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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북정맥 제 4 구간 산행기
(동우아파트, 삼성그라비아 인쇄(주) ∼ 덕고개)
1. 산행일자 : 2007년 3월 10일 (토요일)
2. 산 행 지 : 고려산(307m) - 충남 천안,연기
3. 날 씨 : 흐림, 개임, 흐림, 비, 비·눈·雪風
4. 참 가 자 : 박봉하, 박상호, 안상경, 이정연(4명)
5. 산 행 계 획
[1] 총 산행 거리 : 약 15.32km,
[2] 산행 소요 시간 : 약 7시간 30분(휴식 및 점심시간 포함)
[3] 주요 구간별 거리
경부고속도<---[2.3km]--->돌고개(130m)<---[3.2km]--->한치고개(190m)<---[1.8km]--->아야목고개(180m)<---[1.0km]--->고려산(307m)<---[1.0km]--->691번도로(160m)<---[2.0km]--->비룡산(248.2m)<---[4.0km]---> 덕고개
[4-1] 경유지 및 산행 소요시간 예정
① 수원(05:00) ∼ 경부고속도로 ∼천안휴게소(05:40/아침/06:10) ∼ 천안IC ∼ 21번 국도(07:50)
② 경부고속도로굴다리(08:00) → 216.1봉/삼각점(08:25) → 돌고개(09:05) → 한티고개(09:50) → 아야목고개(10:40) → 고려산(11:00) → 2차선차도(11:20) → 고동고개(11:55/점심/12:35) →248.5/전의산연수원(12:50) → 프레야컨트리클럽(13:40)→ 1번 구 국도/덕고개(14:50) → 1번 신 국도 굴다리(15:00) → 요셉의집(15:25) → 탄약부대정문(15:45) → 691번 도로(16:30)
③ 21번 국도(17:30) ∼ 천안IC(18:00) ∼ 경부고속도로 ∼ 수원(20:00)
④ 탈출로 : 고동고개
[4-2] 산행의 실제
① 수원(06:00) ∼ 경부고속도로 ∼망향휴게소(아침식사) ∼ 천안IC ---21번 국도
② 경부고속도로굴다리--->삼성그라비아인쇄(주)(07:35)→216.1봉/삼각점(08:05) → 능선분기봉(많은표시기, 08:15)→묘→돌고개(08:37)→송전탑(09:05)→한티고개(09:10)→산신신위상석→진흥안씨묘(09:12)→서씨묘(09:15)→임도삼거리(09:20)→241.1봉(09:30)→봉(09:40/휴식)→안부(좌측시멘트도로가 보임, 09:50)→묘3기(09:54)→아야목고개(09:55)→고려산직전묘(10:10)→고려산정상(10:20/10:30)---(계단)→삼거리이정표(10:40)→산불감시초→능선분기→(우측)→묘→2차선포장도로(신고등고개/점심식사,10:55/12:00)→봉(12:10)→구고동고개(12:15)→삼거리 이정표(12:25)→고등터널(경부고속철도가 지나는 봉)→삼각점NO1(12:35)→비로봉삼거리(12:38)---(248.5봉/비룡산)→전의산연수원정문(12:50)→안부/묘(12:59)→안부(우측)→IMG컨트리클럽 주차장(13:14)→IMG컨트리클럽정문(13:17)→컨트리클럽도로 탈출지점(13:25)---(좌)→봉 삼거리(12:30)→남양홍씨묘(13:40)→묘→덕고개(14:05)
③ 21번 국도/삼성그라비아인쇄(주) ∼ 천안IC ∼ 경부고속도로∼ 수원
5. 산 행 기
[1] 산 행 전
금북정맥 산행을 시작해서 네 번째 산행인데 개인 사정으로 정해진 날(3월 4일)에 산행을 하지 못한 것이 두 번이나 된다. 3월 4일에 산행 대원을 확인해 보니 산악대장, 윤사장, 장부장이다.
화요일 출근하여 안상경 교장선생님께 3월 10일 정맥산행 의향을 타진해 보니 흔쾌히 참여하겠단다. 행여 정규산행에 빠진 대원 중 참여할 대원이 있나 싶어 다음 카페에 토요일에 정맥산행을 한다는 글을 올려두고 연락을 기다렸으나 기별이 없다. 3월 초라 모두 바쁜 모양이다. 3월 8일 박사장, 차를 운전해 함께 가겠다고 한다. 김미환 사장도 전화를 해 보니 갈 의사를 내 비쳤다. 내심으로 이것저것 걱정을 했는데 다행이다.
[2] 출발
산행 전날 퇴근을 하는데 안교장선생님 전화다. 어디에서 몇 시 출발할 것인가 궁금해서 박사장에게 몇 번 전화를 해도 연락이 되지 않는다고 걱정이다.
8시가 넘어 박사장 전화. 내일(금요일) 6시에 아파트 앞으로 오겠다고 한다. 늘 챙겨 가는 산행도구지만 다시 배낭을 점검하고 12시를 넘겨 잠자리에 들었다.
3월 10일 05 : 50분, 박사장 전화, 아파트 입구에 도착했단다. 한일 아파트에서 이정연 대원을 태우고 동수원 물류센타 앞 도착, 김미환 사장, 못 온다하고 안교장선생님, 집에서 출발했다고 한다.
06 : 20분경, 동수원 TG를 빠져 나와 이내 고속도로로 올라붙었다. 참여 인원이 적어서인가. 차창 밖 사물이 눈 깜짝하는 사이에 지나가 버린다.
망향 휴게소 도착. 된장국, 우거지 탕으로 아침 식사를 하고 천안 TG를 빠져 나와 오늘 산행의 출발지 『삼성그라비아인쇄 주식회사(07:35)』정문에도착했다.
동우아파트 정문 ---> 21번 도로의 신계리 고갯길과 고속도로가 접하는 곳의 계단---> 원골방향(응원 1리)으로 700m를 이동 ---> 굴다리 ---> 동천안 1급 자동차 정비공장(좌회전) ---> 『삼성그라비아인쇄 주식회사(07:35)』정문으로 와야 했는데 그 과정은 생략이다. 고속도로가 정맥을 관통했기 때문에 눈으로 확인하는 것으로 대체한다는 辨을 늘어놓는다.
[3] 돌고개 가는 길의 情趣
삼성그라비아인쇄 주식회사(07:35) 정문 앞 공터에 주차를 시키고 밭을 가로질러 여러 개의 표시기가 매달려 있는(한배산악회 표지기도 있음) 절개지 능선으로 올라붙었다.
쾌청한 날씨는 아니어도 산행하기에는 아주 적합한 기온이다. 숲 속으로 접어든다. 봄이 오는 낌새를 알아 차렸는지 진달래 가지 끝에는 애기 꽃망울이 맺혀 있다. 한 주정도 지나면 꽃망울이 붉게 부풀어 오르고 2,3일이 지나면 활짝 터지리라. 생강나무는 참을성이 없는지 벌써 노랗게 꽃이 피었다. 봄의 傳令이라도 되는 모양이다.
인적이 드문 곳이라 지난 가을에 떨어진 낙엽이 소복이 쌓여 밟고 지나가는 감촉도 부드럽고 아삭아삭 부서지는 소리는 발걸음을 경쾌하게 만든다.
쉬엄쉬엄 올라 도착한 곳이 삼각점이 있는 216.1봉(08 : 05분). 이마에 땀방울이 맺히기 시작한다. 능선분기 지점에 도착(08 : 15분)했다. 직진 길을 버리고 많은 표시기가 나무에 매달린 우측으로 걸음을 옮겼다. 능선 아래로 대단위 畜舍가 자리 잡고 있는데 냄새가 심하다. 빨리 지나가는 것이 上策이지 싶다. 누가 말도 하지 않았는데 모두 걸음걸이가 빨라진다. 다리 부상으로 산행이 어렵다던 박사장, 선두에서 뛰는 걸음이고 두 번째 정맥 산행에 참여한 이정연 대원도 박사장 뒤로 바짝 따라 붙는다. 이런 걸음이면 예정보다 한 시간을 앞당겨 목적지(군부대 정문 앞)에 도착할 것 같다.
능선분기 지점, 좌측으로 진행, 다시 삼거리에서 우측으로 방향을 틀어 가니 정성스럽게 손질한 묘(全義李公과 江陵金氏 合葬墓) 1기가 나타난다. 잠시 휴식을 가지며 주변을 살펴보니 2차선 포장도로가 앞에 보인다. 휴식도 잠시, 묘에서 출발하여 2분여를 걸어 2차선 포장도로에 내려섰다(08 : 37분). 先行者들의설명을 보니 이곳이 『돌고개』다.
『돌고개』를 『石峴』이라고도 하는데, 돌고개 밑의 마을 고개도 돌고개라고 한다. 살티 서쪽에 있으며 木川面 桃長里로 넘어가는 고개로 고개 부근에 돌이 많이 있다고 한다. <출처 : 성남면 용원리>
[4] 한티고개
돌고개를 가로질러 절개지 능선을 따라 오르다 보니 좌측 아래로 宅地를 조성한 곳이 있고 좀더 진행하면 넓은 공터에 도착(09 : 00시)하게 된다. 밭으로 쓰다 일손이 모자라 묵혀 둔 것 같다. 4기의 무덤 群과 송전탑을 지나면서(09 : 05분) 길도 완만하게 이어진다. 마을 뒷산을 산책하는 것 같은 평탄한 길이다. 잘 손질된 雙墓에 도착, 모처럼 시야가 툭 터진다.
09 : 10분, 임도 길을 시멘트 포장도로가 가로질러 나가는 사거리에 도착했다. 이곳이 귀골에서 성남면 한티에서 목천읍 도장리로 넘어가는 『한티고개』로 일명 『대티고개, 대티=한티』라고도 한다.
한티고개를 가로질러 임도를 따라 약 5분여를 가다보면 넓은 잔디밭에「山神神位」床石이 놓여져 있고 그 앞에는 十二支神像으로 테두리를 한 묘 2기가 있는데 한 기는 순흥 안씨(明彦)의 묘이고 또 한기는 달성 徐氏의 묘가 되는데 크기나 형태가 비슷한 것으로 보아 두 집안의 義가 좋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5] 아야목 고개
墓의 이모저모를 잠시 살펴보고 다소 가파른 峰(245.1봉) 하나를 오르고 다시 작은 봉을 지나면 더 큰 봉이 앞을 가로막는데 정맥 길은 山峰으로 오르지 않고 우측으로 휘어져 나간다.
峰에 올라(09 : 40분) 휴식을 갖고 좀더 진행하지 나무 사이로 마을(아야목) 집들도 언뜻언뜻 보인다. 안부 사거리에 도착(09 : 50분)했다. 시멘트 포장길도 눈에 들어온다. 저 포장길이 야아목 마을을 오가는 길 같다.
안부 사거리에서 약 4분여를 더 가니 4각 형태의 묘 3기와 또 하나의 묘를 지나 시멘트 포장도로에 내려섰다. 『아야목 고개』에 도착(09 : 55분)한 것이다.
"『아야목(我也目) 마을』은 충남 연기군 전의면 고등리 <고려산성>아래에 위치하며 <세거리>북쪽에 있는 마을이다. 고려 홍건적이 쳐들어 왔을 때 고려성에 피난하였던 사람들이 식수에 많은 고충을 느끼다가 성 아래로 내려오며 물을 마실 때 <아야목아><아이구 목아>하고 부르며 이곳 샘물을 마셨다 하는데, 그 샘이 있는 곳에 마을이 생기면서부터 <아야목>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출처 : 충청남도 사이버 문화원,충남의 문화, 연기군 소정면 지명 유래>
[6] 고려산, 고려산성
아야목 고개에서 산 하나를 바로 치고 오르면 高麗山이다. 『아야목 고개』를 뒤로하고 고려산 정상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오늘 산행 중 가장 높은 산(307.2m)으로 아야목 고개에서 약 1km 정도 오르면 정상이 된다. 산 중턱쯤 오르는데 산악대장으로부터 전화다. 산행이 잘 진행되고 있는지 묻는 안부 전화다. 걱정을 해 주는 관심이 고맙다.
10 : 20분, 고려산 정상에 올랐다. 다른 산 정상과는 달리 2000여 평에 달하는 평지가 조성 되 있고 사방으로 막힘없이 전망이 툭 터졌다. 천안시, 성남면, 전의면 등의 市街地 모습을 한 눈에 살필 수 있는 곳이다.
산 정상에 올라 10여 m 진행하면『고려산』표지판이 참나무에 매 달려 있고 쉴 수 있는 亭子와 高麗山城에 대한 안내판도 설치해 놓았다.
※※※ 高麗山城(고려산성) ※※※
⊙ 위치 : 연기군 소정면 대곡리 산 27. 고등리 산 113번지.
※ 해발 : 305m. 성둘레 : 250m. 토석혼축성(퇴뫼형)
⊙ 유래 : 나당연합군에 의하여 사비도성이 무너진후 백제 부흥군이 3년여에 걸친 (서기660년~663년) 항쟁본거지의 하나였으며, 그 후 고려 충렬왕 17년(서기 1291년 5월) 正左山(서면 창고개위치)에 침입한 哈丹敵을 고려 3장군(한희유, 김흔, 인후)이 연기전역에서 대승을 거두므로, 이는 高麗太祖(왕건)의 陰德이라하여 연기군 祖山城인 이곳에 고려 太祖廟(사당)을 세워 모신 이곳을 高麗山城이라 부르게 됨.
<연기군 소정면 지명유래>에는 "「소정면 고등리(高登里) 고려산(高麗山)위에 있는 산성을 고려산성(高麗山城)이라고 부른다. 고려 때 쌓은 산성으로서 옛날 백성들이 한번 난리를 만나고 이 산성에 피난하였으나, 식수가 적어서 갈증이 심하여 목이 아픔으로 성(城) 아래에 '아야목'이라는 부락(部落)이 있어서 이 부락에서 목을 축였다는 설(說)이 있는 산성이다.」라고 했으며 성(城)안에 기우제(祈雨祭)를 지내던 제단(祭壇)이 있었으며 연기팔경(燕岐八景)의 하나다."라고 소개를 하고 있다.
산성 주변 경관을 조망하고 정자에 앉아 준비해온 간식(계란, 배 등)으로 출출한 배를 채운다. 그리고 물 한 모금으로 목안을 적시고 기념 촬영을 한 후 고려산을 뒤로하고 하산을 했다. 고려산을 내려가는 길은 급경사로 통나무 모양으로 만든 시멘트 계단을 설치해 놓았다.
계단을 내려서니(10 : 40분) 넓은 평지로 길이 네 갈래로 나 있는데 의자(3개)와 이정표가 설치되 있다. 이정표에는「고려산성 300m, 아야목 750m(왼편), 작은황골 2200m(우측)」라 표시 되 있다.
4거리에서 100여 m를 진행하면 산불 감시 초소가 설치 되 있는데 많은 사람들이 고려산을 자주 찾는 것 같다.
[7] 고등이 고개와 비젼 자장면
[7-1] 신고등이 고개와 비젼 자장면
산불 감시 초소를 지나 4분 여 진행, 삼거리, 우측 길을 택해 진행한다. 간간이 구름을 뚫고 해가 비친다. 아직까지 봄의 생동감을 느끼기에는 이른 시기지만 바람 끝이 매섭지 않아 산행의 발걸음도 가볍다.
2차선 포장도로가 산을 관통하여 지나가는 고개 마루가 눈에 들어온다. 『고등고개』인가? 지도를 펴고 위치를 확인해 보니『고등이 고개』는 포장도로 절개지를 타고 올라 좀더 가야 한다. 정확한 위치는 분간할 수 없었지만 高登里가 멀지 않으니 『新高登고개』라 생각하자.
도로에 내려서기 전 밤나무 造林地 언덕 양지바른 곳에 자리를 잡고 점심을 시켜 먹기로 했다. 다소 이른 점심시간(10 : 55분)이긴 해도 이곳에서 음식 배달을 시킬 수 있다는 산악대장의 안내가 있었기 때문이다.
미리 안내를 받은 중국집(정통중화요리 「비젼손짜장」☎ 621-7877)으로 전화를 해 쟁반자장 2개와 소주 1병을 시키고 음식이 도착되는 동안 냉이며 망초대를 뜯어 비닐봉지에 담는다. 이른 봄나물의 대명사 쑥은 겨우 얼굴을 내미는 때지만 계절을 어른 맛보고 싶은 급한 마음이 발동했기 때문이다.
전화를 하고서 30여 분이 지체되어서야 자장면이 도착했다. 산행 중 자장면을 먹어 본다는 것도 희귀한 일이고 이런 곳까지 음식을 날라다 주는 비젼 손장의 성의도 놀랍다. 이런 것도 세태가 변하는 한 부분이란 생각이 든다. 넓은 쟁반에 손으로 뽑은 면도 가득하고 잣, 대추, 해삼 등을 각종 재료를 넣어 만든 자장은 단순한 한 끼 식사거리가 아니라 保養食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더하여 군만두까지 곁들였다. 배달원, 주문한 소주가 빠졌다고 다시 되돌아가 날라다 주는 친절도 고맙다.
[7-2] 원 고등이 고개
소주 한 잔에 保養食으로 점심을 마치고(12 : 00시경) 다시 출발이다. 신고등고개 포장도로를 건너 절개지 능선을 타고 올라 작은 山峰에 오르고(12 : 10분), 이곳에서 5분여를 더 가니 4거리 안부가 나타난다. 아름드리 堂山 나무(느티나무)가 서너 그루 있고 그 옆으로 누군가 작은 돌탑 두 개를 쌓아 놓았다. 元來(옛) 『고등이 고개』에 도착(12 : 15분)한 것이다.
고등리(高登里)는 백제 때부터 큰 골짜기여서 북방을 막는 산성(山城)이 있었던 지역(地域)이라고 하며 높고 곧은 큰 골짜기가 있는 山城 아래 부락(部落)이 생기면서부터 「곧은골」, 「고등(高登)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본래(本來) 전의군(全義郡) 북면의 지역이었다 1914년에 전의면(全義面)에 편입(編入)되었다가, 1993년 소정면이 신설되어 소정면에 편입되었다
全義面 高登里에서 大谷里로 넘어가는『고등이고개』는 「고등이재」,「고등현(高登峴)」이라고도 부르며 예전에는 한양(漢陽)과 통하는 삼남대로(三南大路)가 있어서 많은 행인(行人)이 넘나들었으며 선비들이 흥얼거리는 시조가락에 ‘들새가 잔잔하였다’는 옛 時調의 일 절에 등장할 만큼 유명한 고개였다고 한다. 지금은 큰 도로에 그 기능을 넘겨주고 옛 흔적만이 남은 한적한 고개가 되고 말았다.
[8] 전의산 연수원 가는 길
고등이재를 통과하고 峰 하나를 오른다(12 : 23분). 지나 온 고려산의 모습이 점점 흐려진다. 멀리 떨어진 것으로 생각했던 전의산 연수원 건물이 나뭇가지 사이로 언뜻언뜻 보인다. 오늘 산행의 목적지도 그리 멀지 않은 것 같다.
무명봉을 지나 약 2분(12 : 25분)을 진행하니 삼거리에 「등산로 / 등산로 / 고려산(금북정맥)」이라 표시된 이정표가 세워져 있다. 또 하나의 봉을 오른다. 쭉 뻗은 철길(경부고속철도)이 보인다. 우리가 지나가고 있는 산 아래로 철길이 지나가는 모양이다. 峰에 올랐다.(12 : 35분) 시멘트로 만든 원형 삼각점(NO 1)이 있고 연수원 건물이 더욱 뚜렷하게 보인다.
점심을 먹고 난 뒤부터 하늘에 점점 구름이 짙어진다 싶었는데 이곳 山峰에 오르니 바람이 심하게 불어온다.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질 것 같다. 산행이 끝날 때까지 비가 오지 말아야 하는데 ---.
삼각점봉에서 좌측으로 방향을 틀어 나가다 보니(12 : 38분) 삼거리에 또 하나의 이정표를 세워 놓았다. 「등산로 / 비로봉 / 등산로」.
연수원이 보이는 『비로봉』방향으로 진행. 평지 같은 길이다. 전의산 연수원 건물 뒤편 도착, 건물이 가로막혀 직진을 할 수 없다. 정맥 산꾼들이 다닌 길을 따라 좌측 내리막으로 50여 m를 진행하다 다시 산비탈을 타고 오른다. 外部 人이 접근하는 낌새를 알아채고 개들이 요란하게 짖는다.
연수원 정문 앞 도착(12 : 50분). 빗방울이 제법 굵게 떨어진다. 1회용 雨衣를 찾았으나 차에 두고 가져오질 않았다. 짐을 가볍게 하겠다는 꼼수로 비를 고스란히 맞아야할 처지가 되고 말았다. 배낭에 말아 넣어 둔 등산복을 꺼내 입는 것으로 응급 대처를 하고 부지런히 발걸음을 옮긴다. 오전 산행 때 좀더 부지런했으면 지금쯤 『덕고개』는 도착했을 텐데 ---.
[9] IMG 컨트리 클럽
연수원 정문에서 우측(관리소 맞은편) 내림 길로 들어서면서 대원들의 걸음걸이가 갑자기 빨라진다. 4거리 안부를 지나고 묘(우측), 골프장 옆 안부 삼거리를 지나 컨트리클럽 주차장에 도착(13 : 14분)했다. 주말이기 때문인지 빈 틈 없이 주차가 되 있고 연신 차들이 들어온다. 아직은 골프가 고급 스포츠지만 대중화가 될 날도 그리 멀지 않은 것 같다.
주차장 진입로 따라 진행, 주차장 끝 3거리에 IMG National이라 쓴 대형 간판이 있고 계속 진입로를 따라 1Km 정도 가니 도로를 벗어난 곳(좌측 산)에 정맥 길 표시기가 나무에 매달려 있다. 도로를 벗어나 산으로 올라붙었다.
[10] 덕고개 가는 길
13 : 30분, 봉 삼거리. 먼저 다녀간 산악대장이 한배산악회 표시기를 달아 놓았다. 한배 대원을 대하듯 반갑다. 전의산 연수원에서 떠날 때만해도 뜸하던 빗방울이 더 세차게 바람을 동반하고 내린다. 기온도 갑자기 떨어져 손끝이 시리다. 13 : 40분, 南陽洪氏 墓域을 지나는데 雪風이 몰아친다.
13 : 47분, 안부 사거리를 지난다. 바람이 세기가 점점 강해진다. 박사장, 『덕고개』에서 오늘 산행을 접자고 한다. 덕고개에서 한 시간 정도 더 가면 지난 산행 팀들이 도착했던 군부대 정문에 도착할 수 있는데 날씨도 좋지 않고 박사장 다리도 온전치를 못한 모양이다. 다음 기회가 있으면 채우자.
墓地群 도착. 경부선철도와 1번 국도가 나란히 지나가고 우람한 덕고개 표지석도 눈에 들어온다. 묘지 능선을 따라 2, 3분을 진행하여 1번 국도가 가로질러 빠지는 덕고개 마루에 도착(14 : 05분)했다.
여전히 눈을 동반한 비가 계속 내린다. 한기가 옷 속으로 파고든다. 덕고개 표지석이 있는 「광선종합건설」앞, 비를 피하며 차를 기다리려고 했으나 조류독감 防疫으로 출입 통제다. 마을까지 가면서 차를 타기로 했는데 마침 빈 택시가 온다. 다행이다.
[11] 아쉬움을 남긴 산행
14 : 50분 경 아침에 주차해 둔 삼성그라비아인쇄 주식회사 앞에 도착하는 것으로 오늘 산행을 마쳤다. 앞뒤를 자른 산행이었지만 정맥을 이어간다는 자부심을 가져본 산행이었다.
*************** [참고자료] ******************
<참고자료 1> 아야목 (소정면 고등리) 전설
고려시대 북쪽 오랑캐의 잇따른 침략으로 우리나라는 평화로운 때가 별로 없었다. 오랑캐의 침략 때마다 조정에서 임금을 모시고 강화도로 피난을 갔지만 미처 그쪽으로 빠지지 못한 사람들이 남쪽으로 내려오다 이곳 고려산성에 머무는 일이 많았다.
소정면 고등리에는 해발 60m 되는나지막한 산이 있는데, 이 산에는 약 2천여 평의 옛 성터가 남아 있다. 이성은 고려시대 쌓았다고 해서 ‘고려산성’이라고 부르고 산의 이름도 ‘고려산’이라 부른다. 고려산성 아래에는 ‘아야목’이라는 마을이 있는데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고려시대 북쪽 오랑캐의 잇따른 침략으로 우리나라는 평화로운 때가 별로 없었다. 오랑캐의 침략 때마다 조정에서 임금을 모시고 강화도로 피난을 갔지만 미처 그쪽으로 빠지지 못한 사람들이 남쪽으로 내려오다 이곳 고려산성에 머무는 일이 많았다.
몽고족이 침략할 때였다. 이 때도 송도는 몽고족에 짓밟혔고 임금을 비롯한 대신들은 강화도로 피난을 갔다. 그리고 일부는 남쪽으로 내려오다가 고려산성에 머무르게 되었다. 조그마한 산성에 수천 명의 피난민들이 모여들어 성안은 그야말로 사람이 걸려서 다닐 수가 없었다. 어디를 가나 군인들이 아니면 피난민들이었다. 전쟁은 곧 끝날 듯 하면서도 의외로 길어졌다. 자기 나라로 돌아가겠다던 몽고족들이 쉽게 물러가지를 않고 우리나라에 여러 가지 요구 조건을 내세웠다. 우리나라는 여러 가지 처지로 그들의 요구를 다 들어 줄 수가 없었다. 이렇게 두 나라가 의견을 교환하는 시간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피난민들의 생활은 고달팠다. 그들은 가지고 온 양식이 바닥이 나서 식량을 구하는 일도 힘들었지만, 무엇보다도 고통스러운 것은 물이 부족하여 불편하기 그지없었다. 세수를 하고 빨래를 하는데 쓰이는 물은 물론이고 밥을 지을 물까지 모자랐다. 성안은 물론 근처에 있는 마을은 모두 우물이 말랐다. 그래서 사람들은 십리 밖까지 물을 길러 나갔지만, 어디를 가나 오랜 가뭄 때문에 마찬가지였다. 피난민들은 오랑캐들보다도 가뭄을 더 무서워하게 되었다. 그만큼 그들에게는 한 모금의 물이 아쉬웠다. 어쩌다가 물이 생기면 그들은 체면 같은 것은 생각지도 않고 달려들어 물을 빼앗아 마셨다. 그러다가 뒤엉켜 싸움이 벌어지고 살인까지 하는 일도 있었다. 이처럼 성안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갈증을 느꼈다. 그러던 어느 날 누군가가 “기우제를 지내자.”라고 외치자, 성안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들 한군데로 모여들었다. 그들은 그곳에서 모두 하늘을 우러러보며 비를 내려달라고 정성을 들여 빌었다.
그러자 햇빛이 쨍쨍 내리쬐던 하늘에 갑자기 검은 구름이 몰려오더니 무서운 우레 소리와 함께 번개가 정신을 차릴 수 없을 만큼 번쩍였다. 하늘은 비를 뿌리며 점점 내려앉을 듯이 어두워졌다. 대낮인데도 앞집을 볼 수가 없었다. 번개가 여기서 번쩍, 저기서 번쩍하다가 갑자기 천둥소리가 요란하게 높아지더니, 마치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소리를 지르면서 쾅쾅하고 지축을 흔들었다. 그렇지 않아도 겁에 질려있던 사람들은 모두 땅에 엎드리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하늘은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구름이 모두 걷히고, 조금 전과 같이 뜨거운 햇빛이 쨍쨍 내리고 있었다. 땅에 엎드렸던 사람들은 일어나 하늘을 바라보며 비가 더 내리지 않는 것을 아쉬워했다. 그러면서 그까짓 비를 뿌리려고 사람만 놀라게 했다고 불평들을 했다. 그러나 잠시 후에 그들은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 조금 전에 요란하게 울렸던 천둥소리가 두 군데에 큰 웅덩이를 파고 우물이 솟아나게 했던 것이다. 사람들은 우물로 달려가 갈증을 풀면서 “아야 목이야. 아야 목이야”하면서 부르짖었다. 이런 일이 있은 뒤부터 사람들은 그곳 마을 이름을 ‘아야목’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참고문헌 : 연기실록, 연기군지,
<참고자료 2> 고려산성
소정면 고등리(高登里) 고려산(高麗山)위에 있는 산성을 고려산성(高麗山城)이라고 부른다. 고려 때 쌓은 산성으로서 옛날 백성들이 한번 난리를 만나고 이 산성에 피난하였으나, 식수가 적어서 갈증이 심하여 목이 아픔으로 성(城) 아래에 '아야목'이라는 부락(部落)이 있어서 이 부락에서 목을 축였다는 설(說)이 있는 산성이다.
성(城)안에 기우제(祈雨祭)를 지내던 제단(祭壇)이 있었으며 연기팔경(燕岐八景)의 하나이다.
<출처 : 연기군 소정면 지명유래>
<참고자료 3> 소정리(小井里)
원래는 전의군(全義郡) 북면(北面)의 지역이다. 천원군 풍세면(豊歲面) '소정(蘇井)'이라 부르기도 하였었다. '소정(小亭)'이란 잘못된 해석이다. 마을 앞에 소나무가 정자(亭子)처럼 서 있으므로 '송정(松亭)'이라 부르던 것이 '소정(蘇井)'이 되었고, 그 후 행정구역 개혁에 따라 이웃의 여러 마을을 통합하여 소정리(小井里)라 하고전의면에 편입(編入)되었다가 소정면이 신설되어 소정면의 중심마을이다.
<참고자료 4> 연기의 8경
연기군은 중부지역의 전형적인 농촌풍경이 어우러진 순박한 고장입니다. 명승고적의 뚜렷한 이미지보다는 높은 산과 큰 강, 옛 역사적 유적이어우러진 소박한 자연을 배경으로 선인들이 노래한 연기8경을 소개합니다.
1.오봉락조(五峰落照) : 오봉산
오봉산은 서면 동리에 있으며, 우뚝 솟아 하늘을 찌르는 듯해서 엄연한 연기군의 진산이다.
2.당수청람(唐岫晴嵐) : 당산
당산은 남면 연기리에 있는데 구름과 함께 어우러져서 금강에 비친 모습은 참으로 명승지라 할 수 있다.
3.침산추월(砧山秋月) : 침산
침산은 조치원읍의 서쪽 단산의 수려한 명승지이며 이름난 동산이다.
4.용당기암(龍塘奇巖) : 용당
용당은 동면 명학리에 있으며, 바위인가 못인가 신령스럽고 기이한 용이다.
5.금강귀범(錦江歸帆) : 금강
금강은 금남면 대평리에 있으며 파협 고강에 오초원범이다.
6.동진어화(東津漁火) : 동진
동진은 금강의 상류에 있으며, 푸른 물이 양양하고 이끼낀 바위가 도처에 있다.
7.고려고성(高麗古城) : 고려산성
고려산성은 소정면 고등리에 있으며 하나의 옛 성터가 천고의 명승지로 남아있다.
8.비암만종(碑岩晩鍾) : 비암사
비암사는 전의면 다방리에 있으며, 백제 및 통일신라시대의 고찰이며 전의와 전동의 경계에 위치하고 있다
<출처 : 조치원 문화원>
<참고자료 5> 전의면 유래
전의면은 백제때 구지현(仇知縣)이라 불렀다. 통일신라 경덕왕 때에 금지현(金池縣)이라 고쳐 부르다가 고려 때부터 전의(全義)라 불렀다. 전의라 불리게 된 것은 백제시대 이곳에서 전씨(全氏)가 많이 살았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전의 다방리 비암사에서 발견된 석불비상에 새겨진 ‘전씨’라는 명문과 이 일대의 지명이 전의(全義)·전동(全東)이라 한 것이 이를 입증하여 준다.
조선시대인 1414년에는 연기현과 전의현이 합하여 전기현(全岐縣)이라 했다가 1416년에 각각 환원하여 다시 전의현(全義縣)이 되었다. 1895년(고종 32)에는 전의군이 되어 7개면을 관할하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연기군에 흡수되어 현재는 연기군 전의면이 되었다.
전의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비암사(碑岩寺)이다. 과거 비암사는 “뱀절”이라 불렀다. 옛날에 비암사에는 비구니(여승)들이 기거하였는데, 어느 날인가 웬 낯선 남자가 해가 질 무렵에 나타나 밤새도록 탑돌이를 하기에 여승은 법당에서 눈치만 살피다 다음날 아침에 남자가 사라진 후에야 밖으로 나왔다. 그 후 이 남자는 계속 하루도 빠지지 않고 밤마다 나타나 탑돌이를 하였고, 궁금해진 스님은 남자에게 물을 떠주면서 그 연유와 어디에 사는 누구인지 물었다. 그러나 이 남자는 아직은 자신의 신분을 밝힐 때가 아니라며 대답을 하지 않았다. 스님은 궁금증을 풀기 위해 그의 뒤를 몰래 따라갔다. 남자는 탑돌이를 마치고 사찰 동쪽 산 정상으로 올라가 산꼭대기에 있는 커다란 바위 밑 동굴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남자가 굴에 들어가자 궁금해진 스님도 따라 들어갔는데, 스님은 커다란 구렁이가 또아리를 틀고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고 말았다. 그 구렁이가 하는 말이 “내가 사람이 되고 싶어 하늘에 기도를 하니 비암사 삼층석탑에서 백일동안 탑돌이를 하면 소원이 이루어진다 하여 탑돌이를 하였다. 백일동안은 아무도 모르게 해야 하는데, 하루를 남겨 놓고 너에게 들켜버렸으니 이제 다시는 사람이 될 수 없다.”면서 눈물을 흘리더란다. 스님은 자신의 잘못으로 구렁이가 사람이 되지 못한 것을 안타깝게 여겨 그곳에서 구렁이의 수발을 들며 일생을 보냈다. 이와 같은 전설이 전하여 오기에 비암사는 뱀절이라 불리었다.
그러나 비암사의 원 뜻은 사뭇 다르다. 1959년 발견된 불상이 마치 비석처럼 생겼고 이 불상을 비상(碑像)이라 부르는데, 비상이 있는 절이란 뜻으로 비암사(碑岩寺)라 불렀던 것이다. 이 비상이 제작된 연도는 673년이다. 비상에는 「전씨(全氏)가 주동이 되어 계유년(673년)에 백제의 역대 국왕과 대신, 발원자의 7세 부모의 원혼을 달래주기 위하여 이 불상을 만들어 시납하고 매년 4월 15일에 제를 올렸다」는 명문이 새겨져 있는데, 이를 근거로 비암사에서는 매년 4월 15일 백제대제를 지내고 있다. 비암사는 연기군 전의면에 있는 사찰이지만 백제권에서는 유일하게 백제왕들에게 제를 지내는 사찰로 나라에서 관리해야할 중요한 사찰이다.
전의면에는 산마다 산성이 쌓여져 있다. 운주산성(雲住山城)이라 부르는 산성은 원이름이 고산산성(高山山城)이다. 전의의 형국이 솥모양으로 생겼는데, 증산·고산·운주산이 솥의 발처럼 전의를 받치고 있다. 증산은 전의 북쪽에 있고 고산은 전의동쪽에 있으며 지금의 운주산을 가리킨다. 원래의 운주산은 전의남쪽 이성, 금이성, 비암사가 있는 산을 지칭하며 이성은 전의 이씨 시조인 이도(李棹)가 이곳에서 살았기에 붙여진 이름이다.
이도의 본래 이름은 이치(李齒)였다. 그는 대대로 공주 금강변에서 살면서 나룻배로 금강을 건네주는일을 하는 집안에서 자랐다. 고려 초기에 왕건이 견훤과 싸움을 하기 위하여 금강변까지 내려왔다가 장마로 물이 불어나 건너지 못하고 있을 때 이치가 어려움을 잊고 건네주어 승리하였으므로 왕건은 이치에게 도(棹)라는 이름을 하사하고 전성군(全城君)에 봉하니, 이때부터 이도(李棹)라 하고 전의이씨 시조가 되었다.
<출처 : 연기군 지명 유래>
첫댓글 고생하셨습니다. 일기와 건강에 따라 접는 지혜도 필요하지요. 그날 일기가 많이 좋지 않았었습니다. 그 날씨에도 꼭 완주하고자하셨던 그 마음과 앞서 세사람이 채운 길이 합해져서 우리 모두 완주한 것이라 여겨집니다. 회장님, 그리고 세 분 화이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