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광신 : 잘 가, 형!
4월 25일 새벽 핸드폰의 벨이 울린다. 평소 폰을 끄고 자는데 이날따라 폰을 켠 채로 잠이 들었었다.
폰을 받으니 힘없는 큰형의 목소리가 들렸다.
“광신아, 광오형이 쓰러졌다. 지금 부천성가병원 응급실이란다.”
“알았어, 형! 빨리 갈게.”
황급히 씻고 아내를 재촉하여 부천으로 향했다. 차 중에서 회사로 연락을 하고 물어물어 부천성가병원에 도착했다. 응급실에 가 보니 형이 보이지 않았다. 담당 간호사에게 물으니 응급실 구석의 작은방으로 안내를 했다. 거기에는 작은형 한 사람만 쓸쓸히 누워있었다. 순간 죽음의 공포가 몰려 왔다. 놀란 마음으로 형을 보니 이미 동공은 초점 없이 풀린 채 거친 숨만 몰아쉬고 있었다. 잠시 후 응급의가 와서는 빨리 가족들에게 연락을 취하라고 하였다.
그 의사의 말로는 ‘오늘을 넘길 수 없을 수도 있고, 길어야 사흘’이라고 한다. 너무도 기가 막혔다.
“꺼억 꺽!” 하는 작은형의 거친 숨소리가 불안을 더했다.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것만 같았다. 눈물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의사를 급히 부르니 의사는 전혀 서두름 없이 왔다. 그리고는 몇 가지 조치를 하고 중환자실로 형을 옮겨 갔다. 입원 수속을 마치고 온 큰형과 함께 우리는 중환자실로 쫓아갔다.
절망적인 의사의 말을 다시 한번 듣고 중환자보호자 대기실에 앉아 있으려니 답답하기 이를 데 없었다. 조카들이 오기를 기다리니 더욱 초조해지기만 하였다. 1시간쯤 후에 조카딸 수영이가 도착하였다. 조그마한 체구의 수영이는 너무나 서글피 울었다. 수년전 형수와 이혼을 한 까닭에 엄마와 함께 살던 수영이는 아빠가 만나자고 하던 날 약속 장소에 나가지 않아 ‘아빠를 바람 맞혔다’고 회한의 눈물을 한없이 흘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5형제가 참 재미있게 지내던 어린 시절 형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며 우두커니 앉아 있으려니 시간이 멈춘 듯 하였다. 무거운 침묵을 깨고 막내동생이 장례 문제를 꺼냈다. 아무런 준비 없이 갑자기 쓰러진 형, 군에 있어 아직은 경제적인 여유가 없는 조카 태성이와 철부지 조카딸 수영이…
2년 전 셋째형이 갑자기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이제는 남은 3형제가 장례를 치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막내 광철이는 형제들이 얼마씩을 염출할 것을 제의하였고, 어쩔 수 없이 그리 하기로 하고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일산 집으로 와서 이런저런 마무리와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잠자리에 들었으나 뜬눈으로 밤을 새게 되었다.
뾰족한 수 없이 기도하는 마음으로 울다가 한숨짓다가 새벽에 잠깐 잠이 들었다. 밥이 먹히지 않아 빈속으로 회사에 와서 곧 있을 며칠간의 공백에 대비한 준비를 하였다. 일이 손에 잘 잡히지는 않지만 급한 일들을 정리하니 어느새 오후 4시가 되었다. 병원에 갈 요량으로 조퇴를 하고 오후 5시경 집에 도착하였다. 아내의 퇴근을 기다리며 답답한 마음을 달래고 있는데 폰이
또 울렸다. 5시 30분이었다. 발신자 확인창에 뜬 이름은 큰형의 것이었다.
“광신아, 형이 세상을 떴다.” 하며 큰형은 마구 운다.
“형, 금방 갈게.” 울먹이며 전화를 끊었다.
아내에게 빨리 오라고 연락을 한 후 앞으로 있을 며칠간의 일을 생각하며 샤워를 하였다. 이윽고 아내가 도착을 했고 여장을 꾸려 부천으로 향하였다,
부천성가병원 장례식장 앞에서 동생 광철이를 만났다. 뭔가를 분주하게 준비하고 있는 동생을 뒤로 하고, 아내와 나는 지하1층 8호에 갔다. 거기에는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 뜻밖에도 오래 전 형과 헤어졌던 작은형수도 있었다. 반갑기 그지없으나 반가운 기색을 하기에는 분위기가 어울리지 않았다. 작은형수는 오히려 나를 위로해줬다. 학창시절 큰형수와 작은형수 두 분은 나를 무척 사랑해주었다. 늘 좋은 음식, 깨끗한 의복을 준비해 주었고 그런 형수들을 보며 나의 아내도 그런 사람이기를 바랐었다.
큰형을 보자 또 눈물이 치솟았다. 동생을 잃은 사람과 형을 잃은 사람이 서로 실컷 울고 나니 조금 마음이 편해지는 것 같았다. 조카 태성이도 붙들고 엉엉 울고 난 후 형제들, 동서들이 교대로 문상객을 맞으며 장사의 첫날을 시작하였다.
10시에 작은형의 처남인 박창운 목사님이 오셨다. 기독교인으로서 작은형의 구원 문제 때문에 더욱 안타까워하던 나는 큰 위안이 되었다. 박 목사님은 섬세한 배려와 함께 정성껏 임종예배를 집례해주셨다. “하늘 가는 밝은 길이”라는 찬송을 부르며 나의 사랑하는 작은형이 천국에 갈 것을 믿으려 애를 썼다.
내 눈물이 형의 천국행로를 깨끗이 해주리라 생각하며 정말 한없이 울었다.
11시경 임종예배가 끝나고 형의 영정 앞에서 기도하며 바라보았다. 영정의 사진은 태성이가 가지고 다니던 젊을 때의 사진이었기 때문에 죽기 직전에 보았던 형의 모습과는 사뭇 달랐다. 약간 미소를 띤 모습이 보기 좋았다.
영안실의 한쪽에는 작은 방이 하나 있다. 상주들이 쉴 수 있도록 마련된 그 방은 그럭저럭 잠도 잘 수 있는 곳이다. 큰형과 함께 거기에서 잠을 자고 있는데 밖이 소란하다. 누군가가 와서 대성통곡을 한다. 그 사람이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작은형에게 한이 많이 남았는지 울다가 쉬었다가 또 운다. 밤새 뒤척이며 약간이나마 눈을 붙일 수 있었다.
빈소가 지하에 있어 새벽이 되었어도 시각을 짐작하기 어려웠지만 더 이상 누워있을 수 없어 잠자리에서 일어났다. 몸은 찌뿌듯하고 머리가 약간 아팠다. 아침식사를 하고 다시 온 가족 친지들이 모여 이 날 있을 일을 상의하였다.
제일 중요한 행사는 입관이었다. 정오경에 입관을 하였는데 나는 차마 형의 시신을 볼 수 없어 빈소에 남아 영정의 형과 대화를 나눴다.
오후 1시에 박 목사님이 오셔서 입관예배를 집례해주셨고, 입관예배 후 나는 조카들에게 내가 알고 있는 작은형의 이야기를 해주었다. 일부러 아름다운 추억들만을 주로 이야기해주었다. 적지 않은 시간 이야기를 하며, 특별히 삼촌으로서 당부도 빼지 않았다.
저녁부터는 생각 외로 많은 문상객들이 왔다. 맞절을 얼마나 했던지 허리가 아플 정도였고, 슬픔을 느낄 겨를도 없었다. 쓸쓸할 것만 같았던 당초의 예상과는 정반대로 왁자지껄한 상가가 되었다. 큰형 주변의 사람들, 내 주변의 사람들, 동생 주변의 사람들, 조카의 친지들 등등 각자가 감사의 마음으로 접대를 하며 참으로 바쁘게 하루를 보냈다. 아니 하루를 넘기고 새벽까지 정말 힘들게 조문객을 맞이하였다.
평소 작은형은 인정이 많아서 누가 조금이라도 슬픈 일을 당하면 잘 울곤 하였다. 그래서 그랬는지 우리가 잘 알지 못하는 많은 분들이 문상 와서 눈물을 흘리고 갔다.
새벽에 조문객들이 모두 가고 우리는 방명록과 부의금 봉투를 정리하였다. 조카의 부담을 덜어주고 우리 모두의 슬픈 마음을 위로해 준 고마운 그 분들을 일일이 챙기며 정확한 기록을 남겼다.
그리고 장례의 마지막 날을 서둘러 채비하였다. 대충 씻고 아침을 먹으니 벌써 10시가 넘었다. 빈소를 정리하고 11시 20분에 발인예배를 드렸다. 슬픈 마음으로 찬송을 하며 12시에 운구를 하였다. 부평의 화장장에 도착을 해서 접수를 마치고 유족대기실에 앉아 있으니 납덩이처럼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드디어 작은형의 화장을 위한 순서가 되었다. 제복을 입은 화장장 직원이 형의 시신이 담긴 관을 화장시설에 밀어 넣고 거수경례를 하였다. 철문이 무겁게 닫히자 조카딸 수영이가 오열하며 쓰러졌다. 나는 목이 메어 “잘 가, 형!”이란 말을 간신히 할 수 있었다. 더 이상 어떤 말도 할 수 없고, 오직 눈물을 흘리는 외의 어떤 행동도 할 수 없었다.
그런데 화장장 구내식당에 가서는 이내 정신을 수습할 수 있었다. 작은형의 친구 중 나를 좋아하던 문기 형이 위로를 해주어 잠시나마 슬픔을 잊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점심 식사를 하는 둥 마는 둥 하며 모니터 상으로 나타나는 작은형의 화장 진행 상황을 바라보고 있는데 예정 시간보다 화장이 일찍 끝났다는 전갈이 왔다.
모두는 황급히 유골수습처로 갔고 나는 문기 형과 이야기를 나누며 천천히 유골수습처 입구로 갔다. 잠시 후 조카 태성이가 작은형의 영정을 안고 그 뒤에 동생 광철이가 보자기에 싸인 유골항아리를 들고 왔다.
“그게 형이야?”
나는 그렇게 말한 후 태성이를 안고 서럽게 울었다. 얼마 전까지 그렇게 농을 잘 하던 형이, 일주일 후에 만나자고 약속했던 형이 몸 전체를 작은 항아리 하나에 담고 나타난 것이다. 불러도 대답할 수 없는 가루가 되어 내 앞에 있으니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오후 3시 30분 우리는 형을 영원히 안치할 일산의 청아추모공원으로 향했다. 청아추모공원으로 가는 길가에는 그렇게 아름다운 꽃들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데 형은 항아리 안에 갇혀 농도 못 하고 답답한 어둠 속을 간다.
오후 5시경 그곳에 도착하여 수속을 마치고 많은 이들이 영원히 잠든 그곳에 형을 모시고 마지막 예배를 드렸다. ‘절대 이제는 울지 않으리라.’ 다짐을 했지만 목사님의 말씀을 들으며, 찬송을 부르며 조용히 눈물을 흘렸다. 모든 순서가 끝나고 어울리지 않지만 조카들을 위로하는 박수를 쳤다. 계단을 따라 올라와서 다시 형이 누워 있는 건물을 바라보았다.
어릴 적 있었던 일이 문득 생각났다.
중1 때 2학년 선배 녀석이 별 이유 없이 나를 때린 적이 있다. 형은 나를 무척 사랑했었는데 내가 맞았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녀석을 몇 십 배로 응징하였다. 수년 후에 그 선배는 셋째형의 친구가 되어 우연히 우리 집에 놀러 왔다. 선배는 나를 보고는 화들짝 놀라며 “여기가 너네 집이냐? 너네 형은 어딨어? 내가 지옥에 왔구나!” 그 선배는 평생 잊지 못할 무서운 가족이라고 하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인정이 많으나 가족을 끔찍이 사랑했던 우리 형의 과잉보복을 생각하며, 나도 모르게 남이 보면 부끄러울 미소를 살짝 흘렸다. 형이 포근히 누워있는 건물을 바라보며 이렇게 말했다.
“잘 있어, 형!”
사흘간의 슬픈 여행… 참으로 길고도 우울한 여행은 이렇게 마쳤다.
첫댓글 이 글을 쓴 최광신입니다. 우연히 제 글이 실린 것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부족한 사람의 글을 실어주셔서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종종 들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