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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상 청소부
이 성 보
동상 주위를 왜바람이 불고 있었다. 등줄기가 몹시 가려웠다. 건조주의보가 며칠 째 발효된 채 바람만이 기세등등했다. 엄습해온 무기력증에 온종일 감금될 것 같은 날, 내 발이 닿는 곳은 광화문 네거리에 있는 충무공 동상 앞이었다.
가만히 서서 빛나는 동상을 우러러 봤다. 언제 봐도 의연하게 서 있는 동상이 좋았다. 장군의 눈초리가 매섭게 보여 왔다. 장군의 긴 칼이 도시의 어수선함과 후손들의 아수라장을 금시라도 두 동강내려는 듯 꿈틀대고 있었다. 하기야 나무라다 못해 혼을 내주고 싶은 심정일 거야. 일순 혼비백산한 도시의 매연과 소음들이 부리나케 달아나고 있었다. 주위의 모든 것이 무릎을 꿇고 넙죽 큰 절이라도 올릴 듯이 근엄한 순간이었다. 내 귓전엔 장군의 칼에 새겨져 있다는 친필 검명(劍銘)이 웅장한 외침으로 들려왔다. 마치 한산도 진중에서의 승전보를 단숨에 알리기 위하여 쏜살같이 달려오고 있는 파발마처럼.
‘삼척경천산하동색 일휘소탕혈염산하 (三尺敬天山河動色 一揮掃湯血染山河)’ -석자 되는 칼로 하늘에 맹세하니 산과 물이 떨고 한번 휘둘러 쓰러버리니 피가 강산을 물들인다.’
저 칼이야말로 장군께서 항상 벽에 걸어두고 보시면서 정신을 가다듬으시던 칼이었다. 무기력에 빠져드는 날일수록 이곳에 와서 장군 상을 올려다보며 나 또한 장군님의 기품 중 만분지일이나마 닮고 싶어졌다.
아니, 나는 아직도 그 할아버지를 기다리고 있었다. 할아버진 언젠가 여길 다시 찾아오실 것만 같았다. 더 푸른빛을 띤 오후의 하늘이 동상 위를 지나고 있었다.
그날이 언제쯤인지 모르지만 꽤 오래 전이었다. 나보다 먼저 두 노인이 와 계셨다. 고희를 넘기신 듯 보이는 노부부였다. 할아버지는 힘겹게 끌고 온 철제사다리를 동상 주위에 걸쳐놓고 있었다. 할머니의 부축을 받으며 동상 위를 살금살금 기어오르고 있었다. 기어오르는 모습이 아주 불안스러웠다. 동상의 몸체에 반도 못 올랐지만 노구답지 않게 동작은 아주 민첩했다. 이내 할머니에게 건네받은 수건으로 동상을 정성스럽게 닦기 시작했다.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서 동상에 묻어있는 먼지와 때를 열심히 닦아내는 것이었다. 할아버지가 동상을 닦고 있는 동안 할머니는 동상 주변을 깨끗이 쓸고 동상기단과 주변의 화초를 깨끗이 닦고 있었다. 땀을 펑펑 흘리시던 노부부는 너무나 익숙하고 열심인 동작이었다. 아마도 청소용역업체에서 고용된 직원인 걸까. 별 의미부여를 하지 않고 잠자코 있는 찰나, 호각소리가 길게 울려 퍼졌다. 이편으로 울려 퍼진 금속성의 그 소리는 나의 예측을 완전히 뒤바꿔놓았다.
"할아버지, 할머니, 이제 제발 그만 두세요. 벌써 몇 번째입니까?"
순찰 중이던 관할 파출소 순경들이 이 광경을 목격한 후 그들에게 다가가 마구 꾸짖고 있었다. 허나 그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하던 일을 그만 둘 태세가 아니었다.
“훌륭하신 분을 흠모하는 것도 좋지만 여긴 국가기간시설과 다름없습니다. 이제 좀 참으세요. 할아버지. 우리 선에서 그냥 끝낼 수 없는 일이라고 몇 번이나 말씀드렸잖아요.”
젊은 순경들은 귀찮다 못해 차라리 그들을 달래는 투였다.
“다음에 또 이러시면 벌금과 구류처분을 각오하셔야 합니다.”
하지만 그 정도의 엄포만 놓을 뿐 이내 돌아가는 순경들의 행동 또한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대체 어찌된 영문일까. 나는 그들에게 다가갔다.
그들은 어느새 새까맣게 변해버린 장갑과 수건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옷에 묻은 먼지를 털어내고 마주 서서 묵념을 하기 시작했다. 잠시간 묵념을 끝낸 그들이 그 자리를 뜨려는 사이, 나는 다그쳐 물었다.
“할아버지 동상청소는 왜 하십니까? 그냥 두시면 관할 기관에서 알아서 할 텐데 왜 몸소 수고를 하시는지요?”
가는귀가 어두우신지 내 물음에 대해선 아무런 답변도 없었다. 할아버지는 고상한 웃음만 나에게 던질 뿐 끝끝내 아무런 대답을 주지 않았다. 싱긋 웃는 밝은 웃음이 답이었다고나 할까. 할아버지는 말과 웃음이 헤프지 않은 아담한 얼굴모양이었다. 뒷모습은 마치 몸차림이나 행동을 삼가는 선비처럼 보였다.
며칠 후 나는 다시 그 시간 즈음에 이순신 장군상을 찾았다. 역시 첫날에 보았던 바와 다름없이 그들은 먼저 와 있었고 동상 청소에 여념이 없었다.
할머니의 부축을 받으며 할아버지는 철제사다리를 타고 오르고 있었다. 동상 주위는 이들 노인의 동상 닦는 소리와 숨 가쁜 호흡만이 울려 퍼지며 하오의 정적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또 이를 보고 나타날 순경들이 훈계를 하고 갈 터인데 안타까운 순간이 흐르고 있었다. 나는 차라리 순경들이 나타나지 않았으면 하는 솔직한 바람이 가슴 속에서 맴돌았다. 첫날에 보았던 바와 다름없이 그들은 무사히 일을 끝낸 후 또 묵념을 드리고 있었다. 대관절 누구를 위한 묵념이란 말인가. 순국선열을 위한 건 아닐 테고, 그러니까 그들에겐 동상은 물론 그 주변을 말끔히 청소한 후 어김없이 묵념을 올리는 게 일의 마무리였다. 일순 나는 그들을 바라보면서 밀레의‘만종’을 연상했다. 그 그림은 하루 일을 마친 농부 부부가 교회 종소리를 들으며 기도하는 평화로운 모습이 아니란다. 실제로는 배고픔을 참지 못해 죽은 아이에 대한 슬픔의 표출이며 아이를 묻기 전에 천국으로 가기를 기도하는 모습이란다. 그렇다면 필경 노부부에게도 만종의 그림처럼 어떤 사연이 숨겨져 있지 않을까. 바구니 속에 씨감자가 아닌 아이의 시신이 들어있었듯이 필시 말 못한 어떤 사연이.
첫날에 대했을 때처럼 여쭈어봤자 대답이 없을 게 뻔한데 나로선 두 번째 날엔 그냥 물끄러미 바라만 볼 수밖에 없었다. 노부부의 곡진한 사연이 무척이나 궁금했지만 그들의 신성한 행적 앞에 이러쿵 저러쿵 재촉하는 내 자신이 어쩜 경박스럽게 비쳤다고 할까. 그 날엔 더 이상 알려고 하지 않고 궁금함만 가슴에 담아둔 채 돌아섰다.
세 번째엔 내가 노부부가 나타날 시간보다 먼저 와 기다리고 있었다. 오늘은 약주한 잔 건네 올리기 위하여 소주와 오징어 안주까지 미리 준비해놓았다. 할아버지는 이전의 시간보다 훨씬 늦게 나타났고 할머니는 함께 오질 않았다. 어쨌든 오늘엔 어떻게 해서든지 할아버지와 얘기를 나눌 작정이었다.
“오늘은 왜 혼자세요?”
사다리를 타고 올라서는 할아버지를 부축하면서 나는 큰 소리로 물었다.
“……”
할아버지는 역시 묵묵부답이었다. 나는 할머니가 하던 일을 대신 맡고 있었다. 화초에 묻은 먼지더미를 털어내고 동상주변을 빗자루로 쓸어내면서 쓰레기들을 모아나가는 일이었다. 할아버지는 연신 동상에 묻어있는 때를 닦아내는 데 정신이 없었다. 동상을 평소보다 더욱 가까이에서 바라다보니 생각 이상으로 부식현상이 심각했다. 풍파에 찌든 때와 차량의 매연, 그리고 새의 배설물 따위와 빗물에 의한 백화현상으로 인하여 본래의 빛깔을 되찾기엔 아무래도 무리였다. 전문업체에 의뢰해 정밀청소를 해야만 가능한 일로 보였다. 시에서는 해마다 먼지세척 위주로만 동상청소를 진행한다고 하는데 그보다 특수약품과 고압세척기를 동원해야만 먼지와 물때에 찌든 동상의 이물질을 완전히 제거할 것으로 여겨졌다. 광택제 한 가지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할아버지는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열심히 닦아내고 있었다. 제법 긴 시간이 흘렀다.
“젊은이는 왜 여길 찾는가?”
언제 끝내고 내려왔는지 등 뒤엔 할아버지가 서 있었다. 그리고 이제야 내가 대화할 자격자라고 여기셨는지 나에게 말씀을 건네셨다.
“아 네, 할아버지에 비하면 자주 오는 편도 아니죠. 뭐,”
나는 엎드려 있던 몸을 벌떡 일으킨 채 머쓱한 듯 머릴 긁으며 대답을 했다.
“할아버지, 잠깐 이리로 와 앉으시죠. 이제 좀 쉬었다 하셔야죠.”
나는 할아버지를 아주 정중히 동상 뒤편 기단으로 모셨다.
“그 사람은 허리디스크가 도졌다네. 하기야 쉬운 일이 아니었지. 심장질환수술을 받은 지 얼마 되지도 않은 몸으로 전국을 따라 다녔으니 몸 져 누울 만도 할 일이지. 그렇지, 힘든 일일 수밖에 없었어.”
할아버지는 한숨을 크게 내쉬고 있었다. 나는 기다렸다는 듯이 종이컵을 건네면서 양손으로 술을 따라 올렸다. 나는 할아버지의 다음 얘기에 잔뜩 귀를 조아렸다.
“그렇다네, 죄 많은 몸이라 여태껏 근 6년간 틈나는 대로 전국에 있는 순국선열 동상이 있는 곳이면 어김없이 찾아가 동상 청소를 하는 몸이 되었다네.”
근 6년 동안 빠짐없이 전국의 선열 동상을 찾아다니며 동상 청소를 했다? 나는 의아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이내 말을 이었다.
“왜 하필이면 힘든 동상 청소입니까? 그보다 손쉬운 일이 많이 있을 텐데요.”
“그랬지. 꼭 동상 청소였어야만 했어,”
어느덧 시간은 해질녘으로 다가가고 있었다. 오후의 태양은 아직도 구름자락에 가려 제 빛깔을 잃은 채 흐린 빛만을 내뿜고 있다. 건조기후는 해거름이 다 되도록 마른 공기와 공모하여 온종일을 군림했다.
왜, 굳이 동상청소이여만 했는지 그 이유를 알고 싶은 나에게 할아버지는 계속 이어 나갔다.
“일제 때 징병으로 끌려갔던 게 내내 마음에 걸렸어, 해방되기 수년 전 당시 어린 나이였지만 일본으로부터 군 소집 통지서를 받게 된 나로선 강제로 일본군에 편입되어버렸어. 징병으로 끌려간 우리들이 무엇 때문에 일본제국주의를 위하여 총 칼을 들고 나서느냐 며 펄펄 뛰고 반대했지만 일본총독부엔 통할 리가 없었지. 결국 만주에서 복무하면서 누구를 위하여 싸워야 할 전쟁인지도 모르면서 일본군의 임무완수를 위하여 ‘천황폐하 만세’를 부르짖으며 설쳐 날뛰었지. 큰 전과를 올리게 되면 고국으로 귀환시켜준다는 얄팍한 술수에 나는 두 눈이 어두워졌던 게야. 아마도 내 총칼로 인해 죽어간 독립군만 해도 헤아릴 수 없을 정도가 되었어.”
할아버지는 우여곡절을 겪었던 자신의 지난 기억들을 조용히 읊조리고 있었다.
“물론 일본 패망 후 광복 이듬해에 부산항을 통해서 무사히 귀환한 것만으로도 아주 고맙게 생각해야겠지만 말이야. 처음엔 징용으로 끌려가 전쟁과 관련된 일을 했던 동료들보다는 훨씬 더 나았다는 생각을 하며 안위했었지. 억울하게 피해를 입은 동료들의 한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어. 활주로를 만드는 공사에 투입되거나 탄광에 가서 광물을 캐는 일이든가, 아니면 무기를 만드는 군수공장에서 일을 하든가. 가장 재수 없는 것은 전선과 가까운 곳에서 포탄 나르기를 도맡았던 자들이었지. 그리고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떨어져 많은 우리 동료들이 죽게 된 것에 비하면 그렇게 살아 돌아왔다는 것만으로도 고마운 일로 여기며 애써 잊으려고 했지만 그게 아니더군, 나이가 들수록 잊어야 할 것이 더욱 뚜렷하게 정반대로 다가오기 시작했어. 징병으로 끌려가 일본군 생활을 한 게 아마도 눈을 감는 날까지 마음의 짐이 되어 짓누를 것만 같았어, 어떨 때엔 가위눌림의 잠자리도 부지기수였어,”
흐릿한 오후의 햇빛은 회오하는 노인의 얼굴에 피어있는 검버섯 속으로 조용히 스미어 내렸다. 할아버지는 소주 한 병을 비워냈다. 나는 새 잔을 채워 올렸다.
“그러다가 나는 하던 사업을 팽개치고 전국에 있는 순국선열의 동상만을 찾아다니기로 작정했어. 그것만이 내 지난 잘못을 비는 길이라 다짐했고 부지런히 발길 닿는 대로 어디든 찾아 나섰지. 그러던 중 무턱대고 찾아가 참배만이 능사가 아니란 생각이 들기 시작했어. 깊은 속죄를 하려면 마음과 같이 몸도 가만히 있으면 안 된다고, 이렇게 전국에 있는 순국선열 동상 어디든지 찾아다니며 청소를 하게 되었던 거야. 독립기념관은 거의 매달 찾아갔고, 유관순 열사. 안중근 이봉창 의사, 파고다 공원에 있는 3.1운동 기념부조, 넓게는 단군상, 세종대왕상 등 전국에 있는 동상 어디든 거의 내 손이 안 닿은 곳이 없을 정도였어. 내 아내 역시 나의 처지를 알고 함께 동참해준 것만도 너무나 고마울 따름이야. 물론 나 때문에 디스크를 심하게 앓게 되어서 뵐 낯이 없을 지경이지만”
동상 청소를 꼭 해야만 하는 할아버지의 뜻을 나는 이제야 알 수 있었다.
“동상 청소라는 게 나의 속죄 수준에서 벗어나 차츰 새로운 사실에 눈을 뜨게 해주었던 게 한편으론 고맙기도 했어.”
새로운 사실이 무엇인지 나는 아주 궁금했다. 그렇다면 혹 명화 만종에 담긴 바구니 속 내용물 같은 것이라도 있단 말인가?
“유럽의 문화선진국들은 아주 오래 전부터 동상을 세워왔는데 그들에게 동상은 국민 스스로의 교육과 긍지를 심어주는 한권의 교과서로 우뚝 서길 시작했어. 프랑스 파리 한복판에 있는 잔다르크 동상 앞은 매년 전국에서 올라온 수많은 청소년이 잔다르크의 나라사랑 정신을 되새기며 국토순례 대행진을 시작하는 곳이 되어 버렸다네. 그리스와 로마가 세계사 속의 주인공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던 것도 국민들을 역사속의 주인공으로 만들어주는 동상문화가 있었기 때문이야. 이제 우리도 이 땅의 민족을 역사 속의 주인공으로 만들어 줄 동상문화운동을 새롭게 펼쳐보여야 할 것이야.”
동상에 관한 조예가 아주 깊은 할아버지는 마침내 이순신 장군 동상에 관한 자신의 견해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여기 광화문 네거리에 위치해 있는 이순신 동상이야말로 얼마나 많은 입방아를 감당해야 했던가? 물론 박대통령이 가장 존경하고 흠모하는 인물이 바로 이순신 장군이었어. 하지만 그 속에는 박대통령의 여러 가지 정치적 의도가 담겨있다는 해석들이 분분하기도 했었지. 이를 두고 혹자는 한국사회의 파시즘과도 밀접하다고 얘기했지만 말이야. 그런 의미에서 박 정권 말기에는 세종로에 있는 이순신 장군 동상 철거운동이 서서히 불붙기 시작,했,었,어.”
그런데 이 순간 할아버지의 눈가엔 눈물이 배여 갔다. 이순신 장군 동상 철거운동이란 말을 스스로 꺼내놓고서 마치 못할 말을 한 양 갑자기 말문을 이어가지 못한 채 잠시 주춤했다. 나로선 아주 의아스러웠다. 할아버지는 연거푸 두 잔의 술잔을 비웠다.
“아 여기에서도 동상 철거 운동이 있었던가 보죠?”
이번엔 내가 먼저 말문을 열었다.
“10.26이 있기 1년 전부터 이미 이곳 주변은 호시탐탐 철거를 노리는 이순신 장군 동상철거대가 조직되어 퍽이나 당국의 애를 태웠었지.”
“왜 하필이면 철거대상이 이순신 장군동상입니까? 선열 조상의 인물 중 으뜸가는 인물이지 않습니까? 이순신 장군이 뭐 어떻다는 겁니까?”
다소 흥분된 어조로 나는 다그쳐 물었다.
“박정희가 이순신의 신격화를 통해 자신이 민족을 위기에서 구해낸 동시에 위대한 민족문화를 부활하여 발전시키고 있다는 자신과 이순신을 동일시한다고 보았던 게 그 첫째 이유였지.”
“그건 너무 일방적인 해석이 아닐까요?”
“세종로라고 명명된 거리에 당연히 들어서야 할 세종대왕보다는 무관출신의 이순신을 택하였던 게 거슬렸던 얘기이지. 나아가서 박정희는 충무공으로 상징되는 호국정신을 북한의 주체사상을 압도하는 하나의 이데올로기로까지 생각하게 되었다는 논리라네. 논리의 비약인지 모르지만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철거추진대가 조직되는 계기가 되었었지.”
나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아 머리를 내저었다.
“그뿐만이 아니었어. 이충무공 동상에 대하여 거론되는 질문들이 지금까지 많이 쏟아져 나오고 있는 중이야. 가령 왜 칼을 오른손에 차고 있는가? 차고 있는 칼이 일본도가 아닌지? 이순신 장군은 활의 나라 조선의 장군답게 매일 활을 쐈다면서 만일 동상을 새로 만든다면 칼보다는 활과 화살을 손에 쥐고 있는 게 옳다느니, 갑옷도 중국식 피박형 갑옷이라며 철저한 고증을 거쳐 동상을 다시 제작할 필요가 있다는 등 참으로 말들이 많았었지. 입으로는 호국영웅이라고 떠들면서 왜 왜놈 칼을 쥐어놓았는가? 천하의 고얀 놈들! 이라고 장군께서 연방 호통이라도 칠 듯 그런 문제점들이 마구잡이로 쏟아져 나왔었지. 물론 이순신 장군이야 엄연히 왼손잡이가 아니었고 말구, 칼을 오른손에 들고 있으면 항장(降將)의 모습이겠지만 가까이 적을 대면해서 왼 손에 차고 있는 칼을 막 뽑으려는 동세의 형상을 지니도록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네, 적을 물리친 역사의 승리자의 기념비로서 특히 오른손은 그 인물의 역할과 의지를 대변하는 상징적 의미 때문에 칼을 오른 손에 차게 한 연유라는 게야.”
동상에 관한 해박한 지식을 늘어놓는 할아버지는 고개를 한참이나 숙이고 있다가 마침내 자신의 심경을 피력했다.
“잘못된 동상이라도 참된 의미만은 제대로 알고 있어야 할 것이야. 포항공대 교정에는 동상을 놓을 받침대가 하나 설치되어있던데 그 대학 출신자 가운데서 노벨상을 최초로 받는 사람의 동상을 세우려고 만든 것이라네. 그처럼 동상은 젊은이들이 올바른 삶을 살기 위해 또는 큰 꿈을 꾸며 살도록 하기 위해 세우는 게 가장 옳은 뜻이 아닐까. 이렇게 대단한 의미를 가지는 동상들이 함부로 세워지지 않고 제대로만 세워진다면 그 효과는 이루 말할 수 없을 게야. 세우면 생명체가 되는 동상은 허무는 것이 세우는 것보다 더 힘들다지 않던가.”
이제 돌아갈 시간이 되었음인지 할아버지는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아직도 할아버지는 함께 못 나누었던 얘기들이 있는 듯 늦은 오후의 햇빛을 밟으며 돌아서는 모습이 아주 쓸쓸하게 보였다. 나 또한 할아버지가 말문을 흐리면서 눈가에 눈물자국까지 머물던 그 대목이 마음에 걸렸다. 하지만 저렇게 동상을 사수하는 할아버지가 이 땅에 아니 내 곁에 계신다는 것이 너무나 자랑스러워졌다. 다음번에 다시 만날 생각을 하니 내 가슴속은 뿌듯함만이 채워져 왔다.
그 후론 나는 갑자기 불어닥친 직장의 복잡한 업무로 하여 동상 찾는 일에 공백이 생기고 말았다. 혼자서 수고하시며 나를 기다리실 할아버지의 모습이 자꾸 안쓰럽게 떠올랐다. 이다음엔 꼭 찾아뵙겠다는 변명만을 되새기면서 그것도 한 번도 아닌 몇 번 연속으로 동상에 가는 일을 빠뜨리고 말았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저녁상을 물리고 난 후 T.V에서는 맥아더 동상철거를 둘러싼 보수와 진보진영간의 토론장면이 방영되고 있었다. 양진영간의 토론은 너무나 가열되고 있었다.
맥아더 동상 철거를 주장하는 진보단체들은 맥아더가 우리를 분단시키지 않았다면 우리는 북한과 싸울 필요가 없었다. 더구나 맥아더는 한반도에 원자폭탄을 26개나 떨어뜨리려고 했다. 맥아더야말로 일제가 약탈해간 우리 문화재 10만 여점에 대한 반환요구를 미국에 대한 일본의 감정이 악화될 수 있다는 이유로 거부했다. 맥아더는 사실상 우리나라에 별로 관심이 없었다. 그에게 있어 한국보호는 정치적 야망을 채워주고 일본을 보호하는 데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이러한 인물을 우리는 은인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의 결정 때문에 6.25가 일어난 것은 따지지도 않고 인천상륙작전의 성과에 대해서만 칭찬하고 받들 필요성이 없다. 맥아더에 대한 진정한 재평가도 이루어지지도 않은 채 그리고 그 당시의 미국은 점령군이었지 해방군이 아니라는 논리였다. 따라서 동상철거는 반공주의와 제국주의의 상징을 깨뜨리는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었다.
반면에 보수단체들은‘맥아더와 미국이 없었다면 오늘의 한국도 없다.’며 ‘동상철거는 대한민국의 역사를 부정하고 한미동맹을 뒤흔드는 행위’라고 반박했다. ‘맥아더가 양민학살을 지시하였다거나 한반도를 갈라놓는 분단의 원흉’이라는 증거는 그 어디에도 없다. 그렇다면 ‘너희들은 맥아더 동상철거를 외칠 것이 아니라 바로 북한 인민들의 고통과 원성으로 세워진 3만 5천여 개에 달하는 김일성 동상철거부터 외쳐야 할 것’이라고 공격했다.
그리고 이제 며칠 후면 인천자유공원에서 맥아더 동상철거와 사수에 관한 보수와 진보진영간의 폭력사태가 더욱 격렬하게 부닥칠 것은 불 보듯 빤한 일이라는 사회자의 멘트도 이어졌다. 그러고 나서 T.V는 또 다시 농민시위광경을 비추어 주고 있었다. 온통 도로엔 죽창과 각목, 벽돌, 쇠파이프가 즐비하게 늘려있었다. 언제쯤 이 땅에선 저 따위의 폭력시위가 사라질는지.
대학재학 중 나는 의무경찰에 자원입대하여 지방경찰청 기동단 제 1기동대 3중대에 배치 받아 복무했다. 그 시절의 끔찍한 기억들은 지금도 나를 주눅 들게 하기엔 충분했다. 제 1기동대는 구호부터 무시무시한 곳이었다. 1중대인 선봉중대의 구호는 이러했다. ‘우리는 가장 중요한 시기에 가장 중요한 곳에서 가장 중요한 임무를 수행한다.’ 2중대인 최강사복중대의 구호는 ‘제일 격렬하며 난폭한 상황의 중심엔 언제나 우리가 있다. 그 극한 상황 속에서 엄청난 기동력으로 극력 시위대를 검거하는 우리야말로 최강이다.’였고 3중대인 특공중대는 ‘우리가 아니면 누가 하리. 병처럼 깨질진 몰라도 캔처럼 찌그러지진 않는다.’였다. 시위진압은 거칠 날이 없었다. 기동대 복무기간은 나에게 숱한 아픈 상처를 남긴 세월이 되었다. 올림픽을 앞둔 때의 경비근무는 상부의 잦은 점검 및 감독으로 하여 우리들을 짜증나게 했다. 올림픽은 민족적 대행사이니 이제부턴 각종 시위도 없이 당분간 평온이 유지될 것이라는 막연한 예감이 들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은 나 혼자만의 행복한 착각이었다. 나는 당초의 예상과는 달리 대학 개학과 동시에 매일 시위 현장으로 출동을 가야만 했다. 특히 6.10항쟁 이후는 대정부시위가 극에 달했을 때이므로 매일 새벽같이 출동하였다. 시위현장에 매달리다가 새벽 3시가 넘어서야 부대로 돌아오곤 했는데 부족한 잠을 보충한답시고 달리는 버스에 짐짝처럼 실린 채 이동하면서 잠을 자기가 일수였다. 시위현장에선 숱하게 날아오는 돌멩이와 화염병을 피하는 것도 큰일이었으나 몇 시간의 휴식도 없이 시위군중과 대치하는 것은 더 큰 고문이었다. 매일 시위를 막으러 가는 것이 아니라 아예 시위 군중에게 맞으러 간다는 편이 합당했다. 날로 과격해가는 시위대 앞에서 경찰은 맡은 바 직분에 묵묵히 충실할 뿐이라며 아무런 조취도 취할 줄 몰랐다. 하루 종일토록 착용한 방독면과 최루탄 냄새 때문에 호흡기 장애를 겪는 등 하루도 부상당한 대원이 없는 날이 없었고 우리들은 날이 밝으면 또다시 닥쳐올 시위 때문에 공포의 밤을 지새우며 전율해야만 했다. 시위학생들이 옥상에서 아래로 투척한 돌멩이에 머리를 맞는 중상을 입고 국립경찰병원에서 뇌수술을 받았으나 숨을 거두는 대원들이 허다하게 생겨났다. ‘시위대학생이 죽으면 열사가 되고 의경이 죽으면 개죽음이 된다.’며 많은 동료들이 장례식장에서 절규하고 오열하는 목소리들이 지금도 귀에 생생했다. 최루탄은 이미 사라졌지만 시위대가 쇠파이프를 가지지 않으면 진압대는 방패와 곤봉을 가질 이유도 없다. 얼마 전에 전국의 전. 의경 부모들이 평화적인 시위문화를 호소하는 집회를 열었다는데 폭력시위야말로 민주주의를 능멸하는 불법행위인 줄 다 알면서도 왜 지금도 끊임없이 계속 되어야만 할까.
맥아더 동상철거 문제 때문인지 나는 갑자기 할아버지를 만나고 싶어졌다. 내일이면 기필코 이순신 장군 동상 앞으로 가보리라 다짐했다. 맥아더 동상 철거에 대해서 어떠한 견해를 갖고 계신지 묻고 싶었고 그 동안의 근황도 아주 궁금해져 왔다.
다음날 하던 업무도 내팽개치고 동상 앞에 가서 온종일을 기다렸건만 할아버지는 끝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또 다음날도 기다려봤지만 마찬가지였다. 마지막인 양 생각하고 다음날에 한 번 더 찾아가 기다린 날이었다. 역시 종무소식이었다. 나는 불현듯 이상한 예감이 들기 시작했다. 오늘은 인천상륙작전 55돌을 앞두고 맥아더 동상 앞에서 보수와 진보 간에 대 격돌이 있는 날이 아닌가. 혹시 할아버지께서 맥아더 동상에 가 계신 것은 아닐까, 나는 인천 자유공원으로 향했다. 아마도 동상철거반대론자이시고 그리고 평화주의자이신 할아버지께선 분명코 거기에 가 계실 것이리라. 승용차가 달리는 동안 나는 내내 폭력 시위대 속에서 둘러싸여 고통을 겪고 계실 할아버지의 모습이 자꾸 불길하게 어른거렸다. 가속페달을 더 세게 밟으며 나는 제발 할아버지께서 무사하시기만을 바라고 있었다.
인천자유공원에는 예상했던 대로 시위행렬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한쪽에서 ‘동상타도, 동상타도,’라고 외치면 또 다른 쪽에선 ‘동상철거결사반대, 동상철거결사반대’라고 소리치며 아수라장이었다. 이곳에서 노인을 찾는다는 게 도저히 무리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나는 닥치는 대로 인파 속을 헤집고 다녔다. 인천상륙작전참전전우회와 황해도민회,자유개척청년단,자유시민연대회원 등 철거반대 단체 회원들은 맥아더 동상 비둘기 광장에서 ‘동상철거반대 궐기대회’를 열고 있었다. 또 다른 쪽의 우리민족연방제통일추진회의와 친북단체회원 등 철거지지단체 회원들은 ‘동상타도대회’를 열면서 고성능마이크를 들고 와서 서로의 소리들을 방해하며 온통 난리법석이었다.
동상철거반대회원들은 집회를 열고 맥아더동상주변을 둘러싸는 인간띠잇기 행사를 벌이려다 이를 막는 경찰과 격렬한 몸싸움이 전개되고 있었다. 반면에 철거지지회원들은 민주노총까지 가세했으나 동상철거 반대세력보다는 훨씬 못 미치는 숫자였다. 세 싸움에 밀린 동상철거지지단체였지만 ‘동상 끌어내리기’를 강행할 태세였던지 동상으로 돌진하기 시작했다.
경찰은 공원 주위에 배치해놓은 많은 병력을 양 단체 회원들 사이에 집결시켜 양측의 물리적 충돌을 차단하려고 했다. 철거반대회원들은 철거지지단체들이 동상 곁으로 돌진을 못하게 하기 위하여 자기들이 먼저 동상 곁에서 에워싸려고 했지만 경찰 방어선돌파가 쉽지 않았다. 마침내 양측 간의 치열한 몸싸움과 경찰과의 방어벽으로 3군데 패로 갈라진 채 처음엔 페트병, 계란 등이 던져지기 시작했다. 갑자기 세의 수세에 몰린 철거지지단체들이 대나무와 몽둥이를 들고 와서 경찰과 철거반대단체들을 가격하면서 폭도로 돌변하기 시작했다. 이에 질 새라 철거반대단체들도 잠자코 있을 리 없었다. 쇠파이프와 돌멩이질이 격렬하게 오고 가고 있었다. 이 과정에 머리와 얼굴을 다쳐 부상을 당한 시위자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대나무 창에 눈을 찔려 피를 흘리는 전경대원과 취재 중이다 부상당한 기자가 후송을 기다리는 사이 구급차의 사이렌 소리는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그러던 중이었다. 집회 참가자가 휘두른 쇠파이프에 전경 하나가 방석모의 안구보호용 아크릴이 깨지면서 머리를 다치는 참사가 발생했다. 전경은 의식을 잃고 쓰러졌고 시위자들의 발길에 밟혀 일어날 줄을 몰랐다. 참으로 안타까운 순간이었다. 그 찰나였다. 누군가가 재빠르게 뛰어 들어와 전경을 몸으로 감싸 안으며 시위자들의 발길에 대신 밟히고 있었다. 그러면서 전경을 일으켜 업고 난리 통을 벗어나려고 했다. 그러나 역부족이었다. 또다시 밀려드는 시위대의 발길에 밟혀 전경을 업고 피해 다니던 그 사람은 쓰러지고 말았다. 다행히 전경은 의식을 되찾아 시위대열 속에서 벗어났지만 그 사람은 시위대 속에 가려 더 이상 보이질 않았다. 모자를 눌러쓰고 마스크를 했기 때문에 누가 누군지 분간조차 곤란했다. 구급차에 실려 가는 부상자들. 하지만 보수단체들은 진보단체부상자들을 태운 구급차의 후송마저 저지하며 출구에서 연좌시위를 벌이며 길을 막기도 했다. 아마도 전경을 구하고 쓰려졌던 그 사람도 저 구급차에 실려 있을 터인데. 나로선 발만 동동 굴리고 있을 뿐 무엇을 해야 할 지도 몰랐다. 아니 할아버지를 찾는 일조차 포기하는 게 더 나을 성 싶었다.
시위 현장에서 돌아온 나는 며칠 동안 식음마저 전폐한 채 심한 무기력에 빠져 있었다. 그리고 할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은 내 가슴 속에서 떠날 줄을 모른 채 공허함만이 그려지고 있었다.
그 일이 있고부터 이듬달이 되었다. 허전함을 달래려 오랜만에 이순신 장군 동상을 찾아갔다. 그런데 할아버지가 아닌 할머니가 평화로운 자세로 동상기단에 물끄러미 앉아 계실 줄이야. 나는 너무나 반가웠다. 절 할 듯이 머리를 숙이며 그동안의 안부 묻기에 급급했다.
“할아버진 요즘 어떠세요? 그동안 왜 안 오셨죠? 잘 계시겠죠? ”
할머니는 얇은 웃음을 건네면서 내 손을 잡았다. 그리고 조용히 속삭였다.
“네, 할아버진 잘 계시고말고요.”
할머니의 눈가엔 눈물이 이슬처럼 맺혀있었다.
“젊은이를 보는 날부터 가슴에 묻은 그 아이 생각 때문에 할아버진 얼마나 기뻤다고요.”
“가슴에 묻은 아이라뇨?”
“20년도 더 되었죠. 그 애는 경찰이었죠. 여기 이순신동상철거대가 조직되었을 때 그 동상 철거를 막는 임무를 안고 철거대원들과 격돌하다가 그만 순직하고 말았어요.”
아, 그랬구나. 동상청소를 끝낸 후에 올리신 묵념이 바로 아들 때문이었고 그렇기 때문에 그날 할아버지께선 말문을 흐리셨구나. 하지만 그 슬픈 상처를 안고 살아오신 노부부가 너무나 우러러 보였다. 나는 애써 태연한 채 할아버지에 대한 근황만을 여쭐 뿐이었다.
“그렇다면 할아버진 언제쯤 이곳에서 뵐 수가 있을까요?”
“......”
할머니는 눈을 감으신 채 말문을 닫았지만 엷은 입술 새로 가까스로 나지막한 속삭임이 흘러나왔다.
“예, 할아버진 인천 자유공원 맥아더 동상 시위현장에서 그만 돌아가셨어요.”
“돌아가셨다고요? 그 시위현장에서, 아니 어떻게 말입니까?”
그러니까 그날 그 시위현장에서 전경을 구했던 이가 바로 할아버지였다. 어느 순국선열보다 더 장렬한 죽음을 할아버진 택하셨던 것이다. 이젠 할아버질 뵐 수가 없다는 사실이 나로선 도무지 실감이 나지 않았다. 그렇지만 할아버진 너무나 자랑스러웠다. 나는 머리를 숙여 눈물을 삼키려고 했다. 하지만 옷소매로 가려도 촉촉이 젖어드는 눈물자국은 어쩔 도리가 없었다.
“할아버지는 동상 앞에서 기다리고 있을 그 젊은이가 보고 싶다고 하시면서 눈을 감으셨어요. 장례를 치른 후 꼭 그 말을 전해주어야 할지 망설이다가 결국 이렇게 주책없이 젊은이를 기다려 왔어요.”
나는 힘없이 앉아 계신 할머니의 등 뒤편 동상 너머를 우러러봤다. 속을 시원하게 해갈 시켜 줄 빗줄기가 그리웠다. 단비는 아니지만 겨우 먼지잼이라도 한 줄기 내려 주었으면 좋으련만, 이리저리 방향도 없이 막 부는 바람만이 동상 주위를 스치고 가는데 나는 등줄기가 몹시 가려워왔다.(끝)
첫댓글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