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도 법성 중앙교회에서 저희가족 찬양연주 때
"쉐마" 박추재 아줌니가 색소폰연주를 하는 동영상입니다.
그 날 맡은 임무는 드럼이었지만
색소폰도 연주 했었는데
많이 긴장했는지 평소 실력을 발휘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초보자치고는 수준급의 연주 아닌가요?
이 거 올렸다고 이 아줌니 쌩난리 피우는것은 아닌지.....
요즘 우리 마눌님인 이 쉐마가
카페에 잘 안들어오는것 같으니까 이 페이지 넘어갈 때 까지
쉿!! .......(김형호 글임)
(이허 겸의 부인은 안산대부인 경주김씨로 가야국의 가락김씨
김수로왕 허황옥(인도여인)의 후손이다 큰아들 거등은 대을
잇기 위해 김씨로 아래 두아들은 여자 성씨인 허씨 성을 따름)
인천(옛지명 소성,경원(인주))이씨는 태인허씨의 후손으로 신라
경덕왕때 아찬이란 벼슬을 한 허 기라는 자가 당나라 사신으로
갔다가 당의 안록산의 난으로 당나라 현종이 촉나라로 피신하고
다시 궁으로 돌아오는데 호위한 공으로 현종에게 이씨성을 하사
받아 이허씨라는 복성을 쓰고 신라로 돌아온다
이허 기에게 신라 경덕왕이 다시 치하하고 벼슬을 올려 소성백에
(소성은 인천) 봉한다
인천이씨의 시조로 경원이씨.태인허씨 복성을 쓴 10세손
이허 겸이 이자겸의 선조이나 후에 이자겸 경원이씨는
문중에서 사라지고 이허겸을 시조로 모신 인천이씨가 등장한다
이후 김해김씨.태인허씨.인천이씨는 같은 혈족이라며 종친회명을
“가락종친회”라 하였다)
숙종의 경원이씨 배제로 허송세월을 보내고 있던 이자겸은
1108년 집안및 처가의 배경으로 지문하성사란 관직에 다시
복귀하고 2년후 둘째딸(순덕왕후)이 16대 예종의 왕비가 된다
비로 간택되기 까지는 장인 최사추와 동서지간인
유인저(숙종의 처남이자 예종의 외숙부)의 영향이 컷다
이자겸은 이때부터 초고속 승진를 한다
1109년 예빈경 추밀원 부사를 시작으로 조정의 요직을
두루 역임하며 승진에 승진을 거듭하여 명실상부한
왕실의 외척으로 등장한다
왕비가 된 딸이 왕의 원자(17대 인종)까지 낳자
이자겸의 지위는 더 높아지게 된다
가문대대로 정략결혼의 최고의 명예와 전성기를 바탕으로
이자겸은 고려 16대왕 예종에게 자신의 둘째딸을 시집보내
예종의 장인이 되고 원자까지 낳자 더 막강한 권력을 가지고
1115년 예종10년에 외손자인 인종을 태자로 책봉하게 한다
1122년 예종이 죽고 다른 왕실 세력들간의 왕권 다툼이
벌어지자 이자겸이 왕궁을 먼저 장악하고 자신의 외손자이자
예종의 맏아들 인종을 14세에 왕으로 즉위시키는데
공을 세운다
참지 정사 상서좌복야(2품)라는 재상의 반열에 오르면서
익성공신이라는 공신호까지 받게 된다
그리고 어린 왕이 외할아버지인 이자겸의 등급 예우를
신하들에게 거론하자
이자겸의 위세에 눌린 신하들이 왕에게 간하기를
이공이 왕의 외할아버지로 친족임을 거론하며
“임금에게 올리는 글에도 신이라 칭하지 않아야 하며
연회에도 백관과 함께 뜰에서 하례치 말게 할 것입니다“
고 하였으나
개경출신 문벌귀족 대제 김부식의 견제 세력이 불가하다
하니 이에 따랐으나 왕은 이자겸을 한양공으로 삼았다
이어 평장사 정준의 딸인 이자겸의 모친이 사망하자
이자겸은 벼슬을 그만 두고 모친 상제를 모시게 된다
모친 또한 성품이 탐혹스럽고 서민들의 재물을 강매하여
값을 쳐주지 않고 노비들을 시켜 횡포를 일삼는 일을
서슴치 않았으매 사망소식에 서민들이 기뻐했다
어린 인종은 다시 추밀원사 박승중을 보내어
이자겸에게 교지와 하사품을 내리면서 이제 그만 상복을
벗고 상제를 마칠 것을 청하면서
“임금이 신하에게 이름을 부르지 않음은 대개 공덕을
표명하고 친현을 우대하는 예우인바 선왕이 부탁하였고
어린 내가 존경하는 사람으로 큰 직책을 맡고 있다면서
이제부터 내리는 조서는 이름을 칭하지 않고 경이라고도
칭하지 않을 것이니 이것이 비록 이례이나 역시 옛 법을
따름이라“ 하면서
양절익명공신에 중서령(종1품) 영문하상서도성사 판이병부
서경유수사 조선국공이라는 최고의 직위를 책봉하게 된다
모든 백관의 우두머리로 문신과 무신의 인사권을 장악하게
된 이자겸은 자기 처와 아들들을 모두 요직에 앉게 한다
처는 진한 국대부인, 아들 이지미는 비서감 추밀원부사,
이공의는 상서형부시랑, 이지언은 상서공부낭중겸 어사잡단
이지보는 상서호부낭중지공방사, 이지윤은 전중내급사
이지원은 합문지후로 삼고 아들중 승려가 된 의장을 수좌로
삼아 전국의 승려들을 통제하게 했으며 불교계도 장악하였다
이같은 인사에 왕이 신하 이자겸에게 건덕전 문밖으로 친히
나가 조서를 전할 정도였으니 문무백관들 또한 뜰에서
축하하고 다음은 이자겸의 집에 나아가 축하를 하였다
이자겸이 직위에 오른날 개경은 번개와 천둥이 치고 많은
비가 내려 길에 물높이가 1장(丈)이나 되었다
이러한 시점에 주위의 오랑캐들은 고려를 수시로 넘보며
침공을 하려 하니 이자겸 자신의 기득권 세력과 권력유지를
위해 오랑캐 침공이 두려운 나머지 자신이 나라의 모든일을
맡고 있는 지군국사라 자칭하며 오랑캐(금나라)에 표를 올리고
토산물을 바치면서 사대주의 군신관계 정책으로 일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