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그룹의 창업자인 정주영(鄭周永.작고)의 8남1녀(호적 기준) 중 여섯째 아들이었다. 휴전 직후인 53년 서울로 옮겨 성장기를 보냈다.
정몽준의 호적상 어머니는 변중석(邊仲錫.81)이다. 현재 투병 중인 邊씨는 2000년부터 의식이 없는 상태다. 그러나 낳아준 어머니는 따로 있다.
정몽준은 젖먹이 때 생모 곁을 떠나 邊여사에게 맡겨져 생모의 존재를 모른 채 성장기를 보낸 것으로 보인다. 중.고교 시절 정몽준의 집에 드나들던 친한 친구들은 변중석과 정몽준이 친 모자간이라는 사실을 의심한 적이 없다고 한다. 워낙 스스럼이 없었기 때문이다. 반말은 기본이고 "시끄러" "나가" 등의 어리광 섞인 말투가 입에 배어 있었다고 한다.
아버지 정주영이 용돈을 적게 주면 변중석에게 따로 받아내기도 했다. 변중석은 정몽준이 대학 3학년 때인 73년 여름에 학과 수학여행지인 경포대로 따라가 뒷바라지했을 정도로 몽준을 아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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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男 1女 여섯째 아들
정몽준의 어린 시절 기억은 서울시 중구 장충동 1가의 집과 동네에서 시작된다. 수구문(水口門)터에 자리한 시장이 집 근처에 있었고 시장 안에 있는 유치원을 다녔다. 삼성그룹 전 회장 이병철(李秉喆.작고)과 한화그룹 회장 김승연(金昇淵)의 부친 김종희(金鍾喜.작고)의 집이 같은 동네에 있었다.
정몽준네는 대가족이었다. 정몽준은 "집도 여관집 같았고 분위기도 여관집 같았다. 우리 형제에 삼촌들까지 같이 살아서 어머니가 고생을 많이 하셨다"고 했다. 식사 시간이 정해져 있어 그 시간에 맞추지 않으면 식사를 할 수 없었다. 정몽준은 "문 밖에서 큰 소리가 들려 나가보면 형들이 다른 사람들하고 패싸움을 하고 있었다"고 했다. 둘째형 몽구(夢九), 셋째형 몽근(夢根)은 각각 열세살과 아홉살 위였는데 경복고 시절 힘깨나 썼다고 한다. 몽구는 장사여서 다른 사람을 번쩍 들기도 했다.
정몽준은 58년 4월 장충초등학교에 입학했다. 학교까지는 걸어서 10분 거리였다. 집 근처 막걸리집 앞 유리창에 진열된 고사용 돼지머리를 보면서 학교를 다녔는데 늘 무서워했다. 박근혜(朴槿惠.미래연합 대표).김승연.김종필(金鍾泌.자민련 총재)의 딸 예리가 동기생이었다. 정몽준은 김승연의 자전거를 많이 빌려 탔다. 김승연은 요즘도 만나면 "자전거 빌려 탄 돈 왜 안내느냐"고 농담한다고 한다.
정몽준네는 같은 해 종로구 청운동으로 이사한다. 정몽준은 개구쟁이였다. 초등학교 시절 생활기록부에는 '활기있고 명랑하나 장난이 심하고 코를 병적으로 흘림. 성질이 급해서 글씨를 함부로 갈겨 쓰는 경향이 있으나 사고력이 빠름'(1학년), '수업 중 산만하고 항상 코를 흘리고 글씨도 더럽게 씀'(2학년) 등으로 기록돼 있다.
정몽준은 코를 많이 흘렸다. "다섯째 숙모는 내가 어찌나 코를 많이 흘렸던지 밥을 같이 못 먹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때가 아마 4학년 때쯤 됐을 것이다." 다섯째 숙모는 서울대 법대를 나와 동아일보 정치부 기자를 하다 독일유학 중 사망한 삼촌 정신영(鄭信永)의 부인 장정자(張貞子.현대학원 이사장)다.
학업성적은 빼어나지는 않았지만 상위권에 속했다. 생활기록부에서 '명랑.쾌활'이라는 표현이 전 학년 공통으로 등장한다. 대가족이 한집에서 같이 살다보니 그렇게 된 것 같다. "우리 가족은 주로 동해안으로 놀러 갔다.
한번은 경포대에서 간이텐트를 쳐놓고 어머니가 부쳐준 감자전을 먹고 있었는데 식구 숫자가 많아서 지나가던 사람이 가게인 줄 알고 '아줌마 이거 얼마예요'라고 물은 적도 있었다."
정몽준은 아버지에게 어리광을 부렸고 그런 아들을 아버지는 귀여워했다. "아버지가 나가시면 따라가겠다고 고집을 부렸고, 아버지는 그런 나를 쥐어박으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