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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행 67
만주의 중심도시, 선양(沈阳)
*선양(沈阳)으로 가는 기찻길
선양은 중국의 동북삼성 즉, 요동성과 요녕성 그리고 흑룡강성을 합하여 가장 중심 도시로 알려지고 있다. 이는 선양이 만주족이 세운 청나라의 초기 수도였다는 것을 감안하면 매우 당연한 결과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곳은 바로 만주를 근거지로 활동했던 고구려, 발해의 터전이기도 하다. 이런 인연 때문에 청나라에 볼모잡힌 조선인들은 대체로 이 선양의 한 지역에 머물러 살게 된 경우가 많다. 그리고 일제의 강점기에 우리의 독립투사들은 이 지역에 근거를 두고 독립활동을 벌이기도 했다. 그런 특별한 관심 속에서 선양을 관광하기로 한 것은 2010년 1월이었다. 처가 쪽 사촌들과 단둥(丹東)으로 여행 왔던 김이었다.
단둥에서 선양까지는 기차를 이용하기로 했다. 처사촌 중의 하나가 퇴직 후에 마을 도서관에서 중국어를 익힌 바가 있다고 해서 그의 통역 실력을 믿기로 했다. 그는 한 번도 중국인과 직접 대화해 본 일이 없다고 했다. 그렇게 자신 없어 하는 그를 부추겨 단둥역에 나가서 선양가는 기차표를 샀다. 일행의 바로 옆 좌석엔 스스로를 유치원 교사라고 소개하는 젊은 여인과 합석이 되었다. 처사촌은 그와 열심히 중국말을 주고받았다. 의미기 통하지 않을 때는 펜으로 필담을 나누기도 했다. 아무튼 그런 식으로 이야기를 주고받고 그것을 우리에게 전달하는 즐거움으로 시간 가는 줄을 몰랐다.
단둥에서 선양에 이르는 지역은 광막한 만주의 내륙이라 이렇다할 도시가 없었다. 단조로운 겨울 들판이 그냥 이어지고 있었다. 그런 중에 기차가 잠시 정차한 큰 도시가 나왔다. 번시(本溪)라는 곳이다. 그냥 스쳐 지내는 곳이라 별 것 아닌 줄 알았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나름대로 유서 깊은 도시였다.
번시(本溪市)는 공업도시로 중국에서 4번째로 큰 철강 회사가 있고 석탄 채굴 산업으로 유명하다. 풍경명승지로는 “번시수동(本溪水洞)”이라고 일컫는 지하 동굴이 있다. 이 동굴은 지금까지 발견된 세계에서 제일 긴 지하 충수용 동굴로 알려지고 있다. 1983년에 대외 개방하여 1994년 중화인민공화국 국무원에서 국가중점 풍경명승지로 인증하였다.
동굴입구는 높이가 16미터, 너비는 25미터이고 반월형으로 되어있다. 수동의 지하 암하 총 길이는 2800 미터, 면적은 3.6만 평, 공간은 40여 만 입방미터이다. 동굴의 제일 넓은 곳은 높이가 38미터이고 너비가 50미터이며 동굴 내에 흐르는 물은 마를 줄 모르고 물굽이는 굴곡적이다. 은하의 양쪽 기슭에 석순이 숲을 이루고 그 자태가 천차만별 변화무쌍하다. 동굴정상은 아치형이고 반짝이는 종유석이 높이 걸려있으며 신기로운 기운이 짙게 감돌고 있다. 백여 군데나 되는 풍경지는 제 나름대로 특색이 있고 새로 개발한 “원두개지”,“옥녀궁” 등 500 미터 암하의 경치도 별유천지로 신비롭기 그지없다. 동굴안은 공기 유통이 잘 되고 일년 내내 10도의 온도가 유지되어 사계절이 봄이다.
이런 수중 동굴을 지닌 번시는 만족(満族) 자치현으로 비로 이웃인 환런 만족 자치현(桓仁満族自治県)과 쌍벽을 이룬다. 번시 현은 전국시대에는 연나라의 요동군에 속했고, 동부의 환런 현은 한사군의 하나인 현도군에 편입되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주몽은 부여를 피해 기원전 37년에 환런 현에 있었다. 주몽은 졸본성(현재의 오녀산성)에 이르러 고구려를 건국했다.
이후 고구려는 세력을 강화해 남북조시대에서 당나라 때까지 번시 일대는 고구려에 정복되었다. 당나라가 고구려를 멸망시킨 후에는 안동도호부에 속했다. 하지만 발해가 번성하면서 발해의 영토가 되었다. 번시는 이후 환런과 더불어 거란에 점령되었고, 요나라에 편입되었다가 청나라로 이어지면서 오늘날에 이르렀다. 그런 점에서 우리의 옛 조상 땅이던 고구려, 발해의 흔적이 남아 있는 곳이라고 하겠다.
번시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에 선양역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선양고궁으로 가기 위해서는 택시를 타야한다고 설명을 들었기에 택시 두 대를 잡았다. 그리고 고궁 입구까지 가자고 했다. 고궁 입구에 내린 우리는 택시기사가 택시비를 1인당 20원씩 내라고 해서 한 바탕 소동이 일었다. 한 대 당 20원인데 1인당 20원으로 요구한 것이다. 사촌이 서튼 중국어로 공안원을 부르겠다고 난리를 치니까 택시기사가 슬그머니 물러섰다. 중국말을 할 줄 안다는 것의 위력을 실감할 수 있었다.
*선양 고궁(古宮)
선양의 고궁은 베이징의 자금성과 함께 중국 2대 고궁으로 불리는 곳으로 청태조 누르하치가 정사를 보았던 황궁이다. 6만㎡의 면적에 100여 채의 건축물이 있으며 만족, 한족, 몽고족, 티베트족 등 중국 내 각종 민족들의 건축문화양식이 골고루 어우러진 곳이다. 베이징 고궁과 함께 보존 상태가 좋은 편이다. 규모는 베이징 고궁의 12분의 1이다.
이곳은 1625년에 지어진 후금 두 명의 황제 누르하치와 홍타이지의 황궁으로, 청의 입관 후에는 계속하여 별궁으로 이용되었다. 1961년에 중화인민공화국의 전국중점문물 보호단위로 지정되었다. 2004년에 유네스코의 세계문화유산으로 베이징과 선양의 명·청조 황궁에 추가등록 되었다. 현재는 선양고궁박물관으로 일반에 공개되고 있다.
청나라 초기 누르하치와 태종 홍타이지에 이어 아지거와 도르곤이 각각 선양과 베이징을 수도로 정하고자 논쟁을 벌였다. 결국 베이징 천도를 주장한 도르곤이 순치제(順治帝)의 섭정으로 실권을 장악하고 1644년 베이징에서 순치제의 즉위식을 거행했다. 선양은 1625년부터 44년까지 19년간 만주족의 수도였다. 이 사이 6만㎢ 넓이의 궁궐이 지어졌다. 누르하치가 시작해 홍타이지가 완성한 선양고궁은 원래 이름은 성경(盛京)궁궐로, 베이징 천도 이후에는 봉천행궁(奉天行宮)으로 불렀다. 이처럼 선양은 청나라로 볼 때 베이징 정복의 교두보이자 중원 정벌의 요충이었다.
고궁은 동원, 중원, 서원으로 나눌 수 있다. 동원은 선양고궁 내에서도 지어진 역사가 가장 긴 건축물로 주로 누르하치 시대에 사용된 건축물로 주요 건물로 대정전이 있다. 이곳은 황제가 정무를 보던 곳이다. 대정전은 동원의 정전에서 팔각형을 하고 있어, 세계 유일의 건축양식으로 이동식 텐트를 흉내 내고 있다. 정면 2개의 기둥에는 황제의 상징 금룡이 휘감고 있다. 십왕정은 죄를 재판하는 곳. 우의정에 해당하는 우익왕과 태정관의 장관에 해당하는 좌익왕의 집무실과 팔기가 각각의 건물을 차지하고 있다. 대정전의 광장을 중심으로 각각 좌우에 있다. 특히 동원의 중심 건물인 대정전은 고궁의 정전으로 누르하치와 홍타이지, 순치제가 모두 이곳에서 즉위하였다.
중원은 선양고궁 내에서도 홍타이지 시대의 건물로 숭정전, 청녕궁, 봉황루가 있다. 숭정전은 중원의 정전으로 홍타이지의 집무실이다. 봉황루는 선양고궁 중에서도 가장 높은 건축물로 3층으로 되어 있다. 3층 누각은 황제가 술을 마시면서 달을 보았다고 한다. 청령궁은 황제와 황후의 침실과 측실의 침실 4동이 연달아 있어 황제와 그 가족의 생활공간이었다.
서원은 청의 입관 후에 별궁으로서 추가로 지어진 건물이다.「사고전서(四庫全書)」를 둘 수 있었던 문소각(文遡閣)이 있다.
*고궁 이외의 유적
복릉: “동릉”이라 불리기도 하는 이곳은 청태조 누르하치 부부의 능묘이다. 1629년 건축을 시작, 1651년 완성되었으며 이후 순치, 강희, 건륭 황제 시절 중건된 바 있다. 108계단으로 조성된 입구가 매우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소릉: “북릉”이라 불리는 이곳은 청태종 홍타이지 부부의 능묘이다. 1643년 조성되었으며 324.7만㎡의 방대한 면적을 가진 이곳은 그 자체로 삼림공원이기도 하다.
태청궁: 1663년 건축된 이곳은 동북지역 도교의 중심지로 지금도 도교협회의 주관 하에 집회가 열리고 있는 곳이다.
신락유적지: 7,200년 전 신석기시대 유적지로 석기와 목기 등이 출토되어 전시되고 있는 곳이다.
실승사: 청태종 홍타이지의 황실사원이었기에 “황사”로도 불리는 곳이다.
청나라 초기 4대 탑, 4대 사원: 이 외 청나라 초기 호국 목적으로 도시의 동서남북 외곽 네 곳에 세워진 4개의 탑 및 사원이 있다.
남청진사: 1636년 건축되기 시작, 1662년에 완공된 이곳은 이슬람사원으로 지금도 이슬람교협회의 주관 하에 집회가 이루어지고 있다.
자은사: 티베트불교의 경전이 모셔진 이곳에는 경전 외 불상과 불교의식에 사용되는 각종 제기들이 보존되어 있다.
남관성당: 전형적인 고딕 양식의 이 건물은 한번에 1,000명이 모여 예배를 볼 수 있는 곳이다.
9·18 역사박물관: 일본의 침략전쟁에 분연히 일어서 항거했던 동북인들의 모습, 그 역사의 현장을 기념한 곳.
심양 서호: 항저우의 서호 2배의 면적을 가진 이곳은 절경으로 이름 높다. 면적은 2,000무(mu,1mu는 200평), 호수 중심에 있는 섬의 면적만 700무.
요녕성 박물관: 1931년에 지은 것을 1987년에 증축했다. 3층 건물인 박물관 본관에는 중국 역사와 관련된 것들을 진열해 놓았다. 각종 주제와 관련된 전시회들도 자주 열린다. 18개의 전시관에 각종 문화재를 소장하고 있는 이곳은 원래 둥베이 박물관이었다.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유물들은 사람들이 중국역사를 이해하도록 돕는 동시에 선양지방의 역사적 특색도 이해할 수 있게 한다.
0북방 최대의 도소매시장-우아이(五愛) 시장
선양에 가면 우아이 시장을 둘러보라는 권고를 들었다. 우아이 시장은 북방 최대의 도소매시장으로 알려져 있다. 139만㎡의 면적에 하루 유동인구 30만 명을 기록하고 있는 이곳은 연간 거래액이 인민폐 200억원에 이를 정도라고 한다. 특히 의류, 신발, 침구, 가방, 혼수품, 일용잡화, 미용재료, 식품등이 주로 취급되고 있다.
특히 각종 먹거리 시장 등으로도 유명하다는 소문을 들은 터이라 고궁에서 나오자 바로 우아이 시장을 찾았다. 우아이 시장은 고궁에서 바로 이어지는 길목이어서 걸어서 구경할만한 곳이다. 그리고 소매시장이어서 우리 일행이 직접 물건을 살 수 있는 곳이다. 우리는 우아이 시장의 물건들을 기웃거리며 길거리에서 팔고 있는 과일이며 만두 같은 것들을 사 먹기도 했다. 값이 워낙 싸서 물건 사는 재미가 있었다. 한국 상품만 취급하는 전용 백화점도 있었다. 남대문 시장이나 동대문 시장에 익숙한 터라 이곳 시장도 낯설지 않아서 좋았다. 시장의 물건들을 기웃거리며 구경하는 재미로 한동안을 보냈다.
선양은 인구 800만의 대도시다. 거기에다 청나라의 초기 수도였고 만주의 중심이다 보니 중국 동북지역 최대의 물품집산지이자 과학기술, 인재 및 노동력이 집중된 곳이다. 선양의 비즈니스 물류의 규모는 세계 180개국과 무역거래관계를 맺고 있을 정도라고 한다. 그러니 우아이 시장은 쇼핑의 일부에 지나지 않았다. 그 밖의 몇 곳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0쇼핑 천국-타이웬가: 200여개의 각종 대형 상점들로 들어찬 타이웬가는 동북 최대의 중심상업지구다. 하루 유동인구는 약 40만 명에 이르고 있으며, 세계 각국 유명 백화점체인들이 속속 입주하고 있다.
0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비즈니스의 거리- 중가: 중가는 1636년부터 조성되기 시작한, 36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동북 지역 최초의 현대적 비즈니스 거리다. 1,500m의 거리에 약 300여개의 상점이 있으며, 하루 유동인구는 50-60만 명으로 집계되고 있다.
0선양의 실리콘 밸리-산하오가: 산하오가는 베이징의 중관촌에 이어 중국 두번째로 손꼽히는 전자단지다. 1,000여개의 전자제품 관련 상점들이 있으며, 중국 전역 3,200여개의 IT관련 기업체들 제품들이 집결하는 곳이기도 하다.
*중국의 코라아타운, 서탑가(西塔街)
서탑가는 한국인 마을로 중국3대 한국인 촌 중에서 북경의 왕징, 청도의 이촌시장, 그리고 심양의 서탑가로 한국 및 조선족들의 집결지로 알려져 있다. 선양에는 미국 LA에 버금가는 코리아 타운과 유사한 한국인 거리가 있어 주목된다.
중국 선양시 화평구 서탑. 일명 코리아 타운으로 불리는 이곳은 한국인이나 조선족들이 만든 상가 밀집 거리다. 조선백화점 등 대형 상가에서부터 노점상까지 포함하면 2000여개는 족히 될 것이라는 게 주민들의 말이다. 없는 것이 없을 만큼 다양한 제품들이 판매되고 있다. 흡사 시골 장날의 모습처럼 골목 마다 상점이나 노점상이 빼곡이 들어차 있다. 가장 오래된 곳은 조선백화점으로 60년의 역사를 자랑하고 있단다.
이곳에 한인들이 모이기 시작한 것은 6 25 전쟁 이후부터라고 한다. 전쟁이 끝난 뒤 인근에 홍등가가 있었지만 한인들은 그곳을 피해 이곳 서평으로 자연스레 몰려들었다고 한다. 같은 민족만의 동질감 때문에 그때부터 점차 사람들은 이곳을 찾게 됐다고.
이 곳에는 없는 것이 없을 정도로 다양한 제품이 판매된다. 그 결과 지금은 1Km 정도 거리에 상점들이 가득 차 있다. 많은 업소 가운데 운영이 왕성한 ‘백제원’이라는 한정식 음식점의 경우 한달 매출액만 10억원에 달할 정도로 인근에 있는 한국인이나 조선족들에게 이 거리는 이미 정서적으로 뿌리 깊은 곳. 이를 고려해 상인들의 모임인 한국인 상회에서는 ‘한국인 주간’이라는 이름으로 매년 5월에서 8월중에 한차례씩 축제를 연다고 한다. 축제를 통해 같은 민족의 동질감을 확인하고 경제나 문화의 교류를 맺기도 한다.
990년대 후반부터 한국 기업의 중국 투자가 칭다오와 상하이 주변지역에 집중되면서 선양 진출 붐이 시들기는 했지만, 이곳에 거주하는 한국인은 장기 체류자 1만여명을 포함해 2만 명을 웃돈다. 선양의 번화가 중 하나인 서탑거리는 이들이 건설한 곳이나 다름없다. 서탑은 청나라를 세운 누루하치의 아들인 황태극(皇太極)이 선양의 중앙(백탑·白塔)과 동서남북 네 곳에 세운 라마교 탑 중 하나다. 10년 전만 해도 비만 오면 장화를 신지 않고 걸을 수 없는 진창으로 변하는 곳이었다.
그러나 한상이 진출한 후 상전벽해가 됐다. 이곳 주변에는 음식점을 비롯한 한국인이 경영하는 개인 사업체만 200군데에 달한다. 이곳을 중심으로 움직이는 돈도 하루 50억원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된다. 서탑거리는 중국에 진출한 한국 소상인의 모습이 그대로 배어나는 곳이다. 고급 한식당과 사우나를 갖춘 백제원과 현풍곰탕 같은 음식점, 유흥업소, 미용실, 상점, 중·소규모 무역상 사무실이 대부분 이곳에 모여 있다.
부자가 된 선양의 조선족=중국에 사는 조선족은 200만 명에 이른다. 이들 중 상당수는 지린(吉林)성 옌볜(延邊)조선족자치주에 거주하지만, 중국에 개혁·개방이 시작된 뒤 이들은 하나둘 대도시로 옮아오고 있다. 선양에도 조선족이 많다. 선양이 과거 만주로 간 한국인의 근거지 중 하나였던 만큼 원래 이곳에 살던 조선족도 있었지만, 한중 수교 이후 동북지방으로 온 한국인이 이곳으로 모여들자 다른 지역의 조선족도 따라 들어왔기 때문이다. 현재 선양에 사는 조선족은 10만∼12만명에 이른다.
선양의 조선족은 부자로 소문나 있다. 조선족 집단거주지인 만룽춘(滿融村)은 중국 내 조선족 마을 중 가장 부자동네로 소문나 있다. 선양의 한 조선족은 “만룽춘에 사는 조선족 중 80%는 한국을 다녀온 사람”이라며 “이들 중 상당수는 한국에서 번 돈으로 가게를 열고 있다”고 말했다.
서탑거리는 조선족의 주요 거점이기도 하다. 중국 화북과 동북 지역에 체인망을 갖춘 조선족계 한식당인 삼천리 본점도 서탑에 있다. 일부 조선족은 서탑거리 주변의 빌딩을 보유하거나 대형 유흥점을 운영하기도 한다.
*선양의 조선족 행사
중국 조선족 민속문화절행사가 선양에서 열린다. 1995년부터 해외한민족연구소가 후원하고 있다. 중국 랴오닝성 선양시 조선족 제1중학에서 조선족 민속 문화절 행사가 열렸다. 선양에 거주하는 조선족 5000여명이 참가해 민속 공연과 놀이를 즐겼다. 행사에 참가한 조선족 동포들이 장구춤을 선보이고 있다. 행사는 선양시 단위에서 성(省) 단위로 격상되며 2004년 푸순(撫順), 2005년 단둥(丹東), 2006년 환런(桓仁), 2007년 안산(鞍山)시 등 랴오닝성 내 도시를 순회하며 열렸다.
이날 행사에는 선양시에 거주하는 조선족 5000여명과 선양시 부시장 등 중국 정부 관계자, 선양 한국총영사관 총영사를 비롯한 한국 정부 관계자 등이 참석했다. 행사장엔 '민족의 긍지와 자부심을 갖고 열심히 살아가자' '전통과 문화가 없는 민족은 희망이 없다' '우리 풍속은 우리가 지키고, 우리 전통은 우리가 계승한다' 등의 플래카드가 걸렸다. 마을별로 고운 한복을 차려입은 조선족 동포들이 차례로 입장해 장구춤과 부채춤, 농악무, 사물놀이, 태권도 시범 등을 선보였다. 공연이 진행되는 동안 씨름, 윷놀이, 그네뛰기, 널뛰기, 오자미 던져 넣기 등의 경기가 펼쳐졌다. 씨름 우승자에게는 황소 한 마리가 주어졌고, 그 밖의 입상자들도 쌀 한 가마 등 푸짐한 상품을 받았다.
이윤기 해외한민족연구소장은 "민족에게 문화는 꽃이며 생명이고, 문화의 뿌리가 없는 민족은 무수히 명멸해 갔다"며 "이젠 중국 정부 당국도 조선족의 힘과 능력을 무시할 수 없게 됐다"고 말했다. 중국 랴오닝성 4700만명 중 조선족은 23만여 명으로 만주족·회족·몽골족 다음으로 많다. 중국조선족기업가협회 회장단 집행회장은 "행사가 커지면서 조선 민족으로서 긍지와 자부심이 점점 높아지고 있다"고 말했다. "중국 55개 소수민족 중 이처럼 큰 민속절 행사를 치르는 민족은 조선족뿐입니다. 조선족이란 사실이 참으로 자랑스럽고 기쁩니다."라는 말도 있었다. 그런 점에서 선양은 우리 민족의 또 다른 삶의 터전이라고 하겠다.(*)
첫댓글 중국 선양의 면면을 앉아서 감상하는 호사를 누리고,
글의 장면을 상상하며 따라다니는 여행의 또다른 즐거움도 맛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