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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도자기의 역사
도자기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은 진시황릉(B. C. 247 - B. C. 221)의 진용들을 제작하면서 도자기 가공기술의 발전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 일이다.
이 역사적인 작업에서 도자기 기술의 혁명은 시작된다. 전국 각지에서 모여든 장인들로 인해 도자기 기술은 한 곳으로 합쳐지게 되었고 더욱 발전하여 이 기술들이 다시 중국 전역에 퍼져나가 새로운 기술로 확산되었다.
중국과 중동의 사막을 오가며 무역을 했던 상인중의 한 사람은 후에 도자기의 역사를 바꾸는 놀라운 것을 발견한다. 그것이 바로 유약이다. 사막의 모래가 소다나 소금과 섞이면서 뜨거운 사막의 태양 아래에서 녹아내리는 현상을 발견한 것이다.
도자기 역사에 있어서 발상의 전환이 시작된 것이다. 이후 나뭇재 유약을 개발해 태토와 화학적 반응을 일으켜 완벽한 방수성을 가지는 그릇을 만들 수 있게 된다.
이로서 중국은 1,700년 전 세계 어느 곳에서도 흉내 낼 수 없는 그릇을 세계 최초로 “청자”라는 이름의 “자기”를 탄생시켰다.
300년 후 형주에서는 백자가 만들어 졌고 중국은 당시 최첨단 하이테크 상품인 ‘자기’를 생산할 수 있는 유일한 나라였고 ‘자기’를 대량생산하고 대량소비를 하는 유일한 나라였다.
1000년 전 세계의 중심은 아시아였고 동아시아는 그중에서도 가장 문명이 발달한 지역이었다. 그 당시 최첨단 하이테크 상품인 “자기”는 국제교역에서 최고의 무역상품이었고 가볍고 완벽한 방수성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음식을 청결하게 담아내는 그 그릇들은 보물이었으며 다른 나라에서는 동경의 대상이 되는 놀라운 제품이었다.
고려는 중국에 이어 세계에서 2번째로 “자기”를 생산할 수 있는 나라였고 세계 도자기 역사상 가장 독특한 ‘청자 장식법’을 개발해 낸다. 상감청자 기술은 고려 도공들이 독창적으로 개발해 낸 기술이었고 이로 인해 “청자”의 표면에 그림들이 그려지게 되었다.
15세기까지 유럽은 오스만 투루크와의 십자군 전쟁의 패배로 아시아에서 건너오던 물품들은 오스만 제국으로 인해 차단되어 있었다. 당시 유럽은 로마제국 이후 1000년 동안 변화와 발전이 없었고 중세 암흑기를 거친 고립된 세계였다.
마르코 폴로가 남겼던 동방견문록은 처음에는 유럽인들이 믿기 어려운 허황된 내용으로 취급을 받았다. 동아시아에서 일상적으로 사용하던 ‘자기’ 그릇은 유럽인들이 본적도 없었고 들어 본적도 없는 신기한 물건이었다.
아일랜드 국립박물관에는 당시 최초로 유럽으로 전해진 중국의 도자기가 아직도 전시되어 있다. 그 도자기의 이름은 그 유명한 Fonthill Base이다. 이 도자기가 유럽에 전해지고 나서 유럽인들은 마르코 폴로의 이야기가 결코 허풍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아시아와의 유일한 연결 통로인 콘탄티노플을 오스만 제국이 장악하고 있기 때문에 유럽인들은 아시아로 가기 위한 새로운 길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
유럽인들의 아시아에 대한 열망은 컬럼버스의 항해로 이어졌고 컬럼버스가 도착한 곳은 아시아가 아니라 아메리카였다.
이후 아시아로 향하는 항해는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쳤고 결국 “바스코 다 가마”가 4척의 배를 타고 리스본을 출발하여 희망봉을 돌아 10개월 만에 아시아에 도착하게 된다.
16세기의 유럽과 스페인이 침략한 아메리카 대륙에서는 도자기를 소유한다는 것이 곧 부의 상징이었다. 당시 유럽인들에게 아시아는 동경의 대상이었고 그 진원지는 유럽의 황실들이었다.
유럽의 황실에서 도자기 방을 만드는 것은 불문율이었고 중국의 도자기를 얼마만큼 소유하고 있는 것이냐에 따라 황실과 국가의 권위를 측정하였기 때문이다.
도자기는 그 당시 유럽에서는 보물이었다.
16세기 도자기 무역을 주도하던 동인도회사는 중국의 전쟁으로 인해 도자기를 더 이상 수입할 수 없게 된다. 전쟁으로 인한 중국 도자기 산업의 붕괴는 새로운 도자기 생산지를 물색하게 되는 결과를 가져온다. 15년 동안 중국의 도자기 생산을 기다리다 네덜란드 상인들은 그 중의 한 곳으로 일본의 나가사키를 찾아갔다. 나가사키는 새로운 무역 중심지였고 일본 상인들은 쌀과 은을 가지고 와서 총과 화약을 사갔다.
우리로서는 매우 불운했던 사건이지만 1659년 10월 동인도 회사는 일본에 ‘자기’ 5만여 점을 주문한다. 이것은 중국 이외의 나라가 받는 최초의 주문서였다.
그런데 일본은 ‘자기’를 생산할 기술이 없었다.
일본은 다완을 최고의 명품으로 대한다. 지금 남아 있는 100 여개의 다완은 가격이 1000억 원을 호가하고 있다. 최고로 치는 이도 다완은 조선의 막사발이다. 이도 다완을 통해 일본은 조선에 대한 환상을 가지게 되었다.
일본 열도를 정복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 정복을 위한 특명을 내린다. 그 특명의 내용은 도자기 생산을 위한 도공을 잡아오라는 것이었다.
중국의 공백을 틈타 세계 도자기 생산국으로 등장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어이없게도 조선에서 일본으로 넘어간 것이다.
조선 도공들의 기술로 일본은 도자기 생산을 시작하였고 세계 최고의 기술을 가졌던 조선 도공들에 의해 그 당시 유럽을 강타하는 채색 자기를 만들었다. 그 채색 자기들은 엄청난 가격에도 불구하고 유럽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누리게 된다.
일본은 유럽에 70만개의 도자기를 팔아 막대한 수입을 올렸다. 그 당시의 70만개의 도자기는 지금의 가치로 아파트를 70만 채를 팔아 수익을 거둔 것과 맞먹는 것으로 엄청난 부를 축적하게 된 것이다.
그 당시 유럽인들의 꿈은 “자기”를 직접 생산하는 것이었다.
아우구스투스 2세는 한 연금술사를 납치하여 감금했다. 그는 연금술사에게 자기를 개발하라고 명령하였고 연금술사는 렌즈와 거울을 조합시켜 1400도에서 자기를 구울 수 있는 온도 장치를 개발했다.
2년 동안 고령토를 찾아 3만 번의 실험 끝에 1710년 결국 자기 개발에 성공한다. 그것은 유럽에 르네상스 시대부터 축적되어온 과학적 실험과 분석의 결과를 토대로 성공하게 된 것이었다.
개발된 백자는 ‘금’과 같이 귀한 의미로 ‘화이트 골드’라고 불렀다.
1716년 3명의 도공들은 성을 도망 나와 자기 생산 기술이 전 유럽으로 유출된다. 마리아 테레지아 여왕은 자기 공장을 인수하고 유럽의 왕들과 경쟁하기 시작하면서 유럽이 세계 자기 시장을 장악하기 시작한다.
유럽 자기의 화려한 색채 기술은 에나멜 물감을 탄생시킨 안료 기술의 발전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유럽의 유화 기법이 응용되는 자기는 유럽의 상류층을 상대로 자기를 만들었고 19세기에는 중국에 역수출된다. 이제 더 이상 중국의 자기는 고급 제품이 아니라 저가품으로 전락하고 만다.
영국에서는 증기기관을 발명했고 증기 기관차가 나오고 운송시스템이 바뀌자 상공업은 비약적으로 발전한다. 1872년 Wedgwood는 증기 기관을 도자기 생산에 도입한다. 기계의 도입으로 도자기 생산의 시스템은 바뀌게 된다. 이제 도자기 기술은 영국의 Wedgwood에 의해 근대화되어 획기적인 대량 생산이 가능하게 되었다. 도자기 생산은 산업 혁명을 가장 선두에서 이끌었다.
산업 혁명은 유럽 사회의 생산 시스템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고 영국의 도자기 생산 시스템은 세계 도자기 산업의 표준이 되었다. 모든 사람들이 저렴하고 품질이 좋은 도자기 그릇에 음식을 담아 먹는 시대가 오게 되었다.
그렇게 유럽과 아시아의 운명은 크게 엇갈리게 된 것이다.
중국이 역사상 최고의 번영을 누린 ‘명’나라 이후 성장을 멈추어 버렸지만 유럽은 치열한 경쟁을 통해 산업 혁명을 일으킨 영국이 세계의 중심으로 떠올랐다.
‘도자기’는 문명과 오카리나의 역사를 보여준다.
우리는 일본과의 경쟁에서 밀려나 절호의 기회를 놓쳤었다.
다시 유럽의 그 시대로 되돌아가 보자.
유럽인들에게는 동경의 대상이었던 도자기였다.
그들이 그렇게 원했던 도자기의 생산 기술은 세월이 한참 흐른 뒤에 성공하게 된다.
라틴 아메리카의 Whistle이 유럽에 전해져 아즈텍의 음악이 유행을 했고 그렇게 해서 Whistle이 판매되려면 이교도의 문화를 받아 들였다는 역사적 근거가 있어야 하고 그러한 물건을 만들 수 있는 생산 기반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만약 벽돌공이 만들었다면 그러한 물건이 남아 있어야 한다. 그런데 그런 물건이나 그것을 만들었다는 기록은 이 세상 그 어디에도 없다.
8. 다시 생각해 보는 오카리나의 역사
인류 역사상 최초로 흙으로 만든 악기는 “훈”이 유일하였다.
그런데 서양인들은 “훈”의 역사를 외면한다. 기껏 해야 ‘아시아의 오카리나’ 정도이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어떤 정신 나간 사람들은 “훈”을 ‘아시아의 오카리나’라고 부른다.
라틴아메리카의 “Whistle Pots”는 외형적인 면에서 오늘날의 “오카리나”와 유사성을 가진다. 이보다 시대를 훨씬 앞선 인류문명 발생 지역의 새모양의 Whistle이 외형상 훨씬 더 유사성이 있다.
라틴아메리카의 “Whistle Pots”가 유럽으로 건너가 몇 백 년 동안 존재했을 가능성은 전혀 없다.
당시 유럽은 교회의 권위가 절대적인 시절이었고 라틴아메리카의 문화를 존중한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약탈한 것이다.
15세기까지 유럽은 십자군 전쟁의 패배와 중세 암흑기를 거쳤고 로마제국 이후 1000년 동안 발전과 변화가 없었던 고립된 세계였다.
그 시대의 유럽에서 ‘자기’라는 것은 처음 본 신기한 물건이었고 보물이었으며 그들에게는 동경의 대상이었다.
흙으로 어떠한 장난감이나 물건을 생산할 기반이 있었고 그러한 것을 만들었다면 물건이나 기록이 남아 있어야 하는데 그런 물건이 존재한 적도 없고 어떠한 기록도 없다.
이탈리아의 한 마을에서 어떤 소년이 오카리나를 발명했다고 하는 전후시기에 중국인들은 유럽의 각 지역으로 이주하여 차이나타운을 만들었고 차이나타운은 아직도 유럽의 곳곳에 그대로 있다. 차이나타운을 벗어나도 유럽 지역의 동네마다 중국음식점들은 있다. 중국인들은 다른 나라에 가서도 그들의 언어와 전통문화를 유지한다.
이탈리아에서 한 소년이 서양음계 체계에 맞는 ‘흙으로 만든 피리’를 만들었다. 그런데 벽돌이나 만들던 나이 어린 그 소년이 역사적으로 도저히 연결이 안 되는 라틴아메리카의 “Whistle Pots”를 모델로 삼았을까? 혹은 인류 역사상 유일하게 음악에서 사용되었던 흙으로 만든 악기인 “훈”을 보고 아이디어를 얻었을까?
철저하게 침탈당했던 라틴 아메리카의 전통적인 음악의 유산은 몇 가지 단편적인 유물밖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도 고고학의 발전에 의해 근대에 이르러 발굴되었고 그들의 역사가 재조명되었다.
서양인들이 오카리나와 관련된 어떠한 주장을 하건 말건 이탈리아에서 벽돌이나 굽던 한 소년은 아무도 시도하지 않았던 일을 시도하여 성취하였다. 나는 그러한 점을 존중한다.
그러나 왜 우리는 그들의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일까?
누가 이런 말을 했다.
“대중은 거짓에 열광하고 진실에 실망한다.”라고.
임진왜란 때 우리의 조선 도공들은 일본으로 끌려가 조선과 일본의 도자기 운명은 뒤바뀌게 되었다.
그로부터 오랜 세월이 흘러 일본의 “흙으로 만든 피리”가 한국에서 유행을 한다. 일본에서 만든 “흙피리”를 구입하였지만 그 소리에 실망한 한국의 대학생이 자기가 직접 “흙피리”를 만들기 시작했다.
짧은 역사였지만 대한민국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흙피리”를 만들고 있다. 그 “흙피리”를 세계의 모든 사람들은 “오카리나”라고 부른다.
이제는 한국의 몇몇 “오카리나”의 품질은 다른 나라와 비교조차 안 될 정도의 세계 최고 수준으로 만들어 버렸고 더 이상 일본의 오카리나는 한국 땅에서 환영받기 힘들게 되었다.
일본의 오카리나가 한국에서 더 이상 팔리지 않자 한일간의 ‘문화교류’라는 간판을 내걸고 한국으로 일본의 오카리나 연주자들이 온다. 그러나 일본의 오카리나 연주자는 한국의 오카리나를 연주해 보고는 조용히 한국의 오카리나를 구입해 간다. 이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나는 우리의 정교한 오리모양토기에 대한 의미를 생각하고 말하는 오카리나 동호인을 본적이 없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 변진조(三國志魏書 東夷傳弁辰條)’에는 ‘以大鳥羽送死,其意欲使死者飛揚(사람이 죽으면 장례를 큰 새의 깃털로 꾸미는데 이는 죽은 이가 하늘을 날아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라는 기록을 볼 수 있다. 새가 망자의 혼을 비약시켜줄 수 있을 것으로 믿는 풍습이 낙동강 권에서 광범위하게 퍼져 있었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오리 형상의 토기 유물에 관한 방대한 자료가 우리의 역사 속에 살아서 숨 쉬고 있다. 초등학교 교과서에도 그리고 어떤 박물관에 가도 수천 년의 역사를 가진 우리들의 오리모양토기(鴨形土器)들은 많이 있다.
이것이 오카리나와 무슨 연관이 있으며 ‘도자기의 역사’에서 그렇게 철석같이 믿는 기존의 오카리나 역사와 연결하지 않으려는 사람이 반드시 있을 것이며 자연소성으로도 얼마든지 오카리나를 만들 수 있다고 주장하고 싶어 할 것이다.
1000년 전에 비잔틴 도기가 알프스 산맥을 넘어 로마제국의 영토인 유럽 지역에 전해졌다는 역사적 사실과 같은 것을 나에게 알려줄 필요는 없다. 마찬가지로 14세기의 주석 백유와 러스터 유약이 스페인에서 사용되었다는 것과 이것이 프랑스와 이탈리아에 영향을 미쳤다는 것도 나에게 말해줄 필요가 전혀 없다. 내가 이런 글을 쓰면 틀림없이 이탈리아의 화엔자 가마와 마죠리카 도기에 대해서 알고 있냐고 묻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물론 잘 알고 있다. “나는 달을 가리키는데 왜 손끝을 보는가?”라고 하나하나 설명하고 이해시키고 싶지 않다.
다만 “우리의 역사 저변에는 오카리나에 연관된 것만큼은 우리에게 반성과 함께 자긍심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며 “오카리나의 음악적 사대주의 근성을 버리자.”는 것이다. 그리고 “지나치게 미화된 외국의 오카리나 음악을 우리와 동등하거나 혹은 내려다 볼 수 있다는 생각을 하자.”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오카리나의 역사에 대한 결론을 내고 싶지도 않다.
내가 쓴 글의 일부분이라도 책이나 인터넷으로 유포되거나 재인용되는 것과
논쟁을 하는 대상이 되는 것 자체를 일체 허용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논쟁을 할 대상의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 적이 한 번도 없기 때문이고
음악과 역사적 사실은 단 하나이기 때문에 더더욱 그러하다.
믿으라.
이것만큼은 우리가 그들보다 비교할 수 없이 훨씬 강하다는 것을.
첫댓글 이 글의 일부분이라도 책이나 인터넷으로 유포되거나 재인용되는 것과 논쟁을 하는것 자체를 일체 허용하지 않는다. - 김효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