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영동교회 엄창옥 집사님이 어제 대구시 교육감 후보 출마 기자회견을 하셨습니다. 우리 영동교회 성도님들 중에도 우리 집사님의 신앙과 삶이 어떤지에 대해서 모르시는 분이 많을 것 같아서 담임목사인 제가 4차례에 걸쳐서 소개하고자 합니다.
제1회, 엄창옥 집사의 가정과 삶
제2회, 엄창옥 집사의 교회생활
제3회, 엄창옥 집사의 사회적 관심
제4회, 엄창옥 집사의 교육적 관심
1. 엄창옥 집사의 가정과 삶
[1] 엄창옥 집사의 부모.......마지막까지 새벽기도에 힘쓰셨던 분
내가 영동교회의 담임목사로 부임해 왔을 때(2007.9월), 집사님의 부모는 은퇴 장로, 은퇴 권사님이셨다. 두 분은 매우 하나인 부부셨다. 마치 바늘과 실처럼, 언제든지 함께 다니셨다. 동네 마실도 함께 다니셨다. 장로님은 은퇴하시고 연로하셨지만, 계속 서예를 하고 계셨다. 나중에는 서예전도 개최하셨다. 두 분은 돌아가시기 직전까지 새벽기도에 충실하셨다. 나는 새벽 강단에서 이런 말을 몇 번 했다. “나도 나이 들어서도 저분들처럼 새벽에 기도하게 하옵소서.” 하는 마음으로 기도했다고...
나는 주로 밤에 경북대 캠퍼스를 걷는 운동을 했다. 그리고 가끔씩 인문관 앞에서 권사님이 의자에 혼자 앉아서 기도하고 계시는 모습을 보았다. 곁에 앉아서 대화를 나누었다. 아들이 있는 학교여서 자주 오시고, 운동삼아 오시기도 하지만, 늘 자식을 위해서 기도하는 어머니의 마음은 어쩔 수 없는 것이다. 나는 그 자리에서 기도하시는 권사님의 모습을 종종 보았다.
지금 두 분은 이미 소천하셨다. 장로님이 먼저 소천하셨고, 몇 년 후에 권사님이 소천하셨다. 영덕 강구의 뒷산에 묻히셨다. 나는 두 분의 장례를 모두 집전했다. 행복한 두 분이셨다. 가끔씩 교회 차를 타고 가시다가 영덕을 지나면, 소녀처럼 환하게 웃으시면서 어린 시절과 장로님을 만나 결혼하게 된 과정을 말씀해 주시곤 하셨다. 그리고 항상 웃으신다. “나는 정말 행복한 사람이지...장로님 만나서 복 받았고....나도 처음에 고생 많이 했어...” 처음 결혼해서 사셨던 어려운 시대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참 눈물 나는 그런 삶이었다. 행복한 마음으로 과거를 돌아볼 수 있으니 정말 다행이 아니겠는가!
[2] 교육자의 집안
아버지 장로님은 평교사로 은퇴하셨다. 어머니 권사님 역시 처녀 때 유치원 교사로 일하셨다. 엄창옥 집사님도 교육자(경북대 경제통상학부 교수)이시고, 부인 집사님도 교사로 은퇴하셨다. 모두가 교육자 집안인 셈이다. 그래서 엄창옥 집사님 역시 늘 교육자의 냄새가 풍긴다. 그리고 교육에 열정적이시다. 교회의 교육 현장에서도 여전히 열정적으로 봉사하고 있다. 장로님과 권사님은 늘 자애로운 분이셨다. 사랑이 많은 분들이다. 그러나 자녀들은 엄히 반듯하게 키우셨다. 그래서 그런지 엄창옥 집사님 역시 늘 반듯하다. 교육의 가정에서 자란 결과일 것이다.
[3] 무명 교사 예찬(헨리 반 다이크)
엄창옥 집사님은 어제 국채보상운동 기념공원에서 대구시 교육감 출마 기자회견에서 말씀 도중 이런 부분을 말씀하셨다.
“아버지의 손에는 늘 교무수첩이 들려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교무수첩 앞에는 ‘무명교사 예찬’이라는 헨리 반 다이크의 시가 쓰여 있었습니다. 우리 3형제는 늘 그 시를 함께 외우곤 하였습니다. 이제 출마의 다짐하는 시점에서 이 시를 다시 한번 외워보겠습니다....
무명교사 예찬
.......
그를 위해 부는 나팔은 없고
그를 태우고자 기다리는 황금마차는 없고
그의 가슴에 장식할 금빛 찬란한 훈장도 없도다.
그가 켜는 수많은 촛불
그 빛이 후일 되돌아와
그를 기쁘게 하나니,
이것이야말로 그가 받은 유일한 보상이로다
......(헨리 반 다이크, 무명교사 예찬 일부)
교육감 후보로 결단하고 기자회견을 하면서, 어쩌면 어렸을 때부터 외웠다는 이 시가 그의 마음에 가장 깊이 담겨 있다가 표출되었을 수도 있겠다. 그렇지 않겠는가? 교육감이 되는 것 역시 큰 벼슬을 얻는 것도 아니다. 다만 이 일을 잘 감당했을 때, 후일에 맺어질 열매가 반드시 있을 것이다. 그날을 위해서 오늘 주어진 기회를 수고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