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4598
5월23일 [부활 제7주간 토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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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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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Y5aziyl5VrE
[수원교구 김승철 안토니오(의왕성당 주임)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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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예수님 인류 구원 사업의 특급 도우미이자 협력자 성모님!>
예수님께서 인류 구원 사업을 펼쳐나가는 과정에서 가장 큰 협조자이자 특급 도우미로 치자면 단연코 성모님일 것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아기 예수님을 잉태하시고 출산하시고 양육하는 과정에서 성모님의 시선은 단 한 번도 그분에게서 떨어질 줄을 몰랐습니다.
성모님께서는 혹시라도 내 부주의로 인해 작은 것 하나라도 그르치게 되면 어쩌나 하는 마음에서 언제나 노심초사, 애지중지, 전전긍긍하면서 그분을 양육하고 교육하고 동반하셨습니다. 그 세월이 장장 삼십 년입니다. 이보다 더 큰 도움이 어디 있을까요?
그런데 그런 성모님이 이제 또 다른 아들인 우리 모든 그리스도 신자들의 어머니자 특급 도우미로서 역할을 바꾸셨습니다. 오늘 5월 24일 전 세계 살레시오 가족들은 한 마음으로 감사와 축하의 잔치를 벌입니다. 잔치의 주인공은 오늘 축일을 맞이하시는 ‘그리스도인들의 도움이신 마리아’이십니다.
살레시오회 창립자이신 돈보스코 성인는 성모님을 바라볼 때 마다 출중하고 탁월한 능력을 지닌 변호사로서의 모습을 확인했습니다. 하느님 앞에 부족하고 나약한 자신을 변호해주시고 중재해주시는 어머니, 자신이 펼치는 모든 사업에 늘 함께 하시며 자상하게 보살펴주시는 협조자로서의 어머니가 성모님이심을 강하게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따뜻하게 동반하시는 성모님의 역할은 복음서 안에서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이를 통해 성모님은 우리 모든 신앙인들이 추구해야할 신앙의 모델임을 잘 알 수 있습니다.
가브리엘 천사의 탄생 예고 사건에서 성모님은 하느님과의 완전한 일치, 그리고 영웅적 순명의 모델로 소개되고 있습니다. 아기 예수를 잉태하신 후 엘리사벳을 방문하시는 성모님의 모습을 통해 우리는 이웃을 향한 봉사의 모델이심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카나에서의 혼인 잔치 때 성모님께서 보여주신 모습을 한번 보십시오. 정말 특별합니다. 아직 예수님의 때가 오지 않았습니다. 공생활을 본격적으로 시작하시기 전이었습니다. 기적을 행하실 때가 아직 아닌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혼인잔치를 벌이고 있는 혼주의 상황이 너무나 다급하고 절박했습니다. 혼인 잔치의 가장 기본인 포도주가 떨어진 것입니다. 여기서 이웃의 딱한 처지 앞에 절대로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성모님의 모습이 단적으로 드러납니다.
예수님께 해서는 안 될 무리한 청을 하십니다. 그 청이 얼마나 무리한 것이었는지는 예수님의 반응에서도 잘 드러납니다. “여인이시여, 아직 때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어지는 성모님의 태도를 보십시오. 결코 물러서지 않습니다. 어찌 보면 막무가내입니다. 마구 떼를 쓰셨을 것입니다. 집요한 성모님의 부탁에 예수님께서 움직이십니다.
보십시오. 우리 인간을 향한 성모님의 태도를. 성모님은 우리 인간의 딱하고 가련한 처지를 절대로 그냥 지나치지 못하십니다. 우리의 결핍, 우리의 절박한 상태, 우리의 측은한 모습을 예수님께 설명하며 도와주실 것을 지속적으로 간절히 청하시는 분이 바로 우리의 성모님이십니다.
예수님 입장에서 보더라도 성모님은 도움이신 어머니이십니다. 말구유 탄생이후 헤로데의 박해를 피해 이집트로 피신하는 과정에서 아기 예수님이 직면했던 다양한 측면의 위협은 부지기수였습니다. 순간순간 성모님은 요셉의 도움을 받아 아기 예수님의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셨을 것입니다.
아기 예수가 무럭무럭 자라나 소년 예수로 성장했을 때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예수님은 한편으로 메시아셨지만 다른 한편으로 완전한 한 인간이셨습니다. 또래의 소년들에게처럼 의식주 전반에 걸친 어머니 성모님의 지속적인 도움은 절대적으로 필요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때가 이르러 공생활을 시작하기 위해 예수님께서는 출가를 하십니다. 그 이후 성모님의 삶은 이제 ‘고생 끝 행복 시작’이었을까요? 절대 그렇지 않았습니다. 또 다른 마음 고생과 더불어 아들 예수님을 향한 밤낮 없는 기도로 매일 매일을 보내셨을 것입니다.
이처럼 성모님의 삶은 아들 예수님을 위한 완벽하고도 철저한 도우미로서의 삶이었습니다. 아들 예수님의 아들인 우리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인간 각자를 향한 성모님의 마음은 예수님을 향한 그 마음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철저하게도 우리의 도우미이자 동반자, 협조자, 인도자이신 분이 성모님이 확실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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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오늘을 충실히 살게 만드는 것은 꿈보다 정체성이다.>
오늘 복음은 요한복음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가 마지막 때에는 순교로 생을 마감하게 될 것이라고 예언하십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요한의 미래도 궁금해합니다.
예수님은 “내가 올 때까지 그가 살아 있기를 내가 바란다 할지라도,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은 이때부터 요한은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는 날까지 살아 있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러나 요한도 죽었습니다.
예수님은 왜 제자들의 결말에 대해 명확하게 말씀하시지 않고 본인들도 헛갈릴 정도로 모호하게 말씀하셨던 것일까요? 그것은 우리가 삶의 끝을 아는 것이 전혀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그것만을 믿고 현실에 충실하지 않게 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이 운명론의 폐해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운명을 알고 살기를 원치 않으시고 ‘오늘’을 충실하게 살길 원하십니다.
전에 EBS 지식 채널 중 이러한 동영상을 본 적이 있습니다. 아버지의 파리 여행을 다큐 형식으로 찍은 것입니다. 자녀들을 위해 평생 미술 교사를 하다 은퇴하여 이제 마지막으로 화가의 꿈을 이루기 위해 아내와 함께 파리 몽마르트르 언덕에서 그림을 그리기 위해 떠난 것입니다.
그는 오랜 계획을 세우고 많은 돈을 쓰며 그림 도구들을 사고 준비합니다. 그러나 막상 파리에서의 화가 생활은 그렇게 녹록하지 않았습니다. 도착하자마자 소매치기도 당하며 돈을 다 잃습니다. 길거리에서 비도 맞으며 매일 그림을 그립니다. 그것은 기쁘지만 이미 손은 무뎌질 대로 무뎌져서 그림은 한 점도 팔리지 않았습니다. 물론 그 모습이 참으로 아름답기는 하였지만, 어쩌면 어렸을 때부터 가졌던 화가의 꿈이 그분께는 생계를 위한 수단 외에는 영향을 주지 못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어렸을 때 “너는 꿈이 뭐니?”라는 질문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꼭 되고 싶은 것이 하나쯤은 있어야 한다고 여기고 그런 꿈을 이야기합니다.
꿈이 크면 어른들은 칭찬을 해 줍니다. 하지만 어렸을 때 가졌던 꿈을 이루는 경우는 얼마나 될까요? 거의 없습니다. 오히려 성공한 사람 중에 하루하루 그냥 열심히 살았다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유재석 씨 같은 경우입니다. 미래의 꿈보다 오늘의 삶이 더 중요합니다. 꿈이 오늘을 충실하게 살게 할 힘을 잃었다면 그 꿈은 망상이 되고 맙니다.
전에 말씀드린 적이 있는데, 한 스님과 제자가 가난한 집에 묵은 적이 있습니다. 그 가난한 집은 암소 한 마리에서 나오는 젖으로 여러 식구가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스님은 다음 날 떠나면서 제자에게 몰래 그 암소를 절벽에서 떨어뜨리라고 하였습니다. 제자는 깜짝 놀랐지만 순종하였습니다.
10여 년이 지났을 때 제자는 다시 그 집을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그 집은 이전과는 다르게 활기가 넘쳤고 부유해졌습니다. 그 이유를 물으니 그전까지 암소에게 의존하며 살았는데 암소가 사라지자 어떻게 해서든 먹고 살아야겠다는 생각에 하루하루 열심히 살았더니 그렇게 부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진 꿈도 이렇습니다. 그 꿈이 너무나 명확하면 그것이 지금을 열심히 사는 원동력이 되기보다는 오히려 오늘을 허투루 살게 만드는 핑계가 될 수 있습니다. 어차피 미래에도 부자로 살 수 있는 확신이 있는 사람은 어떻겠습니까? 부모가 물려줄 재산에 대한 명확한 보장이 있다면 오늘을 허송세월로 보낼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현명한 부자들은 자녀들에게 재산을 물려주지 않겠다고 미리 선언하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미래에 무엇이 되느냐가 아니라 오늘을 어떻게 사느냐입니다. 주님은 운명에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을 충실히 살기를 원하십니다.
어린아이가 어떤 질문에도 머뭇거림이 없이 현명한 답을 하는 스님을 찾아갔습니다. 자신의 손에 참새 한 마리를 들고 이렇게 질문하였습니다. “이 새는 살아 있나요, 죽어있나요?”
만약 살아 있다고 말하면 꽉 눌러 죽일 생각이고 죽었다고 한다면 하늘로 날려 보낼 생각이었습니다. 스님은 대답했습니다. “그 새의 살고 죽음은 너에게 달렸지.” 아이는 스님의 현명함에 놀라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았습니다. “어제 엄마가 점을 보고 왔는데 제 운명이 아주 안 좋대요.” 스님은 아이에게 손을 펴 보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재물선과 운명선 등을 설명해 주었습니다. 그리고는 주먹을 쥐어보라고 했습니다. “네 운명선은 어디 있지?” 아이는 대답했습니다. “제 손안에 있네요.”
구약의 요셉이 꾼 꿈은 가족들이 자신에게 절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열린 결말이었습니다. 하지만 분명 가족까지 존경하는 결실을 볼 것은 확신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꿈이라기보다는 정체성이었습니다.
하느님의 자녀로서 살면 분명 세상에서 존경받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이 정체성만 있으면 충분합니다. 그러면 모든 시련을 이겨내고 주님께서 원하셨던 꿈이 무엇이었는지 알게 됩니다.
류시화 시인은 오갈 데 없어서 대학 때 판자촌에서 버틴 적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갑자기 비가 많이 와서 물이 새고 심지어 떠내려갈 정도로 위에서 물이 많이 흘러내려 왔습니다. 두려움 속에서 그는 갑자기 이런 생각을 했다고 합니다.
“나는 시인이다. 이 순간은 두려워할 순간이 아니라 시를 위한 영감을 찾아내야 할 때이다.” 이런 생각을 하자 천둥 번개도, 바람도, 새는 비도, 흘러 내려오는 물도 모두 시를 위한 영감을 주는 소재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편안한 마음으로 그 순간을 즐길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은 우리나라에서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의 유명한 시인이 되었습니다.
분명 주님께서는 우리가 세상에서 존경받는 삶, 그리스도를 닮은 삶을 살도록 예정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삶이 오늘의 십자가를 지고 나가게 할 수 없는 것이라면 그것은 망상에 불과합니다.
나의 꿈이 명확하지 않더라도 정체성만 명확하면 주님께서 바라시는 꿈에 반드시 도달하게 됩니다. 중요한 것은 꿈이 오늘을 어떻게 살아가도록 만드느냐입니다.
꿈은 모호해도 좋습니다. 자녀에게 심어주어야 하는 것은 그 꿈으로 오늘의 십자가를 기꺼이 지게 할 수 있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정체성’입니다.
피카소의 말을 들어봅시다. “내 어머니는 나에게 말씀하셨다. ‘만일 네가 군인이 된다면 장군이 될 것이고 네가 성직자가 된다면 너는 교황이 되겠지.’ 대신에 나는 그림을 그렸고 피카소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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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포트워스 성당 미사를 다녀왔습니다. 신부님께서 다른 일정이 있어서 부탁했습니다. 성당에 가니 레지오 주해가 있었습니다. 13명이 미사에 참례했습니다. 반주는 건반과 기타가 함께 했습니다. 외적인 규모는 달라스 성당이 크지만, 신앙의 열정은 작지 않았습니다. 작기에 오히려 더욱 단단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어쩌면 신앙의 본질은 규모나 크기에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신앙의 본질은 정성과 방향이라고 생각합니다.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해서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한다면, 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청하기보다 하느님의 영광이 이루어지기를 청할 수 있다면 신앙은 빛이 나기 마련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베들레헴의 말구유에서 태어나셨습니다. 첫째가 되려 하지 말고 꼴찌가 되라고 하셨습니다. 약하고 힘없는 어린아이를 축복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어린이와 같은 마음을 지닌 사람이 들어갈 수 있다.”
교회는 이제 부활 시기를 마무리하고 성령의 강림을 기다립니다. 우리는 지금 부활 시기의 마지막을 지나고 있습니다. 곧 성령 강림 대축일을 맞이하게 됩니다. 교회는 부활하신 주님의 기쁨을 50일 동안 묵상하며 걸어왔고, 이제 그 여정을 마무리하며 성령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 시간, 우리는 부활 제1주일부터 제7주일까지 주일 복음을 잠시 돌아보며, 그 안에 담긴 의미를 다시 새겨보고자 합니다. 부활 제1주일의 복음은 ‘갈릴래아’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갈릴래아로 가라고 하십니다. 갈릴래아는 제자들이 처음 부르심을 받았던 곳입니다. 그들은 그곳에서 예수님을 만났고, 삶의 방향이 바뀌었습니다. 부활의 시작은 새로운 것이 아니라, 처음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 안에서 길을 잃었다고 느낄 때, 주님께서는 우리를 다시 ‘갈릴래아’, 처음 사랑의 자리로 초대하십니다.
부활 제2주일은 ‘믿음’입니다. 토마스 사도는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져야 믿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신앙은 눈에 보이는 확실함 위에 세워진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하느님께 대한 신뢰 위에 세워진 것입니다. 믿음은 이해의 결과가 아니라, 맡김의 결단입니다.
부활 제3주일은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세 번이나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십니다. 베드로의 과거를 묻지 않으시고, 지금의 사랑을 물으십니다. 그리고 그 사랑 위에 사명을 맡기십니다. “내 양들을 돌보아라.” 신앙의 핵심은 지식이 아니라 사랑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반드시 이웃을 향한 책임으로 이어집니다.
부활 제4주일은 ‘목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착한 목자라고 말씀하십니다. 목자는 양을 알고, 양은 목자의 목소리를 알아듣습니다. 신앙은 규칙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관계를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목소리를 듣고 그분을 따라가는 사람들입니다. 때로는 길이 보이지 않을 때도 있지만, 목자이신 주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신다는 믿음 안에서 우리는 걸어갑니다.
부활 제5주일은 ‘새 계명’입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서로 사랑하여라.” 예수님의 사랑은 조건 없는 사랑이었고, 끝까지 내어주는 사랑이었습니다. 부활 신앙은 나 혼자만의 구원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공동체 안에서 서로 사랑할 때, 우리는 비로소 부활하신 주님을 증거하게 됩니다. 교회는 사랑으로 살아가는 공동체입니다.
부활 제6주일은 ‘성령의 약속’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떠나시면서도 그들을 홀로 두지 않겠다고 하십니다. 보호자이신 성령을 보내 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모든 것을 가르쳐 주시고,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게 하십니다. 신앙은 혼자의 힘으로 살아가는 길이 아니라, 성령과 함께 걸어가는 길입니다.
부활 제7주일은 ‘일치와 파견’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지막으로 기도하십니다. “아버지, 이들이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 신앙의 완성은 일치입니다. 하느님과의 일치, 이웃과의 일치입니다. 그리고 그 일치 안에서 우리는 세상으로 파견됩니다. 신앙은 교회 안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세상 속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부활 시기의 여정을 걸어왔습니다. 갈릴래아에서 시작하여, 믿음으로 깊어지고, 사랑으로 성숙해지며, 목자의 인도 안에서 살아가고, 서로 사랑하는 공동체를 이루며, 성령의 약속을 기다리고, 마침내 하나 되어 세상으로 나아가는 여정이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한 가지 질문 앞에 서게 됩니다. “나는 이 부활의 여정을 어떻게 살았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단순히 기쁨을 느끼는 것으로 끝났는지, 아니면 삶으로 응답했는지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이제 우리는 기다리는 사람에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부활을 기념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부활을 살아가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과거의 사건이 아니라, 오늘 우리의 삶 안에서 계속되어야 하는 현실입니다. 이제 우리는 부활의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말과 행동, 우리의 선택과 삶을 통해서 “주님께서 살아 계신다.”라는 사실을 드러내야 합니다. 때로는 말이 아니라 사랑으로, 때로는 설명이 아니라 희생으로, 때로는 설득이 아니라 인내로 부활을 증거해야 합니다. 다가오는 성령 강림 대축일에, 성령께서 우리 안에 오시어 우리를 변화시키시기를 청하면 좋겠습니다. 두려움에 머물러 있던 제자들이 담대하게 세상으로 나아갔던 것처럼, 우리도 성령의 힘으로 세상 속에서 복음을 살아가는 사람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이제 우리는 부활의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 “이 제자가 이 일들을 증언하고 또 기록한 사람이다. 우리는 그의 증언이 참되다는 것을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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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부산교구 권순호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에 대하여 물어봅니다.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요한 21,21) 예수님께서 단호하게 대답하십니다.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는 나를 따라라.”(21,22) 제자들 사이에 예수님의 총애를 받은 그 제자가 죽지 않을 것이라는 소문이 퍼졌던 모양입니다. 베드로조차 사랑받는 제자가 부러웠는지 그에 대하여 여쭈어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남이 잘 되든 말든 자기 일이나 잘하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오래 살지를 궁금해하는 것은 쓸데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관심을 가지고 우리와 상관있다고 여기는 일이 실제로는 우리와 상관없는 일임을 알려 줍니다.
우리가 미사에 참여하는 것은 단순히 성체를 받아 모시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우리는 성체를 받아 모시며 예수님의 몸과 하나가 되고, 하느님과 한 가족이 됩니다. 우리가 이 미사에서 지향해야 하는 것은 나만의 성공, 나만의 무병장수가 아닐 것입니다. 예수님과 하나 됨으로써 삼위일체 하느님의 사랑을 발견하고, 이웃들을 나의 가족처럼 대하는 것이 정말 내가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일입니다.
오늘 독서에서 바오로는 로마에서 가택 연금 상태로 두 해를 보냅니다. 자유롭게 복음을 전하던 그에게 얼마나 답답한 시간이었을까요? 그러나 바오로는 주어진 그 자리에서 찾아오는 모든 이에게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는 데 최선을 다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정말 집중해야 할 일에 충실하려고 하였던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묻고 계십니다.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냐?” 예수님께서 상관하시는 것에 진정으로 관심을 가지며 살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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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요한 21,20-25: 예수님의 사랑하시던 제자
오늘 복음은 부활하신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주신 마지막 말씀, “너는 나를 따라라.”(22절)로 마무리된다. 이는 단순한 권고가 아니라, 제자의 삶 전체를 규정하는 주님의 최종적 요청이다. 베드로는 주님께서 말씀하신 자기의 미래, 곧 순교의 길을 들은 후, 곁에 있던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던 제자”(요한)를 가리키며 묻는다.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21절) 예수님께서는 “그가 살아 있기를 내가 바란다 할지라도,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는 나를 따라라.”(22절)하고 응답하신다. 이는 각 제자의 길은 다르다는 것을 드러낸다. 베드로는 순교를 통해 주님을 따라야 하고, 요한은 긴 생애 동안 교회를 지키며 말씀을 증거해야 했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이렇게 설명한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의 길을 구분하셨다. 베드로에게는 사자의 용기를, 요한에게는 독수리의 관조를 맡기셨다.”(Homiliae in Ioannem 88, 요한 21 의역) 우리도 남을 비교하거나 그 운명을 궁금해하기보다, 주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맡기신 고유한 소명을 충실히 살아가야 한다.
주님은 “너는 나를 따라라.”(22절)라고 단호히 말씀하신다. 이는 그리스도인 삶의 본질이 무엇인지 분명히 드러낸다. 그리스도를 따름은 단순한 모방이 아니라, 십자가의 길을 함께 걷는 것이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말한다. “베드로가 사랑을 고백하였을 때, 그에게는 고난을 통한 따름이 주어졌다.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이는 반드시 그리스도를 따른다.”(In Ioannis Evangelium Tractatus 124, 요한 21,15-19 의역) 그리스도를 사랑한다고 고백하는 우리 역시 일상에서 고난과 희생을 통해 그분을 따라야 한다.
요한은 이 복음을 맺으며 자신이 본 것을 증언한 자임을 밝힌다. “우리는 그의 증언이 참되다는 것을 알고 있다.”(24절). 그의 증언은 단순한 기록이 아니라, 사랑에서 비롯된 증언이다. 성 이레네오는 요한을 가리켜 “교회의 기둥이며, 사랑의 증인”(Adversus Haereses III,1,1 의역)이라 불렀다. 그의 긴 생애는 주님을 향한 끊임없는 사랑의 여정이었고, 그의 기록은 하느님의 무한한 지혜를 향한 열망으로 가득 차 있다. 교리서는 “사도들은 그리스도의 생애와 부활의 증인으로서 복음의 초석이 되었다.”(642항 의역)라고 설명한다. 또한, 계시 헌장은 “사도들의 증언은 교회의 시작부터 지금까지 이어져 오며, 성령 안에서 생생하게 살아 있다.”(8항)라고 한다. 요한의 증언은 단순한 과거의 글이 아니라, 오늘도 교회 안에 살아 있는 말씀이다.
주님은 우리 각자에게 말씀하신다. “너는 나를 따라라.” 남과 비교하거나 남의 길을 궁금해하기보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소명을 충실히 살라는 요청이다. 어떤 이는 순교의 피를 통해, 어떤 이는 긴 세월의 봉사와 증언을 통해, 또 어떤 이는 작은 일상적 희생과 봉헌을 통해 그리스도를 따른다. 중요한 것은 길의 모양이 아니라, 끝까지 주님을 따른다는 사실이다. 이제 우리는 남의 길이 아니라, 나에게 주어진 길을 따라 주님을 따르는 것이다. 우리 각자는 고유한 삶의 자리에서, 고난과 기쁨 속에서, 말씀과 사랑 안에서 주님을 따라야 한다. 그때 비로소 우리 삶도 요한 사도의 고백처럼, 세상에 다 담을 수 없는 하느님의 무한한 지혜와 사랑의 증거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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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그대여, 길을 걸으라>
요한 21,20-25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제자와 베드로, 엮은이의 맺음말)
그때에 베드로가 돌아서서 보니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가 따라오고 있었다. 그 제자는 만찬 때에 예수님 가슴에 기대어 앉아 있다가, “주님, 주님을 팔아넘길 자가 누구입니까?” 하고 물었던 사람이다. 그 제자를 본 베드로가 예수님께,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올 때까지 그가 살아 있기를 내가 바란다 할지라도,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는 나를 따라라.” 하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형제들 사이에 이 제자가 죽지 않으리라는 말이 퍼져 나갔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가 죽지 않으리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내가 올 때까지 그가 살아 있기를 내가 바란다 할지라도,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하고 말씀하신 것이다.
이 제자가 이 일들을 증언하고 또 기록한 사람이다. 우리는 그의 증언이 참되다는 것을 알고 있다. 예수님께서 하신 일은 이 밖에도 많이 있다. 그래서 그것들을 낱낱이 기록하면, 온 세상이라도 그렇게 기록된 책들을 다 담아 내지 못하리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대여, 길을 걸으라>
“내가 올 때까지 그가 살아 있기를 내가 바란다 할지라도,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는 나를 따라라.”(요한 21,22)
그대여,
길을 걸으라
그대여,
홀로라도
길을 걸으라
그대여,
길벗과 함께
길을 걸으라
그대여,
길벗을 보듬어
길을 걸으라
그대여,
길벗에게 걸림 없이
길을 걸으라
그대여,
홀로인 듯
길을 걸으라
그대여,
길벗을 가림 없이
길을 걸으라
그대여,
길벗이 걷도록
길을 걸으라
그대여,
길벗을 다독여
길을 걸으라
그대여,
길벗과 함께
길을 걸으라
그대여,
홀로라도
길을 걸으라
그대여,
길을 걸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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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쓸모없는 호기심은 걸림돌이다>
“남의 떡은 더 커 보인다.”는 옛말이 있다. ‘자기 것보다도 남의 것이 훨씬 더 좋아 보인다.’ 는 말이다. 자기 것에 만족하고 산다는 것이, 그만큼 어렵다.
남과 비교하며 남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허세를 떨기도 하고 분수없이 지낼 때가 있다. 잘 보이려 하지 말고 지금 최선을 다하여 사는 것이 아름답지만 그것이 마음 같지 않다. 나는 나의 삶을 사는 것이고 다른 사람은 그의 인생을 사는 것이다. 나와 다른 너를 인정해 주면 속을 끓일 이유가 없다.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의 운명에 대한 호기심을 가졌다. 그 제자는 만찬 때에 예수님 가슴에 기대어 앉아 있다가, “주님, 주님을 팔아넘길 자가 누구입니까?”하고 물었던 사람이다(요한21,20). 그런데 그 제자는 죽지 않으리라는 소문이 널리 퍼져 있었다. 그래서 베드로는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요한21,21)하고 예수님께 물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내가 올 때까지 그가 살아 있기를 내가 바란다. 할지라도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는 나를 따라라” 하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다른 사람의 삶에 대해 지나치게 많은 관심 지니지 말라는 의미다. 그 사람은 그 사람의 일생이고, 나는 나의 갈 길이 있다. 그러니 “너는 나를 따라라.” 그것으로 만족하라. ‘그 제자가 나의 사랑을 받았다고 해서 비교하지 마라.’는 말씀이다. 사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주님께서 이끄시는 대로 각자가 가야 할 길이 있다. 주님께서 열어주신 길이 있고 탈랜트가 있다. 그러므로 그 길에 최선을 다할 뿐이다. 베드로가 다른 제자의 운명에 관심을 가진 것은 동료애를 발휘하는 것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쓸모없는 호기심에 지나지 않았다. 오늘 여기서 영원을 살아가는 사람에게 지나친 호기심은 걸림돌일 뿐이다. 그것은 상관을 넘어서서 간섭과 참견을 한다. 우리와 상관없는 일을 끌어안고 괴로워하는 것은 어리석다.
그러므로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는 자”(루카9,62) 되지 말고 주님만을 바라보며 흔들림 없는 나의 길을 가야 한다. 주님께서 이끄시는 대로 걷는 발걸음에 복이 넘쳐난다. 요한복음의 핵심 주제는 “서로 사랑하여라.”로 요약된다. 우리 삶을 사랑으로 물들이고 그 길이 우리가 가야 할 길이라는 것을 잊지 말자!. 구원은 다른 사람의 삶에 끼어들어 비교하고 험담하는 곳에 있지 않고 “나를 따라라” 하시는 예수님을 따르는 데 있다.
“주 하느님, 저희가 옛 악습을 버리고 거룩한 마음으로 새 삶을 살아 구원을 얻게 하소서” 아멘.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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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할리우드의 전설적 여배우 매릴린 먼로를 잘 아실 것입니다. 20세기 문화의 아이콘으로 전 세계 남성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설레게 했던 여배우입니다. 세계에서 가장 매혹적이고 예쁜 외모로 모든 여성의 부러움을 받았습니다. 여기에 커다란 인기와 함께 따라온 ‘부’ 역시 엄청났었습니다.
부족함이 전혀 없어 보이는 여배우입니다. 그러나 먼로는 불우했던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로 여러 번 결혼을 반복하다가 끝내 자살로 생을 마감하고 맙니다. 그의 전남편 조 디마지오는 말합니다.
“그녀는 세상을 살며 필요한 모든 것을 가진 여자였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무엇을 위해 살 것인가?’라는 인생의 목표가 없었다.”
물질적 풍요가 최고라 생각하는 현대 사회입니다. 그러나 그보다 인생의 목표와 꿈이 먼저 아닐까요? 그래야 마음의 공허와 갈증을 다스리면서 지금을 기쁘게 살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확실한 목표와 꿈을 보여주셨습니다. 하느님 나라라는 영원한 생명이 주어지는 곳입니다. 희망 안에 살 수 있는 이유를 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를 잊어버립니다. 하느님 나라를 잊어버리고 순간의 만족만을 주는 이 세상만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 안에서 다른 사람과의 비교도 끊임없이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과연 얼마나 이 세상 안에 머물까요? 무한의 시간이 아닌 어떻게 보면 찰나의 시간에 살고 있을 따름입니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삶으로 나의 삶을 바꿔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내 양들을 돌보아라.” 하시며 그의 수위권을 회복시켜 주셨고, 동시에 그가 겪게 될 순교의 죽음을 예고하셨습니다. 그러자 베드로는 곁에 있던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를 보며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라고 묻습니다. 지극히 인간적인 심리를 보여줍니다. 자신이 고난의 길을 걸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다른 사람의 운명을 궁금해하고 비교하려는 마음에서 온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올 때까지 그가 살아 있기를 내가 바란다 할지라도,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는 나를 따라라.”
예수님은 베드로의 시선을 타인에게서 베드로 자신에게로, 그리고 예수님께로 다시 돌려놓으시는 것입니다. 각 제자에게는 고유한 길과 소명이 있다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목자로서 순교의 길을 걷는 소명이면, 요한은 오래도록 살아남아 말씀을 증언하고 기록하는 것이 소명입니다.
다른 사람의 십자가나 운명과 비교할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주신 나만의 길을 걸어야 합니다. 그 삶에 충실한 사람만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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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정해져 있는 미래나 운명 같은 것은 없습니다.>
베드로가 돌아서서 보니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가 따라오고 있었다. 그 제자는 만찬 때에 예수님 가슴에 기대어 앉아 있다가, “주님, 주님을 팔아넘길 자가 누구입니까?” 하고 물었던 사람이다. 그 제자를 본 베드로가 예수님께,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올 때까지 그가 살아 있기를 내가 바란다 할지라도,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는 나를 따라라.” 하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형제들 사이에 이 제자가 죽지 않으리라는 말이 퍼져 나갔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가 죽지 않으리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내가 올 때까지 그가 살아 있기를 내가 바란다 할지라도,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하고 말씀하신 것이다. 이 제자가 이 일들을 증언하고 또 기록한 사람이다. 우리는 그의 증언이 참되다는 것을 알고 있다. 예수님께서 하신 일은 이 밖에도 많이 있다. 그래서 그것들을 낱낱이 기록하면, 온 세상이라도 그렇게 기록된 책들을 다 담아내지 못하리라고 나는 생각한다.(요한 21,20-25)
1)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라는 베드로 사도의 질문은, 18절에 있는 예수님 말씀에 연결됩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네가 젊었을 때에는 스스로 허리띠를 매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다. 그러나 늙어서는 네가 두 팔을 벌리면 다른 이들이 너에게 허리띠를 매어 주고서, 네가 원하지 않는 곳으로 데려갈 것이다."(요한 21,18)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어,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느님을 영광스럽게 할 것인지 가리키신 것이다. 이렇게 이르신 다음에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나를 따라라.’ 하고 말씀하셨다."(요한 21,19)
예수님께서 베드로 사도에게 하신 말씀은, 베드로 사도가 십자가형으로 순교하게 된다는 것을 예고하신 말씀으로 해석되는데, 그 말씀을 들은 베드로 사도는, 아마도 “다른 사도들은 어떻게 될까?”라고 궁금했던 것 같습니다.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라는 말은, “요한 사도의 미래는 어떻게 되겠습니까?”라는 질문인데, 이 질문에는 요한 사도뿐만 아니라 다른 사도들 모두의 미래와 교회 전체의 미래는 어떻게 될 것인지에 대한 질문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내가 올 때까지 그가 살아 있기를 내가 바란다 할지라도,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는 나를 따라라.”라는 말씀은, “미래는 정해져 있지 않다. 그러니 정해져 있지 않은 미래를 궁금해 하지 말고, 지금 네가 해야 할 일만 충실하게 실행하여라.” 라는 뜻입니다. <다른 사람의 탈렌트와 직무를 존중해야 한다는 뜻도 들어 있습니다.>
2) 우리는 누구나 미래를 알고 싶어 합니다. 그것은 시간의 한계 속에 갇혀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갖게 되는 소망이고, 그 소망 자체는 잘못된 것이 아니지만, 미래가 이미 정해져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만일에 미래가 이미 정해져 있고, 사람의 힘으로 미래를 바꿀 수 없다면, 우리가 오늘 열심히 살 이유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베드로 사도의 순교를 미리 예고하신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확정된 미래’를 예언하신 말씀이 아니라, 베드로 사도에게 주어진 수많은 길들 가운데에서 최상의 길을 알려 주신 말씀입니다.
순교를 향해서 나아가든지, 아니면 다른 길로 가든지, 그것은 베드로 사도 자신의 자유의지로 선택하게 되는 일입니다. 자유의지도 없고, 선택의 자유도 없는 일이라면, 순교는 결코 영예로운 일이 될 수가 없습니다. 미래가 정해져 있지 않기 때문에 인간 세상의 예언가들과 점쟁이들의 예언은 아무 의미도 없고 가치도 없는 말입니다. ‘구원’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할 수 있습니다. 처음부터 구원과 멸망이 정해져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것이 이미 정해져 있다면, 신앙생활을 하는 것 자체가 의미 없는 일이 되어버립니다.
배반자 유다의 경우에는 ‘멸망하도록 정해진 자’ 라는 표현이 사용되긴 하는데(요한 17,12), 그의 운명이 처음부터 그렇게 정해져 있었다는 뜻은 아닙니다. <예수님을 배반하는 자는 멸망한다는 것은 정해져 있었겠지만, 유다가 배반자가 된다는 것 자체가 정해져 있었던 것은 아니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그의 운명은 그 자신의 자유의지로, 스스로 선택한 것입니다. 확정되어 있는, 그래서 아무도 바꿀 수 없는 운명 같은 것은 없습니다. 미래와 운명은 오늘 우리가(내가) 만들어 갑니다.>
3) 23절의 요한 사도가 죽지 않으리라는 소문이 퍼졌다는 말은, 예수님의 재림 때까지 요한 사도가 살아 있을 것이라는 소문이 퍼졌다는 뜻입니다. 당시 신자들은 사도들 가운데 한 명이라도 살아 있는 동안에 예수님의 재림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믿고 있었고, 그렇게 되기를 기대하고 있었는데, 그것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적이 없는 일이고, 근거 없는 소망이었습니다.
25절은 성경에 기록된 것 외에도 대단히 많은 전승이 있음을 전하는 말입니다. 성경은 그 전승들 가운데 일부를 기록한 책입니다. 전승들은 처음에는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차츰 문서로 기록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일은 이 밖에도 많이 있다.”라는 말은 넓은 뜻으로 생각하면,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은 지금도계속되고 있다.”로 해석할 수도 있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과거의 특정 시기에만 계셨던 분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와 함께 계시면서, 우리를 위해서 일하시는 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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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요한 21,23)
우리는
다른 사람의 삶을
대신 살아줄 수
없습니다.
남의 시선 속에
머무는 삶은
쉽게 흔들립니다.
남이 우리를 어떻게
보는가에 더 민감합니다.
하느님 안에서
우리 자신으로
살아가는 것보다,
타인에게 인정받는
존재가 되기를
더 갈망합니다.
현재의 우리 삶을
온전히 살아내는 것이
복음에 가까운 삶입니다.
타인의 삶을
사는 것이 아닌
우리 자신의 소명이
우리 삶의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남의 삶을 사느라
삶을 낭비하지 말고
우리 자신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지금 우리의 마음을
하느님께 향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그 누구도 아닌
우리의 삶으로
써 내려간 믿음이
참된 믿음입니다.
우리의 길을
사랑하지 못하면
끊임없이 타인의 삶을
부러워하게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서로 다른 빛깔로
창조하셨습니다.
이제부터라도
우리의 소중한 삶이
타인의 길을 계산하기보다
우리에게 맡겨진 길을
묵묵히 걸어가는
우리의 부르심이길
기도드립니다.
진실하게 주님을
따르는 것이
가장 아름다운
따름의 완성입니다.
다른 사람의
고유한 미래보다
우리 자신의
진실한 충실함이
더 중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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