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ritten by. 전경웅 <enoch2051@hanmail.net>
이념의 실천 방안 모색과 조직화를 통한 확립기 : 1984년 ~ 1985년, 上
1984년 9월 17일 서울大 민간인 감금고문 사건
1984년 9월 17일 서울大 복학생들은 9월 17일 교내에서 80여명의 회원과 50여명의 재학생이 참가한 가운데 복학생협의회 창립 대회를 열고, 78학번 유시민을 집행위원장으로 선출했다. 이후 일련의 민간인 감금고문사건이 발생하였는데 이 사건의 개요는 다음과 같다(괄호 안은 감금 기간)
①임신현 사건(9.17∼18): 평소에 서울大를 선망하던 임신현은 서울大에 재학중인 친구를 만나러 갔으나 친구는 만나지못하고 복학생협의회의 술자리에 우연히 어울리게 된 후, 자신을 '78학번 공법학과 출신으로 소개했다. 그러나, 유시민 등이 78학번에는 공법학과가 없었다며 기관 정보원으로 의심, 학생회 사무실로 끌고가 다음날 오후 8시까지 기관 정보원임을 자백하라며 감금▪폭행한 사건이다. 임신현은 학교 직원의 연락을 받고 달려온 형이 고소하겠다고 하자 26시간만에 풀려났다.
②손형구 사건(9.21∼26): 손형구는 학력고사성적 때문에 대학 진학을 포기했으나 성당 교우들에게 서울大 법대에 입학했다고 속였다가 돌이키지 못하고 가짜 서울大생 행세를 했다. 이후 40여 차례나 서울大에 출입했고 사건당일에도 법대 앞에서 배회했다 손형구는 9월21일 오후 1시쯤 법대 사무실 앞 의자에 앉아 있다가 김진욱 등 2~3명으로부터 신분을 조사 당하고 서울大 학생이 아님이 드러나자 학도호국단 사무실로 끌려가 감금당했다. 유시민, 백태웅, 백기영, 윤오중, 오재영, 김도인 등으로부터 기관 정보원 추궁 받았다. 손형구가 기관 정보원이라는 명확한 물증이 발견되지 않자, 유시민, 백태웅 등은 신림동 소재 여관으로 자리를 옮겨 손형구를 감금했다가 다시 총학생회장실에 감금하는 등 약 5일 동안 불법 감금했다. 결국, 학교 직원의 연락을 받고 어머니와 삼촌이 왔으나, 석방해 달라는 요청이 거절당했다. 이에 가족들은 학생들의 감시가 소홀한 틈을 타 구출해 냈다. 이후 손형구는 강박증세로 인한 정신분열증세를 보이기도 했다.
③전기동 사건(9.26-27): 전기동은 1982년 대입검정고시에 합격하여 서울법대에 지원했다가 불합격한 후 방송통신大에 입학했다. 그 해부터 사법고시 준비를 위해, 도움을 받던 교수로부터 고시공부에 필요한 참고도서를 추천 받고자 서울大에 가끔 출입해오고 있었다. 전기동은 26일 오후 4시30분쯤 독도 문제와 관련된 국제법 리포트를 작성하기 위해 서울大에 잠시 들어갔다가 『잠깐 볼 일 있다』는 학생 7~8명에 의해 학생회관 3층 총학생회장실로 끌려갔다. 이곳에서 유시민, 백태웅, 윤오중 군등이 전氏의 소지품을 뒤져 주민등록증과 방송통신大학증을 확인했다. 학생들은 『너 소속이 어디냐, 기관원이지』하며 추궁했고, 전氏가 계속 『방송통신大학생이다, 왜그러냐?』고 하자 『안되겠다』 면서 오후 5시쯤 총학생회장실과 같은 층에 있는 서클 연합회 사무실로 데리고 갔다. 이곳에서 4~6명의 학생이 플래카드로 사용했던 나일론천을 찢어 전氏의 눈을 가리고 의자에 앉혀 양손을 의자 뒤로 묶은 다음 구타하면서 자백을 강요했다. 전氏가 자백을 완강히 거부하자 학생들은 다시 전氏를 화장실로 끌고 가 자갈과 숟가락으로 입을 벌려 주전자로 입과 코에 물을 퍼붓고 세면대 물통에 얼굴을 쳐박아 숨을 못 쉬게 하는 등 고문을 계속하였다. 그래도 자백을 하지 않자 복도로 끌어내어 시멘트 바닥에 꿇어앉힌 뒤 양 무릎 안쪽에 각목을 끼워놓고 위에서 밟는 등 고문을 계속했다. 다음 날인 27일 밤 10시까지 29시간 반 동안 이 같은 감금 폭행을 해 전氏가 실신상태에 빠지자 학생들은 생명이 위험하다는 것을 감지하고 학교직원들에게 연락, 직원3명이 들것으로 전氏를 앰뷸런스에 실어 관악병원에 입원시켰다. 병원 측은 혈변 증세로 전氏의 상태가 악화되자 28일 오후 서울大병원으로 옮겼다.
④정용범 사건(9.26-27): 정용범은 7급행정직 공무원시험준비를 위해 서울大에 출입하면서 공기 좋고 조용한 연못 앞에서 수험공부를 했으며, 지난7월부터 3차례정도 서울大에 출입했다. 9월26일 오후 3시 30분쯤 정氏가 서울大 연못 앞 벤치에서 수험서를 보고 있는데 학생2명이 다가와 『여기 어떻게 왔느냐, 잠깐 좀 가자』면서 학생회관 3층에 있는 복학생협의회 사무실로 끌고 갔다. 서울大 학생이 아님을 안 유시민, 백태웅 등 학생 5~6명은 광목천으로 눈을 가리고 팬티만 남긴 채 옷을 벗기고 기관 정보원이 아니냐고 추궁했다. 학생들은 다시 정용범에게 학생훈련복을 입혀 손을 뒤로 묶어 사무실 바닥에 꿇어 앉히고 자백하라며 주먹과 발길질로 다음날 새벽 4시까지 가슴 등 다리를 구타하였다. 유시민 등은 이곳에서 폭행을 지시한 후 27일 오전 5시30분쯤 철야 조사한 것을 확인하는 등 감금폭행을 주도했으나 정보원이라는 사실이 끝내 확인되지 않자 27일 낮 12시30분쯤 정氏를 버스정류장까지 안내해 풀어주게 했다.
이 사건으로 유시민(경제 4, 복학생협의회장, 징역 1년 6월), 백태웅(공법 4, 학도호국단장, 징역 1년 6월), 윤호중(철학 4, 징역 1년 6월), 오재영(인류 4, 징역 2년), 신윤남(인문계 1년 복학생, 유치장에서 정신이상으로 국립정신병원으로 이감) 등이 폭력 혐의로 구속되었고, 단순 참가자들은 대부분 공소 외 혐의로 훈방되었다.
이 사건의 관련자인 尹昊重(윤호중)은 현재 열우당 국회의원으로 사건 이후, 평화민주당 기획조정실 기획위원, 한광옥 의원 비서관 등을 거쳐 국민회의 부대변인, 대통령비서실 민정국장, 대통령 비서실 정책기획국장을 지냈다. 또한, 柳時敏(유시민)도 현재 열우당 국회의원으로 졸업 후「창작과 비평」誌에 소설 『달』로 데뷔했으며, 李海瓚(이해찬) 의원 보좌관, 한겨레신문 독일통신원, 성공회大 교양학부 겸임교수, MBC 100 분 토론 진행자, 인터넷 신문 프레시안 편집위원으로 활동했다. 개혁국민정당에 참여하면서 본격적인 정치 활동을 시작하였다. 현재 열우당 제4정책 조정 위원장을 맡고 있다. 현재 그의 친누나인 유시춘은 국가인권위원회에서 활동하고 있다. 또 다른 관련자인 백태웅은 이후에도 社勞盟 사건과 관련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되었었으나, 1999년 사면복권되어 유학, 캐나다 브리티시 콜럼비아 대학 조교수를 하다가, 현재는 국제 변호사로 국내에서도 활동 중이다. 한 편, 이 사건의 피해자들 중 전기동을 제외하고는 대인기피증 등 극심한 후유증을 보이고 있다. 사건 피해자 중 전기동은 유시민, 윤호중 두 의원의 총선 자료집 중에서 서울大 민간인 감금고문 사건을 서울大 프락치 사건이라 부르고 민주화 운동이라고 거짓말 한 것을 고소했고, 이에 검찰은 유시민 의원을 선거법 위반 혐의로 불구속기소, 벌금 100 만원을 구형하고, 재판을 진행 중이다.
1985년 5월 23일 서울美문화원점거농성사건
▲ 1982년 3월18일 검은 연기가 치솟고 있는 부산 미 문화원에서 소방대원들이 불을 끄고 있다. 성조기가 건물 위 오른쪽 화염 속에서 펄럭이는 모습이 보인다. 80년대 전국의 미 문화원에서는 광주학살에 대한 미국의 책임을 추궁하는 재야와 운동권 학생들의 반미 시위가 잇따랐다.
운동권은 원래 美國이 자신들의 행위를 무조건 지지할 것이라고 기대하다 1980년 5.18 이후 美國이 적극적인 개입이나 지원을 하지 않자, 美國은 군사정권을 지원하는 세력이자, 민주화의 적대 세력이라고 단정, 反美 활동을 하게 된다. 이후, 1980년 12월 9일 光州 美문화원 방화사건, 1982년 3월 18일 釜山美문화원 방화사건, 1982년 4월 22일 강원대생들의 성조기소각사건, 1983년 9월 22일 대구美문화원앞 폭발사건, 1985년 4월 9일 釜山 美영사관투석사건과 같은 일련의 反美활동으로 이어지고, 그 맥이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다.
全學聯의 결성 이후, 1985년 5월 23일 서울大, 고려大생 등 대학생 73명이 서울 중구 소재 美國문화 2층 도서관을 점거하고 3일간 철야농성을 벌인 사건으로 19명이 구속기소되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全學聯과 그 지하지도조직인 민족통일·민주쟁취·민중해방투쟁위원회, 이른바「三民鬪(삼민투)」라는 학생운동조직이 여론에 관심거리로 떠오르기도 했다. 이 사건으로 함운경(서울大 三民鬪위원장) 등 25명이 구속되고 43명이 구류 처분을 받았으며, 5명은 훈방조치됐다.
이후 사건의 주동자인 함운경은 全國聯合 중앙위원 및 정치위원, 한국민주청년단체협의회 기획이사 등을 지냈으며, 1995년 부여간첩사건으로 구속되기도 했다. 지난 17代 총선 당시 군산 지역에 무소속으로 출마했다 낙선했고, 현재는 열우당 산하 재단인 열린정책연구원 교육연수센터 소장을 맡고 있다. 許仁會(허인회)는 총선 낙선 이후 열우당 청년위원장을 맡고 있으며, 鄭泰根(정태근)은 민가협 간사 등을 거쳐 한나라당 성북갑 지구당 위원장을 맡고 있다. 高鎭和(고진화) 한나라당 의원은 全民聯 기획위원, 민주연합청년회 회장 활동을 하다 민주당 기획조정실 전문위원, 민주당 중앙위원, 李富榮(이부영) 민주당 최고위원 보좌관을 거쳐 17代 총선에서 당선, 한나라당 院內 副대표까지 맡았다가 탈당, 현재 열우당 의장으로 있다. 신정훈 現 나주 시장도 三民鬪 위원 출신이다. 그 외 장영승은 벤처기업 레츠 사장으로 지내고 있으며, 이강백은 시민단체「아름다운 가게」의 사무처장을 맡고 있다. 한편, 삼민투와 관련해서는, 姜琪正(강기정) 열우당 의원도 1985 년 6 월, 전남大 민중-민주-민족 투쟁위원회(이하 三民鬪) 위원장으로 4ㆍ19 기념 시위 관련, 폭력 시위와 국가 보안법 위반으로 구속돼, 징역 7 년, 자격정지 5 년을 선고 받았었다. 이후, 빛고을 새날청년회 회장, 북한동포돕기 범시민 운동본부 사무처장, 민주개혁 국민연합 광주본부 사무국장, 5ㆍ18 시민봉사단 「오월의 빛」단장, 아파트 공동체 연구센터 소장, 「바른 정치와 통일을 여는 시민의 힘」대표를 거쳤다. 17代 총선에서 열우당으로 光州 북구 甲에서 당선되었다. (kona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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