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성단(塹星壇) 사적 제136호
인천 강화군 화도면 흥왕리 산42-1
유적건조물 / 종교신앙/ 제사유적/ 제사터
강화도 마니산(摩尼山) 꼭대기에 있는 돌로 쌓은 단(壇), 전설상 민족시조인 단군이 하늘에 제사를 올리기 위해 쌓았다고 전해지는 제단(祭壇)이다. 참성단은 둥근 모습으로 돌을 쌓은 하단(下壇)과 네모난 모습으로 돌을 쌓은 상단(上壇)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둥근 하단은 하늘, 네모난 상단은 땅을 상징한다고 한다. 이런 모습은 경주의 첨성대와 비슷하다.
참성단에 관한 기록은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 처음 보인다. 이에 의하면, 참성단은 참성단(塹星壇)으로 기록되고, 세상에 전하기를 단군이 하늘에 제사지내던 석단(石壇)으로서, 위는 네모지고 아래는 둥글며, 높이는 10척, 석단 위의 네 면은 각각 6.6척, 아래 너비는 15척이라고 되어 있다. 이와 비슷한 기록은 『고려사 지리지(高麗史 地理志)』에도 보인다. 참성단은 세월이 지나면서 허물어져서 1639년(인조(仁祖)17)과 1700년(숙종(肅宗)26)에 두 차례에 걸쳐 개수하였다고 한다.
고려와 조선왕조는 때때로 이곳에서 도교식 제전행사인 초제(醮祭)(별에 대한 제사)를 거행하기도 하였다. 조선후기에는 단군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참성단을 단군시대의 종교와 관련시켜 이해하는 경향이 나타났다. 예컨대, 18세기 중엽 이종휘(李種徽)는 『수산집(修山集)』의 「동사(東史)」에서 참성단을 단군시대의 종교인 신교(神敎)의 제단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는 그때까지 써오던 참성단(塹星壇)을 참성단(塹城壇)으로 바꿔 썼는데, 이는 이곳에서의 제사가 별과 관계가 없다는 뜻을 암시하는 것이다. 그러나 조선시대는 단군을 적극적인 신앙대상으로 이해하지는 않았으므로 단군의 세 아들이 쌓았다고 전해지는 삼랑성(三郞城)과 아울러 강화도 고적(古蹟)의 하나로 이해하고 그 보존에만 주로 신경을 써왔다.
참성단이 민족의 성지(聖地)로 주목을 받게 된 것은 한말 일제시대 단군을 숭배하는 대종교(大倧敎)가 성립한 이후이다. 이때부터 강화도는 단군시대 정치중심지의 하나로 인식되고, 참성단의 네모난 상단과 둥근 하단은 각각 땅과 하늘을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되었으며, 마니산은 음[땅]과 양[하늘]이 만나는 신성한 수중산(水中山)으로 이해되었고, 마니산 기슭에 단군사당이 건립되었다. 참성단을 민족성지로 서술한 기록으로는 김교헌(金敎獻)의 『신단실기(神檀實記)』, 북애자(北崖子)의 『규원사화(揆園史話)』, 대야발(大野勃)의 『단기고사(檀奇古史)』, 그리고 『대종교중광(大倧敎重光) 60년사(年史)』등이 있다. 8·15 민족광복 후 대종교의 영향을 받아 개천절이 제정되면서 이에 따라 참성단도 민족의 성지로 이해하는 전통이 그대로 이어졌다. 그래서 민족제전인 전국체전(全國體典)행사가 열릴 때에는 이곳에서 성화(聖火)를 채화(採火)하는 것이 지금까지 관례로 이어져 오고 있다.
참성단이 과연 단군의 제천 단인지는 단정할 수 없다. 그러나 강화도에는 청동기시대에 축조된 거대한 고인돌(지석묘)이 있고, 단군과 연관된 전설이 오래전부터 내려오고 있어서 상고시대에 이곳에 무시 못 할 정치세력이 형성되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상고시대에는 하늘에 대한 제사를 매우 중요하게 여겼으므로 아마도 참성단은 이 시기부터 제천 단으로 축조 이용해오다가 삼국시대 이후 도교가 들어오면서 별에 대한 제사(祭祀)도 아울러 행하여 온 것으로 짐작된다.
강화 마니산은 단군께서 친히 하늘에 제를 올린 참성단이 있는 곳으로 백두산과 한라산의 거리가 같으며 풍수적으로 우리나라의 조산인 백두산과 태백산의 정기가 이르고 한남정맥의 기운이 뻗어 올라 용맥(龍脈)의 정기가 뭉친 곳으로 우리민족의 정기가 솟구치는 생기발원처로 그 명성이 자자해 기수련가들 사이에서 오래 전부터 전국 최고의 '생기처(生氣處)'로 이름난 명산이다. 마니산의 氣는 1999년 풍수전문가 이재석(한국정신과학학회 부회장), 최재학씨가 전국의 氣센 곳을 탐사하며 지기(地氣)탐사기를 이용해 기(氣)의 세기를 측정한 결과 강화 마니산 참성단은 지기 탐지기 회전수가 65회로 전국에서 가장 많은 기를 분출하는 생기처임을 입증했다.
당시 측정 결과를 보면 마니산 참성단 65 ROD(회전수 이하 생략), 마니산 계단로 60, 계단로 3분의 1지점 46, 해인사 독성각 46, 장경각 34, 백련암 18, 팔공산 갓바위 16, 운문사 죽림현(경북 청도) 20, 선운사 대웅전(전북 고창) 16 등이다. 흙산 보다는 바위산에서, 그리고 수령이 오래된 나무에서 기가 많이 나온다. 마니산은 세계에서 가장 기가 강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
마니산은 세봉우리로 이루어져 있다. 그 중에서 사적 제 136호인 참성단은 가운데 봉우리(465m)에 축조되어 있다. 51년(BC 2283년)에 단군왕검께서 민족의 영화와 발전을 기원하는 제사를 봄, 가을로 올리기 위해서 세 이들을 시켜 쌓았다고 한다. 높이는 5.1m고, 하단의 직경은 11.75m며, 상단 한 변의 길이가 6,5m인 정사각형이다. 그리고 단상의 넓이는 42.25m다. 참성단을 마니산에 쌓은 것은 마니산이 그만큼 정결하며 장엄한 곳이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마리(摩利)니 혈구(穴口)니 하는 말에서 알 수 있듯 마니산은 하늘과의 인연이 깊은 곳이다. 또한 개국신화의 우사(雨師)와 운사(雲師)는 환웅(桓雄)의 권속이며 모두 마니산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그러니 단군은 마니산에다 참성단을 설치하여 제사를 지낼 수밖에 없었다고 여겨진다. 고려사나 동국여지승람 삼국유사같은 문헌을 종합해보면 단군은 묘향산에서 출현하여 평양에 도읍을 정한 다음 국호를 조선이라 했었고, 기자에게 나라를 넘겨주고, 구월산으로 들어가 산신이 되었으며, 그 후 단검은 마니산으로 내려와 주로 하늘과 통하는 이곳에서 지냈다고 한다.
참성단에는 천지관(天地觀)사상이 반영되어 있다. 천원지방(天圓地方) 즉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나다는 관념에 따라, 성소(聖所)인 윗단은 둥글게, 제사를 올리는 아랫단은 네모지게 참성단을 쌓은 것이다. 방과 원이 천지의 의형(擬形)이며 조화가 모두 거기서 일어난다고 본 것이라 사료된다. 참성단은 예러 차례에 걸쳐 증 보수 되었다. 고려 원종 11년(1270)과, 조선 인조 17년(1639)에는 단이 허물어져 다시 쌓았으며, 숙종43년(1717)에도 보수하였다. 참성단중수비는 참성단에서 동쪽으로 직선거리 100m 정도에 위치한 등산로에 옆에 있는데, 제대로 관리가 되지 않아 발견하기가 쉽지 않다.
단군 이후 참성단에서는 고구려 유리왕 19년에 사슴과 돼지를 제물로 하여 제사를 지냈고 백제의 비류왕은 몸소 현지에 나와 제사를 지냈다는 기록이 문헌에 전한다. 고려 원종이 초제를 지냈으며, 조선조에서는 후기까지 국왕을 대리하여 파견된 원로대신이 춘추로 제천의식을 거행하였으며, 기우제를 지냈다고 한다. 현재는 이곳에서 개천절 날 단군께 제사를 지내며, 전국체육대회의 성화를 채화하고 있다. 이때 강화군수가 제주가 되어 제를 올린 뒤 7선녀에 의해 맑은 날은 햇빛을 화경으로 인화하며, 흐린 날은 부싯돌로 채화하고 있다. 7선녀는 단군께서 제천할 때 7명의 신녀가 합그릇을 받들고 있었다는 기록에서 유래된 것이다.
백두산·묘향산과 함께 단군왕검이 강림한 장소로 유명한 높이 6m의 참성단(塹星壇:사적 제136호)이 있다. 이곳에서 전국체육대회의 성화가 채화되며, 매년 개천절에는 제전이 올려진다. 참성단 탱자나무(천연기념물 제79호)가 유명하다.
삼랑성과 전등사: 산 정상에서 북동쪽으로 5km 떨어진 지점에 단군의 세 아들이 쌓았다는 삼랑성(三郞城:사적130)이 있고, 삼랑성 안으로 들어가면 유서깊은 사찰인 전등사(傳燈寺)가 있다. 전등사는 승병이 주둔했던 호국사찰이며 왕실의 수복을 빌던 곳이다. 특히 항몽호국의 염원이 서린 사찰로서 처음에는 이곳에다 팔만대장경을 보관했었다. 전화(戰禍)를 입을 것을 우려하여 후일 보다 깊은 산중에 있는 합천의 해인사로 옮긴 것이었다. 지금도 이 사찰에는 팔만대장경의 판각인 법화경판 104매가 보존되어 있다. 사적기에 의하면 전등사의 개산주는 아도화상이며 고구려 소수림왕때 창건한 것이라고 한다. 당시의 사명은 전종사였는데, 고려 충렬왕 8년(1282년)왕비 정화공주가 인기스님에게 옥등을 하사한 것을 기념하여 가운데의 종자를 등자로 바꿔서 전등사로 부르게 된 것이었다. 전등사에는 대웅보전 약사전 범종 등 보물급 문화재와 조선 영조의 친필이 새겨진 현판이 걸린 취향단, 시왕상으로 유명한 명부전 등이 배치되어 있다. 보물 제178호인 대웅보전은 몇 번에 걸쳐 화마나 전화를 입어 소실되었다가 복원되었는데, 현재의 대웅보전은 조선 광해군 13년(1621년)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정면 측면이 모두 3칸이며 팔작지붕을 얹은 다포계 형태로 지어져 있다. 전등사의 대웅보전 추녀 밑에는 형상은 사람의 모습을 닮았는데, 옷을 거의 다 벗은 채로 작고 네모난 연꽃 대좌 위에 쪼그리고 앉아 손과 머리로 추녀를 받치고 있는 자세를 취하고 있는 나부상(裸婦像)이 있다. 이것들을 조각한 사람은 광해군 시절에 대웅전을 복원했던 도편수라는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