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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의 교육은 다양하다:
미국의 교육 시스템은 미국을 방문한 사람들을 큰 혼란에 빠뜨리게 합니다. 한국이나 일본, 독일, 프랑스와 같은 나라는 공교육이 중앙정부의 몫이고, 교육과정(커리큘럼)도 중앙의 계획에 의해 산출되고, 교사는 교육내용을 매개하는 역할을 맡고 있으며, 학생들은 거의 예외 없이 균일적인 수업의 수용자인 나라들의 구민의 눈에 비친 미국의 교육은 혼란스러운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미국의 학교에는 그와 같은 중앙정부의 통제적인 교육의 특징이 거의 존재하지 않습니다. 미국의 교육은 주 정부, 곧 지방정부에 의해 통제되고 있습니다. 또한 커리큘럼이 다채로우며 교사의 창조적 능력이나, 주와 도시(타운, 시티)의 교육위원회의 통제와 지역사회의 부유도와 문화적 구성 나름으로 제각기 다른 행태를 가지고 있습니다. 학생의 입장에서 본다면 그들은 서로 다른 종류의 교육내용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미국의 공적인 학교 시스템은 완전히 지방분권화 되고, 매우 다양하며, 부단히 국가와 지역의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나라의 교육 체제는 얼핏 보아서 혼돈하고 규율이 없고, 무정부 상태 같아서 기준이라는 것이 전혀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와 같은 미국교육의 다양성은 대학 교육의 현장에서도 나타납니다. 그 한 보기를 최근의 한 일간지 칼럼에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다음은 이원재 님(한겨레경제연구소장)의 글 ‘다양성과 생산성’에서 군데군데 추려 뽑은 것입니다.
<처음 유학길에 올랐을 때 이야기다. 내가 속했던 경영대학원의 MBA과정에서는 대부분의 수업을 팀별 프로젝트 수행 형식으로 진행했다. 팀 동료에 따라 성적과 졸업 여부가 좌우될 수 있었다.
학교에서 강제로 배정해 준 여섯 명의 팀 동료는 그 배경이 정말 다양했다. 미 해군 장교이며 미식축구광인, 당연히 매우 보수적인 팀원이 있는가 하면, 스페인 바스크 지방 출신의 사회주의자 컨설턴트도 있었다. 바이오 벤처시업에서 일하던 과학도가 있는가 하면, 정당에서 선거운동을 하던 팀 동료도 있었다. 서로 도무지 대화가 이어지지 않던 첫 팀 회의를 마치고 집에 들어온 순간, 그대로 거실 바닥에 드러누워 버렸다. 과연 이들과 어울려 학교생활을 무사히 마칠 수 있을까?
나중에 알고 보니, 학교 쪽에서는 일부러 서로 다른 사람들을 같은 팀에 배치했다고 한다. 생각이 다른 사람들과 소통하며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경영을 배울 수 있다는 취지도 알게 됐다. 학교 쪽 생각이 옳았다. 결국 나의 팀 동료들은 졸업 뒤에도 문제에 부닥쳤을 때 연락할 수 있는, 국적과 가치를 초월한 국제 네트워크가 되었다. (........)
세상은 점점 더 복잡해진다. 일류대학을 나오고, 전문자격증이 있고, 시험성적이 좋다고 해도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점점 더 많아진다. 같은 방식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짜내는 아이디어는 한계가 잇다. 전혀 다른 배경과 경험을 가진 사람들이 내놓은 혁신적 아이디어가 점점 더 많이 필요해진다. 다양한 경험과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이 모일수록 조직이 활용할 수 있는 문제해결 도구가 늘어나는 셈이다.
미국 미시간대 스콧 페이지 교수는 최근 낸 <다름: 다양성은 어떻게 더 나은 집단, 기업, 학교, 사회를 창조 하는가>라는 책에서 이를 통계학적으로 입증했다. 페이지 교수는 다양성이 높은 뉴욕 같은 도시가 생산성이 높고, 다양한 배경을 가진 이사가 포진한 이사회가 더 나은 결정을 내리며, 직원의 배경이 다양한 기업이 더 혁신적이라는 연구결과를 내놓았다. (.........) >
가) 비 계통적적인 미국의 학교제도;
미국의 교육제도를 더욱 알 수 없게 하는 것으로 학교의 조직과 통제의 형태가 너무나 다양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한쪽에서는 다양성과 지방자치를 요구하는가 하면, 다른 한쪽에서는 평등과 수준의 통일화를 요구하는 따위로 서로 모순된 방향을 지향하기 때문입니다. 학구는 미국의 행정조직의 가장 말단 단위이며, 이 작은 단위 조직은 관할 지방에 대해서는 물론이거니와, 국가에 대해서도 봉사할 목적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교육제도는 미국의 민주주의의 결함과 더불어 그 단점을 반영하고 있으며, 더불어 기능성과 영광을 동시에 나타내고 있다고 할 것입니다. 이와 같이 여러 면으로 서로 모순되는 모양으로 존재하는 미국의 교육제도를 간단히 소개하기는 힘듭니다. 이하 몇 가지만 단편적이나마 미국교육의 특징을 알아보기로 합니다.
나) 미국 교육에 나타난 조건적 다양성:
지식이나 재산, 물질, 도덕이라는 면에서 학교의 행동을 일률적으로 지배하는 확고한 기준이라는 것은 아무리 보아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학교의 수업시간표나 시설과 마찬가지로 이용할 수 있는 자원의 총량이나 학습 커리큘럼, 교사의 자질과 급여, 졸업 조건 등 교육정책의 온갖 측면이 50개 주와 9천의 상이한 학구 s에서 결정됩니다. 지방분권주의는 어느 면으로는 교육의 다양성과 민주적 프로세스에 대한 존중이라는 정신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다른 측면으로는 이것은 오히려 불평등과 사회적 다양성에 대한 일종의 허용을 보여준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한족에는 교육적으로 풍요한 지역사회가 존재합니다. 대개 고급 교외지역에 존재하며 거기에서는 교육세라는 고정자산세가 풍부한 학교의 세입원이 되며, 교사는 상대적으로 높은 임금을 받으며, 커리큘럼은 창조적으로 구성됨과 동시에 효과적으로 조직되어서, 학생들이 높은 수준의 성적을 얻게 되어 위신이 높은 대학에 진학합니다. 과외활동에 있어서도 넉넉한 재원이 주어져서 질이 높고 범죄나 폭력, 약물 사용이나 교칙위반 따위가 거의 없습니다.
그런가 하면, 다른 한쪽에는 그와는 상위한 지역사회가 있습니다. 경제적으로 궁핍한 도심이나 가난한 촌락사회입니다. 여기서는 노동자나 생활보호를 받는 빈곤층, 이민자, 미국에서 태어났어도 영어를 하지 못하는 시민의 자녀들이 학생의 태반을 차지합니다. 또한 세금 수입도 그 지역에서 행하여지고 있는 교육의 책임에 맞춰서 들어오질 않습니다. 학업 중도탈락자의 수가 많아 어느 도시의 인구과밀 지구는 87%에 달합니다. 그리고 주로 소수민족자, 노동조합, 종교와 인종의 집단과 같은 조직된 지역사회의 집단들 사이에서 커리큘럼이나 경비, 설치인가 및 교육의 관리통제 등에 관한 다툼이 빈번히 일고 있습니다.
비교적 소수의 미국인이 사립학교에 자녀를 보내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학이 교회가 설립한 것이어서 종교적인 확신을 가지고서, 지방의 공립학교에서의 도덕적이며 세속적인 교육내용을 혐오하는 따위 가족을 위한 교육을 실시합니다.
소수의 학교는 자기들의 자녀에게 특별한 엘리트 교육을 요구하는 지위가 높은 엘리트 가정의 아이들을 위한 ‘대안’ 교육기회도 주어지고 있습니다. 차터스쿨(Charter school)과 같은 형태의 학교들입니다.
다) 커리큘럼의 선택과 자주적인 학습:
미국의 교육 체제에서 ‘커리큘럼 선택제도가 있다는 것은 교육의 중요한 한 측면으로서의 다양성과 선택에 대한 믿음이 또 하나의 형태로 나타난 것입니다. 실상 미국의 교육자들 사이에 공통적인 전제로서는 매우 이른 교육 시기에서부터 특정한 과목을 전문화하거나 그것에 전념케 하기보다는 오히려 선택 제도가 있는 편이 젊은이에게는 더 얻는 바가 클 것이라는 것이 있어 왔습니다.
보육원이나 초등학교, 중고등학교, 공립학교나 대다수 사립학교에서도, 그리고 교사는 학생이 다양한 커리큘럼의 선택지나 방과 후 활동을 시도하려고 합니다. ‘놀이 코너’가 딸린 학습센터, 개방교실(Open school), 극히 최근에는 선택제학교 및 전문화된 성적우수자 중점학교(Magnet school)와 같은 것들이 있는 것은 모두가 교육의 다양성과 개인의 선택을 적절한 학습 양식과 커리큘럼 체계로 간주하는 가치에 대한 믿음의 한 자락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미국의 교사가 학생에게 일찍부터 전문적으로 공부하게 하려는 일은 썩 드문 일이고, 학생 쪽에서도 커리큘럼을 선택하고 여러 다른 종류의 방과 후 활동을 시도해 보는 기회가 있기를 기대하는 것입니다.
라) 자주적인 학습:
미국의 교사는 학생에게 서로 다른 방법에 의한 지식의 획득이나 학습을 하게 하려고 할 뿐 아니라, 자주적으로 학습할 것을 장려합니다. 그들은 보통 자주적인 학습을 잡단이나 단체에서의 학습 이상으로 평가하여 학생으로 하여금 자기 자신의 학습습관을 길들이고 있습니다. 미국 교실에서 채용되고 있는 교육방법은 대체로 개별 암창이나 경쟁시험, 학생에게 자신의 관점을 확실히 말하게 해서 논의를 발전시켜서 토론이나 논쟁에 관여할 것을 요구하는 따위 집단적인 토론을 즐깁니다. 또한, 자주적 학습의 가치를 지향함으로써 교사는 교육열이 강한 부모가 자녀와 함께 숙제를 하고, 리포트나 시험을 도와주고, 대학 입학원서니 취업원서 등을 기재하는 것을 도우며, 아이들이 무엇인가를 자주적으로 하려는 능력이 쇠퇴하지 않도록 합니다. 예상을 못할 것은 아니지만, 미국의 학교에서는 집단학습은 극히 드뭅니다.
마) ‘마음의 습관’으로서의 미국 교육:
미국의 학교도 다른 나라들의 학교와 같이 나라와 사람을 구별하는 역사적인 전통이나 문화적 가치, 사회적 관습을 반영하고 전달합니다. 미국은 독립, 자유, 헌법에 의한 지배를 국가적인 재산으로 선언하면서 탄생한 나라입니다. 여기서는 인사를 할 때에 악수를 하거나 포옹을 하며, 아기를 될 수 있는 한 빨리 젖 떼게 하고, 여유만 있다면 가족 각자가 별도의 침실을 가집니다. 아주 어린 아이가 있는 경우, 양친 부모가 함께 있는 가정이 있는가 하면 탁아소나 보육원에 맡기고, 베이비시터를 고용해서 일을 맡기기도 합니다. 미국인은 아이가 5,6세가 되면 학교에 보내고, 아이가 옷을 갈아입는 것으로 시작하여 자라면서 친구, 활동, 데이트 상대, 배우자의 선택 등을 제 책임 하에 하도록 합니다.
또한, 아이가 아직 어려서부터 무엇을 공부하고 싶은가, 어느 중등학교나 대학에 가고 싶은가, 어느 전문분야를 전공할 것인가 등도 스스로 선택하도록 요구합니다. 미국인은 결혼, 직업, 거주지에 대하여 어른들처럼 자기 자신이 결정하는 것이 좋은 것으로 압니다. 미국인은 사회이동을 장려하며 자기 자신의 묘지를 사고, 그리고 흔히 양로시설에서 생활하고, 고독 속에 살다가 삶을 마칩니다.
이와 같은 미국인의 독립, 자유, 개성적 표현, 이동성, 선택, 변화에 대한 애호(사랑)는 모두가 배우고 익힌 행동이며 교제상 습관입니다. 이것을 가리켜 유명한 미국의 사회학자 로버트 베라가 ‘마음의 습관(Habit of Heart)이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어느 나라나 그렇지만, 미국의 마음과 정신의 습관을 한 두 마디의 말로 간단히 정의할 수 없습니다. 대다수 미국인은 자기네 나라를 자유와 평등, 경쟁적 개인주의, 개인의 권리, 그리고 입헌정부(立憲政府. 국민이 제정한 헌법에 의해 정치를 행하는 정부)에 대한 참여와 같은 것들에서 기본적인 가치를 찾고 있으며, 동시에 그것들이 서로를 연결시키는 믿음의 핵이 되고 있는 나라라고 보면 될 것입니다.
독립과 자유, 개방성과 기회의 나라인 동시에 가진 자와 가난한 자, 흑인과 백인, 사용자와 노동자, 서로 다른 종교적 집단이나 민족적 정통의 성원으로 분열된 나라라는 미국의 모순된 현실은 이 나라의 학교의 전통과 제도 속에 반영되고 있습니다. 실제로 학교는 미합중국의 창립과 개혁의 역사 안에서 특별한 역할을 해왔습니다. 1776년 독립전쟁 후 건국 초부터 미국인은 공립학교에다 ‘다름’ 속에서 ‘조화’를 낳고, 공통의 전통을 길렀으며, 다양한 의견과 주장에 대응하는 역할을 기대해 오고 있는 것입니다.
바)미국의 교실문화의 발생과 확대:
독립 혁명 이후 미국인은 교실이라는 것이 매우 뚜렷한 효용성을 잉태한 교육환경이란 것을 발견했습니다. 다음 한 세기와 25년 간에 4세대에 걸쳐서 개혁가들은 서서히 학교에 대해 종전보다 더 복잡한 한 가닥의 사회적인 과제를 축적하였습니다. 그러는 동안에 그들은 권력고조, 집단 네트워크, 문화 전달 양식, 그리고 젊은이가 세계나 세계인과 여러 가지 문제를 이해하기 위해 이용 가능한 수단을 근본적으로 새로이 만들었습니다.
미국인은 교실문화의 효용에 대해 서서히 알게 된 것에 불과합니다. 이 효용은 미국의 초창기에 길러진 것이지만, 그 때에 교양이 있는 시민성은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에게 있어 몸에 지녀야 했던 높은 과제이었습니다. 조지 워싱턴을 비롯한 초기 정치가들은 어린이의 운명과 신생 국가의 운명을 뗄 수 없는 하나의 운명공동체로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헌법과 독립선언, 국기와 마찬가지로 어린이와 학교를 새로운 나라 아메리카의 상징으로 간주했습니다. 어린이는 아메리카의 희망을 나타내며, 시민교육과 애국적인 교과서는 새로운 나라 아메리카를 전파하는 매체를 나타내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국기에 대한 찬미를 의식화 했으며, 종교적인 문화와 마찬가지로 공화주의를 전달함에 있어서 성경의 숭배와 동격으로 여길 만큼 소중히 생각했습니다. 미국의 거의 대부분의 교회에는 예배실 정면에 교회기와 함께 미국기인 성조기가 세워져 있습니다. 그리고 어떤 교회에는 마당에도 높이 성조기를 게양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교양과 비판력이 있는 시민과 헌신적이며 충실한 국민을 양성하기 위한 전략의 하나로써 집단학습이 필요했습니다. 그러나 지방 수준의 개혁가들의 교육에 대한 동기가 반드시 그렇게 숭고한 것만은 아이었습니다. 도시의 중산계급 개혁가들은 도덕의 퇴폐에 대하여 규칙에 불복종하는 시민들에 대해 두려움을 가지고 있어서, 작업장 안에 집단학습장을 설치하기도 했습니다. 도시에 사는 목사, 도덕가나 관리, 그리고 양가의 부인들이 공장 노동자들의 유아를 위한 일요학교라든가, 인구밀도가 높은 지역의 아이들을 위해서는 보조교사제 학교(monitorial school)을 부설하기도 했습니다. 이 제도로 작업장이나 예배의 장소에 교실문화가 들어가고, 가난한 노동자이 생활 속에 독서문화와 교실문화가 도입되었습니다.
19세기 중반에 들어서자 개혁자들이 역시 공적생활의 질을 향상시키겠다는 것에 관심을 가지게 됩니다. 허나, 그들의 시민으로서의 관심사는 당시의 절박한 상황에서 새로운 방향성을 포착하는 데로 향하였습니다. 당시의 미국은 산업화의 한 가운데에서, 수천 명씩 들이닥치는 이민외국인들과의 동화의 과정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었습니다. 서로 다른 도덕과 관습에 의해 양육되는 어린이들에게 전통적 앵글로색슨계 미국인의 시민적 가치와 노동습관을 전달하는 것을 힘쓰는 과정에서 19세게 미국의 교육자와 개혁자들은 학교에서의 학습과 재학습을 할 수 있는 능력에 대한 가정, 교회, 이웃사람들의 영향력이 얼마나 큰가를 확실히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개혁자들은 젊은이를 위한 학습공동체, 곧 도덕이라든가 인지(認知)능력을 키울 수 있는 전문화된 교육의 장을 설립하고 조직할 태세를 갖춰 나간 것입니다. 개혁가들은 도덕적인 것이나 정치적인 것에 대한 깊은 관심과 사회의 무질서에 대한 심한 공포 따위 말고도 공통의 교육환경의 구축을 제창하였습니다.
1840년에서 1890년에 걸쳐 교실문화는 미국인들이 눈이 부실만큼 교실환경을 정비하여 가면서 동시에 영구적이며 전문화된 모양의 교육을 갈망하게 되었습니다. 집단학습에 대한 위임을 진행시키는 한편으로 공립학교를 창설하고 다음과 같은 서로 모순된 사명을 쌓아갔습니다.
즉, 한편으로는 기회를 정비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행동을 통제하며, 국의미, 가족과 시장, 남성과 여성, 어린이와 어른이라는 등 점점 서로 다른 세계가 서로 얽히고, 더욱 증대해 가는 이미자의 어린이들과 미국 본토 태생 어린이들에게 자제심(自制心)을 심어주는 일과, 더욱 더 산업화의 길을 재촉하는 사회 속에서의 학습과 노동에 적합하도록 어린이들을 기르게 되어 갔습니다.
몇몇 도시에서는 이민 엘리트 사이에서도 집단지도에 대한 경향이 현저하게 나타났습니다. 신교도들의 공립학교 개혁가들의 도덕에 대한 침략에 대항하는 목적으로 가톨릭 성직자들에 의한 이민자의 자녀들을 위한 사립학교가 따로 많이 설립되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도시에 거주하는 부유층 사람들이 도시의 유혹을 두려워해서 전원적이며 농촌마을과 같은 환경에서 자녀를 교육하려고 기숙학교를 설립하여 자기들의 자녀를 보호하면서 교육을 실시하는 경향도 생겼습니다. 이렇게 해서 미국의 교육은 세월의 흐름과 함께 많은 변천을 겪어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도 쉬지 않고 교육개혁의 힘은 크나큰 국가적인 목표의 자라를 굳히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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