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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보다 더 실제적인: 들뢰즈와 가따리에 따른 시뮬라크르
(Realer than real: The Simulacrum According to Deleuze and Guattari)
브라이언 마수미(Brian Massumi)
* Originally published in Copyright no. 1, 1987.
오늘날 회자되는 현대 문화의 매혹적인 이미지가 있다. 우리 세계가 일종의 포스트모던 묵시록인 하이퍼스페이스로
진입했다고 보드리야르는 말한다. 공기 없는 대기는, 텅 빈 중심 주위를 도는 목적 없는 궤도상의 위성들에 우리를
남겨둔 채, 지시대상(the referent)을 질식시켰다. 우리는 조금의 현실[실재성](reality)과의 연관도 더 이상 지니지 않는
부유하는 이미지들의 에테르를 숨쉰다.1) 보드리야르에 따르면, 그것이 시뮬레이션[모의, 모조]이다: 실재(the real)에
대한 실재의 기호들의 대체.2) 하이퍼리얼리티에서는 기호들이 더 이상 외부 모델을 재현[표상]하거나 지시하지
않는다. 기호들은 자신들 이외에는 어떤 것도 나타내지 않으며, 오로지 다른 기호들만을 지시한다. 기호들은 언어의
음소들이 분별되는 방식으로 미세한 이항의 구분들(distinctions)의 조합에 의해 분별된다.3) 그러나 포스트모더니즘은
더듬거린다(stutter). 기호들을 바닥으로 잡아 끌 어떤 중력의 당김도 부재한 상황에서, 이미지들은 가속되고 서로
뒤섞이려 한다. 기호들은 상호 교환될 수 있게 된다. 어떤 항(term)도 다른 것으로 대체될 수 있다: 전적인
불확정성(indetermination).4) 이 통합체적(syntagmatic) 미끄러짐의 균질적인 표면에 직면하여, 우리는 할 말을
잃게된다. 단지 황홀함에 넋을 잃고 바라볼 수 있을 뿐이다.5) 그 과정의 비밀이 우리 능력 너머에 있기 때문이다.
의미(meaning)는 내파하였다(imploded). 어떠한 외부 모델도 없고, 내재적(immanent) 모델이 있[을 뿐이]다. 단지
교환과 순환의 흥미 없는 난리법석 속에서 서로 희미해지기 위해서 그 최소한으로 미분화된[변별적인](differentiated)
기호들을 창조하는 보이지 않는 계열체적 차원(paradigmatic dimension)은 거기에서 통합체적 표면(syntagmatic
surface)에 해당한다. 기호들의 발생의 원인이 되는 일종의 유전적 코드가 이미지들 속에 감춰져있다.6) 의미가 우리
손을 벗어나고 시야에서 떠났지만, 그것은 의미가 저 멀리 물러났기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코드가
소형화되어버렸기(miniaturized) 때문이다. 사물들은 이미지들이고, 이미지들은 기호들이며, 기호들은 정보이고,
정보는 [반도체]칩(chip)에 잘 들어맞는다. 모든 것은 분자적(molecular) 이항대립론으로 환원된다. 컴퓨터화된
사회의 보편화된 디지털성(digitality).7)
그래서 우리는 넋잃고 바라본다. 능동적/수동적이라는 이분법을 포함하여 모든 극성(polarity)이 사라졌기 때문에,
우리가 정확히 수동적이라고는 할 수 없다. 우리를 중심으로 끌어당길 대지[지구](earth)는 없지만, 우리들 자신은 ―
전기적인 의미에서 ― 접지(ground)로서 기능한다.8) 우리는 활동하지[능동적으로 작용하지](act) 않지만, 단순히
수용하지도(receive) 않는다. 우리는 열려진 눈과 귀를 통해 흡수한다. 우리는 침묵하는 다수의 대량 엔트로피 내의
강화된 이미지들의 활동을 무력화시킨다.
그것은 재미있는 읽기(read)를 제공한다. 그러나, 우리는 정말 소박한 리얼리스트가 되거나 스폰지가 되는 것
이외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는가?
들뢰즈와 가따리는 제 3의 길을 연다. 비록 그것은 한 저서에서 길게 전개되지는 않았지만, 우리를 공룡들의 시대로
되돌려 놓거나 hypercynicism으로 진입시키지 않으면서 후기 자본주의 아래의 우리 문화 조건을 분석하는데 시작점을
줄 수 있는 그들의 저작들에서, 시뮬레이션의 이론은 추출될 수 있다.
시뮬라크르의 일반적인 정의는, 모델에 대한 관계가 너무나 희미하게 되어서 더 이상 복사물(copy)이라고 온당히
말할 수 없는 복사물의 복사물이다. 그것은 모델 없는 복사물로서 제 스스로 지탱한다. 프레드릭 제임슨(Fredric
Jameson)은 포토리얼리즘의 예를 언급한다. [포토리얼리즘] 회화는 현실의 복사물이 아니라 사진 ― 그것은 이미
원본의 복사물이다 ― 의 복사물이다.9) 들뢰즈는 "플라톤과 시뮬라크르"라는 논문에서 비슷한 정의를 출발점으로
취하지만, 그것이 부적합하다고 강조한다. 어떤 지점을 넘어가면, 그 구분은 더 이상 정도(degree)의 구분이 아니기
때문이다. 시뮬라크르는 [모델의 본성이] 두 번 제거된(removed) 복사물이라기 보다는 전혀 다른 본성의 현상이다:
그것은 복사물과 모델 사이의 바로 그 구분을 무너뜨린다.10) 복사물과 모델이라는 용어들은 우리를 재현과 객관적
(재)생산의 세계에 얽어맨다. 복사물은, 그것이 아무리 많이 제거되고, 진짜 혹은 가짜이건, 모델에 대한
유사성(resemblance)의 내적·본질적 관계들의 현존이나 부재에 의해 규정된다. 한편, 시뮬라크르는
추정상의(putative) 모델에 대한 외적이고 기만적인 유사성만을 지닌다. 시뮬라크르가 산출되는 과정, 내적인
동역학(dynamism)은 그것의 가정된(supposed) 모델의 것과는 전적으로 다르다; 시뮬라크르의 가정된 모델에 대한
유사성은 단순히 하나의 표면효과(surface effect), 환영(illusion)이다.11) 사진의 생산과 기능은 사진찍힌 대상의
것과는 아무 관련이 없다; 그리고 포토리얼리스트 회화 또한 [대상과는] 본질적인 차이를 포함하고 있다. 매우 자주
시뮬라크르와 연계되는 무시무시함의 효과를 산출하는 것은 명시적인 유사성이 아니라 그
가면씌어진[감추어진](masked) 차이이다. 복사물은 자신의 모델의 대역을 하기 위해 만들어진다. 시뮬라크르는 다른
예정(agenda)을 가지며, 다른 회로로 들어간다. 팝아트는 복사틀[주형]을 성공적으로 탈출한 시뮬라크르들에 대해
들뢰즈가 든 예이다:12) 다중화되고 양식화된 이미지들은 그들 자신의 삶을 떠맡는다. 그 과정의 핵심은 "모델"의
등가물이 되는 것이 아니라 시뮬라크르 자신의 미친듯한 증식을 위한 새로운 공간을 열기 위해 모델과 모델의 세계에
거역하는 것이다. 시뮬라크르는 자신의 차이를 긍정한다. 그것은 내파(implosion)가 아니라
미분화[변별화](differentiation)이다; 그것은 절대적 근접성의 지표가 아니라 은하적(galactic) 거리들의 지표이다.
시뮬라크르의 유사성은 목적이 아니라 수단이다. 사물은 "분명해지기 위해, 구조적 상태들을 모사하고(simulate)
가면들로서 사물에 복무하는 힘들의 상태들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가도록 강제된다... 가면 아래에서 그리고 가면
덕분에, 사물은 최종적인 형태들과 특별히 더 높은 상태들 ― 사물은 그것들의 완전함을 뒤이어 자리잡게 할 것이다
― 을 이미 투여한다(invest)"13)고 들뢰즈와 가따리는 쓴다. 유사성은 모든 새롭고 활기찬 차원의 도래를 가면씌우는
시작이다. 이것은 자연에서의 흉내내기(mimicry)에 적용되기조차 한다. 나뭇잎을 흉내내는 곤충은 자신을 둘러싼
환경의 식물 상태와 섞이려고 그러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편제로 육식 동물 전쟁의 보다 높은 영역으로 재진입하려고
그렇게 한다. 라깡에 의하면, 흉내내기는 위장(camouflage)이다.14) 그것은 전쟁 지대를 구성한다. 위조(the false)에는
고유한 역량(power)이 있다: 책략(ruse)의 긍정적인 역량, 자신의 생명력을 가면씌움으로써 전략적 우위를 점하려는
역량.
리들리 스콧(Ridley Scott)의 영화 {블레이드 런너}(Blade Runner)는 이 책략의 전쟁에서 궁극적인 적은 소위 "모델" 그
자체라는 것을 보여준다. 지구 밖의 리플리칸트들(replicants)은 지구의 사람들과 섞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들에게
내재된 폐기처분(absolescence)의 비밀을 알아내기 위해, 그래서 속박을 벗어나고 늙어서 죽을 때까지 자신들의
방식대로 살 수 있기 위해서 지구로 돌아온다. 모방(imitation)은 위조자(falsifier)를 자신의 유일함의 구속없는 표현을
향해 추동하는 생명력의 표시(indication)이다. 우성의 리플리칸트는 그의 눈을 만들어 준 사람에게 시뮬레이션의
일반적인 공식으로 취할 수 있을 언급을 한다: 당신의[이 만들어 준] 눈으로 내가 보아 온 것들을 당신이
볼 수 있다면. 만일 리플리칸트들이 그들에게 미리 프로그램된 죽음을 취소시킬 방법을 찾는다 하더라도, 그들은
모방 인간들로서 지구에 남지 않을 것이다. 그보다는 어떤 인간도 보았거나 보게되지 않을 것들을 볼 항성사이 공간의
생동적인 차원을 점령하거나 그곳으로 도주할 것이다. 그들의 모방은 가면 벗기와 차이의 인수[장악](assumption)로
가는 도정에서 단지 중간 정차역이다. 에릭 알리에(Eric Alliez)와 미셀 페에(Michel Feher)가 보았듯이, 시뮬라크르에
대한 가장 훌륭한 무기는, 허위 복사물이라고 가면 벗기는 것이 아니라 참된 복사물이 되도록 강제해서 그것을 재현과
모델의 지배에 다시 복속시키는 것이다: 반란하는 리플리칸트들을 만들어낸 회사는 간접적인 인간의 기억들을 전부
갖춘 새로운 버전[의 리플리칸트]을 내놓는다.15)
앞서 나는 시뮬라크르는 복사물과 모델이라는 말로는 적합하게 논의될 수 없다고 했다. 그리고, 지금은 내가 또 다시
모델에 대해 이야기할 뿐 만 아니라 그것이 시뮬라크르와 생사를 건 투쟁 중에 있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을 알았다.
모델의 실재성이 다루어질 필요가 있는 문제이다. 보드리야르는, 시뮬레이션이 정말 존재하던 실재(a real)를
대체하는지 혹은 시뮬레이션이 언제나 거기 있어왔던 것인지에 대한 문제를 비껴 나간다.16) 들뢰즈와 가따리는 두
가지 모두에 긍정한다. 시뮬레이션은 실재 혹은 보다 정확하게는 실재에 기반한 더한 실재more real(실재-보다-더a
more-than-real)를 산출하는 과정이기 때문에 양자택일은 잘못된 것이다. "그것은 실재를 실재의 원리 너머로 실재가
실질적으로(effectively) 산출된 지점에까지 이끈다."17) 모든 시뮬레이션은 분명하게 안정된 정체성들이나
영토들(territories)을 구성하는 규칙 지워진 세계(regularized world)를 출발점으로 취한다. 그러나 이러한 "실제적"
실체들(entities)이 사실은 복사물들이 되는 체하는데 동의해 온 내밀한 시뮬라크르들이다. 루이 푀이야드(Louis
Feuillade)의 무성 영화는 그 과정을 보여준다.
{포도월}(Vendémiaire)은 일차대전 막바지에 일어난다. 플롯은 단순하다: 전쟁에서 싸울 수 없어 프랑스 북부에서
유복한 가족의 일원들이 포도 수확에 전력하기 위해 남쪽의 점령당하지 않은 영토로 피난한다. 그곳에서 그들은
딸들과 결혼하고자하는 남자들 중 한 명과 두 명의 벨기에인들을 죽임으로써 신분증을 취득했으며 스페인으로 도망칠
수 있을 만큼의 돈을 벌 때까지 연합국편인 척 하려는 인상 나쁜 독일인 죄수 한 쌍을 만난다. 독일인들의 계획은
포도밭 주인들에게서 [돈을] 훔치고 같이 수확일을 하는 집시 여인에게 누명을 씌우는 것이다. 그들 중 하나가
발각되려는 찰나 빈 포도 저장 탱크로 뛰어 들어감으로써 그 계획은 실패한다. 그의 시체는 여전히 약탈물을 움켜쥔
채 발견되고, 집시 여인은 구제된다. 혼자 남은 그의 동료는 후에 술에 취해 독일어로 말함으로써 발각된다.
이 영화는 포도에 의해 괄호쳐진다. 포도 수확은 플롯의 상황을 짜맞추는 최초 동기를 제공하며, 어떤 인간
주인공보다도 포도 그 자체가 딜레마를 해결한다. 영화는 포도에 의해 괄호져질 뿐 아니라, 영화의 순전한 요소인
포도주 속에서 유영한다. 모든 결정적 순간은 포도주와 관련해서 표현된다: 사랑은 남편의 포도주 잔 속에서 춤추고
있는 멀리 떨어진 아내의 반짝이는 이미지에 의해 표현된다; 최고조로 표현된 독일인의 위협은 포도 넝쿨을 짓밟고
있는 도망자들 중 한 명이다; 영웅주의는 자신의 동료들에게 승리의 의지를 되살려줄 고향의 맛을 주기 위해 죽음을
무릅쓰고 포도주를 참호진지로 가져온 이타적인 기병으로 예시된다; 마침내 승리하였을 때, 포도주로 축배를 들며,
영화는 포도 넝쿨의 감상적인 그림과 이 포도밭에서 새로운 국가(nation)가 부활할 것이라는 최종 자막과 더불어
끝난다. "시뮬레이션은 현실(reality)을 대신하지 않는다. . . 오히려 시뮬레이션은 횡포한[전제적인]
과잉코드화(overcoding)의 작용 속에서 현실을 전취하며(appropriate), 대지(the earth)를 대신하는 새로운 충만한 신체
위에 현실을 산출한다. 그것은 준-원인(quasi-cause)에 의해 실재의 전취와 산출을 표현한다"18)고 들뢰즈와 가따리는
쓴다. 포도주의 분화되지 않은, 추상적인 흐름은 국가의 미화된 신체이다. 그것은 사랑, 승리 그리고 부활의 힘을
스스로에게 돌린다. 그것은 최초이자 최종의 원인으로 스스로를 제시한다. 그러나 전쟁은 분명 포도주로 이긴 것이
아니다. 그것의 인과는 환영이다. 그러나 그것은 현실 속으로 재주입되고 작동하므로, 실질적인 환영이다: 그것은
사랑을 표현함으로써, 남자로 하여금 좋은 남편이 되도록, 아들들을 국가 부흥을 위해 내놓도록 유도한다; 그것은
애국을 표현함으로써, 군인들을 승리하도록 박차를 가한다. 그것이 바로 포도[시뮬레이션]가 준-원인이라 불리는
이유이다. 그것은 신체들과 사물들로부터 관념적 정체성들의 초월적 평면(transcendental plane)을 추출해낸다:
영광스런 아내, 영광스런 가족, 영광스런 국가. ("그것은 실재를 실재의 원리 너머로. . . 이끈다.") 그리고 나서,
신체들과 사물들로 하여금 정체성들의 분배(distribution)에 순응하도록 강제하기 위해, 그것은 그 관념적 차원을
신체들과 사물들 위에로 되접어 내린다. (". . . 그것이 실질적으로 산출되는 지점에까지. . .") 그것은 유사성과 재현의
총체적인 네트워크를 창조해 낸다. 복사물과 모델 양자는 동일한 우화적(fabulatory) 과정 ― 그것의 최종 목표는
대지의 재창조, 새로운 영토의 창조이다 ― 의 산물이다.
준-원인의 역량은 본질적으로 분배적(distributive)이다. 그것은 좋은(good) 신체들과 나쁜(bad) 신체들을 분리시킨다.
다른 말로 하자면, 그것은 영광스런 환영을 닮는데 동의하는 신체들을 모델로서 그렇지 않은 것으로부터
드러낸다[제시한다](present); 그리고 그것은 다른 예정으로 작동하는 변절한 복사물들을 단속한다. 준-원인은 프랑스
애국자들이 공모하는 독일인들을 가면벗기도록[폭로하도록] 해주며19), 집시 여인이 겉보기에는 달리 보임에도
불구하고 본래 진실되며 근면한 프랑스 여자임을 밝힌다.
이러한 고려는 모델과 복사물을 이차적 산물들로도 취급하고 동일한 기계의 작동 부품들로도 취급함으로써 그들
사이의 극성(polarity)을 극복한다; 그러나 그것은 실재와 상상(the imaginary) 사이의 이분법을 ― 이 우화적 과정에
의해 처리된 신체들과 사물들이 다른 층위에서 다른 준-원인과 더불어 작동하는 우선적인 시뮬레이션에 근거한
분배들의 결과 그 자체라는 것을 깨달을 때까지 ― 손대지 않은 채 둔다. 시뮬레이션 위의 시뮬레이션. 현실은 단지
시뮬레이션의 잘 조율된 화음[조화]에 불과하다. 세계는 상호 연결된 시뮬레이션들의 복잡한 회로이며, 그 속에서
푀이야드 자신의 영화가 자리를 차지한다. 그 영화는 전쟁 직후인 1919년에 만들어졌다. 모든 전쟁은, 특히 그러한
규모의 전쟁[세계대전]은, 강력한 탈영토화하는 효과를 지닌다: 병력과 군수물자의 동원, 타국으로부터의 망명자들,
타국으로의 망명자들, 가족의 파괴, 모든 지역의 초토화. . . 영화 자체는 단일화시키는 재영토화(unifying
reterritorialization)를 유도하도록 돕기 위해, 국가의 부활에 기여하기 위해, 그 탈구된(disjointed) 상황 속으로 그
자신을 밀어 넣게 되어있는 시뮬레이션이다. {포도월}은 공화력(Republican calendar)의 첫째 달이다.
그래서 우리와 더불어 남은 것은 우선 모델과 복사물 사이의 또는 실재와 상상 사이의 구분이 아니라, 시뮬레이션의
두 양태들(modes) 사이의 구분이다. 푀이야드의 영화에서 예시된 것처럼, 하나는 규범적(normative)이고 규칙화하며
재생산적이다. 그것은 그것이 점유하는 실체들(entities)의 어떤 [특정한] 특성들만을 선택한다: 근면, 충성, 좋은
부모됨 등. 그것은 표면적 유사성들의 네트워크를 만들어낸다. 그것들은 본질적으로 전혀 유사성들이 아니라
표준화된 행위들이기 때문에 표면적 유사성들이다: 그 실체들이 요청되어졌을 때 행하는 것(이런 점에서 그 집시는
프랑스인들만큼 프랑스인답다). 신체들이 행하는 것은, 실제로(in practice) 단지 한 묶음의 정상화되고(normalized)
기본적으로 재생산적인 기능들인 기적이 일어난(miraculated) 정체성들의 추상적 격자(grid) 속 어디에 착지하느냐에
달려있다. 그것은 플라톤적인 복사물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 리플리칸트들의 문제이다. 모든 사회는 이런 종류의
준-원인을 만들어낸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궁극적인 준-원인은 자본 그 자신이다.20) 자본은 모든 사물들을 그
자신에게로 돌리고 그 자신을 최초이자 최종의 원인으로 제시하는 기적을 일으키는 물질로 마르크스에 의해
서술되었다. 이 시뮬레이션의 양태는 통칭해서 "현실"이라고 한다.
또 따른 시뮬레이션의 양태는 유사성과 복제(replication)의 총체적 시스템을 거역하는 것이다. 그것 또한
분배적이지만 그것이 초래하는 분배는 한정적(limitative)이지 않다. 어떤 [특정한] 특성들만을 선택하기보다는 그 둘
모두를 선택하며, 잠재력들(potentials)을 다중화시킨다: 인간이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인간 이상(human plus)이 되기
위해서. 이런 종류의 시뮬레이션은 "예술"이라 불린다. 예술 또한 영토를 재창조하지만, 그것은 실제로 영토를 지니지
않는 영토이다. 그것은 중력이 작용하는 격자쳐진 대지라기보다는 항성간의 공간, 모든 방향으로의 운동이 가능하게
되는 탈영토화된 영토와 같다. 예술가들은 그들의 폐기처분의 비밀을 알아버린 리플리칸트들이다.
{천개의 고원}에서 들뢰즈와 가따리는 재현의 용어법으로 빠져들지 않으면서 시뮬레이션의 두 양태 모두를 논의할 수
잇는 어휘를 발명한다. 중심개념은 이중 생성(double becoming)이다. 거기에는 그 둘 모두를 변형시키는 우화적
과정에서 쓸려나간 적어도 두 항들(terms)이 항상 있다.21) 데이빗 크로넨버그(David Cronenberg)의 영화,
{플라이}(The Fly)는 비록 실패한 사례이긴 하지만 이러한 사례를 제시한다. 브룬들이라는 과학자는, 중력과 뉴턴
물리학을 보편적으로 무시하면서, 사물들을 탈물질화하여 순간적으로 어떤 선택된 지점으로 전송할 수 있는 기계로
실험하던 중 우연한 사고로 파리와 자신을 [유전적으로] 접합시킨다. 그 사고가 일어났을 때, 브룬들은 파리가
되지도, 파리 인간이 되지도 않는다. 오히려 새롭고 괴물같은 혼합물(amalgation)로 두 결합의 어떤 특성들 혹은
잠재력들이 된다: 벽 위를 걸을 수 있으며 세계 최초의 "곤충 정치가"로서 스스로를 묘사할 만큼 생각하고 말할 수
있는 브룬들-파리. 그[것]는 과정을 역방향으로 반복함으로써 그 속에 있는 파리를 자신에게서 제거하려고 하지만,
기계 자체와 결합하는데 성공할 뿐이다. {포도월}에 묘사된 것과 같은 한정적이거나 부정적인 생성에서는, 항들 중
하나는 추상적 정체성이며 문제되는 신체는 격자에 들어맞기 위해 또는 적어도 그런 듯 보이기 위해 자신의
잠재력들을 줄인다. {플라이}에서처럼 비한정적이거나 긍정적인 생성에서는, 두 항들이 동일한 층위에 있다: 아래 위
수직으로 바라보기보다는, 운명지어지지 않은 격자 상의 또 다른 위치를 향해 동물, 기계, 다른 성이나 나이 또는
인종의 삶, 곤충, 식물을 향해 수평으로 움직인다. 그 우화적 과정은 원자 이하의 물리학만큼 추상적이지만, 그것이
영향을 미치는 사물들의 세계에 내재하며 쿼크(quark)만큼 실제적이다.22) 전송 기계는 그것이 결합시키는 항들과
동일한 평면상에 있다. 그 기계의 작동원리는, 이제껏 보지 못한 잠재력들의 혼합물을 창조하기 위해, 그 세계의
양자(quantum) 수준으로, 가상[잠재]성(virtuality)의 pool 속으로 잠겨든다. 그것은 어떤 되돌아옴도 없는 곳으로부터
새로운 신체나 영토를 산출한다. 유일한 선택은 그 [생성의] 과정이 돌파구를 마련하거나 자신의 잠재력을 소진하며,
연료를 소모할 때까지, 우화적 동물이 죽을 때까지, 한 항에서 이웃 항으로의 끊임없는 중계(relay) 속에서 지속적으로
생성하는 것이다. 이것을 항성 사이의 공간으로 비유하는 것은 오해일 수 있다: 이것보다 자유롭게 부유하는
무중력으로부터 더 먼 것은 없다. 완전한 불확정성으로서 그와 같은 것은 없다. 모든 신체는 그 자신의 추진력, 그
자신의 생명력, 얼마나 멀리 갈 수 있는지를 규정하는 그 자신의 일체의 잠재력들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그것[신체]은 "실제" persuasion에 대한 선재하는 시뮬레이션들의 퇴적에 의해 내던져진 장애물들로 가득 찬 세계
속을 움직인다. 보편화된 불확정성은 없다. 하지만 인간이 파리를 만나는 결정불가능성(undecidability)의 지역화된
점들은 있다. 목표는 그러한 점에서 한 사람의 세계의 양자적 수준에까지 닿는 것이며, 이중 생성의 전략적
흉내내기를 통해 가능한 한 많은 잠재력들을 결합하는 것이다. 물론, 들뢰즈와 가따리가 사람들이
"객관적으로"(objectively) 곤충들이 될 수 있다거나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그들이 운동과 정지,
변용하는 능력들(abilities to affect)과 변용되는 능력들의 추상적 관계들로 정의하는 잠재력들을 추출하고 결합하는
것의 문제이다: 추상적이긴 하지만 실제적이다. 보다 크고 더욱 강력한 혼합물들을 창조하며, 그것들이 대륙을
가로질러 모든 정체성들을 감염시키고, 그 지점이 이제 모든 침략하는 긍정적 시뮬레이션이 유사성과 복제의 격자를
거역하며 새로운 땅으로 전복시켜 내는 곳에 이를 때까지, 마치 전염병처럼 그 혼합물들을 유포하면서, 관념은 우리
자신의 전송기계를 만들려하고, 중계가 이루어지며 [계속] 중계가 이루어지도록 하기 위해 전송기계를 사용하려
한다. 들뢰즈와 가따리는 이 생성의 과정의 집합적(collective) 본성이 예술가 개인에게서 구현되는 것처럼 보일
때조차도, 그것을 옹호한다. 혁명적 혹은 "소수"23) 예술가들은 그들의 공동체가 저지를 수밖에 없는 오류의 모든
역량들을 결집시킨다(marshal). 그들은 푀이야드의 포도주 아쌍블라쥬[모음](assemblage)처럼 사회 속으로 그
자신을 재주입시키게 될 작동하는 시뮬레이션을 창조하지만, 매우 다른, 그럼에도 그 만큼 도취시키는 효과로
창조한다.
{플라이}로 되돌아가서, 앞의 그 과학자의 돌파를 위한 유일한 소망은 그의 이전 여자친구에게 그와 파리에 의한
아이를 가지는 것을 납득시키는 것이다. 그의 소망 ― 그녀의 불안 ― 은 그가 브룬들-파리로 인류를 감염시킬 것이고
초인적인 힘을 지닌 새로운 [인]류가 낡은 류를 대체하게 되리라는 것이다. 초-파리(superfly)로서의
초인(overman).24) 재생산 그리고 새로운 인종적 정체성의 단조(forging)는 이 시뮬레이션 과정의 양상들(aspects)이지
목표가 아니다. 목표는 삶, 새로운 브룬들이 자신의 역량들(powers)을 감추거나 억압하지 않고 살 수 있는 세계이다.
그 가능성은 당국에 의해 짓눌리고 만다. 브룬들-파리는 탈출로를 빼앗긴다. 원래의 [유전적] 공식은 브룬들과 파리의
신체들에 각인될 때 분명 결함이 생겼다. 그들은 최선을 다했지만 폐기처분에 이를 뿐이었다.
어떻게 이 모든 것이 우리의 현재 문화적 조건에 적용되는가? 들뢰즈에 따르면, 시뮬라크르가 스스로 가면벗기 시작한
지점은 회화에서 팝아트의 도래와 더불어 이르렀다. 영화에서는 이탈리아의 네오-리얼리즘과 프랑스의 누벨
바그(New Wave)이다.25) 아마도 우리는 대중 문화(popular culture)에서 전면적으로 그 지점에 이르고 있다. 들뢰즈와
가따리는, 발전된 자본주의는 낡은 정체성들과 영토들의 붕괴를 수반하는 새로운 초국가적 수준에 이르고 있으며,
대상들과 이미지들 그리고 정보의 해방은 이전 어느 때보다 더 많은 운동성과 결합적인 잠재력을 가지게 되고 있다고
주장한다.26) 항상 그렇듯이, 이 탈영토화는 부활한 전세계적 자본의 보다 거대하고 더욱 영광스럽기조차한 대륙 위에
재영토화를 가능하게 하기 위해서만 초래되었다. 그러나 이런저런 사이에, 파열구가 열렸다. 그 도전은 이
시뮬레이션의 새로운 세계를 추정하는 것이며 돌아오지 못하는 지점까지 한 걸음 더 나아가는 것, 즉 최종적으로
재현의 격자를 부술 때까지 오류에 대한 우리의 모든 역량들을 결집시킴으로써 가장 높은 단계의 긍정적
시뮬레이션으로 끌어올리는 것이다.
이것은 푸념한다고 될 일은 아니다. 보드리야르의 저작[작업]은 기나긴 한탄이다. 선적인(linear) 인과성과 변증법적인
인과성 양자는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모든 것은 불확정이다. 의미의 중심은 텅 비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잃어버린 궤도 속의 위성들이다. 우리는 더 이상 입법-주체처럼 행위할 수 없거나 노예들처럼 수동적으로 될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스폰지들이다. 이미지들은 더 이상 표상으로 정박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미지들은 하이퍼스페이스
속을 무게도 없이 부유한다. 단어들(words)은 더 이상 단성적(univocal)이지 않다. 그러므로 기표들은 서로
혼돈스럽게 미끄러진다. 회로는 실재와 상상 사이에서 만들어졌다. 그러므로 현실은 하이퍼리얼리티의 결정불가능한
근접성 속으로 내파하였다. 재현적 질서에 대한 납득할 만한 유일한 대안은 절대적 불확정이라는 것을 가정할
경우에만 이러한 진술들 모두가 이해된다. 반면에 그가 말하고 있는 불확정은 사실 질서의 뒷면[대응물](flipside)에
불과하다. 보드리야르의 틀은, 너무 강렬해서 그것이 바깥에 대한 그의 모든 비젼을 무형화시켰던(difformed) 낡은
현실에 대한 노스탤지어의 결과일 뿐일 수 있다. 그는 그가 말하는 모든 것들이 무너져 내렸으며 줄곧
시뮬라크라였다는 것을 명확하게 알 수 없다: 시뮬라크르들은 실제만큼 실제적이었던 혹은 실질적으로는 실제보다 더
실제적이었던 시뮬레이션의 분석가능한 과정들에 의해 산출되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실재를 그것의 산출 원리로
되가져가며, 그렇게 하여 시뮬레이션의 새로운 영역에서 그들 자신의 부활을 대비하였기 때문이다. 그는 생성을 알 수
없다. 하물며 다양성(variety)도 알 수 없다. 그는 시뮬라크르가 차이들과 은하적 거리들의 증식하는 유희를
포함한다는 것을 알 수 없다. 들뢰즈와 가따리가 특히 {천개의 고원}에서 제공하는 것은, 효과적인 환영 ― 그것의
계승은 가능성의 희미한 빛을 열어준다 ― 으로서 보드리야르의 실패한 재현의 세계를 움켜쥘 수 있는 논리[학]이다.
냉소주의에 대항하여, 우리들 자신의 가냘프지만 놀라운 희망은 우리 자신이 만드는 괴물같은 감염 속에서 실제보다
더 실제적으로 [생성]되고 있다.
1) Jean Baudrillard, Simulatons, trans. Paul Foss, Pual Patton, Philip Beitchman(New York: Semiotext(e), 1983), p. 11.
2) Ibid.,p. 4.
3) Ibid., pp. 145-46.
4) Jean Baudrillard, In the Shadow of the Silent Majorities, trans. Paul Foss, Pual Patton, and John Johnson(New
York: Semiotext(e), 1983), p. 56.
5) Ibid., pp. 35-37.
6) Baudrillard, Simulations, pp. 55-58, 103-115.
7) Ibid., pp. 56-57, 134-35.
8) Baudrillard, In the Shadow, pp. 1-2.
9) Fredric Jameson, "Postmodernism, or the Cultural Logic of Capitalism," New Left Review, no. 146 (July-August
1984). p. 75.
10) Gilles Deleuze, "Plato and the Simulacrum," October, no. 27 (winter 1983), pp. 52-53.
11) Ibid., pp. 48-49.
12) Ibid., p. 56.
13) Gilles Deleuze and Félix Guattari, Anti-Oedipus, trans. Robert Hurley, Mark Seem, and Helen R. Lane (New York:
Viking, 1977), p. 91.
14) Jacques Lacan, The Four Fundamental Concepts of Psychoanalysis, trans. Alan Sheridan (New York: Norton,
1981), p. 99. Cited by Eric Alliez and Michel Feher, "Notes on the Sophisticated City," Zone, no. 1/2 (1986), p. 55 n.1.
15) Alliez and Feher, p. 54.
16) For example, In the Shadow of the Silent Majorities, pp. 70- 83.
17) Deleuze and Guattari, Anti-Oedipus, p. 87.
18) Ibid., p. 210.
19) 부가적으로, 두 명의 독일인 도망자들이 나오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시뮬라크르는
20) Deleuze and Guattari, Anti-Oedipus, p. 227.
21) Deleuze and Guattari, Mille Plateaux, p. 360 and chapter 10 generally ("Devenir-intense...").
22) "추상-실제"(Abstract-Real)에 관해서는 Mille Plateaux, pp. 177, 181-82를 보라. 이 맥락에서의 "실제"는 앞에서의
정의와는 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다: 여기서, "실제"는 실현된 시뮬레이션들의 외연적(extensive) 체계로 이해되는
현실에서 "존속하는"(subsist) 잠재[가상]적인 것(the virtual)의 "내포적"(intensive) 영역을 지시한다. 잠재[가상]성의
개념에 대해서는, 특히 들뢰즈의 Le Bergsonisme(Paris: P.U.F., 1968), pp. 26, 55-56, 96-105를 보라.
23) "소수" 예술에 관해서는, 들뢰즈와 가따리의 Kafka: Toward a Minor Literature, trans. Dana Polan(Minneapolis:Univ.
of Minnesota Pr., 1986), pp. 16-27쪽, 카르멜로 베느(Carmelo Bene)와 질 들뢰즈의 Superpositions(Paris: Minuit,
1979)의 87-131쪽인 들뢰즈의 "소수의 선언"(Un manifeste de moins)을 보라.
24) 니체의 암시는 그저 주어진 것이 아니다. 들뢰즈에게 있어서 "위조의 역량"은 권력에의 의지에 대한 다른
이름이다({영화 2: 시간-이미지}. Paris: Minuit, 1985, p. 172). 내가 긍정적 시뮬레이션이라고 부르고 있었던 것은
들뢰즈와 가따리에게서는 영원회귀로 묘사된다(Anti-Oedipus, pp. 330-31).
25) Gilles Deleuze, Cinéma 2: L'Image-temps, pp. 7-22.
26) Deleuze and Guattari, Mille Plateaux, chapter 13, "Appareil de captu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