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문학에서 근대성(modernity)에 대한 문학적 비판을 문제 삼을 때, 리얼리즘 계열체와 모더니즘 계열체가 논의의 주된 대상으로 부상된다. 전자의 경우, 자본주의를 부르조아 계급에 의한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착취로 보고, 계급투쟁에 의한 자본주의 토대의 전복을 통해 소외되고 억압받는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중심이 되는 사회를 건설하고자 하는 것이다. 한국문학사에서 이 계열체는 20년대 최서해와 조명희에서 출발하여 30년대 이기영의 『고향』, 한설야의 『황혼』을 거치면서 일제강점기를 관통하다가, 해방 이후 좌·우익의 대결로 인해 주춤한다. 그러다가 70년대 황석영의 「객지」에 등장하는 '다이너마이트'로 재부활하여, 80년대의 민중소설로 만개한다. 한편 후자의 경우는, 자본주의의 존재를 인정하고 자체의 발전 과정을 염두에 둔 채 내부 모순을 지양하고자 하는 것으로, 30년대 이상, 박태원, 김기림을 중심으로 한 모더니즘에서 출발하여 90년대의 포스트모더니즘으로 연결된다.
본고에서는 한국문학사의 두 계열체 중, 후자인 모더니즘 계열체에 나타나는 근대성 비판의 측면을 살펴보고자 한다. 흔히, 모더니즘을 두고 근대성 구현이라는 측면에 접근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20세기 초에 대두된 예술운동으로서의 모더니즘은 근대성 비판을 그 핵심 내용으로 삼고 있다. 모더니즘 운동의 출발점으로 알려져 있는 인상파와 상징주의는 모두 근대적 예술에 대한 부정에서 출발한다. 인상파의 경우, 특정 측면을 강렬하게 묘사함으로써 원근법에 기초한 이전의 사실주의적인 회화를 부정하였고, 이것은 피카소로 상징되는 입체파의 다원시점으로 심화되면서 칸딘스키 류의 추상미술로 발전한다. 2장에서 자세히 살펴보겠지만, 이처럼 20세기 초에 대두된 예술운동으로서의 모더니즘은 기존의 전통적인 예술기법을 파괴하면서 근대성을 비판하는 것을 그 본래의 몫으로 삼고 있다.
이처럼 근대성 비판으로서의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에 주목할 때, 한국문학사에 있어서 세 명의 난쟁이에 초점을 맞출 필요가 있다. 30년대의 이상, 70년대의 조세희, 그리고 90년대의 최수철의 난쟁이가 그것이다. 일제 강점기에 이상의 난쟁이는 '레몬을 달라'고 외치면서 정상 발육을 하지 못하고 '어린아이 해골'로 형해화되어 갔다. 70년대 조세희의 난쟁이는 '뫼비우스 띠'와 '클라인의 병'으로 상징되는 세계를 꿈꾸면서 굴뚝에서 자살하였다. 그리고 80년대 말 최수철의 난쟁이는 진공 속을 자유롭게 날아다닌다.
이 세 명의 난쟁이는 그들이 처한 근대적 상황의 특질에 따라 표정을 달리하는데, 바로 그 표정은 우리 문학사에서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논의와 관련하여 중요한 준거틀을 제공하고 있다. 본고에서는 이들의 표정 변화에 대한 고찰을 통해, 첫째 한국 문학에서 모더니즘 계열체의 근대성 비판 양상과 그 전개과정을 검토하고, 둘째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의 질적 편차를 검토하고자 한다.
2. 근대성 비판 운동으로서의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
모더니즘 계열체의 근대성 비판의 측면을 검토하기 위해서는 먼저 근대성에 대한 개념 규정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 자본주의의 전개과정을 증기기관차→비행기→우주선의 시대로 구분한 제임슨의 비유적 표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평면에 놓인 레일의 안과 밖의 구별처럼, 증기기관차의 시대는 평면기하학의 원리에 입각하여 선명한 이항대립에 기초하고 있다. 레일 안은 중심부요 레일 밖은 주변부로, 중심부에 의한 주변부의 철저한 배척을 그 특징으로 한다. 두 번째 단계인 비행기의 시대는 안과 밖의 구분이 무화되는 뫼비우스 띠와 클라인의 병으로 상징되는 위상기하학의 원리에 입각하여 이항대립이 서서히 무화되어 가는 시대이다. 하늘에서 볼 때, 평면은 입체에 불과하고 따라서 평면의 안과 밖의 구분은 입체에서는 사라진다. 세 번째 단계인 우주선의 시대는 이항대립이 완전히 해체된 탈중심의 공간으로, 달나라의 세계이자 진공과 같은 곳이다. 광대한 우주 공간에서 볼 때, 지구는 하나의 덩어리에 불과하며 그 속에서 어느 것이 중심이고 어느 것이 주변이라는 구별은 아무런 의미를 띄지 못한다.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이 비판하는 근대성의 특질은 증기기관차라는 사회적 상징물에 압축되어 있다. 곧, 근대성은 이성중심주의(logo-centrism)에 입각한 이항대립체계를 그 핵심요소로 삼고 있다. <인간, 이성, 의식, 남성, 도시>의 중심부와 <자연, 비이성, 무의식, 여성, 농촌>의 주변부의 이항대립체계는 17-8세기 등장한 계몽사상에 그 사상적 기반을 두고 있다. 계몽사상은 칸트의 선험적 이성, 뉴턴의 자연과학, 다윈의 진화론으로 압축될 수 있다.
칸트의 인식관은 "내용 없는 사상은 공허한 것이며, 개념 없는 직관은 맹목적이다"로 요약될 수 있다. 경험적 지각에 의해 대상을 인식하고, 그것을 오성과 이성에 의해 개념화하고 법칙화하는 인식 능력을 인간만이 지니고 있다고 함으로써 칸트는 인간의 인식을 극대화한다. 인간의 이러한 이성적 인식능력을 선험적(a priori)인 것으로 규정한 칸트에 의해, 근대 이전에 자연의 일부로서 존재하던 인간은 이제 세계의 중심이자 주체(subject)로 부상한다. 여기에 자연의 법칙은 기계처럼 결정되어 있으며, 인간이 그 법칙을 발견하면 자연을 지배하고 정복할 수 있다는 뉴턴의 기계론적 자연관에 입각한 자연의 과학화, 그리고 다윈의 진화론에 바탕을 둔 진보에의 믿음이 결합되면서, 근대 이성적 인간 주체는 객체(object)로서의 자연을 지배하고 재가공하면서 자본주의를 태동시킨다.
따라서 근대 자본주의는 이성적 인간주체가 중심부로 작동하면서 주변부인 객체로서의 자연을 지배하는 이항대립체계를 구축한다. 이러한 이항대립체계는 자본주의 초기 단계에는 이전에 볼 수 없던 물질적 풍요로움을 제공하면서 인간다운 삶을 가능하게 했지만, 19세기말에 이르러 이성의 도구화가 진행되면서 폭력적인 형태로 변질된다. 그 결과 인간에 의한 자연의 소외와 인간에 의한 인간의 소외 등의 문제점을 배태하게 된다.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은 이런 이성중심주의에 입각한 이항대립체계에 대한 비판 운동의 하나로, 각각 비행기의 시대와 우주선의 시대를 지향한다.
2-1. 모더니즘과 근대성 비판
20세기 초 대두된 예술운동으로서의 모더니즘은 상대적(relative) 지식을 사상적 기반으로 삼아 이항대립체계를 비판한다. 상대적 지식은 뉴턴 물리학(고전물리학)을 비판하고 나온 20세기초의 과학혁명에 해당되는 아인슈타인 물리학에 기초하고 있다. 그 특성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고전 물리학은 수학적 명증성을 지닌 절대보편적 진리의 확립이 목표이며, 그 진리로 모든 객관적 현상을 설명하고자 한다. 그러나 상대성 이론에서는 진리는 관찰자의 좌표계의 차이에 불과한 것이기에 진리를 상대적인 것으로 본다. 더불어 단단한 원자라는 실재(reality)도 더 이상 단단한 구조가 아니라, 전자와 원자핵으로 나누어져 있다는 실재회의론을 주장한다.
2) 고전물리학의 3차원 절대공간은 현대물리학에서 광속도 개념에 의한 4차원 시-공 연속체로 대체된다. 3차원 절대 공간에서의 운동은 마치 항아리 속에서 움직이는 것으로, 정역학적 운동이다. 여기서 시간은 인간 경험을 초월한 선험적인 것으로 설정되고, 그 정해진 시간과는 분리된 절대 공간 속에서 운동이 행해지면서, 운동은 절대 공간의 한계를 벗어날 수 없다. 그러나 4차원 시-공 연속체에서는 광속도에 의해 과거-현재-미래라는 객관적 시간 단위의 구분이 부정되면서, 시간은 공간과 밀접한 관련을 맺게 된다. 이에 따라 인과관계도 부정된다.
3) 평면 기하학인 유클리드 기하학은 입체 기하학인 비유클리드 기하학으로 대체된다. 유클리드 기하학이 주장하는 점, 직선, 평면 등의 개념은 인간의 경험 세계에서는 정합성을 띠지만, 시각을 무한한 우주로 확대할 때, 그것은 비유클리드 기하학으로 대체된다. 곧 직선은 굴곡된 직선으로, 평면은 굴곡된 평면으로 대체되며, 평행선도 둘 이상 존재하게 된다. 이러한 차이는 두 점간의 최단 거리가 직선에서 대원으로 변화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4) 실재의 이중성은 수학의 재현적이며 묘사적인 기능을 부정하고, 숫자의 추상화를 통해 그 반사적 기능을 중시하는 것으로 연결된다. 실재, 위치, 속도, 색채, 크기 등을 묘사하기 위해 사용되는 모든 단어나 개념은 불확정적이며, 숫자 그 자체가 독립적 기능을 갖는 것이다.
이러한 과학혁명에 기초한 상대적 지식은 그것이 단순한 과학의 영역에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근대 이후 인식관이 변혁을 불러일으키면서 모더니즘의 사상적 기반으로 작동한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흔히 모더니즘의 미학적 기반으로 언급되는 프로이드의 무의식과 흄의 불연속적 세계관 등은 모두 이 상대적 지식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이를 보다 자세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이성적 인간 주체에 결정적 타격을 가한 프로이드의 정신분석학은 실재 회의론과 관련이 있다. 인간은 의식과 무의식으로 쪼개져 있으며, 의식은 무의식에 의해 조종된다는 프로이드의 주장은 실재 회의론과 관련하여 인간이 의식적이고 이성적 존재라는 것에 대한 회의에서 비롯된 것이다. 프로이드의 이 무의식에 의해, 초월적 이성이라는 절대 보편적 진리가 모든 것을 지배하며, 그것을 가장 확실히 담지할 수 있는 것이 이성적 주체로서의 인간이라는 믿음은 붕괴된다. 모더니즘은 이성적 주체를 부정하고, 인간의 욕망에 있어서 시민화되지 않고 표현되지 않은 무의식의 욕망을 표출함으로써 도구적 이성으로 전락한 근대 인간주체를 비판한다. 이로 인해, 모더니즘 문학은 언술 주체가 분열되면서 동시에 언술 체계도 파괴된다.
한편, 모더니즘에서 중시되는 자기 반사적(self-reflexive) 언어도 상대적 지식과 관련이 있다. 근대 이성적 주체는 그의 이성적 인식능력에 의해 대상을 완전히 지배, 통제할 수 있으며, 객관세계의 실재 역시 그 확실성을 담보하고 있다고 믿는다. 그리하여 언어를 통해 대상을 재현할 수 있다는 재현적(reference) 언어관을 주장한다. 그러나 '숫자의 추상화'와 더불어, 기호(symbol)가 사물을 재현한다는 것을 부정하고 기호(signe)는 기표(signifiant)와 기의(signifi )의 자의적이고 계약적인 관계라고 주장한 소쉬르의 실재회의론적 언어관이 대두되면서, 언어는 더 이상 객관세계의 실재를 묘사, 재현할 수 없으며, 그 자체가 자율성을 띠게 되는 것으로 변한다. 객관세계의 실재가 알 수 없는 것일 때, 이들 대신에 언어 그 자체를 대상으로 삼는 것은 불가피하다. 따라서 모더니즘에서는 더 이상 특정한 주체에 의하여 특정한 의도를 가지고 글쓰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목적이자 정열인 글쓰기인 자동사적 행위로서의 글쓰기가 된다. 마치 형식주의자들이 자신을 구성하는 장치를 드러내는 '낯설게하기(defamliarization)' 기법과 동일하게, 모더니즘은 언어의 자율적이고 자기반사적 기능을 통하여 상투적이고 관습적인 언어의 자동 반응성을 폭로함으로써 새로운 인식관을 획득하는 것이다.
다음, 흄의 불연속적 세계관 역시 상대적 지식과 관련이 있다. 흄은 실재회의론에 입각하여 이전의 단일한 세계를 세 개의 동심원으로 나누어, ① 제일 바깥을 종교, 윤리의 세계로, ② 가운데를 생명의 세계로, ③ 제일 중앙을 수리물리학의 세계로 명명하고, 각각의 동심원은 불연속을 이룬다고 본다. 그런데, 근대 인간은 ②인 생명의 세계만이 실재라고 주장하면서, 그 세계의 논리로 ①과 ③을 설명함으로써 오늘날의 혼돈이 시작된 것이라 비판하다. 그러면서 예술을 생명적인 것과 기하학적인 것으로 구분하고, 새로운 예술은 질퍽거리는 생명적이고 인간적 요소를 배제하고 엄숙한 직선이나 곡선 같은 기하학적 완전성을 구유하기 위하여 기하학적 예술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흄의 이러한 주장은 칸딘스키 류의 추상예술과 이미지즘의 바탕이 되면서, 동시에 모더니즘 문학에 나타나는 개인적 주체로서의 인간을 비인간화하는 기하학적 추상으로 연결된다. 곧 도구적 이성으로 전락한 인간을 기존의 담론으로는 표현할 수 없기에, 그러한 비판의 한 방법으로 인간을 기하학적으로 처리하여 그것을 사물화 내지 단자화시킴으로써, 일상적인 시각에서는 인식되지 않는 근대 이성적 인간의 모순을 역설적이고 다면적인 수법으로 충격을 가하는 것이다.
이처럼 모더니즘은 상대적 지식에 입각하여 근대성을 비판하는데, 흔히 모더니즘의 미학적 장치로 언급되는 공간화, 몽타주, 패러독스, 아이러니 등도 이 상대적 지식에 기반을 두고 있다. 인과관계에 기초한 선조적 시간성을 부정하고 과거-현재-미래가 응축된, 경험의 동시성을 추구하는 공간화나 몽타주의 경우, 4차원 광속도의 개념과 비유클리드 기하학과 연결되어 있다. 그리고 야누스의 얼굴을 하고 있는 현실의 불가행성으로 인해 세계의 역설적, 상대적 다면성을 추구하는 아이러니와 패러독스 역시 실재 회의론과 관련이 있다. 요컨대, 모더니즘은 상대적 지식에 기초하여, 주체 분열과 언술 체계의 분열을 일으키면서 이성중심의 이항대립체계를 비판하고, 안과 밖의 구분 곧 이항대립이 무화된 비행기의 시대를 지향한다.
2-2. 포스트모더니즘과 탈중심
포스트모더니즘은 제임슨의 비유에 의할 때, 자본주의 발달 단계에 있어서 우주선의 시대를 지향한다. 포스트모더니즘 역시 하이젠베르그와 보어의 양자 역학 및 상보성 이론이라는 과학혁명에 기초하고 있다. 불확정성 이론으로 대표되는 하이젠베르그 물리학에 이르면 과학의 탐구 대상인 자연은 기계가 아니라 살아있는 유기적 생명체로 취급된다. 따라서 자연은 그 흐름이 불확실하고 유동적이기에, 더 이상 이전처럼 기계적 결정론은 적용되지 않는다. 자연을 지배하는 진리는 불확정적이며, 이에 따라 객관세계의 실재도 불확정적이다. 인간은 이제 자연을 지배할 수 없고, 자연과 더불어 공존해야 한다. 이러한 과학혁명은 탈중심의 논리로 연결되면서, 이항대립의 해체를 통해 인간과 자연이 상호공존하는 세계를 지향하도록 하는 인식관의 혁명으로 연결된다.
포스트모더니즘은 불확정성이라는 새로운 인식관에 입각하여, 지금까지 명료하고 절대보편적인 것으로 인식되던 진리를 거부한다. 이항대립에서 중심부를 차지하던 모든 것은 부정된다. 신도, 이념도, 이성적 주체도, 서양중심주의적 사고도 부정된다. 그럼으로써 중심부는 그 존립근거를 상실한다. 세계를 획일적으로 지배하던 절대 보편적 진리가 거부됨으로써 전체성과 인과율, 결정론 등은 부정된다. 세계는 파편화되고 단편화된 조각 덩어리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불확정성은 아무런 대안 없이 세계를 무질서하고 혼란스러운 것 그 자체로만 파악하는 것인가? 이 물음은 포스트모더니즘이 '해체를 위한 해체'에 불과한 것인가라는 물음에 직결된다. 이에 대한 해답을 라캉의 주체구성이론에 대한 검토를 통해 찾을 수 있다.
라캉에 의하면, 인간의 의식은 무의식의 욕망에 의해 조종된다. 의식적이며 이성적인 주체는 선험적으로 주어지는 의미의 근원이 아니라 언어활동을 통해 관계를 맺는 타자(The Other)에 의해 구성되어지는 개체성(Personality)에 불과하다. 곧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어머니의 모체로부터 분리되면서 무엇인가를 상실했다고 느끼는 원초적 결핍의 존재이다. 따라서 인간은 그 결핍을 보상해 줄 대체물을 끊임없이 찾게 되는데, 그 대체물을 어머니나 거울에 비친 자기 영상을 통해 획득하는 단계가 거울상(mirror stage)의 단계 혹은 상상적(imaginary) 단계이다. 이 단계는 언어를 배우기 이전의 유아기에 해당되는데, 어린 아이는 거울에 비친 자기 영상을 통해 자신이 찢어져 있다는 환영을 극복하면서 최초의 동일성(identity)을 획득한다. 이 단계를 지나 언어활동을 통해 관계를 맺는 사회문화적 영역으로 진입하게 되는데, 이것이 상징적(symbolic) 단계이다. 이 진입과정에서 어린아이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라는 단계를 필연적으로 거치는데, 이것은 아버지의 이름으로 상징되는 사회문화의 규범체계를 받아들이는 과정에 해당된다. 이 과정에서 상상계에서 이룩된 동일성이 무의식으로 억압된다. 억압된 무의식은 언어로 관계를 맺는 상징계에서도 동일성을 유지하기 위하여 그 대체물을 찾는데, 이 때 대체물은 사물 그 자체가 아니라 그 사물의 이미지, 상징이다. 무의식의 욕망의 기표는 상징계의 이미지에서 그 대체물을 찾아 기의를 획득한다. 그러나 기의 획득, 곧 욕망 충족은 일시적인 것이면서 허상에 불과하다. 무의식의 욕망이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것이 자기 동일성의 세계이며, 그 세계가 어머니의 자궁 속 같은 것이기에 욕망의 기표는 상징계에서 결코 그 기의를 만날 수 없다. 따라서 욕망의 기표는 상징계에서 그 기의를 만나자마자 그것과 결별하면서 도달할 수 없는 기의를 찾아 끝없이 미끄러진다.
끝없이 미끄러지는 욕망의 기표가 궁극적으로 도달하고자 하는 것이 의식과 무의식, 이성과 비이성이 분화되기 전의 상태인 어머니의 자궁 속 같은 공간이다. 인류사적 관점에서 그 공간은 인간과 자연이 조화롭게 공존하는 동일성의 공간이자, 오늘날의 우리가 반드시 회복해야 할 시원(始原)의 공간이다. 또한 그 공간은 오늘 우리 사회의 병폐를 극복하고 도달해야 할, 우주선으로 상징되는 탈중심의 공간이다.
불확정성에 기초한 무의식의 욕망의 기표는 이성적 주체가 지배하는 이항대립체계를 해체하면서 탈중심의 열린 공간을 향해 끝없이 미끄러져 간다. 미끄러져가는 기표가 사회적 상징체계가 지배하는 의식상의 언술을 뚫고 분출되면서 이성적 주체 등의 절대보편적 진리가 지배하는 담론을 파괴한다. 욕망의 언술은 기표의 연쇄사슬 형태로 분출되면서 상징계의 모든 기의를 거부한다. 그런 욕망의 언술을 라캉은 상상적 언어로, 크리스테바는 기호적인 것(The Semiotic)으로 명명하였는데, 따라서 이 욕망의 언술에 입각한 글쓰기는 의식상으로는 이해되고 해석될 수 없는 정신분열텍스트의 형태를 띨 수밖에 없다. 이처럼 포스트모더니즘은, 절대보편적 진리를 거부함으로써 이항대립체계가 해체된 탈중심의 공간을 지향하는 해체적 글쓰기라 할 수 있다.
3. 상대적 지식과 모더니즘: 이상 문학
한글-일본어-한글로 전개되는, 모더니즘 문학으로서의 이상문학은 근대성에 대한 비판을 그 핵심으로 삼고 있다. 처녀작인 한글장편소설 {十二月十二日}에는 칸트의 선험적 이성에 대한 비판과 관련된 언술이 도처에 내재해 있다.
그는 [반가워하지 아니하면 안된다―사랑하지 아니하면 안된다―믿지 아니하면 안된다]등의 [……지 아니하면 안된다]는 의무를 늘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이 [……지 아니하면 안된다]라는 것이 도덕성에 있어 어떠한 좌표 위에 놓여 있는 것인가를 생각해 볼 수는 없었다―따라서 이 그의 소위 [의무]라는 것이 참말 의미의 [죄악]과 얼마나한 거리에 떨어져 있는 것인가를 생각해 볼 수 없었는 것도 물론이다. 사람은 도덕의 근본성을 고구하기 전에 우선 자기의 일신을 관념 위에 세워 놓고 주위의 사물에 당한다.
칸트의 인식론은 이성의 사실로서의 도덕률과 정언적 명령으로 이어진다. 칸트에게서 도덕률이란 "모든 이성적 존재자에 대하여 보편적으로 타당한 법칙"으로, 이 도덕률을 지키는 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절대적 의무이다. 따라서 도덕률은 '무엇무엇을 하여야 한다'라는 정언적 명령의 형태를 띠게 된다. "너의 행위의 격율이 너의 의지를 통하여 보편적 자연법칙이 되게끔 행위하여라"는 칸트의 발언은 이성적 주체로서의 인간에 대한 의무를 강조하는 근대의 도덕률에 해당된다.
이상문학은 칸트의 이러한 인식론을 비판하고 있다. 위의 인용문에서 "관념 위에 세워 놓고 주위 사물에 당한다"라는 것은, 이성이라는 절대 보편적인 개념적 장치에 의해 사물을 인식해야 한다는 칸트의 인식론을 정면으로 비판하는 것이다. 더불어 이성에 의해 설정된 보편적 입법으로서의 도덕률에 대한 복종, 곧 "……지 아니하면 안된다"라는 정언명령으로서의 의무도 부정하고 있다. 이처럼 이상문학은 근대성의 핵심 사상인 칸트의 인식관을 부정하는 자리에서 출발하고 있다.
흔히 이상문학 중에서 [실화]에 언급된 다음 언술을 두고 이상 문학 전체를 왜곡하여 해석하는 경우가 있다.
「슬퍼? 응―슬플밖에―二十世紀를 생활하는 데 十九世紀의 道德性밖에는 없으니 나는 永遠한 절름발이로다. 슬퍼야지―萬一슬프지 않다면―나는 억지로라도 슬퍼해야지―슬픈 포우즈라도 해 보여야지―(중략)웃어야 할 터인데 筋肉이 없다. 울려야 筋肉이 없다. 나는 形骸다. 나―라는 正體는 누가 잉크 짓는 약으로 지워 버렸다. 나는 오직 내―痕迹일 따름이다.」(강조-인용자)
지금까지 이상 문학에 대한 연구는 이 구절에 기초하여, 이상이 19세기의 도덕성을 가지고 있으면서 20세기의 모던 보이로서 지냈다고 평가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평가는 이상 문학에 대한 본질적 접근을 차단하는 중요한 장애 요소였다. 무엇보다 강조되어야 할 사항은 모더니즘 문학으로서의 이상 문학의 글쓰기는 기존의 언술체계를 파괴하는 기호놀이의 일종이라는 점이다. 그러므로 사실주의 문학에 대한 반영론적 접근처럼, 이상문학의 언술체계의 기표를 당대의 기의와 관련하여 일대일로 해석하는 것은 이상문학을 오독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위의 언술을 제대로 해석하기 위해서는 이상 문학 전체와 관련하여 상호텍스트적인 검토가 필요하다. 이 때 주목되는 것이 수필 [정조]이다.
이런 境遇―즉 [남편만 없었던들] [남편이 용서만 한다면' 하면서 지켜진 안해의 貞操란 이미 간음이다. 정조는 禁制가 아니오 良心이다. 이 境遇의 良心이란 道德性에서 우러나오는 것을 가르치지 않고 [絶對의 愛情] 그것이다. (중략) 내가 이 世紀에 容納되지 않는 最後의 한꺼풀 幕이 있다면 그것은 오직 [간음한 안해는 내어 쫒으라]는 鐵則에서 永遠히 헤어나지 못하는 내 곰팡내 나는 道德性이다.
여기서 '정조'는 19세기의 봉건적 윤리 도덕관에 기초한 육체적 정조가 아니라, '절대의 애정'이라는 정신적 정조를 의미함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간음'은 정신적으로 추구하는 절대적인 것에 대한 애정을 배반하는 것에 해당된다. 그런 간음을 저지른 '안해'는 절대로 용납할 수 없다는 철칙이 바로 '19세기의 도덕성'의 내용이다.
그렇다면, 이상문학이 근대성을 비판하고 그 대안으로 욕망하는 일종의 '정신적 정조'는 무엇일까? 이 점을 밝히기 위해서는, 한글→일본어→한글로 전개되는 이상문학의 글쓰기의 원형 내지 무의식적 욕망의 원형을 재구성할 필요가 있는데, 이 때 언술체계의 분열이 가장 심한, 다시 말하자면 무의식적 욕망이 심하게 표출되고 있는 텍스트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상문학에서 그 텍스트는 일본어로 쓰여진 시작품들이며, 그 중에서도 분열이 가장 심한 [삼차각 설계도]이다. [선에 관한 각서]라는 제목 하에 7편이 묶여 있는 이 시편들은 뉴튼 물리학과 유클리드 기하학을 비판하고 아인슈타인 물리학과 비유클리드 기하학으로 표상되는 상대적(relative)지식을 지향하고 있다.
①의 1부터 0까지의 숫자의 나열은 "한정된 정수의 수학의 헐어빠진 습관을 0의 정수배의 역할로 중복"하는 근대 과학과 관련이 있다. 이것을 '스펙톨'화(②)하면 시간의 좌표가 결여된 3차원 절대공간의 3개의 축(③)으로 나타난다. ④에서 "사람은영겁인영겁을살리수있는것은생명은생도아니고명도아니고광선인것"은 3개의 절대공간 축에 속도를 부여한 4차원시-공 연속체를 나타내고 있다. ⑤는 3차원 절대공간의 "생리작용의변이"에 해당된다. 괄호 속은 일종의 보충설명인 바, 우주란 근대 과학적 지식으로는 표시할 수 없으므로(ⓐ), 그러한 숫자를 버리라는 것(ⓑ)이다. ⓒ에서는, 4차원 시-공 연속체에서는 원자는 더 이상 단단한 실재가 아니라 전자와 양자핵으로 쪼개져 있음을 제시하고 있다. ⓓ와 ⓔ는 3차원절대공간의 '입체'와 그 속에서의 '운동'에 절망하고, 그 절망에 의해 4차원 시- 공 연속체의 공간과 광속도에 의한 운동으로의 탄생을 강조하고 있다. ⓕ는 3차원 공간의 지구는 '빈집'일 뿐이며, 그럴 때 '봉건시대는눈물이날정도로그립다'라는 의미이다.
①과 ⑤에서 '1+3' '3+1'의 숫자의 활용에 의해 '4차원'을 양끝에 설정한 후, ② ③ ④를 통해 유클리드기하학을 비판하고 비유클리드기하학을 제시하고 있다. ②에서 '선상의일점'인 A, B, C는 평면기하학상의 점이며, ③ ④에서 그 점을 비유클리드기하학에서 볼 때는 '수선의교점'에 해당되는 동일한 점, 곧 'A+B+C='는 A, B, C 모두가 그 해답이 된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괄호 속은 위의 보충설명으로 유클리드기하학에 대한 비판에 해당된다. 유클리드기하학은 '凸렌즈' 같은 것으로 '태양광선'은 그 렌즈에 수렴되어 '도처에있어서인문의뇌수를마른풀과같이소각하는수렴작용을나열하는것에의하여최대의수렴작용을재촉하는위험을재촉'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수렴작용이란 곧 "절대에모일것"에 해당되는 바, 그것에 절망함으로써 비유클리드기하학으로 새롭게 탄생할 수 있음을 나타내고 있다.
4 第四世
4 一千九百三十一年九月十二日生.
이상문학은 스스로를 '4차원에서 새로 태어난 아해'로 명명하고 있다. 곧 이상문학의 글쓰기의 원형은 20세기 초의 과학혁명인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원리로 표상되는 상대적 지식임을 알 수 있다. 이상문학은 이 상대적 지식의 세계를 욕망하면서 그 무의식적 욕망의 언술을 근대 이성적 담론이 지배하는 언술 체계에 분출시킴으로써 이성적 주체의 분열과 언술체계의 분열을 일으키면서 모더니즘 문학으로 기능하게 되는 것이다. 이상문학에 자주 등장하는 의식과 무의식으로 분열된 주체나 사물화되고 동물화된 주체는 모두 주체가 분열된 형태에 해당한다. 분열된 주체는 실어증 유형인 일어문(one sentence utterance)과 일문(one word sentence)과 같은 전보문 형태, 띄어쓰기를 무시한 무의식의 자동기술법, 패러디 등을 통해 자신의 욕망을 표출하고 있다.
이상문학의 전개과정은 '사차원에서 새로 태어난 아해'가 그것에 대한 욕망을 충족시키지 못한 채, 정상적인 발육 성장을 하지 못하고 점점 해골화되어가는 과정과 맞물려 있다. 말하자면, 성장발육을 중지한 난쟁이의 해골화 과정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과정은 처음에 '충족될 수 없는 동심'(「선에 관한 각서 5」)에서 출발하여 '유모차에 태워 진채로 추락한 아해(「얼마 안되는 변해」)를 거쳐, '13인의 아해'(「오감도」중 「시제1호」)→'애총이 된 아해'(「가외가전」)→'어린아이 해골'(「동해」)→'형해'(「실화」)→ '홍안미소년의 노옹화'(「종생기」)로 이어진다. 곧 '사차원'으로 상징되는 상대적 지식을 욕망하면서 태어난 아해가 그 성장발육을 위한 자양분(레몬)을 섭취하지 못하면서, 자신이 추구하는 절대적 욕망을 포즈화로 감추고 그것을 끝까지 추구함으로써, 결국 형해화되어가는 과정에서 산출된 글쓰기라 할 수 있다. 욕망의 포우화는 아이러니, 패러독스, 몽타쥬, 등의 모더니즘의 미학적 장치를 통해 수행된다. 이처럼 이상 문학은 상대적 지식으로 표상되는 비행기의 시대를 욕망하면서, 그 욕망을 포즈화로 감춘 채 당대의 열악한 근대성을 비판하는 과정에서 난해하면서도 과격한 형태의 모더니즘 텍스트를 산출하고 있다.
4.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 사이: 조세희 문학
상대적 지식에 기초한 비행기의 시대를 지향하는 이상 문학은 「동해」에서 "내 알라모드는 손자들의 그것과 맞먹는 비애"라고 규정하고 있다. 곧 이상문학이 욕망한 비행기의 시대가 손자들에 이르러 실현될 것을 예언한 것이다. 그의 예언대로 이상이 그토록 갈망하던 '레몬의 향기'는 오랜 공백기를 거친 뒤, 70년대에 이르러 뫼비우스 띠와 클라인의 병이라는 위상기하학을 들고 나온 조세희의 난쟁이에 의해 부활한다.
(i) 제군이 이미 교과서를 통해서 알고 있는 것이지만, 이것 역시 입학 시험과는 상관없는 이야기니까 가벼운 마음으로 들어 주기 바란다. 면에는 안과 겉이 있다. 예를 들자. 종이는 앞 뒤 양면을 갖고 지구는 내부와 외부를 갖는다. 평면인 종이를 길쭉한 직사각형으로 오려서 그 양끝을 맞붙이면 역시 안과 겉 양면이 있게 된다. 그런데 이것을 한 번 꼬아 양끝을 붙이면 안과 겉을 구별할 수 없는, 즉 한쪽 면만 갖는 곡면이 된다. 이것이 제군이 교과서를 통해서 잘 알고 있는 뫼비우스 띠이다.
(ii) 추위가 서서히 풀리기 시작한 어느 날 나는 과학자를 찾아갔다. <클라인씨의 병>은 그의 방 창가에 놓여 있었다.
나는 그 병을 들여다보았다.
"이제 알았어요."
빠른 목소리로 나는 말했다.
"이 병에서는 안이 곧 밖이고 밖이 곧 안입니다. 안팎이 없기 때문에 내부를 막았다고 할 수 없고, 여기서는 갇힌다는 게 아무 의미가 없읍니다. 벽만 따라가면 밖으로 나갈 수 있죠. 따라서 이 세계에서는 갇혔다는 그 자체가 착각예요."
안과 밖의 구분이 없는 뫼비우스 띠와 클라인씨의 병은 이상문학이 욕망하던 상대적 지식의 세계에 해당된다. 이상이 '정신병자'의 비난을 들어면서 한글 [오감도]를 통해 표출하던 상대적 지식은 그의 손자대인 조세희에 이르러 비로소 '교과서'에 실리게 됨으로써 이상의 예언은 적중한다. 그러나 이상문학이 그토록 욕망했고, 또 조세희가 작품집의 앞뒤에 각각 포진시키면서 지향하려고 한, 안과 밖의 구분이 없어진, 곧 이항대립이 무화된 상대적 지식의 세계는 아직 현실화되어 있지 않다. 조세희의 난쟁이가 자리잡은 사회는 군사독재정권에 의해 파행적으로 진행된 산업화 과정에서 '부자:빈자, 배운 자:배우지 못한 자, 아파트 촌: 철거민 촌, 정상인: 비정상인'이 날카롭게 대립하는 이항대립의 사회이다.
어머니는 인쇄소 제본 공장에 나가 접지 일을 했다. 고무골무를 끼고 인쇄물을 접었다. 나는 겁이 났다. 나는 인쇄소 공무부 조역으로 출발했다. 땀을 흘리지 않고는 아무 것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뒤늦게 알았다. 명희는 나를 만나주지 않았다. 아주 쌀쌀했다. 영호와 영희도 몇 달 간격을 두고 학교를 그만두었다. 마음이 차라리 편해졌다. 우리를 해치는 사람은 없었다. 우리는 보이지 않는 보호를 받고 있었다. 남아프리카의 어느 원주민들이 일정한 구역 안에서 보호를 받듯이 우리도 이질 집단으로서 보호를 받았다. 나는 우리가 이 구역 안에서 한 걸음도 밖으로 나갈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항대립의 사회구조에서 난장이 일가는 '남아프리카의 어느 원주민'들처럼 '보호'라는 미명 하에 주변부로 내몰려 철저히 착취당하면서, 주변부에서 '한 걸음'도 벋어나지 못한다. 이처럼 완고한 이항대립체계에서 난쟁이와 그 일가는 공해 도시 은강의 산업근로자로 등장하면서 중심부의 채찍질에 의해 착취당하고 희생당하는 주변부의 인물로 설정되어 있다.
그러면서 난쟁이 일가는 사회의 구조적 모순에 항거하면서 안과 밖의 구분이 무화된 뫼비우스 띠와 클라인의 병으로 상징되는 비행기의 시대를 지향한다. 이 지향점은 80년대 중반 도시(중심)와 농촌(주변)의 구분이 무화되어가는 '부천'을 배경으로 한 양귀자의 『원미동 사람들』을 염두에 둘 때, 문학사적 안목에서 정당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뫼비우스 띠의 사회는 환상적인 꿈의 세계가 아니라, 곧 이어 다가올 우리 사회의 구체적인 현실태인 것이다. 난장이 일가가 이항대립의 사회를 극복하고 나아갈 지평은 확실하다. 그런데도 난장이는 뫼비우스 띠의 사회로 나아가지 못하고 굴뚝에서 뛰어 내리는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방법을 택한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이항대립을 구축하는 가장 핵심요체는 바로 도구적 이성이다. 따라서 이항대립의 폭파는 도구적 이성으로 전락한 이성중심주의에 대한 공격에 직결된다. 도구적 이성에 대한 공격 방법은 두 가지로 압축될 수 있다. 먼저, 도구적 이성을 해체하는 것이다. 그것은 주체와 객체, 이성과 비이성이라는 구분 자체를 무화시킴으로써 이항대립의 존립기반을 해체시키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이성과 비이성의 구분이 모호해지는 뫼비우스 띠의 세계로 나아가는 확실한 방법론이다. 두번째 방법은 도구적 이성을 교육과 계몽으로 교화시켜 합리적 이성으로 변형시키는 것인데, 이 경우 강조되어야 할 사실은 도구적 이성의 계몽을 위한 철저한 과학적 방법론이 필요하다는 점이다.
조세희의 난장이는 뫼비우스 띠의 세계에 이르는 확실한 방법론인 전자를 택하지 않고, 도구적 이성의 계몽으로 나아간다. 그러면서 과학적 방법론이 결여된 '자유로운 이성'에 의한 이상 사회의 건설을 주장한다.
아버지는 따뜻한 사람이었다. 아버지는 사랑에 기대를 걸었었다. 아버지가 꿈꾼 세상은 모두에게 할 일을 주고, 일한 대가로 먹고 입고, 누구나 다 자식을 공부시키며 이웃을 사랑하는 세계였다. 그 세계의 지배계층은 호화로운 생활을 하지 않을 것이라고 아버지는 말했었다.
당대의 한국사회를 지배하는 중심부가 가공할 폭력을 휘두르는 자리에서 과학적 방법론이 결여된 채, '사랑'과 '자유'를 통해 그것을 계몽시키겠다는 것은 현실의 구체적 모순을 무시한 이상주의자의 꿈이자 추상적 대안일 뿐이다. 결국 난장이는 이항대립의 현실에서 뫼비우스 띠의 세계라는 정당한 지향점을 설정해 놓고도, 그것에 이르는 방법을 알지 못함으로써 단지 [사랑]만을 꿈꾸는 이상주의자로 남게 된다. 여기서 뫼비우스 띠에 이르는 통로가 차단되자 난장이는 그가 나아갈 방향을 뫼비우스 띠에서 돌연 달나라로 대체한다.
달은 순수한 세계이며 지구는 불순한 세계라고 했다. (중략) 그는 달에 세워질 천문대에서 일할 사람은 행복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에게 달은 황금색의 별세계였다.
뫼비우스 띠에서 달나라로의 이 돌발적인 비약이야말로 난장이를 자살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주된 원인에 해당된다. 우주선으로 상징되는 달나라라는 공간은 이항대립이 완전히 해체된 공간이다. 그 공간에 도달할 수 있는 방법은 뫼비우스 띠의 다음 단계인 탈중심의 지식을 지니는 것이다. 그런데 '자유로운 이성'을 주창함으로써 이성과 비이성의 구분이 무화되는 뫼비우스 띠의 공간으로 나아가는 방법을 터득하지 못한 난장이가 탈중심의 지식을 지닐리는 만무하다. 조세희가 그러한 지식을 알게 된 것은 한참 뒤인 『침묵의 뿌리』(1985)에서이다. 그가 이 작품에서 언급하는 '광케이블이나 통신위성'은 진공이라는 탈중심의 공간에서 가능하며, 그 공간은 80년대 중반을 기점으로 하여 한국 사회에서 환상이 아니라 곧 실현될 현실태로 다가온다.
그러나 조세희가 난장이 연작형을 쓸 때인 70년대 말 한국적 현실에서 달나라에 도달하는 통로인 진공은 꿈이고 환상일 뿐이다. 그것은 한국적 현실과는 무관한 꿈의 세계이자 아폴로 우주선을 쏘아올린 먼 이국나라의 이야기이다. 따라서 난장이가 달나라에 도달할 수 있는 현실적 방법은 전무하다. 달나라로의 꿈을 현실적인 것으로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확실한 우주선 발사대가 필요하다. 그 발사대에 대한 지식도 없이 달나라로 가려는 행위는 한국적 현실을 무시한 것이며 단순한 꿈에 불과하다. 달나라에 도달하는 유일한 통로는 꿈을 꾸는 것이며, 그것은 난장이의 살아있는 현실을 제거함으로써 가능하다. 난장이는 달에서 제일 가까운 굴뚝 위에서 뛰어 내린다.
그럼으로써 조세희의 난쟁이는 30년대 이상문학의 난쟁이가 남긴 레몬의 향기를 넘어서는데 실패한다. 그것은 당대 한국 사회의 미성숙과 그로 인한 방법론의 결여에 일정 부분 원인이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학사적 안목에서 조세희의 난쟁이는 이상 문학이 남긴 레몬의 향기를 넘어서는 자리, 곧 난쟁이가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는, 이항대립이 완전히 해체된 공간을 자신도 모르게 제시한다. 그것이 바로 달나라라는 틸중심의 공간이다. 그 공간은 80년대 말 최수철의 진공에 의해 가시화된다.
5. 진공과 포스트모더니즘: 최수철 문학
최수철의 『고래뱃속에서』(1989)의 난쟁이는 이상의 난쟁이를 이어받으면서 그것을 넘어서는 자리에 있는데, 그 자리가 바로 탈중심의 '진공'이다. 이 진공의 등장을 계기로 한국문학은 비로소 포스트모더니즘의 시대에 진입한다. 여기서 90년대 한국 문학을 지배하고 있는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논의가 불가피해진다.
앞서 2장에서 언급하였듯이, 포스트모더니즘은 모더니즘처럼 자본주의의 생산 양식을 인정한 자리에서 자체 내의 모순을 비판한다. 그러나 모더니즘이 중심과 주변, 안과 밖의 구분이 무화되는 비행기의 시대를 지향한다면, 포스트모더니즘은 진리의 불확정성을 주장한 하이젠베르그의 물리학에 기초하여 탈중심의 우주선의 시대를 지향한다. 우주선의 시대는 우주선을 타고 먼 우주에서 지구를 바라볼 때 지구가 하나의 점에 불과하듯, 안과 밖, 중심과 주변의 구분이 해체되고 모두가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는 '지구촌'의 시대이다. 서양과 동양, 남성과 여성, 인간과 자연, 의식과 무의식이 하나가 되는 시대야말로 자본주의의 모순을 극복하고 도달하고자 하는 탈근대의 세계가 아닐 수 없다. 포스트모더니즘은 그런 탈근대적인 우주선의 시대를 그 지향점으로 삼는다.
그러나 90년대가 과연 우주선의 시대로 명명될 정도로 모든 경계와 간극이 허물어지고 모두가 평등하게 공존하는 시대인가라는 문제를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겉으로 볼 때는 긍정적인 것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실상을 파헤쳐 보면 그것이 허구에 불과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동구 사회주의의 몰락과 함께, 미국이라는 거대한 자본주의 국가가 세계의 중심부로 부상한다. 초월적 중심부로서의 미국을 중심으로 모든 것이 재편된다. 이 재편 과정에서 미국은 미국을 제외한 모든 것의 평등화를 주장하면서 '지구촌'의 시대를 선언한다. 지구는 하나의 작은 촌이기에 국가와 민족의 구분이 불필요하다면서, 미국은 이 '촌'을 지배하는 '촌장'으로 우뚝 서게 된다. 겉으로는 이항대립이 해체되었지만, 실상은 미국이라는 초월적 중심부 하에 모든 것이 주변부로 자리잡는 상태가 '지구촌'의 시대의 실상이다.
비유하자면, 원형감옥(panoption)의 감시탑에 미국이라는 초월적 중심부가 있고, 그 감방에 지구의 모든 나라가 통제되는 시대라 할 수 있다. 90년대의 한국 사회도 이 통제권 내에 편입된다. 그러면서 한국 사회는 또 다른 원형감옥을 설치한다. 가시적인 정치권력이 지배하던 80년대와는 달리, 90년대는 비가시적인 초국가적 권력, 곧 미국으로 표상되는 막강한 자본주의에 의해 조종되는 권력이 한국사회를 지배한다. 그것은 이전보다 더 교활하고 음흉스러운 형태로 사회를 통제한다. 이전에는 뚜렷하게 보이는 총칼로 사회를 통제했다면, 90년대의 한국 사회의 지배세력은 자신의 실체를 철저히 감춘 채 각종 정보 메커니즘으로 모든 것을 통제한다. 그 통제권으로부터 자유로운 것은 없다. 인간의 무의식의 욕망마저 통제하여 욕망의 획일화를 꾀한다.
90년대 한국의 포스트모더니즘은 '지구촌'이라는 허울 좋은 표어를 내세우고 실제로는 원형감옥 같은 감시체계에 의해 욕망의 획일화를 꾀하는 시대에 대한 비판을 통해, 진정 모든 이항대립체계가 해체되고 모두가 평화롭게 공존하는 탈근대로서의 우주선의 시대를 지향하는 과정에서 대두된 문학적 흐름이다. 90년대의 포스트모더니즘을 이렇게 자리매김할 때, 이 본질에 가장 충실한 작가가 최수철이다. 최수철 문학을 통해 우주선의 시대에 도달할 수 있는 방법을 탐색할 수 있는데, 그것이 바로 인간 주체의 해체이다.
최수철은 우리 사회를 고래뱃속같은 닫힌 공간이라 규정한다. 이 공간은 미국이라는 초월적 중심부가 지배하는 폭력적인 이항대립체계와 그것에 편승하여 자신을 만물의 영장이라 자처하는 인간주체가 날뛰는 곳이다. 최수철은 닫힌 공간에서 진공이라는 열린 공간으로 나아가기 위한 방법적 전략을 인간에 대한 인식의 대전환에서 찾는다. 그의 인식 전환은 라캉의 선험적 주체 부정론에 닿아 있다. 라캉은 인간이 선험적으로 이성적 주체임을 부정한다. 인간은 의식과 무의식으로 쪼개져 있으며, 의식은 언어법칙처럼 구조화되어 있는 무의식에 의해 지배된다. 그런데 그런 인간이 언어로 매개되는 사회문화규범체계(상징계)에 진입하면서 무의식을 억압당한 채, 그 체계를 지배하는 이성중심주의 논리에 길들여져 스스로를 주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이 이성적 주체라는 인식은 이성중심체제에 의해 조작된 것에 불과하다. 그런데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인간이 선험적이고 이성적인 주체라고 자처할 때, 그의 인식은 철저히 자기중심적이며 자폐적인 것이 되며, 그 결과 지배체제의 모순에 대한 비판은 불가능해진다. 지배체제는 그런 무비판적인 인간 주체를 양산함으로써 체제를 공고히 할 수 있는 것이다. 이항대립체계에서 인간은 살아있는 만물의 주체가 아니다. 단지 제도에 의해 길들여져, 그것이 시키는 대로 행동하는 자동인형 내지 도구화된 부속품, 혹은 사물이나 광물질과도 같은, 한갓 '밀랍인형'에 불과하다.
그것은 마치 허깨비나 껍데기로 앉아 있는 그 사내의 귓구멍을 통해 누군가가 뜨거운 촛농 같은 것을 흘려넣거나 하여 살아있는 인간을 그대로 닮은 하나의 밀랍인형을 만들어 놓은 듯 했다. 하지만 어느면에서는 그 사내뿐만 아니라 모두가, 그를 포함한 주위의 모든 사람이 결국 밀랍인형인 셈이었다.
주체적인 의지라곤 없는, 한갓 인형에 불과한 인간주체들은 그것을 인식하지 못한 채 자기 중심적인 삶을 살아간다. 그러나 실상 그러한 삶은 자유로운 삶이 아니라, 썩은 물에서 언젠가는 질식사 할 고기, 마치 고래뱃속에서 소화되기를 기다릴 수 밖에 없는 '잡어'들과 같은 것이다. 그런데도 그 잡어들은 서로가 주체라는 "안과 밖의 일차원적 구별의식"에 의해 서로 대립한다. 그러면서 서로에게 폭력적이고 공격적인 짐승같은 모습을 노출하면서, 점차 그들은 파국으로 치닫는데, 그 귀결점이 이성적 인간이라는 이름 하에 자행된 처참한 인간살육의 현장, 곧 '아우슈비츠의 지옥 같은 가스실' 혹은 '게르니카의 그림'같은 상태로 귀착된다.
그의 눈 앞에는 아비뇽의 여인들은 어느새 온데간데 없이 사라져 버렸고, 그는 게르니카의 한가운데에 우뚝 서 있었다. 여기저기에 함부로 널려 있는 인간의 지체들, 손과 발, 머리들, 해골들, 대퇴부들, 그는 다시 눈을 감았다.
결국 이항대립체계를 파괴하고 열린 공간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인간 주체를 해체하여야 한다. 의식과 무의식으로 쪼개진 인간은 무의식의 욕망이 타자(객관세계나 인간)에 의해 충족될 때 자신의 개체성(identity)을 확립할 수 있는 존재라는 인식의 전환을 가져올 때, 그리하여 타자에로의 인식이 열릴 때, 그 때 이항대립체계의 구조적 모순을 간파할 수 있고, 이항대립이 해체된 열린 공간으로 지향도 가능하다.
사회적이라거나 정치적인 면을 모두 제외하고 단순히 개인에 관계된 면으로만 볼 때, 같은 모순된 존재로서 한 인간이 다른 인간의 속을 제도적인 힘을 이용하여 들여다보고 그의 개인성을 말살시키는 것은 물론이고, 어차피 누구나 조금씩은 화해와 타협을 이루고 있기 마련인 내적인 자아와 외적인 자아 사이를 비집고 들어서 그 둘을 걷잡을 수 없이 충돌하게 만드는 것, 과연 그 누구에게 그럴 권리가 있는 것입니까? 그런 폭력이 횡행하는 사회에서 산다는 것은 분노와 부끄러움을 동시에 느끼게 하는 것이 아닐까요?
내적 자아와 외적 자아는 다름 아닌 의식과 무의식을 의미한다. 의식과 무의식이 화해와 타협을 이룬다는 것은, 의식과 무의식으로 쪼개져 있는 인간이 타자와 상호보족적인 관계를 맺을 때 가능하다. 그런데 사회구조가 의식과 이성만을 중심부라 강요하면서 폭력적인 측면을 띨 뿐만 아니라, 인간들마저 주체라 자처하고 그러한 폭력성에 편성할 때, 그 속에서 상호보족적인 관계는 성립될 수 없다. 결국 인간 주체를 해체하고 타자에로의 인식을 전환할 때, 이항대립이라는 폭력적인 사회구조 및 인간주체의 모순을 인식할 수 있으며, 이를 통해 닫힌 공간의 병폐를 파헤치고 그 극복을 통해 열린 공간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인간 주체의 해체를 통해 최수철이 도달한 진공은 "사물들이 진공 속에서처럼 중력을 떨쳐버리고서 휠씬 큰 자유로움을 얻게 되는" 곳이다. 그곳은 '시간이 우주의 미아'가 된 곳이며, '안과 밖이 뒤집힌 공간'으로, 이항대립체계가 적용되지 않는 곳이다. 따라서 정상인과 난장이는 이 진공 속에서 동등한 관계를 이루게 된다. 진공 속은 걷는 것이 필요하지 않기에 정상인과 난장이의 차이는 단지 다리의 '길고 짧음의 차이'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진공 속은 '의식의 정전상태' 혹은 '꿈과 현실의 완충지대, 비무장지대'로, 의식적, 이성적 주체는 존재할 수 없으며, 의식과 무의식이 공존하는 인간만이 정상적으로 생활할 수 있는 곳이다.
이윽고 진공 안은 무수한, 온갖 사람들로 발디딜 틈이 없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전혀 답답함을 느낄 수 없었다.누군가가 그에게 아는 척을 했다. 그는 그에게 미소로써 답했다. 그때 그는 자신이 방금 지은 미소가 자신의 얼굴에 그대로 박혀버리는 것을 느꼈다. 흰색 벽의 이곳저곳에서 사람들이 계속하여 얼굴을 들이밀었다. 그리고 벽이 서서히 무너져 내렸다.(중략) 그러면서 그는 진공 속으로 들어서듯 진공을 벗어났다. 혹은 진공을 벗어나듯 진공 속으로 들어섰다.
6. 맺음말
근대성은 이성중심주의에 입각한 이항대립체계로 규정된다. 이러한 근대성에 대해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은 근대 자본주의의 존재를 인정한 상태에서 그 자체 내의 모순을 극복하고자 하는 예술운동이라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그러면서 모더니즘은 주체분열과 언술체계의 분열을 통해 비행기의 시대로 표상되는, 이항대립이 무화된 세계를 지향한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주체 해체와 해체적 글쓰기를 통해 우주선의 시대로 표상되는, 이항대립이 완전히 해체된 세계를 지향한다. 한국문학사에서 이러한 측면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이상문학과 조세희 문학, 그리고 최수철 문학이라 할 수 있다. 지금까지, 이들 각각의 문학이 그들이 속한 시대의 근대성과 조우하면서 그것을 어떻게 수용하고 비판하려 했는지를 검토함으로써, 한국 문학사에 있어서 모더니즘 계열체의 흐름 및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의 변별점을 살펴보았다.
이상의 난쟁이는 일제강점기의 파행적인 근대화에 절망하고, 상대적 지식에 기초하여 이항대립이 무화된 비행기의 시대를 갈망하면서 형해화되어 갔다. 조세희의 난쟁이 역시 70년대 군사독재정권에 의해 강압적으로 감행된 산업화에 절망하면서, 뫼비우스 띠와 클라인의 병으로 상징되는 비행기의 시대를 지향했지만 그것에 도달하지 못하고 굴뚝에서 뛰어내렸다. 그러면서 조세희의 난쟁이는 우주선의 시대를 상징하는 '달나라'라는 새로운 지향점을 설정함으로써, 한국문학사에서 이상문학을 이어받으면서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해준다. 이후, 모더니즘 계열체에 부여된 중요한 몫은 난쟁이가 부활할 수 있는 공간에 대한 탐색이었고, 80년대말에 이르러 그 공간은 최수철에 의해 '진공'이라는 이름으로 부활한다. 최수철이 제시한 진공이라는 탈중심의 공간은 일시적인 도피의 공간이거나 혹은 비현실적인 꿈의 공간이 아니다. 그것은 근대 자본주의 이후 인류가 상실한 낙원이면서, '지금 이곳'의 모순에 대한 비판을 통해 우리가 반드시 회복해야 할 세계이다. 의식과 무의식, 정상인과 비정상인(난장이)이 공존하는 공간, 나아가 인간과 자연이 공존하는 탈중심의 공간에 대한 지향이야말로, 이상문학이 남긴 레몬의 향기를 이어받은 오늘날의 포스트모더니즘이 맡은 문학사적 몫일 것이다.
푸코는 '근대 사상이 만든 산물'인 이성적 인간주체를 두고 "바닷가 모래알에 그려진 얼굴처럼 언젠가는 사라져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이것은 폭력적인 이항대립체계에 기초한 근대성의 문제점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이항대립을 구축하는 핵심 요체인 이성적 인간 주체가 해체되어야 함을 강조하는 말일 것이다. 주체 해체를 통해 포스트모더니즘이 도달하고자 하는 인간과 자연, 인간과 인간이 합일되는 우주선의 시대야말로 근대 이후 모든 위대한 문학이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인류사적 원형에 해당된다. 근대성 비판의 또 다른 축인 리얼리즘 계열체를 대표하는 루카치가 지향했던 선험적 총체성의 세계, 곧 밤하늘에 빛나는 별이 영혼의 별이 되고 나아갈 좌표를 지시하는 세계 역시 포스트모더니즘이 지향하는 세계와 등가를 이루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말하자면, 근대성을 비판하는 리얼리즘 계열체든 모더니즘 계열체든 그 지향점은 동일하며, 다만 그 도달 방법상에서 차이점을 지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어떤 예술운동이든 그것의 본질적 측면에 대한 인식과 당대의 근대적 상황에 대한 깊이 있는 통찰을 바탕으로 할 때, 그 본래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할 수 있다. 지금의 포스트 모더니즘이 우리문학의 전개과정에서 일종의 유행적 촉수의 뻗침 내지 사이비 지구촌의 논리의 맹목적 수용에만 머물 것인가, 아니면 진공이라는 공동체로의 진입을 위한 탈근대성의 문학으로 자리잡을 것인가? 그 해답은 바로 한국문학사에서 모더니즘 계열체의 흐름이 어떤 것인지를 명확히 파악하고, 나아가 우리 시대에 포스트모더니즘이 맡은 미학적 본질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인식하고 있느냐의 여부에 달려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