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년 가을 집사람의 사업장으로 마련한 용답동의 건물을 고쳐짓고 동숭동에서 옮겨왔다.
시멘트파동과 인력난으로 힘들게 새집을 만들었으나 그것은 헌건물-OXID처럼 되고 말았다.
동숭동을 벗어나야겠다고 마음먹게된 이유중의 하나는 주말마다 되풀이되는 중고생들의 사물놀이 소음이었다.
「좋은 우리것」을 익히는 것에 반대할 이유는 없으나 굳이 대학로에서 연습한 실력을 선보여야 하는지를 이해하기 힘들었다.
김덕수패정도의 수준이라면 몰라도 아마추어의 데뷔공연을 매주 번갈아 들어야한다는 것은 고역이었다.
그렇게도 한국적이려고 하는 열망이 지나고 난 뒷자리는 쓰레기와 막걸리 냄새풍기는 오물들의 더미였다.
또 하나 동숭동을 떠나게 한 것은 이곳을 가득 채우고 있는 벽돌의 붉은 색이었다.
김수근 선생의 작업이후 대학로에 세워지는 건축들은 한결같이 벽돌로 채워져있었다.
컨텍스트처럼 되어버린 벽돌의 남용은 드디어 처음의 것들에서조차 지겨움을 느끼게 하였다.
문예회관 벽돌벽면의 문양처럼 돌출된 벽돌이 마치 두드러기처럼 느껴지기까지 하였으므로 중증의 결벽증세에 가깝게 되었다.
연희조형관, 원불교경주교당, 안암교당 등을 겪으며 경험한 벽돌작업의 후유증인지도 몰랐다.
쌓아올리도록 마련된 벽돌을 철근콘크리트의 치장재로 바꾸었을 때 이미 그것은 벽돌이 아니었다.
벽돌이 치장재로 변한 것이 타일이므로 타일을 통줄눈으로 붙여서는 안된다는 모교수와의 논쟁까지 거론하고싶지 않지만 구조재가 아닌 벽돌은 벽돌이 아니라고 생각하였다.
솔스티스에서 조심스럽게 시도해보았던 콘크리트의 노출은 구조를 간결하게 표현해 조적조로 메꾸어진 벽체의 의미를 내력벽이 아닌 단순한 간막이로 취급해보려는 시도였다.
그 뒤 서초동의 근생시설을 노출 콘크리트의 벽으로 제안하였지만 알미늄판으로 지어졌고 갈현동의 경신교회-뉴트리움은 완벽한 실패로 끝났다.
재료의 선택과 사회적인 인정, 그리고 현장의 사정 사이에서 어떤 결정도 내리지 못한 채 우왕좌왕하던 중에 다시 한번 노출 콘크리트를 시도한 것이 하저교회-이쿼낙스였다.
주택인 솔스티스와 마주하고 있는 소나무숲 언덕의 오래된 교회를 다시 짓는 일을 맡게 되었을 때
다시 한번 마음먹게 된 것은 솔스티스가 인연이었을 뿐만 아니라 여러 장로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지원해준
목사와의 의견일치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결과는 만족스럽지 못하였다. 형태 만들기는 근사치를 이룬 편이었지만 노출의 완성도는 기대한 것과 거리가 멀었다.
도중에 담임목사가 바뀌는 우여곡절이 있었음에도 후임목사의 고집으로 그나마 끝낼 수 있었던 것이 다행이었다.
겨우 체면을 차릴 수 있을 정도로 마무리하고 난 뒤 남은 것은 아무래도 되지않는다는 자포자기였을 뿐이었다.
그 뒤 한동안은 드라이비트에 매달렸다, 비교적 단순한 형식으로 마무리되는 면성에 희망을 걸었으나 마음에 차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서초동 연립주택-메소트론을 준비하기로 하였을 때 콘크리트에 대한 미련이 다시 살아났다.
이쿼낙스의 현장소장과 목수팀을 그대로 재투입하기로 하고 설계자체를 그것이 아니면 안되도록 몰아갔다.
층마다 노출면의 색깔이 달랐고 부분적인 흠집이 여기저기 보였지만 위임된 권한과 들여진 노력만큼은 만들어 낼 수 있었다.
얻어진 것은 자신감이었다. 특별한 노하우가 있는 것도 아니었으며 유별난 기술이 요구되는 것도 아님을 알게 되었다.
요점은 진행의 철저함뿐이었다.
완벽한 설계와 시공계획 그리고 현장관리에 있었다.
부분적인 수정작업도 비교적 깔끔하게 처리할 수 있었으므로 또 한번의 기회가 주어진다면 제대로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이라 생각들었다.
세 번째의 기회가 된 것이 김옥길기념관이었다.
여건은 완벽하게 갖추어져 있었다. 설계에 관하여 건축주의 전폭적인 위임을 받았고 공사비와 기간에 대해서도 상식을 뛰어넘은 배려가 준비되어 있었다.
현장책임자를 비롯한 메소트론의 시공팀이 고스란히 기념관현장에 참여하였다.
규모가 작았고 층수와 충고도 적당하였으므로 그 동안 확인된 모든 방법론을 다시 확인하며 대어들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노출 만들기에 급급하여 엄두 내지 못하였던 공간적 개념들을 구현하기 위한 디테일의 처리까지 한번에 시도하기로 하였다.
십삼개월의 공사기간동안 전쟁치루듯하며 만들어낸 결과는 부분적인 결함에도 불구하고 성공적이었다.
동시에 진행시켰던 행응어린이집이 관급공사의 예산집행으로도 노출 콘크리트가 만들어진다는 예를 만들어 주었다.
기념관의 성공적인 결과는 그 동안 지우지 못하고 있었던 노출 콤플렉스를 어느 정도 씻어주었다.
건축가협회상을 비롯하여 상도 여럿 받게 되었다.
전문적이거나 대중적이거나에 관계없이 평가를 받게될 때마다 미니멀이란 단어가 등장하였다.
그 동안 화두로 삼고 있었던 「없음」의 개념적 의미와 겹쳐서 디테일의 생략으로 드러나는 단순성이 미니멀하다는 인상을 느끼게 하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수사적인 형식들을 배제하고 물성의 근본적인 질감만으로 이루어진 형식에서 미니멀한 감각은 분명하였다.
그러나 회화에서 사용되고 있는 미니멀리즘의 개념과 부합되는가에 대하여는 의문이었다.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로 시작되는 미니멀리즘의 개념적인 체계와 사람의 체취가 담겨야 하는 건축적 상황에 얼마나 근접할 수 있는지가 문제였다.
미니멀리스트들의 단순한 큐브와 아무리 단순하다하여도 그 속에 생활이라는 리얼리티를 품고 있는 건축의 큐브는 쉽게 연결되지 않았다.
르네상스이후 원근법에 의한 회화의 발전은 형태로부터 감각으로 그리고 의미에 이르는 표현방식으로 전개되어왔다.
보이는 대로 그리는 것에서부터 개념을 나타내는 형식에 이르게 되기까지의 추상화과정과 건축의 양식이 변화하는 과정에서 근사치를 발견하기는 쉽지 않았다.
모더니즘의 감각으로 장식에서 벗어나고 형식이 명료해진 것을 추상적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지 모르나 회화와 전혀 다른 생산과정의 궤도를 보면 다른 내용일 뿐이었다.
회화에서 상징적 의도는 하나의 시점으로 압축되어 표현되지만 건축의 그것이 한눈에 읽혀지기란 불가능하였다.
크기의 크고 작음에 관계없이 조형적인 추상성의 문제는 본질적인 차이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여겨졌다.
작업에 관계되는 의지가 일원적인 것인가 다원적인 것인가 에서부터 분명해지는 차이는 결과로서 개념적인 추상성을 만들 수 있을지 모르지만 이미 순수성을 잃고 있는 것이기에 건축에서의 실현으로 불리워지기를 어렵게 하였다.
김옥길기념관의 경우는 특별하여서 건축작업이 순수예술의 과정과 비슷하였다고 할 수도 있었다.
건축을 결정하는 기능은 윤곽만 예정되어있었을 뿐이었으므로 만들어진 결과에 기능이 대입되는 순서였으며 작업과정 내내 의지의 순수성을 방해받거나 간섭받지 않았다.
메디치와 미켈란젤로의 관계도 그렇지는 않았을 것이라 생각들 정도였다.
작업에 제공된 기술 역시 디자인과 일체를 이루어 진행되었다.
디자인의 손과 발이 되어 구사된 기술은 남의 것이 아닌 제것이어서 화가의 물감과 붓이 되었고 조각가의 정과 망치가 될 수 있었다.
물성의 무성화와 디테일의 단순성으로 미니멀하다는 것은 형식적인 것에 관한 것일 뿐이어서 미니멀리즘의 차원에는 이르지 못하는 것이었다.
단순한 방식으로 표현하려한 것이 하나의 개념적인 감각을 만들어내지 못하면 내용 없는 형식에 그치고말 것이 분명하였다.
구차스런 설명과 해설없이 제시된 것만으로 전달되기를 바랐던 것은 공간에 대해 그 동안 정리하였던 몇 가지 생각들이었다.
공간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있는 것에 부여되는 의미로 존재하는 것이며 그러므로 안과 밖으로 나누어지는 것이 아니라 통합된 하나로 인식되어야한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건축작업은 형태의 창작이 아니라 공간을 자리잡게 하는 작업이어 야하므로 공간감을 구속하거나 간섭하는 건축적 요소들은 가능한 한 억제되어야 하였다.
형식과 형태는 내재된 질서로만 역할 하여야 한다는 생각과 만들려고 하는 것이 공간의 의미라고 한다면 김옥길기념관의 작업은 미니멀을 염두에 둔 결과임이 분명하였다.
그러나 또 하나 분명한 것은 미니멀을 처음부터 내세운 작업이었다기보다 되어진 과정과 결과가 미니멀의 범주에 포함되었다는 것이었다.
결국 하려고 한 것과 만들어진 것이 의도적인 목적보다 자연스러운 결과론에 가깝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건축작업을 통해 이루려고 하는 것을 명분으로 삼을 의도는 전혀 없으나 하고 있는 과정과 이루려는 욕심을 보면 그림 그리기에 열중하였던 처음의 기억으로 되돌아가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그때 그때의 작업들이 허술함과 그에 따른 실패의 연속이었음에도 미련스러운 고집을 계속하고 있는 것은 방법이 건축으로 선택되었을 뿐 생각은 오래 전에 이미 정해져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다.
출처 - http://archinude.com/essay/2.ht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