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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용호대 벼락구미 |
‘벼락구미’는 수하리와 물걸리의 경계를 이루는 기암절벽의 산기슭을 말한다. 바로 밑은 강물이 휘돌아 흐른다. 옛날 이곳에 물귀신과 도깨비가 자주 나와 춤을 추며 괴성을 낸다고 하여 많은 사람들이 밤길 다니기를 꺼려하였던 곳이다. 길도 제대로 나지 않은 벼랑길로 오르락내리락 왕래할때 한 해에 한 명씩 물에 빠져 죽거나 강가에 소를 매어 놓으면 소가 물속으로 들어가 죽는 일이 발생하곤 하였다. 어느 날 밤 뇌성 번개가 천지를 진동하고 비바람이 몰아쳐 고목이 쓰러지고 한 치 앞을 볼 수 없는 폭우가 두어 시간 쏟아지더니 마치 폭탄이 터지는 소리와 함께 벼락이 떨어지고 폭풍이 일었었다. 잠시 후 천둥 번개가 멎고 빗소리도 그쳤다. 밤새 공포에 질린 주민들은 날이 밝자 마을의 논밭을 돌아보던 중, 이곳의 절벽에 벼락이 떨어져 바위가 산산조각이 나 강에 흩어져 지금과 같은 풍경을 이루었다 한다. 강바닥에는 기암괴석이 서게 되는 등 개벽을 이루었는데 한구석에 커다란 지네가 죽어 있었다. 말로는 사람이 올라타니 발이 땅에 닿지 않았다고 한다. 그 후로는 인마의 희생도 없었고 평온한 마을로 살게 되었으며 이곳을 벼락구미(구비)라 일컬어 내려온다고 한다. 벼락구미 앞으로 흐르는 강에는 정말 기암괴석의 바위가 많아 강이 아름답다. 지금은 이곳의 전설을 담은 표지석이 서있다. 벼락구미 끝자락은 ‘숫돌머리’다. 지금 ‘벼락구미’를 이루는 산을 ‘척야산(拓野山)’이라 부른다. 동창 뜰을 일구었다는 의미로 ‘동창만세운동기념사업회’에서 공원으로 조성 중인 산이다. ‘척야산’은 ‘김덕원 의사’의 충혼비와 영정을 모신 창의사, 청로각과 요망대, 세류정, 덕원산길로 이어진다. ‘청로각’ 망루에서 바라보면 동창 뜰과 산책로가 한 눈에 들어온다. 산책로에는 ‘미당 서정주’의 헌시를 비롯한 원로 중견 시인들의 시비와 노래비 그리고 김덕원 의사의 행적을 찬양하는 비석들을 세워 ‘항일투사 김덕원’의 삶을 재조명하고 있다. ‘숫돌머리’를 돌아 내촌면 ‘물걸리’로 들어섰다. 강물이 흘러드는 어귀는 ‘널나드리(판교)’이다. 벼락구미 건너편이다. ‘널나드리’는 숫돌머리 아래쪽에 널(두껍고 넓은 나무판자)을 깔아 놓은 다리다. 다리 밑에는 천렵 나온 사람들이 불을 피우고 고기를 구워먹고 강 한가운데선 낚시를 즐긴다. ‘널나드리길’은 언덕배기를 돌아 ‘남산’마루로 이어진다. 길 막에는 참선하는 선원이 있다. 이곳에서 보면 ‘척야산’은 나지막하고 기품이 있는 산이다. 가루개고개(갈고개)로 오르는 길목에 있는 동창만세운동기념사업회를 찾았다. 성역화 되고 공원화 된 ‘척야산’ 공원의 입구가 된다. 아직 세우지 않은 석판과 시비들이 여기저기 널려있다. ‘김덕원 의사’를 우리는 장두(掌頭) 김덕원 의사( 金德元 義士)라고 부른다. 장두(掌頭)가 무슨 뜻일까? 호(號)인줄 알았으나 호는 아니다. ‘장두’란 ‘현기영’의 소설 ‘변방에 우짖는 새’에 등장하는 장두(狀頭)와 같은 의미인 ‘우두머리’라는 뜻이다. ‘장두 김덕원 의사’는 1919년 4월3일 동창에서 기미만세운동을 주도한 항일투사다. 1876년 11월26일 물걸리에서 태어나 8세에 결혼하고 1919년 생계수단으로 마방을 차리고 ‘말강구’(곡물 중개인)를 한다. 그 후 마방을 중심으로 조선을 침략하려는 일제의 만행과 ‘을사늑약(乙巳勒約)’의 상황을 접하면서 물걸리를 중심으로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만세운동을 계획한다. 45세가 되던 1919년 4월3일 물걸리, 와야리, 문현리, 장평리, 수하리, 인제 상남, 내면 방내에서 모인 3천여 명의 군중과 함께 동창 만세운동을 주도한다. 독립선언서 낭독과 대한독립만세삼창에 이어 내촌면주재소로 행진하던 중 군중의 함성에 일본헌병의 무차별 사격으로 ‘이순극(李順克)’ ‘전영균(全榮均)’ ‘이기선(李基先)’ ‘이여선(李麗先)’ ‘연의진(延義鎭)’ ‘김자희(金自喜)’ ‘전기홍(全基弘)’ ‘양도준(梁道俊)’등 팔열사가 순국하고 김덕원은 복골 은장봉으로 피신한다. 1923년 일제의 관헌에 체포-춘천 형무소에 수감 1927년 춘천 형무소에서 석방되고, 마방을 정리하여 항골 응달말로 이사하여 옥고의 여독으로 고생하다가 1942년경(?)에 숨을 거둔다. ‘척야산’은 물걸리 기미 만세공원과 함께 팔열사의 넋을 추모하고 항일 투사의 정신을 계승하기 위하여 ‘동창만세운동기념사업회’에서 추진하는 사업이다. 이런 역사적인 사실 때문에 ‘물걸리’하면 ‘동창만세운동’이 먼저 머릿속에 떠오르는 마을이다. ‘물걸리’하면 어디냐고 하지만 ‘동창’하면 금방 알아듣는다. ‘동창’이 있었던 자리는 지금 ‘농협비료창고’ 터다. ‘동창’이라는 지명은 조선시대 중기 이후 사창(司倉) 제도에서 비롯된다. 사창은 ‘대동미’를 수집 보관하는 창고다. ‘대동미(大同米)’는 조선 중기이후 ‘대동법(조선 선조41년-1608년-이원익에 의하여 실시;중앙에 선혜청을 두었다)’에 의하여 공물(貢物-지방의 특산물을 바치는 것)을 미곡(쌀)으로 통일하여 바치게 하던 납세 미곡을 말한다. ‘동창’이 물걸리에 들어섰던 이유는 영서 내륙의 교통 중심지였고 강을 이용한 물류 운송이 가능했다는 점이라 추정한다. 홍천군지에도 ‘홍천에는 동서남북 4방에 동창 북창 서창 남창으로 불리는 대동미 창고가 있다’고 기록되어 있고, 동창에 서석 내촌 인제부 일부지역의 특산물과 ‘대동미’를 수집·보관하는 창고가 있었다. 따라서 물걸리에는 사람들의 왕래가 많았고 자연스럽게 장마당이 형성되고 주막거리와 마방이 들어서게 되었다. 사창을 관리하기 위하여 중앙의 관리나 현감 등의 순찰이 잦았고 이들의 행적이 많이 남게 되었다. 그래서 생겨난 게 ‘비석거리’다. 대부분 선정비나 공덕비인 비석에는 이곳에 부임을 하거나 순방한 관리들의 이름이 남아있었다고 한다. ‘비석거리’는 원래 지금이 팔열각 앞 길 건너편이었고 다리 건너에 마방과 주막거리가 있었다. 지금 그 흔적은 볼 수 없는데 1964년의 대홍수 때 다 쓸려 내려갔다고 하고 그나마 남은 비석들은 만세공원 뒤편에 세워져 있다. 최근에는 김덕원 의사를 비롯하여 부장두 전성열의사, 팔열사를 추모하는 기미만세공원이 새로 조성되고, 마방터, 척야산, 용호강, 남강로, 김군보 등을 공원으로 단장하고 있어 찾는 이의 발길이 많아진 곳이다. 또한 ‘동창 물리침술원’도 물걸리를 알리는데 빼놓을 수 없다. 대동여지도 홍천부분 내촌에는 ‘물거리(物巨里)’가 등재한다. 큰 재물이 있는 마을이라는 뜻이 언제부터인지 모르나 물걸리(物傑里)로 바뀌었다. 물걸리의 중심은 동창과 탑둔지와 주막거리이다. 동창은 대동미창고를 중심으로 팔렬중학교(대안학교)와 지금의 시장을 포함하는 넓은 지역이다. 특히 주막거리에는 전영균(팔열사중 한분)의 약방 겸 글방(당시 대형태극기가 게양되었다)이 있었고 김덕원의 마방(지금이 마방터 건너편)이 있었고, 4.3 동창만세 운동 거사계획을 밀고한 ‘김홍이(당시 이장)’가 술을 먹었던 ‘김달홍의 주막’과 ‘김도명의 술집’도 주막거리를 이루는 장마당에 있었다. 장마당은 지금의 마방터 공원, 길 건너편으로 개울가에 들어섰다. 당시 시위에 모인 군중들은 비석거리와 장마당, 탑둔지, 가루개고개, 구미터까지 꽉 메웠다고 한다. ‘가루개고개’(가루개, 갈현, 갈고개)는 수하리 절골과 맞닿은 고개다. 우마꾼들과 사람들의 발길로 고갯마루가 낮아졌다고 할만큼 왕래가 많았다고 한다. 수하리 ‘푯대봉’ 능선에 이어지는 ‘가루개고개’는 그리 높지 않고 험하지도 않은데 골이 길다. 고개를 넘어서면 푯대봉 쪽으로 난 골은 ‘메네골’이고, 왼쪽으로 ‘지당골’과 ‘양창골’에는 금광이 있어 큰 부락을 이루었다. 새목골도 있었다. 고개를 넘으면 항곡초등학교 뒤편이 나온다. ‘큰배골’과 ‘큰동회골’ 어귀에는 주막거리와 화약고가 있었다. ‘중지골’ ‘작은동회골’에서 흘러내리는 물줄기가 합쳐 개울을 이루어 숫돌머리를 돌아 흐른다. ‘샛골’에서 ‘덕고개’를 넘으면 복골이다. ‘가루개고개길’과 ‘남강로’가 만나는 삼거리에는 주막이 있었고 다리를 건너면 ‘널나드리’다. 지금은 시멘트 다리가 놓여있고 그 위쪽에는 보가 놓여있어 벼락구미의 풍광을 한눈에 볼 수가 있다. ‘동호골’은 팔렬중학교 오른쪽이다. 복골과 동호골 사이의 능선에는 동창교회가 자리한다. 학교와 울타리를 맞대고 동창 정보화마을 사무실이 있다. 뒷길을 따라 오르면 ‘대동미 수집창고’였던 ‘동창’ 터에는 농협비료창고가 서있다. 길은 저수지로 이어진다. 복골저수지다. 월척급 붕어 뿐만아니라 토종어류인 모래무지와 메기등도 낚인다. 계곡형저수지라 물이 맑고 차다. ‘준동골’(전동골, 정든골, 중동골)과 복골의 원줄기인 새목골에서 흘러드는 물을 받아 동창 뜰로 흘러든다. 준동골 어귀에는 ‘강원민요연구원’이 있다. 1999년 개원된 강원 민요연구원은 강원민요를 비롯한 우리 전통음악의 조사와 연구를 통한 통합 발전의 목적으로 설립되었다. 서울 인사동 명월관을 그대로 이전 복원한 건물로 중요 무형문화재 보유자인 명창 ‘김혜란’씨와 홍천지역 우리문화 지키기에 앞장서 온 ‘연인제’씨가 뜻을 모아 문을 열게 되었다. 준동골을 지나면 맹자(孟子)의 군자삼락{君子三樂 - 군자유삼낙이왕천하불여재언(君子有三樂而王天下不與在焉) 부모구존형제무고일낙야(父母俱存兄弟無故一樂也) 앙불괴어천부부작어인이낙야(仰不愧於天俯不心乍於人二樂也) 득천하영재교육지삼낙야(得天下英才敎育之三樂也)}에서 따온 ‘삼락재’란 현판을 단 ‘장용팔씨(70)’댁이 나온다. 집앞에는 200년이 넘은 돌배나무가 서 있다. 복골은 땅이 매우 좋다하여 복골이다. ‘복골’의 원 골짜기는 ‘큰새목골’과 ‘작은새목골’이다. 백암산줄기가 ‘아홉사리재’로 이어지는 능선이 만든 골이다. 최근에 ‘마방산’이라 부르는 봉우리와 ‘은장봉’이 이어지고 그 사이 ‘입문골’을 따라 ‘수작골’, ‘가령골’로 통한다. ‘마방산’으로 이어지는 등산로의 들머리는 ‘더렁골’이다. 아름드리 소나무와 굴참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어 아름답다. 그러나 최근에는 약초꾼들에 의한 산림훼손으로 잘려나간 나무들이 많다. ‘양지산드럭골’과 ‘음지산드럭골’은 송이밭이다. 지금쯤 한창 송이가 돋을 때다. 조금 더 내려오면 ‘더렁골’이다. ‘더렁골’로 올라 산 등강에 올라서면 우람한 바위가 있다. 장군바위인데 장군석이 내려다보는 샛등에는 묘가 많다고 한다. 정말 ‘새반지골’에서는 장군이 났다고 하는데, 그 소문 탓인지 ‘새밭’은 묘가 밭을 이룰 정도였다고 한다. 그 중 대부분은 몰래 만든 가묘라 하는데 장군이 날까하는 기대에 생긴 무덤이라고 한다. ‘새밭’ 건너편에는 ‘터건너골’인데 ‘삼락재 집’ 앞에서 건너다보이는 골이다. 복골에서는 ‘돌메기’와 ‘준동골’를 꼽는다. 특히 ‘칙소’는 한여름 물맞이 천렵장소로 소문난 곳이기도 하다. 아쉽게도 ‘김덕원 의사’가 피신했다는 동굴은 보지 못했다. 저수지를 돌아내려오면서 하늘빛을 담은 복골 저수지에 투영한 산 그림자를 본다. 은장봉이다. 탑둔지와 동막골을 감싸안은 산이다. 은장봉 뒤로 이어지는 골은 ‘입문골’인데 고개를 넘으면 수작골이나 가령골로 이어진다. ‘은장봉’ 산자락에 절이 있었다. 지금은 절터만 남아있고 어떤 기록도 없다. 이 터를 중심으로 하여 ‘탑둔지’라 한다. 동창초등학교와 기미만세상, 공원일대가 된다. 일명 ‘물걸리절터’라고 기록되는 이곳에는 많은 보물이 남아있다. 글·사진 허 림(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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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을 꽃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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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원민요연구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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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김덕원 의사(?) 관련 기록이 자꾸 맘에 걸리는 것은 현지 고령 주민들은 '김덕원'의 행적에 대해 잘 모른다는 점입니다. 님께서 정확히 확인하셨다면 믿는 수밖에 없지만 왠지 동대문상가 벼락부자의 척야산 공원 조성으로 인한 전체적 착각 현상은 아닌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