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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 그 거룩함에로의 초대
송용민 신부
(인천가톨릭대학 교수)
1. 일상, 그 속됨과 거룩함
일상(日常). 매일 반복되는 생활. 우리는 그 일상을 살아간다. 아침에 눈을 뜨는 순간부터 저녁이면 어김없이 눈을 감는 순간까지 우리는 내게 주어진 반복된 삶의 굴레를 따라 때로는 의식 없이, 때로는 강렬하게 그 일상을 체험하며 살아간다. 어떤 이에게는 아침에 눈을 뜨는 것이 하루를 선사 받은 기쁨의 첫 선물이 될 수 있지만, 다른 이에게는 또 다시 힘겨운 하루를 살아야 하는 악몽과 같은 날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다. 눈을 뜨는 순간부터 우리는 누구나 내가 해야 할 일, 내가 만날 사람들, 내가 고민해야할 문제들을 만난다. 짐처럼 내 어깨에 얹어진 하루의 시작이 감사의 시간이 될 지, 가슴에 담긴 한(恨)의 재생이 될 지 그 누구도 장담하지 못한 채 우리는 반복된 일상을 시작하는 데 익숙해져 있다.
수도생활이나 신학교 생활 중에 공통점이 하나 있다면 정해진 생활의 틀 속에 살아야 한다는 사실이다. 사실 내가 신학교에 발을 내딛은 지 20년이 지났건만, 나는 여전히 신학교에서 산다. 남들은 본당신부라고 대접도 받고, 사목이라는 취지하에 신자들을 열심히 만나고 살지만, 나는 여전히 짜여진 신학교의 시간표에 내 삶을 맡기며, 조금은 기계적으로 느껴지는 신학생들의 틀에 박힌 삶에 나를 맡긴다. 솔직히 지금도 내 생활에 어려운 점을 하나 꼽으라면, 그건 새벽을 열며 아침에 졸린 눈을 비비고 일어나야 하는 일이다. 신학생 때 신학교에서 제일 해보고 싶었던 것이 늦잠이었건만, 규칙생활로 단단하게 짜여진 신학교 생활에서는 단 한 번도 늦잠이 허용된 적이 없다. 그래서 방학이 되면 신나게 늦잠을 즐겼던 것도 사실 무리는 아니었다. 그 점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본당에 있으면 다소 여유 있는(?) 하루를 시작하는 대부분의 젊은 사제들과는 달리 세상이 두 쪽이 나도 신학생들과 함께 새벽을 열어야 하는 고뇌를 겪는다. 그 나마 독일 유학시절에 내가 행복해했던 것은 신학원에서 아침잠을 충분히 잘 수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역설적이지만 밤 시간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올빼미족인 나 같은 사람에게는 확연히 달랐던 독일 신학원에서의 삶은 솔직히 커다란 선물이었다.
그렇게 10년을 살고 한국에 와서 신학교로 돌아오니, 다시 과거의 신학생이 된 느낌이다. 혹시라도 늦잠을 자서 기도에 늦거나 미사라도 빠지면 이제는 신학생들 눈치가 보인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교수신부들과 애증의 관계를 맺고 지내는 신학생들의 눈치가 여간 빠른게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언젠가 일상의 첫 발을 다르게 시작하면 세상이 완전히 달라 보인다는 사실을 깨달은 적이 있다. 늘 잠에 취해 있을 시간에 일찍 거리를 나서게 된 때가 있었는데, 내가 잠든 사이 세상은 정말 놀라울 정도로 열심히 움직이고 있었다. 세상에는 내가 알지 못하는 순간에도 새벽을 여는 사람들이 많았다. 청소부, 택시기사, 어시장의 경매장, 새벽 장을 보는 사람들, 그리고 새벽 기도회를 나서는 사람들의 발걸음, 게다가 밤을 홀랑 새고 새벽을 저녁으로 맞는 젊은이들에 이르기까지 우리들의 일상은 그야말로 천태만상이다. 놀랍다. 우리에게 늘 반복되는 일상이 이렇게 다양한 형태의 삶이라는 사실을 안다는 것이다.
하느님의 거룩한 부르심의 삶을 살아가는 우리 같은 교회의 사람들에게도 이러한 일상은 매한가지다. 흔히 세상 사람들과는 뭔가 다른 뽑힌 사람들이라는 일반 신자들의 눈길이 때로는 민망할 정도로 속된 자신의 모습을 일상에서 만나기 때문이다. 단지 차이가 있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들의 일상이 하느님의 거룩함으로 가득차길 바란다는 점이다. 기도할 때, 사람을 만날 때, 중요한 결단을 내릴 때, 음식을 먹고, 거리를 걷는 일까지도 하느님의 숨결을 느끼는 순간이길 바란다. 그러나 저녁이 되면 늘 우리의 하루가 결코 ‘거룩함’으로 가득찼다고 말하지 못하는 자신을 발견할 때 이내 좌절하고 또 다시 우리의 ‘속됨’에 스스로를 묻어 버린다. 한마디로 나약하기 짝이 없는 자신에 대한 한없는 원망과 비애를 가슴 속에 묻어 두고, 잠들지 않는 내 육신을 내일의 또 다른 일상의 시작을 위해 애써 잠재운다. 이것이 우리의 일상이라고 말하면 너무 지나친걸까?
2. 일상과 초월
우리는 흔히 일상의 단조로움과 스트레스로부터 해방되기 위하여 일상을 벗어난 특별한 무엇인가를 찾아 나서는데 익숙하다. 휴일과 휴가시즌에는 일상의 공간을 벗어나려고 몸부림치는 사람들로 가득 넘치고, 일상에서 체험하지 못하는 보다 강렬한 자극을 향한 특별한 이벤트가 매일 넘치도록 우리 주변을 맴돈다. 그러나 이러한 일상탈출로의 노력이 우리에게 일시적인 평안함과 기쁨을 안겨줄 수는 있겠지만, 우리 내면의 가장 깊은 궁극적인 자아를 만나도록 이끌어 주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내면을 깊이 들여다보는 기회는 결코 내 일상을 벗어날 때가 아니라, 오히려 반복된 일상의 굴레에서 철저하게 자신이 깨어지는 체험을 통해 주어진다. 일상의 굴레에서 깨어진다는 말은 늘 습관적으로 살아온 내 삶의 틀을 더 이상 지속할 수 없는 내적 고통을 의미한다. 내가 당연하게 여겨온 일들, 내가 신뢰하고 의지했던 사람들, 내가 의심할 여지없이 누려왔던 평화와 안정이 송두리째 흔들리는 체험이 그것이다. 신뢰나 확신이 무너지는 순간, 내가 쌓아둔 자아의 벽들이 무너지는 혼란이 엄습할 때 우리는 당황하고 방향감각을 상실한다. 우리에게 그 순간들은 견디기 힘든 고통이다. 단조로운 일상의 리듬은 깨지고, 내 상처 받은 영혼은 내 육신의 고통을 일구어낸다.
사람은 누구나 이 고통을 초극하기 위해 몸부림친다. 순간의 고통을 피하기 위해 일상을 도피하는 사람도 있지만, 대부분 종교적인 삶을 살아가는 이들에게 고통은 또 다른 희망을 향한 생의 의미를 기획하는 단초를 제공한다. 흔히 말하는 ‘초월’은 일상을 뛰어 넘어 전혀 다른 세상에로의 도피가 아니다. 초월은 우리가 겪는 일상의 고통의 벽을 넘어 일상 속에 묻혀 있던 깊은 자아의 궁극적 의미를 만나는 것을 말한다. 한마디로 초월은 생의 궁극적 의미에로의 침잠이다. 속된 일상 속에 묻혀 있던 거룩한 신비가 드러나는 체험이다.
20세기 가톨릭 신학의 대들보였던 칼 라너(1932-1984)는 이렇게 일상 속에서 하느님의 거룩한 신비를 체험하는 ‘새로운 길’을 열어준바 있다. 그의 이른바 ‘초월론적 신학’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경험하는 현실의 일상 속에 묻어 있는 초월에로의 갈망을 시대의 언어로 풀어낸 노작(勞作)이었다. 그가 말하는 초월은 특별한 영역에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라면 누구나 겪는 반복된 자신의 일상의 삶의 자리에서 발생하는 사건이다. 그의 놀라운 신학적 업적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는 이들에게 라너는 자서전적 고백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늘 복음선포, 강론, 영성 지도를 위하여 신학을 해왔다. 한마디로 나는 학자가 아니며 학자이고 싶지도 않다. 그냥 그리스도교를 진지하게 대하고 선입견 없이 오늘의 시대에 살며 거기서 일어나는 이러저러한 갖가지 문제들에 대해서 생각하는 한 명의 그리스도인이고 싶다.”
우리는 습관적으로 학문의 영역이나, 거룩한 신앙의 체험 영역이 일상을 떠나 특별한 장소와 사람들에게만 해당하는 것처럼 생각하곤 한다. 흔히 우리의 한계를 뛰어 넘는 ‘초월’은 일상의 범주를 벗어나 있는 것으로 여긴다. 그러나 라너에게 일상은 초월에로의 출발점이자 목표였다. 그는 초월이란 우리가 사는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 일상을 벗어나는 일이 아니라, 일상 속에 가장 깊이 묻혀 있는 우리 존재의 근원을 발견하는 일임을 강조했다. 우리 존재의 근원. 바로 거룩함에로의 갈망이다. 속되기 짝이 없는 우리들의 찌든 삶 속에 잠들어 있는, 반복된 일상을 단절시키는 고통이 찾아올 때면 늘 우리의 심장 깊은 곳에 선사된 채 잠들어 있는 거룩함에로 우리를 초대하는 음성을 듣는다.
라너가 말한 초월에로의 체험은 요즘 사람들이 현실을 내팽개치고 산이나 숲으로 들어가 명상수련에 몰두하는 영적 체험이 아니다. 오히려 지극히 속된 현실 속에서 우리를 끊임없이 초대하고 있는 거룩한 신비를 마주하는 것이다. 한마디로 인생의 바닥을 체험한 사람은 자신의 좌절 한 가운데에서 울려 퍼지는 나와는 전혀 다른 ‘절대 타자’의 음성을 듣는다. 그리고 우리의 실존이 바로 이 ‘거룩한 신비’ 앞에 놓여져 있음을 깨닫는 순간, 주체할 수 없는 눈물과 더불어 자신이 깨닫지 못하는 순간부터 철저하게 이 거룩한 신비에로 이미 초대되고 받아들여졌음을 자각한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말하는 ‘은총의 시간’이며, 라너가 말하는 초월의 체험이다.
라너는 우리가 세상에 내 의지와 상관없이 던져진 채로 수 없이 많은 삶의 질문들 속에서 살아야 하는 일상 속에서 우리가 ‘은총’이라고 부르는 거룩함에로의 초대야말로 정신적인 존재인 인간이 지닌 가장 큰 특권이라고 말한다. 즉 “일상은 우리에게 베푸시는 하느님의 무섭도록 깊은 심연을 체험하는 장(場)임과 동시에 하느님의 무한성이 성령의 은혜로운 체험으로 우리에게 임하는 삶의 자리이며, ‘정신적인 것’이 경험되는 장”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거룩한 초월에로의 체험이 어떻게 우리의 ‘속된 일상’안에서 드러나는 일이 가능할까?
3. 일상체험과 신비체험의 만남
우리는 흔히 하느님을 체험하는 것, 혹은 은총을 체험하는 것이 무슨 경건한 느낌이라든가 축제에서와 같은 종교적 감흥이나 잠잠한 위안과 같은 일상에서 느끼지 못하는 독특한 체험이라고 여긴다. 그래서 흔히 강렬한 신앙 체험이 없이 살아가는 대다수의 신자들에게 하느님은 내세에 심판자로 만나야할 분 정도로 치부된다. 구원에 대한 확신이나 하느님의 현존에 대한 믿음 역시 일상적인 신앙생활의 진부함 속에서는 결코 얻어질 수 없는 남의 이야기처럼 들린다.
그러나 정작 우리의 반복된 일상을 깊이 들여다보면 우리가 얼마나 일상을 의식 없이 대하고 사는 지 깨달을 수 있다. 가장 단순하고 반복된 일들, 습관처럼 살아가는 일상의 삶을 깨어 의식하는 일이 사실 가장 어려운 일임을 잘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서 대개의 경우 우리는 일상의 순간 속에서 벗어나 뭔가 특별하고 대단한 일이 벌어지길 기대한다. 이른바 일상을 벗어난 이벤트를 기다린다. 우리는 잠시나마 동화의 주인공이 되거나, 지금의 일상에 찌든 나와는 전혀 다른 존경받고, 사랑받는 또 다른 나를 기대한다. 하느님을 만나는 상상도 해보고, 성인과도 같은 영웅적인 사랑을 실천하는 자신을 떠올리기도 한다. 마음에 불편함을 담아둔 사람들을 대할 때, “원수를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떠올리며 그들과 화해하고 행복한 미소를 짓는 자신을 상상한다. 그러나 이내 현실로 돌아오면 결코 그렇지 못한 자신을 만난다. 역시 나의 일상은 특별할 수 없다는 자괴감에 빠지곤 한다.
그러나 여기에 우리가 놓치고 있는 신비가 있다. 우리 인생의 참된 기쁨은 어떤 강렬하고도 특별한 체험 후에 또 다시 공허함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내 인생에 선물처럼 주어진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들이는 용기라는 것이다. 이 용기는 일상에서 수 없이 많은 순간에 우리를 힘들게 하는 고통의 현실들에서 시작된다. 앞서 말한 일상에서의 단절을 체험하게 하는 생의 고통의 체험들은 일상 속에 묻혀진 내면의 깊은 자아를 만나게 해주고, 그 자아 속에 숨겨둔 거룩함에로의 갈망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한 번 상상해 보자. 언제 나는 나에 대해 가장 깊이 생각하는지. 그리고 언제 하느님의 현존을 깊이 갈망하는지. 내가 살아있음을 강하게 의식하고, 내 생의 의미를 되찾기 위해 몸부림치는 때는 언제인지. 우리는 하느님의 부재(不在)의 체험이 사실 더욱 강한 하느님의 현존을 갈망하는 인간의 실존적 고뇌임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일상의 단절을 체험하는 일이 분명히 우리를 존재의 거룩함에로 향하게 하는 힘이며, 그래서 ‘고통은 신앙의 단초’라는 말도 태어났으리라.
일상의 고통을 피하기 위하여 우리는 흔히 도피적 안식처를 찾지만, 정작 그 곳에서 발견된 기쁨은 또 다시 일상으로 돌아오면 이내 사라지고 만다. 참된 기쁨은 일상의 고통을 딛고 피어나는 거룩한 신비에 대한 체험에서 나온다.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하는 순간, 더 이상 사랑 받지 못하고, 인정 받지 못하거나, 더 나아가 자신이 사랑 받을 자격이 없다고 여겨지는 순간에도 어김없이 찾아오는 실날같은 위로와 희망의 표징을 만난다. 때로는 그 표징이 너무 약해서 내 영적 감각을 자극하지 못하기도 하지만, 뚜렷하지 않아도 나의 속됨을 속되다 탓하지 않고, 오히려 거룩함에로 초대해주는 음성을 듣는다. 희미하게나마 보이는 표징과 들릴 듯 말 듯한 그 음성이 무엇인지 물을 때 우리는 일상에서 잊고 있던, 그러나 늘 우리를 초대하고 있는 ‘거룩한 신비’이신 분을 만난다. 그럴 때 일상은 바로 거룩한 신비를 체험하는 자리가 된다.
불교에서는 이러한 체험을 ‘해탈’이라고 부른다. 선불교에서 깨달음으로 나아가는 길을 소와 동자(童子)로 표현한 십우도(十牛圖)에서처럼 깨달음을 얻은 자는 모든 자아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 모든 것이 텅 비어 있다는 ‘공(空)’의 체험을 통해 세상의 고통을 극복할 수 있다고 가르친다. 그러나 이 깨달음은 철저하게 중생의 구제를 향한 일상의 체험에로 다시 돌아온다. 그 결과 이제까지 살아온 일상은 과거의 일상이 아니다. 새로운 눈과 귀, 새롭게 열린 영적인 지평 속에 놓여진 거룩한 일상이다.
그리스도교의 역사는 바로 이러한 거룩한 일상을 체험한 사람들의 역사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스도교가 고백하는 하느님은 초월의 경지에 머무르지 않으시고, 철저하게 자신을 낮추어 인간이 되신 분, 다시 말해 철저하게 일상 안으로 들어오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일상이 비현실적인 신화의 세계에 묻혀 있는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자신을 비운(kenosis) 하느님의 자기전달의 사건을 통해 일상이 거룩한 하느님의 활동 무대임을 고백하는 신앙이다. 우리가 흔히 속되다고 여기는 일상의 영역들이 사실 하느님이 자신을 드러내는 거룩한 신비의 장이 되고, 여기서 성(聖)과 속(俗)의 일치가 체험된다.
칼 라너에 따르면 인간은 일상에서 거룩한 신비와 마주하며 살아갈 뿐만 아니라, 이 신비에로 초대되고 있는 자신을 체험하면서 죽음이라는 유한과 영원이라는 무한의 긴장 사이에서 절대적 신비이신 하느님에게로 지향된 자신의‘영’을 체험하며 실존하고 있다고 말한다. 한마디로 우리의 일상은 이미 거룩한 신비이신 하느님에 의해 받아들여졌기에 신비체험이란 우리가 비록 의식하지 못하는 순간에도 언제나 열려 있는 일상의 선물이다. 우리가 체험하는 생노병사와 희노애락이 엮어 내는 삶의 장이 바로 일상이며, 이 일상은 우리를 속됨에 매몰되지 않게 하면서도 우리를‘그 이상’을 지향할 수 있게 해준다. 즉 우리가 간직한 “더 없이 진지한 자유 안에서 하느님을 향한 믿음과 소망과 사랑으로 포착되는 영원한 하느님의 무게를 지닌 삶”을 받아들이는 결단은 바로 ‘지금-여기’의 일상에서 이루어지는 사건인 것이다.
일상에서의 신비체험. 이것이야말로 참으로 인간다운 삶으로써 체험할 수 있는 가장 최고의 행복이다. 라너의 말처럼 “손에 잡히는 것, 내보일 수 있는 것, 즐길 수 있는 것이 다 사라지고 모든 것이 죽음 같은 암묵에 잠겨 죽음과 멸망의 맛을 띠게 될 때, 모든 것이 마치 희고 무색(無色)이며, 잡히지 않고 무어라 형언하지 못할 열락(悅樂) 안에 녹아버릴 때면, 우리는 우리 안에 작용하는 것이 정신뿐 아니라 성령임을, 길(道)이며, 생명(生)의 본래 모습을 직관하고 있음”(일상, 45쪽)을 깨닫는다. 이 거룩한 신비의 체험을 그리스도 신자인 우리들은 구체적으로 역사 안에서 발생한 사건으로 고백한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드러난 일상의 거룩한 신비이다.
4. 예수의 십자가, 일상에서 하느님을 체험하는 길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은 2천년 전 우리와 같은 역사 속에 사신 나자렛 사람 예수의 신비에 담겨 있다. 예수는 누구보다도 일상의 신비를 관통하신 분이었다. 그 분은 늘 반복되는 일상에 묻혀 거룩함에로 초대된 참된 자아를 발견하지 못하는 이들에게 생명의 빛을 밝혀 주셨다.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고기를 낚던 제자들의 일상 속에, 생존을 위해서 어쩔 수 없이 반복된 수치심에 살아야 했던 창녀들과 세리들, 운명처럼 주어진 자신의 일상의 처지에 체념과 좌절을 살아간 수 없이 많은 병자들과 일상의 짐을 지고 희망 없이 살아야했던 많은 군중들의 마음 속에 잠들어 있던 하느님의 거룩한 부르심의 음성을 일깨워 주셨다.
예수님은 군중들을 가르치고, 가난한 이들과 음식을 나누며, 상처 받은 이들을 위로하는 일상의 순간 속에서도 늘 기도하며 살아 계신 하느님 아버지의 뜻이 땅에서 이루어지길 간절히 소망하셨다. 그 분은‘하느님 나라’가 당신이 선포하는 말씀을 받아들이는 ‘이 자리’에서 그대로 이루어졌음을 사람들에게 깨닫게 해주시는 말씀 그 자체이셨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람들이 일상에서 깨닫는 것만으로 거룩한 신비를 체험하는 것은 아님을 알려주신다. “너도 가서 그렇게 하여라.”(루가 10, 37)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일상의 깨달음은 정신적인 자각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삶으로 드러나는 표징을 통해 완성됨을 가르치신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바로 일상의 고통 속에서 하느님을 만나는 살아있는 표징이다. 예수님이 짊어지신 십자가는 골고타 언덕에서 처해진 사형틀이었지만, 실상 이 십자가는 이미 당신이 세상에 파견되어 오시는 순간부터 맡겨진 하느님의 소명이었다. 사람들로부터의 배척, 온갖 모욕과 반대의 외침, 어리석은 제자들의 자리다툼에서부터 예수님을 모른다고 배반한 제자의 통한의 눈물에 이르기까지 예수님의 십자가는 일상에서 겪는 고통의 상징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그리스도 신앙은 바로 이러한 일상의 십자가 안에 거룩한 하느님의 부르심을 고백하는 예수의 부활 신앙으로 완성되었다. 일상의 십자가란 우리가 하찮게 여기는 순간에도 발생하고 있는 온갖 형태의 미움과 질투, 시기와 분노 속에서 우리를 부르시는 거룩한 하느님의 음성을 듣는 것이다. 라너가 말하듯 일상에서의 초월체험은 일상의 사소한 일들, 별것 아닌 하찮은 일들에서 발견되고 또한 그러한 일련의 특별하지 않은 사건들에서 하느님을 찾아내는 것을 말한다. 이는 이념이나 고상한 말이나 자아반영에 의한 행위가 아니다. 오히려 이기심에서 나를 풀어주는 행위, 나를 잊게 해주는 남을 위한 염려, 나를 가라앉히고 슬기롭게 해주는 인내 등에서 영원으로 열려진 한없는 깊이를 체험하는 것을 말한다. 그는 우리가 믿는 하느님이 일상과 인간을 떠나서는 체험될 수 없다고 말하며, 그래서 가장 일상적이고 가장 평범한 순간은 신적인 순간인 동시에 가까이 와 있고 그러면서도 동시에 파악될 수 없는 하느님의 신비는 인간의 구체적인 삶의 상황에서 자각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우리는 모두가 하느님의 이 거룩한 신비에로 초대되고 있다. 이 초대는 결코 특별한 순간에 특별한 장소에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일상 속에서 하느님 아버지와 가장 긴밀한 일치를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인격적 신뢰를 통해서 일어난다. 그 분이 짊어지신 일상의 십자가 속에 드러난 거룩한 하느님의 신비, 바로 부활의 신비가 숨겨 있다. 예수의 제자들은 일상 속에서 만난 부활하신 예수를 만남으로써 자신들의 실패한 일상이 새롭게 선사된 축복의 일상이었음을 깨달았다. 스승 예수를 배반하지 않겠다던 베드로의 세 번의 배반(요한 13, 37-38)과 티베리아 호숫가에서의 사랑의 고백(요한 21, 15-18), 실망 속에 고향으로 발걸음을 돌리던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의 깨달음(루가 24, 32-34), 사랑하는 이를 마음에서 떠나보내지 못해 무덤을 향하다가 부활하신 예수를 만난 마리아 막달레나의 기쁨(요한 20, 1-18), 다락방에 숨죽이며 두려움에 떨던 제자들이 체험한 의심과 확신(요한 20, 19-29)에 이르기까지 부활하신 예수님의 거룩한 신비는 일상의 어두움을 박차고 제자들에게 드러났다.
사도 바오로는 율법을 수호하기 위한 자신의 일상의 직무를 수행하기 위해 다마스커스로 달려가던 중에 빛과 음성으로 자신을 드러낸 부활하신 예수님의 거룩함 앞에 쓰러져 두 눈을 멀었다(사도 9, 1-9). 바오로는 이제까지 자신이 보고 움직이던 일상 속에 묻힌 거룩한 일상을 깨닫기까지 사흘 동안 보지도 못하고, 먹지도 마시지도 못하였다. 그에게 이제 일상은 편을 가르고, 나와 다른 이를 배척하며, 특권층에게만 유보된 율법의 세계가 아닌, 상처 받은 이를 치유하고, 죄인을 회개시키며, 갈라진 이들을 하나로 묶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가득찬 거룩한 일상이 된 것이다.
5. 일상, 그 거룩함에로의 초대
우리는 모두 이 거룩한 일상에로 불리웠다. 세례 때, 수도원에 입회하고 첫 서원을 할 때, 제단에 엎드려 거룩한 사제직의 부르심에 응답할 때, 가정 공동체를 꾸릴 특별한 책임과 신뢰를 약속하는 혼인 서약 때에 우리의 일상이 하느님의 거룩함으로 가득차길 기도한다. 때로 그 기대가 신앙을 방해하는 속됨에 묻혀 버리거나, 수도생활이나 사제생활에서 흔히 빠지기 쉬운 타성에 젖은 일상에 안주(安住)하는 유혹으로 바뀔 수도 있고, 철석같이 믿었던 배우자의 변심으로 가정의 위기로 무너질 수도 있다. 그러나 이 모든 순간들 역시 우리의 일상을 벗어나 일어나지 않는다. 일상의 단절은 또 다른 일상을 찾기 위한 몸부림을 요구하지만, 이렇게 해서 찾은 일상이 또 다시 과거의 일상에로의 회귀를 반복한다는 체험이 우리를 지배하고 있다. 이것이 우리가 겪는 일상의 어려움이다.
그러나 우리 신앙인은 이 일상의 반복이 결코 불교에서 말하는 업(業)처럼 우리를 얽매는 그런 일상으로의 회귀라고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내가 겪는 시련과 고통은 습관적인 일상 속에 묻힌 하느님의 거룩함에로의 초대라고 믿는다. 우리에게는 반복된 일상이 더 이상 같은 일상이 아닌 하느님의 거룩함으로 가득찬 일상이 되게 하는 자유라는 은총이 선사되어 있기 때문이다. 눈을 뜨면서부터 내 하루가 하느님의 선물이고, 내가 숨 쉬고 있음이 축복이며, 내가 해야 할 일들은 내가 세상에 봉사하기 위함이며, 내가 만나는 사람은 하느님의 마음을 읽게 해주는 축복의 존재가 되게 할 수 있다. 우리는 새로운 눈과 새로운 귀, 새로운 심장을 가지고 우리의 일상을 거룩한 일상으로 만들어 낼 수 있는 축복된 존재가 된다. 나를 혼란에 빠뜨리고, 스스로를 저주하게 만드는 나의 오감(五感)은 속됨에 묻힌 죄악의 출발점이 아니라, 하느님의 거룩함과 아름다움을 체험하는 축복의 자리가 될 수 있다. 교부 오리게네스는 인간의 속된 감각은 결코 파괴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변용(變容)되고 정화(淨化)되어야 한다고 가르친다. 그렇게 정화된 우리의 감각은 신적인 감각이 되며, 이를 두고 오리게네스는 [아가주해]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 때 눈은 외아들의 영광을 볼 것이며, 그 외의 것 보기를 원하지 않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귀도 생명의 말씀과 구원의 말씀이 외의 것을 듣고 싶어 하지 않을 것이다. 코는 그리스도의 향기 이외의 것을 맡으려 서둘러 달려가지 않을 것이다. 또 생명의 말씀을 만진 손은 물질적이고 부서지기 쉽고 멸망에 종속되어 있는 것들을 만지고 싶어 하지 않을 것이다. 하느님 말씀의 선하심과 그 분의 살과 천상에서 내려온 빵을 맛본 혀는 다른 것을 맛보려 하지 않을 것이다”(541).
영적으로 고양(高揚)된 우리의 신적 감각은 일상을 속됨의 공간이 아닌 거룩함의 현현(顯顯)의 자리임을 깨닫게 해준다. 이것은 신앙인인 우리에게 선사된 하느님의 축복이다. 우리 주변을 둘러보자. 힘들고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웃음을 잃지 않는 이들, 누가 뭐래도 고통에 찌들어 있을 삶의 자리에서 오히려 빛을 내는 사람들, 아주 단순한 소임과 소명에도 최선을 다하는 신실한 사람들, 세상에서 소외되고 버려진 이들에게서 하느님의 얼굴을 보는 사람들이 있다. 인도 빈민촌 캘커타의 마더 데레사가 그랬고, 죽음의 수용소인 아우슈비츠의 막시 밀리안 콜베 신부가 그랬으며, 서슬퍼런 칼 날 앞에서 우리 순교 성인들이 그랬다. 이들의 삶이 결코 영웅적인 어떤 특별한 체험 덕분이라고 말하는 것은 잘못이다. 이들은 한결 같이 일상에서 발견된 하느님의 놀라운 섭리와 은총을 껴안고 살아온 사람들이었다.
더 가까이 우리 주변을 살펴보자. 전신마비 아내를 23년째 돌보는 할아버지, 40년간 딸에게 밥을 씹어 먹인 눈물의 부정(父情). 40년간 천사같이 와서 소록도에서 봉사한 후 천사같이 떠난 오스트리아의 출신 할머니 수녀님들. 내 주변에도 일상을 거룩하게 살아가는 수 없이 많은 ‘작고 보잘 것 없는 이들’이 있음을 깨닫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다. 내 일상이 지치고 힘겹다고 여길 때 누군가 나를 위해서 기도하고 있다는 확신을 갖는 일도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특히 우리 같이 사제생활이나 수도생활을 하는 이들에게 기도는 일상이지만, 그 일상을 거룩한 일상으로 살지 못하는 일이 빈번한 반면, 우리를 위해 헌신적인 기도를 바치는 부모님들과 눈에 보이지 않는 신자들의 마음의 기도가 하늘을 울리고 있음을 아는 이들은 이미 일상 속에 초월을 사는 사람들일게다.
사도 바오로는 말한다. “우리가 지금은 모든 것을 희미하게 보지만 그 때에 가서는 얼굴을 맞대고 볼 것입니다(고린전 13, 16). 지금 우리에게 거룩함의 완전한 형상은 숨겨져 있다. 설령 하느님을 체험한 이들이라고 하더라도 우리가 깨달은 바는 지극히 작고 보잘 것 없는 하느님의 신비의 일부에 불과하다. 우리에게 감춰져 있으나, 희미한 표징을 통해 드러나시는 하느님의 흔적들은 우리를 일상의 속됨에서 거룩함에로 초대하는 부르심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