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쾅’
“신임대대장이 다쳤다. 이 지역은 위험하니 그대로 있어라. 내가 구출해 오겠다.”
사고가 발생하자 이종명 중령(41·육사 39기)이 부하대원들에게 내린 지시였다.
지난 6월27일, 파주시 군내면 비무장지대 군사 분계선 지역에서 육군전진부대 수색대대장 이종명 중령과 신임대대장 설동섭 중령(39·육사 40기)은 수색대대장직 인수인계차 중대장 박영훈 대위(27·육사 52기) 등 수색대원 19명과 함께 수색정찰을 나섰다가 대인지뢰가 폭발하는 사고를 당했다. 실수로 M-3 대인지뢰를 밟은 설동섭 중령과 박영훈 대위가 먼저 ‘쾅’하는 폭발음과 함께 쓰러졌다.
폭발음과 함께 시작된 눈물겨운 한 편의 드라마는 결국 양다리를 잃고 피투성이가 된 설동섭 중령과 팔과 허벅지에 관통상을 입은 박영훈 대위, 두 사람을 구하기 위해 혼자 들어갔다가 역시 지뢰를 밟아 양다리를 잃은 이종명 중령이 자신들의 소총과 철모를 끌어안고 10m를 포복으로 기어 나오면서 막이 내렸다.
“사고 직후 이중령이 부하대원들에게 ‘이 지역은 위험하다’며 ‘내가 설중령과 박대위를 구출해 올 테니 너희들은 따라오지 말라’고 제지하고 혼자 사고지점으로 들어왔어요. 그 때 두번째 폭발음이 울렸어요. 이중령도 지뢰를 밟은 겁니다. 또다시 부하대원들이 사고현장에 들어오려고 하자 이중령은 ‘위험하다’며 ‘우리가 기어나가겠으니 들어오지 말라’고 다급하게 외쳤어요. 당황하다보면 다 들어오게 되어 있거든요. 세 사람 모두 피투성이가 되었지만 죽을 힘을 다해 소총과 철모를 챙겨서 기어 나왔습니다.”
“제대로 임무도 수행해보지 못한 설중령의 부상이 더 안타깝다”
결혼 한 달만에 사고를 당한 박대위는 ‘사고 당시 침착하게 대처한 이중령과 설중령이 아니었다면 대형 인명피해를 냈을 것’이라며 담담하게 사고 순간의 기억을 떠올렸다.
사고발생 나흘 후 세 사람이 입원한 경기도 분당 국군수도병원을 방문했을 때 설중령은 넋을 잃고 앉아 있는 가족들의 애끊는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중환자실에서 의식을 회복하지 못한 채 사경을 헤매고 있었다. 사고 소식이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 보호자대기실에서 굳게 닫힌 중환자실 문을 힘없이 쳐다보고 있는 아내 김윤희씨(36). 사고 소식을 듣고 제대로 옷 챙겨 입을 정신도 없이 집에서 입던 반바지와 슬리퍼 차림으로 달려온 김씨는 눈물마저 말라버린 듯 두 눈이 붉게 충혈된 채 남편이 깨어나기만을 기다리며 가슴에 성경책을 품고 있었다.
먼저 지뢰를 밟은 설중령이 불의의 사고를 당했다면 이중령은 마음먹기에 따라 사고를 피할 수도 있었다. 위험한 사고현장에 부하대원들을 대신해 직접 뛰어들지 않았다면 부하대원들의 ‘생명’을 담보로 손끝 하나 다치지 않고 사고현장을 수습할 수도 있었던 것이다. 남다른 기지와 침착함이 없었다면 막대한 인명피해로 이어졌을 사고현장. 부하대원들의 희생을 막고 대신 자신의 양다리를 잃은 이중령은 의외로 씩씩한 모습이었다.
“사고가 나자마자 정보장교와 지뢰 탐지병을 비롯한 부하대원들은 사고현장에 들어올 태세였어요. 부하대원들이 당황한 상태에서 상황판단도 제대로 못하고 우왕좌왕 하다보면 더 큰 인명피해가 날 것 같아 혼자 들어가기로 결정하고 부하대원들이 사고현장에 들어가려는 것을 제지했어요. 그것뿐입니다.”
“그 경황 중에 부하대원들을 생각하고 사고현장으로 뛰어들어갈 엄두가 났느냐”고 묻자 “군인이라면 다 그렇게 했을 것”이라며 “자신의 행동이 사람들에게 관심을 끌만한 특별한 것이 아니었다”고 대답한다.
파편으로 인해 양팔에 심한 상처를 입고 양다리를 잃는 사고를 당했지만 불의의 사고라 여기지 않는다는 이중령은 다리가 조금 불편한 것 밖에 없다며 한사코 자신의 행동이 드러나는 것을 꺼렸다. 그는 자신은 괜찮다며 대대장직 임무를 제대로 수행해 보기도 전에 사고를 당하고 아직 깨어나지도 못하고 있는 설중령이 안타까우며 그의 가족들에게 미안할 뿐이라고 했다. 사고와 관련된 신문기사와 뉴스를 봤다는 이중령은 칭찬일색인 자신의 행동보다 맡겨진 임무를 충실히 이행하다 사고를 당한 설중령이 오히려 ‘자랑스럽고 훌륭한 군인’이라며 눈시울을 붉혔다.
이중령과 설중령의 아내는 서로를 격려하며 힘든 시간을 견뎌
자신이 처한 고통과 역경 앞에서도 ‘군인이라면 누구나 다 자신처럼 행동했을 것’이라며 좌절하지 않고 군인다운 씩씩한 모습을 내보인 이중령. 씩씩한 그의 모습이 오히려 더 안타깝게 느껴지는 것은 비단 그의 가족들만이 아닐 것이다.
“아내가 의외로 저보다도 더 담담하게 잘 견뎌내고 있어 다행입니다. 중학교에 다니는 큰아들은 뉴스를 통해 사고소식을 들어 자세히 알고 있고, 초등학교에 다니는 작은 아들은 아직 어려서 아빠가 사고를 당했다는 정도만 알고 있어요. 아이들이 충격 받고 공부하는데 지장 있을까봐 굳이 병원에 찾아오지 말라고 했어요. 저와 아내보다도 아이들이 아버지를 이해하고 잘 극복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뿐입니다.”
아이들 얘기를 꺼내자 행여 남편이 볼세새라 고개를 돌려 눈물을 닦는 아내 김금남씨(41). 사고 후 그는 너무도 태연하게 고통을 견뎌내는 남편을 보며 “당신 몸과 가정은 생각하지 않았느냐”며 한번쯤 원망할 만도 한데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고통을 속으로 삭이며 묵묵히 남편 곁을 지키고 있었다. 그리고 이중령 또한 ‘아내가 의외로 잘 견뎌내고 있어 다행’이라고 하지만 남편 앞에서 아픈 속내를 드러내지 않고 있을 뿐이라는 걸 모를 리 없다.
“남편은 언제나 가족보다는 부대 일을 우선으로 여겼어요. 평상시에도 어려움이 닥치면 식구들 앞에서 나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고 애썼고요. 남편도 고통을 참기 힘들텐데 후배인 설중령의 몸 상태가 안 좋아 고통스럽다는 말 한마디 않고 참고 견디는 것 같아요. 설중령이 깨어나서 빨리 완쾌되었으면 하는 바람뿐이에요.”
평소에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이중령과 설중령의 아내는 이번 사고를 겪고 나서 서로를 위로하며 하루하루를 버텨 나간다고 했다. 설중령은 수술 직후에는 의식이 있었지만 지방 색전증 때문에 뇌경색이 심해 청각자극만 살아있어 시간을 두고 지켜봐야 의식 회복여부를 알 수 있는 상태다.
하루에 두 번밖에 면회가 허락되지 않아 남편 얼굴조차도 제대로 볼 수 없다는 설중령의 아내 김씨. 김씨는 사고를 당하기 사흘 전 자신의 생일날을 잊을 수 없다고 한다. 장미꽃다발과 아이들 장난감을 사들고 들어와 전방에 올라가면 가족들과 보낼 시간이 없을 것 같다며 유난히 가족들 생각을 많이 했었다는 설중령. 김씨는 뉴스를 통해 아버지의 사고소식을 듣는 것보다 엄마가 직접 말해주는 게 나을 것 같아 세 아이들에게 사고소식을 알렸다며 애써 참았던 눈물을 토해 낸다.
세 사람의 사고소식을 보고 받고 병실을 방문한 길형보 육군참모총장(59)은 “지뢰밭에서 보여준 세 사람의 전우애와 희생정신이 전 군인들에게 귀감이 되고 있다”며 환자와 가족들에게 “의료진도 최선을 다하고 있으니 용기 잃지 말라”는 위로의 말을 건넸다. 길총장의 위로와 격려에 씩씩한 목소리로 “빨리 일어나겠습니다”라고 대답한 이중령과 박대위. 설중령을 포함한 세 사람의 쾌유를 기원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