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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나를 찾아서 / 윤대녕의 소설세계
- 나병철 / 한국교원대학교 국어교육과 교수 1. 미로에서 길찾기 문학에 한정해서 얘기하자면 90년대 문학은 자신의 존재의 이유를 되돌아볼 만큼 위기의 시대였다고 할 수 있다. 위험하고 지루한 그 여로에서, ‘길은 시작되고 여행이 끝난 것’이 아니라, ‘길이 보이지도 않은 채 여행은 계속되었던’ 셈이다. 그렇기에 실상 이 시대에는 길이나 터널보다는 늪이라는 비유가 적절할지도 모른다. 그 문학적 늪은, 처음에는 전환기의 지연현상으로 이해되었으나, 90년대도 다 끝나가는 지금은 그 자체가 이 시기의 특징이라고 할 수밖에 없게되었다. 이제 우리는 오리려 그것이 다른 종류의 길을 경험한 여행이었음을 말해야 옳을 것이다. 80년대와는 사뭇 달라진 그 길은 곧게 뻗은 큰 길이 아니라 미로였다고 할 수 있다. 미로에서는 직선의 평면과는 달리 적이 보이지 않는 것이 특징이다. 싸워야 할 적수도 뚜렷한 목적지도 감지되지 않기에, 이 여행은 여행이 다 끝나도 길이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길을 잃은 ‘나’는 필경 ‘나’ 자신을 잃어버린다. 비유적 의미에서 길이란 우리의 욕망이 안에서 밖으로 나아가기 위한 내면의 통로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바깥 길을 헤매는 동안 안의 길도 헤매게 된다. 이점에서 내면의 길을 잃은 90년대 소설의 주제는 ‘잃어버린 나를 찾아서’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안과 밖의 미로를 그리는 90년대 소설들은, 합리적인 사회적 목적의식의 상실로 인해 감각적이고 내밀한 개인의 세계에 빠진 듯이 보인다. 박일문, 장정일, 윤대녕 등 90년대 전반을 수놓은 작가들에게서 공통적인 것은 감각적이고 신선한 문체와 구성방식이다. 이들은 독특한 개성을 가지고 개인적 세계를 세밀하게 그려낸다. ‘세상이 천만번 변해도 나는 나’라는 신세대의 주장을 이들은 나의 세계를 형상화함으로써 보여주는 듯하다. 이러한 자기중심성은 그 강박에 가까운 충동에 의해 개인적 주체의 과잉으로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주체의 자기정립은 그런 개인의 세계에 폐쇄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진정으로 나를 주장하기 위해서는 나의 실현이 세계 속에서의 자신의 위치 정립과 상응해야 한다. 왜냐하면 세계와의 관계망에서 벗어난 주체란 생각도 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나란 과연 무엇인가. 주체(나)는 단순히 몸의 ‘나’나 관념의 ‘나’로 환원되지 않는다. 그보다도 ‘나’란 몸(물질)을 근거로 사회와의 다양한 관계 속에서 자아를 확립하는 실천적 존재이다. 따라서 진정으로 자기자신의 주인이 되기 위해서는 복합적인 사회적 장을 가로지르는 자기 실천이 필요하다. 그와 달리 사회 밖의 벽 속에서 자기를 주장하거나, 사회 안에 감금되어 ‘나’를 상실하는 것은 주체의 정립과는 거리가 멀다. 사실 이 폐쇄적 자기주장과 주체의 상실은 동전의 양면과도 같은 것이다. 즉, 사회로 나아가지 못하면서 과도하게 자기를 내세우는 것은 주체의 상실을 강요하는 사회적 조건의 부산물인 셈이다. 이 점에서 신세대의 자기주장은 역설적이게도 ‘나’를 잃어버린 사회의 반작용이다. 실제로 다양한 개성을 지닌 90년대 자가들의 공통점은 탈주체화된 사회를 그리고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여러 방법을 동원해 탈주체화된 세계에서 ‘나’를 찾아가는 모험을 형상화한다. 나를 빼앗는 세계에서 나를 찾는 이 모험은 탈근대적 문학의 핵심 주제이기도 하다. 주체의 죽음을 낳은 포스트모던의 세계에서 90년대 문학의 강렬한 개성은 이제 나를 둘러싼 관계망이 소설의 전쟁터가 되었음을 말해준다. 소설을 자아발견의 과정으로 보는 것은 무론 전통적인 소설에도 적용된다. 그러나 그 모험의 과정은 매우 다른 양상으로 나타나고 있다. 예컨대 리얼리즘 소설은 이상과 현실이 분열된 세계에서 문제적 개인이 자기자신을 찾아가는 여행을 형상화한다. 하지만 리얼리즘의 자기발견의 과정은 부단히 인물과 환경의 상호작용 속에서 나타난다. 그리고 양자의 상호작용은 빈번히 인물의 환경에 대한 내면적 싸움으로 그려진다. 리얼리즘이 건강하게 느껴지는 것은 이처럼 어떤 환경에서도 인물의 주체성이 훼손되지 않기 때문이다. 즉 리얼리즘의 주인공은 현실(환경)에 패배하면서까지 자신의 내면성의 승리를 확인한다. ‘문제적 개인의 자기 인식에로의 여행’이란 바로 이 내면성의 승리를 의미한다. 어떤 점에서 자아상실이란 모더니즘의 특징적인 주제일 것이다. 모더니즘은 리얼리즘과는 달리 현실(환경)에서 격리된 인물을 그린다. 모더니즘의 현실의 상실은 인격의 분열을 초래한다. 그러나 모더니즘은 분열된 인격을 보상하려는 형식적 장치를 통해 오히려 자아의 과잉을 가져온다. 즉, 소외된 인물의 내면의식을 복합적으로 구성해 현실과의 내면적 관계를 그려낸다. 모더니즘이 난해하게 느껴지는 것은 이처럼 과잉된 내면적 구성을 사용하기 때문이다. 모더니즘이 현실에서 고립된 인물을 그리는 반면 포스트모더니즘은 다시 현실로 돌아온 인물을 그린다. 포스트모더니즘이 오히려 리얼리즘과 가깝게 여겨지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러나 모더니즘에서 나타났던 자아상실은 도리어 더 짙은 절망으로 부각된다. 이런 묘한 역설은 어떻게 생겨난 것일까. 한마디로 모더니즘은 현실없는 나를 그린 반면 포스트모더니즘은 나 없는 현실을 그리기 때문이다. 근대소설은 어떤 식으로든 자아와 현실의 투쟁관계를 그려낸다. 그런데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에서 권력은 폭력과 배제의 방식으로 자아를 파멸시키려 시도한다. 반면에 포스트모더니즘은 욕망과 쾌락의 장치를 사용해 자아를 파괴하는 현실을 그친다. 즉 포스트모더니즘에서 권력은 행복을 나누어 주면서 나를 빼앗는 것이다.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에서는 자아와 현실(권력)의 대결(혹은 분열) 관계가 분명히 드러나지만 포스트모더니즘에서는 미궁같은 혼돈으로 그려지는 것은 이 때문이다. 또한 다시 현실로 돌아온 포스트모더니즘에서 리얼리즘의 건강한 주체가 나타나지 않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이다. 욕망의 장치로 주체를 에워싸 나를 빼앗는 방식은 후기자본주의의 사회구조에서 기인된 것이다. 후기자본주의는 푸고의 권력의 그물망 개념에 잘 적용되는 구조로 되어 있다. 권력은 일상의 삶 속에서 미세한 그물로 나를 둘러싸 탈주체화시킨다. 따라서 이런 사회 구조에서는 나를 찾는 소설적 방법 역시 미세하고 내밀한 전략을 쓸 수밖에 없다. 잃어버린 나를 찾는 모험은 잃어버린 현실(시간)을 찾는 여행과는 달리 현실공간에서 이루어진다. 따라서 모더니즘이나 메타픽션의 반서사성에서 벗어나 두 사람의 소설에서는 서사성이 부활한다. 그러나 리얼리즘과는 달리 이들 소설 속의 현실은 미로와도 같은 불가해한 세계로 나타난다. 모순의 근원을 알 수 없는 현실에서 나를 찾는 싸움 절망적일 수밖에 없다. 이들 소설 속에 글쓰기, 밀교, 환상 등 현실 속의 비현실의 장치가 탈출구로 내장되는 것은 이로 인한 것이다. 우리 90년대 소설들에도 이같은 후기자본주의의 서사적 징후가 얼마간이든 나타나고 있다. 예컨대 윤대녕의 소설은 현실과 비현실을 뒤섞는 방법을 통해 나를 찾는 싸움이 ‘보이지 않는 적’과 대결하는 새로운 방법임을 암시한다. 그의 소설은 후기자본주의 사회의 미로에서 잃어버린 안과 밖의 길을 찾는 모험을 보여준다. 그 모험은 내면의 길을 잃은 나를 찾는 낯선 여행이기도 하다. 이제 윤대녕의 소설을 통해 미로의 바깥으로 탈출하려는 그 내면의 모험을 살펴보기로 하자.
2. 허무적 세계의 외부와 환상의 공간 흔히들 윤대녕의 소설에는 길이 있다고 말한다. 그 길위에 여자가 있고 우연한 만남이 있다. 그리고 길을 떠나는 사람들은 대부분 허무의식에 사로잡힌 사람들이다. 그의 소설에서 이 우연성, 만남, 허무의식은 어떤 연관이 있을까. 우리는 윤대녕 소설의 만남이 대개 결락된 만남이며 그 충족의 결핍은 허무적인 세계에서 비롯되었음을 알 수 있다. 허무적 세계의 여행에서 윤대녕 소설의 특징은 길을 떠나는 순간 길을 잃어버린다는 점이다. 그것은 그의 길이 미로이기 때문이다. 우연성의 의미도 바로 그 점과 관련이 있다. 잘 계획된 도시의 길과는 달리 미로에서는 우연성이 중요한 계기가 된다. 여자와의 우연한 만남이나 그 여정에서 느닷없이 떠오르는 마음속의 결핍감은 그의 여로의 성격을 잘 보여준다. 미로를 둘러싸는 화려한 이미지들은 실상 내면의 길을 잃은 현란함의 표현에 다름 아닌 것이다. 그러나 그 정제된 어지러움은 허무적인 세계를 벗어나려는 욕망의 표현이기도 하다. 허무란 고뇌와 민과는 달리 내면을 송두리째 어둠에 점령당하는 것을 의미한다. 허무 속에서 나타나는 시적인 이미지는 유리로 된 성채처럼 깨어지기 쉬운 것이며, 늘상 그 너머로 다른 세계로의 탈출을 꿈꾸게 된다. 그 때문에 윤대녕의 탈출은 환상이나 비의적인 삶과 같은 특별한 공간을 필요로 한다. 그의 소설에서 여자와의 우연한 만남은 허무에서 탈출하기 위한 장치의 하나로 나타난다. 그러나 그 탈출의 계기는 또한 허무를 보다 분명히 확인하는 계기이기도하다. 온통 허무에 점령당한 시대에는 사랑으로조차도 진정한 만남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허무에서 벗어나서 잃어버린 나를 찾는 과정에서는 이제까지 버려졌던 계기들이 중요하게 작용한다. 가령 서구합리주의 제도 외부에서 표상을 얻지 못하고 떠도는 문화적 흔적들, 즉 ‘호피인디언’, 보디페인팅 같은 전위예술에서 판소리, 인연설, 환생 등의 동양사상에 이르기까지, 그것들은 존재의 불가사이를 일깨우고 구멍투성이의 삶을 메우며, 제도 밖으로 떠도는 탈주자들을 사로잡는다. 이처럼 그가 허무에서 달아나는 방법은, 이질적인 낮선 문화나 전설이 된 문화적 암호들을 통해 이쪽에서 저쪽세계로 가버리는 것이다. 그가 달아는 통로는 일상과 신비의 이중적으로 중첩된 언어들, 그 화석에 박힌 꽃무늬 같은(3월의 전설) 암호들이다. 은어, 산수유, 화개 등의 화사한 이미지들은 이제는 굳어버린 돌 속에 박힌 암호들을 풀어내는 눈부시게 빛나는 표상들이다. 그러나 그 눈부심에 눈멀어 우리가 버리고 온 검은 도시를 상기하지 않는다면, 꽃무늬처럼 우리 자신이 화석 속에 들어가 박혀 어둠이 되고 말 것이다. 윤대녕의 소설은 항상 그 빛과 어둠의 한계지점에 놓여 있다. 그러면 이제 구체적으로 그의 소설에서 탈출의 여정을 살펴보자. 이른바 존재의 시원으로의 회기는 그의 탈출방식을 나타내는 표상 중의 하나이다. 그가 환상이나 밀교적인 공간을 통해 존재의 근원으로 돌아가려는 것은 자기정체성의 상실을 극복하려는 내밀한 시도로 이해된다. 우리는 그의 근원회기의 모험이 탈주체화된 사회에 대응하려는 은밀한 전략임을 주목해야 한다. 윤대녕 소설은 현실과 환상을 뒤섞은 방법을 사용함으로써 빈번히 사회적 배경이 베일 속에 가려지곤 한다. 그러나 사회적 맥락이 흐려진 경우에도 그의 소설은 늘상 후기자본주의의 허무적 세계를 배경으로 한다. 허무적 현실을 삶의 비의로 감싸는 그의 소설은, 신비주의와 합리성의 서사문법을 이중코드화함으로써 따뜻한 사랑을 구원한다. 아마도 윤대녕 소설은 90년대 소설 중 때묻지 않는 사랑을 그리는 유일한 경우일 것이다. 사랑이나 성을 다른 90년대 다른 소설들이 과도한 성적 묘사로 인해 스스로 혼돈에 빠지는 반면, 윤대녕은 사랑을 주제를 그리면서도 항상 혼돈을 극복할 또다른 세계에 사로잡힌다. 비의적 세계에의 집착은 때로는 현실성을 상실하게도 하지만 그대신 허무를 넘어서서 따뜻한 사랑으로 충족된다. 따라서 윤대녕의 또다른 주제는 사랑을 통한 진정한 만남이라고 할 수 있다. 존재의 근원회기는 늘상 <자기정체성의 회복>과 <진정한 만남>을 위한 내면적 모험인 셈이다. 윤대녕의 소설에서 그 비밀스런 모험은 다양한 방법으로 나타난다. 가령 ‘은어낚시통신’에서는 밀교의식과 은어의 은유를 통해, ‘불귀’에서는 실종된 여동생을 찾는 여행으로, ‘소는 여관으로 들어온다, 가끔’에서는 불교적 환상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January 9, 1993 미아리 통신’에서는 일상에 깃든 삶의 비의로, ‘말발굽소리를 듣는다’의 경우는 말과 함께 떠나는 환상으로 그려진다. 이들 소설은 모두 일상 속의 환상의 기미나 일상 바깥의 밀실을 그리고 있다. 이처럼 신화적 상상력을 통해 불가해한 삶의 비밀을 추적하는 점에서 윤대녕의 소설은 윤후명의 서정적 소설과 흡사한 면을 지닌다. 그러나 윤후명의 서정세계에는 진정한 만남에 대한 향수가 담겨 있으며 소외와 고독에서 벗어나려는 자연(그리고 신화)을 통한 내면의 화해가 존재한다. 그에 반해 윤대녕 소설에서 그려지는 것은 절망과 허무의 현실이다. 자기정체성을 상실한 현실에서 이제 더 이상 진정한 만남은 가능하지 않은 것이다. 그의 소설에 이혼이나 이별이 자주 그려지는 것도 이 때문이다. 하지만 결락된 만남으로 인한 현실의 절망은 빈번히 환상의 경험으로 싸여진다. 그리고 환상의 경험은 절망과 허무의 현실을 포근한 사랑으로 덮어주는 것이다. 윤대녕의 소설에는 결핍된 자아(그리고 결락된 만남)를 가져온 현실의 요인이 매번 분명히 그려지지 않는다. 그러나 신비적인 소설들 역시, 합리성의 극단에서 물화된 삶에 절망한 사람들을, 합리성을 해체한 비의적 삶을 통해 구원하려는 시도로 보인다. 따라서 그의 소설에서는, 타인처럼 사는 삶들이 어긋난 만남에서 자아를 되찾는 근원적 만남으로 회유하는 모험이 그려진다. ‘은어낚시통신’에서는 ‘나’와 그녀는 만날 때마다 성적 관계를 가지면서도 아무런 감동도 느끼지 못한다. 광고모델인 그녀와 촬영팀의 ‘내’가 만난 것은 추운 초봄 성산포에서였다. 두 사람은 달빛 젖은 유채꽃의 바닷가에서 느닷없는 그리움 속에 첫 관계를 갖는다. 그 후 서울로 와서 수차례 기계적인 메마른 섹스에 열중하지만 끝내 타인같은 눈빛을 나눌 수밖에 없었다. ‘나’는 ‘상처에 중독된’ 사막같은 사람이었기 대문이었다. 그녀 역시 ‘삶으로부터 거부된 사람들’중의 하나였다. 마침내 그녀는 작별도 없이 ‘책 속의 글자처럼’ 수많은 인파에 묻혀 타인이 되고 만다. 이처럼 이 소설은 사랑의 힘을 거세당한(자아를 잃은) 사람들의 결락된 만남을 그리고 있다. 하지만 마치 은어가 회유하듯이 현실로부터 근원으로 회기함으로써 ‘나’는 정체성을 되찾고 그녀와 재회한다. 이 소설에서 근원회기의 과정은 밀교의식 속의 환상을 통해 이루어진다. 그들은 토하는 자세로 깊숙이 허리를 구부리고 앉아 저마다 피스(peace), 피스 라고 뇌까리면서 낮은 웃음소리를 냈다. 한번도 경험한 바 없었지만, 나는 직감적으로 그들이 하고 있는 일이 무엇인가를 깨달았다. 풀잎 타는 냄새가 내가 있는 곳까지 수평으로 느리고 떠와서는 코끝에 달라붙었다. (중략) ... 좀, 더, 와야만 해요. 표정없던 그녀의 얼굴에 격한 감정의 흔들림이 스치고 지나가는 게 보였다. 그러한 와중에 나는 그녀가 나를 만나곤 하던 그때의 순간들에 나에게서 지워지지 않는 상처를 입었음을 확연히 깨달았다. 그녀는 산란 중인 은어처럼 입을 벌리고 무섭게 몸을 떨고 있었다. 그녀는 그런 자세로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고 있다가 마치내 벽에 모로 기대에 천천히 흐느끼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먼 존재의 시원, 말하자면 원래 있어야만 하는 장소로 돌아가기까지 나는 보다 많은 밤과 낮을 필요로 해야 했다. 긴 흐느낌의 시간이 흐른 뒤, 나는 가까스로 그녀에게 다가가 살아 있는 자의 온기라곤 느껴지지 않는 그녀의 차디찬 손을 완강하게 거머쥐었다. 아침이 오기까지 나는 그녀의 손을 잡고 내 살아온 서른 해를 가만 가만 벗어 던지며, 내가 원래 존재했던 장소로, 지느러미를 끓고 천천히 거슬러 올라가고 있었다. ‘은어낚시 통신’은 윤대녕의 소설 중 비교적 현실과 환상의 비중이 균형을 이룬 경우에 속한다. 그러나 이 소설은 마약과 밀교의 힘을 빌어 정체성을 회복을 꾀하는 점에서 현실도피적인 경향을 띠고 있다. 조금은 성격이 다르지만 이런 결함은 윤대녕의 다른 소설에서도 발견된다. 예컨대 ‘불귀’, ‘소는 여관으로 들어온다, 가끔’ 등은 현실보다 환상의 형상화에 기울므로써 신비적 초월성이 암시적 현실성을 가리우고 있다. 첫 장편 ‘옛날 영화를 보러갔다’에서는 단편들과는 달리 근원회기에서 현실로 다시 돌아오는 과정이 나타나다. 이 소설 역시 자아를 빼앗긴 주인공이 어긋난 만남에서 벗어나 진정한 사랑(그리고 자기 정체성을) 되찾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하지만, 자아의 회복과 사랑의 성취가 현실의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점에서 단편들과 구별된다. 아내와 별거중인 ‘나’는 <쇼팽네 가게>의 최선주에게서 사춘기 친구 유진의 환영을 보게 된다. 옛날영화를 보러갔다 선주와 우연히 재회한 ‘나’는 그녀와 가까워지면서도 과거를 도난당한 느낌에 사로잡힌다. ‘나’에게 자아의 ‘일식’을 가져다준 것은 열일곱살 때의 유진의 죽음이었다. 유진과 희배, 그리고 ‘나’는 그 시절 ‘벌레구멍’을 드나들며 삶의 이쪽과 저쪽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 유진은 ‘벌레구멍’을 통해 삶의 저쪽 영원으로 빠져나가고 싶어했다.
‘한번 같이 와줘, 보고 싶으니까.“ “여기로 말야?” “내가 여기로 오는 통로를 가르쳐 줄게. 벌레구멍 말이야.” “벌레구멍?” 우리는 수업시간에 벌레구멍이 이쪽 세계에서 저쪽 세계로 빠져 나가는 비밀 통로라는 걸 배웠다. 다음날 하학 후 나는 유진을 만나 벌레구멍을 통해 그 오렌지빛의 방으로 함께 들어갔다. 벌레구멍은, 그 하늘색 건물의 후문에 나 있었다. ...(중략)... 옥상에서 내려오기 전 유진은 마지막으로 이런 말을 남겼다. “난 늘 빛의 속도를 생각하고 있어. 내몸의 질량이 0이 될 때까지의 속도를 말야. 저긴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가 동시에 포함된 영역이야. 나는 거리고 가고 싶어.” 다시 벌레 구멍을 빠져나오니 자정이었다. 그러나 어느날 그들 셋은 ‘벌레구멍’ 속에서 저쪽 세계와는 다른 정반대편의 현실을 악몽처럼 경험한다. 즉 그들은 유진 어머니와 희배 아버지의 불륜을 통해 성적 욕망에 감금된 성인의 세계를 목격한 것이다. 모딜리아니의 그림처럼 무표정하게 서 있던 유진 어머니의 얼굴은 탈주체화된 성인이 표정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유진은 느닷없이 저쪽세계의 반대편으로 이끌린 충격의 반작용으로 영원히 돌아 올 수 없는 ‘저쪽’으로 가버린다. 이후 그녀의 죽음의 공범인 ‘나’는 과거의 자아를 상실한 채 타인처럼 살아가게 된다. ‘나’에게 자아회복의 필요를 일깨워 준 것은 선주였고 그것을 가능하게 해 준 것은 E(희배)와의 재회였다. 옛날 영화를 보는 중의 환상적인 재회는 과거로 돌아가 상처를 치유하고 ‘나’를 되찾는 제의적인 만남이었다. ‘나’와 E에게 옛날 영화는 벌레구멍의 공간으로 되돌아가게 해주는 제의적인 시간을 마련해준 셈이다. 나는 신음하듯 중얼거렸다. “자네는 전생의 허깨비야. 말하자면 살아있는 주검같은 존재지.” “그럴지도 모르지. 무덤이 곧 나의 현실이니까. 난 아직도 벌레구멍을 찾지 못하고 있는 열일곱살일세. 그래, 열일곱살에 이미 난 죽었네.” “......” “그런데 어떻게 삶과 죽음이 이렇게 한자리에 와 앉아 있는 걸까.” “오늘 난 한편의 옛날 영화를 보러 왔네. 영화가 끝나면 나는 내 공간으로 돌아갈 작정이네. 현실의 공간으로 말이지. 여기가 바로 내 벌레구멍일세. 과거를 회복한 공간말일세.”
나는 무의식의 상처를 치유함으로써 비로서 자아의 일식에서 벗어나 사랑의 힘을 되찾는다. 선주와의 평화로운 삶이 회복된 것은 바로 그 다음 순간이다. 이처럼 이 소설은 옛날 영화라는 벌레구멍을 통해 현실 이편과 저편을 넘나들며 자기정체성을 확립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그러나 이 소설은 그 과정에서 다소 개인적인 삽화에 의존하고 있어 결말의 주체의 회복 역시 개인의 구원이라는 느낌을 준다. E를 만나 뒤 ‘나’의 사유의 결론인 ‘절대적 평등’ 역시 구체적 현실경험과 유리되어 있어 추상적으로 다가온다. ‘절대적 평등’이나 주체의 정립이 보다 설득력을 지니려면 다양한 현실을 매개하는 더 많은 삽화들이 필요할 것이다. 윤대녕의 소설에서 환각의 묘사가 신선한 매력을 지니는 것은 현실을 합리적 서술에서 해방시켜 또다른 삶의 가능성을 열어어놓기 때문이다. 환상을 용인하는 불확적정인 현실의 이해는 죽어버린 합리적 현실을 극복하려는 단초로서 의미를 지니는 것이다. 따라서 현실과 환상을 넘나드는 통로는 벌레구멍 같은 유년기의 신비적 체험보다는 죽어버린 현실의 구멍 그 자체가 되어야 한다. 그 합리적 세계의 구멍과 무덤을 거쳐서만 삶의 비의성은 환상으로써 현실을 전복시키는 전망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윤대녕 소설의 환상이 더욱 빛나는 환상이 되려면 현실에 대한 보다 깊은 탐사가 전제되어야 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3. 우연성의 발견과 동양사상 윤대녕의 또다른 탈출방식은 합리주의에 의해 주변화된 전통문화의 표상들을 부활시키는 것이다. 가령 그는 서구적 합리주의(그리고 그 권력)에 억눌려 흔적으로 떠도는 문화적 코드를 복권시켜 합리주의적 재현과는 또 다른 재현을 만들어낸다. 이는 이제까지 유리가 불변의 현실로 생각해온 서구적 근대사회가 시상은 합리주의적 코드에 의거한 하나의 판본(재현)일 뿐임을 드러내는 셈이 된다. 즉, 서구적 합리주의와는 구별되는 또 다른 문화적 코드에 의한 재현을 제시함으로써, 서구적 근대사회를 여러 재현(판본) 중의 하나로 해체하는 한편, 그것(재현)을 불변의 현실로 강요하는 합리주의 속의 권력이 내재해 있음을 암시한다. 이처럼 합리주의적 현실을 해체하기 위해서는 그에 의해 주변화된 동양사상을 전근대적 맥락으로부터 더 해체해야 할 것이다. 동양사상이 전근대성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 그것은 근대적 합리주의에 의해 배제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와 달리 동양사상이 새로운 재현의 코드가 되기 위해서는 전근대적인 비합리적 초월성에서 벗어나 합리주의 사회의 탈주체화를 극복하는 새로운 인간관계의 원리가 되어야 한다. 역설적으로 합리주의를 해체하기 위해서는 동양사상을 합리주의의 명령문 앞에 놓아야 하는 것이다. 예컨대 불교적 인연설은 전생이라는 비합리적인 초월성에 집착하는 한 근대사회를 이해하는 새로운 재현의 원리가 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유연성 속의 인간관계마저 존중하는 인간의 원리로 이해될 때, 또 다른 재현 방식이 될 수 있다. 가령 윤대녕의 ‘전지간’에서는 모든 필연의 인간관계에서 매듭을 놓쳐버린 한 여자가 우연성 속에서 발견한 내면의 인간관계의 끈에 의해 새로운 삶을 얻는 과정이 전개된다. 그로 인해 이 소설의 인과관계는 필연이 아니라 우연에 의해 만들어진다. 윤대녕이 노리는 효과는 바로 그 필연적 인과율의 전복인 것이다.
그녀의 무표정한 얼굴에서는 나는 9개월 전 암 선고를 받은 뒤 외숙모의 얼굴에 드리워져 있던 차디찬 죽음의 그림자를 엿보고 있었던 것이다. 크나큰 당혹감이 천둥처럼 지나가고 나서 그리 길지도 않은 사이에 그녀의 얼굴에 뒤덮이던 적막한 체념의 그림자. 그것은 이미 죽음을 받아들인 자의 모습이라고 해도 좋았다. 이 소설에는 ‘그녀’가 허무와 죽음에 이르게 된 합리주의적 사회의 구조적 원리가 잘 드러나 있지는 않다. 그러나 한 남자와의 필연적 관계에 집착했던 그녀는 그가 떠난 후 합리주의화된 사회에서 모든 인간관계의 끈을 놓쳐버리고 만다. 인간관계의 죽음이라는 정신적인 종양을 앓고 있는 그녀는 암 선고를 받은 사람처럼 어쩔 수 없는 필연적인 죽음의 그림자에 붙잡히게 된다. 그게 나와의 거리를 좁히고자한 것은 아니었다 하더라도 내가 제 둘레를 떠나지 못하게 느슨해진 줄을 슬쩍 끌어당겨 놓은 것은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이 서먹할 리밖에 없는 우연 혹은 인연의 끈을 여자는 왜 이토록 질기게 틀어쥐고 있었던 걸일까. 여자는 자신의 전생을 지우기 위해 나와의 관계를 원했고 그리하여 아아는 살리되 아이의 아비에게서는 놓여 날 수 있었다고 중얼거리며 내 팔 안에서 깊이 잠이 들었다. 위의 두 인용문에서는 합리주의적 코드와는 다른 원리(불교적 인연설)에 의존하는 담론이 전개된다. 그러나 여기에서 ‘인연’이나 ‘전생’의 개념은, 비합리적인 (그리고 전근대적인) 초월성이 아니다. 죽어버린 합리주의적 사회의 구멍속에 틈입하는 살아있는 언어가 되고 있다. 즉, 무의식과 욕망마저 교환원리에 지배되어 모든 인간관계가 죽어버린 시대(후기자본주의)에는, 우연성(인연)이 죽은 합리주의적 관계에 대항하는 반격의 거점이 될 수 잇다. 사소한 우연마저 존중하는 불교적 인연설은 합리주의적 원리(그리고 그 권력)의 그물망에서 벗어난 내면의 인간관계의 끈을 보여준다. ‘천지간’은 합리주의적 사회에서 버림받은 한 여인이, 유연성 속에 숨겨진 그 내면의 인간관계를 발견함으로써 정신적인 죽음을 넘어서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위의 인용문들에서 불교적 인연설은 운명론적인 신비주의 대신 인간의 의지로써 인간관계의 끈을 발견하는 원리로 재해석되고 있다. 여자는 합리주의적 사회에서는 어색할 수밖에 없는 인연을 끈을 질기게 틀어쥐고 있다. 이는 그 우연성이 죽어버린 인간관계의 그물망에서 탈출할 수 있는 빈 틈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또한 그녀는 자신의 의지로써(우연성 속에)아직 살아있는 그 인간관계에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죽은 인간관계를 의미하는 ‘전생’을 지울 수 있게 된다. 이처럼 ‘천지간’은 합리주의적 재현을 대신하는 또 다른 재현(인연설) 방식을 보여주고 있다. 전자가 인간을 탈주체화시키는 허무와 죽음의 재현이라면 후자는 그로부터 탈출해 주체성을 되찾는 재생의 재현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우리가 살고 있는 후기자본주의 사회의 유일한 삶의 방식은 아니며 그와 다른 방식의 삶의 이해가 가능함을 보여준다. 그러나 합리주의와 구별되는 그 또 다른 삶의 이해}(그리고 재현)방식은 어떤 면에서 개인적인 구원을 제시할 뿐이다. 즉, 인연설의 재해석은 합리주의적 허무에서 벗어나는 빈 틈을 제시하지만 그 비좁은 구멍으로는 후기자본주의의 삶의 방향을 뒤바꾸는 전망이 잘 투시되지 않는다. 거시적 차원에서 새로운 전망의 부재는 ‘천지간’뿐만 아니라 그의 모든 소설(그리고 거의 모든 90년대 문학)이 지닌 한계를 암시한다. 그가 찾는 구원의 해방구는 한 개인이 들어앉기에도 비좁은 공간으로만 보인다. 그것은 그가 구멍을 찾기 위해 역투시하는 허무적 세계의 지형도가 너무도 좁기 때문일 것이다. 그로 인해 탈주의 공간에서 얻은 시적 이미지의 파편들을 버리고 온 세계의 추악한 환부와 오욕을 어둠 속에 지워버린다. 그러나 그 더러운 세계를 직시하는 고통없이는 다른 세계로 탈출하는 길도 보이지 않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