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백제의 대중국 통교의 관문, 능허대〃 | ||||||||||||||||||||||||||||||||||||||||||||||||
김상열(송암미술관 학예연구실장) | ||||||||||||||||||||||||||||||||||||||||||||||||
| ||||||||||||||||||||||||||||||||||||||||||||||||
우리 민족은 많은 위기를 극복하면서 반만년의 역사를 발전시켜 왔다. 그동안 인천은 이러한 국난 극복의 현장이 되기도 했다. 신구(新舊)문화가 교차하던 격동의 시대에 개항을 통해 민족 근대화의 첨단에 서기도 했고, 최근 IMF라는 금융위기 상황에서 인천국제공항과 송도신도시를 건설하면서 동북아시아의 허브도시로 거듭나기도 했다.
# 능허대의 등장 능허대는 백제 근초고왕 27년(372)부터 웅진(공주)으로 옮겨가는 개로왕 21년(475)까지 100여 년간 중국으로 내왕하는 사신들이 머물던 객관(客館)으로, 1990년 인천광역시지정기념물 제8호로 지정되었다. 이곳에서 후풍(候風:바람을 기다리는 것)하던 사신이 도호부 서쪽 10리 다소면(多所面)에 위치한 한나루(大津)에서 배를 타고 중국 산동(山東)반도의 등주(登州)에 도달했던 것이다.
등주항로는 한강 하류역인 인천의 능허대를 출발해 덕물도(덕적도)를 거쳐 중국 산동반도의 등주에 이르는 항로이다. 이는 백제를 공격할 때 당의 소정방(蘇定方)이 이용한 항로가 산동반도의 내주에서 덕물도를 거치는 항로였음에서도 알 수 있다. 인천이 백제사신의 출항지가 된 것은 서해로 빠지는 한강 하류의 길목에 위치하고 있다는 지리적인 조건과 함께 인천이 전통적인 해상활동의 중심지였기 때문이다. 등주항로는 비교적 안전한 항로였다고는 하지만, 개로왕이 북위에 보낸 국서에도 나타나듯이 당시의 조선기술이나 항해술로 비추어볼 때 사신을 중국으로 파견한다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근구수왕 5년(379)에 동진으로 파견된 사신은 악풍을 만나 회항하는 등 총 65회 중 3차례나 중도에 회항한 사실에서도 알 수 있다. 그러나 백제는 ‘방(舫)’으로 표현된 대형 선박을 이용했고, 또 488~490년의 해전에서 북위 선단을 격파할 정도로 비상한 해전능력을 보유하고 있었기에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고 중국과 통교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하늘을 높이 나른다’라는 ‘능허’라는 명칭에 대해서는 중국의 문헌뿐 아니라 중국의 경승지나 건물에도 ‘능허대’라는 명칭이 많이 등장하고 있고, 우리나라에도 많이 나타난다. 조선시대 박민의 호가 ‘능허’이며, 장조(사도세자)의 문집도 『능허관만고(凌虛關漫稿)』이다. 건물에 사용한 것은 ‘능허정’이 가장 많다. 1691년 창덕궁에 건립된 것을 비롯해 삼척 등 각지의 정자의 명칭으로 사용되었다. 또한 울진현에 ‘능허루’, 보령현에 ‘능허관’, 진주목에 ‘능허당’ 등이 있었으며, ‘능허대’라는 명칭은 황해도 해주, 강원도 울진과 고성에도 있었다. 이렇듯이 ‘능허’라는 명칭은 ‘허공을 가른다’, ‘승천하다’, ‘비상하다’ 등의 뜻을 가진 길상어로 관용화된 표현이었으며 중국과 조선시대에 보편화되어 해변의 절경지에 많이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다만, 일본인들이 간행한 『인천부사』에는 ‘능호대(凌壺臺)’로 표기하고 있는데, 이는 일본어 발음에서 온 오기이다. # 능허대와 한나루
능허대에 대해서 시민들이 갖고 있는 큰 오해는 발선처(發船處)로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능허대는 백제의 사신들이 배를 타고 출항하던 포구가 아니라, 그들이 후풍하며 머물던 객관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여지도서(輿地圖書)』 인천도호부 형승조(形勝條)에는 “대진(大津)은 부서 십리 다소면(多所面)에 있으며, 삼국이 정치(鼎峙)하였을 때 고구려에 의하여 백제의 조천로가 경색되었으므로 중국으로 들어가는 사신이 이곳에서 배를 띄워 산동반도의 등주·래주에 도달하였다. …능허대가 부서 10리 원우미면(또는 원우금면)에 있는데 청량산 자락이 해변으로 들어가 100척의 높이로 가파르게 솟아 있고 위에는 30여 명이 앉을 만하며 대양을 바라보매 막힘이 없었다. …대진은 백제가 조천할 때의 출선처이다. 그 밑에 기암이 있다. 전하기를 백제사신이 기녀를 데리고 와서 후풍하다가 막상 배에 오르던 날 원별(遠別)의 정을 이기지 못한 기녀가 바위에 떨어져 죽었기 때문에 후인들이 그 바위를 기암이라 하였다고 한다” 고 기록하고 있다. 기타 읍지에도 비슷한 기록이 보이고 있다. 〈※ 자료제공 = 인천광역시 역사자료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