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8월 4일 드디어 꿈속에서나 그려보던 그리운 금강산을 출발하는 날이다. 물론 오늘 출발하여 실제 금강산은 내일 속초에서 출발하지만 새벽에 가는 것보다는 하루 일찍 올라가서 설악산을 구경하기로 하였다. 9시 30분 경주를 출발하여 설악산으로 올라가는데 휴가철이라 동해안의 피서 인파로 인해 교통이 많이 막혀 차가 제대로 달리질 못한다.
설악동에 도착하니 6시가 다 되어간다. 오늘 설악산 구경은 다 틀린 일이다. 짐을 내려놓고 잠시 주위를 둘러보지만 하늘은 온통 구름이 끼여 언제 비가 쏟아질지 모를 상황이다. 저녁을 먹고 모두가 여흥을 즐기로 간다.
어제 낙남정맥을 다녀와서 제대로 휴식도 취하지 못한 상태에서 곧바로 오다보니 조금은 피곤한 상태에서 오늘도 장시간에 걸쳐 차를 타서 그런지 피로가 겹치는 것 같다. 늦게까지 놀다가 잠을 청했다. 아침에 눈을 뜨니 밖에는 비가 많이 내린다. 그토록 기다리고 기다리던 북한땅을 밟아보는 기회요, 금강산을 구경할 기회인데 이렇게 아침부터 추적추적 서글프게도 비가 내리다니...
비옷을 입고 버스 승강장에 잠시 기다리니 속초 여객터미널 가는 버스가 온다. 1시간여에 걸쳐 가니 여객터미널이라 한다. 터미널에 가니 아직 사람들이 얼마 없다. 너무 일찍 온 것 같다. 대합실에 기다리고 있는데 대구에 계시는 선생님이 이곳에 와 계시다. 인사를 하니 자기들도 금강산을 간다고 한다. 무척 반갑다.
터미널에서 미화 100달러를 바꾼다. 금강산에서는 달러만이 통용된다고 해서 바꾼 것이다.
11시 조금지나 출항수속을 마치고 설레이는 마음으로 우리 일행은 설봉호에 오른다. 배가 생각했던 것 보다 큰 것 같다. 설봉호는 1998년에 건조된 최신형 배로 길이 114.5m, 폭 20m, 시속 17.8노트, 배수량 9258톤급이며 속초와 장전항(북한에서는 고성항이라 함)을 최고 3시간 30분만에 갈 수 있는 쾌속선이라고 한다. 또한 이 배는 400명 수용규모의 객실 89개와 별도로 330개의 좌석을 갖추고 있고, 승객 730명, 승무원 70명 등 최대 800명이 탈 수 있으며, 여러 가지 부대시설도 갖추고 있다.
이번 여행에는 정부의 지원을 받아서 금강산으로 가는 선생님들이 많은 것 같다. 승무원 중에는 외국인들이 많은데 나중에 알고 보니 필리핀 사람들이라 한다. 아마도 임금이 싸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점심은 배 안에서 육개장으로 대신한다.
12시 30분 드디어 배가 움직이기 시작한다. 배는 서서히 속초항을 빠져나가기 위해 기적소리를 몇 번 울린다. 갑판 위로 올라가니 이제 비는 그쳤고 많은 사람들이 올라와 구경을 하고 있다. 속초항 일대를 둘러보는데 멀리 뒤로는 설악산과 울산바위가 한눈에 들어오는데 언제 보아도 너무너무 멋있게 보인다. 속초항 바로 앞에는 자그마한 무인도가 하나 외롭게 떠 있고 물보라를 일으키면서 배가 항구를 빠져나간다. 속초항이 제법 멀리 보이고 바다물결은 매우 잔잔하다.
시간이 지날수록 보이는 것은 검푸른 바다뿐이요, 지금 어디쯤 가고 있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지만, 아마 영해를 벗어나 공해상을 항해하고 있지 않을까 짐작해 본다. 선실에 누워 있는데 방송으로 곧 군사분계선을 넘어간다고 해 다시 갑판으로 급히 뛰어 올라간다. 날씨는 맑아서 멀리 통일전망대가 보이고 그 위쪽으로 남쪽 군사분계선과 휴전선 그리고 북쪽 군사분계선이 뚜렷이 보인다.
그런데 육지에서 공해상으로 너무 멀리 우회하고 있는 것 같다. 분단이 아니었다면 바로 차를 타고 가던지 아니면 이렇게 멀리 우회해서 갈 필요가 없을텐데 생각하며 친구한테 전화를 하니 아직은 통화가 가능하지만 배는 서서히 휴전선을 넘어서고 있다. 한동안 남쪽 땅을 바라보다가 서서히 멀어지면서 가까이에는 북쪽 땅이 눈앞에 다가온다.
한참 후 선실에서 비디오로 입북을 위한 사전교육을 받았다. 고배율의 사진기, 망원경, 휴대전화기는 일체 반입이 허용되지 않는다고 한다. 그리고 북한주민을 자극하는 말과 행동도 해서는 안된다고 한다. 다시 갑판위로 올라가니 저 멀리 해금강과 금강산이 시야에 가까이 들어오며 해금강에 배가 한 두척 보이고, 금강산의 큰바위에 글을 써 놓은 것이 뚜렷이 보인다. 서서히 배는 장전항으로 진입을 하고 있는데 군사지역이라 사진촬영을 못하도록 한다.
장엄하고 화려한 금강산이 두 눈을 가득 채우고 항구에는 작은 어선과 조그만 군함이 떠 있는데 군함 위에서 군인들이 작업을 하고 있는 것 같다. 도착할 때가 다 되어서 그런지 승무원들이 선실로 들어가라고 하지만 조금이라도 더 감상하기 위해서 머뭇거리고 있으니 승무원이 먼저 내려간다. 오후 4시 30분 설봉호는 장전항에 입항하고 카메라를 챙겨서 하선을 한다.
하선이 시작되어 장전항 부두에 감격스런 첫발을 내딛는다. 41년만의 이 환희와 감격... 무엇으로도 말할 수 없는 흥분된 순간의 연속... 마침내 살아생전 북한땅을 밟아보고 금강산을 눈앞에서 바라볼 수 있다니... 부두에 내려서 입북심사장으로 조금 걸어가다 하니 초소가 있고 거기에는 김일성 뱃지를 단 북한사람들이 서서 지키고 있다. 조금 더 걸어가니 해금강 호텔이며, 현대직원인듯한 사람들이 그 앞에 서 있고 우리는 입북심사장에서 간단한 수속을 마치고 대기중인 버스로 향했다.
앞에 보이는 해금강 호텔은 길이 89.2m, 폭 27.6m의 지하 2층, 지상 6층의 규모로 160개의 객실에 450명이 묵을 수 있다고 하며, 연회실, 라운지 바, 가라오케, 레스토랑, 디스코텍, 기념품점 등을 갖추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아쉽게도 우리는 설봉호에서 생활을 해야하므로 해금강 호텔 생활은 다음 기회로 미루어야 했다.
조금은 긴장이 되었지만 막상 버스에 올라타니 기사님은 조선족이라 한다. 버스는 길 양쪽으로 높다랗게 철조망이 쳐진 사이로 난 도로를 따라 달려간다. 곳곳에 군복을 입은 북한 군인들이 아무런 표정도 짓지 않은채 무표정하게 경계를 서고 있는데 북한 주민들이 거주하는 마을로 통하는 곳에는 어김없이 군인들이 서서 지키고 있다. 아마 남쪽 관광객들과 북한주민들이 접촉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가슴아픈 일이다. 내민족 내겨레이면서 서로 갈라져 서로를 원수처럼 여겨야 하는 현실이 서글프고 안타까울 뿐이다. 당장이라도 뛰어내려가 부둥켜 안고 흥겹게 둥실둥실 춤이라도 추었으면 좋으련만... 아! 가슴아픈 조국의 분단현실이여...
현대에서 닦았다는 관광전용도로 옆으로는 북한사람들만 다닐 수 있는 비포장도로를 따라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북녘동포들의 모습도 보인다. 여기가 최전방이라서 그런지 자동차는 보이질 않고 자전거를 타고 가는 사람들도 있다. 오른쪽에는 철로가 나 있으며 열차가 거의 다니지 않아서 그런지 녹이 잔뜩 슬어 있는것 같다. 그리고 나무전봇대와 전화선이 보이지만 남쪽의 6-70년대 전봇대를 보는것 같아 가슴이 아프다.
어느새 버스는 온정리 금강산온천에 도착했다. 온천장 앞에는 학생들이 야영을 할 수 있도록 텐트들이 즐비하게 쳐져 있다. 온정리라는 지명이 말하듯 이곳은 온천으로 유명한 곳으로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김부)의 아들 마의태자(김일)가 금강산에 들어와 이곳에서 온천욕을 했다는 전설이 전해오며, 조선시대 7대 임금인 세조가 피부병에 걸려 고생하다가 이곳에서 온천수로 목욕을 한 뒤 깨끗이 나았다는 이야기도 전해온다.
온천비는 꽤나 비싼편이다. 10달러를 주고 들어가니 사람들이 별로 없어서 그런지 물은 깨끗하고 온천을 둘러싸고 있는 아름드리 소나무숲이 멋있다. 그리고 멀리 보이는 금강산의 비경은 가히 절경이다. 온천을 마치고 온정각까지는 걸어가도 된다기에 걷고 싶은 마음은 꿀떡 같았지만 갑자기 비가 내려 하는수 없이 버스를 타고 온정각까지 이동을 한다. 북녘땅을 조금이라도 더 많이 밟아보고 싶었는데...
온정각에 도착하여 식당에서 뷔페식으로 저녁을 먹는데 그런대로 맛있게 먹었다. 단지 북한음식이 아닌 우리 음식을 먹었다는데 조금은 아쉬움이 남지만... 저녁을 먹고 이리저리 거닐면서 기념품들을 둘러보지만 가슴에 와 닿는 물건을 찾을 수가 없다.
밖에는 온정리를 둘러싸고 있는 우뚝우뚝 솟은 암봉들이 천하의 절경을 이루지만 마음대로 다닐수도 없으며 북녘주민들과는 일체 단절되어 대화를 나눌 기회가 전혀 없는 아쉬움을 남긴다. 다시 버스에 올라 설봉호로 향하지만 주위는 온통 어둠으로 감싸여 있고 차창밖으로 사방을 둘러봐도 불빛이라곤 찾아보기가 힘든다.
3년전 통일연수를 갔을때 북한에서 심각한 것은 식량도 문제지만 전력난에 허덕인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막상 와서보니 불빛을 찾아보기가 어렵다는데서 북한의 전력난이 얼마나 심각하다는 것을 짐작 할 수 있겠다.
입국수속을 마치고 나오면서 우리일행은 내일 구룡연으로 가지만 저는 만물상을 갈려고 가기전부터 마음을 먹고 있었던지라 도저히 포기 할 수가 없어서 우리의 안내를 맡은 이상헌씨에게 내일 만물상을 갈 수 있도록 몇번이나 부탁을 하니 두사람만 바꾸어 주겠다는 다짐을 받은 후 설봉호에 올랐다.
어둠에 잠긴 장전항을 바라다 보지만 바다를 오가는 배는 한척도 보이질 않으며, 저 멀리 건너편 해안에서 비추는 밝은 탐조등만 쉴 새 없이 돌아가면서 어두운 밤바다를 비추고 있다. 밤늦게까지 술로 쌓인 피로와 회포를 풀지만 북녘땅에서의 첫날밤은 찢어지는 가슴을 부여잡고 회한을 남긴채 그렇게 지나가고...
8월 6일 떨어지지 않는 눈을 어렵게 뜨니 7시가 넘었다. 오늘은 기다리고 기다리던 금강산 제일의 명승지요, 금강산에서 산악미를 대표하는 만물상을 가는날로 형형색색의 모양을 나타내는 기암괴석의 천연 조각미를 감상할 수 있는 날이지만 애석하게도 밖에는 추적추적 비가 내리고 있다.
늦게 일어난 덕분으로 아침도 먹지 못하고 대충 준비를 해서 입북심사장을 지나 버스에 오르니 8시쯤 되었다. 오늘은 산행 후 오후에는 해금강 해수욕장에서 해수욕을 하기로 되어 있지만 비가 내리는 관계로 취소되어 산행에 약간의 여유가 있다고 한다.
온정각에서 한참을 기다리다 8시 50분이 되어서야 만물상으로 떠난다고 한다. 우리는 미리 부탁해 놓았기 때문에 일행은 구룡연으로 떠나고, 이상명 선생과 저는 만물상 가는 차로 갈아타게 되었다. 만물상 가는 4호차로 갈아타니 마침 안내는 대구에 사는 정정심아가씨가 친절하게 우리를 맞이해 주었고, 생각과는 달리 거의 대부분 연세가 많으신 어르신네들이다. 저 연세에 만물상 전체를 구경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생긴다.
차는 서서히 출발하여 김정숙 휴양소, 금강산 여관, 금강산 초대소를 지나간다. 금강산 여관은 외국인들이 북한을 방문했을때 이용하는 곳이고, 금강산 초대소는 외국의 귀빈들이 머무는 영빈관이라고 생각하면 될 것 같다. 버스는 서서히 울창한 송림사이로 난 길로 들어서니 아름드리 미인송(금강송)들이 꿋꿋한 기상을 자랑하며 하늘높이 치솟아 있다.
이곳 미인송은 세계3대 송림중의 하나로 손꼽힐 정도로 유명하다. 드디어 진짜 금강산에 들어온 것이다. 금강산 1만2천봉을 보기전에는 산수의 아름다움을 논하지 말라고 했듯이 예로부터 수많은 시인 묵객들이 찾아와 그 절경을 읊은 금강산! 이루말로 표현하기 힘든 뛰어난 아름다움을 간직한 그리운 금강산에 마침내 발을 들여놓은 것이다.
백두대간 줄기에 자리잡은 금강산은 행정구역상으로는 강원도 고성군과 금강군, 통천군 등 3개의 군에 걸쳐 있으며, 남북으로 60km, 동서로 40km에 이르는 규모로 금강산의 주봉은 비로봉으로 그 높이가 1639m에 이른다. 이 비로봉을 중심으로 금강산은 외금강, 내금강, 해금강으로 구분한다.
설악산과 마찬가지로 비로봉의 동쪽지역은 외금강으로 산세가 웅장하고 씩씩하여 남성적이라 할 수 있는데 비하여 내금강은 비로봉의 서쪽 내륙지방을 차지하고 있으며 산세가 수려하고 우아한 것이 여성적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해금강은 외금강의 산줄기가 동해쪽으로 뻗어나가 바다의 금강을 이루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며, 금강산은 다른 산과는 다르게 유달리 봉우리가 많아 1만 2천봉을 자랑한다.
또한 금강산은 계절에 따라 그 이름도 각각 달리 하는데 만물이 소생하는 봄에는 금강석과 같은 보석에 비유하여 금강산이라 하고, 여름에는 녹음이 우거진 계곡과 산봉우리에 흰구름과 안개가 감돌아 마치 신선과 선녀가 사는 산이라 해서 봉래산이라 한다. 가을에는 단풍으로 온 산이 붉게 물들어 형형색색의 옷을 갈아입는다고 하여 풍악산이라 하며, 겨울에는 흰눈에 덮인 고목들과 바위들의 모습이 마치 뼈와 같다고 해서 개골산 혹은 설봉산이라고 한다.
온정리에서 온정천을 따라 서쪽으로 한하계곡을 거슬러 오르면 온정령에 이르는데 이 사이가 금강산 제일의 경승지라고 하는 만물상 구역이다. 이 길은 일제 강점기에 찻길로 닦이어 내금강 내강리까지 이어지며 대관령이 아흔아홉구비인데 비해 온정령은 백여섯 굽이를 돌아돌아 올라야 한다고 할 정도로 험한 굽이도 많고 가파르다.
온정천 왼쪽으로 보이는 봉우리가 상관음봉, 중관음봉, 하관음봉 연맥이고, 오른쪽으로 처음 보이는 봉우리는 수정봉, 그다음으로 문수봉인데 이들 물줄기와 산봉우리 사이에 이루어진 계곡이 한하계이다. 한하계는 아침 저녁으로 '찬 안개가 낀 골짜기'라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한하계 왼쪽을 따라 붙으며 중천에 닿을 듯 한껏 솟아오른 관음연봉은 날카로운 암릉에 연속된 돌산인 데다 산세가 험준하고 쭈뼛뿌뼛한 능선이 겹겹으로 쌓여 있어서 웅장한 느낌을 준다. 관음연봉 동쪽 끝 암봉에 관음상을 닮은 큰 바위가 버티어 솟아 있는데서 '관음'이란 이름이 생겼다.
곰바위를 지나다보면 까마득한 암벽에서 떨어지지 않으려는 듯 앞발을 뻗치고 목을 쭉 빼든 채 골짜기를 내려다보는 듯한 모습이 꼭 곰을 닮았다. 곰바위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져 내려온다.
옛날 비로봉 골짜기에서 살던 곰 한마리가 봄을 맞이하여 수정봉 양지를 향해 가다가 중관음봉을 넘어서는데 문주담 맑은 물속에 작은 돌들이 지난해 떨어진 도토리가 수북하게 쌓여있는 것이 같아 보였다. 그리하여 단숨에 삼키고 싶은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뛰어내렸으나 문주담에는 이르지 못하고 중관음봉 중턱의 절벽 위에 떨어지고 말았다. 그 바람에 발이 바위 속으로 움푹 빠져 들어가 꼼짝달싹을 할 수 없게 되었다고 한다. 곰은 그래도 도토리를 먹으려는 생각으로 한눈을 팔지 않고 물속만 바라보았다. 어느덧 세월은 흘러 곰은 한 알의 도토리도 먹어보지 못한 채 돌로 굳어지고 말았다고 한다.
곰이 내려다보는 곳으로 눈길을 돌리면 바로 맑은 물을 담고 있는 문주담이다. 찻길에서는 보이지 않지만 예전에는 금강산 안에서 규모가 가장크다는 옥류담에 버금가는 규모였으나 여러 차례 홍수가 나서 지금은 규모도 줄어들고 형체도 달라졌다고 한다.
그러면서 사슴을 구해주고 팔선녀 중 한 선녀의 옷가지를 숨긴 인연으로 아들딸 낳고 살았다는 '나무꾼과 선녀' 전설 속에 나오는 팔선녀가 목욕하던 장소가 문주담이었지만, 지금은 여러 차례 홍수가 난 뒤로 문주담이 메워져서 모습이 달라지자 팔선녀의 전설은 외금강 구룡연 구역의 상팔담으로 무대를 옮겼다고 한다.
다시 관음폭포를 지난다. 관음연봉에서 흘러내리는 폭포라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며, 비가 많이와서 엄청난 수량을 자랑하며, 올라가는 길에는 앞이 조금 가려져 내려올 때가 더 잘 보이며, 폭포의 길이는 37m이고 폭은 4m에 달한다고 한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버스를 타고 가면서 바라볼수 밖에 없는 안타까움이 앞선다.
다음은 육화암(눈꽃바위)이다. 금강산을 사랑하여 자기의 호마저 봉래라고 하였던 양사언의 '육화암'이라는 글씨가 있다고 하지만 보이지 않는다. 상관음봉 줄기의 바위벽은 길이가 100m나 되며 모양이 삐쭉삐쭉하며 색이 희어서 달빛 아래에서는 틀림없이 육각형의 눈꽃송이처럼 보인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육화암에서 보면 육화폭포가 흘러내린다.
마침 비가 많이 와서 물이 흘러내리는데 이처럼 철에 따라 폭포로 나타나는 것을 '계절폭포'라 하며 육화폭포는 금강산에서 가장 큰 계절폭포 가운데 하나인데 지금 그 장관을 유감없이 마음껏 발휘하고 있다. 육화암에서 한하계는 끝이 나고 그 상류는 만상계이다. 육화암에서 약2km 되는 지점에 이르면 만상정이다. 주차장과 휴게소가 있는 만물상의 관문이 되는 셈이다.
여기서 계속 찻길을 따라 2km쯤 더 오르면 온정령 고갯마루가 나온다. 이곳은 온정령 백여섯 굽이 가운데 일흔일곱 굽이째라 하며 차는 서서히 주차장에 멈추어 서니 9시 30분 만물상 등산로 입구에 도착한다. 차례대로 내려서니 각 차별로 간단한 설명을 하고는 산행이 시작된다. 여기는 해발이 약 615m정도 된다고 한다.
주차장 바로 위에는 만상정이라는 정자가 있고 그 뒤에는 김일성 주석이 1947년 9월 27일 여기서 교시를 내렸다는 비석이 세워져 있으며, 옆에는 시원하고 물맛이 좋아 마시면 무병장수한다는 만상천이 있다. 흔히 이 만상정 부근을 네거리라고 하는데, 이곳에서 온정동, 만물상, 온정령으로 통하는 길이 나 있고, 또 계곡 건너로 금강산의 북쪽 주능선인 상등봉으로 가는 길이 있기 때문이다.
곧이어 만나는 것은 무사바위(장수바위)이다. 그 생김새가 갑옷을 입고 투구를 쓴 무사의 모습과 흡사하며, 이곳은 문짝과 지붕이 없는 대문과 같아 만물상대문이라고도 한다. 무사바위를 지나면 바로 왼쪽으로 삼선암이 나타나는데 다리를 건너면서 우리차에 탄 사람들이 함께 상선암을 배경으로 기념촬영을 한다.
나란히 선 세개의 바위가 하늘높이 치솟아 있는데 구름이 흐를때 바위들이 움직이는 듯 한 모양이 꼭 하늘에서 내려온 신선 같다고 해서 붙인 이름이다. 보기도 좋게 키 순서대로 나란히 서 있는 이 거창한 바위들은 모두 30~40m는 되어 보인다.
위로부터 첫번째인 상선암은 바위라기 보다 날카롭고 예리한 창을 모아 세운것 같고 두번째 중선암과 세번째 하선암, 그리고 삼선암 맞은편 벼랑 위에 외따로 솟은 바위 하나는 옛날 네 신선이 금강산에 내려와 장기를 두었는데, 한 신선이 훈수를 너무 많이 하다가 세 신선으로부터 미움을 받고 밀려나서 외떨어져 있게 되었다는 독선암이며, 오늘날로 말하면 왕따를 당한 것이다. 신선들도 이럴진대 우리 속세의 인간들이란... 또한 삼선암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온다.
옛날 온정골에서는 해마다 동제를 지냈는데, 제삿날만 되면 젊은 처녀가 찾아와 10년이나 일손을 도왔다. 마을 노인이 고맙다는 인사를 하면서, 처녀의 집에 가보길 청하니, 처녀는 자신을 삼선암에 사는 월명수좌라 소개하면서 초청하였다. 약속한 날 마을 노인 몇이 삼선암을 찾아가 산해진미 대접을 받고 사흘을 놀다가 마을로 돌아왔으나, 마을은 온데 간데 없어지고 온통 쑥밭이었다. 한 마을 노인을 만나 물어보니 지금부터 210년 전에 노인 몇이 한 처녀를 쫓아갔다가 소식이 없어졌다는 이야기를 하더란다.
비가 계속 내리는 가운데 올라갈수록 만물상은 기암괴석과 층암절벽들이 수십길, 수백길 하늘높이 치솟아 올라 천태만상을 이루고 있다. 이 세상의 모든 형태의 물체들을 한 곳에 모아 놓은것 같은 형상을 하고 있다.
토끼바위, 새끼거북바위, 메뚜기바위, 독수리바위, 으뜸바위, 코뿔소바위, 왕관을 쓴 사자바위 등등 없는 것이 없을 정도이다. 조금 더 올라가면 왼쪽에는 칠층암이 나오는데 높이 30여m의 거대한 자연석인데, 마치 돌을 일곱 층 쌓은 것처럼 보이고, 꼭대기에는 뽀뽀를 하는 원앙새바위, 그것을 시샘하는 강아지바위가 있다.
오른쪽으로 세지봉 능선과 도끼에 찍힌 듯한 자국이 남아 있는 절부암 위로는 두더지바위 독사바위, 애기곰바위, 도마뱀바위, 부엉이바위, 물개바위, 꼬부랑 할머니바위 등 온갖 기묘하게 생긴 바위들을 볼 수 있다. 만불상이란 이렇듯 세상만물이 이곳에 다 모인 것 같다고 해서 유래된 이름이며, 문화유적 혹은 산행에서 알고 보는것과 모르고 보는것의 차이는 엄청나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게 한 산행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정정심 안내원을 바짝 뒤따르면서 설명과 전설을 듣다보니 많은 도움이 되었다. 절부암은 금강산 절경을 바라보는 선녀의 아리따운 아름다운 모습에 매혹된 나무꾼 총각이 청혼했지만, 선녀는 어디론가 훌쩍 날아가 버리고 나무꾼이 그 선녀를 만나고 싶은 안타까운 심정을 하소연할 길이 없자 도끼로 바위를 내려찍었다는 전설이 깃들어 있다.
10시 30분 망양대와 천선대 갈림길에 도착하니 오른쪽이 망양대로 가는 길이다. 돌계단 길이 계속 이어지고 가파른 곳에는 철계단이 놓여 있다. 제1전망대를 올라가면서 북쪽 안내인 두분과 함께 올라가면서 북쪽 백두대간에 대해 질문을 했지만 백두대간이라는 말뜻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다.
그래서 백두산에서 시작하여 지리산 천왕봉까지 능선을 연결하는 산줄기를 말한다니까 그때야 백두대산줄기를 말하느냐고 한다. 그렇다니까 가 보지는 못했지만 이야기는 들었다고 한다.
산을 오르면서 지금까지 휴지나 담배꽁초 한개를 구경할 수 없을 정도로 깨끗했으며, 금강산에는 금을 비롯한 광물자원이 매장되어 있지만 김일성 주석은 금강산을 보존하기 위해서 금광의 개발을 금지시켰다고 하니, 남한의 개발이라는 미명하에 백두대간 자병산과 추풍령의 금산 등을 마구 파헤치는 것과는 너무나 대조적인 모습이다.
망양대에 올라서니 깎아지른 듯한 절벽위에 있는 전망대에 오르니 저 멀리 비로봉이 바라다 보인다. 얼마나 보고싶은 비로봉이었던가. 직접 올라가 보지 못하는 안타까움이 있지만 그래도 멀리서 바라볼 수 있다는 것만 해도 천만다행이 아닌가.
거기에다 비가 내리지만 조망은 너무 좋아 정말 잘왔다는 생각이 들지만 만약 구름이 천지를 감싸버렸다면 어찌할뻔 했든가. 제1전망대를 거쳐 제2전망대에서 기념촬영을 하다가 몇해전 통일연수를 함께 받았던 청주에 계시는 선생님을 만났다.
이곳에서는 온통 보이는 것은 외금강의 수십 수백길의 깎아지른 바위봉우리들이 키재기를 하는 만물상과 금강산 연봉들을 바라보면서 한순간 넋을 잃다가 고개를 돌리면 푸르른 동해바다의 해금강이 한눈에 내려다 보인다. 다시 제3전망대에 올라서니 만상계와 한하계에는 구름바다를 이루고 있으며 잠시 비는 거치고 몇장의 사진을 찍는데 시간이 촉박하다면서 빨리 천선대로 가야된다고 한다.
하지만 비로봉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또 바라보며 남모를 감회에 젖어본다. 하루빨리 통일이 되어 저 비로봉 정상에 올라 금강산도 둘러보고 북쪽 백두대간을 종주해 보고 싶은 욕망을 숨길 수 없다. 서둘러 돌아내려와 안심대에 도착한다. 아래위가 다 절벽이지만 이곳만은 말안장처럼 생겨 마음놓고 쉴만하다고 해서 안심대라고 부르는 전망대가 있다. 안심대에서는 사람이 상상할 수 있는 형상의 바위란 바위는 모두 모아 병풍을 두른 듯한 만물상이 또다시 펼쳐지며 삐쭉삐쭉 기기묘묘한 바위의 집결체이다.
여기서 가파른 돌계단길을 잠깐 오르니 망장천이 나온다. 예로부터 이 샘물을 마시면 힘이 솟는 바람에 짚고 올라온 지팡이마저 잊어버리고 단숨에 천선대까지 오른다고 하여 망장천이라 부른다. 망장천에서 물을 한컵 마시고 가파른 돌계단길을 올라가니 높은 봉우리 사이로 구명이 뚫린 곳이 바로 하늘문이다.
금강산에는 자연적으로 생긴 돌문이 모두 8개가 있는데, 그 중에서도 하늘문이 제일 높은 곳에 있다. 이 돌문을 나서면 하늘을 오른다고 해서 하늘문 또는 천일문이라 하며, 이 하늘문이 없으면 천선대로 가는 길이 나지 않았을지도 모르며 천선대가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하늘문의 폭은 한 사람이 통과할 만하고 높이는 두어 길이 되며, 하늘문 서쪽바위에는 옛날 한 천재 소년이 썼다는 금강제일관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하늘문을 빠져 나와 한 굽이를 돌아 올라가면 천선대에 이르는데 하늘에서 선녀들이 내려와 놀았다고 해서 부른 이름이다. 비가 다시 내리면서 천선대 오름길은 많은 사람들로 붐비면서 길이 막혀 한참을 기다리다 올라서니 바람이 거세게 불고 좁은 공간에 많은 사람들이 몰려 차례대로 사진을 한장씩 찍고는 내려가곤 한다.
천선대에서 바라보는 만물상은 가히 천하의 절경이요, 정말 장관이다. 만물상의 경치가 너무나 좋아 하늘에서 선녀들이 내려와 놀았다는 천선대는 오른쪽으로는 수백길 깎아지른 듯한 낭떠러지요, 만물상 한가운데 자리잡고 있어 만물상의 뛰어난 경치를 한 눈에 바라볼 수 있는 금강산 최고의 전망대라 생각이 된다.
천선대에서는 비로봉의 일부가 보이며 뒤쪽에는 오봉산으로 불리는 일련의 바위 봉우리가 성벽처럼 둘러싸고 있다. 오봉산의 첫 봉우리가 우의봉, 무애봉, 천진봉, 천주봉, 천녀봉 등 다섯 봉우리로 이루어져 있으며 오봉산 오른쪽으로는 사람모양의 세지봉이 빙 둘러 솟아 있다. 한동안 넋을 잃고 둘러본다.
아! 우리의 조국, 그리운 금강산. 천하명승이라고 하는 금강산 절경, 만물상 중에서도 가장 만물상다운 이곳의 경관을 일러 '신만물상' 또는 '진만물상'이라 한다. 그러다보니 국가지정 천연기념물 제216호로 지정이 되어 있다. 이곳 천선대 서북쪽 아래 벼랑 중턱에는 둥그스럼한 돌확 두개가 있는데 옛날 선녀들이 놀다가 하늘로 올라갈 때 얼굴 치장을 하던 곳이라는 천녀화장호(天女化粧壺) 또는 천녀세두분(天女洗頭盆)이라고도 하는데, 온정리에 사는 비단녀가 앓아누운 늙은 부모를 공양하기 위해 꿈에 본 백발노인의 말대로 천선대 꼭대기에 천계화를 따러 갔다.
그러나 지금처럼 천선대에 오르는 길이 있는 것이 아니어서 천선대에 오르다가 높은 벼랑에서 굴러 떨어졌다. 이튿날 선녀들이 천선대 화장호에 얼굴 치장하러 왔다가 비단녀를 발견하여 살려준 뒤 백년에 한번밖에 피지 않는 하늘의 천계화를 쥐어주었다. 비단녀는 천계화로 마을의 아픈 사람과 부모를 모두 공양하였으나 욕심 많은 지주집에서 천계화를 탐하기에 선녀들이 가르쳐준 대로 천계화를 하늘로 보냈다. 지주는 자신의 딸을 천선대에 보내 천계화를 얻어오라 시켰으나 딸이 천선대에서 발을 헛디뎌 죽자 자신도 죽고 말았다. 이후 마을 사람들은 지주의 괴롭힘 없이 잘 살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내리는 비를 맞으면서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되돌려야 할 시간이다. 앞에 보이는 비로봉을 다시 한번 쳐다보면서 찢어지는 가슴을 부여안고 그래도 금강산의 가장 멋진 만물상과 비로봉을 보았다는 것으로 위안을 삼으면서 하산을 시작한다.
그리운 조국 나의 금강산아! 하루빨리 통일이 되어 다시 찾아올때는 꼭 비로봉뿐만 아니라 북쪽 백두대간을 밟아볼 수 있기를 간절히 기원하며... 하늘문을 지나 망장천과 안심대를 거쳐 절부암을 지나고 삼선암 앞에 도착하니 많은 사람들이 휴식을 취하고 올라갈때 그냥 지나친 귀면암으로 올라간다.
잠시후 귀면암 앞에서 사진촬영을 하는데 둥그런 돌 하나를 머리에 이고 험상궂게 우뚝 서 있는 모습으로 인해 다시 한번 쳐다보게 한다. 귀면암이라는 이름은 귀신의 얼굴 같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며, 어떤 사람은 날카로운 창 앞에 넋을 잃고 서 있는 귀신의 어수선한 얼굴 같아 그 도깨비 같은 모양이 제발 꿈에만 보이지 않게 해달라 했다고 하며, 귀면암 역시 국가지정 천연기념물 제224호로 지정되어 있다.
다시 되돌아 내려와 주차장에서 기다리는 동안 북측안내원들과 어울려 많은 이야기들을 나누다 12시 50분 버스에 승차하여 출발한다. 내려오면서 육화폭포와 관음폭포를 다시 한번 구경을 하고 내려오면서 일정대로 해수욕장에 가자고 하다보니 온정각에 도착한다.
아직 구룡연으로 가신분들은 도착을 하지 않았다. 오늘 일정은 만물상 산행을 일찍 마치고 해수욕을 하기로 되어 있었지만 비가 오는 관계로 취소 되었다고 한다. 조금은 아쉽다. 그런데 나중에 안 일이지만 우리가 타고 간 버스의 사람들은 해수욕장까지 다녀왔다고 한다. 그런데 우리는 점심을 먹고 쉬고 있는데 구룡연으로 간 일행들이 2시경 도착한다.
오후 일정은 4시부터 온정각 공연장에서 평양교예단 공연이 있는데 그때까지 휴게실에서 텔레비젼을 보면서 시간을 보낸다. 4시부터 온정각 공연장에서 평양 모란봉 교예단의 공연을 관람하였다. 북한의 대표적인 이 교예단은 국제 교예 축전에서 여러차례 입상을 하였으며, 인민배우, 공훈배우 등 일류배우들로 구성되어 있다고 한다. 두시간 여에 걸쳐서 공연을 선보였는데, 공중2회전, 널뛰기, 장대재주 등 여러가지 묘기를 관람할 수 있었는데, 특히 나의 관심을 집중적으로 끈 것은 장대재주 묘기였다.
우리는 나무에 올라갈때도 힘들고 어렵게 천천히 올라가는데 이 친구들은 사람이 아니라 다람쥐나 다름없을 정도였다. 얼마나 날랜지 그저 감탄사만 연발할 뿐이다. 저렇게 하기까지는 어린 배우들의 피땀어린 정성의 결과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힘들고 고통스러운 시간들을 보내면서 참고 인내하면서 저런 묘기를 펴칠수 있는 기량을 닦은 것이 아니겠는가.
약 2시간에 걸친 아슬아슬한 묘기를 관람하면서 우리는 적이 아닌 한민족, 한겨레로서 진한 동포애를 느낄 수 있는 시간이었다고 자부한다. 공연이 끝나자 모든 배우들이 무대에 나와 상냥하게 인사를 하고 웃는 얼굴로 손을 흔들어 보이자 관람석에서는 모두가 일어서서 박수로 화답을 한다. 이 순간이야말로 체제를 떠나 서로가 하나가 되는 순간인것 같다.
끝까지 악단, 조명 등을 관리하는 많은 분들까지도 마지막까지 정성껏 환송하면서 다시 한번 진하고 뜨거운 동포애를 실감하게 만든다. 이것을 보더라도 하루빨리 통일이 되어 서로가 부둥켜 안고 한마음 한뜻이 되어 오손도손 살아갈 수 있는 그날이 오기를... 공연관람이 끝나자 우리는 다시 금강산 온천으로 향했다.
많은 사람이 동시에 입장하여 어제보다는 다소 시끌벅적하면서 온천장은 만원을 이루었다. 노천탕에는 가랑비가 내리다 멈추다 한다. 온천을 마치고 나와서 온정각까지 걸어서 올려고 하는데 갑자기 소나기기 내려 하는수 없이 버스를 탄다. 마침 초등학교 학생들이 단체로 금강산 여행을 와서 온천장 앞 야영장에서 야영을 할려고 줄을 서고 있는 것을 뒤로 한채 차는 서서히 목적지를 향해 출발한다.
온정각에서 뷔페식으로 저녁을 먹은 후 기념품점에서 이것 저것물건을 구경하고 북한산 술을 구입한다. 북한을 대표하는 백두산 들쭉술을 살려고 하지만 어제부터 품절이 되어 이번 여행객들은 더 이상 구입을 할 수가 없다고 한다. 평양에서 가져오는데 보름정도의 시간이 걸린다고 하니, 조금은 아쉽고 안타깝지만 어찌하겠는가. 하는수 없이 다른 술을 구입한다.
8시 30분이 넘어서야 차에 올라 설봉호로 돌아오니 침대와 객실이 깨끗이 정돈되어 있다. 잠시 휴식을 취하다가, 10시 북한에서의 마지막 밤을 기념하기 위한 전체 회식을 가진다고 한다. 하지만 어제 저녁의 과음과 며칠동안의 피로가 누적되어 오늘은 술을 마시고 싶은 기분이 별로 들지 않는다. 몇잔 마시다 일찍 들어와 피곤한 몸을 자리에 눕히지만 왠지 쉽게 잠이 오질 않는다.
그렇게 그리워하고 고대하던 북한땅을 밟아보았지만 오히려 아쉬움을 간직한채 어렵게 꿈속으로...
8월 7일 금강산 여행 마지막날이다. 오늘은 삼일포와 해금강을 구경하는 것으로 2박 3일의 일정을 모두 마치고 짧은 시간이었지만 정들었던 북한땅을 떠나 남쪽으로 돌아가야 하는 날이다. 헤어짐이 아쉬운지 오늘도 계속해서 비가 내리는 가운데 온정각으로 향한다.
온정각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고는 삼일포로 떠난다. 길가에는 옥수수밭이 많이 보이고 옥수수밭에서 일을 하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 한 두명 보인다. 산에는 나무들이 거의 없는 상태이며, 논둑에는 한가로이 풀을 뜯어먹고 있는 소들이 보인다. 초등학교 다닐적에 학교를 마친후 집으로 돌아와 산으로 가서 소를 먹이던 생각이 떠오른다. 나의 고향을 연상시키는 이곳, 나의 살던 고향을 그리워하며, 정지용 시인이 읊은 향수를 떠올리게 하는 풍경이다.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회돌아 나가고,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그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
흙에서 자란 내 마음 파아란 하늘 빛이 그립어 함부로 쏜 활살을 찾으려 풀섶 이슬에 함추름 휘적시든 곳,
그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
하늘에는 석근 별 알 수도 없는 모래성으로 발을 옮기고, 서리 까마귀 우지짖고 지나가는 초라한 집웅, 흐릿한 불빛에 돌아 앉어 도란도란거리는 곳,
그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길 양쪽으로는 철조망이 높게 쳐져 있으며 북한주민이 다니는 길목에는 예외없이 초병들이 지키고 서 있으며, 길 오른쪽 북강에는 깨끗한 물이 흐르고 있는데 뛰어 들어가 물장구라도 치고 싶은 심정이며, 강 저편에는 넓은 들판이 펼쳐져 벼들이 한창 자라고 있다. 운곡리와 봉화리 마을을 지나 참대사업소를 지나는데 대나무숲이 울창하게 조성되어 있다.
이곳 대나무는 김일성 주석이 중국을 방문했을 때 선물로 받아 옮겨 심은 것으로 중학교 시절 교과서에서 배운 대나무식생의 북방한계선은 차령산맥 이남으로 배웠는데 여기서도 울창하게 자라고 있으니 뭔가가 잘못된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삼일포를 지나 삼일포 고등중학교 옆으로 지나가지만 방학이라서 그런지 아니면 비가 와서 그런지 운동장에는 학생들의 그림자도 볼 수가 없다.
버스는 송림이 우거진 언덕길을 올라 멈추어 선다. 전망대 입구에서 내려 현대 아산 안내원에게 북쪽 산에는 왜 나무가 별로 없느냐고 물으니 오히려 답변은 고사하고 그런 정치적인 질문을 하는 것을 알면 북쪽 사람들이 가만 있지 않을 것이라면서... 송림사이로 난 오솔길을 따라 걸어 올라가니 삼일포 전망대가 나온다.
이곳 전망대를 장군대라 하는데 충성각이라는 정자가 세워져 있어 삼일포 호수를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는 곳이다. 이곳 삼일포는 외금강 온정리에서 동남쪽으로 12km 떨어진 지점에 자리하고 있으며, 예로부터 관동팔경의 하나로 이름났고 호수 풍경으로서는 전국에서 으뜸으로 알려져왔다.
그래서 영조때 실학자 청담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고성의 삼일포는 맑고 묘하면서도 화려하고 그윽하며, 고요한 중에 명랑하다. 숙녀가 아름답게 단장한 것 같아서 사랑스럽고 공경할 만하다'고 했으며, 신라 때의 사선인 영랑, 술랑, 남석랑, 안상랑이 이곳에 하루쯤 다니러 왔다가 호수 경치에 취해 사흘 동안 놀았다고 한다.
그래서 삼일포라는 이름도 이들이 사흘 동안 놀고 갔다고 하여 생겨났으며, 호수 둘레는 약 8km인데 굴곡이 매우 심하고 물의 깊이는 9-13m에 이른다고 한다. 삼일포는 원래 만이었던 것이 동해안의 융기로 인해 모래가 쌓이면서 지금은 바다와 끊어져서 이루어진 호수로 예로부터 서른여섯 개의 크고 작은 봉우리들에 둘러쌓여 있으며, 그 자태가 잔잔한 수면에 담기어 있다고 할 만큼 호수면이 맑고 고요하다.
호수 가운데는 소나무 우거진 와우도와 사선정이 있는 단서암, 무선대 등 몇개의 큰 바위로 이루어진 작은 섬들이 놓여 있다. 예전에 신라의 사선이 놀았다는 사선정과 단서암은 신라 사선의 한 사람인 술랑이 세 자씩 두 줄로 써놓은 술랑도 남석행이라는글자를 새겨 놓았는데 글자가 붉은색을 띤다고 해서 단서암이라고 불린다. 장군대를 내려와 출렁다리를 건너면, 다음에는 봉래대에 이르게 된다.
100여명 정도 들어설 수 있는 넓고 평평한 바위로 여기서도 호수의 전경을 한 눈에 바라볼 수 있다. 봉래대라는 이름은 '태산이 높다하되'라는 시조를 지은 16세기의 유명한 시인이자 서예가인 봉래 양사언이 이곳에 와서 공부를 했다는데서 유래한다. 바위밑에는 암굴이 있는데 바로 양사언이 공부했다는 봉래굴이며, 이곳 삼일포 주변 바위 곳곳에는 김일성과 김정숙에 관련된 글들이 곳곳에 음각되어 있다.
비가 내리는 가운데 봉래대를 떠나 호숫가를 따라 단풍관으로 향한다. 전에는 식당이었다는데 지금은 문이 닫혀 있지만 한바퀴 둘러보니 이곳까지가 우리에게 허용된 관광구역이다. 다시 단풍관을 떠나 송림사이로 난 길을 걸어서 연화대로 오른다. 호수에서 바라보면 그 모양이 연꽃 같다하여 연화대 전망대라 하며, 삼일포에서 가장 이름난 전망대이다.
여기서도 기념촬영을 한 후 다시 버스에 올라 마지막 여행지인 해금강으로 떠난다. 삼일포 마을을 지나자 드넓은 고성평야가 나오고 고성평야 한가운데 앙상하게 뼈대만 남은 고성역사가 멀리 보인다. 6.25때 미군의 폭격으로 폐허가 되었다고 하며 고성역에게 간성까지는 기차로는 15정도 거리밖에 안되며, 남쪽 통일전망대에서 금강산까지는 13.7km라고 한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했는가? 이렇게 지척이다 싶은 가까운 거리를 장장 4시간이나 돌아서 오다니, 아니 이렇게라도 올수 있다는 것에 위안을 삼으면서 만족해야 하다니... 북한 군인들이 경비를 서고 있는 통문을 통과하면서 비무장지대로 들어가는 순간이다. 4-5m의 넓이로 이중철조망이 쳐져 있지만 철조망이 조금은 허술해 보인다.
남쪽의 철책선은 거의 장벽수준인데 비하면 북쪽에서의 이곳은 최남단으로 북한 주민들은 출입할 수 없는 최전방지역이다. 좁은 비포장길을 한참 가서 작은 언덕을 넘어서니 해금강이 나타난다. 기기묘묘한 바위섬들이 바다위에 떠 있으며, 전망대에서 바라보는 해금강은 바위절벽과 소나무와 바위섬과 바다가 한데 어울려 빚어낸 한폭의 진경산수다.
비가 내리고 바람이 부는 관계로 많은 지역을 관람할 수가 없다고 하면서 해금강문까지만 관광을 허용한다고 한다. 특히 해금강문은 촛대바위와 두개의 바위 기둥이 마주서서 마치 대문처럼 열려진 듯 보이는 금강문의 경치가 가장 유명하다. 이외에도 해금강의 절경으로는 해돋이, 해만물상, 물속의 해만물상, 입석과 솔섬, 사공바위와 칠성바위 등이 있지만 남쪽 관광객에게는 극히 일부분만 개방을 하고 있어 아쉬움이 커지만 어쩔수가 없는 일이 아닌가.
버스로 돌아오면서 어제 만물상 안내를 담당했던 정정심아가씨와 기념촬영을 하고 명함을 주면서 경주에 올 기회가 있으면 연락을 하라면서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면서 걸어오니 버스가 대기를 하고 있다. 버스에 올라타고 북측 안내원들과 작별을 한다. 우리도 북측 안내원도 하루빨리 다시 만날 그날을 기약하며, 회자정리라 했든가. 이별을 아쉬워하며 서로에게 손을 흔들어 답례를 한다.
이것으로 금강산 관광은 끝을 맺고 온정각으로 돌아가서 북한땅에서 마지막 점심을 먹는다. 점심을 먹고 간단한 선물을 구입하고 기다리니 버스를 타라고 한다. 아직도 밖에는 비가 내리는 가운데 온정각을 떠나 장전항으로 향한다. 출입국 사무소에서 간단한 출국수속을 마치고 설봉호에 올라선다.
2시에 설봉호는 2박 3일의 아쉬운 여정을 마치고 속초를 향해 출발하니, 헤어진다고 섭섭해서 토라져 버린 것일까? 아니면 우리가 싫어서 아무것도 보여주기 싫어서 그런지, 금강산은 운무속으로 자취를 감춘채 아무것도 보여주질 않는다. 서서히 설봉호는 남쪽을 향해 항해를 하지만 비는 계속 내리고 사방을 분간할 수가 없을 정도로 해무가 바다를 뒤덮고 바람이 거세게 몰아치지만 갑판위에서 마지막으로 한동안 금강산과 북쪽을 그리워하면서 혼자 넋이 나간 사람처럼 쳐다본다.
배는 북한 영해를 벗어나 공해상으로 나왔다가 해안을 따라서 속초항으로 향하고 있는데 운무로 휴전선과 북쪽 군사분계선은 물론 남쪽 군사분계선도 보이질 않으며, 오직 보이는 것은 넘실대는 파도를 뚫고 망망대해를 달리는 설봉호 뿐이다. 6시경 설봉호는 속초항에 입항하여 수속 절차를 마치고 기다리고 있던 버스로 옮겨 탄다.
내려오면서 낙산사 입구에 들러서 저녁을 먹은후 경주에 도착하니 다음날 새벽 2시가 조금 못된 시간이다. 이것으로써 2박 3일간의 금강산 여행을 마쳤지만 가슴속에는 언제쯤 다시 금강산과 비로봉을 올라보고 북쪽 백두대간을 밟을 수 있을지 기약할 수 없는 나날들과 싸우면서 통일의 그날이 하루빨리 다가오기를 갈망하고 학수고대하면서 남북이 하나되는 그날까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