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사기 고구려 본기....양원왕편...
○<陽原王>[或云<陽崗上好王>.], 諱<平成>, <安原王>長子. 生而聰慧, 及壯, 雄豪過人, 以<安原>在位三年, 立爲太子. 至十五年, 王薨, 太子卽位. 冬十二月, 遣使入<東魏>朝貢.
양원왕[양강상호왕이라고도 한다.]의 이름은 평성이며, 안원왕의 맏아들이다. 그는 태어나면서부터 총명하고 지혜로웠으며, 장성해서는 남달리 호방하였다. 안원왕 재위 3년에 태자가 되었다. 15년에 왕이 별세하자, 태자가 왕위에 올랐다.
겨울 12월, 동위가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三年, 秋七月, 改築<白巖城>, 葺<新城>. 遣使入<東魏>朝貢.
3년 가을 7월, 백암성을 개축하고, 신성을 수리하였다.
동위가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四年, 春正月, 以<濊>兵六千, 攻<百濟><獨山城>, <新羅>將軍<朱珍>來援, 故不克而退. 秋九月, <丸都>進嘉禾. 遣使入<東魏>朝貢.
4년 봄 정월, 예의 군사 6천 명으로 백제의 독산성을 공격하였다. 신라 장군 주진이 백제를 도왔기 때문에 승리하지 못하고 퇴각하였다.
가을 9월, 환도에서 상서로운 벼이삭을 바쳤다.
동위가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五年, 遣使入<東魏>朝貢.
5년, 동위가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六年, 春正月, <百濟>來侵, 陷<道薩城>. 三月, 攻<百濟><金峴城>. <新羅>人乘間取二城. 夏六月, 遣使入<北齊>朝貢. 秋九月, <北齊>封王, 爲使持節侍中驃騎大將軍領護東夷校尉<遼東郡>開國公<高句麗>王.
6년 봄 정월, 백제가 침입하여 도살성을 함락시켰다.
3월, 백제의 금현성을 공격하였다. 신라가 이 기회를 이용하여 두 성을 빼앗았다
여름 6월, 북제가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가을 9월,
북제가 왕을 사지절시중표기대장군영호동이교위요동군개국공 고구려왕으로 봉하였다.
○七年, 夏五月, 遣使入<北齊>朝貢. 秋九月, <突厥>來圍<新城>, 不克, 移攻<白巖城>. 王遣將軍<高紇>, 領兵一萬, 拒克之, 殺獲一千餘級. <新羅>來攻, 取十城{郡} .趙炳舜. 『三國史節要』.
7년 여름 5월, 북제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가을 9월, 돌궐이 신성을 포위하였으나 승리하지 못하자, 군대를 이동하여 백암성을 공격하였다. 왕이 장군 고 흘에게 군사 1만을 주어 그들을 물리치고, 1천여 명의 머리를 베었다. 신라가 침공하여 열 개의 성을 빼앗았다.
○八年, 築<長安城>.8년, 장안성을 쌓았다.
○十年, 冬, 攻<百濟><熊川城>, 不克. 十二月晦, 日有食之. 無氷.
10년 겨울, 백제의 웅천성을 공격하였으나 승리하지 못했다.
12월 그믐날, 일식이 있었다. 물이 얼지 않았다.
○<平原王>[或云<平崗上好王>.], 諱<陽成>[『隋唐書』作湯.], <陽原王>長子. 有膽力, 善騎射. <陽原王>在位十三年, 立爲太子. 十五年, 王薨, 太子卽位.
평원왕[평강상호왕이라고도 한다.]의 이름은 양성[「수당서」에는 탕(湯)으로 되어 있다.]이며, 양원왕의 맏아들이다. 그는 담력이 크고, 말타기와 활쏘기를 잘하였다. 양원왕 재위 13년에 태자가 되었다. 15년에 왕이 별세하자, 태자가 왕위에 올랐다
○二十八年, 移都<長安城>.
28년, 장안성으로 도읍을 옮겼다.
그렇군요...양원왕떄 장안성을 쌓았습니다......평원왕은 장안성으로 도읍을 옮기는 군요...
처음 알았습니다...........매우 즐겁습니다..
아마추어인 제가 삼국사기를 읽고서 이런 내용이 있음을 찾았습니다...
사학을 하시는 분들은 그동안 뭐하고 계셨나요?
밥먹고 사는게 중요하시다면 장사를 하면서 여생을 보내세요...역사 한다 하지마시고..
첫댓글 놀라운 기사입니다.
사기 고구려본기 양원왕 8년에 장안에 성을 쌓고
평원왕 28년 장안으로 도읍을 옮겼다는 기사가 눈에
띄지 않았다니 말입니다.
삼국사기와 유사를 봤어도 이 "장안"을 북경으로 알지 못하고
하북이 아닌 고구려 강역의 다른 지명으로 오해했으니
등잔밑이 어둡다는 속담이 틀리지 않습니다.
동위는 고구려의 속국으로 이해가 되나 북제와의 관계가
특별하군요.
북제가 고구려왕을 봉하는 내용과 고구려가 북제에
조공을 받치는 내용은 의아합니다.
아마도 이민족을 견제하고 힘의 균형을 유지하기 위한
형식적 외교관계가 아닐까 싶네요.
1850?년대 미 해군 대위가 자금성을 보았을 때 성의 치가 분명히
존재하는 것을 보았답니다.
고구려성의 특징은 석축에 치를 두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치를 잘라내고 시멘트로 덮시워 그 원형를
없애버렸으니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장안이 곧 또다른 평양이겠지요.
@태허루 장안은 북경이 아니라 낙양서쪽에 있는 장안성 입니다..
북경쪽은 백제의 영역입니다...
@하자하자 한의 수도였던 장안(서안)을 말하는군요.
보통 수도를 장안이라 부르니 ㅎㅎㅎ 북경이 떠오릅니다
@태허루 당나라가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는데 낙양성 서쪽문으로 갔다고 합니다..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가잖아요?
이것을 보니 아하~ 이해가 돼는 것이죠...
@하자하자 당시 대륙은 혼란기였고 5호16국을 거쳐 남북조시대에
해당하는 걸로 보입니다.
북위는 선비족이 세운 나라로 북위->동위->서위->북제로
빠른 정치적 변화를 보입니다.
북위가 동쪽으로 축소되는 과정에 고구려가 북위의
서쪽 강역을 회복한 것으로 보입니다.
서안 피라밋군은 우리 상고사와 관련된 것으로 보이고
고구려의 서안 회복은 정치적으로 매우 뜻이 깊다 하겠습니다.
박창범 교수의 '하늘에 새긴 우리역사'와 삼국사기 기록을
잘 활용하면 대륙삼국의 위치를 밝히는데 큰 도움이 되겠다 싶어요.
@태허루 동감 합니다..삼국사기는 편년체이기에 김부식이 있던 시기인 고려초기에는 삼국의 역사책이 있었고,,,
그 책을 바탕으로 쓰여진것이 삼국사기이니..삼국의 역사책을 찾는 노력도 해야 합니다...
@태허루 제가 어릴때 대구에서 살았는데 조부께서는 대구시내나갔다가집으로 돌아오셨을 때마다 우리더러 장안에 나갔다가 이러이러한 걸 봤다는 식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시내 나갔다는 말을 장안에 나갔다고 말씀하셨어요. 장안을 시내라고 합디다.
박창범 교수님의 결과물을
중심으로 연구를 한다면 아마
정확하다 ,저도 생각합니다.
귀한 글 잘 읽었습니다.
장안성이 평양에 있던 성을 말하는것이 아닌가요
아닙니다..장안성은 서안에 있고 고구려성임을 며칠전 사진으로 확인 했습니다..어느분이 보여주셔서 큰 울림을 가졌기에 지금도 눈앞에 보이는듯 합니다..
지명 교치를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한반도 평양만 평양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예를 들면 고구려 수도를 정할 때 서안으로 천도하면
서안이 평양이 됩니다.
서안에서 북경으로 천도하면 북경이 평양이 되는 것이지요.
한반도 평양은 고구려 수도로 정했는지 모르겠으나
평양이라는 지명으로 볼 때 한시절 수도역할을 했겠다 싶네요.
유목민은 특성상 강북(강의 북쪽)에 수도를 정합니다.
고향으로 회귀가 쉽지요.
한양이나 평양에서 양은 강의 북쪽을 나타냅니다.
평양은 수도로 정한 강북의 평원에 수도를 정했을 것이고
한양은 한강의 북쪽에 수도를 정했다는 뜻이지요.
고구려의 평양은 여러 곳에 존재하겠지요.
~ 서안=장안 !
그럼 당의 수도는 어디일까요?
암튼 내용이 "장안의 화제"가 되겠네요^^
수가 남북조를 통일하면서 장안이 수의 손에 들어간 걸로
보입니다.
당은 수를 바탕으로 세운 나라라 수도는 장안으로 시작합니다.
중국의 역사는 한족의 역사가 아니라 유목민들의 힘의
균형에 따라 정치 세력이 바뀝니다.
한족의 역사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유목민들의 헤게모니 각축장이었을 뿐이지요.
평원왕떄는 위진 남북조 시대 입니다...
고구려가 수도를 지금의 평양으로 천도할 때에 축조한 성을 장안성이라 하였고 왕궁도 안학궁이라고 한것으로 알고있는데
뭔가 잘못 알고 있었던건가
근데 진나라와 당의 수도는 어디에 갔는가
지명이 장안이 아니라 역사책에 여러군데에서 나오는, 당시에는 수도를 장안성으로 많이 부른것으로 알고있는데
장안에 성이 있다고 장안성이 아니라 수도의 성을 장안성으로
역사기록도 중요하지만 일부는 오류와 왜곡된것들도 허다합니다
기록이나 유물도 철저한 검증과 각계의 다양한 검토와 합의된 결론이 필요합니다
평양성과 장안성은 별개로 나옵니다..평양성근처에 장안성이 있다고 학자들의 견해를 모르는바 아닙니다..
그렇다면 서안의 장안성이 고구려성의 형태를 하고 있는지가 중요하겠습니다..
이 의구심을 어떡해 풀어야 하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