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무숙 문학관을 찾아서
김 란
겨울 하늘은 유난히 파랗고 깊었다. 삼청각을 지나서 각국의 대사관저들이 즐비한 성북동길 중간쯤에서 길상사를 만났다. 평생 백석 시인을 기리며 기다리던 자야부인이 부처님께 공양하고 타계했다는 집이다. 만해 한용운님의 심우장과 간송미술관도 있었다. 소설가 한무숙 선생님이 생전에 살던 집을 문학관으로 남겨서 보존하고 있다는 기사를 보고 찾아가는 길이었다.
혜화초등학교 근처라던데. 찾기 어렵지 않았다. 학교 앞에 있는 아람문구점 뒷집. 주위는 온통 아파트와 다세대주택이었다. 한무숙문학관만이 전통한옥의 자태를 잃지 않고 사막의 오아시스처럼 오롯이 남아있다. 초인종을 눌렀지만 굳게 닫힌 대문 안쪽에서는 인기척이 없었다. 인근의 아파트 경비실에 문의해봤더니 요즘은 계속 닫혀있다고 했다. 이런 낭패가 있나! 다행히 문학관 학예사와 전화통화가 돼서 한 시간 후에 다시 방문하기로 약속했다. 12월부터 4월까지는 문학관을 개방하지 않는 것이 원칙이라고 했다. 전화도 없이 무턱대고 찾아온 내 실수였다.
근처의 작은 카페에서 기다리는 동안, 유리창으로 스며드는 햇살에 주름살투성이의 표마리아 할머니가 눈물을 흘리며 고해하는 모습이 아른거리는 듯싶었다. 이십여 년 전, 드라마에서 본 <생인손>의 한 장면이다. 구한말 명문가의 종으로 태어났던 여자의 한 맺힌 삶을 그린 한무숙 선생의 장편소설이었다. 사대부 집안의 관습, 풍속, 언어, 의식 등을 밀도 있게 다룬 이 소설은 생인손을 앓는 딸을 버려두고 주인 딸에게 젖을 먹여야하는 어미로 인해 수많은 독자들의 눈시울을 적셨다.
문학관을 향해 다시 명륜동 골목길을 걷는 동안, 소설 속 주인공들이 옛 모습을 찾기 어려운 이 거리에 돌아온다면 얼마나 혼란스러울지 생각했다.
초인종을 누르자 김영민 학예사가 반갑게 맞이해주었다. 동료의 병문안을 갔었다고 했다. 대문에 들어서자 햇살이 보자기를 펼쳐놓은 듯 마당 가득 펼쳐져 있었다. 작은 연못에선 금빛 잉어가 얼음 아래서 숨을 죽이며 불청객을 빠끔히 올려다봤다. 선생의 장남인 김호기 관장님은 외출중이어서 만날 수 없었지만 학예사의 세심한 배려로 꼼꼼히 둘러볼 수 있었다.
선생은 1942년 《신시대(新時代)》지의 장편소설 모집에 일본어 장편《등불 드는 여인》이 당선되어 문단에 데뷔했다. 이어 1947년 부산《국제신보》에 장편소설《역사는 흐른다》가 당선되었다. 1956년 첫 창작집《月暈(월훈)》을 간행했으며, 1957년 단편 <감정이 있는 심연>으로 자유문학상을 수상했다. 그 후 한국 고유의 여인상에 깊은 관심과 조예를 보이는 《유수암》《생인손》《송곳》등의 작품을 썼다.
작가가 젊은 나이에 썼던《역사는 흐른다》는 근래 하와이대학 출판사에서 영역으로 출판되었으며, 마지막 장편소설《만남》은 천주교와 다산 정약용의 저서와 사상에 대한 방대한 연구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는 작품으로 캘리포니아주립대학 출판사에서 영역으로 출판되는 등 한국현대소설로는 최초로 외국의 대출판사에서 출판되었다. 이러한 작품 활동을 통하여 대한민국 문학상, 예술원상, 문화훈장, 자유문학상, 삼일문화상 등을 수상하였다.
선생의 삶이 순탄하기만 했던 것은 아니었다. 어렸을 때부터 수많은 병으로 인해 생사의 기로를 넘나들기도 했고, 화가의 꿈을 결혼으로 접어야했다. 병약한 육신과 층층시하의 시집살이에 병든 시어머니의 병구완, 집안 일, 이 모든 것을 해내면서 틈틈이 집필한 것이 첫 소설《등불 드는 여인》이었다. 이렇듯 선생은 주부로서도 모범적이었을 뿐만 아니라, 유창한 일본어와 영어의 구사력, 세계 역사, 문학, 예술에 대한 박식함. 부군과 함께 다시 그림을 시작하여 가졌던 3번의 부부서화전에서 보여줬던 능력 등 신사임당 상을 받기에 충분했던 것이다.
제1전시실은 빛이 잘 드는 남향으로 출판기념회 등 크고 작은 연회가 열리던 곳이며, 현재는 문학관련 자료 등 주요 물품이 전시되어 있다. 문학관련 자료 중에는 부부서화, 육필원고, 각종 저서 초판본, 노벨문학상 수상자 가와바타 야스나리, 교황청 비서의 친필서한, 운보, 월전, 소전의 서화 등이 있다.
제2전시실은 작가가 생전에 국내외 문인들과 명사 등 많은 손님들을 대접했던 응접실을 재현한 곳이다. 향정 한무숙의 문학과 아름다움을 기리는 유명 문인과 화가들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어서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던 작가를 느낄 수 있는 곳이다. 지금도 생전에 작가와 가까이 지내던 문인들이 종종 방문해서 고인을 회상한다고 학예사가 전했다.
나선형 나무계단을 오르면 개조한 2층 양옥에 작가의 집필실이 생전에 사용하던 모습 그대로 남겨져 있다. 가사 일이 모두 끝난 한밤중에야 집필에 전념했던 작가에게는 집필실이자, 침실이요 거실이기도 했다. 그래서일까? 사방이 문인들의 싸인북, 집필에 필요한 전문자료, 문학서적들로 둘러싸여 있었다. 작가가 사용하던 책상과 필기구, 일상용품이 그대로 놓여져서 잠시 외출하셨던 작가가 곧 문을 열고 들어설 것만 같았다.
아마, 새 작품을 구상하려고 북한산 자락에 산책을 나가신 건 아닐까. 아까 지나쳤던 성북동의 길상사가 떠올랐다. 기생이기보다는 시인 백석의 여인으로 더 알려져 있는 자야부인이 평생토록 정인을 기다리며 살던 길상사. 혹시, 소설《유수암》의 무대가 아니었을까.
《유수암》은 입산(入山), 환속(還俗), 우국지사에 대한 절개, 정인(情人)에 대한 끝없는 기다림과 인륜의 정 등이 어우러져 동양적인 삶의 정취를 물씬 풍기는 것이 그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다.
풍치 좋은 산간에 자리 잡은 요정(料亭) 유수암. 몇 해 전만 해도 인간의 욕망이 얽혀 소용돌이치던 그곳에서 풍악소리 대신 독경소리가 울려나오며 소설은 시작된다. 왕년의 명기(名妓) 진경은 스스로를 냇가에 서 있는 버드나무이고, 남자들은 스쳐가는 물과 같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러나 한 남자에의 신앙과도 같은 기다림은 유수암을 황폐케 한다. 파멸 속에서도 기다림을 그치지 않는 진경의 모습은 완벽을 향한 인간의 욕망과 슬픈 의지의 표상으로 낙조처럼 사라져가는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 얼핏 대중소설의 인상이 들지만, 무게 있는 노작(勞作)으로, 인생을 바라보는 작가의 원숙한 경지가 잘 나타나 있다.
- 인간이란 비참과 위대의 풀 수 없는 혼합, 모순, 끊임없는 갈등과 분열 속에 허우적거리는 극적 존재라고 갈파한 파스칼의 말을 되새기며 그 비참을 아는 까닭은 인간은 위대하다고 한 그 ‘위대한’ 명구를 나는 아직도 처음 읽었을 때와 같은 신선하고 순수한 감동으로 찬탄하고 있다. 나의 감동의 원천과 관심의 향방은 나이를 먹어도 그리 크게 달라지지는 않은 것 같다.- 소설가 한무숙 동아일보 인터뷰 중에서. 1992.12.26
스스로가 자학하듯 열정을 쏟으며 열심히 살았다고 자부했던<불씨>, 작가는 75세의 나이로 1993년 별세했다. 부군 김진흥 선생은 작가가 40년을 살다간 한옥을 문학관으로 개조했다. 그러니 이곳에는 작가의 생애와 자취가 고스란히 스며있을 수밖에. 다양한 주제를 다루면서 치밀한 심리묘사와 정확한 언어구사,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과 역사의식을 남긴 그분의 발자취를 느끼게 된다. 그뿐이랴. 작가의 작품에 대한 유족들의 강한 애착과 자긍심을 곳곳에서 발견하며 그분의 생전 인품을 생각해보게 했다.
“봄이 되면 다시 한 번 오세요. 그때는 지금 준비하고 있는 제3전시실도 개방될 거예요.” 환한 미소로 배웅하는 김영민 학예사의 등 뒤로 햇살이 눈부셨다.
문학미디어 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