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남아 있는 고려시대의 목조 건축물들은 모두 주심포계 목조 건물로 안동 봉정사 극락전(12세기 중엽),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1376년 재건)과 예산 수덕사 대웅전(1328년) 그리고 강릉 객사문이 있다. 여기서는 문(門)건축으로는 유일한 고려시대의 유구라는 점에서 중요시되고 있는 강릉 객사문에 대하여 서술하고자 한다.
그럼 먼저 목조 건축 양식인 주심포형식을 다포형식과 비교하여 간단히 서술한 뒤 강릉 객사문의 건축 양식을 살펴 보겠다.
Ⅱ. 목조건축양식
대표되는 목조 건축 양식으로는 주심포형식과 다포형식이 있다.
주심포형식은 여러 가지 견해가 있으나 대체적으로 포작을 주두 위에서만 짜는 목구조 형식 중 익공을 제외한 형식을 말한다. 이 형식의 큰 특징을 나열하면 첫째, 간단한 맞배지붕을 하고 기둥에 엔타시스가 있는 점이다. 둘째, 공포 짜임을 주구 위에서만 짜되 대부분 기둥 위에 평판 없이 바로 주두를 놓고 짜 울린다. 셋째, 오래된 고식 형식으로 소박하고 아름답다. 넷째, 가구가 간단하며 치목이 아름답게 되어 건물 안에서 모든 가구가 잘 보이도록 천장을 가설하지 않는 연등천장을 하였다는 점이다.
주심포식 공포를 갖춘 현존 건축물로는 안동의 봉정사 극락전, 영주의 부석사 무량수전, 예산 수덕사 대웅전, 강릉 객사문 등 고려시대 건축의 예가 많으며, 조선시대 건축으로는 강진 무위사 극락전, 승주 송광사 극락전과 하사당 등이 대표적이다.
다포형식은 기둥 위에 공포를 배치할 뿐 아니라 기둥과 기둥 사이에도 창방(昌枋)을 놓고 그 위에 공포를 배치하는 형식을 말한다. 이 공포 형식은 건축물의 규모가 커지고 지붕의 하중이 무거워짐에 따라 하중을 아래쪽에 고루 전달하기 위해 고안된 공포기법이다.
조선 시대로 들어서면서 부터 원나라 문물의 영향을 많이 받게 됨으로써 중국에서 유행하던 다포식(多包式) 건축 양식이 우리 나라에도 보급되기 시작했는데 주심포형식과 다른 점은 다음과 같다.
첫째, 포작이 기둥 윗부분에만 짜여지지 않고 기둥과 기둥 사이 공간에도 공간포(空間包)를 배열하였다. 둘째, 첨차는 대부분의 경우 교두형을 사용했다. 셋째 건물이 장중하게 보이게 포작도 여러 층을 겹쳐 짜고 지붕도 팔작지붕으로 하였다. 넷째, 배흘림이 심하지 않고 가구의 아름다운 곡선형 새김이 줄어든다는 점이다.
Ⅲ. 강릉 객사문의 건축 양식
1) 연혁
강릉 객사는 고려 태조 19년(936년) 임영관이라는 이름으로 총 83칸이 건설되었다. '임영관'이라는 지금의 현판 글씨는 공민왕이 낙산사 가는 길에 들러 남긴 친필이다. 이후 여러 차례 중수되어 오다가 1929년 일제 때 강릉 공립 보통 학교 시설로 이용되면서 헐리고 지금은 객사문만 남아 있다.
2) 기능
객사는 중앙에서 파견된 사신들이 이용하던 숙박 시설이다. 객사 본전에는 국왕을 상징하는 전패를 모시고 관리들이 각종 의식과 더불어 유흥을 즐기기도 하였다. 이러한 기능 때문에 객사는 통치 건물인 관아 건축과 주택 건축의 결합형이기 마련이었고, 중앙에서 오는 사신과 관리를 위한 건물이었기에 해당 지방에서 제일 경치 좋은 곳에 세워졌다.
3) 건축양식
규모가 작은 객사대문으로 정면 3칸·측면 2칸의 단순하면서도 강렬한 단층 맞배지붕 집이며, 화려하면서도 날카로운 첨차 구성이 뛰어나다. 기단은 앞면이 비교적 높고, 정면에 돌계단이 있으며, 측후면에는 집석을 간단하게 늘어놓았을 뿐이다. 초석은 일률적인 형태가 아니라 몇 가지 형태로 된 것을 다양하게 이용했다. 기둥은 가운데 기둥에 3칸 판문을 달고 앞뒤로 기둥을 또 세웠는데, 앞 뒤 줄 기둥에는 배흘림을 이용하고, 판문이 달린 가운데줄은 민흘림의 사각기둥을 이용하였다. 독립된 앞뒤의 기둥에 강한 배흘림을 주어 시각적으로 안정감을 주는 효과를 내고 있다. 기둥 높이의 3분의 1 되는 지점이 가장 굵고 여기서 위아래 방향으로 차츰 줄어들어 위쪽에서 가장 가늘게 되는 배흘림 기둥의 모습이 매우 두드러진다.
대들보 위에는 앞뒤에 파연포대공(波蓮包臺工)을 두고 그 첨차 역시 앞으로 나아가 우미량 같이 되어 기둥 위에서 대들보 끝 위에 놓인 포대공 위에 달하여 주심도리를 받는다. 이 파연포대공은 또 마루보 끝을 받고 그 위에서는 중도리를 받는다. 마루보 중앙에는 두터운 제형의 대공을 올려 그것이 마루도리를 지탱한다. 문짝을 달게 된 문얼굴의 구성은 신방석 위에 신방목을 놓고 문설주를 따로 세워 하방과 인방을 드리고 판병을 달도록 되었다. 신방목 앞머리 양볼따귀에 태극무늬는 주목할 만하다.
이 건물의 세부를 보면 무엇보다도 기둥의 배흘림이 현저하여 주경 상면이 0.36m, 하면 0.56m, 최대경 0.57m이다. 주멸이 독립주이기 때문에 시각적으로 배흘림을 더 많이 주고 있음은 목조 건축에 있어서 합리적인 조형수법이다. 또한 공포는 이출목형식이며 수덕사와 같이 기둥머리에 헛첨차를 가지고 있다. 주두/소로/헛첨자형/첨자끝/밑각선의 처리는 모두 무량수전을 비롯한 주심포 계열의 건물과 유사하다.
가구(架構)방식은 수덕사 대웅전의 중앙칸을 옮긴 구조이며, 다만 주두 위 초제공 내부가 양봉형식으로 된 데 비해서 여기서는 아직 소로 받침을 고수하고 있으며 대들보 위 마루보를 받드는 포대공은 엄격한 파련 조각으로 고식을 따르는 수법의 훌륭한 건축물이다. 이는 수덕사 대웅전의 그것보다는 훨씬 간결하여 조선초기보다는 고려말의 유구로 보아야 할 것이다.
4) 건축사적인 의의
강릉 객사의 일부인 객사문은 규모는 작지만 고려 주심포 건축의 정수로서 정연하고 아름다운 비례와 구조를 지니고 있어 한국 건축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일컬어지고 있다. 원주의 배흘림은 우리 나라에 현존하는 목조건축 유구 중 가장 현저하며 기둥 높이의 중앙부가 가장 굵고 기둥 상부에서 가장 가늘게 되어 약 4치 이상의 차이를 보인다. 강릉 객사문은 기둥의 강한 배흘림이외에 기둥 위에 짜 놓은 공포의 형상에서 고려시대 건축 양식의 특징을 보여준다. 즉 공포형식(주심포 제2형식)을 취했고 주두와 소로의 굽에 곡면을 두고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객사문을 현재 극소수에 불과한 고려시대 건축 가운데 하나이며 문(門)건축으로는 유일한 고려시대의 유구라는 점에서 중요시된다.
Ⅳ. 맺음말
강릉 객사문의 이런 가구상(架構狀)은 층급을 이루는 변화와, 변화에 따른 장단이 있어 매우 율동적이며 운율의 오묘함을 맛보게 한다. 또 표현될 기법도 치밀해서 빈틈이 없다.
강릉 객사문의 연대에 학자들의 많은 주장이 있으나 뚜렷한 배흘림을 가진 기둥이나, 기둥머리 소로 굽의 곡면, 굽 밑의 굽받침 등이 모두 부석사 무량수전(1376년 재건)과 거의 같으며, 첨차 끝의 경사진 단면과 그 끝의 S자형 조식등 모두 오래된 양식임을 알 수 있다. 또 대들보 위에서 마루보를 받치는 파련대공의 파연문 역시 수덕사 대웅전의 그것보다는 훨씬 간결하다. 이러한 점으로 보아, 한때 이 건물이 조선 초기의 것이라고 하였던 설은 합당하지 못할 것이며 당연히 고려 말기의 것으로 해야 타당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