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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신에서 말씀으로
2023년 10월 15일 본문 말씀: 디도서 2:6-8
(2:6) 너는 이와 같이 젊은 남자들을 권면하여 근신하게 하되
(2:7) 범사에 네 자신으로 선한 일의 본을 보여 교훈의 부패치 아니함과 경건함과
(2:8) 책망할 것이 없는 바른 말을 하게 하라 이는 대적하는 자로 하여금 부끄러워 우리를 악하다 할 것이 없게 하려 함이라
복음을 알게 되면서 ‘복음의 대적자’가 벌써 존재해 있음을 압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적이 어떤 식으로 활동하는지도 젊은 이들은 알아야 합니다. 젊다는 것은 단지 경솔하고 경험하고 인생 경험이 적어서 잘못된 선택을 한다는 정도가 아닙니다. 젊다는 것은 ‘늙음 이후’로 자신이 내딛고 있음을 여전히 모르고 있다는 겁니다.
인간은 늙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후에 죽음이 있습니다. 죽음이란 곧 ‘자기 자신이 사라진’는 것을 뜻합니다. 그렇게 되면 평생에 수고한 것이 빈 가방으로 마감되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생각하는 그런 ‘끝’ 말고 다른 ‘끝’을 마련해 두셨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죽음’입니다.
‘예수 안’에서 죽지 않는 죽음은 허망한 개죽음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식으로 개죽음에서 고귀한 죽음 안으로 들어설 수 있을까요? 그것은 말씀을 따라 진척되는 노선에 의해서 성사됩니다. 이 말씀 안에는 모든 시간이 마감된 이후에 드러난 상황과 상태를 미리 보여줍니다. 즉 인간은 어떤 식으로 구원될 수 없다는 것을 말합니다.
모든 말씀이 예수님의 죽음을 겨냥해 집중되는 이유는 인간 자체가 잘못된 이해 안에 놓여 있기 때문입니다. 즉 인간은 자신의 몸이 자기 것이라고 여기고 자신이 감당하려고 합니다. 자기가 만든 몸도 아님에도 말입니다. 인간 몸의 주인은 따로 있습니다. 말씀은 바로 이 몸의 주인으로 인도하고 이끄십니다.
이런 사례가 구약 이스라엘 민족이 보여줍니다. 그들은 한 분의 이름으로 이끌려 애굽나라에서 나왔습니다. 그들은 모두 땅에 속한 자들입니다. 반면에 그들을 인도한 하나님의 이름은 하늘과 땅의 경계선에 계신 분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에 해야 할 것은 ‘어린양의 죽음’을 운반하는 겁니다. 약속의 땅까지 말입니다.
그들 각자의 이름은 거부하고 하나님과 통하는 유일한 이름은 ‘어린양의 죽음’을 이끄는 ‘하나님의 이름뿐입니다. 이는 사람과 직접 관계하지 않겠다는 하나님의 뜻이 나타난 겁니다. 이런 하나님의 뜻을 모르는 사례가 구약 욥기에 나옵니다. 욥은 스스로 자신을 의인이라고 자부했습니다.
그런데 난데없이 멈추지 않고 고통이 찾아듭니다. 욥은 스스로 조건을 만들어 내세웁니다. “반성할테니 그만 때리소서. 그런데 무엇에, 어떤 점이 죄가 됩니까?”라고 말입니다. 욥은 하나님께서 고난을 주시는 이유를 몰랐습니다. 그에게는 정답이 없었습니다. 그 이유는 자신이 고난받을 대상자로 뽑힌 것을 아예 정답에서 제외시켜 놓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욥에게 고난을 주신 것은 악마의 실정을 말해주기 위해서입니다. 악마는 지옥에서 영원히 벗어나지 못한 채 하나님의 보복을 당하고 또 당하고 또 당해야합니다. 당연히 반성같은 것은 하나님에게 용납될 수가 없습니다. 바로 이런 악마의 외침을 욥의 입을 통해서 나오는 겁니다.
욥은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를 몰랐던 겁니다. 요나 선지자의 경우는 더 심화됩니다. 그런 하나님의 사명자로 부름받았습니다. 그런데 그 사명이 하나님으로부터 버려지기 위한 사명이었음을 그는 알지 못했습니다. 이는 곧 이 세상 어느 인간도 자신이 굳이 살아있어야 될 이유를 가진 자는 아무도 없음을 드러내는 겁니다.
인간이 살아 있어야 되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이 살아나야 합니다. 따라서 말씀이 인간 속에 찾아와야 합니다. 누가복음 19장 므나 비유에서 예수님께서는 종들에게 주인의 것을 장착시키고 그 현장을 떠납니다. 그렇게 해서 누가 인간 자신에게 관심두는지 아니면 주인에게 관심두는지를 살필려는 겁니다.
누가 와서 다음과 같이 인사를 건넬 때, 다음과 같이 답변하기 마련입니다. “네 주인님 잘 계신가?” “그래 내가 잘 있어” 나의 삶의 관심있다는 말은 여전히 내가 나답게 살고 싶어서 자기에게 대한 미련을 갖고 있다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 말씀에 대해서 흥정에 나서려고 할 겁니다.
인간은 자신이 달라지고 있음을 안다고 자부하지만 막상 타인들을 만나게 되면 남들이 변하지 자신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똑같다고 여깁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은 하나님 말씀 외에 다른 것을 보면서 여전히 자신이 한결같음을 유지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성경 말씀은 인간들이 더 생을 사는것과 관계없이 확정되었다고 봅니다.
시편 62:9에는, “진실로 천한 자도 헛되고 높은 자도 거짓되니 저울에 달면 들려 입김보다 경하리로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시편 39:5에서는 “주께서 나의 날을 손 넓이 만큼 되게 하시매 나의 일생이 주의 앞에는 없는 것 같사오니 사람마다 그 든든히 선 때도 진실로 허사뿐이니이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어린 양의 죽으심을 위한 말씀을 주시면서 여타의 율법들이 철저하게 이스라엘의 죄를 들추어내는 취지로 주신 이유는, 어린양의 죽음이 인간의 죄와 관련성 있기 때문입니다. 즉 인간은 죽어 마땅하다는 겁니다. 그리고 영원히 남을 것은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로 구성된 복음 뿐입니다.
신약에 와서 드디어 이 사실이 성령의 오심으로 알려집니다. 사도행전 2:17에 보면, “ 하나님이 가라사대 말세에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청년들에 대해서 꼭집어 이야기야 한 대목이 요한일서 2:14에도 나옵니다.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강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시고 너희가 흉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라” 즉 성도 안에, 이미 악마를 이긴 요소가 들어왔다는 겁니다. 인간 내부에 외부적인 요소가 들어온 겁니다. 이렇게 되면 성도의 관심사는 오직 이 환타지, 곧 말씀 성취에 꽂힐 수밖에 없습니다.
그동안 하나님의 말씀들이 모두 인간들의 해석의 오류를 들추어내는 식으로 주어진 겁니다. 예를 들면 마태복음 7:12에 나오는 말씀 같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이 말씀을 죄인인 인간쪽에서 돌려서 해석하게 되면 평소에 인간 죄성이 다음과 같이 폭로됩니다.
“누구든지 나를 해롭게 한 자면 내가 가만두지 않는다. 반드시 갚아주겠다”가 됩니다. 이처럼 성도는 예수님에게 일어난 변화, 곧 예수님의 죽으심과 변화를 통해서 이미 새로운 피조물로 바뀌어졌음을 압니다. 이것이 신약 때에 말씀 해석에서 벗겨진 수건입니다.(고후 3:14) 기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모든 육신이 나비처럼 말씀이 되어 떠오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우리교회
23-10-15 18:35
8강-디도서 2장 6-8절(육신에서 말씀으로)231015-이 근호 목사
하나님 말씀은 디도서 2장 6-8절입니다.
디도서 2:6-8
“너는 이와 같이 젊은 남자들을 권면하여 근신하게 하되 범사에 네 자신으로 선한 일의 본을 보여 교훈의 부패치 아니함과 경건함과 책망할 것이 없는 바른말을 하게 하라 이는 대적하는 자로 하여금 부끄러워 우리를 악하다 할 것이 없게 하려 함이라.”
젊은 사람들도 예외 없이 될 수 없는 상황은 바로 대적하는 자, 복음에 대적하는 자, 하나님께 대적하는 자와 맞닥뜨리는 일을 역시 당하게 돼 있습니다. 젊은 사람이라고 해서 악한 자, 악마와 무관하게 살아갈 수 있는 형편에 있지 않다는 거예요. 그러면 이 젊은 자에게는 그 악마 앞에서 악마를 대적하는 그 일, 그 사명을 감당할 만한 요소도 역시 있어야겠죠.
젊은 자들은 누구보다 못하냐 하면, 늙은 사람보다는 못합니다. 젊다는 말은 제한된 경우로 구성되는 자아상을 갖고 있기 때문에 가벼움, 경솔, 오해, 어설픔, 잘못된 선택이나 결정, 성급함, 진정성 없음, 여러 가지 표현으로 젊음을 표현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가벼움, 경솔, 어설픔, 잘못된 선택, 이런 것들은 사라져야 될 것이 사라지지 않고 계속 남아있기 때문에 나오는 증상들입니다.
늙은 사람들보다 젊은 사람들에게 이런 증상이 많이 남아 있는데 그러면 늙은 사람이 젊은 사람보다 나은 점은 뭐냐? 본인이 곧 죽는다는 거예요. 죽는다는 것은 없어진다는 겁니다. 없어진다는 것에 대해 늙은 사람, 늙은 성도를 말합니다, 늙은 성도들은 그것이 마땅하다는 거죠. ‘당연한 조치다. 내가 있다가도 없어지는 것이 하나님의 일관된 합당한 일이다.’ 그렇게 보는 겁니다.
인간이 왜 사라져야 되고 없어져야 되는가? 그것은 내가, 내가 만든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어느 학교에서도 이 이야기 하지 않습니다. 내가 만들지 않았어요. 내가 만들지 않았기 때문에 내가 날 관리하는 방법도, 요령도 몰라요. 더군다나 내가 날 관리해야 할 이유도 목적도 몰라요. 내 것이 아닌데 마치 평생을 내 것처럼 관리했던 이것, 이게 바로 대적하는 자가 우리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고 이미 우리 안에 침투되어 있다는 사실을 연세 많은 사람, 특히 연세 많은 성도들은 압니다.
‘아, 이제는 내가 나를 놔줄 때가 됐구나.’ 젊을 때는 내가 남 앞에 뽐내기 위해서 나도 사람이다, 라고 내세우기 위해서 “나도 이 정도로 훌륭할 수가 있잖아요.” 그런 걸 자랑삼아 살려고 부단히 애를 썼는데 나 자신은 내가 감당할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겁니다.
시편 39편 5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주께서 나의 날을 손 넓이만큼 되게 하시매 나의 일생이 주의 앞에는 없는 것 같사오니” 이렇게 되어 있어요. 손 넓이쯤 되어 있으니까 이렇게 짧으나마 마치 내 인생이라는 것이 있는 것처럼 그렇게 느껴지지만 이 손안에 있거든요. 손을 이렇게 접어버리면 없는 것 같이 되는 거예요. 분명히 살았는데 없어요. 없어지기 위해서 살아온 거예요. 없어지기 위해서.
‘없어질걸?’ 이렇게 했는데 나중에 요양병원에 가서 죽어보니까 ‘없어지네!’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러면 그동안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은 그 빈 가방, 빈 가방 때문에 헛짓하고 온 겁니다, 평생을. 평생을 살고 가방을 열어 봤는데 아무것도 없어요. 없는 것 같이 되는 겁니다.
시편 62절 9절에는 더 심하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되어 있어요. “진실로 천한 자도 헛되고 높은 자도 거짓되니 저울에 달면 들려 입김보다 경하리로다.” 입김보다 경하리로다. 후~, 하고 인간 속에 공기만 들어왔다가 나왔다가, 들어왔다가 나갔다가, 그렇게 평생을 보낸 겁니다. 입김보다 더 가볍다는 거예요. 이 존재의 가벼움을 어떻게 할 거예요? 아무것도 아닌 거예요.
늙은 성도들은 이걸 알아요. 그런데 젊은 사람들, 성도들은 이걸 아직 모릅니다. 인정 못 합니다. 그건 바로 죄 때문에 그래요. 죄라는 것은 내 몸을 내 것이라고 여기는 것, 내가 내 몸을 어떻게 감당해 보려고 하는 것, 쉽게 말해서 자기의 어떤 기대와 스케줄, 목적을 자기가 지시를 내려서 내가 거기에 따라가면 그럴싸한 뭔가가 된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에 대적하는 존재에 대해서 의식하지 못하고 그걸 느끼지 못했기 때문에 그러한 인식을 갖게 되는 겁니다. 이 젊은 사람들의 이런 경솔함 때문에, 대적하는, 인간 속에 이미 장착되어 있는 마귀로 인하여 주님의 이름, 주님 하시는 일이, 복음이 훼손되는 경향이 있어서 성경에 몇 군데 보면 청년들에 대해 당부한 것이 있습니다. 특히 청년들을 꼭 집어서 당부했어요.
요한1서 2장 14절에 보면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강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시고 너희가 흉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흉악한 자, 마귀를 이기는 조건은 뭐냐?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 속에 들어와야 돼요. 너희 속에, 말씀이 너희 속에 들어와야 됩니다.
말씀이 우리 속에 들어가면 어떤 현상이 일어나냐면, 현재 지금 내 것이라고 여기는 이 내 몸이 없어져요. 없어지고 ‘주 안’에서 하나님이 새롭게 마련하신 ‘나’가 따로 있습니다. 그때는 흙에 속한 내가 아니고 예수님의 영광에 속한, 하늘의 영광에 속한 내가 따로 준비 되어 있어요. 그걸 교체하는 방법이 말씀이 들어오면서 교체가 일어나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요근래 자주 이야기하는 것이, 나의 믿음을 갖지 말라는 게 그 뜻이에요. 내 것을 가지면 안 돼요. 내 믿음, 내 소망, 내 사랑을 갖지 말아야 해요. 어떤 젊은 사람은 이런 이야기를 해요. 특히 기성 사회에서. 우리에게 내일이 없다고 이야기하거든요. 우리에게 내일이 없다 하는데 성경적으로 보면요, 네가 없어요. 내일이 없는 게 아니라 네가 없어요. 네 자체가 없는 거예요. 그걸 젊은 사람은 모르는 거예요. 내가 없, 없, 없, 없는 거예요. 없기 때문에 없어져 가는 겁니다.
젊은 사람들이 교회 나오는 것도 수상해요. 오늘 본문에 사도 바울이 이렇게 말씀을 주게 되면, 사도 바울은 마치 최후의 심판자처럼 행세하며 나타납니다. 일방적으로 지시하죠. 말씀의 세계를 소개하는 겁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보면서 젊은 사람들은 자기를 아직도 자기가 감당하려고 하면서 흥정에 나서는 거예요.
흥정에 나선다는 말은 “이 말씀을 어떻게 다 지킵니까? 약간은 지킬 수 있고 약간은 못 지킵니다.” 흥정에 나선다는 것은 아직도 자신이 완전히 망하지 않았다는 뜻이에요. 나 자신을 포기 못 하겠다는 겁니다. 왜 자신을 포기 못 하냐면, 아직 내가 나답게 살 수 있다는 희망을 못 버리겠다는 거예요. 내가 나답게 사는 것.
내가 나답게 살고 싶은 이 욕망을 허물고 싶지를 않은 거예요. 내가 나답게 살고 싶어 하면 이게 화를 자초하거든요. 이게 자기를 더 힘들게 만들어요. 다시 이야기해서 내 몸은 내 것이 아닌데 우격다짐으로 내 것이라고 여기는 겁니다, 내 것. 관리자가 따로 있는데 내가 관리자라고 우기는 거예요.
그리고 이걸 아무도 주위에서 이야기해 준 사람이 없어요. 그러나 이야기는 해 주지 않더라도 이미 구약 성경에 이스라엘 역사가 있습니다. 그들은 우리의 오류를 미리 앞서 보여줬던 대단위, 민족 단위의 택한 백성들이었습니다. 택한 백성들이었습니다. 구원받기 위해서 택한 건 아니지만 하여튼 주의 일을 행하기 위해서 택한 백성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특이한 죽음, 특이한 죽음을 실어 나르는 일을 하는 민족이에요. 인간의 모든 죽음은 예수 밖에서 죽는 죽음이에요. 그걸 가지고 개죽음이라고 해요, 개죽음. 예수님 밖에서 죽는 죽음, 이스라엘 빼놓고 이방 나라는 자기의 죽음이 개죽음인 것을 알아야 될 근거 같은 게 없었어요.
그런데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언약을 주고 율법을 줌으로써 죽음이, 죽는다는 사실이 율법에 준해서 죽는다는 새로운 죽음의 노선, 관계망을 형성시켜 줬어요. 네가 죽는 것은 그게 네가 언약을 위반했기 때문이라는 죽음의 근거, 죽음의 내력을 이스라엘에게만 준 겁니다.
율법을 주고서 그다음에 그 안에 율법이라는 저주를 해소하는 시스템을 같이 병행해서 그들에게 실시했어요. 그게 제사였습니다. 그러니까 어린양의 죽음, 어린 양의 죽음을 실어나르는데 실어나르는 방법이 뭐냐 하면, 너희들이 헛된 죽음으로 인하여 어린양이 죽고, 너희들의 헛된 죽음, 하나님의 법에 의하면 죄만 짓는 그 헛된 죽음이 너희 안에 어린 양의 죽음을 실어나르는 효과를 발휘한다는 겁니다.
어린 양이 죽는 그 핵심 요소는 환경이 뭐냐? 우리는 죽을 짓만 하면서 살아간다는 그것이 너희 안에 어린 양의 죽음을 부각시키는 계기가 된다는 겁니다. 이게 이스라엘이 존재하는 이유입니다. 바꿔치기하라는 거예요. “주어진 육신의 성질과 본질에 대해서 네가 알아? 모르지?” 율법을 줌으로써 네 육신은 이미 폐기처분 돼야 될 육신이라는 겁니다.
이스라엘에게는 하나님의 또 다른 이름으로 가는 거예요. 이름인데 그 모습은 어린 양이 반복해서 죽는 모습으로 주의 이름이 그들과 함께 동승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이름이라고 하는 것은요, 자기 이름이 뭐 대단한 것 같지만 서로 돌려가면서 써도 무방한 이름이에요.
종수, 영철, 상철, 옥순이, 영숙이, 16기 영숙, 15기 영철이, 17기 상철이 또 등장하고, ‘나는 솔로’라는 프로그램에 돌아가면서 동일한 이름을 써도 우리 사람들은 말합니다. “그때 16기 영숙이하고 17기 영숙이 다른 사람인데?” 그러나 하는 말, 말하는 태도, 살아가는 모습, 그런 성질을 보면 16기나, 17기나, 15기나, 1기나 인간 치고 똑같아요. 전부 다 똑같습니다.
자기밖에 모르는 것, 내가 나답게 한 번 살아보고 죽겠다는 그 심보, 그 억지스러움. ‘아, 주님께서는 이걸 인간의 이름으로 돌려막기 하시는구나. 어떤 이름도, 여러 가지 이름은 존재하지 않고 하나의 이름, 바로 아담의 이름뿐이구나.’
그래서 남자만 육십만이 되는 그 많은 이스라엘 사람들을 애굽에서 데리고 올 때 그들은 다 땅에 속한 존재였습니다. 거기에 반해 그들의 이름을 주의 이름으로 대치하기 위해서 한 분이 동행하는데 그 동행하시는 분의 이름은 하늘과 땅의 경계선을 품고 있는 이름, 그게 바로 주의 이름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준 그 언약은 어디에 집결되어 있는가? 주의 이름에 집결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아주 어려운 이야기를 한다면 이렇습니다. 젊음에서 늙음으로 시간이 흘러가는 게 아니고, 시간이 압축되어 간다고 표현해야 정확합니다. 시간이 흘러가는 것이 아니죠. ‘내가 젊으니까 시간이 흘러 늙어가겠지.’ 아니요, 시간이 압축됩니다. 어떤 압축? 주의 이름의 시간으로 압축돼요.
모든 인간들은 하나님 보시기에 이미 죽었습니다. 그게 고린도후서 5장 14절에 나옵니다.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Everybody is a dead man,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다.’ 모든 사람이 죽은 거예요. 이걸 이스라엘은 알아요. 아는데 뭐 지식으로나 알겠지요. 그러나 이방 민족 같은 우리는 이걸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내가 나답게 될 것이 아직 남아있는데……, 못 받아들이는 거죠.
주님께서는 못 받아들일 줄 알았어요. 구약에 보면 못 받아들이는 두 사람이 대표로 등장해서 그들이 결국은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유와 그 이유의 배경에 따라 주의 어떤 조치가 주어지는데 그 조치에 따라서 못 받아들이는 자들이 받아들이게 되는 그 과정이 구약 성경에 두 군데에 나옵니다.
한 군데는 욥입니다. 욥기를 보면 욥이 알 수 없는, 항상 의문으로나 표시되는 그 알 수 없는 의문점을 계속 지니고 있어요. 해답을 모르는 거예요. 해답을 모르는데 ‘내가 왜 고난받아야 합니까?’에 대해 어떤 결정적 답을 몰라서 그거 때문에 괴로워하는 거예요. 정답을 말씀드리면 이렇습니다.
욥이 알지 못했던 그 답의 정답은 이겁니다. 욥은 고난받기 위해서 선택된 거예요. 그런데 욥이 고난받으면서 그 정답을 모르겠다고 하는 것은 뭐냐? ‘내가 왜 고난받는 대상자가 되어야 하는가?’ 이게 자기 내부에서 극렬하게 반대하고 있었기 때문에 해답이 있어도 해답이라고 받아들일 수 없었던 거예요.
“내가 왜 고생해야 돼?” 모든 젊은 사람들의 특징이죠. 내가 왜 고생해야 돼? 사실은 제가 젊다, 젊다 하지만요, 사람이 나이 많다고 지혜 있는 늙은이 되는 게 아닙니다. 지금 젊은이들이 하는 모든 것은 사실 하나님의 지혜를 모르면 똑같이 다 해당되는 대상자들이에요.
욥이 그렇게 친구들에게 닦달하고 모르겠다고 반항하면서 나중에는 하나님께 막 대들죠. “왜 제가 고난받아야 합니까?” 하나님의 답변은 그거에요. “네가 고난받지 말아야 할 이유가 뭐냐?” 이거죠. “네 몸이 네 거야? 네 것도 아닌데 네가 왜 감당하려고 해?” “Why me? 왜 저에게 왜 이런 시련을 줍니까?” “네가 뭔데? 너 뭔데? 임시방편 존재인데.”
욥에게 고난이 온 것은 배후에 악마의 정체를 드러내기 위해서 욥을 사용했기 때문입니다. 악마가 들어갈 세계는 악마도 알고 있어요. 여러분, 지옥에 대해서 알아요? 지옥은 뭐냐 하면, 하나님께서 철저하게 보복하는 곳이 지옥입니다. 욥 같은 경우 이렇게 빌죠. “하나님, 제발 저를 그만 때리소서.” 이게 세상이기 때문에 이 말이 가능해요. “이제 저 때리는 거 멈춰주세요. 너무 많이 맞았습니다. 저 감당 못 하겠습니다.”
그런데 지옥이 무엇인지 보여주기 위해 하나님이 욥을 선택한 거예요. 욥에서 나오는 그 고통에 대한 탄식, 거부할 수 없는 반항, 멈추지 않는 반발, 이것이 악마가 들어갈 세계를 미리 보여주는 거예요. “원인도 모르는데 왜 자꾸 저를 때립니까?” 욥이 하는 중요한 말 중에 하나가 이거에요. “제가 반성하라면 반성하고요, 회개하라면 회개할 텐데 자꾸 때리시기만 하면 저 어쩌란 말입니까?” 그 이야기에요.
원래 하나님이 때리고 싶은 것, 영원히 되풀이해서 보복하시는 그 멈추지 않는 때림은 악마한테 해당되는 거예요. 그걸 인간에게 옮겼을 때의 악마의 외침을 욥을 통해 미리 보여주고 터져 나오게 만드는 겁니다. “반성하면 안 때리겠죠? 그러니까 반성 안 할 때나 때려주세요.”
반성이 뭔 줄 알아요? 선악 체계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따먹지 말라고 했어요. 맞을 것은 맞아야 하는데 자꾸 거기에 반성이 들어가 버리면 반성하는 자의 정당성이 보장되는 거예요. 그러면 때리시는 일방적 때림이, 하나님의 때려주심의 정의가 맞는 쪽에 의해 모독받게 되는 겁니다.
“왜 때립니까?” 네가 나에게 그렇게 할 잽이 못 된다는 거예요. 인간의 어떤 무덤도 쉴 무덤은 없습니다. 인간이 무덤에 들어갔다고 쉰다고 생각하시면 큰 오산입니다. 인간 속에 들어온 그 선악 체계, 윤리, 도덕, 그 잘남, 그 잘남! 하나님은 사정없이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영원히 패고 또 패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이 선악 체계를 빼지 못하고 인간은 빼는 대신 뭐하느냐 하면, “앞으로 잘 할게요. 반성할게요. 훌륭하게 살겠습니다. 참하고 착하게 살면 되잖아요? 그만 때리세요!”
착하게 사는 것이 목적이 아니고 안 맞겠다는 게 인간의 뜻이고 그게 마귀의 뜻이에요. “네가 뭔데 날 때리냐?” 이게 악마의 외침이에요. 신이면 다냐, 이 말이에요. ‘네가 뭔데 날 왜 때려. 신이 뭔데 내 인생을 힘들게 해.’ 주님께서는 악마로 하여금 네가 악마일 수밖에 없다는 것, 악마의 한계를 드러내기 위해 산상설교를 주었습니다. 산상설교 중에서 한 대목을 제가 보겠습니다.
마태복음 7장 12절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다시 읽어봅니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이 성경 구절을 예수님 쪽으로 테이블을 돌려서 해석해야 해요. 내 쪽으로 돌려 해석하면 해석이 안 나옵니다.
내 쪽으로 해석하면 이런 해석이 나옵니다. ‘내가 너 가만두지 않을 거야. 내가 널 가만두지 않을 거야.’ 무슨 뜻이냐면, 누구든지 나에게 해코지하는 인간, 내가 지옥까지 따라가서 복수 할 거라는 뜻이에요. 내 쪽으로 해석하면요.
그런데 사람들은 이 해석할 때 공자 논어의 말을 인용해요. 그리고 탈무드의 말까지 또 인용합니다. <탈무드>라는 이스라엘의 교훈집이 있어요. 남들이 싫어하는 것을 남에게 하지 않는 것이 진정한 도덕이라는 뜻이에요. 그 해석 전부 다 신에게 대들고 반항하는 악마의 소리입니다. 선악 체제에서 나온 거예요.
이 말씀은 이렇게 해석돼야 돼요. 나라는 인간은 나 조금이라도 건드리면 나는 가만두지 않고 그 복수심을 잊지 않겠다, 라는 것이 바로 우리 안에 들어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주께서 주신 말씀이에요. 이 말씀은 “복수를 해도 네가 너를 위한 복수는 너에게 허락한 적도 없는데 너는 허락한 적도 없는 복수를 네가 지금 하고자 한다. 그게 너의 대인관계다. 남과의 만남이다.”
젊은 사람들은 말합니다. 내가 지금은 젊지만 점점 더 나이 들어 인격적으로 훌륭하게 될 것이라고요. 자신의 변화를 자신 있게 내세웁니다. 그러나 인간은 변하지 않습니다. 인간은 절대 변하지 않아요. 왜? 사라져야 되기 때문에. 언약에 의해서 저주받아 죽어야 되기 때문에 인간은 변하지 않습니다.
인간들은 자신이 변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어떻게 아는가? 남들이 변함으로써 자신이 독불장군이라는 것을 깨닫게 돼요. “너 예전에 나한테 그렇게 잘해주더니 사람이 변했다. 2년 만에 보니 다른 사람이 됐네. 야, 너 인간성 너무 변한 거 아니야?” 그러면 저쪽에서 “너는 너 변한 건 생각 못 하고 남이 변한 것만 생각하네?” 인간은 자기를 변하지 않는다고 여깁니다. 타인이 변해도 남들이 변한다고 생각하거든요.
주님께서 자기 백성을 사랑하사 우리가 얼마나 독불장군처럼 얼마나 마귀 적으로 확정되었는지를 알리기 위해서 누구 쪽에서 변해버리느냐 하면, 예수님 쪽에서 자기가 스스로 변해버려요. 하나님이시나 이 땅에 오셔서 죽기까지 복종하시고, 그리고 난 뒤에 아버지로 인하여 주가 되시는 그 변화 과정을 우리에게 보여주십니다. “아나, 이게 네 모습이다.”
변하지 않는 주님. 왜? 주님은 하늘과 땅의 경계선에 있어요. 인간들은 자기는 변하지 않는다고 여기고 자기가 천국에 가고 싶어 해요. 그래서 교회 나오는 겁니다. 그러나 성경은, 천국에 인간은 갈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을 보내주는 것은 천국에 보내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 자기 안으로 들어가게 해 주죠. 천국은 그 안에 있어요. 우리가 생각하지 않는, 악마의 품속에서 변하지 않는 독불장군, 내가 아는 천국은 그게 바로 지옥입니다.
심지어 불교에도 그 내용이 나와 있어요. 부처가 지옥 가는 사람 불쌍해서 파를 던져주는 이야기가 있어요. 어떤 효자가 극락에 가서 구원받고 난 뒤에 보니 지옥에 자기 엄마가 있거든요. 엄마 좀 구해달라고 하니 염라대왕이 “그래. 기회는 한 번 줄게. 파를 가져가라. 엄마가 파를 잡으면 끌어올려라.” 이렇게 했어요.
천주교의 일종의 연옥설과 똑같은 거예요. 패자부활전 하나 주는 겁니다. 파를 하나 쭉 주니까, “엄마, 나다! 이 파를 잡아라. 그러면 극락 갈 수 있어.” 그래서 엄마가 파를 딱 잡으니까 그래서 따라 왔거든요. 그러니까 옆 동에 있는 아줌마가 나도 잡자고 하니까 엄마가 “오지 마. 나만 가야 해. 이것은 내 아들이야. 네 아들 아니야.” 내 아들, 나, 내 것, 나다움, 그게 과연 극락에서 용납이 될까요?
사람들은 말합니다. “지금은 나 중심이지만 천국 보내주면 내가 착하고 바르게 살겠습니다.” 그런 거 없습니다. 그런 것은 내 욕심이에요. 주께서는 나를 없애기로 작정하시고 말씀을 주십니다. 그 말씀 따라가게 되면 우리는 고맙게도 그 골칫덩어리, 감당 못 할 내가 그 말씀 안에서 사라지고 죽습니다. 나는 사라지고 남는 것은 십자가와 부활만 남게 돼 있어요. 복음만 남게 되어있습니다.
나는 점점 더 옅어져 갑니다. 점점 더 사라져 갑니다. 내 안에 말씀만 드러나죠. 그 말씀 안에 내가 준비하지 아니하는 나, 내가 예상하지 아니하는 나, 주님께서 이미 마련한 나가 주님 안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겉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고후 4:16) 이 사실을 성경 전체에 깔아 놓았습니다.
그러면 불교식으로 말해서, 파를 잡는데 내가 파를 잡을 수가 없어요. 내 속에 있는 주님이 이 파를 잡는 거예요. 이 파, 긴 대파를 잡아야 해요. 불교 표현으로 하는 기독교 복음은 그렇습니다. 내가 잡는 것이 아니에요. 우리는 언약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에 내가 잡을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와 계약한 것이기 때문에 해도 예수님이 하시지 내가 하는 게 아니에요. 내 속에 들어온 그 말씀을 이루신 예수님이 아버지와 계약해서 우리를 건져내시는 겁니다. 그런데 건져낼 때 나는 예수님의 말씀에 의해서 내가 제거되는 작업을 주께서 해 주시는 거예요. 우리를 떨쳐내는 거예요.
이걸 어렵게 해서 이렇게 합니다. 신은, 하나님은 어디 있느냐? 내 내면에, 안에 있다? 아닙니다. 내 안에 있는 외면에 있어요. 내 내부에 있는 외부에 있습니다. 외부가 내 안에 들어온 거예요. 그게 바로 내 안에 ‘예수 안’을, 새로운 공간을, 영토를 형성시킨 겁니다. 조건이 있어요. 그 조건은, 우리 안에, ‘주님 안, 예수 안’이라는 외부 공간이 내 공간 속에 들어오는 조건은 내가 말씀에 의해 늙어 죽어야 된다는 사실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가 늙어 죽는 것을 그렇게 좋아했어요. 빨리 죽고 싶어했습니다. 여러분들이 컴퓨터 게임 하잖아요. 벽돌 깨기 게임이 있어요. 딱딱한 콘크리트가 있으면 위에서 벽돌이 와서 칠 때마다 깨지는 거예요. 말씀이 올 때마다 말씀이 나를 뜯어가는 거예요. 분해시키는 거예요.
뜯어가게 되면, 나비 채집통, 나비가 오글오글 모여 있는 거기, 그 뚜껑을 열면 나비가 자동적으로, 자발적으로 날개 펼치면서 통 안에서 나비가 날아가죠. 우리 안에 누적된 말씀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되어 하나 둘씩 뜯겨가며 날아가는 거예요. 네가 죄 짓는 거, 심지어 네가 헛짓하는 이 모든 것이 말씀의 완성 차원에서 하나의 펄럭이는 Butterfly, 하나의 나비가 돼서 주님 쪽으로 전부 다 완성된 모습을 드러내는 겁니다.
차 폐차할 때 폐차장에서 문짝부터 해서 다 뜯어내잖아요. 말씀은 우리를 다 뜯어내는 거예요. 히브리서 4장의 말씀입니다. 말씀이 우리 안의 골수와 그 모든 것을 다 뜯어내는 거예요. 그거 볼 때마다 LA갈비 생각하는데요. 갈비에 붙어 있는 살점 하나 전부 다 “이게 바로 윤리 도덕이었어. 이게 선악 체계였어!”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 왜 때리십니까?”가 나오는 거예요. 왜 때리십니까. 피조물 주제에 자기가 자기 인생을 자기가 감당하려고 한 거예요.
누가복음 19장에 보면 열 므나 이야기가 나와요. 므나라고 하는 것은 화폐 단위인데요. 남성이 백 일 동안 일 한 품 삵이 1므나예요. 그 1 므나를 주인이 종 세 명에게 한 므나씩 줬어요. 주면서 “내가 왕위를 가지고 다시 올 때까지 너희는 열심히 장사하고 뭘 해라.” 하고 자기 종에게 주었습니다.
여기서 어떤 사람은 1 므나 가지고 10 므나 남겼어요. 주인이, 내 영토에서, 예수님이 왕이 되는 영토에서 “열 고을 다스려라.” 어떤 사람은 5 므나를 남겼습니다. “네가 다섯 고을을 차지한다.” 그런데 세 번째 사람은 20절에 “또 한 사람이 와서 가로되 주여 보소서 주의 한 므나가 여기 있나이다. 내가 수건으로 싸두었었나이다. 이는 당신이 엄한 사람인 것을 내가 무서워함이라 당신은 두지 않은 것을 취하고 심지 않은 것을 거두나이다. 주인이 이르되 악한 종아 내가 네 말로 너를 판단하노니 너는 내가 두지 않은 것을 취하고 심지 않은 것을 거두는 엄한 사람인 줄을 알았느냐.” 하고 그 은을 뺏어버리죠.
인간 속에 하나님 자신이 들어왔다가 나갔다는 말은, 인간 속에 주님의 말씀이 들어왔다가 나왔다, 이 말이거든요. 들어왔다가 나오면서 자기 자신이 파괴가 돼야 하는데, 파괴가 되지 않으면 내가 누구의 종이 아니잖아요. 예를 들어 인사할 때 “주인님 잘 계십니까?” 하고 상대방이 물어볼 때 “나 잘 있어요.” 이렇게 대답하는 거랑 똑같은 거예요.
“아니, 당신 말고 당신을 종으로 부리는 주인님 잘 계십니까?” 이렇게 물으니까 “나 요새 운동 열심히 하고 잘 있어요.” 이러고 있다고요. “너 말고, 너 주인님!” “어? 나 주인님 없는데?” 이게 마귀 모습이잖아요. “내가 주인이야, 내가 나에게 주인이야. 나 훌륭하게 되려고 교회 나왔어.” 이러고 있다 이 말이죠.
므나를 줬다는 것은 주인의 것이 우리에게 삽입되어 있다는 거예요. 그런데 관심사가 주인의 것이라는 것에는 관심이 없고, 하나님을 스카우트 한 거예요, 인간들이. 내가 잘 되기 위해서 하나님이 있다고 생각한 거예요, 내가 잘 되기 위해서. 자기가 주인이고 하나님을 고용한 겁니다.
그래서 어떻게 스카우트해서 하나님을 이용하냐면, 하나님이 알고 있는 모든 지식을 본인이 다 받아들이는 거예요. “내가 남에게 대접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했습니다.” 이렇게 나오는 거예요. 주께서 주신 말씀은, 내가 너를 지옥 보낸다고 할지라도 넌 거기서 할 말이 없다는 것을 일깨우기 위해서 그 말씀을, 산상설교를 준 거예요.
심지어 저주를 준다고 할지라도 인간은 거기서 “고맙습니다.” 이렇게 해야될 게 인간이란 말이죠. 어떤 인간도, 예수님 빼놓고 어떤 인간도 마귀로부터 자유로운 인간은 없습니다. 따라서 그걸 알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10원 놓고 빼는 장면입니다.
구약에서 욥기 말고 요나에서도 마찬가지에요. 요나 4장 1-2절에 “요나가 심히 싫어하고 노하여 여호와께 기도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내가 고국에 있을 때에 이러하겠다고 말씀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므로 내가 빨리 다시스로 도망하였”습니다.
이어서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그래서 “예, 예, 좋은 것은 다 갖고 계시네요. 하지만 왜 저의 의견과 다릅니까?”라고 요나가 이야기해요. 아까 욥의 반말은 ‘왜 이유없이 저의 인생에 치고 들어오십니까? 하나님이여! 치신 분이 하나님 맞지요? 하나님 맞는데 내가 아는 하나님하고 왜 이렇게 다릅니까?’ 하는 거예요.
하나님은 “네가 네가 생각하는 너와 다르다는 생각은 왜 못했는가?” 하는 거예요. 그 생각을 왜 못했는가? 너는 마귀의 존재를 전혀 의식 못 하고 있다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너는 네가 사는 게 네 사명이 아니고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드러내는 것이 네 사명”이라는 겁니다. 지금 마귀는 욥을 치기 전에 악마와 내기한 거예요. 그게 하나님의 일인 거예요.
그런데 욥은 악마가 제거된 상태에서 하나님을 생각한 겁니다. 악마 없이 하나님과 직접 좋은 관계 유지한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악마 같은 것은 자기가 싫어한다는 겁니다. 악마가 있을 이유가 없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자기에 대해서 몰라도 너무 모르는 거지요. 그런데 요나같은 경우에는 자기가 사명자에요. ‘사명자인데 왜 이제 와서 내 사명을 끊어버리십니까?’ 하는 뜻이에요.
사명 줘도 문제에요. ‘인간은 사명이 있어야 된다.’ “사명이 있어서 사명대로 했는데 왜 이 사명을 끊어버립니까?” 정답은 이거예요. “네가 준 사명은 그 사명이 잘리기 위한 사명이다.” 잘리기 위한 사명이에요. 욥이 되었든 요나가 되었든 어떤 인간도 잘려야 되는 겁니다. 어떻게 수완을 부리고 어떻게 해결해서 될 일은 없습니다.
그렇게 해서 구약 지나서 신약에 옵니다. 자, 신약에 오게 되면, 그러면 모든 인간은 죽었고 저주받을 수밖에 없지요. 신약에서 지난 시간에도 했지만 사도행전에서 청년들에게 한 이야기를 다시 말씀드립니다. 사도행전 2장 17절 “하나님이 가라사대 말세에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판타지지요. 젊은이들은 판타지, 환상을 보는 거예요. 환상의 특징은 내가 만들지 않았다. 내가 원하지도 않았어요. 내가 나를 감당하기 위해서, 관리하기 위해서 내가 요청하지도 않았습니다. 나의 스케줄, 나의 인생 목적에 전혀 포함되지 않는 요소가 청년들에게 주어진 겁니다. 그러면 이 청년들에게 주어진 판타지는 누가 준 것인가?
성령이 주신 거지요. 성령이 주신 거예요. 그러면 성령은 언제 오시는가? 성령은 예수님이 죽음에 넘기우고 난 뒤에 오신 게 성령이에요. 그러면 이것은 모든 시간이 응축이 되어서 완료가 된 거예요. 모든 인간은 죽었다는 것이 확정되고 난 뒤에 오는 것이 성령입니다. 모든 인간은 죽은 거예요. 자기가 꿈틀거리면서 구원받으려는 노력도 소용없어요. 죽은 자가 노력해 봐야 그것은 죽은 것이니까 소용없습니다.
구원 자체가 소용없어요. 천국도 그것은 빈껍데기예요. 소용없는 거예요. 방법은 뭐냐? 말씀을 완성하신 예수님에게만 방법이 있습니다. 그분의 것이 내 속에 들어올 때만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겁니다. 그게 판타지에요. 그게 환상입니다. 내 것이 아닙니다. 왜 그래야 되는가? 고린도후서 3장에 보면 모세 이야기가 나옵니다.
모세가 시내산에서 내려올 때 그냥 온 게 아니고 돌판 들고 온 것은 다 아시지요. 돌판을 들었는데 돌판 말고 또 모세가 한 일이 있습니다. 자기 얼굴에 수건을 덮은 거예요. 자, 이 수건을 왜 덮었는가? 수건은 하늘과 땅 사이에 경계선을 표하는 겁니다. 인간이 만들어내는 것과 하나님이 주시는 것과의 차이를 수건으로 표시한 겁니다.
인간이 자기가 스스로 자기를 감당하기 위해서 자기가 이 세상에서 밥 먹고 살기 위해서 애썼던 모든 것이 하늘의 것 앞에서는 하나님의 것을 감당 못 하게 만드는 요인이 되었다는 거예요. 하늘의 것이 하늘의 것으로 오려면 그냥 오는 게 아니고 ‘우리가 뭘 해도 나는 실상은 죽은 자일 뿐이고 늙어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이 당연하다. 그 정도로 나는 죄인이다.’ 이렇게 되어야 하는데 인간은 스스로 살고자 하는 그걸로 무장되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주신 돌판을 해석을 하지 못하고 모세 얼굴에서 비추이는 영광도 보지를 못하는 거예요. 그 뒤에 모세가 주는 말씀, 율법도 이해를 못 하고요.
그래서 율법을 이해하려면 그 수건이 거둬져야 이해가 되거든요. 그 수건이 언제 없어지는가? 고린도후서 3장 14절에 보면 “그 수건은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질 것이라.” 그 수건은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진다는 겁니다. 자, 오늘 설교에서 제일 어려운 대목에 우리가 도달했습니다. 쉽게 말씀드리면 이렇습니다.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라는 책에 나옵니다.
고양이가 웃어요. 막 웃어요. 고양이가 웃다가 사라져버립니다. 고양이는 사라졌는데 고양이의 웃음소리는 그 현장에 그냥 남아 있어요. 세상에 이런 판타지가 어디 있어요? 이것은 뭐냐? 고양이의 존재보다 사건이 우선 있었다는 거예요. 육신으로 나타난 그 예수님의 존재보다, 곧 성자 되시는 하나님의 약속이 이 땅에 있는 육신보다 먼저 계신 거예요.
어디에? 하늘나라에 먼저 계신 겁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었잖아요. 이제 우리에게는 육신이 와해되고 분해되어서 말씀화되는 거예요. 그 말씀은 창세 전에 십자가라는 사건이 우선 있고 그 십자가라는 사건을 위해서 성자 하나님이 이 땅에 육신을 입고와야 되는 거예요. 그래서 육신을 입고 오신 예수님은 임시적이에요.
요한복음 20장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부활하고 난 뒤에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지려고 하니까 뭐라고 하느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만지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못하였노라.”(17) 아버지 앞에서 살지 못한다면 그것은 영생이 아닙니다.
지금 예수님은 엄청난 일을 하시는 거예요. 천하의 죄인인 우리를, 말씀에 입각해서 볼 때 죄인일 수밖에 없는 우리를……, 남에게 대접하라는 이 말씀도 우리속에 어떤 죄가 들어 있는가를 폭로하는 말씀이거든요. 나 건드리면 죽여버린다, 나는 네가 나한테 해준대로 갚아주는 사람이라는 것, 그게 우리한테 무장되어 있다는 사실, 주께서는 ‘남에게 대접받고자 한대로 남을 대접하라’는 그 지킬 수 없는 말씀으로 우리에게 접근하신 거예요.
모든 말씀이 다 그런 말씀이에요. 죽어 마땅한 거예요. 저주받아 마땅한 거예요. 사명 잘리고 다 잘려도 우리는 마땅한 겁니다. 그 마땅함, 마땅함이 어디에 집약되어 있는가? 사건에 집약돼요. 무슨 사건? 십자가 사건에 집약되었고 이스라엘은 바로 그 사건을 운반하는 책임을 가지고 애굽에서 나왔던 민족이 이스라엘민족입니다. 어린양의 죽음.
피밖에 없어요.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라’고 주께서 이야기하신 것은 네 몸과 내 몸이 호환관계, 어떻게 내가 조치해서 먹는 게 아니고 삽입되어 있고 스며 들어가게 되어 있는, 교환되게 되어 있는 새로운 몸으로, 내가 말씀으로 그런 네 몸을 만들어내겠다는 겁니다. 어떤 몸? 천하의 죄 된 몸이지만 그걸 의인으로 만들어내겠다는 것은 주님의 자기 숙제고 자기 성과였어요. 그게 바로 ‘예수 안’에서 이루어지는 겁니다.
“어떻게 그런 현상이 일어납니까?” 이제는 내가 이 땅에서 살기 위해서 애썼던 그 모든 내가 기억하고 있는 것 대신에 판타지로 다 바뀌는 거예요. 말씀으로 바뀌는 거예요. 나라는 육신이 살아 있는 말씀으로 다 바뀌어 나가는 거예요. 여러분이 어떤 사람이 성도라고 할 때 뭘로 아느냐 하면, 그 사람이 변했다, 그걸 통해서 알잖아요.
변할 때 그냥 변하지 마시고 말씀과 연계해서 변하시기 바랍니다. “전에 나는 잘 먹고 잘 사는 그것이 나의 희망이었는데 그게 예수님의 피를 대신할 수 없었고 그것은 모래위에 지은 집 같아.”라고 할 때 그 사람은 벌써 두 개의 말씀을 동원한 거예요. 모래위에 지은 집은 망한다는 말씀이 그 사람 속에 살아 있고, 예수님의 피가 우리의 모든 죄를 사했다는 그 말씀이 살아 있는 거예요.
“그런데 내가 이 말을 해도 남들이 못 알아먹고 안 알아줘.” 벌써 그 사람은 말씀 하나가 더 들어갔어요. ‘넓은 길은 많은 사람이 가는 곳이다.’ 그 사람에게 어떤 변화가 있는데 그 변화가 말씀과 연계해서 일어날 때 그 사람은 지금 이동 중이에요. 어디로 가느냐? ‘천국이냐, 지옥이냐?’ 말씀이 계신 곳은 천국이고 말씀이 안 나오는 곳은 지옥이지요.
지옥에는 자기 정당성만 계속 고집하고 있습니다. 시키는대로 했습니다, 열심을 다 했습니다, 신학까지 공부했습니다, 어쩌고저쩌고……, 지금은 내가 못 하지만 시간만 주시면 지금보다 더 발전된 모습을 보여드릴 수가 있는데요, 지금도 내가 반성하고 있습니다. 반성좀 하지 마, 반성 좀 하지 마.
반성하겠다는 그것이 음모고, 마귀의 짓이에요. 반성이 왜 필요합니까, 반성이! 반성할 것 같으면 주께서 죽을 이유가 없잖아요. 반성하겠다는 것은 자기에게 미련이 있다는 말이에요. 반성하겠다는 말은요, ‘내 인생 그만 패세요.’ 하는 그 말이에요. 주의 인생 좀 패면 어떤데. 자기 것도 아닌데.
다 비워두는 거예요. 다 비우고 그게 탕자의 비유입니다. 허랑방탕, 다 날립니다. 아버지는 아들이 다 날릴 때를 기다렸지요. 판타지를 가지고 요한1서에서는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14절에서 어떤 말씀을 하고자 하느냐 하면 “너희가 흉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라.” 이 대목입니다. 이겼다. 이겼다는 거예요.
껍데기는 철딱서니 없는 육신, 껍데기인데 안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시고 너희가 흉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라.” 하는 것은 네가 뭘 하라는 말이 아니고 너희가 예수 안에 있으면 예수님이 너를 죽은 자로 간주해서 이긴 것으로 쳐주시는 거예요. 그러면 죽은 자를 어떻게 아느냐? 말씀이 우리로 하여금 우리를 죽은 자로 확정시켜 줍니다.
그냥 죽으면 안 되지요. 그것은 예수 밖의 죽음이지요. 예수 안에서 죽을 수밖에 없는 이유를 말씀이 우리 안에서 매일같이 증명해주는 겁니다. 성경 눈 감고 아무 구절이나 펼쳐서 “네가 어느 말씀 지켰나? 너 이 말씀 지켰나, 안 지켰나?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 말씀 지켰어, 안 지켰어?”
그러니까 어떤 말씀도 우리는 내 포기가 내 힘으로 안 된다는 것을 발견하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왜냐하면, 흉악한 자가 붙들고 있는데 흉악한 자를 심판함과 더불어서 우리의 육신도 같이 폐기되어야 되기에 그래요. 어떤 사람은 ‘뭐 귀신이 어디 있나?’ 하는데요. 인도네시아 여성들 한 번 보세요. 한국에 들어와 있는 인도네시아 여성들은 전부 다 스카프 다 쓰고 있어요. 공항에서부터. 그걸 히잡이라 합니까?
그걸 머리에 다 쓰고 있어요. 내가 보면 귀신들렸어요. 그거 왜 씁니까? 심지어 얼마나 그 귀신이 지독한지 배구하면서도 그걸 쓰고 있어요, 배구하면서도. 아시안 게임할 때. 유도하면서도 쓰고 모든 스포츠에서 다 쓰고 있어요. 축구하면서도 쓰고요. 이게 무슨 짓이에요? 그걸 왜 씁니까? 신에게 버림받지 않기 위해서.
그러니까 하나님이 그들을 버린 거예요. 나를 위한 신을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런 자를 버리는 겁니다. 우리 내부에 우리가 생각하지 전에 외부가 우리가 생각 못 한, ‘나 있다’와 ‘내 바깥에 있다’ 이전에 그것 말고 다른 외부, 생각지도 못한 외부, 생각지도 못한 판타지 그게 바로 성령께서 오시게 되면 모든 시간은 예수님이 이뤘던 그 시점부터 모든 것을 거꾸로 돌려서 우리로 하여금 “이 철딱서니 없는 젊은 자야, 너희가 복음이 훼손되지 않게 하라. 악한 자를 의식하라. 마귀를 의식하라.”라고 새삼스럽게 완성된 입장에서 우리에게 주는 거예요.
그 말씀을 지키는 게 아니고 그 말씀이 우리 안에서 작동하고 있는 겁니다. 그럴 때 이 성경 한 구절 한 구절, 이 말씀이 다 주께서 이루신 말씀이라는 것을 발견하는 겁니다. 그걸 가지고 수건이 그리스도 안에서 벗겨져서 이제는 내가 살았다, 가 아니라 내가 말씀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겁니다.
예수님 안에서 이 말씀 이 자체가 ‘우리는 못하고 주께서 홀로 다 이루었다’는 사실을 발견하는 그러한 사람,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증인’이라고, ‘예수님의 종’이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혹시 나중에 누가 여러분에게 “당신 주인 잘 계시느냐?” 할 때 “우리 주님 우리 안에 잘 계신다.”고 이야기해야지…, 그런데 “나는 잘 있다.” 하지 마시라는 말을 하기는 싫어요.
왜냐하면 그렇게 말해도 못 알아들으니까 그냥 이렇게 하세요. “너 잘 있나?” “나 잘 있어.” 이렇게 하시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