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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고슬라비아 빨치산의 모습
티토의 주도로 각지에 흩어져 파르티잔 활동을 계속하던 공산주의자들은 1942년 11월 비하치라는 곳에서 대표자 회의를 열었다. 이 자리에서 이들은 ‘유고슬라비아 민족 해방을 위한 반파시스트 위원회(아브노이;AVNOJ)'라는 다소 긴 이름의 체계적인 조직을 만들었다. 후일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의 모태가 된 아브노이는 강령으로 전후 자유선거를 통한 정부 수립, 그리고 국가 조직은 연방으로 구성한다는 결정을 했다.

요시프 브로즈 티토와 파르티잔 대원들
여기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전후 국가 체제를 연방으로 구성키로 했다는 점이다. 이는 크로아티아에서 출발해 ‘세르비아, 크로아티아 그리고 슬로베니아 인의 왕국’에서 어느 정도 실현되었지만, 알렉산더의 대세르비아주의를 기반으로 한 독재정의 실시로 조각이 난 유고슬라비즘을 계승하는 중요한 단서가 되었다. 특히 크로아티아에 수립된 우스타샤의 크로아티아 자치국이 세르비아 인에 대한 집단 학살로 더 이상 유고슬라비즘을 담을 그릇이 되지 못했기 때문에, 아브노이의 영웅적인 투쟁은 필연적으로 전후의 흐름이 대세르비아주의라기보다는 유고슬라비즘으로 흘러가게 만들었다.

유고슬라비아 빨치산 지도자들. 좌측에 요시프 브로즈 티토(Josip Broz Tito) 그리고 우측에 모사 피야데(Mosa Pijade)
1943년 11월 보스니아의 야이체(Jaice)에서 아브노이 제2차 회의가 열려 유고슬라비아 정부 수립을 선포했다. 이 사건은 페타르 2세가 이끌고 있던 런던의 유고 망명 정부에 치명적인 일격을 가한 계기가 되었다. 이후 연합국측은 런던에 본부를 둔 망명 정부를 공식으로 승인하고 있었지만 무력 지원은 아브노이를 통하는 이중적 태도를 취할 수밖에 없었다. 대세르비아주의는 망명 정부의 위상 추락과 운명을 같이하고 있었다. 아브노이는 2차 회의에서 유고슬라비아 연방 대통령에 이반 리바르 박사를 임명하고 티토는 유고 게릴라군 원수로서 권력의 전면에 나서지는 않았다.

페타르 2세
1944년 5월 전쟁은 그 절정을 향해 줄달음치고 있었다. 독일군은 아브노이의 임시 본부가 설치되어 있던 보스니아의 드르바르를 찾아내 엄청난 공습을 감행했다. 아브노이 본부는 일시적으로 와해되었으며 티토는 겨우 목숨만을 건진 채 탈출해 일단 이탈리아로 피신했다가 그후 영국령인 비스 섬으로 임시 거처를 옮겼다.

독일군의 공격을 피해 이동하는 아브노이
연합국의 주축이었던 영국은 이제 발칸을 중심으로 한 전후 전략을 수립할 시점에 서 있었다. 유고슬라비아를 대표하는 두 개의 정부 존재에 대해 어떤 방식으로든 입장 정리를 한다는 것이 연합국측의 입장이었던 만큼, 티토가 비스 섬에 와 있던 점을 이용하여 본격적으로 중재에 나섰다. 영국은 우선 티토와 런던의 유고슬라비아 망명 정부를 동시에 협상 테이블로 불러내는 외교 노력을 강화하기 시작했다. 마침 영국령에 피신해 있던 티토를 설득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지만, 시종일관 세르비아 민족주의로 일관해 온 페타르 2세의 런던 망명 정부를 설득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특히 망명 정부는 크로아티아 내에서 자행되고 있는 세르비아 인에 대한 학살 사태를 실제보다 훨씬 더 과장해서 보고 있었다. 할 수 없이 영국은 우선 페타르에게 엄청난 압력을 넣었다. 그리고 추축국과 협조를 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 망명 정부의 전쟁 장관이자 체트니크 대장인 미하일로비치와의 관계를 끊고 파르티잔측과 화해할 것을 촉구하고 나섰다. 이 압력을 견디다 못한 페타르는 1944년 6월 크로아티아 출신인 이반 수바시바치 박사를 망명 정부의 총리로 임명했다. 수바시바치 박사는 취임 직후 곧바로 비스 섬으로 가서 티토를 만났다.
양측의 협상은 파르티잔 측이 전투를 통해 연합군의 인정을 받고 있는 상태여서 티토가 유리했다. 양측이 합의한 협정에 따르면 런던 망명 정부는 아브노이를 유고슬라비아 내에 있는 유일한 정치 세력으로 간주하고 파르티잔 게릴라군을 유고의 공식 군대로 인정한다고 했다. 특히 페타르에게 사활이 걸려 있던 전후의 왕정 문제는 다만 전후 적당한 시기에 다시 결정토록 한다는 유보 조항을 달고 있었다. 이는 알렉산더의 독재정을 기점으로 유고슬라비즘을 압도해 왔던 대세르비아 민족주의가 일단 패배했다는 것을 의미했다.

유고슬라비아 빨치산
1944년 여름 발칸에서의 전쟁은 거의 종착지에 도달하고 있었고 독일군은 철수하기 시작했다. 이해 8월 티토는 이탈리아의 나폴리에서 영국 수상 처칠을 만나 전후 대책을 논의했다. 티토는 또 9월이 되자 연합국측에 아무런 상의도 없이 모스크바로 가서 소련군측과 유고의 장래 문제를 최종 논의해 연합국측을 놀라게 했다. 10월 파르티잔은 소련군의 지원으로 마침내 베오그라드를 탈환했으며, 이후 소련군은 유고 북부 지방을 거쳐 중유럽으로 진군하기 시작했다.

좌측 티토 중앙 스탈린 우측 몰로토프
아브노이측은 이미 세르비아,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뿐만 아니라 마케도니아, 코소보에서도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고 있었다. 전쟁 중 이들 지역에 게릴라를 보내 저항 세력을 창설해 두었기 때문이다. 1943년 파르티잔은 지하 운동가로서 능력이 뛰어났던 스베토자르 부코마노비치를 마케도니아에 파견해 파르티잔 조직을 활성화시켰으며 그리스와 알바니아에서도 연대 조직을 구축해 나갔다.
이미 1943년 11월 야이체에서 열렸던 아브노이 2차 회의에서는 마케도니아가 유고의 공화국임을 선언했다. 특히 마케도니아를 점령했던 불가리아가 1944년 철수함에 따라 이 지역의 관할권은 자연스럽게 아브노이측으로 넘어갔으며 소련 정부는 이를 지지하는 내용을 발표했다. 코소보도 비슷한 과정을 밟아 유고로 편입되었다. 전쟁 중 이 지역은 이탈리아와 알바니아의 점령 하에 있었는데, 유고측은 이곳에 저항 세력을 심어 둠으로써 전후의 입지를 단단히 다진 셈이었다.
유고의 파르티잔은 동유럽 공산주의자들 중 가장 유리한 위치에 있었다. 군병력은 무려 80만을 상회하고 있었고 이들 모두 완벽한 지도부의 통제 하에 있었다. 게다가 점령 세력 모두가 유고 본토에서 철수했으며 중앙 정부 조직은 이미 전쟁 기간 중 아브노이에 의해 완전히 수립되어 있는 상태였다.

여성 빨치산
티토가 이끄는 공산주의자의 전횡을 가로막는 조그만 장애물은 바로 전쟁 기간 중 비스 섬에서 티토와 런던 망명 정부를 대표한 수바시비치 사이에 맺은 협정이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베오그라드 탈환 직후인 1944년 11월 1일 양측은 회의를 재개해 다음 사항에 합의했다.
1. 왕의 복귀 여부를 결정하는 인민 투표 때까지 왕의 귀국을 보류한다.
2. 아브노이는 전쟁 중의 추축국 협력자를 제외한 전쟁 전의 의원들도 포함해 국회 형태로 전환한다.
이 협정에 따라 1945년 3월 런던 망명 정부에서 세 사람이 티토 진영에 합류했다. 수바시비치는 외무장관으로, 그리고 세르비아 민주당 지도자인 밀란 그롤과 수바시비치의 측근으로 크로아티아 농민당원인 유라이 슈테이 등이 각료로 입각됐다. 티토를 총리 겸 전쟁장관으로 선출한 새 정부는 총 28석의 각료직 가운데 5석을 제외한 나머지 각료직을 모두 파르티잔에 배분했다. 연합국측은 이러한 구성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화려한 투쟁 경력 때문에 이 정부의 정통성을 승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유고 연방의 국회도 정부와 마찬가지 구성 분포를 보였다. 아브노이가 아예 국회로 전환하면서 이때 포함시키기로 한 전쟁의 의원들은 선출 시기가 1938년이었기 때문에 대부분이 사망한 상태였다. 따라서 아브노이에 더해지는 전(前)의원은 모두 39명에 불과했다. 이 밖에 6개 비공산당과 유력 인사 13명이 합쳐 69명이 새 국회에 합류한 가운데 1945년 8월 임시 국회가 개최되었다.
그러나 이때부터 공산 정부를 수립하기 위한 테러가 재등장하기 시작했다. 물론 이 테러는 공산당 핵심 분자들이 주도했지만 우리가 주목해야 할 사실은 바로 이들이 대부분 세르비아 인이었다는 것이다. 런던 망명 정부의 몰락, 왕정 복귀의 불가능이 기정 사실이 되면서 일견 대세르비아주의가 몰락되는 것처럼 보였지만, 대세르비아주의는 공산 세력 내의 세르비아 인인 알렉산더 란코비치가 주도해 창설한 비밀 경찰이었다. 그 첫 명칭은 인민 방위대(ONZA)로 불려지다가 후에 국가안전부(UDBA)로 개칭되었다. 란코비치가 이끈 이 조직은 끝내 유고슬라비즘의 주창자인 티토와의 격렬한 싸움 끝에 제거되긴 하지만, 공산 유고에서 또다시 유고슬라비즘과 대세르비아주의가 격돌하는 첫 접전이 되었다.

파르티잔 지도부 3인. 좌로부터 알렉산더 란코비치, 티토, 밀로반 질라스
이에 대한 자세한 얘기는 뒤에 언급하기로 하고, 이 비밀 경찰은 우선 공산당 체제를 수립키 위한 엄청난 정치 공작도 자행해 런던 망명 정부에서 복귀한 3명의 각료는 사실상 일을 할 수 없는 상태에 이르게 되었다. 결국 그들은 1945년 8월, 그리고 그 외 2명은 9월에 각각 사임할 수밖에 없었으며, 특히 수바시비치는 가택 연금 상태에 있었다.
이러한 공작 끝에 1945년 11월 총선이 실시되었다. 역사상 가장 비민주적인 투표로 기록될 이 총선에서는 일부 유권자들은 아예 전쟁 중 추축국에 협조했다는 이유로 투표권을 박탈당했다. 오직 공산 정부측의 판단대로 찬성표만 던질 성분의 사람들만 투표가 가능토록 선거 명부가 만들어졌다. 선거구에서는 투표 조작과 폭력이 난무했다. 사실상 공산당에 반대하는 유권자는 근본적으로 투표권도 부여받지 못했다. 이에 힘입어 공산 정부 수립을 위한 투표에서는 유권자의 88%가 유효 투표, 그리고 유효 투표 가운데 90%가 찬성표로 발표되었다.
1945년 11월 제헌 국회가 구성되어 왕정을 폐지하고 공산주의에 기반한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이 수립되었다. 그리고 새 유고슬라비아는 연방제도를 근간으로 6개 공화국, 2개 자치주로 구성되었으나 전권은 모두 공산당이 쥐고 있었다.

유고슬라비아 정부 수립을 발표하는 티토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의 국기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의 국장
전후 공산 정권이 수립된 유고슬라비아에서는 공산화와 집단화가 본격적으로 추진되어 1947년까지는 산업 시설의 대부분이 정부 통제 하에 들어갔다. 집단 농장화도 본격 추진되었으나 농민들의 거센 반발에 부딪혔다. 이 때문에 농업 생산이 급격히 떨어졌다. 심지어 농업 총생산이 집단 농장 설치와 함께 무려 전쟁 전의 수준보다 47%까지 떨어졌다. 서슬이 퍼렇던 공산주의자들도 1953년부터는 집단 농장화 정책을 완화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53년 3월부터 농민들은 자발적으로 집단 농장을 떠날 수 있었으며 그들이 처음에 보유하고 있었던 재산은 다시 가지고 나갈 수도 있었다. 물론 개인이 보유할 수 있는 토지는 아무리 많아도 10헥타르(1제곱킬로미터)를 넘지 않아야 했다.
어떻든 집단 농장화는 주춤거릴 수밖에 없었다. 정부의 완화 조치와 함께 유고슬라비아의 집단 농장 이탈 세력이 급격히 늘어났다. 1952년 전체 농가 중 집단 농장 비율이 25%까지 올라갔지만, 1957년에는 이 비율이 9%로 떨어졌다.
집단 농장화뿐만 아니라 이러한 제반 문제점들을 극복하는 한 방편으로 공산당에 의한 권력의 탈집중화가 시작된다. 1952년 공산당은 보다 느슨한 느낌을 주는 유고슬라비아 공산주의자 연맹(LCY)으로 개칭했다. 그러나 공산당, 행정, 경제 등의 제분야에서 탈집중화가 추진되면서 유고슬라비아의 고질적인 민족 문제가 다시 제1의 의제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탈집중화는 베오그라드 중앙 정부에서 각 공화국 정부로 많은 권력이 이양되게 했고, 당연히 이러한 분리 정책은 공산주의의 이데올로기 밑에서 잠시 가라앉아 있던 각 민족주의의 불길에 폭약을 던지는 구실을 했다. 이와 더불어 경제적으로 부유하고 개발된 선진 지역인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와 보다 후진적인 세르비아, 그리고 아주 뒤떨어진 마케도니아, 몬테네그로, 보스니아와의 갈등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계기가 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