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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부산크리스천문인협회 원문보기 글쓴이: 주앙
박두진 시론 - 임종성 교수님
* 참석자 : 권갑숙 김상호 김종헌 김종화 김출현 김혜은 라영훈 변도우 서한성 신병철 양윤형 임종성 정봉애 조정태 최복남 (15명)
* 공지사항 : 문예대학 문학기행 2월 24일 아침9시 문예대학 집결
東里·목월문학관 및 경주일원
<논문집 47페이지부터 강의 시작>
머리 : 번민 욕망 상징. 수도가 안 되니까 깎음. 여승이 머리 깎을 때 펑펑 운다. 밝음을 가리는 풀이라 하여 <無明草>로 불린다. 황덕선사가 재상에게 <무명초>에 대해 물으니 기분이 별로 안 좋아 불만 섞인 대답을 했다. 무명의 불길이 뒤로부터 꺼지기 시작..마음이 가리키는 대로 깨우친다. 무명이 불로 승화되는 과정 설명. 세존 왈 <세상 어둡다 말고, 네가 스스로 불꽃이 되어라>..노력이 필요하다. 47p를 보면 갈등(comflex)이 어떻게 깊어지는가 알 수 있다.
제가 봉직하는 남성여고의 프리 코너에는 담쟁이덩굴에 벽돌이 상하고 있다. 갈등이란 그런 것이다.
3시집 <거미와 성좌>
거미 : 불길한 것으로 이해된다. 어둡고 깨끗하지 않고 흐릿하고, 화장실이라든지 청소 상태가 좋지 않은 곳..누에와 비슷해서 벼랑에 자기 느낌 풀어내 줄을 쳐서 허공에 절박한 삶을 걸쳐 놓고 살아간다. 절박한 존재이다. 거미 거무 시각적 배치가 <교살 황홀 전율...>등의 시어로 표현되었다.
시의 배치를 보면 시에 대해 짐작할 수 있다. <조국>이라 하면 <태극기><민족>< 한반도> 등의 시어가 배치된다. 그렇지 못하면 황당무계한 시가 될 수 있다. 진지하게 가면 추상적인 ..기대치가 작품으로 승화될 수 없는 시도 있다. 거미의 설정은 환경을 그대로 드러낸다.
ⓐ 암시 ⓑ 비유 ⓒ 상징 없이는 직설적 토로이다. 시원시원한 전달엔 좋지만 시적 감칠맛은 감소된다. 성좌와 대립되는 이미지다.
李箱의 <꽃나무>는 빈 들판에 서 있는 자신의 생애를 상징한다. 쓰고자 하는 시 세계를 나타내기도 한다. 불러도 대답없는 절대절명의 고독한 환경이다. 두진의 시는 60년대 결렬한 사회적 현실을 반영한다. 현실인식이 어느 시인보다 강하다. 조지훈의 <역사 앞에서>와 <다부원..> 등이 없지 않지만, 어느 시인보다 현실과의 갈등 심화가 계속되고 있다.
[인간 밀림]은 인간을 사회/생활/환경보다 본능적 존재로 본다. 호랑이는 혼자 다니고 사자는 거느리고 다니지만 용호상박이다. 절대적 심미의 충돌은 어느 한 쪽이 이긴다고 보기 어렵다.
까마귀와 고양이, 술(뒤따라 붙는 말이 '女子')..인도에서는 술을 먹여 그 맛에 취해 자면 그 때 잡아 혼내준다고 한다. <다실>은 차를 마시는 공간이다. 하동에는 <마실수록 깨어난다>는 차 시비가 있다. 술은 소모적이고 창조성이 없다. 차 한 잔을 마시면 게으름에서 깨어나는 <자각적 증세>를 보인다. 효율적이고 정겨워진다.
외국인더러 <어디 갑니까?> 하면 화를 낸다. 우리는 이런 말에 대해 수용적이다. <니하고 같이 있고 싶은데..>하는 정서적 유대가 있기 때문이다. 논리적 이해에 앞서 질문에 대해 수용할 필요가 있다. 화두삼아 하는 얘기가 있다. 미국의 카타리나 천재지변 때 한국인은 임시수용소에 없었다 한다. 태국 베트남 일본인은 다 있는데. 이미 교회서, 가정에서 한국인을 다 불러서 그 위기를 나누어 졌다는 것이다. <정리될 때까지 같이 살자>는 식이다. 정서적으로 작은 나라에서 살아왔기에 논리화 되면 힘들어진다. 한국인에게는 논리가 적용되면 불편해진다. 자꾸 물으면 정내미 떨어진다. 그 詩라는 메타포를 가지고 대화하러 왔는데 자꾸 따지면 힘들어질 수밖에.
시가 존중받지 않는 세상. 사회적인 구조적 모순을 시로 삭이지 않는 곳은 문제가 있다. 시가 정서적 면에서 효율성이 있다. 두진의 전체적인 시는 뜨겁고 활기차고 막힌 데 없다. 읽어나가면 운률이 따라 붙는다. 드라마틱하고 다이나믹한 운률은 청록파 세 사람 중에 두진이 최고다.
51p. 자유는 --- 꽃잎..<꽃>은 혼성 복자음이다. <ㅗ>를 빼곤 모두 자음이다. 닿소리는 부딪치면 깨지고 터진다. 모음 하나 빼면 전부 거친 것인데, <ㅗ> 덕분에 <생명의 덩어리>가 되었다.
용두산공원에 있다가 민주공원으로 이사간 4.19탑 비문은 유치환 선생이 썼다. "눈을 들어 바라보라...귀순한 자는 마침내 말이 없나니..> 서울은 많고 부산은 적다. 고려대 등에 기념탑이 있다. 김광균의 <엘리자를 위하여>란 작품도 있다. 친구들이 가장이 되고, 토끼같은 딸아들, 여우같이 생긴 부인과 가정을 이루고..시 속에 죽은 친구는 지금도 살아서 교수와 열띤 토론을 하고 강의실을 들락거리고, 친구들은 하품이나 하고..시 속의 젊은 학생은 영원히 살아 있다.
살았으나 죽은 인물도 있고, 죽었으나 살아있는 이도 있다. 예수님이 그 대표적이다. 바울과 베드로도 그렇다. 누가성당이나 야고보성당이라 하지 않고 <바울성당><베드로성당>이라 한다.
두진은 너무나 젊은 시인이었다. 나이를 먹을 필요가 없었다. 돌아가셨으나 젊은이 못지 않게 행을 껴안고, 조금도 쉴틈을 갖지 않는 투사의 모습으로 사셨다. 그런 살아있는 시인이었다. <자유>, <조국>, <운명> 등 관념어가 많아서 시의 구조적 가치가 약화되었으나 시가 살아 펄펄 뛴다.
해방직후 깡패들까지 <내 자유>라고 할 정도로 <누리는 자유>가 판을 쳤다. 에리히 프롬은 <인간은 자유가 많아서 도피해야 한다>고 역설,「자유로부터의 도피」란 책을 썼다. 참된 자유는 누리는 것이 아니다. 정말 아름다운 자유는 누리지 않는 것이다. 흉보는, 남을 무시하는, 예의를 지키지 않는, 내멋대로 하는 자유는 자유가 아닌 것이다. 지드는 <자유롭게 살되 함부로 살아선 안 된다>고 했다. <좁은문>이 그렇다. 좁은길을 들어가는 것이 참된 자유이다. 자유를 빙자하여 함부로 하는 것이 너무 많다. 그래서 <우리들의 깃발을 내릴 때가 아니다>는 시를 두진은 썼던 것이다.
러시아혁명은 평등이랍시고 인류에 해악을 끼쳤고 지배층에 엄청난 자유를 주었다. 영국의 산업혁명은 물질적인 풍요의 동기를 부여하였다. 프랑스혁명은 꼭 있어야 할 혁명이었다. 내가 이야기 할려는 것은 시 속에서도 내적 혁명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내 속에 두 가지의 <나>가 있다. 선을 지향하는 <나>와 선을 포기하고 악을 지향하는 <나>가 있는 것이다. 이 둘의 갈등이 계속 일어나면 한 자아가 지배하게 되는데...60년대 한국사회의 황폐와 무질서, 정리되지 않은 문제들을 써낸 것이다.
<젊은 주검에게>는 4.19 때 맨 앞줄에 서서 <학생의 피에 보답하자>고 외친 일석 이희승 조지훈과 나란히 교수 시위를 한 후 쓴 것이다. <바르게 살라고 가르쳐 놓고 보니, 학생들을 다 죽일 판이었다. 역사는 희생을 요구하는데, 교수들이 피해 버렸거든...<있어서는 안될 날/분노가 침묵한다>고 그는 외쳤다.
분노에는 두 가지가 있다.
ⓐ 도덕적 분노(모랄 인디그네이션)
ⓑ 심미적 분노(에스테틱 인디그네이션)
몇몇 국회의원들이 국가 세비를 가지고 외국 가서 골프 치고 놀러가 아직도 안 돌아왔다는 사실이 지금 국민들의 분노를 촉발시키고 있다. 수염을 기른 정당 대표란 사람은 깡패수준이다. 서울교대 교수가 동아일보에다 <아이들 볼까 부끄럽다> 글을 썼다. 이는 윤리적 분노이다.
세 사람의 지식인 소설가(연대 박영준 교수/ 서울대 전광용 교수/ 고대 정한숙 교수-男)의 한 분인 정교수는 일본의 국보인 법륭사의 금당벽화(고구려 사람 담징 作)에 대해 분노한다. 화재 이후 못 보게 유리벽으로 막아 놓았다. 미적 가치는 모든 인류가 느껴야 하는데 파괴시키면 심미적 분노가 폭발한다. 상식선을 넘은 도덕적 분노는 해결이 가능하지만 심미적 분노는 해결이 안 된다.
문맹율 90%이던 시대의 춘원은 국민개조/국민교육론을 제시하였다. 문맹율 1.7%인 현재도 시간 걸린다고 대학 앞 육교를 건너지 않아 <목격자를 찾습니다> 현수막이 걸린다. 질서 자체를 거부함은 도덕적 분노를 촉발한다. 수업시간 학생은 잠자거나 학원 숙제를 하고 학원 가서 공부를 한다. 수업 끝나기 10분 전에 책을 꺼낸다. 학력 나쁜 아이는 자기도 모르게 욕설을 한다. 습관이 돼버려서 누가 듣는지도 모른다.
이왕 분노할 바에야 심미적 분노를 해야 한다. 민족, 시인공화국. 59p. 부산의 시인 5백명. 시시한 사람, 문제를 가진 사람이다. 시정잡배나 다를 바 없는 시인의 지식...시인은 원래 대단히 우수한 존재이다. 예이츠 같은 시인은 아일랜드의 위대한 존재였다. 지금 시인에겐 민족이나 조국이 없다. 경쟁하듯 시집을 내지만 휴지만 양산하고 있다. 본래의 시인세계는 그렇지 않다. 60년대는 민족의 장래를 걱정하는 엘리트 의식이 시를 썼다. 걸레처럼, 누더기처럼 의식이 부패하여 넌더리가 난다. 시인이란 자부심은 없다. 문제적 개인임에 분명하다. 이중섭은 밥을 먹으면서도 굶는 사람을 생각하며 통증을 느꼈다. 다산은---시인이야말로 횃불 들고 민중 속에 깨어있는 사람이다. 결코 시시한 존재가 아니다. 예레미야나 여호수아 갈렙 같이 선지자적인 사람, 민족을 짊어지고 굴절하는 삶을 거부하며, 거대한 흐름을 만들어 가면서 나서는 사람이다.
나는 그리워한다. 내 생애 앞과 -----을. 도저히 창조 안 되는 논리..야구처럼 앞으로 나간다. 뒤로 처지는 이가 없다. 전진이다. 다이나믹한 흐름이 우리에겐 좀 약하다
시협 회장 안 나간다 하니 얼마나 편하고 다들 좋아하는지..남성여고 교훈 <조용한 강물처럼> 흐르면서도 깊이 가기 때문에 좋은 것이다. 학술원 회원이 부산엔 1명도 없다. 346년 된 프랑스 학술원 회원인 100세의 에비스트로스가 거동이 불편하여 식전에 나가지 못하자 사르코지 대통령이 친히 찾아가 <우리 국민의 자랑>이라며 문안 인사를 했다. 10분간 까뮈를 이야기하고, 5분간 싸르트르를 이야기하고, 모이면 싸우고, 내용도 깊지 않고..대 작가가 타계해도 찾아가는 법도 없다. 문화민족의 자부심은 어디에 있는가? 대접 못 받는 존재로 전락하고 말았다. 60p..65p. 중간에서 앞쪽으로 세속사에 대한 관심 6.25, 4.19..강렬한 역사의식..
큰 범위의 역사 : 4.19, 6.25, 3.1운동만 대사로 생각. 큰 하드웨어
작은 범위의 역사 : 실제 민중이 어떤 생각으로 살아왔는가..옷, 밥...
박두진은 60년대의 부패/죄악 등을 부정적 속성으로 보고 작품을 썼다. 1,200편을 발표했는데, 이래야 시인이다. 두진의 작품이 실리지 않은「현대문학」등 문학지가 없다. 인구에 회자되는 시는 열 편도 안 되지만, 그런 우수한 시를 쓰기 위해 1,200을 써야 한다. 매일 한 편 이상 써야 한다. 나도 500편 정도는 남아 있다. 시를 쓰지 않으면 <나>라는 정체성이 사라지고 만다. 게따나 앉으나 서나 똑같은데 (웃음)..루터는 피를 흘리며 베드로 대성당을 기어 올라갔다. 그리고 종교개혁을 했다. 김삼환 목사는 찬송 연습을 해놓고 막상 성가대에 들어가 2절 이상을 부를 수 없었다 한다. <나같은 죄인을...>...다산은 <임금은 사랑의 대상이 아니라, 세종대왕처럼 존경의 대상이 돼야 한다>고 했다. 학자의 기본적 자질이 무엇인가?
분노와 억압된 민중을 깨우치는 시를 쓴 두진은 관습적이고 관념적인 4.19를 노래한 게 아니었다. 6.25의 노래 <아 아 잊으랴!>는 두진의 작사였다. 분단의 현실을 극복해 보려는 의지가 있다.
그리스도폴이라는 폴란드 신부는 강을 건너다 빠진 사람을 건져내고 죽었다. 자기 일을 던져버리는 것, 진리 앞에 하나님의 법칙 앞에 생명을 버리는 것, 그리하여 오히려 생명을 탄생시키는 것...具常 시인이 <시문학>에 연재하였다. 시적 통로를 강에서 찾으려 하였다.
산업혁명 후엔 두진의 시가 바뀐다. 고향 안성에 내려가 수석 채집을 하며 자연과의 영합을 통한 교감을 시로 썼다 <수석열전>이 그것이다. 자연의 축소인 수석(안성에서는 다 캐어 간다고 안 좋아했지만)을 통해 자연을 내밀한 세계로 끌어낸다. 끝없는 자기의 신앙고백을 한다. 전봉건의 <돌> 연작시와는 달리, 두진은 자기 신앙과 결부시켰다. 신앙을 빼고 단순히 돌만 노래했다면 볼품없으리란 개연성이 있다.
기독교 시(문학)은 구교와 신교를 합쳐서 총체적으로 봐야 한다. 김남조 구상 홍윤식 등 가톨릭문학을 합하여 봐야 한다.
97p <사도행전>
종말사관 : 일반적 사관
섭리사관 : 함석헌, 김교신, 우치무라 간조처럼 하나님께서 돌보시겠다는 섭리에 바탕을 둔 역사해석. 예를 들어 쏘련이 자기 나라 문제 해결 위해 6.25 유엔군 파병 안보리에 불참한 것을 섭리사관으로 이해함. 하나님의 관찰 없는 역사가 있을 수 없다고 보는 것이다. 미국 묘지엔 <낯선 나라, 우리가 한 번도 가보지 않은 나라를 위해 싸우다 죽어 여기 잠들다>란 묘비가 있다. 함석헌 선생은 토성동 기독교사회관에서 3년동안 매달 세 시간씩 강의를 했다. 부산의 성자 장기려 박사가 기도를 했다. 신부 스님이 꽉 찼다.
78p 역사의식을 사도식으로...두진은 사도의 의식을 갖고 있다. <사도행전>과 <갈보리의 노래>는 디모데전후서와 관련지어 당시의 석학 사도 바울 선생의 신앙적 깊이를 시로 승화시키고 있다.
85p 왜 여태 몰랐을까/당신 아닌..사랑, 자유, 그 높고 높은...작은 돌에서 이런 시상을 찾아낸다. 뜨거운 돌 하나..하나님은 성내기를 더디하신다..토끼 사자 사슴 새..갈등없이(이사야書에 나오듯) 누가 잘나고 못나고 없이..<하나님과 연애한 분>이란 생각이 든다. 열렬한 투사 같으면서도 명징성(물결로 치면 갈아 앉아 깊이를 가지신 분)을 가진 두진의 후기 시는 신앙시였다. 신앙을 배제한 두진의 후기시는 생각할 수 없다. 신앙이 시를 이끌어가고 있다.
신앙시엔 두 부류가 있다.
ⓐ 시로 신앙을 내재화 - 목월 김남조. 시를 통해 신앙을 끌어들임
ⓑ 신앙으로 시를 형상화 - 신앙으로 시를 끌어들임. 두진.
수석엔 온갖 무늬와 형상이 들어 있다. 이것을 신앙으로 내면화시킨 것이다. 94p <수석회의록>, 95p 정밀, 점, 불멸...96p 정현종의 <섬> - 사람들 속에 섬이 있다. 그 섬에 가고싶다..사람마다 다르다. 등교하여 교실에서는 모두 같지만 귀가 때는 타고 가는 차의 종류가 다르듯 다 다른 섬이다.
시인, 선지자, 교사는 같은 말이다. 필로소피아..독일의 수필가 안톤 슈낙의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울음 우는 아이들, 술취한 여자의 좁은 어깨...아직도 책에 실리고 있다.
빵 두 개, 콩 한 조각...엄청난 크기..집채만 해져..극히 이기적인 것으로..더 작아짐..빵이 생각에 따라 커졌다 작아졌다 한다. 전쟁을 치르다 보니 들고 다니며 먹는 게 필요하여 빵이 생겼다. 밥은 반찬이 필요하다. 그래서 들고 다니며 먹는 김밥이 생겼다. 분량이 중요치 않다. 어떻게 나누느냐가 더 큰 사랑이다. 예를 들어 비너스상을 어떤 이는 눈을 지우고 어떤 이는 코를 떼어 갔다 치자. 그 상을 영원히 보존키 위해서는 가지고 있는 걸 내줘야 존속된다.
평론집 <서정시의 내면풍경과 미적가치>...자신의 시로 타자와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한다. <나>의 모음을 뒤집으면 <너>가 된다. 나를 바꾸지 않으면 너가 없다. 나에 집착돼 있으면 너가 안 보인다. 진짜 시인은 자신과 얘기할 때도 타자와 얘기한다. 박두진의 <자화상>은 어떤 것을 지향하는가?
~60년대 외적인 소재(민족/역사)
60년대~ 존재적 가치에 밀착
98p
..아 훌륭한 낙화..그 분노가 나를 두들기고 절망이 나를 두들기고 아니 사랑이 나를 두들기고 끝없는 뉘우침과 갈망이 나를 두들기고..
실험적인 시다. 해독이 안 된다. 지적 유희가 아니다. 김현 교수가 말하는 <거짓 절망>이 아니다. 유치원생의 시와 서정주의 시가 비숫해도 시의 얼굴은 그런 게 아니다.
결론적으로, 논문은 서론이 제일 중요하다. 서두에 뭘 쓸 것인가? 정하고 나면 결론은 절로 나온다. 106p 한국 역사 속에 의연히 살아가는..학구적인 사람이었던 윤동주는 정지용의 시를 다 베껴서 암송한 성실하고 성품이 온화한 사람이었다. 저항시인이 아니었다. 이육사 이상화 윤동주 등 저항시인 세 사람 중에 서울대 오세영 교수가 윤동주를 뺐다. (전남 영암 전주 신흥고 졸)..김우창 교수(개항 100년 한문 최고)도 <궁핍한 시대의 **>에서 윤동주를 <내면적 인간>으로 보았다. 잘못된 상식을 바꾸기 위해 공부를 한다. 끝내 큰 학자로 남는 것이 목표이다. 신경림이 자기 시에 대한 시험 문제를 풀어 30점을 맞았다는 이야기가 있다.
김현승은 <신앙을 시 속에 감춰놓은> 시인이다. 방황과 갈등이 고통스러워 병까지 났다. 숭실대 채플시간에 기도하다 세상을 떠났다. 젊어서 하나님과 교감 없이 지내다 큰 병을 얻고 <하나님을 지식(인식)으로 찾았구나> 깨닫게 된 시인이다.
목월은 시 속에 신앙을 넣었으나(후기 시에 특히), 어머니가 훌륭하셨다. 마지막 시집 <크고 부드러운 손>에 이르러 속에 신앙이 다 들어 있다.
염상섭 연구의 최고 권위자 신동욱 박사가 <의미공간><의미구조>란 말을 그 때는 잘 쓰지 않을 때여서 이상하다고 하였다. <초월적 본체>란 말은 두진의 시나 산문에 들어있는 말이다.
소설의 자아 - 서사적 자아
시적 자아 - 서정적 자아
우리는 시적 화자란 말에 길들여져 있다.
개울을 건너는 것과 강을 건너는 것은 다르다.
개울을 건너가면서 강을 건너는 것처럼 해선 안 된다.
목월과 두진을 결합해서 논문을 한 편 쓰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