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의 석빙고이다.
현재까지 전해오는 석빙고 가운데 규모가 가장 큰 경주의 석빙고이다.
겨울에 얼음을 채빙하여서 여름에 사용할 수 있도록 저장해 두는 돌로 만든 창고 석빙고이다.
얼음이나 냉기를 인공적으로 만드는 기계장치인 오늘날의 냉장과와는 다르다.
석빙고는 자연의 순리에 따라 겨울에 채집해 두었던 얼음을 빙실의 온도를 낮게 해서
봄, 여름까지 녹지 않게 효과적으로 보관하는 냉동 창고인 것이다.
추울 때 채집해 두었던 얼음을 녹지 않게 효과적으로 보관하는 인공창고로서
겨울에 얼음을 채취하여 저장하였다가 여름에 사용하였다
얼음을 보관하는 시설은 돌로 만든 석빙고만이 아니라 목재로 만든 목빙고도 있었다.
석빙고는 505년 신라시대 이후 조선 말기 양빙(동빙고와 서빙고)제도가 없어질 때(1898년)까지
지속적으로 실생활에 이용한 첨단 과학시설물로서 옛날에 냉음이라 불렀다.
보관된 얼음은 각종 제사에 필요한 음식 제조에 사용하거나 벼슬아치, 노인, 환자에게 나눠주었으며
특히 상(喪)을 당하였을 때 시신이 빨리 부패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나누어주었다고 한다.
옛 경주석빙고의 모습
(석빙고의 정면 앞쪽에도 바람막이용의 석벽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지증왕 6년(505년) 11월에 ‘시명소사장빙(始命所司藏氷)'라고 기록하고 있다.
유사에게 명하여 얼음을 저장하도록 하였다는 것이다. 얼음을 관리하는 빙고전(氷庫典)이라는 관청을 두고
대사 1명 사 1명의 관원을 두었다는 기록도 있다.
경주 월성(반월성,사적 제16호)은 파사이사금 22년(101년)부터 신라 멸망때까지 800여년간 신라의 왕궁이 있었다고 전하는 곳이다
보물 66호로 지정되어 있는 경주 석빙고는 월성 안의 북쪽 성루 위에 남북으로 길게 자리하고 있으며
그 규모는 남북 길이 18.8m, 홍예(紅霓: 아치형 천장) 높이 4.97m, 동서 너비 5.94m이다.
회색으로 칠해진 부분이 석빙고의 빙실이다
지붕은 반원형이며 홍예(虹霓)처럼 된 석재 5개를 틀어 올리고 홍예석(虹霓石)과 홍예석 사이의 천장에는 세 곳에
배기공(환기통)을 마련해 공기가 통하게 했는데, 조각한 돌로 구멍을 덮어 비와 이슬을 막고 있어 다른 석빙고와 구별된다.
(환기구의 덮개돌은 근래 수리할 때 석탑의 옥개석을 사용한 것이다)
석빙고는 외견상 고분과 같은 형태를 하고 있는데 얼음을 보관하는 빙실은 주변 지반과 비교하여 절반은 지하에 있고
나머지 절반은 지상에 있는 구조가 대부분이다
남쪽에 마련된 높이 1.78m, 너비 2.01m의 출입구를 통해 계단으로 내려가면 바닥을 경사지게 하여 어름에서 녹아 내린 물이
성 밖으로 배출되도록 바닥 중앙에 배수로가 설치되어 있다
석빙고의 바닥은, 흙다짐이나 그 위에 넓은 돌을 깔아 놓았고 바닥을 경사지게 만들어 얼음이 녹아서 생긴 물이
자연적으로 배수되게 하였다.
빙고 구조에서 가장 특징적인 요소는 빙실의 천장을 아치로 만든 것이다.
석빙고의 아치는 같은 크기의 돌을 아치로 쌓아 올려 무지개 형상을 만들고
마지막으로 정상부에 다른 돌보다 조금 크기가 다른 석재를 꽂아 마감했는데 아치 종석이라 부른다.
그런 다음 그 사이를 장대석처럼 다듬는 판석을 치밀하게 축조해 천장을 완성시키는 방식으로 조성한다.
아치 구조로 빙실을 만들면 기둥이 없으므로 얼음을 취급하는데 편리하다.
내부는 연석(鍊石)으로 5개의 홍예를 틀어 올리고 홍예와 홍예 사이에 길쭉한 네모 돌을 얹어 천장을 삼았다.
벽면은 직사각형의 작은 석재로 정연하게 쌓아올렸고, 밑부분은 장대석을 연결하여 지대석(址臺石)을 삼아 견실하게 축조하였다.
천장에는 3개의 환기 구멍이 있다.
이러한 환기공은 봉토 밖으로 이어지며 환기공 위에 환기공보다 큰 개석을 얹어
빗물이나 직사광선이 들어가지 않도록 하였다.
환기 구멍은 중심부에서 북쪽으로 치우쳐 설치하였다.
이것은 입구가 남쪽에 있으므로 안으로 내려가는 층계가 몇단 있어서
그만큼 자리[房]를 차지하고 얼음창고의 주실(主室)은 좀 더 깊이 들어간 내부의 북쪽에 있기 때문이다.
출입구는 남쪽에 있다.
바깥 지반보다 낮은 위치에 설치하였으며,계단을 따라 빙실로 들어가게 되어 있다.
출입문의 크기도 얼음의 출납에 지장이 없을 정도의 크기로 출입구를 통한 열 손실이 최소화되도록 하였다.
구조물 위에 덮는 흙은 진흙과 함께 석회를 혼합하여 외부에서 물이라든가 습기가 침입할 수 없도록 하기 위한 용도였으며
또한 봉토에는 잔디를 심어 열의 손실을 막고 봉분이 수해에 의해 손상되지 않도록 하였다.
경주 석빙고의 경우 여름철 실외 온도가 섭씨 28도 였을 때
빙실내의 온도는 18.9도로 온도 교차 범위는 8.2도라는 조사보고서도 있다.
이는 얼음이 저장되어 있지 않은 상태에서 조사된 것이며 실제 얼음이 저장되어 있는 상태라면
온도의 교차 범위는 훨씬 더 커진다고 볼 수 있다.
석빙고에는 한 겨울에 얼음이 가장 두껍게 얼었을 때, 일정한 두께 이상을 일정한 크기로 잘라 저장했다.
석빙고 바닥에 짚을 깔고 얼음을 한벌 놓고 사이 사이에 짚과 등겨를 덮고, 다시 얼음을 재는 것을 반복하였을 것이다.
석빙고나 목빙고를 만드는 위치는 얼음을 채집해 운반하기 좋은 강가나, 못 가의 경사진 응달이면서
읍내에 가까운 곳에 세웠졌을 것이라고 본다면 경주 석빙고는 월성의 북쪽 경사진 응달에 자리잡아
이곳에서 가까운 월지(안압지)의 꽁꽁 언 얼음을 떼내어 쌓아두었다가 여름에 환자들에게나
상가(喪家)에 공급했던 것이 아닐까 한다.
현재의 석빙고가 지어진 연대에 대해서는 조선시대에 지어진 것이라는 견해와
신라시대에 축조한 것을 현 위치로 옮겼다는 신라시대 축조설(築造說) 두가지 견해가 있다.
신라시대에 축조한 것을 현 위치로 옮겼다는 견해로는 삼국유사, 삼국사기 등에 얼음을 저장한 기록이 있으며,
조선 영조 당시 인적마저 외딴 이곳에 석빙고를 축조하였을 까닭이 없다는 점 등을 들어서 신라시대의 것을
개축하여서 이어온 것이라는 주장이다.
조선시대에 이곳에 석빙고를 만들었다는 견해는 월성 남쪽에 남천이 흐르고 있어 채빙하기에 편하다는 점과
성루의 경사를 이용할 수 있었다는 점 등을 들고 난 뒤, 전체적인 구조와 설계가 조선시대에 세워진 청도 석빙고,
대구시 측후소 내에 있는 석빙고 비명(碑銘), 안동의 석빙고, 경남 창녕읍 석빙고 등과 같이
18세기 전반에 축조되었을 것이라는 견해를 보이고 있다.
석빙고축조비
석빙고축조비
이맛돌에 새겨진 기록
숭정기원후재신유추팔월이기개축(崇禎紀元後再辛酉秋八月移基改築)’
‘숭정 기원(1628년)이후 두번째 신유년(1741년) 가을 8월에 이곳으로 옮겨 지었다.’는 뜻이다.
석빙고 입구의 좌측에 있는 석비의 비문에 '숭정기원후재무오 (崇禎紀元後再戊午)'라고 적혀있어 1738년(영조14년)에 개축되었으며,
당시 경주부윤이던 조명겸이 목조(木造)의 빙고(氷庫)를 석조(石造)의 빙고로 다시 축조하였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고,
석빙고 입구의 이맛돌에는 '숭정기원후재신유이기개축'(崇貞紀元後再辛酉移基改築)이라고 쓰여 있어
3년 뒤인 1741년 8월에 동쪽으로 약 100m정도 옮겨 현 위치에 재 축조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 영조(英祖) 때, 경주 부윤(慶州府尹)으로 부임한 조명겸(趙明謙)이 백성들에게 어렵고 귀찮은 점이 무엇인가 물어보았더니
“한겨울에 얼음을 깨어 저장하는 것도 힘들지만, 그 창고를 나무 집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해마다 장마 때 태풍에 넘어져 새로 짓는 일이 무엇보다도 번그럽고 소비적입니다.” 라고 하였다.
이에 부윤이 백성들의 노고를 덜어 주기 위해 영조 14년 무오년(1738)에 돌로써 영구적인 얼음창고를 짓게 하였으니
이 사실로 미루어 이미 목빙고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현재의 위치로 옮기기 전의 석빙고터
현 위치로 옮기기 전 옛 위치는 지금의 석빙고보다 서쪽 약 100m지점에 웅덩이로 남아 있다.
현재 영조 당시 축조한 석빙고 가운데 경주의 석빙고가 가장 완전하게 보존되어 있으나,
아직까지 신라시대에 축조된 석빙고의 위치가 어디인지
또 조선시대의 만들어진 석빙고와는 구조면에서 어떠한 공통점을 갖고 있는지는 밝혀진 바가 없다
현재 우리나라에는 신라나 고려 때 만든 빙고는 지금 남아 있지 않다.
경주 석빙고와 안동 석빙고, 영산 석빙고, 창녕 석빙고, 청도 석빙고, 현풍 석빙고 등은 모두 조선 시대 때 만들어진 것이다.
그중에서 규모나 기법에서 가장 뛰어난 걸작이 경주석빙고이다
석빙고와 같은 시설을 만들어 여름에 항상 얼음을 사용할 수 있도록 만든 것은
세계적으로 거의 유례가 없는 것으로 우리 조상들의 슬기에 또 한번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석빙고의 옛모습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청도의 석빙고이다.
석빙고는 내부의 기준이 되는 홍예(무지개 구조)를 일정항 간격을 두어서 설치하고 그 바깥쪽에 장대석을 덧걸거나
건너지르는 방식으로 건설하였다. 그리고 벽면은 성문 형태처럼 수직 벽면 위에 무지개 설치하는 궁륭형의 방식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바깥쪽은 무지개틀 없이 작업이 가능하고 쉽게 만들 수 있다.
홍예 구조물 위에 설치한 장대석 위에는 흙으로 덮고 잔디를 심었기 때문에 외형은 긴 타원형의 봉토 고분처럼 보인다.
홍예형 빙고의 장점은 무엇보다 ㅅ자형 지붕(맞배지붕)보다 외부 공기나 온도에 영향이 적을 뿐만 아니라 중량 배분에도 유리하다.
또한 기둥을 생략할 수 있어서 보다 넓은 공간을 확보할 수 있고 힘의 분산을 통한 견고성과 함께 원형의 아름다움과
조화될 수 있는 우수한 구조이다.
-위의 글과 사진은 다음 카페 <토함산솔잎파리>의 '신라시대에도 얼음보관을-경주 석빙고'를 옮겨온 것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