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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고대국가의
건 국 신 화
孤雲 田 萬 秀
밤하늘에 홀로 떠있는 별은,
그냥 지나치는 사람에게는
아무 의미 없는 단순한 별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 별을 사랑하는 여인에게는
무한한 사랑을 속삭이는 연인이 된다
.
우리가 신화를
사랑하고, 아끼고, 이해한다면
그 신화는 우리에게 숨겼던 많은
이야기를 들려 줄 것이다.(msjum)
전 만 수(고 운)
금천구청 사무관
「내고장 금천」
「금천의 주산 금지산」
「왜 금천인가? 시흥행궁터는? 시흥관아터는?」
「한국 고대국가의 지방조직」
「무학이 삼봉에게 말하기를」
「essay 단군이야기」
글 전 만 수
편집 전 만 수
낸날 2000.11. 15
연락 890 - 2345
이 글을 내면서 7
첫 번째 이야기
신화란 무엇인가? 10
두 번째 이야기
천지창조 이야기 20
세 번째 이야기
한민족과 고대국가의 형성 44
인류의 이동 44
구석기시대의 한반도 주인 46
신석기시대의 민족형성 48
한민족의 형성 51
청동기시대의 고대국가 형성 42
고대국가의 형성 57
네 번째 이야기
고대국가의 건국신화 59
고조선의 건국신화 61
삼국유사의 단군신화 61
제왕운기의 단군신화 65
세종실록의 단군신화 67
응제시주의 단군신화 68
네 단군신화의 내용비교 69
단군신화가 갖는 역사적 의미 72
역사적 사건으로서의 단군신화 79
복희의 탄생신화 80
부여의 건국신화 81
북부여 82
동부여 83
고구려의 건국신화 91
삼국사기의 고구려 건국신화 94
삼국유사의 고구려 건국신화 98
세종실록의 고구려 건국신화 102
주나라 시조신화 120
백제의 건국신화 122
삼국사기의 백제 건국신화 123
신라의 건국신화 134
시조 혁거세 거서간 136
탈해 이사금 146
김알지 신화 154
가락국의 건국신화 158
중국의 난생신화 166
우리의 고대국가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 169
이 글을 내면서
우리 사회를 농촌사회(農村社會)와 도시사회(都市社會)로 구분하는 시점을 1970년으로 보고 있다. 그 해가 농업인구와 도시인구의 수(數)가 반반이 된 해이다. 즉 우리사회는 1960년대까지 농업에 의존한 사회구조를 갖고 있었다. 그 때까지는 집이나 생활용구가 나무와 흙, 돌, 짚, 질(그릇), 사기 등이 주였고 부분적으로 쇠가 사용되었다. 주거용 집도 나무로 얼개를 하고 흙을 바른 후 짚으로 덮으면 되었다. 또, 생활용품도 짚으로 자리를 짜서 깔고, 짚으로 가마니를 만들어 수확물을 저장하였으며 삼태기, 멍석 등을 만들어 사용하였다. 주방용품은 사기가 주였으며, 질은 김장․간장독, 물독 등 주요한 쓰임새가 되었다.
이와 같이 모든 생활에 필요한 것들이 별다른 화학적 가공과정 없이 자연에서 얻어지고, 또 자연으로 되돌릴 수 있었다.
이러한 1960년대까지의 우리의 삶의 모습이 언제부터 시작되었을까?
그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으나 신석기 시대의 삶의 터에서 뼈나 돌로 만든 망치, 도끼, 바늘, 바늘집, 낫, 바디, 보습 등을 사용한 흔적을 찾을 수 있다.
한반도에 삼국이 시작 될 무렵인 기원전(BC) 1세기 것으로 밝혀진 경상남도 창원시의 다호리 유적지와 전라남도 광주시의 신창동 유적지에서는 괭이, 가래, 낫자루, 보습, 절구공이, 삼태기, 싸리비 등 농기구와 나무망치, 자귀자루 등 목재공구류, 그리고 문짝, 구절판, 통발 등 목재 생활용품과 붓, 부채, 목재칠기와 철제품, 철제 의례기가 많이 출토되었다.
이러한 도구들을 생각할 때 우리의 1960년대 이전 농촌사회를 연상시킨다. 그러니까 우리의 생활 모습이 2천여 년간 큰 변화 없이 소박하게 유지되어 왔다는 뜻이 된다. 그러나, 현재는 불과 30년 사이에 화학제품이 대부분을 이루고 기계화, 전자화에 의하여 농촌사회의 모습은 사뭇 달라졌다. 그래서 때로는 공허한 마음이 들 때도 있다.
문명의 발전이 인류에게 어떠한 결과를 가져다 주었는가?
생활이 편리해지고, 수명이 연장되는 긍정적인 면도 있지만 부정적인 면도 크다.
인류는 삶에 대한 애착 즉 무병장수(無病長壽)를 늘 기원하고 살아왔다. 병의 고통과 죽음의 공포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자기보다 상대적으로 강한 해․달과 자연물(바위, 나무 등) 또는 자연현상(비, 바람, 물, 불, 땅)이나, 동물(범, 곰, 용, 봉황), 인물을 신으로 모시고 그의 힘을 빌어 자기의 바램이 성취되기를 기원하였다.
이들이 신(神)이다. 이들 신에 관한 이야기가 신화이며, 이 땅에 최초로 국가를 연 인물을 신격화하고 이야기로 전한 것이 건국신화이다. 이 글에서는 고조선, 부여, 고구려, 백제와 신라, 가락국(가야)의 개국시조에 얽힌 이야기를 통하여 개국의 대강을 이해하고자 한다. 또, 이 글은 연구논문이 아니고, 이야기 형식으로 폭넓게 알아보는데 노력하였음을 이해하여주기 바란다.
그리고, 부탁하고 싶은 것은, 신화는 그 신화를 만든 사람들의 정서를 이해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2천년 전에 만들어진 신화를 오늘의 가치와 현실을 대입시켜 이해하려 한다면 이는 허무맹랑하고 해괴한 이야기에 불과하다. 그러나 2천년 전의 가치와 현실을 가지고 그들 정서 속에서 이해한다면 그 신화에서 얻는 것이 있을 것이다.
용이나 봉황은 오늘 우리에게는 가상의 동물로 이해되고 있다. 그러나 이 지상에는 존재하다 멸종된 동물이 많다. 그 대표적인 것이 공룡이다. 아주 옛날 사람들은 물에 살면서 엄청난 힘을 가진 공룡 즉 용(龍)을 보았으며, 하늘을 날면서 오동나무가 아니면 앉지 않고 연꽃의 열매가 아니면 먹지 않으며 예천이 아니면 마시지 않는 고고하고 자태가 뛰어난 큰 새 즉 나르는 공룡을 보았을 것이다. 이것이 봉황이다. 그들은 인간보다 절대적인 힘과 자태를 가진 그것들을 보고 경외심(敬畏心)을 가졌을 것이고 이를 (문자가 없어)말로 자손에게 전하였을 것이다. 이것이 오늘날에는 우리의 이해 잘못으로 허무맹랑한 이야기로 들리고 있는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신화는 우리들의 이러한 이해 속에서만 자기가 가진 의미를 이야기해 주고 있다.
우리가 먼저 신화를 사랑하고, 아끼고, 이해하지 못한다면 신화는 우리에게 아무 이야기도 해주지 않을 것이다.
이 글은 자료적 성격도 갖추기 위해 가급적 많은 신화를 실기 위해 노력하였으며, 원문에 충실하려고 했다. 그러나 본문의 취지가 상하지 않는 한 이해하기 쉽도록 다소 다듬은 부분도 있음을 밝혀둔다. 또 우리 신화의 이해를 돕기 위해 인근 국가의 신화를 실어 비교할 수 있도록 하였다.
끝으로, 평소 필자의 글을 비판해주고, 격려를 아끼지 않는 이덕재․황재웅 필우에게 감사드리며, 맞춤법과 띄어쓰기에 자신이 없는 필자를 힘껏 도와준 노향숙님에게 감사 드린다.
2000년 11월 3일
孤雲 田 萬 秀
첫 번째 이야기
신화란 무엇인가?
사기(詐欺)를 잘 치기로 이름난 봉이(鳳伊) 김선달이 있었다. 봉이라는 별명도 닭을 봉(鳳)이라고 속여 비싸게 팔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그가 하루는 평양에서 황해도 구월산에 있는 단군전을 구경시켜 준다고 관광단을 모집하였다. 평양에서 내노라 하는 양반댁 마님들이 다수 참여한 이 관광단은 구월산 입구에 있는 명월사에서 하루를 자고 새벽에 신전에 올랐다. 단군신전에 도착한 봉이는 일행들에게 일렀다.
“이 단군님께 기도를 드리면 반드시 소원을 들어 드립니다. 그러나, 먼저 그 동안 자신이 저지른 잘못을 숨김없이 고백한 다음에 소원을 빌어야지 그렇지 않으면 큰 화를 입게 됩니다”
이 말에 양반댁 마님들이 자기집 종하고 있었던 부적절한 사건까지도 사실대로 고백하였다. 이를 자세히 엿들은 봉이는 평양에 돌아와서 그때 그 마님들을 찾아다니며
“내 입을 막지 않으면 좋지 못할 것입니다”하며 반 협박조로 으름장을 놓았다. 이에 놀란 마님들은 당황하여 상당한 돈을 봉이에게 주지 않을 수 없었다. 희대의 사기꾼 봉이는 민족이 조상으로 모시는 단군을 이용하여 사기를 쳐 돈을 챙겼다.
단군은 누구인가? 역사적 실존 인물이다(북한 학자). 단군은 왕을 일컽는 말이다(남한 학자)고 의견이 엇갈린 단군은 신화로 우리에게 전하는 인물이다.
신화는 무엇인가? 신화는 신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렇다면 신은 어떠한 존재인가?
신은 인간이 가지는 사고(思考), 관념(觀念), 행태(行態)를 초월한 초인적(超人的) 존재이며, 자연 현상을 뛰어넘어 존재하는 초자연적 존재이다. 또 신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넘나드는 초시공적 존재이기도 하다. 이러한 신에 관한 이야기가 신화(神話)라고 할 수 있다.
신화의 특징
이러한 신화에 대한 특징을 이종욱 교수는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첫째, 신화는 구전(口傳)을 통하여 발전하고 성장해 왔다. 이 과정에서 후대인(後代人)의 필요에 따라 내용과 양식이 조정되기도 한다.
둘째, 신화는 자연과 인간, 신과 인간을 구별하지 않는다. 그 때문에 과학적 기준에 의해 신화를 해석하고 진위를 파악하는 일은 의미가 없다. 과학적 기준만을 갖고 해석하고 판단하면 신화가 잘못된 믿음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신화는 과거에 있었던 사실(事實), 사건에 대한 구전과정에서 과학을 넘어서 직관이 확대되고 상상력이 발휘된 결과 나타난 산물이라고 이해하여야 한다.
셋째, 신화는 시간적 변화를 인정하지 않는다. 단군의 생존연대나 통치기간은 그 예가 된다.
이와 같은 특징을 가진 신화는 전설(傳說), 민담(民談) 등과는 구분하여야 한다.
신화가 민족사이에 전승되는 신적 존재와 그 활동에 관한 이야기라면, 전설은 신을 주체로 하지 아니하고 인간과 인간의 행위를 주체로 하는 이야기이다. 그리고 민담은 옛날 이야기로 알려진 것이다. “옛날 옛날에............. ”, 또는 “호랑이 담배피우던 시절에...... ”로 시작되는 것으로 신성성과 위엄성, 역사성이 희박하고 흥미위주로 되어 있다.
신화의 종류
그러면 신화는 어떤 종류가 있을까? 신화학이라는 독립된 학문으로까지 발전한 신화가 그 종류를 정하는 기준을 설정하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문헌마다, 학자마다 각자의 기준에 따라 종류를 정하고 있다.
첫째, 문헌신화(文獻神話)화 구전신화(口傳神話)가 있다. 문헌신화는 삼국유사, 제왕운기, 동국이상국집 등과 같이 문자로 담아서 전하는 신화이며, 구전신화는 무속신화와 같이 말로 전하는 것이다.
둘째, 신화 중에는 무에서 유를 창조한다거나 천지개벽이 이루어지고 하늘과 땅 자연에 관한 내용을 담은 것, 난생신화, 홍수신화와 같은 우주발생신화가 있고, 당곰 이야기나 남매혼 이야기 같은 인간 탄생신화, 농경과 병 치료를 담은 이야기나 건국신화와 같은 문명기원 신화가 있다.
셋째, 천체신화(天體神話), 건국신화(建國神話)로도 구분하며,
넷째, 신의 상태나 동작․성질 등을 설명하는 설명적신화(說明的 神話), 신의 기원․유래 등을 추설(推設)하는 추설적 신화로도 분류한다.
다섯째, 우주가 어떻게 하여 창조되었는가를 설명하는 천지창조신화(天地創造神話), 국가의 기원을 설명하는 건국신화(建國神話), 우주나 한 인간의 시초를 알〔卵〕이라고 하는 난생신화가 있다.
여섯째, 크라프는 신화의 종류를 특별한 기준 없이 하늘과 땅에 관한 신화, 대광체(大光體)에 관한 신화, 해․달․별에 관한 신화, 대기․화산․물에 관한 신화, 타계(他界)신화, 반신(半身)신화, 우주기원신화, 인류기원신화, 재앙신화, 사적(史的)신화로 분류하였다.
일곱째, J.H, Hegel은 우주기원신화, 신들의 신화, 원초상태의 신화, 원초와 변동의 신화, 종말론적 신화, 자연 및 우주론적 신화 등으로 분류하고 있다.
이러한 신화의 유형은 일정한 기준에 의하여 정해진 것이 아니고 학자들 각자의 기준에 의하여 정의되거나, 학문적 주체성 없이 유형이 자유스럽게 결정된 경우가 많은 것 같다.
여러 유형 중에서 필자는 천지창조신화, 건국신화, 난생신화로 분류하면서 이 글 전체를 그러한 내용으로 구성하고자 한다.
천지창조신화
천지창조신화는 우주가 어떻게 하여 창조되었는가를 설명한 신화다. 현재는 과학적 논리로 우주의 탄생기원을 설명하지만 그러한 여건이 아니었던 고대인들은 천지창조를 신의 힘을 빌어 실마리를 찾고자 노력하였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이렇다할 천지창조 신화를 찾아 보기 어렵다. 각종 천지창조 유형은 신의 힘에 의하여 직접 창조되었다고 보는 신화와 시베리아 지방의 경우와 같이 신화의 인물이 바다 밑에서 진흙을 가wu와 천지를 창조했다는 유형도 있다. 또 분화되지 않은 원초적 물질이 분화되면서 천지가 창조되었다고 설명하는 경우도 있다. 이것은 〈특이점〉이 빅뱅(big bang)에 의하여 우주가 창조되었다는 현대 우주물리학의 이론을 연상하게 한다.
건국신화
건국신화는 고대에 처음 국가가 생긴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건국한 인물을 신의 반열에 올려놓고 있다. 그래서 개국자는 우리와는 다른 초인적 인물로 보고 있다.
어떻게 해서 이러한 현상이 발생할 수 있을까? 개국신화는 개국한 최초의 지배자가 피지배자에게 자신의 권위를 나타내어 지배권을 정당화하기 위한 수단이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또, 이와는 반대로 문자가 없던 시절의 역사적 사실이 말로 전해지면서 피지배자가 지배자에 대한 권위를 스스로 받아들여 개국한 자를 신격으로까지 승화시켰다고도 볼 수 있다.
우리나라의 개국신화를 살펴보면 가장 신화적 요소가 많은 것은 단군신화이며, 그 다음이 부여, 고구려, 신라 순이다. 백제의 건국신화는 신화라고 보기에는 다소 물의가 따를 정도로 그 요소가 약하다. 이러한 이유는 고조선이 들어선 후 계속 글로 기록되지 않고 오랫 동안 구전되어 오면서 신적 요소가 점차 많이 개입되었다고 할 것이다. 그리고 역시 역사 기록이 없는 부여도 그럴 것이다.
고구려와 백제는 각각 「유기」와 「서기」라는 역사기록을 비교적 이른 시기인 4세기경부터 가지고 있었다. 이는 자신들의 시조가 개국한 이후 약 300여 년 후에 글로 기록하였으므로 신적 요소가 덜 개입하였다고 하겠다. 그러나 신라는 진흥왕 6년(545)에 비로소 「국사」라는 역사기록을 시작하였으므로 구전된 기간이 고구려 백제보다 상대적으로 길어 박혁거세, 석탈해, 김알지 등의 신화에 신적 요소가 많이 들어갔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건국신화는 우리나라에서도 비교적 잘 보존되고 있다. 단군신화에서 고조선은 우리민족이 세운 최초국가라는 역사적 사실을 전하고 있다. 이와 같이 건국신화가 갖는 역사적 의미는 매우 크다. 그것은 신화도 역사이기 때문이다. 신화 자체가 역사라고 하기에는 한계가 있으나 신화가 상징하는 역사를 파악하면 그 안에서 역사의 자료를 얻을 수 있다(이종욱).
건국신화는 인간세계에 국가라는 제도가 어떠한 과정을 거쳐 성립되었는지를 설명하고 있으므로 문명기원 신화로 분류하기도 한다.
난생신화
난생신화는 우주나 최초생명의 직접적 모체를 알에서 찾고 있다. 이는 우리나라를 비롯하여 동북․동남아시아에 넓게 퍼wu 있다. 우리나라의 주몽, 박혁거세, 김알지, 김수로왕 등에서 찾을 수 있다. 인간이 알에서 태어난다고 하는 것은 부계(父系)를 부인하여 천제(天帝) 등과 연결시키려 의도했던 것이 아닌가 싶다. 우리 고대국가의 건국신화를 보면 고조선과 부여, 고구려는 천제의 아들이 개국한 것으로 되어 있고, 신라나 가락국은 알에서 시조가 탄생한 것으로 되어 있다. 백제시조 온조는 주몽의 아들, 또는 부여계의 후손이지 천제나 난생 등 신화적 요소를 갖고 있지 못하다.
중국의 문명비평가 권삼윤은
“신화는 새롭게 해석되고 변신을 거침으로서 생명력을 이어가고 그 생명력은 그 시대 사람들에게 현실의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이 되어준다”고 지적하였다.
상고(上古)의 일은 전설과 사실(史實)이 혼합되어 있어 알 수 없다. 그리고 사실(史實)은 새로이 윤색되어 전설과 다름없이 변하여 간다. 그러나 전설은 왕왕 사실의 소리가 될 수도 있다. 그래서 사실(史實)과 전설은 구별하기가 어렵게 된다. 이는 세계각국이 같은 현상이다.(청나라 왕국유)
두 번째 이야기
천지창조 이야기
우주의 탄생
우주가 언제 어떠한 경로를 거쳐 탄생했느냐 하는 것은 현대과학으로서도 명쾌하게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우주가 150억 년 전에 탄생했을 것이라는 데는 과학자들이 대체로 의견을 같이 하는 것 같다. 150억 년 전에 대 폭발에 의하여 우주가 형성되었다는 표준대폭발이론(standard big bang theory)이 현대 과학자들의 우주기원에 대한 설명이다.
이 이론에 의하면
첫째, 우주가 초고온, 초고밀도 상태(이를「특이점」이라고 한다)에서 10의 -43자승 초로 폭발하여 오늘과 같은 차갑고 희박한 상태에 이르렀다는 대폭발(big bang)이론과
두 번째, 대폭발 직후 10의 -35자승 내지 -24자승 초의 짧은 시간동안에 공간이 10의 28자승 배 이상 급격하게 팽창하면서 물질이 만들어 졌다고 한다.
세 번째는 급팽창할 때 생긴 미세한 밀도의 차이가 중력으로 인하여 점차 커지면서 별과 은하계 등 우주 거대 구조가 형성 됐다고 보고 있으며,
끝으로 우주 물질의 대부분은 아직 무엇인지 모르는 차가운 암흑 물질로 구성돼 있다는 이론 등 네 개의 이론이 혼합된 모델을 제시하고 있다.
우주는 빅뱅 30만년 후에 물질과 빛이 분리되었으며, 130내지 140억년 전에 은하계와 별이 형성되었고, 50억 년 전에 태양계가 형성되었다고 본다. 무한한 우주의 한 부분인 태양계, 그리고 태양계의 한 부분인 지구가 50억 년 전에 형성되었고, 그 지구에 생명체가 탄생한 것은 30억 년 전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스티븐 호킹 교수는
“생명이 40억 년 전에 지구를 덮고 있었던 원시 태양으로부터 싹튼 것 같다”고 말하면서
“어떻게 생명이 시작됐는지는 아직 모른다”고 한다. 그러면서 그는 우주 속에 인간과 같은 지능 동물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는 의견을 밝힌다. 호킹 교수는 또,
“지능이란 진화의 결과라고 생각하지만 지능이 생존을 하는 데에 큰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박테리아는 지능 없이 살지만 지능이 있는 우리 인간이 핵전쟁을 일으켜 자멸하더라도 박테리아는 살아 남을 것이다. 이런 이유로 은하계를 탐험하면 원시적인 생명체를 발견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우리 인간과 같은 생명체는 발견할 수 없을 것이다”고 견해를 밝히고 있다.
이제까지 밝혀진 대로라면 인간(人間)은 약 400만 년 전에 아프리카 남부에서 발원하였다고 한다. 어떻게 발생하여 진화하였는지 또는 창조되었는지 아직도 이견이 많은 부분이다. 우주의 창조는 우리 인류의 오랜 관심거리였다. 그래서 상고인들도 여기에 대하여 많은 선각자적 관심을 표하여 설화로 전하고 있다. 현대 과학으로도 다 풀지 못한 우주 즉 천지창조를 우리 조상들은 어떻게 생각하였으며, 인식하여 왔는지를 찾아보기로 한다.
우리 조상이 한반도에 들어온 시기를 40 ~ 50만 년 전으로 높여 보기도 하고, 1만 년 전쯤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어쨌든 그때는 글자가 없어서 그들의 인식을 정확하게 확인할 수는 없다. 그러나 역사기록 이전의 사실(史實)은 전설과 고고학적 유물을 통하여 그 사실이 점차 확인되고 있다.
성경에 전설적으로 나오는 「노아의 홍수」가 현대 과학에 의하여 사실로 밝혀지고 있다. 미국 내셔널지오그래픽 탐사 팀에 의하면 흑해는 7,500년 전까지는 담수호(淡水湖)였으나 대홍수로 인하여 지중해 바닷물이 흘러들어 바다로 변했으며, 이 대 범람이 성경에 기록된 홍수신화를 탄생시켰다는 것이다.
그런데 한가지 의심스런 것은 왜 우리 상고조상들은 천지창조 신화를 남기지 않았나 하는 점이다.
어느 나라 어느 민족이나 대부분이 천지 창조신화와 조상신화를 갖고 있으며, 특히 우리민족과 같이 신에 대한 믿음이 강한 것을 감안하면 얼른 납득이 가지 않는다. 물론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 전하는 방법이 단군신화와 같이 민족적 차원이 아니고 민담 내지는 주술적 차원에서 부분적으로 전하고 있는 정도이다.
우리의 창조신화
우리에게 전하는 천지창조격에 해당하는 「창세가(創世家)」와 제주도의 「삼성혈(三聖穴)」신화, 그리고「초감제(初監祭)」를 소개한다.
창 세 가
창세기는 우리에게 그렇게 잘 알려져 있지는 않다. 그리고 그 내용도 지방사투리가 섞여있는가 하면 다소 편협적인 면이 있고 하여 신화라기 보다는 그저 민담 정도가 되지 않을까 생각된다. 이 이야기는 손진태가 편찬한 <조선신가유편>(1930, 향토문화사)에 수록된 것이다.
제 1.
한을(하늘)과 따이(땅이) 생길적에
미력(미륵)님이 탄생한즉
하늘 따이 서로 부터(붙어)
떠러지지 아니 하소아
한을은 북개 꼭지(가마솥 뚜껑)처럼 도드라지고
따는 네귀에 구름 기둥을 세우고
그 때는 해도 둘이오 달도 둘이오
달하나 띄어서(떼어내서) 북두칠성, 남두칠성 마련하고
해하나 띄어서 큰 별을 마련하고
잔별은 백성의 직성별에 마련하고
큰 별은 임금과 대신 별로 마련하고
(註,우주 탄생)
미력님이 옷이없어 짓겠는데 옷감이 없어
이산 저산 넘어가는 버덤어가는(뻗어가는)
칙을 파내어, 벗겨내어, 삼아내어, 익혀내어
한올 한올 베틀노코
구름속에 영애(잉아대) 걸고
들고 짱짱 노코 짱짱 따(짜)내어서
칙장(칙으로만든 장삼) 삼아 마련하고
전필이 지대요, 반필이 소맬러라
다섯자이 섭힐러라, 세자이 짓(깃)일러라
마리 곡갈(고깔) 지어되는
자세치를 띄어내어 지은 즉은
눈무지도 아니 내려라
두자세치를 띄치내어 마리곡갈 지어내니
귀무지도 아니내려와
석자세치 띄치내어 마리곡갈 지어내니
턱무지애를 내려왔다.
(註,인간이 옷을 입게된 과정)
미력님이 탄생하야
미력님 세월에는 생화식(생식)을 잡사시와
불아니 넣고, 생나달(생낱알)을 잡사시와
미력님은 섬두되(섬들이)로 잡사시와 말두리(말들이)로 잡숫고 이레서는 못할너라
내 이리 탄생하야, 물의 근원 불의 근본
내 밧게는 얺다, 내여야 쓰겠다.
풀맷독이(메뚜기) 잡아내어
스승틀(형틀)에 올려놋코
숙문삼치 때리내어
여봐라 풀맷독아, 물의 근본 불의 근본 아느냐?
풀맷독이 말하기를
밤이면 이슬 바다먹고
나지면 햇빛 바다먹고
사는 즘생(짐승)이 어찌아나
나보다 한번더 먼지본(먼저본)
풀개고리를 불러 물으시오
풀개고리를 잡아다가
숙문삼치 때리시며
물의 근본 불의근본 아느냐
풀개고리 말하기를
밤이면 이슬 바다 먹고
나지면 햇살 바다 먹고
사는 즘생이 엇지 알나
내보다 두 번 세 번 더 먼저본
새양지를 잡아다가 물어 보시오
새양지 잡아다가
숙문 삼치 때리내어
물의 근본 불의 근본 아느냐
쥐 말이 나를 무슨 공을 시워 주시겟슴니까
미력님 말이, 너를 천하의 주지를 차지하라
한즉, 쥐말이
금렁산에 들어가서
한짝은 차돌이오, 한짝은 무시쇠(무쇠)요
툭툭치니 불이 낫소
소하산에 들어가서
삼치(샘물) 솔솔나와 물의 근본
미력님, 수화(水,火) 근본을 알엇스니
인간 말하여 보자
(註, 불과 물의 근본을 밝힘)
제 2.
옛날 옛 시절에
미력님이 한 짝 솥에 은 쟁반 들고
한 손에 금 쟁반 들고
한을에 축사하니
한을에서 벌기 떠러저
금 쟁반에도 다섯이오
은 쟁반에도 다섯이라
그 벌기 질이 와서
금벌기는 사나희(남자)되고
은 벌기는 게집(여자)으로 마련하고
금벌기 은벌기 자리와서
부부로 마련하야
세상 사람이 나엿서라 (註, 인간의 탄생)
(이 아래 부분은 큰 뜻이 없이 장황하게 이야기가 이어 지므로 여기에서 생략한다)
이 설화는 하늘과 땅 즉 천지가 창조될 때에 미륵님이 탄생했다고 한다. 미륵은 불교에서 말하는 미래의 부처님이다. 지금은 석가모니 부처님이 이 세상을 교화하고 중생을 구제하고 있으며, 석가모니 부처님이 그 영향을 다하고 나면 미륵부처님이 이 세상에 나와 석가모니 부처님의 역할을 대신하게 된다고 한다. 그러한 미륵이 여기서는 천지와 같이 태어나 인간세계를 밝히는 역할을 하고 있다.
처음에는 하늘과 땅이 둘이 아니고 하나로 붙어있었고, 해도 달도 두 개씩 있었다. 사귀 즉 네 귀퉁이에 구리기둥을 세워 하늘과 땅을 분리시켰으며, 해와 달을 각각 하나씩 떼어내어 북두칠성, 남두칠성을 만들고, 큰 별은 임금과 대신들의 별을, 작은 별은 백성들의 것으로 하였다는 내용이다.
최초로 옷을 만들어 입을 때는 그 원료로 칡을 사용하였으며, 부싯돌을 이용하여 최초로 불을 만들어 사용하기 시작하였으며, 소하산의 샘물이 물의 근원임을 말하고 있다.
제2에서는 남․녀 성을 갖게 되는 과정을 이야기하고 있다. 전체적으로 다듬어지지 않아 다소 어색한 감이 들지만 우리 조상분들의 소박한 마음을 읽을 수 있는 신화이다..
제주도의 삼성혈(三聖穴)
혹은 三姓穴이라고도 한다
탄생신화는 대개 하늘에서 내려오지 않으면 알에서 태어나든지, 용이나 신의 힘을 빌어 신체에서 태어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런데 이 신화는 땅속에서 이상한 기운을 받아 인간이 태어난다. 이는 아마 제주도가 화산으로 이루어졌고 옛날에는 지진이 자주 있어 지하에 대한 두려움에서 이를 신으로 섬기는 과정을 거치지 않았나 싶다.
『옛날 세상을 창조한 상제(上帝)님이 축복을 내렸을 때 그만 깜박 잊고 탐나에게는 축복을 내리지 못했다. 후에 상제가 그 사실을 알고 탐나에 축복을 내리게 했는데 공교롭게도 창고에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래서 자신의 목걸이에서 진주알 세 개를 떼어내 탐나에 던지면서
“탐나여! 가장 아름다운 땅이 되어라! 아침 햇살이 제일 먼저 찾아드는 축복 받은 땅이 되어라”고 말했다.
(지금도 한라산 북쪽기슭에 움푹 파인 세 개의 구멍이 있는데 세 개의 구슬이 박힌 자리라고 한다.)
세월은 흘러 문득 세 구멍에서 이상한 기운이 뻗치더니 세 사람의 신인(神人)이 땅위로 솟아올랐다. 이들은 각각 양을나(良乙那), 고을나(高乙那), 부을나(夫乙那)로 불렀다. 세 신인은 부족한 게 없었지만 딱하나 외로움이 있었다(그때까지 그들은 여자를 몰랐다). 한편 일본나라 임금에게는 7명의 공주가 있었는데 그 중 네 명의 공주는 멀리 단적국에 시집보냈고, 세 공주가 남아 있었다.
어느 날 상제가 이 왕의 꿈에 나타나 탐나에 있는 세 신인과 딸들을 혼인시킬 것을 당부하였다. 왕은 세 딸을 탐나에 보내 이 세 신인과 혼인 시켰다. 세 신인은 각각 땅을 정하여 살게 되었는데 이들이 양․고․부씨의 조상이다.』
이 신화는 탄생신화에 가까우나 태어난 인물이 나라를 세운 것이 아니기에 이곳에 싣는다.
초 감 제(初監祭)
제주도에는 무가(巫歌)중에 천지 개벽을 노래한 초감제(初監祭)라는 것이 전하여 온다고 한다. 이 초감제는 일본인 아카바다카시가 채록한 것을 김양기의 ‘우리문화의 수수께끼’에 수록한 것을 인용한 것이다.
천지 혼합으로 제일입니다.
어떠한 것이 천지 혼합입니까?
하늘과 땅이 맞붙은 것이 혼합이오
혼합한 후에 개벽이 제일입니다.
어떠한 것이 개벽이뇨?
하늘과 땅이 각각 갈라져 개벽입니다.
천지 개벽이 어떻게하여 되었으리까?
하늘로부터 아침이슬이 내리고
땅으로부터 묵이슬이 솟아 나와서
음양이 상통한즉 하늘은 자(子時)에 열리고
땅은 축(丑時)에 열리고, 사람은 인(寅時)에 열리니
하늘 머리는 갑자년, 갑자월, 갑자일, 갑자시에
자(子)방향으로 열리고
땅머리는 을축년, 을축월, 을축일, 을축시에
축방향으로 열리고
사람 머리는 병방향으로
병인년, 병인일, 병인시에 열리고
동방으로는 이〔齒〕를 두르고
서방으로는 꼬리를 치고
남방으로는 나래를 두르고
천지 개벽이 되었습니다.
하늘은 어떤 것이 하늘이냐?
청청 맑은 청하늘이오
이은 이도 삼하늘〔三天〕, 지자(知者)도 삼하늘
삼십 삼천 구천 서른 세하늘, 이것이 하늘이외다.
하늘은 두려운 하늘, 땅은 백사(白砂)의 땅
천지간에는 무엇이 다릅니까? 산도 물도 다릅니다
산수중에 무엇이 먼저 났으리까? 구별 못하옵니다.
산이 나고 물이 났으니 산속에 물이 나고
물속에 산이 났으니 산으로 먼저 생겼습니다.
지금 세상을 굽어본즉 밤도 캄캄 낮도 캄캄
인간이 동서남북을 모르고, 가림을 못한 즉
할 수 없이 남방국 일월궁의 아들
청의 동자가 솟아 났으니
앞이마 뒷이마에 눈이 둘씩 돋았다.
하늘 옥황(玉皇)으로 도수문장이 내려와서
앞이마의 눈 둘을 떼어다가
동의 동방 섭제(攝提) 땅에서 옥황께 축수 한즉
하늘에 해가 둘이 돋고
뒷이마의 눈 둘을 떼어다가
서방국 섭제땅에서 옥황께 축수 한즉
달이 둘 솟아나 이 세상은 밝아졌으나
햇빛에는 인간이 타죽고
달빛에는 인간이 얼어죽어
인간이 살아 갈 수 없은즉
천지왕이라 하시는 양반이 이 세상에 강림하사
바지왕과 배필을 맺어서 살다가
하늘로 올라가신 후로 바지왕이 잉태하여
대별왕과 소서왕 양 도령이 솟았나이다.
대별왕 십오세에 어머니왕께
아버지왕이 어디계십니까 물으니
네 부친은 천왕이다.
천왕이라는 증거는 무엇입니까?
증거는 세동강난 용얼레빗 한짝, 붓 한짝, 실 한발,
박씨 세알이다
이것을 어찌하라 하십디까 물으니
정월 첫돋날〔初亥日〕에 박씨를 심어두면
옥황으로 줄기가 뻗어 오를 테니
오렵내라 하시더라 하니
모왕께서 증거품을 받아서 박씨를 심은즉
순이 나서 두줄기 뻗치니
옥황으로 올라가서 부왕을 대한즉
주소, 성명을 물으시고, 증거품을 보니
자식이 분명한 지라.
인간세상은 해도 둘, 달도 둘이다
햇빛에는 타죽고, 달빛에는 얼어죽습니다하니
천근 무게의 무쇠 화살과 활 둘을 내주며
해도 한 개 쏘고, 달도 한 개 쏘아라
부왕의 명령을 받아서 이세상에 나온즉
대왕별은 앞에 오는 해는 섬기고,
뒤에 오는 해는 쏘아서
동해에 반짝 반짝 떠오르는 동산 샛별을 만들고
소별왕은 앞에 오는 달은 섬기고,
뒤에 오는 달은 쏘아서
서해바다에 반짝 반짝 사라져 가는 어스름 별을 섬기고
천공에는 해가 하나되고
지하 공간에는 달이 하나 나서, 이 세상이 밝아졌소
동에는 동산 샛빛, 서에는 어스름 별
남방의 노인성(老人星), 북방에는 북두칠성
별자리 가운데는 견우성, 직녀성
밤중 샛별, 태백성, 타광성
이십팔수 별자리도 도움으로 제일이다.
지금 세상에 어느 성인이 먼저나시고
어느 귀신이 먼저 나셨습니까?
별자리 후로 태고 천황(天皇)씨는 목덕(木德)으로서 왕이 되어
나이를 섭제에 일으켜 하염없이 만드니
형제 십이인이 각각 일만 팔천세러라
지황(地皇)씨는 화덕(火德)으로 왕이 되어
형제 십일인이 또 각각 일만 팔천세러라
인황(人皇)씨는 형제 구인이 구주(九州)를 분장하여
모두 백오십세에 합 사만오천육백세이다.
인황씨 이후에 유소씨 있사오니
나무를 얽어 보금자리를 짓고, 나무 열매를 먹자옵더니
수인(燧人)씨 부싯돌을 뚫어
사람에게 화식을 가르쳐 주신
성인님 들도 도움으로 제일입니다.
하늘찾이 천주왕(天主王), 땅찾이 복희왕
저승찾이 대별왕, 이승찾이 소별왕
옥황찾이 옥황상제, 지황찾이 지왕상제
인간찾이 인간상제
산찾이 산신백관, 물찾이 사해용신
인간 생불(生佛)찾이 천왕불도(佛道)
지왕불도, 인왕불도
(이하는 생략함)
이 신화는 하늘과 땅이 애초에는 하나였으나 개벽에 의하여 둘로 분리되었고, 음과 양이 서로 통하여 天․地․人이 각각 자․축․인의 방향으로 열렸다고 한다. 다음 부분에서는 좀 애매하게 표현하고 있으나, 천공, 지하, 지자라는 삼하늘이 존재하였던 시기를 말하는 듯하다. 여기에는 숫자 “3”을 강조하고 있다. “삼하늘”, “삼십삼천”, “구천 서른 세하늘” 등의 숫자 삼은 불교에서 말하는 양수(陽數) 즉 신의 숫자이다. 삼은 쪼개지지 않는 수로 동양에서는 행운의 수로 삼고 있다.
이 신화는 다소 어색한 부분이 많다. 이러한 결과는 앞으로 소개할 건국신화와 같이 글을 아는 계층에서 다듬은 것이 아니고 민간에서 또는 무당간에 구전으로 전하다 보니 내용이 미숙한 것 같다. 「천지왕이 지상을 내려본즉 인간이 혼란에 빠졌기에 지상으로 내려와서 지상의 여왕인 바지왕과 결혼하여 대별왕, 소별왕을 낳게 하고, 다시 옥황으로 되돌아 간다」
이 내용은 단군신화의 영향을 받은 듯하다. 단군의 아버지인 환웅이 하늘에서 내려와 단군을 낳았고, 그 세상을 다스리듯이 여기서도 대별왕과 소별왕이 아버지 천지왕의 도움을 얻어 혼돈상태인 우주질서를 바로 잡아 인간을 구제한다. 그 후에 천황과 지황, 인황이 우주를 나누어 다스렸으나 겨우 나무를 얽어 보금자리를 짓고, 나무 열매를 먹고 사는 수준이었다.
그런데 수인씨의 도움을 받아 불사용법을 알고, 그로 인하여 음식을 익혀 먹게 되는 등 성인들의 도움을 받는 것으로 되어있다. 여기에 등장하는 수인은 누구인가? 중국신화에 나오는 3황(3皇) 중의 하나인 신으로 인간에게 불사용법을 가르쳤다고 한다.
이어서 우주를 세분하여 관할하는 과정이 나오고 있다. 여기에서도 복희가 등장하고 있다. 복희는 앞에서 소개한 중국 3황 중에서 인간에게 물고기 잡는 법과 8괘를 가르쳐준 신이다.
또, 생불(生佛), 불도(佛道) 등 불교용어가 등장한다. 결국 이 구전 설화는 단군, 중국의 전설적인 3황, 부처님이 등장하는 등 우리 고래(古來)의 민간사상으로부터 영향을 받아 만들어진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앞에서 소개한 창세가에서도 생략된 부분에서는 부처가 등장하는데 이곳에서도 부처가 등장하는 것은 불교사상이 우리 한민족의 의식 깊이에 뿌리 내리고 있었음을 뜻한다 할 것이다.
주변국가의 창조신화
오늘 우리 민족을 형성한 선주민(先住民)은 중앙아시아에서 몽골을 거쳐 바이칼호 근처에서 생활하다가 시베리아를 거처 만주에서 한반도로 들어왔다고 본다. 또 한편은 중국에서 요서, 요동을 거처 한반도로 들어 왔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들 지역 즉 우리 선주민 내지는 그곳에서 유입된 주민이 거주하던 지역의 상고인들의 천지창조에 관한 인식이 어떠했는지를 알아보기로 한다. 먼저 우리 민족형성과 역사 형성에 직․간접으로 큰 영향을 끼친 중국, 시베리아, 몽골의 신화를 알아보기로 한다.
중국의 천지탄생 신화
『중국 서쪽의 천산에 신령스런 새 한 마리가 살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한 덩어리 불꽃 송이처럼 붉은데 다리가 여섯 개고, 날개는 네 개이며, 눈․코․입․귀가 모두 없었다. 그러나, 그 새는 음악과 춤을 알았으며 이름은 제강(帝江)이라 하였다. 제강은 중앙의 상제인 황제(皇帝)인데 혼돈이 황제의 아들이라고 한다. 남해의 천제를 숙이라 하고, 북해의 천제를 홀(忽)이라 하며, 중앙의 황제를 혼돈(混沌)이라 한다. 숙과 홀은 자주 혼돈에게 놀러갔는데 혼돈이 그들을 대접하는 것이 매우 은근하면서도 치밀하였다. 어느날 숙과 홀이 어떻게 하면 혼돈의 은혜에 보답할 수 있을까 하고 논의 하였다. 그 결과
“사람은 모두 눈․귀․코․입 등 일곱 개의 구멍이 있어 보고, 듣고, 음식을 먹고 하는데 혼돈에게는 구멍이 하나도 없으니 무엇인가 부족함이 있지 않은가? 우리가 가서 그를 위하여 구멍을 몇 개 뚫어주는 것이 어떨까? ”하고 말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도끼와 끌 등을 갖고 가서 혼돈에게 구멍을 몇 개 뚫어주는데 하루에 한 구멍씩 7일만에 7개구멍을 뚫었다. 그랬더니 혼돈은 그만 잠이 들었다. 혼돈이 숙과 홀에 의하여 7개의 구멍이 뚫어지자 그만 죽고 말았다. 그러나 혼돈의 뒤를 이어 우주와 세계가 탄생하였다』 (이 글은 ‘산해경’에 있다)
이 신화에서는 우주가 안정기에 접어들고 새로운 질서가 확립된 상태를 우주의 탄생으로 보고 있다. 앞에서 제시한 <우주의 탄생>과 관련하여 생각해 볼 만 하다.
몽골의 창조신 부르칸(Burkhan)
몽골 부리아트족의 창조신화에는 창조주가 셋이 등장한다.
시베케니부르칸, 마다리부르칸, 에세게부르칸이다. “칸(khan)”은 족장, 지도자에서 왕을 뜻한다. 이 말이 우리에게 전해져 한(韓)으로 음전 되었다고 여겨진다.
『창조주 부르칸이 하늘을 날아다니다가 오리가 새끼 열둘을 데리고 물위에 앉아 있는 것을 보았다. 부르칸이 그들에게 물 속에 들어가서 입으로는 검은 흙, 발로는 붉은 흙을 갖고 오라고 명령하였다. 오리가 바다 속으로 들어갔는데 커다란 왕게가 텃세를 부려 오리는 무서워 그냥 나왔다. 부르칸은 오리에게 왕게를 이길 수 있는 주문(呪文)을 가르쳐 주었다. 그래서 오리는 왕게를 물리치고 흙을 가지고 나올 수 있었다. 부르칸은 그 흙으로 땅을 만들었다. 세 부르칸은 서로 힘을 합쳐 붉은 흙으로는 사람의 살을, 돌로는 뼈를, 물로는 피를 만들어 사람을 만들었다. 이 사람이 아직 생기가 없을 때 마귀가 그 사람을 구경하다가 침을 밷아 그만 더렵혔다. 그래서 부르칸이 사람의 몸을 깨끗이 씻었다. 이때 사람의 몸에 털이 없어지게 되었는데 마귀가 침을 밷을 때 손으로 가리고 있던 부분은 씻어지지 않아 털이 남아 있다』.
몽골의 브르아트족이 믿는 창조신이 몽골의 대평원을 만들었고 사람을 만들었다는 내용이다. 그런데 바다와는 거리가 먼, 그래서 생활하면서 접하기 어려운 바다가 등장하며, 그 바다의 흙으로 땅과 사람을 만들었다는 데에 관심이 간다.
시베리아의 『세상을 창조한 할미새』
시베리아는 우리민족이 만주 또는 연해주 방면을 거쳐 한반도에 들어오기 전에 오랫동안 머물렀던 곳이기도 하다.
『처음에 이 세계는 아주 커다란 진흙덩이였다. 물과 흙이 뒤죽박죽이 되어 있었고, 모두가 누더기 같았으며, 진흙탕뿐이었다. 그리고는 서로 엉켜서 움직이며 돌고 있었다. 모든 것이 죽음뿐인 상태였다. 이러한 대 혼란 상황에서 그 어느 생명도 탄생할 수가 없었고 그 어느 생명도 살아 남을 수가 없었다. 공기 중에는 새 한 마리를 찾을 수 없었다. 모든 것은 춥고, 건조하며, 삭막하기만 했다. 그러나 구름은 그의 천둥신(神)을 갖고 있었고, 하늘도 그의 신을 갖고 있었다. 창조주는 하늘의 가장 높은 꼭대기에 수많은 신들과 정령들과 함께 살고 있었다. 이렇게 수많은 시간이 흘렀다. 그 뒤에 신들은 이 땅에 사람들이 살 수 있게 하기를 원하였다. 그래서 신은 하늘에서 할미새 한 마리를 땅으로 내려보냈다.
할미새는 온 천지가 진흙탕뿐인 이곳에서 어찌할 도리가 없어 아주 오랬 동안 날아 다녔다. 그리고는 내려와서 꼬리를 살살 흔들어 진흙탕을 쓸어냈다. 그랬더니 조금씩 마른땅이 나오기 시작하였다. 물은 물대로 바다에 모여들기 시작하였다. 이런 식으로 세상을 차츰 넓혀 나갔다. 그래서 계속 땅은 넓어지고 높아 졌다. 이렇게 해서 세계가 만들어 졌고, 아이누 사람들은 이 세계를 모시리(moshiri) 즉 ‘혜엄치는 땅’이라 부르고, 또 그런 이유로 할미새를 아주 소중하게 숭배한다.』
시베리아 신화는 참으로 현실적이다. 시베리아가 해빙기를 여러 번 거치면서 대평원이 되는 과정을 잘 설명해주고 있는 것 같다. 이와 같이 신화는 역사의 사실을 전달해 주는 역할을 한다.
시베리아 야쿠트족의 창조신화
현 러시아의 야쿠트 자치공화국은 동시베리아에 있다. 야쿠트족은 민족신앙, 예를 들어 신내림이나 주술적 행위, 솟대에 기러기 등 새를 매다는 풍습 등이 우리와 매우 흡사하다. 그래서 필자는 몽골리안이 바이칼호 근방에서 살다가 태양의 신이 사는 동쪽으로 이동하다 바다를 만나 남으로 내려와 한반도에 다다랐을 것으로 본다. 학자들은 약 4만년 전부터 아시아 해안가에 살던 남방계 몽골리안 일부가 북상하였다는 견해도 있다.
『최고의 신이자 창조주인 이린아이토욘
(YronAjyTojon)』은 태초에 물고기의 부레 같이 생긴 바닷속 귀신이 물위에 떠있는 것을 보았다. 그가 신문하자 그는 자신은 악령이며 물밑에 있는 땅에서 사는 자라고 했다. 그래서 이린아이토욘은
“만약 정말로 밑에 대지가 있다면 그 땅의 한 조각을 내게로 가져 오라”고 했다. 이린아이토욘은 물밑에서 가져 온 흙을 바다위에 띄워 놓고 그 위에 않았다. 이때 귀신은 이린아이토욘을 바다에 빠뜨리려고 흙을 차고 밟았다. 이린아이토욘은 흙을 커지게 하여 땅을 만들었다. 땅에 산과 골짜기가 있는 것은 그때 귀신이 차고 밟은 자리이다. 땅을 만든 후에 돌로 사람형상 7개를 만들어 놓고 하늘에서 기(氣)를 가져다 불어넣어 생명을 주었다.』
시베리아의 창조신화는 어려운 자연환경을 극복하면서 인간이 살 수 있는 여건을 만든 다음, 신이 인간을 창조하고 있다. 시베리아 신화에는 추운 지방에서 살아가는 개가 자주 등장하며, 신의 메신저는 새로 구성되어 있다. 개와 새가 등장하는 것은 그들의 현실세계, 정신세계를 반영하는 것이라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민족의 창조신화나 건국신화와 같은 하나로 연결되는 내용을 발견할 수는 없다. 이는 우리민족이 이미 그들과 오래 전에 헤어져 별도의 문화를 형성한 단계에서 신화가 만들어졌다고 볼 수 있으며, 이러한 이유에서 우리를 별개의 민족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세 번째 이야기
한민족과 고대국가의 형성
인류의 이동
영국 옥스퍼드 대학의 브라이언사이스키 교수는
“오늘 지구상의 모든 햄스터는 1930년에 시리아 사막에서 잡은 한 마리의 임신한 햄스터에서 비롯되었다”고 했다. 이는 미토콘드리아 DNA 분석을 통해 실제로 확인했다고 한다. 미트콘드리아 DNA는 난자에만 있는데 세포의 핵밖에 위치하여 아버지의 유전자와 섞이지 않은 채 태초의 여자의 것을 원형대로 유지해 온다고 한다.
이러한 논리를 근거로 하여 유전학자 들은 현존하는 인류의 조상은 10명의 남자와 18명의 여자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이들이 아프리카 남부에서 발원하여 계속 번창하면서 이집트 지역을 경유하여 이라크 지방에 도착한 후 56,000내지 73,000년 전에 일부는 유럽으로, 또 일부는 인도방면으로 이동하였다고 본다. 그들은 계속하여 중앙아시아로 들어가 대평원에서 생활하다 다시 일부는 북유럽으로 들어갔고, 한편은 몽골, 시베리아 쪽으로 이동하였다. 이동중에 일부는 남으로 방향을 바꾸어 만주방면으로 들어섰고, 7,000년 내지 35,000년 전에 베링해협을 건너 북아메리카를 거쳐 남아메리카로 이동하였다고 본다.
이들이 주장하는 인류의 발생지와 이동 경로는 기존의 학설과 같으나, 시기에는 차이가 크다.
기존의 학설에 의하면 인류는 400만년 또는 300만년 전에 아프리카 남부 어디에서 발원하여 앞에서 설명한 경로를 통하여 이동하였다고 보고 있다. 중앙아시아의 넓은 평원에서 생활하던 이들은 동으로 이동하여 바이칼호에서 수렵생할을 하면서 문명을 키웠을 것이다. 이들은 다시 태양의 신이 솟아오르는 동쪽으로 이동하다 태평양을 만나 해안을 따라 남으로 이동하여 연해주 지방을 거처 한반도의 동북지역으로 들어왔을 것이다. 또 한 무리는 바이칼호나 그 인근에서 야브로노이산맥을 넘어 송화강 부근으로 이동하였을 것이고, 또 다른 무리는 대흥안령산맥을 넘어 요하유역으로 이동하였다고 보아진다.
또, 인류학자들은 DNA 조사를 통하여 인류의 이동경로를 확인하였다. 이들에 의하면 인류는 아프리카(Africa)에서 출발하여 중동과 중앙아시아를 거쳐 7만~5만년 전쯤에 몽골에 도착했다. 이들은 이곳에서 세 갈래로 퍼저 나갔다. 하나는 중국대륙을 통해 동남아시아로, 또 하나는 시베리아와 베링해협을 거처 아메리카(America)로 갔으며, 또다른 한 갈래는 만주를 거쳐 한반도에 이르렀고, 여기에서 다시 일본으로 건너갔다고 한다.
이들이 한반도 깊숙이 까지 들어와 구석기 문화를 형성하였다.
구석기 시대의 한반도 주인
한반도에 언제 사람이 들어와 살았는지 정확한 연대를 확인할 수는 없다. 그러나 구석기 시대에 한반도에도 인류가 살았음은 확인되고 있다. 경기도 연천군 전곡리 유적지는 약 20만년 전에 인류의 생활 흔적을 말해주고 있으며, 충북 단양군 도담리의 금굴유적은 70만년 전에 이 땅에 인류가 살았음을 설명해 주고 있다.
한반도에서 발견되는 구석기 유적은 1935년 일본인들이 철도공사를 하다 우연히 발견한 함북 강안리 유적지에서부터 시작한다. 이곳에서는 털코키리, 털코뿔소, 타제석기 등이 발굴되었다. 그 후 80년대 내지 90년대에는 많은 유적이 추가로 발견되어 한반도 제주도에서부터 요동․요서지역, 연해주 지역, 송화강유역에 걸쳐 구석기인들이 살았음이 확인되고 있다.
전곡리 유적지에서는 주먹도끼, 자르개, 여러면석기, 찍개 등의 도구가 발굴되었다.
구석기 시기를 전기, 중기, 후기로 나누고 있으며, 우리 한반도에는 중기부터 살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후기로 들어와서는 채집(採集) 경제에 바탕을 둔 이동생활을 영위하면서 초기모계씨족공동체(初期母系氏族共同體)를 형성하였다고 한다.
모계를 중심으로 한 가족이 어울려 씨족을 이루었으나, 이들은 씨족 연맹체였을 뿐 지연공동체(地緣共同體) 단계는 아니었다고 한다. 그러나 구미 고고학계의 ‘사회발전 단계설’이나 선사시대 사회에 대한 인식에 비추어 볼 때 모계사회설은 허위로 여겨진다. 이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모계사회에서 부계사회로 넘어 오면서 무덤제도가 발전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는 청동기 시대 초기에 청동기 무기를 이용하여 정치권력을 갖춘 자가 나타나면서 무덤제도가 발전하였다고 보아야 하므로 모계사회는 인류사에서 존재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중국이나 북한에서는 아직도 이 용어를 계속 사용하고 있다고 한다.
인류역사의 99%를 차지 한다는 구석기 시대는 마지막 빙기인 1만년을 전후하여 끝났다.
신석기 시대의 민족 형성
빙하기가 끝나 지구가 따뜻해지자 사계절이 분명해졌다. 그래서 이동이 보다 활발해졌다. 빙하기가 끝나면서 얼음이 녹아 많은 육지가 바다로 바뀌자 이동을 시작했는데 오늘의 지평과 같이된 시기가 대략 1만년 전쯤이다. 이때부터 신석기 시대가 열린다. 물론 그 이후인 3천 5백년 전쯤에 있었던 작은 빙하기와 같은 간빙기는 있었다.
안정된 기후는 창작활동 범위를 넓혀 문명을 진화시키고, 활동력을 키워 이동을 촉진했다. 새로운 문명을 가진 북방인이 만주, 한반도로 이동하여 올 때 그들은 각기 다른 문명을 가지고, 시기와 지역을 달리하여 들어왔다. 그래서 우리 민족 형성 초기인 신석기 시대의 한반도에는 문화가 서로 다른 인종이 서로 다른 지역에서 살아가면서 4개의 문화이질 지역을 형성하였다.
현재의 함경도와 강원도 북부의 동북지방, 평안도의 서북지방, 한강을 중심으로 한 중서부지방, 경상도 전라도의 남부지방으로 나뉜다.
이들 지방을 구분하는 기준은 가장 객관적인 것이 현재로는 토기이다. 신석기 시대의 토기는 무늬모양에 따라 융기문토기, 빗살무늬토기로 구분되며, 토기밑의 생김새에 따라 뾰족한 것을 첨저토기, 평평한 것을 평저토기, 둥근 것을 원저토기라 한다. 융기문토기는 토기면에 진흙띠를 말아 붙이거나, 표면을 손끝으로 눌러 띠돋움을 만들었다.
빗살무늬토기는 토기 겉면에 일정한 선으로 무늬(빗살무늬)를 음각 형태로 새긴 것이다. 이러한 토기의 형태와 무늬는 지방에 따라 특색을 갖고 있다.
동북지방은 만주 동쪽, 두만강 이북 살림지대, 연해주 지역의 주민들과 밀접한 관계를 가져 빗살무늬 토기가 사용되었다. 이지방은 서포항형문화(西浦港型文化)라고 부른다.
서북지방은 요녕, 길림지방과 같은 계열의 문화를 갖고 있었으며 납작밑토기를 사용하였고 이를 신암리형문화(新岩里型文化)라 한다.
중서부지역은 둥근밑빗살무늬토기를 사용하였고 경제생활도 다른 지방에 비하여 많은 차이를 보이는데 이 지역을 암사동형문화(岩寺洞型文化)라고 한다.
끝으로 남부지방은 융기토기와 타제석기를 사용하였으며 바닷가이므로 어로와 해산물채취에 보다 비중을 많이 둔 경제생활을 하였다. 이곳을 동삼형문화(東三型文化)라고 한다.
이와 같이 신석기시대의 한반도에는 비교적 지방차를 보여주는 몇 갈래의 종족이 지역단위로 살고있었다. 이러한 지역의 문화차이는 광활한 시베리아의 곳곳에서 독립된 생활을 하던 집단들이 서로 다른 경로를 따라 한반도로 이동하면서 자기들 나름대로 문화를 형성하였으며, 한반도내에서도 자연환경에 적응하면서 각자 다른 문화를 갖는 집단으로 발전하였다고 본다.
신석기시대의 지역적 문화차이는 청동기․철기 시대를 거쳐 삼국시대까지 계속된 듯 싶다. 그러나 삼국시대에도 문화교류는 계속되었기에 서서히 통합되다가 삼국이 통일되면서 동질성이 커져 한민족의 형성이 완성되었다고 볼 것이다.
신석기인이 한반도로 이주하기 전의 구석기인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한편에서는 구석기인은 우리의 직계조상이 아니고, 신석기인만이 직계조상이라고 하고 있으나, 구석기인들은 숫적으로도 적었고 문화수준도 저급하여 새로 이동해 온 신석기인에게 흡수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구석기인들도 우리조상의 일부로 보아야 한다.
신석기인은 움집이나 동굴에서 생활하면서 수렵, 어로, 채집, 농경에 바탕을 둔 정착생활로 이전 생활과는 그 모습이 사뭇다르고 인구도 급격히 증가하였다. 이들은 돌과 동물의 뼈등으로 만든 농기구, 어구, 수렵용도구 등을 다양하게 만들어 사용하였으며, 숫가락. 칼. 바늘. 송곳. 낫. 뒤지개. 뿔쾡이. 살촉. 작살. 낚시바늘 등과 흙알. 토기뚜껑 등 토제품도 사용하였다.
한반도의 신석기시대는 지금부터 9천년 전부터 약 3천 3백년 전까지로 볼 수 있다.
한민족의 형성
민족의 기준을 어디에 둘 것인가는 많은 사람이 의견을 달리하고 있으나 그 기준은 혈연, 또는 문화적 고유성과 정체성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우리민족이 형성된 시기는 대체로 신석기 시대로 보아야 한다. 한반도내와 그 북부에서 이주해온 우리조상은 고아시아인과 알타이족의 혼혈이라고 한다. 고대 알타이족은 알타이산맥 남쪽에서 살았으며, 그 중의 퉁구스(Tungus)는 바이칼호 서쪽에서 기원하였다. 한편 고아시아인은 시베리아, 흑룡강, 연해주 일대에서 생활하였는데 한인(韓人)의 조상 예․맥족은 고아시아인과 알타이족 특히 퉁구스의 혼혈이라고 한다(김정배).
즉 한족은 알타이족 계통의 퉁구스족과 고아시아인이 일차로 혼합하여 예(濊), 또는 맥(貊) 혹은 예맥족이 되고, 이들이 다시 한(漢), 말갈, 읍루족 등과 혼혈하였다. 이들은 나름대로 독립된 문화를 창조하면서 한반도에 이르렀다.
중국 사서에 “읍루는 부여의 동쪽 천여리에 있는데 사람의 모습은 부여와 닮았으나 언어가 다르다. 한(漢)이 일어날 무렵에 부여에 복속되어 있었는데 풍속의 기강이 가장 뒤 떨어졌다”는 기사가 있다. 부여인이나 읍루인의 모습이 비슷하면서도 무리를 결정짓는 언어가 다르다는 것은 즉 문화가 다름을 뜻한다. 언어는 사회적 약속의 산물이다. 부족어 또는 지역어가 독립적으로 발전하면서 한나라의 언어로 정착되는 것이다.
시베리아나 만주의 일정한 지역에서 오랫동안 같은 무리생활을 한 집단은 그 집단에 맞는 문화를 형성하여 민족으로 발전하였음을 볼 수 있다.
그러므로 민족은 혈연보다는 문화의 동질성(同質性)과 정체성(正體性)을 그 기준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청동기 시대의 고대국가 형성
신석기를 사용하여 점차 정착생활을 영위하던 그들은 한반도의 서부지역인 요녕(遼寧)지방에서 청동기 무기로 무장한 집단들이 사용하는 청동무기와 청동생활용품, 무문토기의 영향을 받기 시작하였다. 그 시기는 북한에서는 4천년전 이상으로 보고있으며, 남한에서는 3천년 전쯤으로 본다. 유물을 볼 때, 파주군 옥성리 유물은 3천년 전의 것이고, 여주군 흠석리는 3천 내지 3천 3백년 전, 평양시 남경에서도 3천 3백년 전의 것으로 확인되므로 남․북한 지역에서 발굴된 유물이 3천 3백년 전의 것으로 밝혀져 그 시기를 그렇게 보기로 하겠다. 그리고 그 하한 시기는 세형동검과 철기가 같이 사용되기 시작한 2천 3백년 전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청동기를 사용하는 무리들이 시베리아나 바이칼호에서 내려왔느냐 아니면 중국 은나라에서부터 전파된 것이냐는 여기서는 별개로 하겠다(청동기 유물의 분포로 보아서는 시베리아․바이칼호에서 전파된 것으로 볼 수도 있고, 은나라 멸망때 다수 이주한 한족(漢族)에 의하여 전파된 것으로도 볼 수 있다)
고조선의 건국시기도 일부에서는 4천년 이전으로 보는가 하면 다른 한편에서는 3천년에서 3천3백년 전으로 보기도 한다.
이러한 견해차이는 청동기의 사용시기와도 맥을 같이 한다고 볼 수 있다. 고조선 하면 대표할 수 있는 청동기중 비파형동검이 있다. 이는 악기인 비파와 모양이 비슷하다 하여 그렇게 불려지는 이 칼은 당시로서는 신분을 상징하는 물건일 수도 있고 무기로서는 오늘날의 신무기 만큼이나 그 위력이 컸을 것이다.
물론 신석기 사회에서도 혈연사회에서 씨족사회로 발전하면서 혈연관계에 의한 복종은 있었을 것이나 일반적으로 평등하고, 공동생산하여 공동으로 소비하는 사회였다고 보고 있다.
혈연성을 배제하고 객관적 권력관계가 형성된 집단을 추장(酋長, Chiefdom)이 이끈 추장사회를 거처 국가의 권력이 형성된 것은 청동기 시대 초기라고 보아야 한다.
이 시기에 고조선이 요하(遼河)유역에서 일어섰고, 다소 늦은 시기에 송화강 일대에서는 부여가 개국하여 우리민족의 활동범위가 요하 - 송화강 - 한반도 전역에 이르렀다.
국가가 형성되면서 필연적으로 지배자와 피지배자(평민, 노예)가 구분되고, 지배자는 적으로부터 피지배자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해 주는 역할을 하고, 피지배자중 평민은 세금과 군역을 부담하였다. 평민이 공민(公民)이라면 노예는 지배자의 사적 소유물 이었다.
지석묘(支石墓)
씨족 혈연사회를 벗어나 추장사회로 발전하면서 권력을 소유한 자는 영토를 넓히고 권력을 집중하는데 성공한 후에는 자신의 사후세계(死後世界)인 무덤에 관심을 갖게된다.
청동기 시대의 묘지제도는 돌무덤 즉 고인돌무덤, 돌곽무덤, 돌널무덤, 돌무지무덤이 있고, 철기시대로 내려오면서 널무덤이 많아진다. 돌무지무덤〔積石墓〕은 중앙아시아와 몽골 평원에서 이동생활을 하던 사람들의 유물로 이들은 시신을 묻고 오늘날과 같은 봉분을 만들어 흔적을 남겨 오래 기릴 필요가 없었다. 그래서 시신을 묻은 후 여우와 같은 야생동물이 냄새를 맡고 시신에게 피해를 입히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잔돌을 가득 쌓아 놓은데서 연유한다 하겠다. 지금도 중앙아시아의 알타이족은 이러한 무덤양식을 지키고 있다. 그들은 우리와 같이 성황당(서낭당)을 만들어 놓고 기도하기도 한다.
집안 때의 고구려는 적석묘 제도가 일반적이었다. 또 백제 초기에도 적석묘가 있었는데 이는 백제초기 지배세력이 북쪽에서 내려와 선주민을 지배한 근거로 볼 수 있다.
이러한 묘제도를 갖고 남으로 이동한 무리들은 지석묘라는 묘제도를 만들었다. 지석묘는 청동기시대를 대표하는 무덤의 하나이며, 한반도에는 전세계 지석묘의 60%에 달하는 29,000여기가 있다. 지석묘는 받침돌의 크기에 따라서 북방식과 남방식으로 구분하고 있으나 큰 의미가 없다고 할 것이다.
지석묘는 집단의 규모와 권력의 정도를 말해준다. 덮개돌의 무게가 큰 것은 150ton에 달하는 것이 있다. 이정도의 돌을 운반하기 위해서는 일시에 3천명의 인원이 동원되어야 가능하다고 한다. 한가정에서 건장한 장정 한명이 이 공사에 동원되었다고 보고 가구당 5인의 가족이 있었다고 한다면 이 집단은 약 1만5천명이 거주하였다고 추정할 수 있다.
고인돌의 무덤주인은 적어도 1만5천명을 통치할 수 있는 정치력을 갖춘 지도자였을 것이다. 이 정도의 규모는 추장사회였을 것으로 본다.
중국 사서인 <양서(梁書)>에 이런 내용이 있다.
“마한은 54개국이다. 큰 나라는 1만여호였고, 작은나라는 수천여호였다.” 같은 논리로 1만여호라면 약 5만명의 집단이다. 즉 고인돌무덤 주인의 3~4배 규모이다. 소국형태의 3내지 4분의 1 규모 집단였다면 추장사회로 보는 것이 가능하다. 그러므로 지석묘는 청동기 초기부터 시작된 무덤양식으로 추장(chiefdom)의 것이었다.
비파형 동검
우리나라 고조선의 특징적 유물이면서 청동기시대의 가장 큰 특징이라면 비파형동검을 들 수있다. 이것의 연대를 요즘은 기원전 13세기 내지 12세기로 보고 있어 고조선의 국가형성 시기도 그때로 보는 기준이 되고 있다.
비파형동검이 나타나는 지역은 요동지역은 물론 길림, 장춘지역을 비롯하여 한반도 전역이다.
이제까지 동(銅)제품은 검. 거울. 도끼. 화살촉. 마구부속품. 의례용품. 장식품 등이 있다. 초기 청동기문화를 전파한 사람들은 청동기와 말〔馬〕로 무장한 전투력이 강한 집단이었으며, 주로 요녕지방을 중심무대로 성장하여 이를 요녕청동문화라 한다. 청동기시대에 나타나는 문화는 신석기시대의 4개 지역 문화권과는 또달리 요녕청동문화, 무문토기문화, 한국식농경청동문화권으로 구분할 수 있다.
요녕청동문화는 요녕지방을 중심으로 기마를 사용하였으며, 농경과 반(半)이동적 유목생활을 병행하였다. 이들은 계급적 부족사회를 이루었고, 묘지제도는 적석석관묘(積石石棺墓)제 였으며, 전투력이 강한 큰검. 도끼. 화살촉 등을 활용하는 무사집단 이었다.
신석기시대에 동북지역을 통하여 한반도에 들어온 빗살무늬토기와는 다르게 청동기시대에는 한반도내에 무문토기문화가 형성되었다. 이들은 알곡 농사를 지으며 완전 정착생활을 하였으며, 사회구조는 평등적 부족사회를 형성하였다. 이들은 주로 마제석기를 사용하였으며, 지석묘제도를 받아들였다.
끝으로 한국식청동문화는 한반도 내에 존재하였으며, 이들은 동검이나 동도끼외에는 주로 동으로 만든 장식품이나 의례품을 즐겨 사용하였고, 그 기술이 아주 정교했다. 이 문화권에서는 마구부속품이 발견되지 않는 것으로 보아 만주지역의 예맥 족과 달리 이때까지도 말을 사용하지 않았던 듯 싶다. 이들의 우두머리는 정치적 지배자 였음에도 무사신분은 아니고 비교적 전투력이 약한 농경집단이었다.
고대국가의 형성
대체로 우리민족이 하늘의 뜻을 받아 국가를 연〔開國〕시기는 청동기 초기였다고 본다.
먼저 국가가 형성된 과정은 많은 학자들이 아주 다양하게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는 이종욱교수의 견해를 따르기로 한다. 그에 의하면 국가는 추장(Chiefdom)사회 → 소국(小國) → 소국연맹 → 소국연합(병합)의 과정을 통하여 형성되었다고 한다.
추장사회 이전에 씨족사회가 있었을 것이며, 씨족사회가 발전하여 혈연공동체 사회를 형성하고, 더 발전하여 지연공동체 사회를 거처 추장사회에 이르렀다. 청동기 시대에 들어와서 소국이 형성되었으나, 많은 지역에서는 이때까지도 추장사회 또는 그 이전단계에 머물렀을 것으로 본다.
시대구분에서 현대를 컴퓨터를 이용한 정보사회라고 하지만 과연 전체인구의 몇 퍼센트가 이 혜택을 받고 있을까? 마찬가지로 청동기 시대라 해서 전 주민이 청동기를 사용한 것은 아니다. 철기시대 또한 같다.
네 번째 이야기
고대국가의 건국 신화
어느 민족이나 민족 형성과정과 초기국가 성립단계는 신화로 구성되었음을 볼 수 있다. 신화가 고고학자들의 성실한 활동으로 많은 부분이 차츰 사실로 입증되고 있다. 우리나라의 초기국가 성립시기에는 문자로 기록할 수 있는 여건이 아니었기에 구전되어 오다 후에 문자로 기록되다 보니 신적 요소가 개입되었음은 앞에서 확인하였다. 단군신화의 경우 3~4천년 전의 이야기이다. 오늘 우리와는 그만한 시간차가 있다. 그 시대 이 땅에 살았던 그 시대 사람들은 어떠한 문화수준에서, 어떠한 환경에서, 어떠한 사고와 관념을 갖고 살았을까? 오늘 우리와 같았을까? 그럴리는 없다. 신화가 허무맹랑하다하여 믿을 수 없다고 버릴 것이 아니라 그들을 우리가 이해하는 자세가 더 필요하지 않을까?
네 번째 이야기 첫마디
고조선의 건국신화
고조선은 단군이 건설하였다는 사실은 우리국민 누구나 다 잘 아는 일이다. 그 역사적 사실이 <삼국유사>, <제왕운기>, <세종실록>, <응제시주>에 전하고 있다.
삼국유사의 단군신화
삼국유사는 고려 중엽인 1280년대 전기에 일연(1206~1289)이 편찬한 역사서이다. 일연은 김부식의 <삼국사기>가 왕조 중심의 편년체 역사서로서 서민들의 숨결이 들어있지 않은 것이 못내 아쉬웠던지 삼국유사를 편찬하면서 우리민족이 당시까지 살아오면서 남긴 따뜻한 삶의 이야기를 빠짐없이 수록하였다. 여기 단군신화도 그 중의 하나이다.
『<위서(魏書)>에 이런 말이 있다. 지금으로부터 2천년 전에 단군왕검(檀君王儉)이 계셨는데 아사달 - 경에는 무엽산 또는 백악이라고도 했는데 백주에 있었다. 혹은 개성 동쪽에 있었다고도 하는데 지금의 백악궁이 바로 이곳이다. - 에 도읍을 정하고 새로 국호를 조선이라 불렀는데 이때는 중국의 고 임금과 같은 시기였다고 한다.
<고기(古記)>에는 이런 말이 있다.
옛날에 환인(桓因) - 제석(帝釋) -이 있었는데 그 서자 환웅(桓雄)이 항상 천하에 뜻을 두고 인간세상을 다스리고자 했다. 아버지가 그 뜻을 알고 삼위태백산을 내려다 본 즉 그곳이 과연 인간세상을 널리 이롭게 할 만한 곳이라, 이에 천부인(天符印) 세 개를 주어서 환웅으로 하여금 내려가 이를 다스리게 하였다. 환웅은 무리 3천을 거느리고 태백산 - 지금의 묘향산- 꼭대기에 있는 신단수 밑에 내려왔는데 이곳을 일러 신시(神市)라고 한다. 이분이 바로 환웅천왕(桓雄天王)이라고 불리시는 분인데 그는 풍백(風伯), 우사(雨師), 운사(雲師)를 거느리고 곡식, 생명, 질병, 법률, 선악 등을 위시한 인간의 360여 가지의 일을 주관하여 인간세계를 다스리고 교화시켰다.
이때 곰 한 마리와 범 한 마리가 같은 굴속에서 살고 있었는데, 항상 사람되기를 환웅에게 기원하였다. 환웅은 신령스런 쑥 한 심지와 마늘 스무개를 주면서 말하기를
“너희가 이것을 먹고 백일동안 햇빛을 보지 않는다면 곧 사람이 될 것이다.”라고 했다.
곰은 이것을 받아먹고 세이레(21일) 동안 기(忌)하니 여자의 몸이 되었다. 그러나 범은 기하지 못하여 사람이 되지 못하였다.
웅녀는 그와 혼인할 상대가 없으므로 날마다 단수밑에 와서 잉태하기를 축수 하였다. 이에 환웅이 임시로 사람으로 변하여 그와 혼인하였더니 이내 잉태하여 아들을 낳았다. 그가 바로 단군왕검이다. 단군왕검은 당 고가 즉위한지 50년인 경인년 - 요(堯)가 즉위한 연원은 무진년이니 50년은 정사요, 경인이 아니다. 이것은 사실이 아닌 것 같다 - 에 평양성 - 지금의 서경 - 에 도읍을 정하여 비로소 국호를 조선이라 불렀다. 이후 백악산 아사달로 도읍을 옮겼다. 그곳을 궁홀산 이라고도 하고 금미달 이라고도 한다. 그는 이곳에서 1천5백년 동안 나라를 다스렸다. 주나라 호왕이 왕위에 오른 기묘년에 기자(箕子)를 조선에 봉하니 단군은 장단경으로 옮겼다가 나중에 돌아와 아사달에 숨어 산신이 되었는데 나이가 1천9백8세였다.
당나라 배구전에 전하기를 고구려 본래가 고죽국 - 지금의 해주 - 이었는데 주나라가 봉해 줌으로서 조선이라 하였으며, 한(漢)나라가 이를 다시 나누어 세군(三郡)을 설치하여 이를 낙랑, 현도, 대방 - 북대방 -이라 불렀다. 통전(通典)에도 또한 이와 같다. - 한서에는 진번, 임둔, 낙랑, 현도의 한사군으로 되어 있는데, 여기서는 세 군으로 되어 있고 이름도 또한 같지않으니 어떤 이유일까 -』
일연이 인용한 <위서>나 <고기>는 현재 전하지 않아 그 내용을 알 수 없으나 아마 존재하였으나 지금은 없어진 자료가 아닌가 싶다. 위서에는 단군왕검이 아사달에 나라를 세운 것이 중국의 고임금 때라고 하였다. 고 임금이란 표현은 일연이 삼국유사를 찬술하면서 중국의 요 임금을 고려 제4대 정종의 휘(諱)가 요 이었으므로 이를 피하여 그렇게 기술한 것이다. 뒤의 당 고도 또한 같다.
우리나라 기록 중에서 단군이 고조선을 세운 연대가 기원전 2333년 전이라는 기록은 삼국유사가 최초이다.
단군이 도읍을 정하고 또 신이 되어 잠적한 아사달에 대하여 알아보기로 한다.
세종때 영의정을 지낸 유관이 말하기를
“황해도 문화현은 나의 고향인데 그곳에는 구월산이 있다. 그 산은 단군조선 때에는 아사달산이라 하였고, 신라 때에는 궐산이라고 하였다. 궐을 느리게 발음하면 ‘구월’이 되니 구월산이라고 하였다. 산속에는 신당이 있는데 어느 시대에 세웠는지 알 수 없으나, 북쪽 벽에는 단웅천왕이 있고, 동쪽 벽에는 단인천왕이 있으며, 서쪽 벽에는 단군천왕이 있다. 이를 삼성당(三聖堂)이라 한다. 신당 밖에서 까마귀와 참새들이 날아들지 아니하고, 고라니나 사슴도 들어오지 않는다.”고 세종임금께 알린 기록이 있다.
이와 같이 아사달이 황해도의 구월산 이라면 다른 정치세력에 쫓긴 조선임금이 구월산으로 숨어 몸을 피한 것은 아닐까?
환인이 환웅에게 준 천부인이란 신의 위력과 영험한 힘의 표상으로 인간세상을 다스리는 물건을 말한다. 그러나 그것이 무엇인지는 구체적으로 전하지 않아 알 수 없으나, 아마도 칼. 거울. 방울(혹은 곡옥)이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이 세가지는 군주나 제주, 또는 무당이 천신(天神)에게 제를 올릴 때 사용하는 도구였다.
제왕운기의 단군신화
제왕운기는 1280년대 후반에 이승휴(1224~1301)가 쓴 서사시로서 민족문화의 우월성과 역사적 전통에 강한 자부심을 갖고 쓴 자주적 역사서이다.
『누가 처음 나라를 세워 풍운을 이끌었는가? 제석(帝釋)의 손자로서 이름은 단군이다. <본기(本紀)>에 이르기를 상제 환인에게 서자가 있었는데, 웅이라 했다. 운운. 일러서 말하기를
“아래로 삼위태백에 내려가서 인간을 크게 이롭게 하라”했다. 이 까닭에 웅이 천부인 세 개를 받고, 귀인 삼천을 거느리고 태백산 꼭대기 신단수 아래에 내려오니 이를 일러 단웅천왕이라 했다. 운운. 손녀로 하여금 약을 먹고 사람의 몸으로 되게한 다음 단수신(檀樹神)과 혼인해 아들을 낳으니 이름이 단군이다. 조선의 지경에 웅거해 왕이 되었다. 이 까닭에 시라(신라). 고례(고구려). 남북옥저. 동북부여. 예와 맥이 모두 단군의 수였다. 1천38년을 다스리고 아사달에 들어가 신이 되니 죽지 않는 때문이다. 요임금과 더불어 무진년에 일어나서 우하(虞夏)가 다 나도록 왕위에 있다가 은나라 무정8년 을미에 아사달에 들어가 신이 되었다(지금의 구월산이니, 궁흘이라고도 하고 삼위라고도 한다. 사당이 아직도 있다). 1천28년을 임금으로 있었으니 환인으로부터 그런 변화를 받은 것이 아닐까? 그런지 164년 후에 어진 사람이 군신을 다시 열었다(또는 164년에는 부자는 있었지만 군신은 없었다고도 한다)』
여기에서 제석과 석제는 같이 쓰이고 있다. 삼국유사에서는 석제라 하였고, 제왕운기에서는 제석이라 하였다. 이는 같은 뜻으로 모두 불법을 보호하며 아수라의 군대를 벌한다는 하늘의 임금님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그러나 여기에서 제석은 환인을 뜻한다. 환인은 하늘에 있는 임금으로 신(神)을 뜻한다. 환웅이 환인의 서자라고 했는데 이는 첩의 자식이 아니라 장자가 아닌 차자를 그렇게 불렀다고 보아야 한다.
세종실록지리지의 단군신화
세종실록은 조선왕조실록 중 세종조의 실록을 말하며, 여기의 지리지 편에 실린 내용이다. 이 기록은 단종2년(1454)에 <단군고기>를 인용하여 편찬한 것으로 생각된다.
『<단군고기>에 이르기를
“상제환인(上帝桓因)이 서자가 있으니, 이름이 웅인데 세상에 내려가서 사람이 되고자 하여 천부인 세 개를 받아 가지고 태백산 신단수 아래에 강림하였으니 이가 곧 환웅천왕이 되었다.
손녀(孫女)로 하여금 약을 마시고 인간이 되게 하여 단수(檀樹)의 신과 더불어 혼인해서 아들을 낳으니 이름이 단군이다. 나라를 세우고 이름을 조선이라 하니 시라, 고례, 남북옥저, 동북부여, 예와 맥이 모두 단군의 다스림이 되었다.
단군이 비서갑 하백(河伯)의 딸에게 장가들어 아들을 낳으니 부루(夫婁)이다. 이를 곧 동부여왕 이라고 부른다. 단군이 당 요와 더불어 같은 날에 임금이 되고 우가 도산의 모임을 당하여 태자 부루를 보내어 조회하게 하였다.
나라를 세운지 1038년 만인 은나라 정무8년에 아사달에 들어가 신이 되니 지금의 구월산이다.ꡓ』
(이후는 생략함)
응제시주의 단군신화
응제시주(應製詩註)는 권람(1416~1465)이 그의 할아버지 권근(1352~1409)이 지은 시에 주석을 붙인 것으로 세조8년(1462)에 판각된 것이다.
『옛적에 신인이 박달나무 아래에 내려오니, 나라사람들이 그를 세워 임금으로 삼고, 인해 단군으로 불렀다. 그 때는 요임금 첫해인 무진 이었다. <고기(古記)>에 이르기를
“상제 환인에게는 서자가 있었는데 웅 이라고 했다. 인간세상에 내려가 교화하려는 생각을 갖고 천인(天印) 셋을 받고, 무리 3천을 거느리고 태백산의 신단수 아래에 내려오니 이를 일러 환웅천왕이라고 했다. 환은 혹 단(檀)이라고도 한다. 산은 곧 지금의 평안도 회천군 묘향산이다.
풍백(風伯), 우사(雨師), 운사(雲師)를 거느리고 곡식, 인명, 질병, 형벌, 선악 등을 주관하고, 무릇 인간의 360여 가지 일을 주관하며 세상에 머물며 다스리고 교화했다.
그때 곰 한 마리와 범 한 마리가 같은 굴에 살면서 늘 웅에게 기도해 사람으로 탈바꿈하도록 해달라고 빌었다. 웅이 영험 있는 쑥 한줌과 마늘 20개를 주면서 말하기를 ‘이것을 먹고 백일 동안 햇빛을 보지 않으면 곧 사람의 형체를 얻으리라’하였다. 곰과 범이 이를 먹었는데 범은 기를 하지 못하였고 곰은 스무하루를 기(忌)해 여자의 몸이 되었다.
더불어 혼인할 사람이 없으므로 매양 신수(神樹)아래에서 아이를 배게 해달라고 빌었다. 웅이 잠시 사람으로 변신해 아이를 배게 해 아들을 낳으니, 단군이라 하였다.
당 요와 더불어 같은 날 즉위했다. 국호를 조선이라 하였고, 처음에는 평양에다 도읍했는데, 후에는 백악에 도읍했다.
비서갑 하백의 딸에게 장가들어 아들을 낳으니 부루인데 그가 동부여왕이 되었다. 우 임금이 도산에서 제후들을 모을 때에는 단군이 아들 부루를 보내어 조회했다. 단군이 우하를 거쳐 은나라 정무8년 을미에 이르러 아사달에 들어가 신이 되었다. 지금의 황해도 문화현 구월산이다. 묘가 지금도 있다. 향년은 1408년 이었다ꡓ라 했다.』
네 단군신화의 내용 비교
지금까지 살펴본 네 가지 문헌에 나타난 단군신화의 내용을 비교하기로 한다. 삼국유사와 제왕운기는 1280년대에 찬술되었고 세종실록과 응제시주는 각각 1445년, 1464년에 편찬되었다.
보편적으로 표기되는 환인, 환웅, 단군을 각각 어떻게 표기했는가? 삼국유사에서는 환인 또는 제석이라 하였으며, 환웅 또는 단웅이 지상에 내려왔을 때는 환(단)웅천왕이라 하였고 단군을 단군왕검이라 하였다.
제왕운기에서는 환인 또는 석제, 웅 또는 단웅천왕, 단군으로 표기하고 세종실록에는 상제환인, 웅, 환웅천왕, 단군이라 하였다. 끝으로 응제시주는 상제환인, 웅, 단(환)웅천왕, 단군으로 기록하였다.
네 가지의 자료가 크게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 경미한 차이가 있으나, 이는 기록자의 주관이나 취향이 다르므로 다소의 차이는 인정할 수 있다. 또 이들 자료에서 환인에 대한 인식은 공통된다. 즉 환인은 하늘에 있는 신으로 보고 있고 환웅도 환인의 서자로 하늘에서 지상으로 내려왔다고 인정한다. 그러나 삼국사기와 응제시주가 인간을 다스리고 교화하였다고 보는 한편, 나머지는 이를 기록하지 않고 있다. 환웅이 하늘에서 지상으로 내려올 때 처음 내려온 지역은 태백산 정상의 신단수 아래로 적고 있으며, 하늘에서 가지고온 물건도 천부인 세 개는 다같이 기록하고 있으나, 삼국유사와 응제시주는 무리 3천이라 하였고, 제왕운기는 귀신 3천으로 적었으나, 세종실록은 언급하지 않았다.
환웅의 역할은 삼국유사와 응제시주가 풍백. 우사. 운사를 거느리고 곡식. 질병. 형벌. 생명. 도덕과 360가지의 일을 주관하면서 인간을 다스렸다고 한 반면, 제왕운기와 세종실록은 그러한 내용은 없고, 손녀에게 약을 주어 사람이 되게 하는 역할을 하였다.
또 단군은 삼국유사와 응제시주가 환웅과 곰이 사람으로 변한 웅녀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로 보는데, 제왕운기나 세종실록은 단수신과 손녀의 아들로 보고 있다.
이렇게 큰 차이를 보이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일연과 권람은 각각 삼국유사와 응제시주를 편찬하면서 <고기>를 인용하였고, 이승휴와 세종실록 편찬자는 각각 <본기>, <단군고기>를 인용하였다. 그렇다면 고기의 내용과 본기․단군고기의 내용이 서로 달랐다는 것인데 지금은 문헌이 없어 확인할 길이 없다.
단군이 조선을 세운시기는 모두 요임금 즉위연인 무진년 즉 기원전 2333년으로 적고 있으나, 개국한 장소는 다소 차이가 난다. 삼국유사에서는 평양성에서 개국한 후 백악산 아사달로 도읍을 옮겼다가 기자에게 쫓겨 장단경으로 갔다가 다시 아사달에 숨어 산신이 되었다고 한다. 여기서 깊이 생각해 볼일이 있다. 단군이 기자에게 쫓겼으나 나라를 다 잃은 것은 아니다. 그런데 기자조선설은 이때 기자에게 주권과 영토를 모두 잃고 조선이 멸한 것으로 보고 있다. 기자조선설의 허구를 드러내는 요목이다. 응제시주는 평양에서 개국한 후 백악산으로 도읍을 옮겼다가 아사달에 들어가 신이 되었다 한다. 전체로 볼 때 삼국유사와 응제시주가 비슷하고, 제왕운기와 세종실록이 유사하다. 이는 우리 고조선에 관한 문헌이 대체로 두 가지가 조선초기 이후까지 전해왔다는 얘기가 된다. 즉 고기가 그 하나고, 본기 또는 단군고기라고 불리는 것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단군의 통치기간은 1,500년, 1038년 등으로 기록되어 있고, 단군의 연령은 1,908세, 1,408세 등으로 되어 있다. 이것은 어느 한 자연인으로서는 불가능한 것이다. 그러므로 단군은 조선을 개국한 인물을 칭하는 것이 아니고 <임금>과 같은 뜻으로 사용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단군신화가 갖는 역사적 의미
이제까지 살펴 본 네 문헌이 갖는 단군신화의 내용을 요약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옛날 하늘나라에 환인(桓因)이 있었는데, 그에게는 환웅(桓雄)이라는 아들이 있었다.
환웅은 늘 천하(天下)세계에 뜻을 두고 인간세상을 다스리기를 원하였다. 환인이 그 뜻을 알고 천하세계를 내려다보니 인간세상을 널리 이익 되게 다스릴 만한 가치가 있어 보였다. 그래서 환인은 아들 환웅에게 천부인 세 개를 주고, 무리(혹은 귀신)3천명을 딸려 인간세계에 내려 보냈다. 환웅은 태백산 신단수 아래에서 풍백. 운사.우사를 거느리고, 농사짓는 방법과 병을 치료하는 방법을 가르치고 형벌과 도덕을 바로 세우는 등 무려 360가지를 관리하면서 인간을 다스렸다. 그러던 중에 곰과 범이 찾아와 인간이 되기를 간절히 바라므로 환웅이 그들에게 마늘 20개와 쑥 한줌을 각각 나누어주면서 백일 동안 햇빛을 보지 말고 견디면 사람이 될 수 있다고 일러주었다.
그후 곰은 이를 착실히 이행하여 사람이 되었으나, 범은 견디지 못하고 도중에 도망하여 사람이 되지 못했다.
사람으로 변한 웅녀는 결혼할 상대가 없어 날마다 신단수 아래에서 잉태할 것을 빌었다. 이를 본 환웅이 임시로 사람이 되어 그와 혼인하였는데 곧 잉태하여 아들을 나았다. 그가 단군(檀君, 檀君王儉)이다≪세종실록 등에는 환웅이 손녀에게 약을 먹여 사람으로 되게 한 다음 단수(檀樹)의 신과 혼인 시켜 단군을 낳았다≫
단군은 평양에서 도읍하여 중국 요임금 즉위년인 무진년에 조선을 개국하고, 후에 백악산으로 도읍을 옮기는 등 천하를 다스리다, 은나라 무정8년 을미년에 아사달에 들어가 신이 되었다. 그가 천하를 통치한 기간은 1,500년 혹은 1,038년이며, 그의 수명은 1,908세 또는 1,408세이다』대강 이렇게 정리할 수 있다.
이를 좀더 세밀히 짚어 보기로 한다.
“하늘나라에 환인이 있었다”는 내용은 두 가지로 볼 수 있다. 하나는, 단군신화를 역사적 사건으로 볼 때 북쪽지방에서 한반도의 북서지역으로 이동한 무리가 있었는데, 그 원 세력 즉 북쪽지방의 최고통치자는 이동하지 않고, 그 자리에 계속 머물러 있었다고 보아야 하며, 그 다음은 단군신화를 신적 영역으로 볼 때 환인은 하늘에 있는 신이다. 동양사상은 하늘을 받드는 사상을 중심으로 하고 있다. 중국의 천자(天子)는 글자 그대로 하늘의 자식이며, 제후(諸侯)는 하늘의 뜻을 받은 천자가 임명하여 일정한 지역을 통치토록 한 자이다. 그래서 천자는 천지에 제사를 지내고, 제후는 산천에 제사를 지냈다.
중화사상은 중국이 세계의 중심이며, 조선 땅은 동이로 제후에 불과하다는 견해이다. 그리고 사대주의는 이러한 사상에 안주하는 주의이다. 그런데 우리가 국조로 믿고 있는 단군은 하늘의 아들 즉 천자이다. 우리의 자주사상을 읽을 수 있다.
“환웅은 천계에서 지상계로 내려온 신의 아들이면서 그 역시 신의 신분을 가지고 신과 인간관계를 이어주는 역할을 하였다”
환웅이 인간세계를 이익 되게 하기 위하여, 즉 홍익인간(弘益人間)을 실현하고자 이곳 조선 땅에 이른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민족은 북방계로 볼 때 환웅은 시베리아 어디에서 큰 정치세력을 가진 집단의 통치자, 즉 환인의 허락을 받고 “천부인 세 개와 군사, 혹은 주민 3천 여명을 이끌고 이주하여 왔다”고 볼 수 있다.
환웅이 북쪽의 주민들을 이끌고 조선 땅에 이른 목적이 홍익인간을 위해서라면 그가 만주일대의 선주민(先住民)에게 어떤 혜택을 주었을까?
당시 북방문화가 요하유역의 문화보다 더욱 발전되었던 것 같은데, 이들이 과연 선진문화를 가지고 왔을까? 신화대로라면 이 시기가 기원전 20세기인데 이때는 신석기시대이다. 그러나 최근 국내 사학계에서는 환인은 기원전 12세기말이나, 11세기초에 북방의 청동기 문화를 가지고 남으로 내려와 정치기반을 세운 것으로 보고 있다.
홍익인간이란 인간세계를 널리 이롭게 한다는 뜻으로, 조선 개국 때부터 건국이념으로 이어져 왔고, 1948년 정부수립 이후 헌법에 바탕을 둔 교육이념이 되었다.
“환웅이 태백산 신단수 아래에 내려와서 인간을 교화하였다”고 하는데 삼국유사에서는 태백을 묘향산이라고 주석을 달고 있다. 이제까지 고조선의 발상지에 관한 국내 학자들의 견해는 첫째, 요동 지방이었다는 입장과, 둘째, 요동에서 시작하였으나 후에 요서세력에 밀려 평양으로 도읍을 옮겼다는 견해도 있고, 셋째는, 당초 평양에 도읍을 정하였다는 견해이다. 필자는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보아 두 번째 입장을 더 중시하고 있다. 여기에서 첫 번째 견해와 두 번째 견해를 따른다면 신화에 표기된 평양, 태백산 등은 지금의 지명과는 달리 요동지방의 어디로 비정할 수 있다.
“신단수(神檀樹) 아래에서 신시(神市)를 형성하고 교화하였다”고 했다. 몽골족과 고시베리아족은 인간과 신을 연결하는 매체는 가급적 하늘 높이에 솟아있는 큰 나무나 하늘 높이 나르는 새 등으로 보았다. 그래서 그들은 긴 장대에 방울을 달아 높이 세우고 솟대(솟은 장대)라 하여 신성시하였으며, 그 영역에 들어오는 자는 비록 범법자라 하여도 처벌이 유보되는 신성지역으로 섬겼다. 이곳은 아마도 제단이었을 것이다.
제주는 초기 국가에서는 최고 권력자가 통치권과 함께 가지고 있었으나, 국가연맹 단계에 이르러서는 제․정이 분리되었다. 단군은 제주를 칭하는 이름이고, 왕검은 임금 즉 통치자를 칭하는 이름이다. 그러므로 단군왕검(檀君王儉)은 제를 주관하는 역할과 통치권을 함께 가진자이므로 개국당시의 단군조선은 초기국가 단계였음을 뜻한다.
또 환웅은,
“풍백, 우사, 운사를 거느리고 인간을 다스렸다”고 한다. 바람과 비와 구름은 무엇을 뜻하는가? 이는 농사 짓는 데 절대 필요한 것이다. 유목생활을 위해서는 넓은 초원이 필요하지만, 농사에는 계절에 맞는 적절한 비가 절대적이며, 태풍 등 바람의 피해가 없어야 한다. 환웅이 이를 잘 관리했다는 것은 곧 농경생활을 시작했다고 볼 수 있다. 북쪽에서는 넓은 평원을 떠돌며 유목생활을 하던 집단을 이끌고 남으로 내려와 요하 언저리에 정착하여 풍부한 물과 넓은 땅에 농토를 일구어 농사를 짓는 정착 농경생활이 시작되었음을 의미한다. 이렇게 볼 때 요하 유역에 먼저 정착한 선주민은 북쪽에서 내려온 일단의 무리가 우수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정복하지는 않았을까? 그렇다면 환웅집단은 청동무기로 무장한 집단이었을 것이다.
“환웅이 농사짓는 방법을 가르치고, 360여 가지를 관리하였다”고 하였다. 이는 환웅이 이미 국가형태를 갖추었음을 의미한다. 그는 소국을 형성하고 강한 정치력으로 주변에 영향을 미치는 위협적 존재였다. 중국에서는 3황 중에서 신농씨가 농사 짓는 방법을 가르쳤는데 우리나라에서는 환웅이 그 역할을 하였다.
“곰과 범이 찾아와 사람되기를 간절히 바랐다” 지구 북반부 전역과 아메리카 대륙 북쪽에 사는 민족은 곰을 제사지내는 의식을 오래 전부터 이어 내려왔다. 이 민족들은 곰을 매우 신성시하며, 조상으로 모시고 있다. 바이칼호에서 동시베리아에 이르는 지역에서는 곰을 조상으로 숭배하여 왔다. 이들은 무당(巫堂)의 명칭을 ‘kam', 'gam'으로 부르고, 한반도와 아이누족(일본의 원주민), 일본에서는 'kam', 'kamui'로 부르고 있다. 이로 보아 곰은 무당을 뜻하는 'kam', 'gam'이 'ㄱ.ㅁ'으로 불리다가, 곰으로 기록된 것으로 추측된다.
한편 범은 옛 은나라 때부터 한족(漢族)이 선호한 동물이다. 산동반도에는 기원전 2세기경에 만들었다는 무씨사당이 있는데 이곳에 있는 화상석에는 단군신화와 비슷한 내용이 그림으로 새겨져있는데 곰이 아니라 범의 입에서 첫 인간이 태어나는 것으로 묘사되었다고 한다.
고조선의 유물은 비파형 동검, 세형동검 등이 있으나 그 이상은 발굴이 안 된다. 그러나 고구려는 고분벽화를 남겨놓아 그때의 이념을 어느 정도 읽을 수 있다. 이 벽화에 범을 사냥하는 그림은 있어도 곰을 사냥하는 그림은 없다. 집안에 있는 장천1호 벽화에는 나무아래 굴속에서 곰이 편안히 쉬는 중에 밖에서는 범이 화살에 맞아 죽어가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러한 현상은 고조선의 사상이 고구려로 이어진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즉 고구려인의 의식세계는 고조선인의 그것을 이어받았다고 보아야 한다. 중국고대의 왕실이 호랑이를 섬겼다는 것과 우리 조상이 곰을 섬겼다는 것은 단군신화를 이해하는데 의미가 크다.
“곰과 범 중 곰은 환웅의 뜻을 쫓아 사람이 되었고, 범은 이를 견디지 못하고 달아났다. 그리고 사람이된 웅녀는 결혼할 상대가 없어 날마다 신단수 아래에서 잉태할 것을 빌어 환웅이 잠시 사람이 되어 그와 결혼하여 단군을 낳았다”고 한다.
환웅이 요하유역에 내려오기 전에 이 지역에는 이미 범을 숭상하는 집단과 곰을 숭상하는 집단이 정주하고 있었다. 이들 중 곰숭배 집단은 환웅에게 순종한 반면, 범숭배 집단은 환웅과 겨누다 패하여 달아났다고 볼 수 있다. 환웅과 웅녀가 결합하여 단군을 낳았다 함은 환웅집단과 곰집단이 결속하여 하나의 완성된 국가를 형성하였음을 의미한다 할 것이다.
“단군은 평양성에 도읍을 정하고, 개국한 후 일정기간 다스리다가 백악으로 옮겼다”고 한다. 이는 아마도 고조선이 요동에서 발원한후 도읍을 평양으로 옮겼다는 설의 근거가 되지 않나 싶다.
역사적 사건으로서의 단군신화
단군신화를 문자대로 인정해도 안되겠지만 그렇다고 사실성을 완전히 부인하는 것은 더욱 옳은 태도가 아닐 것이다. 이 단군신화는 우리민족이 북쪽에서 이동해 온 사실과 그 이동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또 이 신화는 기원전 13세기말에서 11세기 초경에 북쪽에서 이주해온 환웅이 이끄는 집단에 의하여 조선 영토 내에서 계급분화가 발생하고, 지배자가 나타나며, 국가가 성립되는 등 우리민족의 초기국가 형성의 모습을 말해 준다. 이것이 우리의 조상인 예맥족이 정치적으로 성장하는 과정을 밝히고 독립된 민족으로서의 자주의식을 내세우는 역사 발전의 단계를 말해주는 역사적 사실(史實)을 담고 있다 하겠다.
복희 탄생신화
중국 고대 3황 중 하나인 복희의 탄생신화를 참고로 싣는다.
『인간과 신의 중간쯤 되는 사람들이 사는 낙원에 이름은 없고, 그저 화서씨(華胥氏)라고만 불리는 소녀가 있었다. 하루는 그녀가 동쪽에 있는 나무가 우거지고 경치가 아름다운 뇌택이라는 호숫가에서 놀고 있었다. 그녀가 우연히 뇌택가에 찍혀있는 한 거인의 발자국을 발견하였다. 그를 밟자마자 기이한 느낌이 들었다. 그후 곧 임신하여 사내아이를 낳았는데 그가 곧 복희이다.』
복희라는 이름은 날고기를 익힌다는 뜻이다. 곧 불의 사용을 뜻한다. 복희는 팔괘를 그렸고, 고기잡는 방법을 백성들에게 가르쳤다.
중국의 고대 신화이면서도 천제가 아닌 지상에서의 기이한 행동만으로 최초 황제가 탄생하고 있어 우리의 단군신화 보다 뜻이 크지 못하다.
네 번째 이야기 둘째 마디
扶餘(夫餘)의 건국신화
부여는 만주 송화강과 장춘, 길림을 중심으로 하여 만주일원에서 오랫동안 독립된 국가체제를 갖춘 우리민족이 세운 나라였다. 그러나 부여는 우리의 역사 관심 밖에서 서러움을 받아왔음도 또한 사실이다.
부여가 언제 국가로 형성되었느냐 하는 점은 아직 확실하게 밝혀진 것이 없다. 다만 고조선 보다는 늦은 기원전 7세기경으로도 보고, 기원전 2세기경으로도 본다. 그런가하면 기원전 1세기 후반으로 낮춰 보는 견해도 있다. 부여는 494년에 고구려에 흡수되었다.
그러나 우리민족이 이동해 온 한 길목에 있었으며, 넓은 평원과 수렵 자원이 풍부한 숲을 무대로 신석기 이전부터 우리의 조상들이 살아왔으며, 독립된 문화를 형성하여 예맥족을 형성하는 중심체가 되었다.
그리고 부여는 최고 통치자인 왕이 있고, 그 밑에 제가(諸加) - 호민(豪民) - 민(民)<하호(下戶) - 노복(奴僕)>의 사회구성 체제를 갖춘 독립국가였다. 고구려나 백제는 그들의 발원지를 스스로 또는 타인(중국 사계)이 부여계 혹은 부여의 별종으로 인정하면서 그 계승을 아주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다.
일연의 <삼국유사>에 부여의 건국신화가 기록되어 있다.
북부여(北扶餘)
『<고기(古記)>에 이르기를 전한(前漢)선제 신작 3년(기원전 58년) 4월 8일에 천제(天帝)가 홀승골성에 내려왔는데 5룡거(5龍車)를 타고 왔다.
도읍을 정하여 왕이라 일컫고, 북부여라 하고 스스로를 이름하여 해모수라 하였다. 아들을 낳아 이름을 부루라 하고, 해(解)를 성으로 삼았다. 왕을 위해 상제의 명령으로 동부여로 도읍을 옮겼다. 동명제(東明帝)는 북부여를 계승하여 일어나 졸본주에 도읍을 정하여 졸본부여를 이룩하였으니, 이가 곧 고구려 시조였다.』
여기에서는 “북부여의 시조는 천제(天帝), 이름은 해모수(解慕漱)이며, 그의 아들 해부루(解夫婁)는 상제(上帝)의 명으로 왕을 위하여 동쪽으로 옮겨 동부여를 열었다.
고구려의 시조는 동명제이며, 그는 북부여를 계승하여 졸본주에 도읍을 정하고, 졸본부여를 이루었다ꡓ는 줄거리다. 즉 북부여의 시조는 천제 해모수이고, 동부여의 시조는 해부루이며, 고구려 즉 졸본부여의 시조는 동명제라 하였다.
부루는 불(火)에서 연유하였다고 본다. 이는 광명(光明)이 내포된 이름이며, 해는 “해[태양]”의 한자 표기이고, 박혁거세도 “밝다”에서 유래한 것이다.
동부여(東扶餘)
<삼국유사>에
『북부여왕 해부루의 대신(大臣)인 아란불의 꿈에 천제가 내려와서 말했다.
“장차 나의 자손으로 하여금 이곳에 나라를 세울 것인즉 너는 다른 곳으로 피해 가라. 동해 바닷가에 가섭원이란 곳이 있는데 땅이 기름져서 왕도를 세울만한 곳이다.”하였다. 이에 아란불은 왕에게 권하여 그 곳으로 도읍을 옮기고 나라 이름을 동부여라고 하였다.
그런데 해부루에게는 늦도록 아들이 없었다. 하루는 아들을 얻기 위해 산천에 제사를 지내기로 하고 제단이 있는 곳으로 가고 있었다. 이때 타고가던 말이 곤연에 이르러 큰 돌을 보고 마주 대하고서 눈물을 흘렸다. 왕이 이를 보고 이상하게 생각하여 사람을 시켜 그 돌을 들추어 보았다. 그랬더니 거기에는 금빛개구리 모양의 어린아이가 하나 있었다. 왕이 기뻐하면서
“이는 하늘이 나에게 아들을 주신 것이로다”하고 그 아이를 거두어 기르고 이름을 금와(金蛙-개구리 와)라 하였다. 그가 성장하여 태자가 되었다. 이후 부루가 죽자 금와가 대를 이어 왕이 되었다. 그리고 다음의 왕위를 대소에게 전하였다. 그후 서기 22년에 고구려왕 무휼이 이를 처서 대소를 죽이니 나라가 망했다.』
이 신화는 북부여에서 해부루가 천제의 명에 의하여 동쪽으로 도읍을 옮긴 사실과 부루가 아들이 없던 차에 큰 돌 밑에서 아이를 얻어 금와라 하고, 태자로 삼은 후 대를 이어 왕이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우리나라 고대국가의 신화는 부여에서 고구려로, 고구려에서 백제로 내려오면서 앞의 설화를 뒤의 설화가 내용을 보충하는 특징이 있다. 이러한 현상은 이 세 나라가 상호 관련이 있음을 뜻한다.
부여에 관한 그 외의 문헌을 간추려 살펴보기로 한다.
A, 부여의 건국신화가 없는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는 “시조 동명성왕의 성은 고씨이며, 휘는 주몽이다. (중간 생략). 아란분은 드디어 왕에게 권하여 그곳으로 도읍을 옮기고 국호를 동부여라고 하였다. 그 구도(舊都)에는 사람이 있었는데 어디서 왔는지 알 수 없으나 자칭 천제의 아들 해모수라고 하며, 도읍 하였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B, <단군고기>를 인용한 <세종실록>에서는,
“단군이 비서갑 하백의 딸에게 장가들어 아들을 낳으니 부루이다. 이를 곧 동부여왕이라고 부른다. (중간 생략). 부루가 아들이 없어 금색 개구리형의 아이〔金色蛙形兒〕를 얻어 이름을 금와라 하고 세워서 태자로 삼았다.”고 하면서 부루가 동쪽으로간 과정을 적고 있다. 이어서 “천제가 태자를 부여 고도에 내려보내 다스리게 하니, 이름이 해모수이다”라고 하였다.
C, 후한(後漢)의 왕충이 <논형(論衡)>에 수록한 내용에는 “부여의 시조인 동명은 탁리국의 시종이 햇빛에 감응하여 출생했다. 그러나, 그의 출생과정과 성장과정이 신이(神異)하여 왕으로부터 용서받지 못하고 남으로 망명하였다. 물고기와 자라떼의 도움으로 엄호수를 건너 부여땅에 와서 왕이 되었다.”고 하였다.
D, 중국사서인 <삼국지(三國志)> 위지(魏志)에는 “부여는 장성(만리장성)의 북방으로 현도를 지나 1천여리에 있으며, 가히 (넓이가)2천여리에 8만호가 있다. 국고(國庫)에 옥쇠가 있는데 그 글은 예왕지인「濊王之印」(예나라 임금의 직인이라는 뜻임)이다. <위략>에서 말하기를, ‘북방 호리국(豪離國)의 동명이 큰 알 같은 유기(有氣)로서 태어나 부여왕이 되었다’고 한다”라 하였다.
E, <후한서> 동이열전, 부여국편에 “현도의 북방 1천리되는 곳에 부여국이 있다. 지방이 2천리이며, 예의 땅이다. 처음에 북이(北夷)의 색리국(索離國) 국왕이 출행하자 시아(侍兒, 시중드는 아이)가 큰 알 같은 천기로 임신해서 동명을 낳았다. 그를 돼지우리와 마굿간에 버려도 돼지와 말의 도움으로 살아 도망가서 엄시수를 건너 부여왕이 되었다. 섣달에 영고제가 있고, 서기 111년에 낙랑을 공격하여 관리와 주민을 살상하더니 곧 귀부(歸附)하였다.”
여러 문헌을 살펴보면, 국내문헌은 대체로 부여의 시조는 천제의 아들 해모수이고, 동부여의 왕은 해부루이며, 해모수는 부루를 쫓아내고 그 자리에 도읍을 정하였으며, 동명은 해모수의 부여를 계승하여 졸본부여 즉 고구려를 세웠다. 그리고 부루는 아들이 없어 큰 돌 밑에서 금와를 얻어 뒤를 잇고 있다.
중국문헌에서는 동명의 탄생과정이 국내의 것과 같으나, 부여는 동이 탁리국(삼국지는 고리국, 후한서는 색리국, 위략은 호리국으로 적음)에서 동명이 남하하여 건국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렇다면 동명은 송화강 북쪽, 바이칼호 부근에서 남하하여 온 것이 된다. 결국 부여는 바이칼호 부근에서 송화강을 건너 이주하여 왔다. 이들은 장춘, 길림을 중심으로 이미 국가를 형성하고 있던 기존의 부여국을 동쪽으로 몰아내고 북부여(사실 이러한 이름도 후에 사가들에 의하여 붙여졌을 것임)를 세웠다고 볼 수 있다.
문헌 중에서 확인해야 할 부분이 또 있다.
첫째, 천제가 직접 부여땅에 강림했느냐, 아니면 그의 아들이 왔느냐 하는 점과, 두 번째는 동명은 누구냐 이다.
먼저 삼국유사에서는 천제가 직접 내려왔다고 하였으나, 삼국사기와 세종실록에서는 천제의 아들 또는 태자가 내려왔다고 하였다. 단군신화에서도 볼 수 있드시 일반적으로 천제는 하늘에 머무르고, 그의 아들이 내려오는 것이 순리이다. 또 천제가 속인의 이름을 갖는다는 것은 격에 맞지 않는다. 그러므로 부여땅에는 천제의 아들 해모수가 내려와서 시조가 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이렇게 볼 때 주몽은 천제의 아들이 아니고 천제의 손자가 된다.
다음은 동명의 실체가 무엇이냐 이다.
삼국유사에서는 동명이 북부여를 계승한 후 졸본주로 이동하여 고구려를 세웠다고 한다. 삼국사기에서는 동명을 고구려 시조 주몽임을 확실히 하고 있으나, 동명은 시호(諡號, 임금 등이 죽은 후에 주는 이름)일 뿐이다.
중국사서는 동명은 탁리국(고리국, 색리국, 호리국)에서 부여로 망명하였다고 한다. 그러면서 호리국은 흥안령 북방 근처에 있다고 주를 달고 있다.
그렇다면, 국내문헌에서는 동명을 고구려의 시조로 보고 있고, 중국문헌에서는 흥안령 북쪽에 있는 탁리국 등으로 불리는 나라에서 남쪽에 있는 부여로 망명했다고 한다. 이 내용은 고구려 건국신화와 유사하나, 다만 동명이 남하한 위치가 다르다. 앞으로 살펴보겠지만 주몽은 동부여에서 남으로 망명하여 고구려를 세운다.
국내 학계 한편에서는, 부여는 북이의 탁리국 등으로 불리는 나라에서 동명이 망명하여 세운 나라라고 한다. 부여의 주도세력인 동명집단은 북이(北夷) 탁리국 → 엄호수 → 부여의 경로를 따라 남하하고 있다. 이들이 건넌 엄호수는 송화강으로 학계는 보고 있으며, 탁리국은 송눈평원 일대로 위치를 비정하고 있다.
정리해 보면, 『해부루 집단이 송화강 남쪽에 부여라는 나라를 세워 다스리던 중에 해모수 집단이 남하하여 해부루는 동으로 쫒겨 동부여라고 하였다. 북부여 해모수 집단이 다시 동명집단에 밀렸고, 동명집단은 한 동안 머무르다 남하하여 졸본주에 이르러 고구려를 세웠다고 볼 수 있다. 그후 다시 동부여에서 주몽집단이 이동해와서 동명세력과 합세하여 고구려를 계승하였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고구려 9백년 설 등이 존재한다. 이때 주몽은 고구려를 개국했다기 보다는 기존의 국가를 계승하였으며 왕이 교체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신화 내용을 놓고 볼 때, 우리민족은 시베리아의 송눈평원에서 송화강을 건너 장춘, 길림을 거처 압록강 중류의 환인, 집안으로 이동한 후 다시 한강유역에 다다른 것으로 판단된다.
한편, 동명이라는 이름은 단군과 같이 어느 한 자연인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고, 밝은 동쪽 즉 거룩한 태양이 떠오르는 곳을 가리키는 신성(神聖)함을 상징하는 뜻으로 불린 이름으로 보아야할 것이다.
동부여의 시조 부루는 단군과 하백의 딸 사이에서 태어났다고 세종실록과 응제시주에서 밝히고 있다. 그러나 이는 후세에 추가된 것으로 보아야 하며 역사성을 갖지는 못한다할 것이다.
부여의 한자표기는 광개토왕능비문, 묘두루묘지명과 같은 것에는 夫餘라 하였고, 삼국사기. 삼국유사. 제왕운기. 위서. 당서. 사기. 한서. 삼국지. 후한서 등에서는 扶餘라고 하였다.
부여가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아 덧붙이고자 한다. 부여는 남만주를 가로지르는 길림함달령 북쪽에서부터 송화강을 따라서 동쪽으로는 장광재령, 서로는 요하에서 대안을 잇는 만주일대에서 가장 평평하고 넓은 지역을 갖고 있었다.
<삼국지> 부여전에서는 이렇게 적고 있다.
“부여의 면적이 사방 2천리나 되며, 동이 지역에서 가장 넓고 평평한 땅이다. 부여사람들은 체격이 크고, 성격은 굳세고 용감하며, 근엄․후덕하여 다른 나라를 처 들어가거나 노략질하지 않으며, 나라가 매우 부강하여 선대로부터 일찍이 패해 본적이 없다.”고 하였다.
부여의 유적은 토광목곽묘(土壙木槨墓), 철제무기, 금․옥장식품, 금․은제 귀고리, 금․동장식품, 청동거울 등이 출토되고 있다.
네 번째 이야기 셋째마디
고구려의 건국 신화
고구려는 한반도 북쪽과 만주, 요녕지방을 국토로 가졌던 거대국가였으며, 중국과 경쟁하면서 생존하였었다. 당시 중국은 세계 제1의 국력과 군사력을 가진 나라였는데 이를 상대한 고구려는 또한 세계 제1의 나라였다고 하여도 손색이 없을 것이다. 고구려는 삼국사기에 따르면 기원전 37년에 동명왕(휘, 주몽)에 의하여 세워 졌고, 668년에 멸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고구려의 건국시점에 대해서는 많은 논란이 있어 몇 가지 주장을 소개하기로 한다.
첫째, 고구려 900년 설이다. 668년 고구려와 당나라가 치열한 전투를 하고 있을 때 가언충이라는 당나라 신하가
“고구려의 비기(秘記)에 이르기를 ‘900년이 안되어 80세 된 대장이 이 나라를 멸한다’고 하였습니다. 고구려는 한나라 때부터 있었는데 지금 900년이 되었고, (당나라 고종)이세직의 나이가 80세 입니다”하였다. 이 기록이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 있다. 그러므로 기원전 37년 보다 200년이 앞선 기원전3세기 내지 2세기가 된다고 보는 견해이다.
둘째, 고구려 건국을 기원전 217년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광개토대왕은 고구려 제19대 왕이다. 그런데 광개토대왕 비문에는 “동명성왕 이후 17세 손이다”라고 적고 있다. 대(代)와 세손(世孫)은 그뜻이 다르므로 삼국사기에서는 고구려 왕위를 태자가 잇지 않고 형제가 이은 경우가 6번 있었다. 이는 삼국사기 기록에서 6세대가 삭제되었으므로 한세대를 30년씩 계산하여 180년을 추가한 시점을 건국시기로 보아야 한다는 견해이다(서길수)
셋째, 기원전 277년으로 보는 주장이 있다. 삼국사기에 광개토대왕은 추모왕의 17세 손으로 기록되어 있고, 이것을 중국측 사료들과 비교하여 볼 때 연나라 멸망(기원전 222년) 이전 진나라와 교류가 있었다는 점과 중국 기록에 존속기간이 1천년이라고 한 것을 감안하면 60간지를 4번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고 본다(북한학회)
넷째, 기원전 108년 이전으로 보는 입장이 있다.
한나라 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현도군을 설치할 때 세 개의 현을 두었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고구려현이다. 당시 세 현은 이미 존재했던 현지의 나라이름을 그대로 썼기 때문에 적어도 위만조선이 망한 기원전 108년 이전에 고구려가 존재했다고 한다(북한의 이지린, 강인숙)
다섯째, 고구려는 주몽에 의하여 처음 세워진 것이 아니라 기원전 37년 이전부터 소부노 집단에 의하여 존재하였다. 기원전 37년에는 정권교체가 이루어 젔다고 본다(서병국). 이것은 앞에서 살핀 동명집단의 이동경로에서 본 것과 같은 취지이다.
그외 이기백은 기원전 107년으로, 이종욱은 기원전 2세기 후반보다 훨씬 올라간다고 보고 있다.
고구려의 건국과 관련된 신화는 <삼국사기>, <삼국유사>, <세종실록>이 있다. 이들은 국사, 삼국사, 고기, 또는 단군고기에서 인용하였다고 밝히고 있으나 내용에 다소 차이가 있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는 그 내용을 축약(縮約)한 것이고, 세종실록은 비교적 상세히 기록한 것 같다.
삼국사기의 고구려 건국신화
『시조 동명성왕의 성은 고(高)씨이며, 휘는 주몽「朱夢:추(鄒) 또는 상해(象解)」이다. 이에 앞서 부여왕 해부루(解夫婁)가 늙도록 아들이 없었으니, 산천에 제사지내어 후사를 구했는데, 그가 타고 있는 말이 곤연에 이르러 큰 돌을 마주 대하고 눈물을 흘리므로, 왕은 괴이히 여겨 사람을 시켜 그 돌을 옮기게 하였는데 어린아이가 금색와형(와는 와(蝸)로도 씀)을 하고 있었다. 왕은 기뻐하면서 말하기를 “이는 하늘이 내게 아들을 주신 것이다.”하고 이내 거두어 기르며 이름을 금와(金蛙)라고 하였으며, 그가 장성하자 태자로 세웠다.
그후 (부여의)국상 아란불이 말하기를,
“일전에 하느님이 강림하여 내게 말하기를 ‘장차 나의 자손으로 하여금 이곳에 나라를 세우게 할 것이니 너희는 피하라. 동해가에 있는 땅을 가섭원이라 하는데, 토양이 기름지고 오곡에 알맞으니 도읍할 만하다.’ 하였습니다.” 하였다. 아란불은 드디어 왕에게 권하여 그곳으로 도읍을 옮기고 국호를 동부여라고 하였다. 그 구도(舊都)에는 사람이 있었는데 어디서 왔는지 알 수 없으나, 자칭 천제의 아들 해모수(解慕漱)라 하고 와 도읍하였다. 해부루가 돌아가고 금와가 위를 계승하였는데, 이때 태백산 남쪽 우발수(優渤水)에서 한 여인을 만나 (내력을)물으니,
“나는 하백(河伯)의 딸로 이름은 유화(柳花)입니다. 여러 아우들과 함께 나와 놀고 있을 때 한 남자가 자칭 천제의 아들 해모수라 하고, 나를 꾀어 웅심산(熊心山) 아래 압록가의 집에서 사욕(私慾)을 채우고 곧 가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우리 부모는 내게 중매도 없이 남을 따랐다고 하여 나를 우발수로 귀양 보낸 것입니다.”하였다. 금와는 이상히 여겨 방안에 가두었는데 일영(日影)이 비추더니 (그녀가) 몸을 피하는 대로 일영이 또 따라 비추었다. 그로 인하여 태기가 있어 알〔卵〕 하나를 낳으니 닷되들이 크기만 했다. 왕은 (그 알을) 버려 개․돼지에게 주니 모두 먹지 않으므로, 또 길에 버렸는데 소․말이 피하니, 후에 들에 버리니까 새가 날개로 품어 주었다. 왕은 깨보려 하였으나 깰 수 없었으므로 드디어 그 어미에게 다시 주었는데 그 어미는 물건으로 싸서 따뜻한 곳에 두니 한 사내아이가 껍질을 깨고 나왔다. 골격과 생김이 영특하여 7세에 남과 다르게 스스로 활과 화살을 만들어 쏘는데 백발백중이었다. 부여의 속어에 활을 잘 쏘는자를 주몽이라 하므로 이름이 되었다 한다. 금와에게는 아들 7형제가 있어 항상 주몽과 더불어 유희하는데 그 기능이 모두 주몽에 미치지 못하였다. 그 장자 대소가 왕에게 말하기를 “주몽은 사람의 소생이 아니고 그 위인이 용맹하니, 만약 빨리 도모하지 않으면 후환이 있을까 염려되므로, 청컨대 빨리 제거하십시오.”하였으나 왕은 듣지 않고 그에게 말을 기르게 하니 주몽은 그 준마를 알아서 사료를 적게 주어 여위게 하고, 노마는 잘 먹여서 살찌게 하였는데 왕은 살찐 것은 자신이 타고, 여윈 것은 주몽에게 주었다. 후에 들에서 사냥할 때 주몽이 활을 잘 쏘기 때문에 화살을 적게 주었는데도 주몽이 잡은 짐승이 매우 많았다. 왕자와 여러 신하들이 또 모살 하려 하므로 주몽의 어머니가 음모를 알고 말하기를,
“나라 사람이 장차 너를 해칠 것이니 네 재능으로 어데간들 안되겠느냐. 지체하다 욕을 당하는 것보다는 멀리 가서 쓸모 있는 일을 하는 것이 좋겠다.ꡓ하였다. 주몽은 오이, 마리, 협보 등 3인을 벗으로 하여 길을 떠나 엄사수(또는 개사수라고도 한다. 지금의 압록 동북쪽에 있음)에 이르러 물을 건너려 하였으나 다리가 없었다. 추격해 오는 병에게 잡힐까 염려하여 수신(水神)에게 말하기를 “나는 천제의 아들이며, 하백의 외손으로서 지금 도망가는 길인데 잡으러 오는 자가 쫓고 있으니 어찌해야 합니까? ”하니, 어별(魚鼈)이 떠올라 다리를 만들어 주었다. 주몽이 물을 건너자 어별이 곧 흩어졌으므로 추병이 건너지 못하였다. 주몽의 일행이 모둔곡(毛屯谷)에 이르자(魏書에서는 音述水에 이르렀다고 하였음), 세 사람을 만났는데 그 한 사람은 마의를 입고, 한 사람은 납의를 입고, 다른 한 사람은 수조의를 입었다. 주몽이 묻기를,
“그대들은 어떠한 사람이며 성과 이름은 무엇이라 하는가?”하니 마의 입은 자는 이름이 재사라 하고, 납의를 입은 자는 무골이라 하고, 수조의를 입은 자는 묵거라고 하며 성씨는 말하지 않았다. 주몽은 재사에게는 극(克)씨의 성을 주었으며, 무골에게는 중실(仲室)씨를, 묵거에게는 소실(少室)씨를 주며 이내 여러 사람에게 말하기를,
“내가 천명을 이어 받아 국가의 터전을 창건하려 하는데 세 사람의 현인을 만났으니 어찌 하늘의 주심이 아니겠는가? ”하며 드디어 그 재능을 헤아려 각자의 소임을 맡기고 함께 졸본천(卒本川)에 이르러(<위서>에서는 紇升骨城에 이르렀다고 하였음)토양이 비옥하고 산하의 제고함을 보고 드디어 도읍하려 하였으나 궁실을 지을 겨를이 없어 단지 비류수(沸流水) 위에 집을 지어 살며 국호를 고구려라 하고 고를 성씨로 삼았다.〔또는 주몽이 졸본부여에 이르니 왕이 아들이 없었으므로 주몽을 보고 범상한 인물이 아님을 알고 그 딸을 아내로 주었으며, 왕이 돌아가니 주몽이 왕위를 이었다고 함〕
이때 주몽의 나이 22세이니 바로 한 효원제 견소
2년이었다. 사방에서 소문을 듣고 와 의탁하는 자가 많았다. 그 지역이 말갈지역과 인접해 있으므로, 침략의 피해를 염려하여 드디어 배척하여 물리치니 말갈이 겁내어 감히 침범하지 못하였다.
왕은 비류수중에 채소잎이 흘러 내려오는 것을 보고 상류에 사람이 있음을 알았다. 그리하여 사냥을 하면서 찾아 비류국에 이르니 그 국왕 송양(松讓)이 나와 보고 말하기를
“과인이 해우에 떨어져 있어서 일찍이 군자를 만나 보지 못하였는데 오늘 뜻밖에 서로 만나니 또한 다행한 일 아닌가? 그러나 그대는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하겠다.”하므로 대답하기를
“나는 천제의 아들로 모소에 와서 도읍을 정하였다.”하였다. 송양이 말하기를
“나는 여러 대(代)를 왕 노릇하였다. 땅이 적어 두 임금이 용납될 수 없는 것이니 그대는 도읍을 세운지 얼마 안되므로 나의 부용이 되지 않겠는가.”하였다. 왕은 그 말에 분개하여 언변으로 투쟁하고, 또 서로 활로서 기예를 시험하니 송양이 능히 대항하지 못하였다. 2년 6월에 송양이 나라를 바치고 항복하므로 그 땅을 다물도라 하고 송양을 봉하여 지주로 삼았다. (중간 생략). 19년(기원전 18년) 9월에 왕이 돌아가니 나이 40세였다. 용산(龍山)에 장사지내고 호를 동명성왕이라 하였다.』
삼국유사의 고구려 건국신화
『고구려는 즉 졸본부여이다. 혹은 지금의 화주 또는 성주라고 하나 이는 모두 잘못이다. 졸본주(卒本州)는 요동방면 이었다. <국사> 고려본기에 기술하기를 시조 동명성제의 성은 고씨이며, 이름은 주몽이다. 이에 앞서 북부여왕 해부루가 이미 동부여로 피해갔으며, 후에 부루가 세상을 떠나자 금와가 왕위를 계승했다. 이때 금와는 태백산 남쪽 우발수에서 한여자를 만나 물은즉, 여자가 말하기를
“저는 하백의 딸로 이름은 유화라고 합니다. 내가 여러 아우들과 놀고 있을 때에 남자 하나가 나타나 자기를 천제의 아들 해모수라 하고서 저를 응신산 밑 압록강가에 있는 집속으로 유인하여 남몰래 정을 통해 놓고 가더니 돌아오지 않고 있습니다. 부모는 내가 중매도 없이 혼인한 것을 꾸짖으며 마침내 이곳으로 귀양을 보냈습니다.”라고 하였다. - 단군기에 의하면 단군이 서하 하백의 딸과 친하여 아들을 낳아 부루라고 하였다 했다. 그런데 지금 <삼국사(三國史)> 기록을 보면, 해모수가 하백의 딸과 정을 통해 주몽을 낳았다고 되어 있다. 이들 기록의 내용을 분석해 보면 아마도 부루와 주몽은 배가 다른 형제일 것이다 -
금와는 이를 이상하게 생각하여 그녀를 방속에 가두어 두었더니 햇빛이 방속에 비졌다. 몸을 피하자 햇빛이 따라와 또 비추었다. 그로부터 태기가 있더니 알 하나를 낳았다. 크기가 닷되들이 말〔斗〕만 했다. 왕은 그것을 버려 개나 돼지에게 주려했으나, 모두 먹지 않았다. 그래서 길에 내버리게 하였더니 소와 말이 모두 그 알을 피해 지나갔다. 또 들에 내다버렸더니 새와 짐승이 오히려 덮어 주었다. 이에 왕이 그것을 쪼개보려 하였으나 쪼갤 수가 없어 마침내 그 어머니에게 돌려 주었다.
그 어머니는 알을 천으로 싸서 따뜻한 곳에 두었더니 한 아이가 껍질을 깨고 나왔다. 골격과 외양이 영특하고, 기이하였다. 나이 겨우 일곱 살에 기골이 준수하니 범인과 달랐다. 스스로 활과 화살을 만들어 쏘는데 백번 쏘면 백번 다 맞았다.
그 나라의 풍속에 활을 잘 쏘는 사람을 주몽이라 하였는데 이런 연유로 해서 그는 주몽이란 이름을 얻었다. 금와에게는 아들이 7명이나 있었는데 언제나 주몽과 함께 놀았으나 그 재주가 항상 주몽을 따르지 못하였다. 이에 장남인 대소가 왕에게 참소하여 말하기를
“주몽은 사람이 낳은 자식이 아니니 일찍 없애지 않으면 후한이 있을까 염려됩니다”
그러나 왕은 그 말을 듣지 않고 주몽을 시켜 말을 기르게 하였다. 주몽은 곧 좋은 말을 알아보았다. 그래서 좋은 말은 일부러 먹이를 적게 주어 여위게 하고 나쁜 말은 먹이를 많이 주어 살찌게 하였다. 왕은 살찐 말은 자기가 타고 여윈 말은 주몽에게 주었다. 왕의 여러 아들과 신하들이 주몽을 죽이려고 하니 주몽의 어머니가 이 사실을 미리 알고 주몽에게 말하였다.
“지금 나라안 사람들이 너를 죽이려고 하니 너의 재주와 지략으로 어디를 간들 살지 못하겠느냐! 그러니 어서 여기를 떠나라”
그리하여 주몽은 오이 등 세 사람을 벗으로 삼아 도망하였는데 마침 엄수에 이르렀다. 이에 그는 물을 향해 말했다.
“나는 천제의 아들이며, 하백의 손자이다. 오늘 도망가는데 뒤쫓는 자들이 거의 따라오게 되었으니 어찌하면 좋겠는가?”
이에 물고기와 자라가 솟아올라 다리를 만들어 주어 그들을 건너게 한 다음 흩어졌다. 이로서 뒤쫓아오던 기마병은 건너지 못하고, 주몽은 무사히 졸본주 - 현도군의 지경 - 에 다다라 이곳에 도읍을 정하였다. 그러나 미처 궁실을 지을 겨를이 없어서 다만 비류수(沸流水) 위에 집을 지어 거처하면서 국호를 고구려라고 하였다. 인하여 고(高)로서 성을 삼았다. - 이때의 나이가 12세 였는데 한나라 효원제 건소 2년(기원전 37년)에 즉위하여 왕이라 일컬었다.
한편, <주림전> 21권에는 이렇게 기술되어 있다.
옛날 영풍리왕의 시비(侍婢)가 임신을 하였는데 상을 보는 이가 점을쳐 말하기를
“귀하게 되어 왕이 될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왕은 내 아들이 아니니 마땅히 죽여야겠다고 말하였다. 시비가 말하기를
“이상한 기운이 하늘로부터 내려와서 임신을 한 것입니다.”라고 했다. 그 아이가 태어나니 왕은 상서롭지 못한 일이라고 하며 돼지우리에 내다 버리게 하였으나 돼지가 입김을 불어주고, 마구간에 버렸더니 말이 젖을 먹여 죽지 않았다. 이 아이가 자라 부여의 왕이 되었다. - 이는 동명제가 부여의 왕이된 것을 말한 것이다. 이 졸본부여는 북부의 다른 도읍으로 부여왕이라 이른 것이다. 영품리는 부루왕의 다른 칭호이다. - 』
세종실록의 고구려 건국신화
조선왕조 세종실록 지리지, 평양부편에 실린 내용이다. <동명이상국집> ‘동명왕편’의 내용과 유사한 것으로 보아 이 실록과 동국이상국집 편찬자는 <단군고기>를 참고하여 편찬한 것으로 여겨진다. 다소 장황한 면이 있으나 가급적 본문에 충실하면서 일부는 일상어로 바꾸었다.
『<단군고기>에 이르기를
단군이 비서갑(非西岬) 하백(河伯)의 딸에게 장가들어 아들을 낳으니 부루(夫婁)이다. 이를 곧 동부여 왕이라고 한다. 단군이 요임금과 같은 날에 임금이되고 우(禹)가 도산에서 회의를 할 때 태자 부루를 참석시켰다. 단군이 나라를 누린지 1038년만인 은나라 무정 8년에 아사달에 들어가 신이 되니 지금의 구월산이다.
부루가 아들이 없어 금색을 띤 개구리 모양의 어린아이를 얻어 이름을 금와(金蛙)라 하고 그를 태자로 삼았다.
부루의 정승 아란불이 말하기를
“일전에 하느님이 나에게 강림하여 말하기를 ‘장차 내 손(孫)으로 하여금 여기에다 나라를 세울 것이니 너는 다른 곳으로 피하라. 동해에 땅이 있는데 이름은 가섭원이며 토질이 오곡에 적당하여 도읍할 만하다.’고 하였습니다.”하고 이를 왕에게 권하여 도읍을 옮겼다.
천제가 태자를 부여 고도(古都)에 내려보내 다스리게 하니 이름이 해모수이다. 해모수가 하늘에서 내려오는데 오룡거(五龍車)를 타고, 따르는 자 1백여명은 모두 백곡(白鵠:하얀 고니)을 탔는데 채색구름이 그 위에 뜨고 음악소리가 구름가운데에서 흘렀다. 웅심산에 머물러 10여일을 지내고 비로소 내려왔다. 머리에는 오우(烏羽)의 관을 쓰고 허리에는 용광검(龍光劍)을 찼는데 아침이면 일을 보고, 저녁이면 하늘로 올라가니 세상에서 이르기를 <天王郞, 천왕랑>이라 하였다. 성 북쪽 청하(지금의 압록강)의 하백에게 딸이 있으니, 큰 딸은 유화(柳花), 둘째 딸은 훤화, 막내 딸이 위화인데 자태가 곱고 아름다웠다. 세 딸이 웅심연에 가서 노는데 해모수왕이 좌우에게 이르기를
“저 여자를 얻어서 비(妃)로 삼으면 가히 자손을 얻으리라”하니 그 딸들이 왕을 보고 곧 물로 들어갔다. 좌우에서 말하기를
“대왕은 어찌하여 궁전을 지어 저 여자를 받아 방에 들이고 문을 꼭 닫지 않습니까?”하니, 왕이 옮겨 여기에 말채찍으로 땅을 그으니 동실(銅室)이 잠깐사이에 이루어졌다. 방 가운데에 세 자리를 만들고 잔과 술을 두었더니, 그 여자들이 서로 권하여 크게 취하였다. 왕이 나아가 붙드니 그 여자들이 놀라서 달아났는데 유화가 왕에게 붙잡혔다.
이 사실을 안 하백이 크게 노하여 사신을 보내
“너는 어떤 사람이기에 내 딸을 붙잡아 두느냐?”하니 왕이 대답하기를
“나는 천제의 아들인데 이제 하백과 결혼하고자 하노라”하니, 하백이 다시 사신을 보내어 고하기를 “네가 만약 구혼을 하려거든 마땅히 중매인을 보낼 것이지 덮어놓고 내 딸을 붙잡아 두니 어찌 그리 예의를 모르느냐?”하였다. 왕이 부끄러워서 장차 하백에게 가서 뵈려고 하나 하백의 방에 들어갈 수가 없고, 또 유화를 놓아주려고 하나 그녀가 이미 왕과 더불어 정을 통하였으니 떠나려 들지 않았다. 왕이 말하기를
“만일 용거(龍車)가 있으면 하백의 나라에 갈 수 있다.”하며 하늘을 향해 고하였다. 조금 있으니까 오룡거가 하늘로부터 내려왔다. 왕이 그 여자와 함께 수레를 타니 풍운이 갑자기 일어 대번에 그 궁에 다달았다.
하백이 예를 갖추어 맞이하여 좌정하고 이르기를
“혼인의 예는 천하의 통규(通規)인데 어째서 이렇게 실례하여 나의 문중을 욕되게 하십니까. 왕이 천제의 아들이면 어떠한 신이(神異)함이 있습니까?” 하니 왕이 대답하기를
“오로지 시험해 보면 알 것이오”했다.
이때 하백이 뜰 앞의 물에서 잉어로 변하여 물결을 따라 놀으니까, 왕이 물개로 변하여 잡으려고 하였다. 그랬더니 하백이 다시 사슴으로 변하여 달아 났다. 왕은 승냥이로 변하여 쫒으니 이번에는 하백이 꿩으로 변하여 달아났다. 왕은 다시 매로 변하여 뒤 쫒았다. 하백이 그제서야 진실로 천제의 아들이라 생각하고 예를 갖춰 성혼하였다. 왕이 그 딸을 거느릴 마음이 없을까 두려워하여 풍악을 베풀고 술을 마련하여 왕에게 권해서 크게 취하게 한후 딸과 함께 작은 혁여(革轝) 가운데에 넣어서 용거에 실어 승천하려 하게 하였는데 그 수레가 물에서 나오기 전에 왕은 술이 깨었다. 왕은 유화의 황금비녀를 뽑아 혁여를 찌르고 혼자 빠저나와 승천하였다. 하백이 노하여 딸에게 이르기를
“네가 가르침을 쫒지아니 하여 우리 가문을 욕되게 하였다.”하고 좌우로 하여금 그 딸의 입을 얽어 잡아당기게 하니 그 입술이 늘어나 길이가 세자나 되었다. 하백은 노비 두 명을 딸려 유화를 우발수 가운데로 내 쫒았다(지금의 태백산 남쪽이다). 어부가 금와에게 알리기를
“요즘 어살 가운데에 있는 고기를 훔쳐가는 자가 있는데 어떤 짐승인지 알지 못하겠습니다.”한다. 금와왕이 어부로 하여금 그물을 끌어올리게 하니 그물이 찢어졌다. 다시 쇠그물을 만들어 끌어냈더니 한 여자가 돌 위에 앉아서 끌려나왔다. 그런데 그 여자가 입술이 길어서 말을 하지 못하므로 세 번 입술을 끊어냈더니 비로소 말을 할 수 있었다.
왕이 천제 아들의 비(妃)임을 알고 별실에 거처하게 하였는데 그 여인이 창 가운데로 들어오는 햇빛을 품어서 잉태하였다.
왼쪽 겨드랑이로부터 큰 알을 낳았는데 닷되들이 만하니 왕이 괴이하게 여겨 말하기를
“사람이 새알을 낳아 상서롭지 못하다.”하고 마굿간에 버리도록 하였더니 여러 말들이 밟지 않았으며, 깊은 산에 버리니 백가지 짐승이 모두 보호하여 구름이 낀 날에도 알 위에는 늘 햇빛이 있었다. 왕이 알을 어머니에게 다시 주어 기르게 하였더니 한 달만에 그 알이 열리어 한 사내아이가 나왔다. 그가 후에 주몽이다. 주몽은 난지 한 달도 지나지 않아 말을 잘 하였으며, 어머니에게 말하기를
“파리들이 눈을 건드려 잘 수가 없으니 어머니 저에게 활과 화살을 만들어 주십시요.”하였다. 어머니가 갈대로 활과 화살을 만들어 주니 물레위에 앉아 파리를 쏘아 매번 맞혔다. 민간인들 속에서 전하기를 “활을 잘 쏘는 사람이 주몽이다.”하였다. 나이가 장성하면서 재능을 겸비하였다.
금와에게는 아들이 7명이 있었는데 늘 주몽과 함께 사냥을 다녔다. 왕자와 종자 40여명이 겨우 사슴 한 마리를 잡는데 주몽은 혼자서 여러 마리를 잡았다. 왕자가 이를 시기하여 주몽을 잡아 나무에 매놓고 사냥한 사슴을 빼앗아 갔다. 주몽이 나무를 뽑고 돌아가니, 왕자가 금와왕에게 말하기를
“주몽은 영험하고 날랜 선비입니다. 쳐다 보는 눈매가 심상치 않으니 만일 일찍 도모하지 아니하면반드시 후한이 있을 것입니다.”하였다.
왕이 주몽에게 말을 기르게하여 그 뜻을 실험하고자 하였다. 주몽이 한을 품고 어머니에게 말하기를
“나는 천제의 아들인데 마부가 되었으니 사는 것이 죽는 것만 못합니다. 남쪽 땅으로 가서 나라를 세우고자 하는데 어머님이 계시기 때문에 차마 스스로 결정하지 못하고 있습니다.”한다. 어머니가 말하기를
“이것이 바로 내가 밤낮으로 속썩이는 일이다. 내가 들으니 선비가 먼길을 떠나려면 모름지기 준마에 의지하라 하였으니, 내가 말을 가리어 주겠다.”하고, 목장에 가서 곧 채찍으로 말들을 마구 후려치니 모든 말들이 놀라서 달아나는데 붉은 색 말 한 마리가 두길이나 되는 난간을 뛰어넘어 달아나는 것이다. 주몽은 그 말이 뛰어남을 알고, 말의 혀뿌리에 몰래 바늘을 찔러 박아놓으니 말은 혀가 아파서 몹시 여위었다. 왕이 목장을 순행하여 모든 말이 살찐 것을 보고 크게 기뻐하였으며, 그중 여윈 말을 주몽에게 주었다. 주몽이 그 말을 얻어가지고 바늘을 뽑고 더 잘 먹여서 몰래 오이, 마리, 협부 등 세명과 결탁하여 남쪽으로 도망하다 개사수에 이르렀다. 강을 건너야 하는데 배도 없고 뒤에서는 군사가 급히 쫒아오므로 채찍으로 하늘을 가리키면서 몹시 분개하여 탄식하기를
“나는 천제의 손자요 하백의 외손인데 지금 난리를 피하여 여기에 이르렀으니 황천후토(皇天后土)께서는 저 고자(孤子)로 하여금 빨리 주교를 이루게 하여 주옵소서.”하였다. 말을 마치고 활로 물을 치니 자라떼가 떠올라와서 다리를 놓아 주몽이 건널 수 있었다. 뒤에서 쫒던 군사가 강가에 다다르니 자라가 만든 다리가 갑자기 없어져 이미 다리에 올랐던 군사가 모두 물에 빠져 죽었다.
주몽이 어머니와 이별할 때 차마 떠나지 못하니 어머니가 말하기를
“너는 한 어미 때문에 염려하지 말라.”하고, 오곡의 씨앗을 싸서 주었는데 주몽이 어찌나 생이별하는 것이 슬펐던지 그 씨앗을 잊고 떠나왔다. 주몽이 큰 나무아래에서 쉬는데 쌍곡(雙鵠)이 날아왔다. 주몽이 말하기를
“아마도 이것은 어머니가 보내 주신 씨앗일 것이다.”하고 활을 당겨 쏘았다. 한 화살에 모두 떨어져서 목을 열고 씨앗을 꺼낸 후 물을 곡에게 뿜으니 다시 살아서 날아갔다.
주몽이 졸본천에 이르러 비수 위에 집을 짓고 나라 이름을 고구려라 하고, 고(高)로서 성을 삼았다.
주몽이 풀더미 위에 올라앉아 대략 군신의 자리를 정하였다.
비류왕(沸流王) 송양(松讓)이 사냥하러 나왔다가 주몽왕의 얼굴이 비상함을 알고 인도하여 함께 앉아서 말하기를
“궁벽한 바다의 모퉁이에 있어서 일찍이 그대 같은 사람을 만나보지 못하였는데 오늘 우연히 만났으니 어찌 다행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대는 어떠한 사람이며, 어디서 오셨습니까?”하니, 주몽이 대답하기를
“과인은 천제의 손자로서 서국왕(西國王)입니다.”고 대답하면서
“제가 여쭈어 보겠습니다. 군왕은 누구의 뒤를 이으셨습니까?”하였다.
송양이 대답하기를
“나는 본디 선인(仙人)의 자손이라 하여 대대로 왕이 되었습니다. 이제 땅이 작으니 나누어서 두 임금이 될 수 없으며, 또 그대는 나라를 세운지 몇일 안되므로 나에게 부속하는 것이 마땅하다.”하였다. 몽왕이
“과인은 하느님의 뒤를 이었고, 지금왕은 신의 맏자손이 아니면서 억지로 왕이라 하고 있습니다. 만일 나에게 귀부하지 않으면 하느님이 반드시 죽일 것이요.” 하였다.
송양이 왕으로서는 하느님의 자손이라고 말하는데 속으로는 의심을 품고 재주를 시험하고자 하였다. 주몽왕이
“왕과 더불어 활쏘기를 원합니다.”하고서 사슴을 그려 1백보 앞에 놓고 송양왕이 활을 쏘니 화살이 들어가지도 않았다. 주몽왕이 사람을 시켜 옥가락지를 1백보 앞에 달아 놓고 활을 쏘았는데 옥가락지가 기와조각이 부숴지듯이 하니 송양이 크게 놀랐다. 주몽왕이 말하기를
“국업(國業)을 새로 세웠기 때문에 고각(鼓角)이 위의가 없어서 비류의 사자가 왕래할 때에 내가 와의 예로서 맞이하고 보낼 수 없으니 나를 가볍게 여기게 된다.”하였다. 이때 종신 부․분․노가 나아가 아뢰기를
“신이 대왕을 위하여 비류의 고각을 가져오겠습니다.”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남의 나라의 장물을 네가 어찌 가져 온다고 하느냐?”하니, 대답하기를
“이는 하늘이 주는 물건인데 어찌 가져오지 못하겠습니까. 무릇 대왕이 부여에서 고생하실 때 누가 대왕께서 능히 이곳에 이를 것이라고 생각했습니까? 이제 대왕께서 만사(萬死)에서 분신(奮身)하시어 요좌(遼左)에 양명(揚名)하셨으니 이는 천제께서 명하여 하셨음 이온 데 무슨 일인들 이루어지지 아니하겠습니까.”하면서 부․분․노 셋이서 비류에 가서 고각을 가져왔다.
비류왕이 사신을 보내어 고하매, 왕이 와서 볼까 염려하여 고각의 색을 어둡게 하여 헌것같이 해 놓으니 송양이 와서 보고서는 감히 다투지 못하고 돌아갔다.
송양이 도읍을 세운 선후로서 부속을 삼으려고 하므로 왕이 궁실을 지으면서 일부러 썩은 재목으로 기둥을 해서 천년이나 묵은 것 같이 하니 송양이 와서 보고 마침내 도읍을 세운 선후를 다투지 못하였다.
왕이 서쪽으로 사냥 가서 힌 사슴을 잡아 해원에 거꾸로 달고 저주하기를
“하늘이 만일 비를 내려서 송양의 도읍을 표몰시키지 아니하면 내가 결코 너를 놓아주지 않겠다. 이 어려운 지경에서 벗어나려거든 네가 하늘에 호소하라.”하였다. 그 사슴이 슬피 우니 그 소리가 하늘에 닿아 장마비가 7일 동안 내려 송양의 도읍이 표몰 되었다. 왕이 갈대로 꼰 새끼를 횡류시키고 압마(鴨馬)를 타니 백성들이 모두 그 새끼줄을 잡았다. 왕이 채찍으로 물을 그으니 물이 곧 줄어들어 송양이 온 나라를 가지고 와서 항복하였다.
검은 구름이 골령에서 일어나 사람들이 그 산을 보지 못하는데 오직 수천 사람의 소리만 들리며 토목공사를 일으키니 왕이 말하기를
“하늘이 나를 위하여 성을 쌓는 것이다.”하였다. 7일만에 구름과 안개가 스스로 걷히고 성곽과 궁궐이 저절로 이루어지니 왕이 황천께 절하고 들어가 살았다.
9월에 왕이 하늘로 올라가서 내려오지 않으니 그때의 나이가 40이었다.
태자가 용산(龍山)에 장사 지냈다.
고구려의 건국신화는 삼국사기나 삼국유사, 세종실록 등 국내문헌이 큰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
고구려의 시조 주몽은 ‘활을 잘 쏘는 사람’이라고 직접 밝히고 있다. 삼국사기에서 주몽을 ‘상해(象解)’라고도 한다고 했다. 상은 ‘큰’이란 뜻을 가지며, 해는 ‘해’의 한자화 이므로 ‘큰 해’ 또는 ‘크게 밝다’라는 뜻이 내포되었다. 그러므로 동명(東明), 광명(光明)과도 의미가 통한다 하겠다.
앞에서 확인하였듯이 해부루를 삼국유사에서는 천제의 아들이라 하였으나, 삼국사기에서는 부여왕으로만 표기하여 해모수와 해부루와는 혈연관계로 설명하지 않았다.
또 해모수는 삼국유사 북부여편에서는 직접 천제라 하였으나, 삼국사기에서는 해부루가 있던 자리에 와서 자칭 천제의 아들이라고 하면서 도읍한 인물로 묘사하고 있다.
이러한 결과를 놓고 파악하면 삼국유사 북부여편의 내용을 정리할 필요가 있지 않나 생각된다. 즉 해모수는 해부루의 아버지가 아니고 천제도 아니다. 해모수는 천제의 아들이며, 부루의 부여를 침범하여 그를 동쪽으로 내쫒은 인물로 보아야 한다.
유화가 말하기를 “자칭 천제의 아들이라 하며, 해모수라는 사람이 웅심산 아래 압록가의 집에서 사욕을 채우고 가더니 돌아오지 않았다.”고 하였다. 이를 삼국유사에서는 “웅심산밑 압록강가에 있는 집 속으로 유인하여 정을 통해놓고 가더니 .... ”라고 하였다. 아마도 하백은 해모수의 통치력이 미치는 지역의 영향력 있는 호족이었을 것이며, 유화는 해모수의 권력에 눌려 수청을 들었을 것이다. 이로 인하여 호족 하백과 통치자 해모수사이는 알력관계가 있었던 것은 아닌가 싶다.
“금화가 이상히 여겨 유화를 안방에 가두었는데 일영이 비추더니 (그녀가)몸을 피하는 대로 일영이 또 내려 비추었다. 그로 인하여 태기가 있어 알 하나를 낳았다.”고 했다. 여기서 금와가 유화를 “방안에 가두었다”, “별실에 거처하게 했다”고 하는 것은 금와가 유화와 강제로 정을 통하였거나, 후처로 삼았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주몽은 해모수의 아들일까? 금와의 아들일까?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난생(卵生)을 만들어 냈음직 하다.
주몽은 자신이 천제의 손자(또는 아들), 하백의 외손이라 하고 있다. 삼국사기는 아시천제자, 하백외손(我是天帝子, 河伯外孫)이라 하였고, 삼국유사에서는 “나는 천제의 아들이며, 하백의 외손이다.” 또 세종실록에는 “나는 천제의 아들인데 이제 하백과 결혼하고자 하노라”하며 하백에게 청혼을 하는가 하면, “과인은 천제의 손자로서 서국왕 입니다”하면서 송양에게 자신을 소개하고 있다. 이러한 결과는 특별한 뜻이 있다기 보다는 기술상의 문제로 보아야 할 것 같다.
고구려인들은 그들이 직접 쓴 광개토대왕비문에 “주몽은 천제의 아들로 어머니는 하백의 딸이다”라고 했지 해모수가 등장하지 않는다. 또 거기에는 “시조이신 추모왕이 창기(創基)한 바 출자가 북부여이고, 천제의 아드님이시고, 어머니는 하백여랑(女郞)이다.” 또 “하백의 자손이며 명(明)의 아드님인 추모성왕은 본래 북부여 출신이다.”하였다. 그런데 왜 삼국유사 등에서는 동부여에서 왔다고 하였을까? 광개토대왕비문은 고구려를 가장 강성하게 키운 광개토대왕(391~413)의 공적을 기린 릉 비문이다. 아마도 410년대에 쓰여진, 그리고 고구려인들이 그들의 조상에 관한 기사를 직접 쓴 유일한 사적(史蹟)이 12․13세기경에 쓰여진 삼국사기나 삼국유사보다 정확하지 않을까? 그래서 주몽은 동부여가 아닌 북부여 즉 장춘지역에서 남하하여 졸본천(지금의 요녕성 환인시)에 이르렀다고 보아야 한다.
우리나라 건국신화를 보면 고조선, 부여, 고구려, 백제계는 천손(天孫)신화가 형성되고 신라, 가락국은 난생신화를 탄생시켰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주몽탄생의 경우 천제의 아들이라 해놓고, 다시 알에서 태어났다고 한 것은 무슨 이유에서일까?
주몽의 탄생과정이 불명확 한 것은 아닐까? 즉 해모수 계통인지, 해부루 계통인지가 확실하지 않다.
주몽이 건넜다는 강 이름이 엄사수, 개사수, 엄시수, 엄호수, 엄수 등 매우 다양하게 불리운다. 삼국사기는 엄사수가 ‘지금 압록강의 동쪽에 있다.’고 하였다.
위기에 처하여 신의 도움을 받은 주몽은 모둔곡에 이르러 재사․무골․묵거를 만나 각자에게 성씨를 부여하고, 소임을 맞긴 후 졸본주에 이르러 비류수 위에 집을 짓고 살며 국호를 고구려라 하였다. 여기에서 졸본은 현재의 요녕성 환인시이며, 비류수는 환인시를 지나 압록강으로 유입되는 혼강으로 본다. 주몽은 졸본주에 이르기 전에 지방의 유력인들과 협력하여 세를 불리면서 남하하였을 것이다. 그러므로 주몽은 마리등 3인의 힘을 얻어 고구려를 세웠다.
성을 고로 한 것에 대해, 일연은 “본성은 해였으나, 천제의 아들로 햇빛을 받아 낳은 까닭에 스스로 고로 성을 삼았다”고 삼국유사에서 밝히고 있다. 그외 주몽이 성(城)을 아주 높이 쌓은 데서 연유했다는 설, 고리국에서 연유했다는 설 등이 있으나 확실하지 않다.
삼국사기에서는 주몽의 건국과 관련하여 또 다른 사실을 적고 있다.
[또는 주몽이 졸본부여에 이르니 (졸본부여)왕이 아들이 없으므로, 주몽을 보고 범상한 인물이 아님을 알아 보고 그의 딸을 아내로 주었으며, 왕이 돌아가니 주몽이 졸본부여의 왕위를 계승하였다].
참고로 다른 문헌을 살펴보자.
<삼국유사> 북부여조에 “동명제는 북부여를 계승하여 일어나 졸본주에 도읍을 정하여 졸본부여를 이룩하였으니 이가 곧 고구려의 시조이다.”
또, 고구려조에서는 “고구려는 즉 졸본부여다.”고 하였다.
<후한서>는 “동명은 .......... (생략) ....... 물고기와 자라떼의 도움으로 엄호수를 건너 부여땅에 와서 왕이 되었다.”라고 하였으며,
<삼국지> 위지는 “동명이 큰 알 같은 유기로 태어나 부여왕이 되었다.”고 적었다.
끝으로 <삼국사기> 백제조에서는 “주몽은 북부여에서 난을 피하여 졸본부여로 왔다. (졸본)부여왕은 아들이 없고 단지 세 딸이 있었는데 주몽을 보자 비상한 인물임을 알고 둘째 딸을 아내로 삼게 하였다. 얼마 안되어 졸본부여왕이 돌아가니, 주몽이 왕위를 계승하였다. (주몽이)아들 둘을 낳으니 장자는 비류요, 차자는 온조였다.”
[혹은 말하기를 주몽이 졸본에 와서 월군의 딸을 맞이하여 두 아들을 낳았다 고도 함.]이라고 적고 있다.
이 내용들을 요약하면 첫째, 주몽은 졸본주에 이르러 스스로 도읍을 정하고 국가를 세웠으며, 월군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여 두 아들을 낳았는데 이들이 비류와 온조라는 이야기이며, 두 번째는, 북쪽에서 이주하여 이미 국가로 성립된 졸본부여에 왔다. 졸본부여왕이 주몽을 사위로 삼았으며, 졸본부여왕이 죽은 후에 주몽이 왕위를 계승하였다는 내용이다. 어느 경우가 사실(史實)인지 알 수 없으나, 둘째의 경우를 인정한다면 본장 서두에 소개한 것과 같이 고구려는 기원전 37년에 건국된 것이 아니고 그보다 훨씬 이전에 건국되어 운영되어 오던 국가가 있었는데 기원전 37년에 주몽집단에 의하여 정권 교체가 이루어졌다는 주장(서병국)을 뒷받침 한다고 볼 수 있다.
삼국유사는 주몽이 건국할 당시의 나이를 12세라 하였는데 이는 잘못이고 22세가 맞다.
<삼국사기>에는 고구려 건국 19년 즉 기원전 18년에
“왕자 유리가 부여에서 그의 어머니와 함께 도망하여 돌아오니 주몽왕은 기뻐하며 태자로 세웠다. 9월에 왕이 돌아가니 나이 40세였다. 용산에 장사지내고 호(시호)를 동명성왕이라 하였다.”고 한다.
한편 <세종실록>에서는
“ 9월에 왕이 하늘로 올라가서 내려오지 않으니 그때의 나이가 40이었다. 태자가 용산에 장사지냈다.”고 하였다.
<삼국사기> 백제조에는
“대왕(주몽)이 세상을 싫어하여 국가를 유리에게 속하게 하였으니 ....... .”하고 비류와 온조가 한탄하는 기사가 보인다.
주몽은 그가 부여에 있을 때 결혼하여 유복자를 두고 남하하였는데 그가 유리이다. 유리는 기원전 18년에 아버지가 이룩한 고구려 땅에 왔다.
주몽은 그를 태자로 세웠으며, 그해 주몽이 죽자 유리가 왕위를 이었다. 그리고 그해에 유리의 이복 동생인 비류와 온조가 남하하여 백제를 세웠다. 이 일련의 사건을 놓고 볼 때, 주몽이 고구려를 세운지 19년만에 부여에서 유리라는 세력이 들어와 주몽을 해쳤으며, 비류와 온조가 황급히 남쪽으로 몸을 피하는 정변이 일어난 것은 아닐까?
한편 주몽의 가계(家系)가 문헌에 따라 각각 달라서 혼란스럽다. 환인의 아들 환웅이 웅녀와 결혼하여 단군을 낳고[古記], 단군이 하백녀와 결혼하여 부루를 낳는다[檀君記, 또는 檀君古記]. 또, 해모수는 하백의 딸[유화]과 결혼하여 주몽을 낳는다.
환인(天神)
↓
환웅 ↔ 웅녀
↓
단군 ↔ 하백의 딸 ↔ 해모수(북부여 시조)
↓ ↓
부루(동부여 시조) 주몽(고구려 시조)
하백의 딸 ↔ 부루
↓
주 몽
부여계(송화강 유역)에서 출발하여 고조선지역(압록 유역)에서 패권을 확립한 고구려는 부여에서 난생설화와 함께 해모수․동명신화에서 환웅신의 천손신화를 흡수하여 그들 모두를 수용한 건국신화를 갖추었다. 두 지역의 사상을 통합․흡수함으로서 주몽과 부루를 단군의 계통으로 승화시키는 효과를 얻었다. 일연은 삼국유사 왕력편에서 주몽을 단군의 아들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현상은 우리나라 초기국가의 건국세력들이 자신을 단군으로 연결되는 혈통을 내세우기 위하여 후대에 추가된 것으로 믿어진다.
그런데도 어머니 계통은 부여계의 하백신[수신]의 딸로 이어지고 있다.
끝으로 부여와 고구려의 건국신화를 비교하면 유사한 점이 많다. 동명, 강을 건너는데 물고기와 자라의 도움을 받는 점, 북에서 남하하여 건국하는 점 등 그 형식이 매우 흡사하다. 이러한 결과는 “고구려는 북쪽은 부여와 접하고, 부여의 별종으로 언어와 법속(法俗)이 부여와 같다.”는 <후한서> 동이열전의 내용과 같이 둘은 같은 종족이며, 어느 하나의 신화가 만들어진 후에 다른 한편에서 이를 모방한 것이 아닌가 싶다.
주나라 시조신화
사마천이 쓴 사기에 주(周)나라 시조의 신화가 있다. 이것이 주몽신화와 닮은 데가 있어 여기에 소개한다.
『주나라를 세운 무왕의 시조는 후직(后稷)이다. 그의 이름은 기(棄)라고 했다. 기는 버린다는 뜻인데 그러한 이름을 갖게된 데는 사연이 있다. 그의 어머니는 강원이었는데 제곡의 왕비였다. 어느날 강원이 들에 나갔는데 그곳에 귀인의 발자국이 있었다. 그것을 본 강원은 갑자기 마음이 들떠 밟아보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래서 가만히 밟아 보았는데 이상한 기운이 꿈틀거리는 것을 느꼈다.
집으로 돌아온 강원은 곧 자신이 임신하였음을 알게 되었다. 그후 일년이 지나 아들을 낳았다. 강원은 겉으로 내색을 하지는 않았지만 불길한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그래서 아들을 몰래 좁은 골목길에 버렸다. 그러나 그곳을 지나가는 말이나 소들이 피해가고 있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아이를 데려다가 아무도 살지 않는 숲에 다시 버렸다. 그러나 때맞추어 산에서 사람들이 몰려와 아이를 다시 데리고 올 수밖에 없었다. 강원은 다시 아들을 얼어붙은 개천의 얼음 위에 버렸다. 그러자 이번에는 하늘을 날던 새들이 몰려와 덮어 아이를 보호하였다. 강원은 놀랍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하여 아이를 데리고 왔다. 그리고는 혹시 하늘이 준 아이가 아닐까하는 생각을 갖고 마음을 고쳐 먹었다. 기는 어린 시절부터 의연했고, 큰 인물이 될 품성을 타고났다.』
네 번째 이야기 넷째 마디
백제의 건국신화
백제는 주몽의 아들 온조가 고구려에서 남하하여 기원전 18년에 세웠다고 한다. 첫 번째 도읍한 곳은 아직 확인되지 않고 있으나, 요즘에는 풍납토성으로 의견이 모아지는 듯하다.
백제를 건국한 온조는 탄생이나 건국과정이 신화적 요소를 거의 갖고 있지 않다. 그래서인지는 알 수 없으나 일연은 삼국유사에서 아주 간단히 언급하고 있다.
백제는 삼한(마한, 진한, 변한)중 마한의 땅에서 일어났다고 보는 것이 국내 학계의 의견이나, 마한 이전에 대방남쪽에 진(辰)국이 있었다는 중국기록이 있으며, 마한에는 54개의 소국이 있었는데 이를 통합하는 정치세력이 있었다는 주장도 있으나, 아직까지 뚜렷이 확인되지 않았다.
또 일반적으로 알려진 백제의 영토 중 현재의 전라남도 지역은 그 통치권이 확실히 미치지 않은 상태에서 백제에 예속되어 있다가 백제의 남하정책에 의하여 일본열도로 쫓긴 세력이 왜[大和倭]라는 주장도 있다.
삼국사기에 기록된 내용을 확인하고, 중국문헌에 단편적으로 전하는 내용을 가지고 백제 시조의 탄생과 백제의 건국과정을 알아보기로 한다.
삼국사기의 백제건국신화
『백제의 시조 온조왕은 그의 아버지가 추모이며, 혹은 주몽 이라고도 한다. 북부여에서 난을 피하여 졸본부여로 왔다. (졸본)부여왕은 아들이 없고 단지 세 딸이 있었는데, 주몽을 보자 비상한 인물임을 알고 둘째 딸을 아내로 삼게 하였다. 얼마 안되어 (졸본)부여왕이 돌아가니 주몽이 왕위를 계승하였다. 아들 둘을 낳으니 장자는 비류(沸流)요, 차자는 온조(溫祚)다[혹은 말하기를 주몽이 졸본으로 와서 월군의 딸을 맞이하여 두 아들을 낳았다고도 한다.] 주몽이 북부여에 있을 때 낳은 아들이 와서 태자가 되자 비류와 온조는 태자에게 용납되지 못할 것을 두려워하여, 마침내 오간, 마려 등 열 사람의 신하와 더불어 남쪽으로 떠나는데 따르는 백성들이 많았다. 드디어 한산(漢山)에 이르러 부아악에 올라 살만한 땅을 바라보았다. 비류는 해변에서 살려고 하였으나 열 사람의 신하가 간하기를
“이 하남(河南)의 땅은 북으로는 한수를 띠고, 남으로는 높은 산에 은거하고 남으로는 옥택을 바라보고 서로는 큰 바다로 막혔으니, 천험지리로 얻기 어려운 형세이므로 여기에 도읍을 정함이 역시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그러나 비류는 듣지 않고 그 백성을 나누어 미추홀(彌鄒忽)로 가서 살았으며, 온조는 하남위례성에 도읍을 정하고 열 신하로 보필을 삼으며 국호를 십제(十濟)라 하였다. 이 때는 전한 성제 홍가 3년(기원전 18년)이었다. 비류는 미추의 토지가 습하고 물맛이 짜서 안거할 수 없으므로 돌아와 위례를 보았는데, 도읍이 안정되었고 백성이 안락하므로 드디어 참회하여 쫓으니 그 신민이 모두 위례로 돌아왔다. 그후 처음 올 때 백성이 즐겁게 따랐다 하여 국호를 백제로 고쳤다.
그 세계는 고구려와 더불어 부여에서 나왔기 때문에 부여를 성씨로 삼았다. [또는 이르기를 시조는 비류왕이다. 그 아버지 우이(優台)는 북부여왕 해부루의 서손이요, 어머니는 소서노이니 졸본사람 연타발의 딸이다. 처음 우이에게 시집와서 아들 둘을 낳았는데 장자는 비류요, 차자는 온조다. 우이가 죽자 졸본에서 과부로 살았다. 그 후 주몽이 부여에서 용납되지 못하므로 전한 건소 2년(기원전 38년)에 남으로 달아나 졸본에 이르러 도읍을 세우고 국호를 고구려라 하였으며, 소서노를 맞이하여 비로 삼았다. 그녀는 주몽이 건국 할 때 자못 내조가 있었기 때문에 주몽의 총애와 대접이 후하였고, 비류 등을 자신의 아들과 같이 대하였다. 주몽이 부여에 있을 때 예씨(禮氏)에게서 낳은 아들 유류(孺留)가 오자 태자로 세우고 왕위를 계승케 하였다. 이에 비류는 아우 온조에게 말하기를 “처음에 대왕이 부여의 난리를 피하여 이곳에 왔을 때 우리 어머니가 가재를 기울여 나라를 세우는 일을 도왔으니 그 공이 많았다. (그러나)대왕이 세상을 싫어하여(大王壓世) 국가를 유류에게 속하게 되었으니, 우리가 이곳에 있어 혹처럼 답답하게 지낼 것이다. 어머니를 모시고 남으로 가서 땅을 가려 따로 나라를 세우는 것만 같지 못하다.” 하고, 드디어 아우와 함께 도당을 거느리고 패수와 대수 두 강을 건너 미추홀에 이르러 살았다. <북사> 및 <수서>에 모두 이르기를
“동명의 후손으로 구이(仇台)란 자가 있는데 인신(仁信)이 돈독하였다. 처음에 나라를 대방고지(大方故地)에 세웠다. 한(漢)의 요동태수 공손도가 딸을 맞이하게 하여 동이의 강국이 되었다.” 하였으니, 어느 것이 옳은지 알 수 없다]. 원년 5월에 동명왕의 사당을 세웠다[立東明王廟] 』
여기서는 세 가지 설을 말하고 있다.
첫째는 온조시조설 이고, 두 번째는 비류시조설 이며, 세 번째는 구이시조설 이다.
온조시조설은
「온조는 고구려시조 주몽의 아들이다. 주몽은 북부여에 있을 때 장가들어 아들(유류) 하나를 남겨두고 난을 피하여 졸본부여에 이르렀다. 그런데 볼본부여왕에게는 아들은 없고, 딸만 셋이 있었다. 왕은 주몽이 비상한 인물임을 알고 둘째 딸을 주어 사위로 삼았다. 왕이 얼마 안있다 죽자 주몽이 졸본부여의 왕위를 계승하였으며, 비류와 온조 두 아들을 낳았다.
주몽은 북부여에 있던 아들 유류가 찾아오자 그를 태자로 삼았다. 그래서 비류와 온조는 용납되지 못할 것이 두려워서 남으로 내려와 한산(지금의 서울 북한산)에 이르러서 비류는 미추홀(지금의 인천)에 가서 살고, 온조는 하남위례성에 도읍을 정하여 국호를 십제라고 하였다. 이때가 기원전 18년이다.
비류는 미추홀에서 실패하고, 온조에게 와서 참회하여 스스로 죽었으며, 이때 온조는 국호를 백제(百濟)로 고쳤다. 온조는 세계(世係)가 고구려와 더불어 부여에서 나왔기 때문에 부여를 성씨로 삼았다.」는 내용으로 온조는 주몽의 아들이며, 비류는 형으로 보고 있다.
두 번째, 비류시조설은
「백제의 시조는 비류이다. 비류의 아버지는 북부여왕 해부루의 서손인 우이이며, 어머니는 졸본부여에 사는 안타발의 딸인 소서노이다. 소서노가 우이에게 시집와서 비류와 온조 두 아들을 낳았는데 우이가 죽자 과부로 지냈다. 그러던 중 기원전 38년에 주몽이 졸본에 이르러 도읍을 세우고, 국호를 고구려라 정하고 나서 소서노를 아내로 맞이하여 왕비로 삼았다.
주몽은 소서노가 건국과정에서 자신을 많이 도왔기에 그녀를 총애하였고, 비류 형제를 친자식 같이 대하였다. 주몽이 부여에서 살 때 예씨와 장가들어 유복자가 있었는데 그가 유류이다. 유류가 기원전 18년, 즉 주몽이 죽던 해 4월에 아버지 주몽을 찾아왔다. 주몽은 친자식인 유류를 태자로 삼았다. 이에 불만을 가진 비류는 온조와 상의하였다.
‘처음에 대왕께서 이곳으로 망명왔을 때 어머니가 가재를 기울여 나라세우는 일을 도왔는데도 대왕이 나라를 유류에게 주었으니 우리는 이곳에 있을 이유가 없다. 그러니 어머니를 모시고 남으로 가서 따로 도읍을 정하세’ 하니, 이에 아우 온조가 동의하여 둘이서 무리를 거느리고 패수와 대수를 건너 미추홀에 이르러 살았다.」는 내용이다.
여기에서 비류는 해부류의 손이고 우이의 아들이다. 비류는 온조와는 친형제이고, 주몽의 의붓아들이다.
끝으로 구이시조설은
「구이는 동명의 후손으로 인신이 돈독하였다. 처음에 나라를 대방고지에 세웠는데 한의 요동태수 공손도가 딸을 맞이하게 하여 드디어 동이의 강국이 되었다.」는 줄거리다.
김부식은 삼국사기를 편찬하면서 많은 국내외 자료를 참고하였을 것이다. 당시 국내 자료였을 <고기>, <단군고기 혹은 단군기>, <삼국기> 등은 현재 전하고 있지 않아 확인할 수 없고, 중국의 기록을 살펴 본 후 두 건국신화를 평가하기로 한다.
A, “백제국은 그 선조가 부여로부터 나왔다”(위서, 열전, 백제국)
B, “백제는 그 선조가 대체로 마한의 속국이었으며, 부여의 별종이다. 구이란 사람이 있어 대방의 고지에서 국가를 세웠다.”(주서, 열전, 이역백제)
C, “백제는 대체로 마한에 속하였다. 색리국에서 출자하였다. 왕의 시녀가 임신하였는데 왕이 그를 죽이려 하자 시녀가 말하기를 ‘전에 천상에 있는 기를 보았는데 마치 큰 겨자 같았습니다. 그것이 내려와 감응한 까닭에 임신하였습니다.’한다. 왕이 그를 버렸는데 후에 아들을 낳았다. 왕이 그를 돼지우리에 버렸더니 돼지가 입김을 불어주어 죽지 않았으며, 다시 마굿간에 버렸더니 이번에도 말이 그와 같이 하여 죽지 않았다. 왕이 신기하게 여겨 그 아이를 기르도록 하였다. 이름을 동명이라 하였는데 자라면서 활을 잘 쏘았다. 왕이 그의 용맹스러움을 꺼려하여 다시 죽이려 하였다.
동명은 도망하여 남쪽의 엄대수에 이르렀다. 활로 물을 치니 고기와 자라가 물위에 나와서 다리을 만들었다. 동명이 타고 건너 부여에 이르러 왕이 되었다. 동명의 후손에 구이라는 자가 있어 인신을 돈독히 하였는데 처음으로 대장고지에 나라를 세웠다. 한(漢) 요동태수 공손도가 딸로서 처를 삼게 하였다. 마침내 동이의 강국이 되었다. 처음에 백가(百家)가 제(濟)하였기에 백제라하였다.ꡓ(北史, 열전, 백제)
D, “백제의 선조는 고려국에서 출자하였다. 국왕에게 한 시비가 있었는데 홀연히 잉태를 하였다. 왕이 그를 죽이려 하자, 시비가 말하였다. ‘게자와 같은 물건이 있어 나에게 와서 감응한 까닭에 임신을 하였습니다. 왕이 그를 버렸는데 후에 한 남자아이를 낳았다. 이를 뒷간에 버렸는데 오히려 죽지 않았다. 신기하게 여겨 기르도록 하고 이름을 동명이라 하였다. 동명이 자라자 고구려왕이 이를 꺼려하였다. 동명은 두려워서 도망하여 압수에 이르렀는데 부여인 들이 함께 받들었다. 동명의 후손에 구이란 자가 있어 인신에 돈독하였다. 처음으로 대방고지에 국가를 세웠다. 한 요동태수 공손탁이 딸을 그의 처로 삼게 하였다. 점차 창성하여 동이의 강국이 되었다. 처음 백가로 제하였기에 백제라고 하였다.”(隨書, 열전,동이백제)
자료를 살펴보면, “백제는 부여로부터 나왔다.”거나, “부여의 별종이다.ꡓ “마한의 속국이다.” 는 내용은 사실이다. 그러나 C와 D의 자료는 고구려시조 동명에게는 구이라는 아들이 있었는데 그가 처은에 대방고지에 나라를 세웠는데 이름을 백제로 했다는 것이다. 이설은 백제를 부여 고구려와 구분 못하고 있는 듯하며, 부루는 자식이 없고 동부여 시조인데도 우이가 북부여왕 해부루의 서손이라 하였다. 자료가 명확하지 못하고 혼돈하고 있어 사료(史料)적 가치가 희박하다 할 것이다.
구이가 대방고지에 국가를 세웠다 함은 백제를 이르는 것이 아니고, 아직 우리학계에서 명확히 밝히지 못하고 있는 진국(辰國)이 아닌가 싶다.
김부식은 삼국사기를 편찬하면서 무척 고심한 흔적이 역력하다. 온조 시조설, 비류 시조설, 또는 구이 시조설을 놓고 고민하다가 온조 시조설로 결론을 지으면서도 아쉬움이 컸던지 이런 저런 자료를 소개하고 있다.
최근에는 온조설과 비류설을 혼합하여 백제왕실이 도중에 온조계와 비류계 세력사이에 교체되었다는 주장(이기동, 노명호,이도학)도있는 실정이다.
다음은 다툼의 핵심인물인 온조와 비류는 어떤 인물인지를 살펴보기로 한다. 온조와 비류가 반드시 형제간이라거나, 주몽의 아들 또는 의붓아들을 따질 필요가 없을 것 같다. 이들은 주몽보다 먼저 부여계에서 졸본에 와서 국가를 경영하던 세력이었다. 주몽은 그 후에 남하하여 온조․비류세력과 협력하면서 국가를 키워나가다가, 유류(삼국사기 고구려전에서는 유리로, 백제전에서는 유류로 적음)라는 또 다른 세력이 동부여에서 내려와 전쟁을 하였는데, 이때 주몽이 죽고 온조와 비류는 이들에게 밀려 남으로 내려와 마한에 의지하여 있다가 차츰 국가로 발전하였다고 볼 수 있다.
유류는 기원전 18년 4월에 내려왔는데 그해 9월에 주몽은 세상이 싫다고 하늘로 올라가 내려오지 않고(즉 自盡), 그해 5월에 백제가 건국된다. 온조는 나라를 세우자마자 부여의 시조인 동명왕의 사당을 세웠으며, 성을 부여로 삼았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은 온조가 고구려의 뒤를 이은 것이 아니고 부여의 뒤를 이은 것이 되므로 위의 가설을 뒷받침하고 있다.
또 온조와 비류가 남하하여 비류는 미추홀에, 온존는 하남위례성에 정착한다. 이들이 남하하는 과정도 살펴보아야 한다.
그들이 남하한 기원전 18년경에 남만주에서 한강유역으로 이동할 때 반드시 통과해야할 평안도에는 평양을 중심으로 중국세력인 낙랑이 버티고 있었다. 그런데 어떻게 그 많은 사람이(삼국사기에 ‘따르는 백성이 많았다’) 적지를 무사히 통과할 수 있었을까? 하는 점이다. 이에 대해 비류는 바다를 이용하여 인천에 다달았고, 온조는 육로를 이용하여 한강에 왔다는 의견이 있다. 그러나 온조가 온 경로에 대해서는 아무 설명이 없어 이도 납득하기 어렵다.
온조는 신천지를 열은 것이 아니고, 기존의 마한땅 일부를 빌어 나라를 세웠다. 온조가 이곳에 나라를 세우기 전에 진국과 마한은 북쪽 즉 지금의 평안도 황해도 일대에 있던 한족(漢族)의 한군(漢郡)과 대립관계에 있었다. 그런데도 어떻게 많은 사람이 남의 나라를 무사히 통과할 수 있었을까?
그리고, 내려온 시기에 대해서도 비류가 먼저 왔다는 설 등이 있으나, 둘은 비슷한 시기에 동일한 경로를 통하여 이주하였다고 보고 있다(이종욱).
이들이 이주하여 최초로 머문 곳이 비류는 미추홀이라하고, 온조는 하남위례성 이라고 한다(삼국사기). 이 하남위례성의 위치를 지금까지 확실히 밝히지 못한 상태에서 학자에 따라 강동구와 경기도 광주로 보아왔다. 그런데 삼국유사 왕력에서는 “위례성에 도읍하였다. 혹은 사천(蛇川)이라고도 한다. 지금의 직산(稷山)이다. 기원전 5년에 한산(漢山)으로 도읍을 옮겼는데 지금의 광주(廣州)다.”고 적고 있다. 이 기록에 의하면 온조는 직산에 도읍을 정한 후에 지금의 경기도 광주로 이전하였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충남 천안지역의 향토사학자들은 하남위례성은 충남 천안시 북면에 있는 위례산성(해발 825m)이라는 주장을 제기하고 있다. 실제로 서울대 고고학 발굴조사단이 위례산성에서 거둔 시료(숯)의 연대측정을 한 결과 지금부터 2010여년전의 것으로 밝혀저 백제의 초기에 해당함을 확인 하였다. 그러나 아직까지 우리나라 고대 사학계가 여기에 관심을 두고 있지는 않다.
그간 사학계에서는 하남위례성의 위치를 놓고 풍납토성, 몽촌토성, 이성산성 등으로 논란을 빚어 왔다. 그런데 최근에 풍납토성터에서 백제 초기 집자리와 이형(異形)기와, 토기파편, 철기류 등의 유물을 발견했고, ‘대부(大夫)’라고 쓰인 토기 명문을 찾아내는 등 활발한 발굴을 통하여 이곳이 하남위례성이라는데 상당한 접근을 보고 있다.
끝으로 백제왕가의 성은 무엇일까?
삼국사기에서는 “그 세계(世系)가 고구려와 더불어 부여에서 나왔기 때문에 부여를 성씨로 삼았다.”고 하였고, 삼국유사는 “그 세계는 고구려와 마찬가지로 부여에서 나왔으므로, 성씨를 해(解)라고 하였다.”고 기록하였다. 백제의 왕실은 성을 부여로 계속 사용하였다. 그래서 제26대 성왕이 도읍을 소부리(지금의 부여)로 옮기고 나라이름을 남부여(南夫餘)라고 고쳤다.
네 번째 이야기 다섯째 마디
신라의 건국신화
한반도의 동남쪽에 위치한 신라는 초기에는 대륙의 정치세력에 의한 영향을 덜 받으며 소박하게 발전하였다. 그러나 외부의 영향을 덜 받았다는 것은 문화의 이식(移植)이 적어 발전이 늦었다는 말로 대체할 수도 있다.
‘신라’라는 나라 이름은 500년에 즉위한 지증왕 때부터이다. 신라는 대체로 지증왕대에 이르러 국력이 바로잡히기 시작하였다. 그는 순장제도를 금지시키고, 소를 이용하여 농사를 짓도록 지도하고, 주․군․현의 지방제도를 정비하였으며, 우산국을 정복하는 등 국가 발전의 기틀을 세운 왕이다.
‘신라’이전에는 ‘서나벌(徐那伐)’이었다. 왕의 명칭도 ‘거서간’, ‘차차웅’, ‘이사금’, ‘마립간’으로 불리었다.
거서간은 진한의 말로 왕 또는 귀인(貴人)을 뜻하였으며, 차차웅은 존장자(尊長子)를 가리키는 말이다. 그리고 이사금은 “잇금”을 말한다. 비유가 적절한지 모르겠지만 요즘도 소의 나이를 확인할 때는 이빨의 테 즉 잇금을 보고 몇살인지를 확인 한다. 아마도 신라 초기에는 문자가 없어 출생을 기록하는 제도가 없었을 것이고, 달력 등이 없어 나이를 객관적으로 확인 하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그래서 연장자를 가리기 위하여 잇금을 이용하였다고 판단된다.
마립간은 삼국사기 눌지마립간조에 “마립이란 방언으로 궐(橛:말뚝)이며, 궐은 함조(諴操)라고 하는데 위(位)에 준하여 설치한다. 즉 왕의 궐은 주가되고, 신의 궐은 아래에 진열한다. 그래서 이름이 된 것이다.”고 되어 있다.
신라 전체를 통하여 거서간과 차차웅이 각각 한명이고 이사금은 16명이며, 마립간은 4명, 왕은 34명이었다. 왕이라는 칭호를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법흥왕부터이다.
신라는 기원전 57년에 박혁거세거서간에 의하여 건국되었고, 935년에 고려에 통합되었다.
신라에 관한 건국신화는 이제까지 살펴 본 부여나 고구려, 백제보다 내용과 기록이 단순하다. 단순하다는 것은 내용이 빈약하다는 뜻이 아니고 부여, 고구려, 백제와 같이 서로 연관성을 갖지않고 명확하게 뜻이 밝혀진다는 의미이다.
신라와 가야신화는 중국의 문헌에서는 찾아보기 어렵고, 삼국유사와 삼국사기에 전하고 있다. 여기서는 삼국유사와 삼국사기의 내용을 살펴보기로 한다.
범위는 신화적 요소를 갖고 있는 시조 박혁거세, 석탈해, 김알지로 한정한다. 이들은 각각 박(朴)씨, 석(昔)씨, 김(金)씨의 시조로 신라 왕실을 이룬 주인공이다.
신라는 박씨가 1대에서 시작하여 3대까지, 그리고 5대부터 8대까지 7명의 임금을 배출하였고, 석씨는 4대, 9대에서 12대까지, 14대에서 16대까지 모두 8명의 임금이 있었으며, 김씨는 13대 미추이사금을 시작으로하여 17대부터 신라 마지막 임금인 56대까지 계속하였다.
시조 박혁거세 거서간
삼국사기의 박혁거세 신화
『①, 시조의 성은 박씨요, 휘는 혁거세로서 전한 효선제 오봉 원년(기원전 57년) 4월에 즉위하였다. 칭호는 거서간이요 나이는 13세 였으며, 국호를 서나벌이라고 하였다. 이에 앞서 조선의 유민(遺民)이 산곡사이에 분거하여 여섯 촌락을 이루었으니 1은 알천의 양산촌, 2는 돌산의 고허촌, 3은 취산의 진지촌(우진촌이라고도 함), 4는 무산의 대수촌, 5는 금산의 가리촌, 6은 명활산의 고야촌이다. 이를 진한의 6부라고 한다.
②, 고허촌장 소공벌이 양산 기슭을 바라보니 나정옆의 수풀사이에서 말이 무뤂 꿇고 울고 있으므로 곧 가 보았더니 말은 홀연히 가서 보이지 않고, 다만 큰 알이 있어 깨뜨려 보니, 어린아이가 나왔다. 거두어 길렀는데 나이 10여세가 되자 벌써 장대하여 숙성하니 6부 사람들은 그 출생이 신이하므로 추존하다가 이에 이르러 임금으로 세웠다. 진의 사람이 호(瓠)를 박이라고 하므로 처음에 큰 알이 박만하였기 때문에 성을 박이라고 하였으며, 거서간은 진의 말로 왕을 뜻한다.
③, 5년 정월에 용이 알영 우물에 나타나 오른쪽 갈비대에서 계집아이를 탄생시키니 할멈이 보고 이상하게 생각하여 데려다가 기르면서 우물이름을 따 이름을 지었다. 장성하여 덕기가 있으니 시조가 이를 듣고 왕비로 맞아들였는데 행실이 어질고 내조를 잘하여 그때 사람들이 시조와 비를 이성(二聖)이라 하였다. (중간 생략).
④, (재위) 61년 3월에 거서간이 승하하니 담암사 북쪽에 있는 사릉에 장사지냈다.』
삼국유사의 박혁거세 신화
『A, 진한 땅에 옛날에 여섯 마을이 있었다.
첫째는, 알천 양산촌인데 그 남쪽은 지금의 담엄사로서, 그 촌장은 알평이었다. 처음 하늘에서 표암봉에 내려왔는데 이가 급량부 이(李)씨의 조상이 된다. 둘째는, 돌산 고허촌이니 촌장은 소벌도리이다. 처음 형산에 내려왔으니 이가 사랑부 정(鄭)씨의 조상이 된다. 셋째는, 무산 대수촌이니 촌장은 구례마이다. 처음에 이산에 내려오니 여기가 점량부 또는 모량부로 손(孫)씨의 조상이다. 넷째는, 자산 진지촌이니 지백호이다. 처음에 화산에 내려오니 이가 곧 본피부 최(崔)씨의 조상이 되었다. 다섯째는 금산 가리촌이니 촌장은 지타이다. 처음에 명활산에 내려오니 이가 곧 한기부 배(裵)씨의 조상이다. 여섯째는 명활산 고야촌이니 촌장의 이름은 호진이다. 처음에 금강산에 내려왔으니 이 사람이 습비부 설(薛)씨의 조상이 되었다. (이 부분에서 다소 내용을 축약하였음)
위의 글을 살피건데 이 여섯부의 조상들은 모두다 하늘에서 내려온 것 같다. 노례왕(유리왕)9년에 비로소 여섯부의 이름을 고치고 또 그들에게 여섯성을 주었다. (생략).
B, 기원전 69년 3월 1일에 여섯부의 촌장들은 자제를 거느리고 알천의 언덕위에 모여서 의논을 하였다.
“우리들은 아직 백성들을 다스릴 임금이 없어서 백성들이 방자하기가 이를 데가 없소.”
이리하여 그들이 높은 곳에 올라가서 남쪽을 바라보니 양산 밑에 있는 나정 곁에서 이상한 기운이 땅에 닿아 비추고 있었다. 그런데 그 곁에 백마 한 마리가 꿇어앉아 절을 하고 있는 형상을 하고 있었으므로 그곳을 찾아가 살펴본즉 자주빛 알 한 개가 있었다. 말이 사람을 보더니 길게 울고는 하늘로 올라갔다. 그 알을 깨어보니 사내아이가 나왔는데 모양이 단정하고 아름다웠다. 모두들 놀라고 이상하게 여겨 그 아이를 동천에서 목욕을 시키자 몸에서 광채가 나고 새와 짐승이 더불어 춤을 추니 이내 천지가 진동하고 해와 달이 청명하여졌다. 그로 인하여 그 아이를 혁거세라고 이름 지었다. - 혁거세라는 말은 향언(鄕言)으로 ‘붉’, 혹은 ‘밝’을 뜻함 - 위호는 거서간이라고 했다. 사람들이 서로 앞다투어 치하를 하였다.
C, “이제 천자가 하늘에서 내려왔으니 당연히 덕이 있는 왕후를 찾아 배필을 삼아야 할 것이오.ꡓ
이날 사량리에 있는 알영정 주변에 계룡이 나타나 왼쪽의 갈비에서 계집아이를 낳았다. 얼굴과 모습이 매우 고왔으나, 입은 닭의 부리와 같았다. 월성의 북천에 가서 목욕을 시키니 그 부리가 떨어졌으므로 그 내를 발천이라 한다.
남산의 서쪽 기슭에 궁궐을 짓고 성스러운 두 사람을 받들어 길렀다. 사내 아이가 알에서 나왔는데 그 알이 호(瓠)와 같았다. 향인들은 호를 박이라 하는 까닭에 그 성을 박(朴)이라 하였다.
계집아이는 그녀가 나온 우물의 이름을 따서 ‘알영’이라 이름지었다. 두 성인의 나이가 13살이 되자 사내아이는 왕이 되고 그 여자를 왕후로 삼았다.
D, 나라의 이름은 서라벌(徐羅伐) 또는 서벌(徐伐), 사라(斯羅), 사로(斯盧)라고 하였다.
처음에 왕이 계정에서 탄생하였기 때문에 나라 이름을 계림국 이라고도 하였다. 이것은 계림이 상서로움을 나타냈기 때문이다. 일설에 의하면, 탈해왕 시절 김알지를 얻을 때, 숲 속에서 닭이 울었다고 하여 국호를 고쳐 계림이라 하였다고도 한다.
E, 박혁거세가 나라를 다스린지 61년이 되던 날 하늘로 올라갔는데 7일 후에 땅에 떨어저 흩어져 떨어졌다. 그리고 왕후도 역시 왕을 따라서 세상을 하직하였다. 나라의 사람들이 이들을 합장하여 장사를 지내려 하자 큰 뱀이 나타나 방해를 하므로 머리와 사지를 제각기 장사지내어 5릉을 만들고 능의 이름을 사릉(蛇陵)이라 하였다. 담엄사 북쪽의 능이 바로 이것이다. 태자 남해왕이 즉위하여 왕위를 계승하였다. 』
두 신화의 내용을 크게 나누면 6촌의 존재, 박혁거세의 탄생, 왕비의 탄생, 그리고 (나라 이름 결정), 왕의 서거로 구분할 수 있다.
①.A, 한반도에는 언제부터인지는 알 수 없으나, 마한, 진한, 변한이 있었다. 이들은 소국 상태에서 각각 연맹 초기 단계였으며, 통합된 정치세력을 갖지는 못하였다. 박혁거세가 임금이 되기 전에 신라의 전신인 진한(辰韓)에는 여섯 개의 촌(村)이 있었다. 촌에는 각각 촌장이 있어 백성들을 다스렸는데 이들 촌장들은 유리이사금 9년까지는 성씨가 없었다. 유리이사금이 촌(村)을 부(部)로 명칭을 바꾸면서 각자에게 성씨를 하사하였다. 이때부터 부는 국가의 지방조직으로 체제를 잡아갔으며, 부의 장은 국가 경영에 관여하는 지배층으로 세습되었다.
국가의 초기에 성을 하사하는 것은 오랜 전통이다. 고구려 주몽이 그랬고 신라의 박혁거세가, 고려의 왕건이 그랬다. 6촌의 촌장(村長)은 추장(酋長 :Chiefdom)으로 볼 수 있다. 그러므로 6촌 사회는 초기국가 발전단계의 추장사회로서 소국 형성의 전 단계이다. 대체로 추장사회는 몇 개의 마을로 구성되었으며, 그 규모는 직경 3~4km 정도라고 할 수 있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전체 내용은 비슷하나, 삼국유사가 신화적 요소가 강한 반면에 삼국사기는 역사성을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차이는 같은 문헌을 가지고 편찬하였는데 일연은 그 내용을 그대로 옮겼고 김부식은 신화적 요소를 가급적 제거하고 역사적 사실만을 추려서 편찬한 결과로 보인다. 그러한 결과 삼국사기는 “유민(遺民)이 분거하여 여섯 촌락을 이루었다.”고 역사적 사실로 기술하였으나, 삼국유사는 “여섯 촌장이 모두 하늘에서 내려왔다(降臨)”고 하였다. 이는 촌장 즉 무리의 지도자가 외부에서 이주하여 왔음을 표현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삼국사기 혁거세조에서 “예전에 중국 사람이 진(秦)나라의 난에 시달려서 동으로 온 자가 많았는데, 대개 마한의 동쪽에 거처하면서 진한(辰韓)과 더불어 살다가 이에 이르러 차츰 번성해 졌기 때문에 마한이 시기하여 문책이 있었다.”는 기사가 보인다. 이는 중국 진나라의 시황제 즉 진시황제가 기원전 247년에 천하를 통일하고서 만리장성을 쌓았고, 아방궁을 지었으며 지금도 상상하기 힘든 묘지를 만드는 등 끊임없이 토목․건축 공사를 일으켜 백성들을 이루 말할 수 없이 괴롭혔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육지를 이용하여 혹은 바다를 통하여 한반도로 이주하였다.
본래 신라를 형성한 주민은 중국 북서 지역에서 몽골, 시베리아 동부, 연해주, 동해 해안선을 따라 이주하였다고 볼 수 있다. 이들은 중앙아시아인들의 금(金)선호 사상을 간직하고 이동하다가 동시베리아의 야쿠트족들의 샤머니즘을 흡수하여 독특한 금관문화를 형성하였다.
중국백성이 한반도지역으로 이동한 것은 꾸준히 이루어졌다고 보아야 한다. 그래서 고려나 조선조 초까지도 중국귀화인을 적극 우대하여 백성을 늘려나가는 정책을 펼쳤다.
중국에서 정변이 있을 때면 큰 무리를 지어 한반도로 이동하곤 하였다.
기원전 12세기말에 은나라가 망했을 때 많은 사람이 중국 동북지방인 요하 유역으로 이동하였다. 이때 이 무리를 이끈 지도자가 기자라고 본다.
기원전 4세기 초에는 연 나라가 요동에 있던 고조선을 공격하여 고조선이 크게 패하여 유민이 평양지역으로 밀렸다.
기원전 3세기 후반에는 진나라가 망하고 한나라가 들어선 시기이다. 이때 연 나라, 제 나라, 조 나라 사람이 대거 한반도로 이주한 사실이 있다.
또 기원전 2세기 초에는 위만조선이 들어서면서 고조선사람이 한반도내로 이동하였고, 기원전 108년에 고조선이 망하면서 중국 한나라가 낙랑군 등 군․현을 설치할 때 선주민의 이동이 크게 있었다. 이때 고조선의 지도층들이 한사군의 지경 밖으로 흩어지면서 한반도에는 정치적 격변을 거첬고, 또는 이에 자극을 받아 국가 형성이 이루어 졌다고 보아야 한다. 이때 고구려, 백제, 신라가 국가 체제를 갖추었다고 하겠다.
②.B, 이 부분은 신라시조 혁거세가 탄생하는 신화중의 신화이다. 6촌의 촌장(추장)들은 백성을 통합하는데 어려움이 있었던지 이를 통합하여 통치할 능력을 가진 지도자를 요구하고 있었다.
어떻게 받아들여야 좋을지 모르지만 중국 사서인 <삼국지> 한전에
“그 기강이 적어 국읍(國邑)에 비록 주사(主師)가 있어도 읍락에 잡거하여 잘 다스리지 못하였다.”고 하였다.
6촌장과 그 무리들이 기원전 69년 3월 1일에 알천 언덕 위에 모여서 상의를 하는데 양산 밑의 나정 곁에서 이상한 기운이 땅에 비추더니 말이 무릎꿇고 울고 있어 달려가 보았더니, 말은 하늘로 올라가고 자주 빛 큰 알 한 개가 있었다. 알을 깨고 나니 사내아이가 나왔다. 6촌사람들이 신이하게 여겨 추존 하다가 그의 나이 13세가 되던 해에 임금으로 세웠다. 이들은 알을 처음 발견할 때 그 크기가 박만하였다고 하여 성을 박이라 하고 “밝다”는 뜻에서 혁거세라 이름을 지었으며 왕이라는 뜻의 거서간이라는 칭호를 붙였다. 그래서 박혁거세 거서간이 탄생한 것이다.
③.C, 이는 왕비가 탄생하는 과정이다. 삼국사기에는 박혁거세 거서간 5년(혁거세의 나이 18세 되던해) 봄에 용이 알영우물에 나타나서 오른쪽 갈비에서 여자아이를 탄생시켰다고 한다.
그런데 삼국유사는 박혁거세가 알에서 태어나던 날에 왕비가 계용의 왼쪽 갈비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그녀가 태어날 때 입은 닭의 부리를 하고 있어 월성의 북천에서 목욕시켰더니 떨어져 나갔다고 한다. 그리고는 둘이 13세가 되던 해에 왕과 왕비가 되었다고 한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가 차이나는 것은 왕과 왕비의 태어난 연도와 왕비가 태어나는 방법, 왕비가 닭부리 모양이었다는 점 등이다. 여자는 음이고 남자는 양이다. 그래서 남자는 천제, 또는 알에서 태어나는 반면 여자는 용, 수신과 같이 물과 관련을 갖는다. 그래서 왕비는 오른쪽이 아닌 왼쪽 갈비에서 나와야 한다. 그리고 닭부리 모양을 하고 태어났다는 삼국유사의 기록이 옳다고 보아야 한다. 태어난 연도는 삼국사기가 현실성은 있으나, 신화성은 떨어진다 하겠다.
D, 나라이름은 서라벌 또는 서벌이라고 했다는 내용이다.
오늘 우리나라의 수도를 서울이라고 부른다. 서울의 유래는 여러 가지가 있다. 서벌에서 서울로 변했다는 설도 있고, 신라의 수도에 성을 쌓은 시기가 혁거세 21년(기원전 37년)인데 “성을 쌓고 금성(金城)이라 불렀다”는 기사가 있다. 금성을 순수한 우리말로 하면 ‘쇠울’이 된다. 이것이 음전되어 서울로 되었다는 설이 있는데, 필자는 이설에 관심을 갖는다. 또 하나는 이성계가 한양에 성을 쌓을 때 정도전과 무학대사의 일화 가운데 “눈이 쌓인 경계대로 성을 쌓았다”고 전하는 이야기가 있다. 그래서 ‘설울’에서 연유했다는 것이다.
④.E, 박혁거세 즉위 61년 되던 해 3월에 74세의 나이로 승하하였다는 내용인데, 삼국유사에서는 신화적 요소가 물씬 나는 내용으로 장황하게 적고 있다.
탈해 이사금
박혁거세가 서거하자 그의 아들 남해차차웅이 대를 이었다. 남해는 탈해가 어질다는 말을 듣고 그의 큰딸을 탈해에게 주어 아내로 삼게 하였다. ,
남해차차웅이 즉위 21년에 죽자 다음 왕위를 놓고 태자 유리와 사위 탈해가 서로 사양하고 있었다. 이때 탈해가
“내가 듣기로는 성지(聖智)의 인물일수록 이[齒]가 많다고 하였으니 시험삼아 떡을 씹어봅시다.”하고 제안하였다. 그 결과 유리 태자의 잇금[齒理]이 많으므로 임금의 위에 오르고 주위에서 그를 이사금이라는 칭호로 불렀다. 유리이사금은 6촌을 6부로 명칭을 바꾸고, 이들에게 각각 이, 최, 손, 정, 배, 설씨를 하사하였다. 또 그는 관직을 정비하여 국가체제를 갖추었으며, 추석명절도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유리의 유언에 의하여 그의 뒤를 이어 탈해가 왕위를 계승하였다.
삼국사기의 탈해 이사금
『탈해이사금이 즉위하니 그의 나이 62세였다. 성은 석씨이고, 비(妃)는 아효 부인이다. 탈해는 본래 다파나국 소생인데 그 나라는 왜국의 동북 1000리 정도 거리에 있었다. 처음에 그 나라 왕이 여국(女國) 왕녀에게 장가들어 태기가 있었는데 7년만에 큰 알을 낳았다. 왕이 말하기를
“사람으로서 알을 낳았으니 상스럽지 못하므로 내다 버려야 마땅하다.”하였으나, 그녀는 차마 못하여서 비단으로 알을 싸고 보물과 함께 독속에 넣어 바다에 띄워 마음대로 가게 하였다. 처음에 금관국(金官國) 해변에 이르니 금관 사람들이 괴이하게 여겨 가져가지 않았다. 다시 진한(辰韓)의 아진포구에 이르니 이때가 혁거세 재위 39년이었다. 때마침 해변의 노모가 줄을 끌어 당겨 해안에 매고 독을 열어보니 작은 아이 하나가 들어있으므로 그 노모가 데려다 길렀다. 그가 장성하자 신장이 9척이요 풍신이 빼어나고 지식이 남보다 빼어났다. 어떤 이가 말하기를
“이 아이는 성씨를 알 수 없으나 처음 독이 떠내려올 때 까치 한 마리가 울며 따랐으니 작(鵲)의 한 편을 생략하여 석(昔)으로 성을 삼고, 또 얽어맨 독 안에서 풀려나왔으니 이름을 탈해라 하는 것이 마땅하다.”하였다.
탈해는 처음에 고기잡이를 업으로 삼아 어미를 공양하되 조금도 게을리 함이 없었다. 어미가 말하기를
“너는 보통 사람이 아니다. 골상이 특수하니 학문에 종사하여서 공명을 세워야 한다.”하였다. 이에 학문에 전력하고, 겸하여 지리를 알게 되었는데, 양산아래 호공(瓠公)의 집을 바라보니 길지이므로 꾀임수를 써서 빼앗아 살았다. 그 땅이 뒤에 월성이 되었다. 남해왕 5년에 이르러 그의 어짐을 듣고 왕은 그 딸을 아내로 삼게 하였다. 왕 7년에 등용하여 대보로 삼고, 정사를 위촉하였다.
유리왕이 돌아 갈 때 말하기를
“선왕의 유언에 ‘나 죽은 뒤에는 아들 사위를 막론하고 나이 많고 어진 자로서 위를 계승케 하여라.’하시었다. 그래서 내가 먼저 즉위하게 된 것이니 이제는 마땅히 그 위를 탈해에게 전해주어야 한다.”고 하였다.
24년 8월에 탈해가 돌아가니 성 북쪽 양정 언덕에 장사 지냈다.』
삼국유사의 탈해이사금
『남해왕 때에 가락국의 바다에 배 한 척이 와 다았다. 이를 보고 수로왕이 신하와 백성들로 하여금 북을 치고 떠들어서 배를 머물게 하려하였으나, 배는 급히 달아나 계림의 동쪽 하서지촌 아진포에 이르렀다. 이때 갯가에 한 늙은 할멈이 있었는데 이름이 아진의선이다. 이가 바로 혁거세왕 때의 고기잡이 할멈이었다. 그가 배를 바라보면서 말하였다.
“본시 이 바다 가운데에 바위가 없는데 어찌하여 까치가 모여서 울고 있는가?”
배를 끌어 당겨 찾아보니 까치가 배 위에 모여들고, 배 안에는 궤 하나가 있었다. 길이는 20자나 되고, 넓이는 13자였다.
그 배를 끌어다가 나무숲 밑에 매어두고 이것이 흉한 일인지 길한 일인지를 몰라 하늘을 향해 고하였다. 이윽고 궤를 열어보니 잘생긴 사내아이가 있고, 또 일곱 가지 보물과 노비가 그 속에 가득하였다. 이레동안 잘 대접하였더니 그 사내아이는 말하였다.
“나는 본시 용성국 사람입니다. - 정명국 또는 완화국 이라고도 하는데 용성은 왜국 1천리 떨어진 곳에 있다. - 우리나라엔 일찍이 28용왕이 있었는데 모두 다 사람의 태에서 났으며, 5~6세 때부터 왕위에 올라 만민을 가르처 성명을 바르게 하였습니다. 8품의 성골이 있는데 그들은 선택하는 일이 없고, 고루 왕위에 올랐습니다. 우리 부왕 함달파가 적녀국의 왕녀를 맞이하여 왕비로 삼았는데 오랜 동안 아들이 없으므로 기도를 하여 7년만에 알 한 개를 낳았으니, 고금에 없는 일이며, 이것도 좋은 일은 아닐 것이다.ꡓ하고 궤를 만들어 나를 그 속에다 넣고 일곱 가지 보물과 노비들을 함께 배 안에 실은 후에 바다에 띄워놓고 간구하기를
“인연이 있는 곳에 닿는 대로 나라를 세우고 집을 이루라는 축원을 하였습니다. 그러자 문득 붉은 용이 나타나 배를 호위하고 여기까지 오게된 것입니다.”
말을 끝내자 그 아이는 지팡이를 끌고 두 종을 데리고 토함산 위에 올라가 돌집을 지어 그곳에서 이레동안 머물면서 성안에 살만한 곳이 있는가를 바라보니 마치 초승달 모양으로 된 봉우리가 보이는데 그 지세가 오래 살만한 곳이었다. 이내 내려와서 그곳을 찾아가 보니 바로 호공의 집이었다. 이에 지략을 써서 몰래 숫돌과 숯을 그 집 곁에 뭍어놓고 다음날 아침 그 집 문 앞에 가서 말했다. “이 집은 조상 때부터 우리 집입니다.”
호공이 그렇지 않다 하여 서로 다투었으나 시비를 가리지 못하므로 관가에 고발하였다. 관가에서 동자에게 물었다.
“그 집이 너의 집임을 무엇으로 증명하겠느냐?”
“우리의 조상은 대장장이였는데 잠시 이웃 고을에 나간 동안에 다른 사람이 빼앗아서 살고 있으므로 땅을 파서 조사를 해보면 알 수 있는 일입니다.”
그 동자의 말대로 땅을 파보니 과연 숫돌과 숯이 나왔으므로 그 집을 빼앗아 살게 되었다.
이때 남해왕은 그 어린이 즉 탈해가 지혜가 있는 사람임을 알고 맏 공주를 그의 아내로 삼게하니 이가 곧 아니 부인이다.
하루는 탈해가 동악에 올랐다가 내려오는 길에 백의를 시켜 물을 떠오게 하였다. 백의는 물을 떠서 가지고 오다 도중에 자기가 먼저 마시고 탈해에게 올리려고 하였다. 그런데 물그릇 한쪽에 입이 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탈해가 이를 꾸짖자 백의가 맹세를 하였다. “이제 절대 먼저 마시지 않겠습니다.”하고 말하자 그제야 물그릇이 입에서 떨어졌다. 이후로 백의는 탈해를 두려워하여 감히 속이지 않았다.
지금 동악 속에 우물하나가 있어 이를 세상사람들이 요정이라 하는데, 이것이 바로 그 우물이다.
노례왕(유리이사금)이 세상을 떠나자 서기 57년 6월에 딸해가 왕위에 올랐다. 옛날에 자기 집이라 하여 빼앗은 이유로 하여 성을 석(昔)씨라고 하였다. 혹은 까치로 해서 상자를 열게 하였기 때문에 까치라는 글자[鵲]에서 새조를 떼고 석씨를 성으로 삼았다고도 한다. 그리고 궤를 열어서 알을 깨고 나왔기 때문에 이름을 탈해라고 했다고 한다.
왕위에 오른 지 23년 만인 서기 79년에 세상을 떠났다.』
탈해설화는 <삼국유사> 가락국기에도 나온다. 그런데 내용이 일연 자신도 의아해할 정도로 서로 다르다.
일연은 삼국유사 가락국기를 쓰면서 「고려 문종 때 대강연간에 금관지주사로 있던 문인이 지은 것이다.」고 밝히고 있다. 그가 어떤 자료로 지은 것인지 또는 그가 어떤 성품의 소유자인지는 알 수없어 그 진위를 가리기가 어렵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가 대동소이하므로 살펴보고 가락국기에 나오는 이야기를 뒤에 붙이기로 한다.
탈해는 왜동북 1천리(왜국 1천리)에 있는 파나국(용성국, 완하국)출신이다. 그의 아버지는 아달파(아달)이며, 어머니는 여국(적녀국)의 왕녀이다. 둘이 결혼한 후 7년만에 임신하여 알을 낳았다. 본래 아이를 낳아야 하는데 알을 낳았으니 상서롭지 못한 자라 하여 궤에 넣어 바다에 띄웠다. 처음에는 금관국에 이르렀으나 그곳 사람들이 괴이하게 여겨 가져가지 않으므로 떠다니다 진한의 아진포에 이르렀다(혁거세 49년).
바닷가에 사는 할머니가 발견하여 궤를 열어보니 작은아이가 하나 나왔다. 그를 정성껏 길렀더니 영특하고 신장이 9척이나 되었다. 토함산에 올라 돌집을 짓고 살다가 술수로 호공의 집을 빼앗았으며, 대보의 자리에 올라 벼슬하다가 남해차차웅의 사위가 된 후 신라 제4대 탈해이사금의 자리에 올랐다. 그는 독이 발견될 때 까치 한 마리가 울며 따라왔으므로(혹은 까치로 해서 상자를 열게 해서) 까치작자[鵲]에서 한편을 생략하여 석(昔)을 성으로 삼고, 얽매인 독 안에서 (혹은 궤를 열고 알을 깨고 나왔으므로)이름을 탈해라 하였다
한편, 가락국기에는
탈해가 완하국에서 바다를 따라 가락국에 도착하여 김수로왕으로부터 왕위를 빼앗으려 하였으나, 실패하고 계림의 영토 안으로 달아났다고 하였다.
이 설화를 살피기 전에 전체적으로 우리나라 건국설화를 보면 부여의 동명은 고리국(색리국, 탁리국)에서 이주하여 와서 나라를 세웠고, 고구려 주몽은 부여에서, 백제의 온조는 고구려(또는 부여에서 내려와 고구려에서 머물다가)에서 이주하여 나라를 세웠다.
신라의 혁거세 집단과 탈해, 그리고 김알지 집단도 역시 어디에선가 이주해 왔다고 볼 수 있으며, 가야를 세운 수로왕도 이주민임이 확실하다.
<梁書> 신라조에 「위나라 장군 관구검이 고구려를 침공할 때 옥저 지방으로 피난 갔던 고구려 사람들 중 일부가 그 뒤 수복해서 복귀한 자도 있지만, 잔류하던 자가 (남하하여) 신라가 되었다.」는 기록도 보인다.
한편, 부여․고구려․백제․신라․가야(가락)등은 이주민 집단이 건국하였으나, 고조선은 이주민이 아니었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이종욱).
그렇다면, 탈해가 왔다는 파나국(용성국)은 어디일까? 그는 왜의 1천리 거리에 있는 나라에서 바다를 건너왔다고 한다. 이렇게 볼 때 탈해가 온 곳은 오끼나와 또는 그 남쪽에 있는 어디였을 것이다. 지도를 놓고 살펴보면, 필리핀 ― 오끼나와 ― 일본열도로 이어지는 섬의 띠를 발견할 수 있다. 그리고 조류가 이러한 방향으로 흐른다고 한다. 그렇다면 남해 먼 곳에서 섬을 징검다리로 하고 조류를 이용하여 한반도 남해에 다다랐을 것이라는 추즉은 가능한 일이다.
한편 가락국기에 등장하는 탈해는 알에서 깨어난 것이 아니고 장성한 체구를 기지고 가락국에 도착하여 왕권을 도모하였으나 역부족으로 실패하고 신라에 이르러 교묘한 술수를 써서 대보라는 최고 직위에 올랐다. 이어서 왕의 사위가 되고 결국 왕위에 오른다. 그는 별도의 혈통을 형성하여 신라왕 계보의 한 축을 이루었다.
김알지 신화
김알지는 신라왕실의 주종을 이루는 김씨의 시조이면서도 그가 직접 왕위에 오르지는 않았다. 그의 가계(家系)는 김알지(金閼智)를 시조로 세한, 아도, 수유, 욱보, 구도로 이어지며, 구도의 아들이 신라 제13대 미추이사금(262~284)이다.
삼국사기의 김알지 신화
김알지는 왕위에 오른 인물이 아니라서 삼국사기에 별도로 올라있지는 않고, 다만 탈해이사금조 9년에 이렇게 적고 있다.
『왕은 밤에 금성 서쪽 시림(始林) 숲 사이에서 닭울음소리를 듣고, 새벽녘에 호공을 보내어 보게 하였다. 금색의 작은 궤짝(독)이 나무 가지에 걸린 채 힌 닭이 그 아래에서 울고 있으므로, 호공이 돌아와 보고하니, 왕은 사람을 시켜 궤짝을 가저와 열어 보았더니, 작은 사내아이가 그 안에 있었다. 그는 용모가 매우 기위 하였다[姿容寄偉]. 왕은 기뻐하며 좌우에게 말하기를 ‘이는 하늘이 나에게 아들을 주신 것이 아니냐?’하고 거두어 길렀다. 장성하자 총명하고 지략이 많으므로 이내 알지라 이름하고 그 출생이 금궤이므로 성을 김씨라고 하였으며, 시림을 고처 계림(鷄林)이라 하고 따라서 국호로 삼았다.』
삼국유사의 김알지 신화
『서기 60년 8월 4일에 호공이 밤에 월성 거리를 가는데 크고 밝은 빛이 시림 하늘로부터 땅에 뻗치어 그 구름 속에 황금의 궤가 나무가지에 걸려있는 것을 보았다. 그 큰 광명은 궤 속에서 나오고 있었는데 흰닭이 나무 밑에서 울고 있었다. 이 모양을 보고 호공이 그대로 왕에게 보고하였다. 왕이 친히 숲에 나가서 그 궤를 열어보니 사내아이가 있었는데, 누웠다가 곧 일어났다. 이것은 마치 혁거세의 고사와 같으므로 그 아이를 알지라 이름하였다. 알지는 우리말로 아이를 뜻하는 말이다. 왕이 그 아이를 안고 궁으로 돌아오니 새와 짐승들이 서로 기뻐하면서 춤을 추고 뛰어 놀았다. 왕이 길일을 택하여 태자로 책봉하였으나 알지는 그 자리를 파사왕(註, 유리왕의 둘째 아들)에게 물려주고 왕위에 오르지 않았다. 금궤에서 나왔으므로 성을 김이라 하였다. (중간 생략). 신라의 김씨는 알지에서 시작된 것이다.』
알지는 천제의 자손도 아니고, 그렇다고 알에서 탄생하는 것과 같이 신이하지도 않다. 다만 궤에 아이가 있어 길렀다는 내용이다.
그러나 알지가 궤에서 나오도록 설화를 만든 이유는 그의 부모와 출신지를 감추기 위한 방편이었을 터인데 그는 과연 어디에서 온 누구일까?
알지는 탈해와 같이 왈력에 의하여 권력에 오른 흔적이 없고, 왕위도 받지 않았으며, 뚜렸한 벼슬에 오르지도 않았다.
아마도 그는 내륙 어디에서 온 학식이 풍부한 지식인이 아니었을까? 그래서 그 후손들도 학문을 닦아 6세 손인 미추가 임금의 자리에 오르지 않았나 싶다. 신화로서는 내용이 비교적 단순하고 사실적이다.
신라 초기 기록을 보면 호공(瓠公)이란 이름이 많이 보인다. 시조 박혁거세 38년 2월 기사에 “호공을 보내어 마한을 방문하니 마한 왕은 호공을 꾸짖으며 말하기를 ‘진․변 두 나라는 우리의 속국인데 근년에 조공을 바친 일이 없으니 사대의 예가 이럴 수 있소?’하였다.”
여기에 비로소 나타난 호공에 대하여 같은 문헌에서 “호공이란 자는 그 족성(族姓)이 자세하지 않으며, 본래 왜인(倭人)으로 처음에 박을 허리에 차고 바다를 건너왔기 때문에 호공이라 칭하였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렇다면, 호공은 특별한 벼슬이름이 아니고 한 개인의 별호라고 보아야 한다. 호공이 왜에서 왔다고 하였다. 왜는 일반적으로 지금의 일본을 말했다. 삼국사기를 보면 혁거세 8년(기원전 50년)에 왜인이 군사를 이끌고 변방을 침범했다는 기사가 있다. 그후 계속 왜가 신라를 침범하는 기사가 나타난다.
신라 소지마립간 4년(482년)까지 무려 40회 침범한다. 그런데 백제나 고구려를 침범한 기록은 없다. 신라만을 그토록 괴롭힌 왜의 실체는 무엇일까? 신라는 지증왕(500~514) 때에 이르러 국력이 신장되고 확고한 국가체제를 갖춘다. 그런가 하면 백제는 고구려 장수왕의 남하정책에 밀려 475년 전투에서 근초고왕이 전사하는 패배를 격고서 한성시대를 마감하고, 웅진(공주)시대를 연다. 이때 백제는 지금의 평택지역까지 영토를 잃는다. 이를 만회라도 하듯, 백제는 그간 조공관계는 유지하였지만 정치적으로 통치는 하지 않았던 영산강 이남의 세력집단을 복속 시킨다. 학계 일부에서는 - 아직은 아주 조심스럽게 - 그때 밀린 그 세력이 일본으로 건너가 대화왜(大和倭)를 세운 것이 아닌가 보고 있다.
그렇다면 500년경까지 신라를 괴롭힌 세력은 일본땅에 있지 않았고, 지금의 전라남도 지방에서 독자적 세력을 형성했던 세력이 아니었을까?
네 번째 이야기 여섯째 마디
가락국의 건국신화
가락국(또는 가야)은 우리의 역사에서 다소 밀려있는 듯한 감을 준다. 그것은 가락국이 소국연맹 단계에서 병합 단계에 이르지 못하고, 소국으로 각각 존재하였기 때문에 힘을 쓰지 못한 채 신라에 흡수되었기 때문이다.
서기 42년에 김수로왕에 의하여 경남 일원의 분지에 기반을 두고 세워진 가야는 초기 신라보다는 수준 높은 문화를 갖고 있었다.
중국의 <삼국지> 위지에 「변진(변한을 말함)에는 철이 생산되는데 한(韓)․예(濊)․왜(倭)에서 얻어다 쓰고, 낙랑․대방 등에도 공급하였다.」고 한다. 그들은 철을 다루는데 상당한 기술을 축척하고 있었다.
가야는 562년에 신라에 흡수되었다.
가야를 세운 김수로왕에 대한 신화는 오직 삼국유사에만 전하고 있다. 비교적 자세하게 쓰여진 이 신화는 일연이 밝히고 있듯이 고려 문종(1046~1083) 때 쓰여졌다. 어떤 문헌을 참고했는지도 밝히지 않은 상태이다.
여기에서는 그 대강을 싣는다.
『천지가 개벽한 후로 이곳에는 아직 나라이름도 없었고, 또한 군신의 칭호도 없었다. 이때 아도간․여도간․파도간․오도간․유수간․유천간․신천간․오천간․신귀간 등 아홉 간(干:간은 長을 뜻한다)이 있었다. 이들 추장들이 백성을 통솔했는데 모두 1백호로 7만 5천명이 있었다. 이 사람들은 거의 산과 들에 모여서 살았으며, 우물을 파서 물을 마시고 밭을 갈아먹었다. 서기 42년 3월에 그들이 살고 있는 북쪽 구지(龜旨, 거북이 엎드린 형상과 같은 산봉우리 이름으로 경남 창원시에 있음)에서 이상한 기운이 일며, 수상한 소리가 들렸다. 마을 사람들 2, 3백 명이 그 곳에 모였는데 사람소리와 같기도 하지만 그 모습은 보이지 않는데 소리만 들렸다.
“이곳에 누가 있는가?”
구간들이 대답했다.
“우리들이 여기에 있습니다.”
“내가 있는 여기가 어디인가?”
“구지입니다.”
이에 또 말했다.
“하늘이 나에게 명령하기를 이곳에 새로운 나 라를 세우고 임금이 되라고 하므로, 이를 위하 여 여기에 내려왔다. 너희들은 산꼭대기의 흙 을 뿌리며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밀어라
만약 내밀지 않으면
구워 먹겠다.
하고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워라. 그러면, 곧 너희들은 대왕을 맞이하여 기뻐서 춤을 추게 될 것이다.“
구간들은 이 말에 따라 마을 사람들과 함께 모두 기뻐하며 노래하고 춤추었다. 얼마 후 하늘을 우러러보니 한줄기 자주색 빛이 하늘로부터 드리워져 땅에 닿았다. 줄 끝을 찾아가 보니 붉은 보자기에 황금이 쌓여 있었다. 열어보니 해처럼 둥근 황금빛 알 여섯 개가 있었다. 여러 사람들은 모두 놀라고 기뻐하여 다함께 절을 했다. 조금 있다가 다시 싸서 안고 아도간의 집으로 돌아와 걸상 위에 놓아두고 각각 집으로 돌아갔다가 하루가 지난 후 그 이튼 날 아침에 마을 사람들이 다시 모여 그 합을 열자 여섯 개의 알은 아이가 되어 있었는데 용모가 매우 깨끗했으며 이내 평상위에 앉았다. 사람들은 모두 절하고 하례하면서 극진히 공경했다. 이들은 나날이 자라더니 10여 일이 지나자 키가 9척으로 은나라 천을과 같고 얼굴이 용안임은 한나라 고조와 같았다. 눔동자가 겹으로 된 것은 우나라 순임금과 같았다.
그 달 보름에 왕위에 올랐는데 세상에 처음 나타났다고 하여 이름을 수로라 하거나 혹은 수릉(수릉은 시호이다)이라 했다. 나라를 대가락이라 하고 또 가야국이라고도 했으니 곧 여섯 가야 중의 하나이다. 나머지 다섯 사람도 각기 가서 다섯 가야국의 임금이 되었다. 가야는 동쪽은 황산강, 서남쪽은 창해, 서북쪽은 지리산, 동북쪽은 가야산이며 남쪽은 나라의 끝이다. 그는 임시로 대궐을 세우게 하고 거처하였는데 질박하고 검소할 따름이니 집에 이은 이엉은 자르지 않았으며, 흙으로 만든 계단은 겨우 삼척이었다. 』
그 후 신답평에 도읍을 정하고 대궐을 지어 이사하였다. 얼마 후에
『완하국 함달왕의 부인이 아기를 배어 달이차 알을 낳았는데 그 알이 변하여 사람이 되었다. 그의 이름이 탈해이다. 탈해가 바다를 따라 가락국에 왔는데 키는 석자요 머리 둘레가 한자나 되었다. 그는 대궐로 들어가 왕에게 말했다.
“나는 왕의 자리를 빼앗으러 왔소.”
이에 왕이 대답했다.
“하늘이 나를 명하여 왕위에 오르게 한 것은 장차 나라를 안정시키고 백성들을 편안하게 하려 함이다. 나는 감히 천명을 어기고 너에게 왕위를 줄 수 없으며, 또한 이 백성들을 너에게 맡길 수도 없다.”
“그렇다면 술법으로 겨눠보자.”
이에 왕이 승낙하였다. 탈해가 순간 변하여 매가 되자 왕은 독수리로 변했다. 또 탈해가 참새가 되니 왕은 매가 되었다. 그 변하는 시간은 지극히 짧았다. 탈해가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오자 왕도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이에 탈해가 엎드려 항복하며 말하기를
“ 술법으로 다투면서 저를 용서한 것은 성인께서 죽이기를 미워하는 인덕을 가지셨기 때문입니다. 내가 왕과 왕위를 다툰다해도 이기기는 실로 어렵겠사옵니다.”
탈해는 곧 왕과 하직하고 교외로 나가 나루터에 이르러 중국배가 와서 닿는 수로를 따라 떠났다. 왕은 그가 머물면서 반란을 일으킬 것을 두려워하여 급히 수군을 실은 배 5백척을 보내어 촟게하였다. 탈해가 계림의 영토 안으로 달아나므로 수군은 이내 돌아왔다.』
털해의 침범을 물리친 수로왕은 그 때가지도 혼자였다. 그래서 9간(干)이 서기 48년에 배필을 구할 것을 권유하였다. 왕은
“염려하지 말라.”고 거절하면서 미리 알고 있었던 듯 왕비를 맞도록 했다.
이 때 허 왕후가 20명의 시종과 노비를 거느리고 이루 다 기록할 수 없을 만큼 많은 보물울 배에 싣고 산 밖의 별포나루터에 닿았다.
왕과 함께 침전에 든 왕후가
“저는 아유타국의 공주인데 성은 허씨이고 이름은 황옥이며 나이는 16세입니다. 본국에 있을 때인 지남 5월에 부왕과 모후께서 제에게 말씀하시기를
‘어젯 밥 꿈에 하늘의 상제를 뵈었는데 상제께서 가락국왕 수로는 하늘이 내려보내 왕위에 않게 되었으니 신령스럽고 성스러운 분이다. 또 새로이 나라를 다스림에 아직 배필을 정하지 못했으니 그대들은 공주를 보내 배필이 되게 하라는 말을 마치고 하늘로 올라가셨답니다. 꿈을 깨었으나 상제의 말씀이 아작도 귓가에 생생하니 너는 이 자리에서 곧 우리와 작별하고 그곳으로 떠나라 하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배를 타고 멀리 증조를 찾고 하늘로 가서 번도를 찾아 이에 모습을 가다듬고 용안을 가까이하게 되었습니다.ꡓ한다. 둘은 드디어 결혼하였다.
왕은 158세에, 왕후는 157세에 세상을 떴다.
낙동강 서쪽, 경남지방에서 일어난 가야는 9명의 간(干)이 다스리는 추장사회(chiefdom) 내지는 소국형태였다. 간은 장(長) 즉 어른을 뜻한다.
단순한 어른이 아니라 공식직함으로서의 어른, 즉 추장을 의미한다.
이들 9명의 추장이 평화스럽게 다스리던 땅에 갑자기 철을 다룰 줄 아는 인물이 나타나는 과정을 적은 신화이다.
앞에서 살핀 신라의 탈해도
“우리의 선조는 대장장이 였는 데 잠시 이웃 고을에 나간 동안에 다른 사람이 빼앗아서 살고 있으므로 땅을 파서 조사해 보면 알 수 있는 일입니다.”고 우겨 호공의 집을 빼앗았다.
이렇게 볼 때 수로의 왕권을 놓고 다투었던 탈해도 수로와 같이 철의 문화를 갖고 있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1988년에 경남 창원시 다호리의 무덤에서는 기원전 1세기 것으로 보이는 철제품이 출토되었다. 이미 이 시대에 수준 높은 철의 의기류(儀器類)를 사용하였다면 철제 무기도 능히 사용하였을 것이다. 선진 무기로 무장한 수로가 알에서 세상에 처음 나타났다고 하여 이름을 수로라고 하였다 하는데 어떻게 해서 김(金)이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는지에 대한 설명이 없다.
신라의 김알지는 서기 60년에 세상에 모습을 보였는데 김수로는 서기 42년에 나라를 세웠다. 김알지가 금궤에서 나왔다 하여 성을 김이라 하였다면 수로는 쇠를 잘 다루므로 김이라는 성을 갖게 되지 않았나 생각된다.
그런데 수로는 가야 전역을 통일하지 못하고 6개 지역으로 나누어 그 일부만을 차지했다. 9개 지역 간에서 6개 지역으로 통합하는 과정이지 통일된 국가는 만들지 못했다. 이러한 수로가 아유타국에서 온 여인을 맞아 왕비로 삼는다. 아유타가 인조에 있는 나라라는 주장도 있고, 중국 남부에 있는 나라라고도 하나 아직 확실하게 밝혀지고 있지 않다.
왜 남쪽의 먼 나라 여인을 왕비로 삼았을까?
우연히 표류하는 여인은 아니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당시에 중국남부, 오끼나와, 동남아시아 지역과 교류가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고연 그만한 조선(造船) 기술과 항해술이 발달되어 있었는지 확인이 필요하다.
중국의 난생신화
은나라 시조 탄생신화
설(楔)은 은나라 시조인 탕왕의 시조이다. 탕왕은 설의 4대 손이며, 설은 우왕을 도와 치수 공사에 많은 공을 세웠다.
유융씨에게는 간적과 건자라는 아름다운 두 딸이 있었다. 어느 날 천제가 제비 한 마리를 보내어 그녀들을 보고 오도록 했다. 제비는 즉시 그녀들이 있는 곳으로 날아가 빙빙 돌며 노래를 하였다. 그 노래 소리는 그녀들을 기쁘게 했다. 그래서 다투어 제비를 잡으려 하니 제비는 마침내 옥광주리 안에 잡혀 갇혔다. 그러나 조금 후 궁금해진 그녀들이 광주리를 열어 보는 순간 제비는 홀적 날아가고 광주리 안에는 알 두 개만이 남겨져 있었다. 간적은 이 두 개의 알을 먹고 설을 낳았다.
또 다른 전설에는 그녀가 다른 두 여자와 함께 강에서 목욕을 하는데 제비가 하늘에서 알을 떨어뜨리는 것을 보고 무심코 그 알을 받아먹었는데 임신을 하게되어 설을 낳았다고 한다.
서나라 언왕의 탄생신화
중국 주 나라 주목왕 때 남방에 서 나라가 있었고, 그를 통치하는 언왕이 있었다.
전설에 의하면 서 나라 궁전에서 어떤 궁녀 하나가 갑자기 임신을 하게 되었다. 그녀가 달이 차서 낳은 것은 아이가 아니고 알 이였다. 궁녀는 상스럽지 못한 일이라고 여겨 그 알을 물가에 내다 버렸다. 그런데 그 물가에는 과부 할머니가 살고 있었는데 그는 곡창이라고 하는 개를 기르고 있었다. 마침 그 개가 물가에서 놀다가 알을 발견하였다. 그리고는 그 알을 입으로 물고 돌아와 자신의 몸으로 따뜻하게 품었다. 어느날 그 알에서 어린 아이가 태어났다. 그 아이는 태어날 때부터 개처럼 누워 있었다고 하여 언(偃, 누울 언) 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으며, 그 소식을 들은 궁녀는 아이를 데려다가 자신의 아들로 정했는데 그 아이가 커서 언왕이 되었다.
진(秦)나라 조상의 탄생신하
진 나라의 조상은 전욱의 먼 후손이다. 전욱의 손녀는 여수(女修)라 했는데 여수가 어느 날 베를 짜고 있었다. 그 때 한 마리의 제비가 날아와 알을 떨어뜨렸는데 여수가 깜짝 놀라 그 알을 삼켰다. 그 후 열달이 지나 아들을 나았는데 그의 이름을 대업(大業)이라 하였다.
우리의 고대국가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
하나의 특이점이 대폭발(big bang)에 의하여 150억년 전에 우주가 탄생했고, 50억년 전에는 태양계가 만들어졌다. 지구도 이 때 형성되었으며 지구상에 생명체가 살기 시작한 것은 40~30억년 전이라고 보며 인류는 400~300만년 전에 발생한 것으로 학자들은 추정한다.
Africa 어디에서 발원한 인류는 중동을 거쳐 중앙아시아에 다달았다. 7만~5만년 전에 몽골에 도착한 이들은 한반도 서북지역인 요녕지방에 들어왔고, 동시베리아로 이동했던 일부가 송화강을 건너 장춘, 길림지역에 도착하였다. 또 한 무리는 연해주에서 동해안을 따라 한반도에 들러왔다고 볼 수 있다.
이들은 한반도 서북지방에서 「신암리형 문화」를 형성하였고, 동북지방에서는 「서포항형 문화」를, 한강을 중심으로한 중서부지역에서는 「암사동형 문화」를 각각 형성하였다. 그리고 한반도 남쪽에서는 「동삼형 문화」를 이루었다. 이 때 신석기 시대이다.
기원전 13~11세기에 시작된 청동기 시대를 맞이해서 요녕지방을 중심으로 「요녕청동기 문화권」이 형성되고, 동북지역에서 한반도에 들어온 이주민은 「무문토기 문화」를 만들었다. 그리고, 또 다른 한반도 내에서는 「한국식 청동기 문화」가 형성되었다.
요녕청동기 문화권에서 예(濊)․맥(貊)족이 형성되고 무문토기와 한국식 청동기 문화권에서 한족(韓族)이 형성되었다. 한족은 다시 마한(지금의 경기도, 충청도, 전라도 일부), 진한(경상북도, 강원도), 변한(경상남도)으로 구분된다.
맥족은 고조선을 열었고, 예족은 부여를 세웠다. 부여계의 주몽 세력은 고조선과 부여를 통합하여 고구려를 세웠으며, 역시 부여계인 온조는 마한으로 내려와 백제를 개국한다. 그리고 어느정도 독자적 문화를 가진 진한은 촌을 통합하여 신라를 건국하였고 변한은 통합된 국가를 이루지 못하고 6가야로 존재하다가 신라에 흡수된다.
크게 볼 때 구석기 시대에 한반도와 남만주에서 생활하던 인류는 1만년 전부터 이주한 신석기인에게 흡수되었을 것이며 이들 신석기인들은 부족 내지 추장사회에 머물다 청동기로 무장한 세력에 의하여 소국으로 발전하였으며, 그 결과 고조선, 부여가 형성되었다.
한반도 내는 비교적 조용하였는데 고조선이 멸망하고 중국 한나라 세력이 들어오면서 그들의 지배층이 분산되고 유민이 이동하는 과정에서 자극을 받아, 또는 그들에 의하여 소국을 통합하여 백제, 신라, 가락이 형성된다.
고조선, 부여, 고구려, 백제는 북방 이주민이 국가를 이루었고, 신라, 가야는 북방 이주민과 중국남부 등 남방 이주민도 있어 혼합된 것으로 생각된다.
고구려, 신라, 백제가 경쟁적으로 발전하면서 상호 교류를 통하여 문화 통합이 서서히 이루어지다가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후 보다 빠르게 문화통합이 진행되어 한민족으로 발전하였고 오늘에 이르고 있다. (mindle49)
이 글을 쓰면서 참고한 문헌들
1. 고고학 과거로 돌아가는 문 (김문호 번역)
2. 고구려의 발견(김용만)
3. 고구려 역사 유적 답사(서길수)
4. 고구려 제국사(서병국)
5. 고려사(주-누리미디어)
6. 고분 벽화로 본 고구려 이야기(전호태)
7. 고조선과 부여의 제문제(한국현대사 연구회)
8. 두산세계백과 사전(동아출판사)
9. 뜻으로 본 한국의 역사(함석헌)
10. 백제사(이도학)
11. 북한문화유적 답사기(유홍준)
12. 북한 선사문화 연구(한창균, 신숙정, 장호수)
13. 사기(정진언, 김창 편역)
14. 삼국사기(최호 역해)
15. 삼국유사(박석봉, 고경식 역해)
16. 서울의 문화재(소울특별시)
17. 우리 신화의 수수께끼(김광순 번역)
18. 우리의 역사 수수께끼(이덕알, 이희근)
19. 유물로 읽는 우리역사(이덕일, 이희근)
20. 이이화 역사 이야기(이이화)
21. 천년의 왕국 신라(김기홍)
22. 조선상과(신채호)
23. 조선왕조 살록(서울시스템-주)
24. 조선왕조 실록(한국서적공사)
25. 한국고대국가의 새로운 체계(이종욱)
26. 한국 고대사의 구성(곽창궝)
27. 한국민족의 기원과 형성(이선복 외 7인)
28. 한국인물 대사전(한국정신문화 연구원)
29. 한국사(한길사)
30. 한국역사 입문(한국역사 연구회)
31. 한국의 역사(이상옥)
32. 한국의 초기국가(이종옥)
33. 그 외 다수의 문헌(mindle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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