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리더스 빅토리아호 (SS Meredith Victory)
메리더스 빅토리아호 (SS Meredith Victory)
흥남부두의 피난민들
메리더스빅토리아호 선상의 피난민들
메리더스빅토리아호 선상의 피난민들
메리더스빅토리아호 선상의 피난민들
메리더스빅토리아호 선상의 피난민들
메리더스빅토리아호는 1950.12.22과23일에 걸쳐 14,000 여명의 피난민을 실고 12월23일 오전11시에 흥남부두
를 출발하여 12.24일 부산에 도착 부상자등 일부인원을 부산항에 내리고 12.26일 종착지인 거제도에 도착하였다
건조 당시의 메리더스 빅토리아호 (SS Meredith Victory) 1945년7월24일 진수
부산항에 정박중인 메리더스 빅토리아호 (SS Meredith Victory) 1950년10월
흥남철수 작전과 기적의 배, 메리더스빅토리아호
흥남철수작전은 1950년 12월 국군과 유엔군이 중공군의 개입으로 포위되자 1950.12.15~12.24까지 열흘간에
걸쳐 함경남도 흥남항에서 10만5천명의 군인과 9만1천여명의 피란민, 차량 1만7천500여대, 화물 35만t을 193척의 함대
에 싣고 묵호항과 부산항, 그리고 거제도 장승포항으로 철수한 작전이다.
한국전쟁 당시 중공군의 한국전 개입으로 인해, 한반도의 동북부에 위치하고 있던 연합군은 매우 어려운 상황에 직면하게
됩니다. 중공군의 공격으로 장진호에서 포위되었던 미군을 중심으로한 연합군은 많은 희생자를 내게 됩니다.
그 해 12월 중순 연합군의 주축이 된 미 육군과 해병대는 장진호 포위를 돌파하고 함정들이 대기하고 있던 흥남을 통하여
성공적으로 철수를 합니다.
대부분의 군대는 이미 철수했고, 도시는 적의 포화에 의해 화염에 싸여 있었고, 다가오는 대포 사격과 공습의 위험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탈출이 매시간 위태로워지고 있는 상황에서 비행기용 제트 연료를 가득 실은 메러디스 빅토리 호는
해안에 남아 있던 14,000 명의 피난민 모두가 승선할 때까지 포화가 쏟아지고 있는 항구에 정박해 있었습니다.
이 배의 상급선원이었던 로버트 러니씨는 “선장님은 "눈에 보이는 모든 사람들은 한명도 빠짐없이 구출하라"고 명령하였
습니다." 라고 증언합니다.
마지막으로 흥남을 떠난 배 중 하나인 일반 화물만을 선적하도록 건조된 화물선인 메러디스 빅토리호의 레너드 라루 선장 -
한국전쟁 후, 1954년 미국 뉴저지주의 가톨릭의 성 베네딕도회 뉴튼수도원의 마리너스 수사로 일생을 봉헌하고 2001년
10월 14일 선종- 을 포함한 47명 선원들은 세계역사상 가장 위대한 해상 구조의 하나를 성공적으로 완수한 용기, 지략,
투철한 승무원 정신, 선장과 선원, 승무원들의 인도주의적인 사랑을 배경으로 한 팀웍으로, 물도, 먹을 양식도, 의료진이나
통역관도 없고, 심지어 화장실도 없는 상황에서 적군의 기뢰를 뚫고 3일간의 항해 끝에 북한 공산정권을 탈출하여 거제도에
도착하기 까지, 항해 도중 5명의 아기가 태어나고, 승선한 피난민들 중 단 한 명의 사망자도 없었던 기적적인 피난민 구출
작전을 하였습니다.
북한 피난민을 구출한 메러디스 빅토리 호의 영웅적인 승무원들은 1958년과 1960년에 대한민국 정부와 미국 정부로부터
표창을 받았으며 그들의 이야기는 종종 신문, 잡지에 기사로 실렸습니다.
그러나 그런 기사로 알려진 기억은 대한민국 정부와 미국 정부의 표창을 받았던 1958년과 1960년, 즉 지금으로부터 40년
전의 일입니다.
흥남철수 직후에도 메러디스 빅토리 호의 이야기를 알았던 사람들은 별로 없었으며 오늘날에는 거의 아무도 이 이야기를
듣지 못합니다.
메러디스 빅토리 호의 상급선원이었고, 1950년 당시 부터, 지금까지 모든 자료와 정보를 수집하고 보관해온 로버트 러니씨
의 기록을 중심으로, 작가 빌 길버트씨에 의해서 집필된 ‘메러디스 빅토리 호’의 영웅적인 이야기인 '기적의 배'에서, 흥남
철수 당시 네드 앨몬드 미 육군 10군단 사령관의 부관이었던 알렉산더 헤이그 전 미국 국무장관은 당시의 상황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증언합니다.
“우리는 흥남 해안으로부터 군 병력과 피난민 모두를, 즉 미국인들과, 적국인 북한의 많은 남녀노소를 데리고 나왔습니다.
그들이 적국의 국민이라는 사실은 우리들 중 어느 누구에게도, 특히 미 해군과 상선의 선원들에게는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거의 10만 명의 피난민이 구조를 요청하는 믿기 어려운 광경을 보고 그들을 안전하게 승선시키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을
때, 어느 누구도 피난민들의 국적이나 정치 성향을 문제삼지 않았고 신분증을 요구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들은 전쟁의 죄 없는 희생자들이었습니다. 더구나 그런 것을 조사할 시간조차 없었습니다. 오직 구출해야 할 생명들이
있었을 뿐입니다. 피난민들을 탈출시키기로 한 결정의 현명함에 대해 나는 어떠한 의문도 품지 않았습니다. 그 일은 세상
의 어느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인간생명의 문제라는 것이 저의 확신이었습니다.
만약 우리가 조금이라도 절대자의 존재를 믿는다면, 그 불쌍한 사람들을 그 지옥같은 상황에서 탈출시키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 일에 대해서 단 한 번도 후회해 본 적이 없습니다.”
1958년에 이들의 인도주의적인 구출작전에 대한 표창에서 이승만 대통령은 다음과 같이 적었습니다. “위험한 바다를 지나
3일 동안의 항해 후 메러디스 빅토리 호가 부산에 도착한 것은 이 인도주의적인 위업에 참여한 모든 이들에게는 잊지 못할
사건이었으며, 실천하는 기독교 신앙의 모범으로 한국인들에게 기억될 것입니다.”
당시 이 배의 레너드 라루 선장 (1954년부터 가톨릭의 성 베네딕도회 마리너스 라루 수사)은 당시의 어려움을 극복한 일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증언하였습니다.
“저는 때때로 그 항해에 대해서 생각합니다. 어떻게 그렇게 작은 배가 그렇게 많은 사람들을 태울 수 있었는지, 그리고 어떻
게 한 사람도 잃지 않고 그 끝없는 위험들을 극복할 수 있었는지 생각합니다. 그러면 그 해 크리스마스에 황량하고 차가운
한국의 바다 위에서 하느님의 손길이 제 배의 키를 잡고 계셨다는 명확하고 틀림없는 메시지가 저에게 옵니다.”
메러디스 빅토리 호의 상급선원이었던 로버트 러니 변호사는 이 책에서 “우리는 한국인들의 극기와 용감함에 깊은 인상을
받아 승무원들 각자 한국의 모습을 마음과 영혼 속에 담아 가지고 왔습니다. 저는 아직도 그들이 놀랍습니다.” 라고 증언하
면서 더 이상 전쟁의 고통과 상처가 없는 한반도 평화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기적의 배' 옮긴이는 당시의 레너드 라루 선장과 47명의 승무원들, 그리고 당시 이 배의 승객이 되었던 모든 피난민들, 피난
민들이 안전하게 피난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후방 지역의 공산군으로부터 방어하다가 숨지거나 희생된 많은 유엔군이 함
께 보여준 생명, 희망, 자유, 사랑에 대한 열정을 추모하고 기억하여 세계 평화와 인류공존의 의미를 알리기 위해, 레너드 라
루 선장이 '마리너스 수사'라는 이름으로 일생을 봉헌했던 미국 뉴저지주의 '뉴튼 수도원'에 추모공원을 건립하기로 하였고,
'기적의 배' 옮긴이의 글에서 다음과 같이 마무리를 하였습니다.
“역사를 서술하는 일은 지나간 사실의 조각을 하나씩 하나씩 모아서 마치 모자이크처럼 옛 기억을 되살리는 일이다. 그러나,
우리가 아무리 그 기억을 제대로 되살린다고 해도 당시의 그 아픈 기억들을 고스란히 되살릴 수는 없을 것이다. 모자이크를
아무리 잘 한다고 해도, 조각들 사이의 아주 작고 섬세한 틈을 완전히 메울 수는 없는 것처럼... 당시의 피난민들의 고통과 죽
음에 대한 공포, 그리고 자유와 생명과 희망에 대한 갈구를 우리는 과연 어느 정도 실제적인 상황으로 느낄 수 있을 것인가?
많은 내용은 "마리너스의 기적의 배" 책자에서 발췌 하였습니다..
(위 글은 유용원의 군사세계에 올려져 있는 내용입니다.)
흥남 철수시 피난민 승선으로 수송선에 적재할 자리가 없어 4백 톤의 폭약과 차량, 장비 등 5백 60만 톤의 장비가
유기되었으며, 승선이 끝난 후 해군 함대와 폭격기가 집중사격을 가하여 폭파시켰다.
남겨진 흥남부두의 장비와 탄약을 폭파하는 모습 (1950년12월24일)
위에 보이는 배는 USS Begor(APD-127)고속 수송선이다.
흥남철수 당시 메리더스 빅토리아호 선장, 레너드 라누
메리더스 빅토리아호 약력
빌더 : CalShip , 로스 앤젤레스 , 캘리포니아
누워 : 1945 년 5 월 1 일
런칭 : 1945 년 6 월 23 일
완료 : 1945 년 7 월 24 일
신분증: IMO 번호 : 5232593
명예와 상 : 용감한 배상 * 한국 대통령 표창 * 공로 훈장
운명: 1993 년 중국에서 해체
선박: 10,658톤
배수량: 15200 톤 (28 피트 구배)
길이: 139 미터 (455 피트)
빔: 19 피트
초안: 7.6m (28 피트)
홀드 깊이 : 38 피트 (11.5m)
속도: 15 ~ 17 노트 (28 ~ 31km / h)
생산 능력: 총 59 명 (승무원 35 명, 임원 12 명, 승객 12 명)
군비: 승리 선박으로서 1 × 5 인치 (127mm) / 38 구경 총
1 × 3 인치 (76mm) / 50 구경 총,올리 콘 (Oerlikon) 8 × 20 m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