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캄보디아(KINGDOM OF CAMBODIA) 여행기
● 여행경비
개인당 599,000원 2,995,000원
유류할증료(개인당 54,200원) 216,800원
입국비자신청비용(개인당 U$20) 131,100원
가이드비용(개인당 U$40) 262,200원
옵션여행경비(U$300) 393,300원
기타비용 200,000원
환전 U$1,200 (환율:1,311원) 1,573,200원
● 힌두교사원의 여행시 기본적으로 알아야 할 것
-시바신
힌두교에는 대표적인 3명의 주신인 시바신, 비슈누신, 브라하마신이 있으며 시바신은 10개의 팔과 4개의 얼굴을 가졌으며, 눈은 셋이고, 용의 독을 마셨기 때문에 검푸른 목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머리에 달을 이고 호랑이 가죽을 걸치고 다니는데, 황소 등에 올라타 신비인 우마와 함께 히말라야 산중에 살며, 창 ·활 ·도끼와 날이 세 개 달린 창 등의 무기를 가지고 있습니다.
사람을 죽음으로 몰아가기도 하고 열병을 가져오기도 하는 무서운 신이지만, 춤과 음악을 즐기며 이를 관장하고, 고행자에게는 은혜를 베풀며 생식을 지배하는 신으로 보기도 합니다. 부의 신, 행운의 신, 파괴의 신으로 불리우며 힌두교 신자가 가장 많이 섬기며 좋아하는 신이며 신전도 가장 많음
-라바나
라크샤사(인도의 악신)의 수령(首領)으로 머리가 10개, 팔이 20개, 다리가 4개인 브라마의 총애를 받으려고 1만 년의 고행(苦行)을 실천하고, 1,000년마다 머리를 하나씩 바쳐오다가 10번째 머리를 바치려고 할 때, 신의 은총으로 불사신의 힘을 얻었다. 그 후 힘이 더욱 커져, 신들까지도 노예로 부릴 정도였으나 영웅 라마의 아내 시타를 빼앗았기 때문에 원숭이군대를 거느린 라마에게 멸망당하였다. 라마가 그의 머리를 자를 때마다 새 머리가 돋았으나 브라마가 만든 무기에 의해 숨이 끊어졌다함
-난딘
힌두교 신자가 가장 좋아하는 창조와 파괴의 신 “시바”신이 타고다니는 우마로 힌두교에서 소을 신청시 여기는 것이 아니라 소을 잡아먹으면 자신의 가장 좋아하는 시바신이 타고다닐 자가용이 없어 걸어다녀야 하기 때문에 소를 잡아먹지 않는다고 함.
-링가 와 요니
시바신, 비슈누신, 브라하마신이 세상을 창조할때 브라하마가 먼저 세상을 창조하여 시기한 “시바”신이 다시는 창조하지 안는다고 하면서 자신의 성기를 자르것에서 기원을 두어 “링가” 와 “요니” 를 “시바”신 사원에 만들어 놓았고 이것이 있으면 힌두교 사원 임
-음악의 신 간드하르바(Gandharva)
향 냄새만 마시고, 공중을 떠다니며 노래와 연주를 하고 산다는 인도 힌두교의 음악의 신(여신임)으로 중국에 와서 이 말이 乾達婆(건달바)라는 불교용어로 바뀌었고, 노래하고 춤추며 빈둥거리며 놀기 좋아하는 이른 바 건달(하늘 乾 통달할 達)도 여기서 유래된 말이라고 합니다.
-압쌀라
-데바(Deva) 여신
천신으로 하인 데바다시(인도에는 “데바다시”라는 어린 여자아이에게 매춘을 강요하는 노예계급이 있음)를 거느린다.
-깔라
썩은고기만 먹는 신이였으나 브라하마신에게 부탁하여 자신의 몸을 먹는 먹는 고행을 시작했으며 자신의 몸을 다 먹고 턱을 먹었을 때 신이 고행을 멈추게 하고 말을 잘 듣는다하여 문지기 신으로 격상시켜 주었음. 힌두사원의 정문에 도깨비모양의 턱이없는 얼굴모양의 신이 새겨져 있으며, 우리나의 대문에 있는 손잡이 모양과 비슷한다.
-라마야나
라마가 아요디아(오우드) 왕국에서 태어나 현인 비슈바미트라의 보호를 받고 자라 강건한 시바의 활을 휘어 자나카 왕의 딸인 시타와 결혼하게 된다. 그러나 음모에 의해 상속권을 상실한 라마는 부인과 이복형제 락슈마나와 함께 숲속으로 들어가서 14년을 지낸다. 어느날 라마와 락슈마나가 그들을 유인하러 보낸 금사슴을 쫓아 숲속을 헤매고 있을 때 랑카의 마왕 라바나가 시타를 데리고 가버린다. 시타는 단호히 라바나의 호의를 거절하고 라마와 락슈마나는 시타를 구하러 떠난다. 수많은 모험 끝에 그들은 원숭이들의 왕 수그리바와 동맹을 맺게 된다. 원숭이 장군 하누만과 라바나의 친형제 비비샤나의 도움으로 그들은 랑카를 공격하여 라마는 라바나를 죽이고 시타를 구한다. 후대에 만들어진 판본에서는 시타가 몸을 더렵혔으리라는 의심을 벗기위해 불의 시련을 받는다. 그러나 그들이 아요디아에 돌아오니 백성들이 아직도 여왕의 순결을 의심하는 것을 보고 라마는 시타를 숲으로 추방한다. 거기서 그녀는 발미키 현인(유명한 〈라마야나〉의 저자)을 만나 그의 암자에서 라마의 두 아들을 낳는다. 아들들이 어느 정도 나이가 들자 가족이 재회하게 되지만 시타는 다시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면서 대지에게 받아줄 것을 청하여 결국 대지는 그녀를 삼켜버린다는 내용의 서사시
-마하바라타
비아사라고 알려져 있으며 BC4세기 경부터 귀족층을 기반으로 만들어지고 구전된 대서사시 입니다.
바라타족에 속한 쿠르족과 반두족의 불화로 18일간의 큰 싸움이 벌어져 반두족이 승리하는 내용
● 앙코르 왓 여정
10월5일 22시30분 캄보디아 씨엠립 공항도착
비자신청장에서 입국비자 신청함 개인별 FEE비용 U$20과 군 장교복장의 군인이 개인당 U$1 요구해서 우리말로 내지말라고 말했으며, 상당히 기분이 안좋았음(우리나라 여행객에게만 요구한다고함, U$1 주면 나라망신이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
출입국신고서에서 빈칸 3곳을 자신이 작성해야 한다며 또다시 개인당 1불 요구
(나와 지혜언니만 안냄)
현지 가이드 박준수 아저씨와 만나 르메르디앙호텔 투숙
10월6일 호텔 조식후 11시경 반데이스레이(Bateay Srei) 사원 관광
-반데이는 "성채" 스레이는"여인"이라는 뜻으로 "여인의 성채"가된다
-사원이 작은 이유는 브라만 승려인 “야즈만 바라하” 가 왕의 안녕을 위하여 지어졌기 때문에 왕이 직접 지은 건축물보다 크면 않됨(크면 반역죄로 죽는다고함)
-사원 정문을 통과하면 중앙통로 사이로 2개의 해자(연못 규모) 가 있으며 이는 힌두교에서 우주를 뜻하는 것으로 일반적으로 서양의 성벽 방어용 해자와는 거리가 있음.
-황토흙(벽과 몸체)과 붉은색을 띤 사암(기둥과 상박공을 치장하는 주요 조각물이나 소조에 사용됨)으로 만들어짐
※ 황토흙은 우리가 생각하는 황토흙이 아니라 깊은 땅속에 있는 압력을 받은 진흙을 햇빛에 말린 것으로 아주 단단하며 물에 젖으면 미끄러우나 화강암처럼 되어 잘 부식 되지 않음
※ 붉은색 사암이 가장 강도가 강해서 상박공의 장식이 덜 부식되어 더욱 아름답다 할수있음
-붉은색 사암으로 만들어진 양각 과 음각이 가장 뛰어난 작지만 가장 아름다운 사원임
-좌우 대칭구조(앙코르의 모든사원이 똑같은 구조임/한쪽면만 보면 다른쪽도 알수있음)
-안쪽 사원 정문앞에 난딘(시바신의 자가용)이라는 소의 조각물이 사원안쪽을 바라보고 있어 이곳이 시바신을 위한 힌두사원임을 알수있음
-안쪽 사원 입구 안쪽에 시바신의 표시인 링가와 요니가 있어 여기가 힌두교 사원임을 알수있음 (링가와 요니: 여자와 남자의 중요부위를 표현한 것임)
-4각 각각의 탑이 있으며 중앙에 도서관과 창고용 건물이 있고, 앞의 2개의 탑 출입문옆에 남신의 전신이 직사각형 사암에 음각 되어 있고, 뒤탑은 여신이 기둥에 새겨져 있어 앞의 탑은 왕, 뒤의탑은 왕비의 위패를 모신곳이라고 했다.
-특히 뒷탑의 모서리에 새겨진 “데바”신의 모습은 동양의 모나리자라고 불리우며, 프랑스의 식민지 시대에 “앙드레말로 도굴사건”으로 유명하며 프랑스귀족인 앙드레말로가 도굴하려다 실패하여 캄보디아에서 옥살이를 했다고 하며, 이후 앙드레말로는 프랑스 문화부장관을 지냈다고합니다.
10월6일 12시경 한식당 “명가”에서 불고기 전골을 먹음/맛은 비교적 양호함
10월6일 13시경 롤로오스 유적지 방문
롤레이사원,프레아코사원, 바콩사원등 앙코르 제국 최초의 수도인 롤로오스에 위치한 앙코르 유적군으로 인드라바르만 1세 때 제국의 건축양식과 발전과정을 감상할수 있음.
(1)롤레이 사원
-야소바르반 1세가 부왕을 기리기 위해 호수위에 인공섬을 만들어 흙벽돌과 사암으로 지은 사원으로 지금은 불교사원의 경내에 있는 것 처럼 되어있다.
-계단을 오르면 정사각형의 모서리에 4개의 탑이 있으며 모두 전탑(벽돌을 쌓은 탑)으로 축조되어 있고, 탑들 사이에 십자형 수로가 있고 중앙에 링가와 요니가 있어 호수의 물이 뿜어져 나왔다고함 (당시에 어떠한 동력기관도 없었는데 불이 뿜어져 나왔다는 것이 불가사의하다함)
-탑은 오랜기간 풍화작용으로 훼손되어 있었으며, 사암의 구조상 떨어져 나간 부분이 많아 주요건축물이 많은 붕괴로 훼손되어 있고, 정면의 문과 옆과 뒤쪽의 가짜문(모양을 내기위해 만든 가짜문)의 사암들이 훼손이 심하였음, 그래도 문옆의 남신과 여신의 사암은 잘 남아있는 부분이 있어, 앞의 탑이 크며 선왕들의 위패를 뒤의 탑이 작으며 왕비의 위패를 보셔두었다고 함.
-돈도없어 부목으로 넘어가는 탑을 지탱하고 있어 가난한 나라의 문화재 관리가 한심하다는 생각을 했으나 한편으로는 얼마나 많은 사원이 있기에 주변의 이런 문화재는 이정도의 보수만으로 방치할까? 라는 부러움이 더 많았습니다.
(2) 프레아코사원
-출입구 정면에서 좌우에 두 개의 건물이 있으며, 왼쪽에 화장터(건물중앙에 부채살 구멍이 정사각형으로 뚤려 있었음)와 오른쪽의 창고 및 도서관 용도의 터가 남아있음
-“성스러운 소” 라는 의미로 사각형의 터에 앞에 3개의 큰탑과 뒤의 3개의 작은탑이 있으며. 앞에는 사원을 바라보며 “난딘”석상이 3개가 놓여있어 시바신을 위한 힌두사원임을 알 수 있다.
-뒤의 탑중 정면을 바라보는 사람을 기준으로 오른쪽 뒤쪽의 탑이 오른쪽 앞쪽의 탑에 가까이 붙어 있어 뒤쪽의 탑과 일렬로 되어있지 않은데 이는 선왕인 자야바르반 1세와 왕비의 부부금술이 좋아 인드라바르만 1세가 사원을 건립하면서 가깝게 했다고함.
-롤레이 사원과 다른점은 흙탑 과 사암사이에 벽토를 발라 당시에 화려함을 나타냈다는 점이다
(3)바콩사원
-4층의 피라미드형태로 하리할랄라야(앙코르제국의 최초의 수도) 도시의 중심에 위치하며 우주의 산인 메루의 상징으로 지었으며 4개의 층은 신화에 나오는 4개의신 나가(Naga), 가루다(Garuda), 락싸싸(Laks -asa), 약싸(Yaksa)를 나타내며 동쪽으로 출입하게 되어있고 최근에 지은 절이 오른쪽에 있습니다.
출입구에는 비교적 해자가 있으며, 사면에는 큰 뱀 모양으로 된 난간으로 구분되는 통로와 제방이 있고 화장터도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남아있지 않습니다. 십자형 중앙통로 양편을 보면 통로를 더 들어가면 사암으로 만든 두 개의 긴 건물이 양쪽에 하나씩 있으며 입구는 중앙통로를 마주보고 있습니다. 이곳은 아마 창고 혹은 도서관으로 사용 되었을 것 이라고 전합니다.
-이 건물의 북쪽과 남쪽에는 사각형의 벽돌로 지은 사원 탑이 하나씩 있으며, 또 중앙사원의 상승단의 각 면에도 2개의씩이 탑이 더 있어 모두 8개의 탑이 중앙사원의 외부를 둘러싸고 있다고 하는데 거의 허물어진 터만 있는 상황이라 그 숫자를 어찌알수 있을까요?.
그리고 4층단에는 사암으로 만든 탑이 각면에 4개씩(모서리부문 중복) 보이게 12개가 있었으며 안에는 링가가 있었다고 합니다. 5층은 띠 모양의 장식을 한 기초로 둘러싸여 있으며, 중앙에 큰 탑이 있습니다. 탑의 모양은 큰돌과 작은돌을 짜집기한 것 같은 레고의 모양이며 두꺼운 흙토의 흔적도 보였습니다.
-전체적으로 각 면 중앙에 4개의 출입구가 중앙탑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있으며, 단순한 피라미드 형식의 돌쌓기 형태를 보입니다.
조금 불만스럽다면, 4층 정상탑 정문에서 관리인들이 장기같은 것을 두고 있었습니다.
그래도 자기나라에서는 신들이 사는 성스러운 곳이 였는데요
(4)프노끄놈(Phnom Krim) 사원
-4층구조로 규모은 바콩사원보다 작으며 산위에 축조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산이 그렇게 높은편은 아니여서 쉽게 오를수 있는 사원입니다
동쪽에 계단이 있으며 보통계단의 절반정도의 폭을 유지하는 75도각의 계단이 각층만다 7개정도로 놓여 있고, 계단의 폭이 좁은 이유는 신을 마나러 가면서 어찌 두발로 걸어서 올수있는냐며 기어서 올라 오라는 이유로 좁게 하였다고 합니다. 당시 건축자님은 참 머리가 좋았나 봅니다.
-남쪽으로는 돈레썁호수가 보이고 톰레이더에서 안젤리나 졸리가 서쪽의 밀립지역을 보면서 서있던 장소로도 유명하다. 사원 중앙에 중앙탑으로의 문이 있으며 서쪽으로의 출입문은 산 아래까지 연결된 계단이 있으나 지금은 위험하여 출입할수 없습니다.
10월6일 17시 호텔 르메르디앙 도착
10월6일 18시 압살라 뷔폐식당에서 음식을 먹으며 민속쇼를 관람함(우리는 재미없었 중간에 나왔지만 어르신들은 재미있어함/무희들에게 조금 아니 많이 미안했음)
10월6일 19시 툭툭이(오토바이를 개조하여 만든 뒤에 4인정도가 탈 수 있는 교통수단)씨엠립 시장탐방 과 안젤리나졸리가 숙식한 식당에서 맥주를 마셨음(옵션임)
10월6일 20시 호텔 르메르디앙 도착후 취침
10월7일 07시 30분까지 호텔정문에 모이기로 했으나 호텔에서의 오랜 조식과 화장실 출입으로 인해 우리가족이 제일 늦게 모임
10월7일 08시 탐프롬(Ta Prhom)사원 도착
-자야바르만 7세가 어머니를 위해 지었다하여 어머니 사원이라고 불리움
-프랑스학자가 이곳을 발견한 후 복원하여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을 많이 했다함. 이유는 복원을 하면 나무를 베어야 하는데 나무가 죽으면 그 나무의 뿌리만큼 공간이 비어 결국에는 사원이 지금보다 더 많이 무너지는 사태가 발생되기 때문였습니다.
-결국 현재의 상태를 유지하면서 보존하는 것으로 결론을 내렸으며, 현재는 각 사원을 누르고있는 스펑나무와 보리수 나무를 그대로 둔채 성장 억제제와 새로난 묘목만을 제거하는 방법으로 현상유지를 하고있습니다.
-특히 스펑나무가 죽은터에 보리수나무가 그 수액을 먹으로 거미줄처럼 덮어 자라는 모습은 자연의 힘을 보는 듯 했습니다.
-또한 건축물의 대부분은 허물어져 있었으며, 특히 겉모습은 아취형으로 보이지만 돌을 쌓아 올려 깍은 것으로 조그만 부식이나 자연재해에도 쉽게 무너지는 구조로 아타가움 감출수가 없었습니다. 이러한 구조물이 우리나라에 허물어져 있는 상태로 만이라도 있었으면 바로지었을 텐데. 정말 호강스러운 캄보디아가 미웠습니다.
-타프롬사원은 당시 3,140개의 마을을 통치하였고 79,365명이 이 사원을 관리하였는데 18명의 고승과 2,740명의 관리들과 2,202명의 인부들과 615명의 무희들이 있었다고 기록하며 사원에 남아있는 재산중에는 500kg이 넘는 황금접시 한쌍과 35개의 다이아몬드, 40,620개의 진주, 4,540개의 보석, 876개의 중국에서 온 커튼, 512개의 비단침대 그리고 523개의 양산이 있었다고 합니다. 특히 통곡의방(공명의 방/사원이 지원지기 전에 어머니가 돌아가심)의 울림과 보석의 방의 보석을 박았던 구멍 그리고 문 위로 부터 1미터 위에 구멍을 내어 건물상층부의 하중을 문으로부터 분산시켜 원형을 유지하려 했던 건축기술이, arch형을 생각해 냈다면 원형을 유지할수 있었고 지금 더 아름다움 사원을 볼수 있었을 텐데, 그리고 동시대에는 arch기술이 다른지역에 있었다고합니다 정말 아쉬움을 자아내는 건축물입니다.
10월6일 10시 앙코르톰 으로 입성하여 바욘(Bayon)사원 관광
-해자를 돌아 동문으로 들어 갔으며 지금은 벽이 없어 어느곳 으로도 들어갈수 있으며 3층구조로 1층은 미물계를 의미하며 사면에는 부조가 조각된 회랑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동문의 회랑은 군사퍼레이드,중국인 모양의 부조와 자야바르만 7세의 모습도 볼수 있습니다.
-2층은 인간계를 의미하며 벽에 부조가 조각된 회랑이 있는 사각형 구조이고, 많은 힌두교신이 부조되어 있었으나 힌두사원으로 바뀌면서 후대에 의해 지웠다고합니다. 자신이 섬기는 신이 부처를 바치고 있으면 안된나 하면서요, 3층 중앙사원은 둥근 모양을 하고 있습니다. 비록 3층 구조이지만 그속은 회랑이 미로처럼 되어있고, 통로들이 실제로 구별이 힘든 층들로 이어지는 계단들로 매우 복잡하게 되어 있습니다.
-또한 바욘사원은 최초의 불교사원으로 건축을 지시한 자야바르만 7세는 직계왕손이 아니라 방계왕손으로 1170년경 톤레샵 호수로 처들어온 참족과의 전투에서 승리하면서 왕이 되는 계기를 마련했다 합니다. 더욱이 기존의 힌두교를 믿는 다른 왕족들과 귀족들이 위협에서 왕권강화 목적으로 대승불교를 받아 들였고 스스로를 관세음보살로 자칭하면서 대승불교를 권장하고 빈민구제 시설들을 건설하였으며, 지금의 비욘사원도 건축하였다 합니다.
-비욘사원의 특징으로는 사면에 부처의 얼굴을 한 탑이 있으며 54개가 있으며 200여개의큰얼굴이 사면으로 조각되어 사원의 위엄이 가득한 곳으로 보이게 했습니다. 특히 약간 굴곡진 입술과 위 눈꺼풀을 내리 감아 그늘진 눈을 한 이 얼굴은 관음보살이라고 믿어지고 있지만 왕의 얼굴이라고도 한다.
-사원안쪽의 1층사원의 사암기둥은 훼손이 되어있는데, 이는 자야바르만 7세가 죽은후 힌두교인 왕이 불교사원을 힌두교사원으로 교체 하는작업을 하였으며 1층에 있는 여러 힌두교 신들의 부조를지웠고 54개의 탑의 두상위 연꼿 부처상을 없애으며, 각 층의 출입구마다 시바신의 상징인 링가와 요니를 설치하여 이 사원을 처음 발견한 프랑스 학자도 이곳이 힌두교 사원이라고 착각했다 합니다.
-1200년대 초 앙코르 왕국을 괴롭혔던 베트남의 참파국(이슬람교도)을 복속시켰고 태국 북부지역도 다스렸으며 현재 라오스의 비엔티안 부근에도 그의 비문이 발견될 정도로 세력이 확장했다가 정확한 국경선인이 밝혀지지는 않았지만 상당히 넓은 지역을 통치했으며 그것을 가능케한 끝없이 뻗어나간 도로에서 볼 수 있는 광할한 영토의 대제국이 왜 이 사원을 허물고 다시 짖지는 못했을까? 왜 부분보수로 변경하였을까?의 의문점이 생깁니다.
-각자 추측할 부분이지만 아마 힌두교만의 포용성과 기존 자야바르만7세의 세력과의 마찰방지 그리고 이후 왕들의 방탕한 재정운영등을 들수 있으리라 추측됩니다. 이후 15세기에 이 웅장한 대제국의 수도를 버리고 변방으로 수도를 이전하니까요
10월6일 11시 석문(4면의 두상이 있는 큰 탑)과 해자를 지나 궁궐터에 위치한 피미아나까스(Phimeanakas) 사원 방문
-10세기 후반~11세기 초반 라젠드라바르만 2세때 지어진 하늘위의 왕궁이란 뜻으로 황국내부의 왕실을 위한 사원이었습니다.중국 원나라 사신이었던 주달관의 진랍풍토기(眞臘風土記)기록에 의하면 이 사원의 꼭대기에는 황금으로 된 뽀족탑이 있었다고 한다.
-이 사원에는 9개의 머리를 가진 뱀의 정령이 살았다는 전설이 있으며 이 뱀의 정령이 여자로 변장하여 왕이 그의 왕후와 후궁들에게 들기전에 이 뱀의 정령과 동침하였는 곳으로. 만일 왕이 하루라도 빠뜨리는 날에는 죽게 될 것이라 믿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하여 크메르 왕가의 혈통에는 신성한 뱀의 피가 흐르고 있다고 전해져 왔습니다.
사실 크메르족의 시조는 인도의 라마승려가 머리가 9개 달린 뱀신의 딸 소마공주와 결혼해 세웠다고 하니까. 인도의 영향도 많이 받았을것이고, 뱀도 신성시 했겠지요
10월6일 11시 30분경 석문을 지나 코끼리 테리스로 이동
-300m가 넘는 길이의 석조바닥으로 상승에 목조건물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되지만 현재는 석조물만 남아있다. 길이만으로도 어마어마 하며, 주변에 코끼리 석상등 구조물로 보아 규모가 상당하였으리라 생각이 듭니다.
또한 탁트인 앞마당은 여의도광장을 보는듯했다. 이정도의 광장을 보유했다면 제국의 규모를 집작했으리라.
-석조바닥을 지나 문둥이 테라스로 인동했습니다. 이곳에서 손가락과 발가락이 잘린 석조 바야바르만 7세의 석상이 있다. 원 석상은 박물관에 있고 여기에 있는 것은 모조품으로 제국의 허망함을 보는 듯 합니다.
자신의 제국을 병마앞에서 숨어서 바라봐야했던 절대 권력자의 최후는 어떠했을까. 태어나 넓은 제국을 통치했지만 자신의 치부를 보이기 싫어 숨어서 죽음을 기다려야했던 영웅의 최후는 그리고 그의 마지막 유언은 무엇이었을까? 잠시 생각에 잠기게 합니다.
10월6일 12시 10분 퉁퉁이를 타고 트로피칼 레스토랑으로 이동 중식함
-오빠가 김치를 너무 잘 먹고 있습니다. 집에서도 저렇게 먹으면 엄마가 업고 다닐텐데...
10월6일 13시 30분 앙코르 왓(Angkor Wat)도착
-정말 보고싶었던 곳입니다. 처음 그 웅장함에 반했고 들어가 내실의 규모에 놀라웠 습니다.
-비슈누에게 헌정된 사원으로 앙코르 유적지중 가장 큰 사원이며 또 가장 잘 보존되어 있는 크메르 건축예술의 극치를 이루는 역사적인 예술품이다. 사원의 구성, 균형, 설계기술 조각과 부조등의 완벽함은 정말 고대건축의 백미라 할수있을 것입니다.
-건물의 구조는 210ha넓이의 사각형의 땅을 성벽으로 쌓고 그 안에 지어졌고, 사원부지의 규모는 사암으로 만든 긴 입구 통로(250m)와 해자를 지나 많은 기둥들이 세원진 회랑, 탑, 곡선의 지붕, 상인방, 계단, 그리고 대칭으로 연속되는 십자형의 공간등이 보여진다. 이러한 구조물들은 2개 또는 그 이상들이 높이에 변화를 주어가면서 반복됩니다.
-방향감각은 없지만 정문이 서쪽으로 향하고 있고 서쪽은 죽음을 의미하며 이 사원을 지은 수리아르만 2세의 장례식을 치르기 위한 사원으로 지어졌다고 하는군요
-정문의 긴 회랑의 벽화는 좌측과 우측의 벽화가 당시의 서사시를 부조한 것으로 일부는 관광객의 손에 의해 반질반질한 모습이 보입니다
-정문을 지나 중앙통로 양 옆에있는 두 개의 건물, 좌측건물은 일본의 동경대에서 복원작업을해서 새로운 사암이 보이며, 우측은 아직도 검은색의 사암들로 세월은 흔적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좌측으로 이동하여 중앙을 사이로 2개의 해자가 보이며 45도로 해서 기념사진 촬영을 했습니다. 그래야만 5개의 탑이 동시에 사진으로 나오며 앙코르 왓이 연못에 비춰져 거울궁전 나옵니다. 하지만 연꽃잎으로 인해 해자에는 일부만이 비추어 아쉬움이 남습니다.
-좌측으로 이동하여 회랑을 지나니 총 3층으로 된 건물이 보입니다. 1층은 미물계를 뜻하며 2층은 인간계, 3층은 신의 영역입니다.(뭐 여태것 모든사원의 구조가 다...) 중앙통로로 이동하여 2층에 오르니 십자형을 사이로 4개의 사각형 공간이 나오는데 이곳은 목욕탕으로 승려들이 목욕하는 곳이 였다고 합니다. 주변의 벽에는 데바여신의 부조가 있는데 얼굴이 모두 같은 모습이 아닌며 표정도 다들 다르군요. 관광객의 손으로 아름다운 부조의 가슴만 반질반질 합니다.
-너무 큰 사원이라서 그런지 가루다신의 여럿얼굴이 미완성으로 남아있습니다. 가이드에 의하면 미완성으로 아마 조각하다 빠진것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미원성 조각은 주변 여러사원에서도 볼수있다고 합니다. 너무 큰 건축물이니 석공의 실수를 이해해야 하나요?
-중앙통로를 지나 3층에 오르니 정사각형의 건물에 3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있습니다. 주변을 바라보면 정말 인간이 이러한 석조건축물을 만들 수 있었는지에 의구심마저 듭니다. 건축물에 앞도 되어 입이 다물어지지 않습니다.
-계단은 75도로 축조되어 인간이 신의 영역으로 오를 때 두발로 걸어올수 없게 하여다 합니다. 3층은 신과 동일한 왕만이 오를수 있었던 곳으로 새로만든 보조계단을 통해 오를 수 있습니다. 또 오를때 복장은 반바지는 안되며 나시티도 안됩니다. 신을 만나기 위한 기본적인 예의라고 합니다.
그래도 운이 좋은게 작년까지는 부식에 따른 위험으로 출입이 안되었다가 올해부터 보조계단이 완성되어 오를수 있다하니 얼마나 행복합니까
-신의 세상을 기어 올라 보니 십자형 통로에 4개의 웅덩이가 있다. 이곳이 임금이 목요하는 곳으로 항상 물이 채워져 있었다고 한다. 이곳까지 물을 올리는 것이 쉬운일은 아니였는데 짖는 것 보다 관리하는 것이 더 어렵다는 것을 새삼 느끼며 현대에 살고있는 내가 고마울 따름입니다.
정상에서 오른쪽과 왼쪽 그리고 뒤쪽을 바라보면 감탄이 절로 나옵니다. 내가 서있는 이곳의 높이와 광장의 규모 그리고 내가 그 중앙에 있다는 것이 정말 잘 왔다는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습니다.
신의 영역에서 자신의 제국을 바라보는 왕의 모습 정말 왕만이 느낄 수 있는 제국의 오후였으리라 생각이 듭니다.
10월6일 16시30분 르메르디앙 호텔 도착 과 수영장에서의 물놀이
10월6일 18시30분 화로구이식당에서의 돼지갈비 석식
10월6일 20시 2시간의 전신맛사지 (개인당 팁 U$2 지급)
10월6일 10시30분 르메르디앙 호텔 도착 및 숙면
10월8일 08시 조식후 르메르디앙에서 톤레샵 호수 출발
10월8일 08시30분 톤레샵호수 배를타고 수상가옥과 호수중앙을 보고 돌아왔음
10월8일 10시30분 상황버섯 판매점 방문
10월8일 11시30분 숙소에 와서 짐을 챙기고 체크아웃함
10월8일 12시30분 중식(캄보디아식 샤브샤브점)
10월8일 13시30분 왓트마이(작은킬링필드)관광
-불교사원으로 300구의 유골이 탑안에 전시되어있고, 승려들이 관리하고 있다
10월8일 13시30분 캄보디아 민속촌 관광
10월8일 15시30분 다일공동체 쇼핑(허브구입/야자 건식품구입)
10월8일 16시30분 라텍스 판매점 쇼핑
10월8일 17시30분 캄보디아 시장 쇼핑(정현창 10달러 그림을 흥정 끝에 6달러에 구입함)
10월8일 18시30분 명가 한인식당에서 우렁된장 쌉밥 석식
10월8일 19시30분 바르고바르만 머드 마사지
10월8일 21시30분 씨엠립 공항에 도착하여 출국
10월9일 06시30분 인천국제공항도착
이상 우리가족의 여행기였습니다.
정말 즐거운 시간도 많았고 혼나는 시간도 많았습니다.
이러 거대한 문화재를 남겨주지 못한 조상님을 많이 원망도 했고
또 이렇게 까지 노동력을 착취하지 않은 조상님께 감사도 했습니다.
정말 좋았던 점은 서로의 상대성을 이해했다는 것입니다.
이 앙코르 유적지도 좋지만
우리의 경주불구사도 좋고
석굴암도 좋고
경복궁도 좋아 보입니다.
생각을 조금만 바구면 모두 너무너무 소중한 것들이니까요.
다음에 경주와 경복궁을 다시한번 가봐야 겠습니다.
물론 가이드 안내시간에 맞추어서요
TIP
여행을 떠날때의 원칙
◎떠나기전 여행의 목적을 정하자
-물론 관광이지만 유적지 관광인지 아니면 휴식을 위한 관광인지
-여행의 목적에 부합하는지 특히 이번여행에서 마지막날은 우리에게 아무 필요없는 여행이 대부분이였으며, 현지 지식이 없는 상태에서 무방비로 노출되어 가이드의 요구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몰랐다.
◎ 귀중품의 목록을 적어두자
-목록을 적어두면 가지고 갈때와 올 때 귀중품을 챙길수 있다
-전자사전 사건(귀중품의 관리자를 정해 놓는 것이 좋다)
◎사전 정보를 숙지하자
-캄보디아에는 1,000여개의 사원이 있다고 한다. 그중에 우리가 본 것은 10곳도 안된다.
-그리고 유적지의 벽화나 통로 그리고 그곳의 회랑등에 대한 정보가 있었다면 비욘사원의 4면회랑 과 앙코르 왓 에서의 좀 더 알찬 관광을 할수 있었을텐데
-이 모두가 무지의 소산으로 가이드의 말에 의해 이동했다는 것이 조금은 아쉬움이 남는다
◎지역의 사회안전망에 대해 숙지하자
-무자비한 U$1 의 요구로 첫여행의 이미지가 퇴색될줄은 아무도 몰랐다.
-교통 이동수단 과 현지인의 생활환경과 지식수준등을 미리 파악하여 돌발변수에 대비해야 할것으로 생각된다.
◎계속되는 옵션관광 과 필요도 없는 쇼핑 요구도 사전에 숙지해야 하다
-사전에 무자비한 쇼핑에 대해 거부의사를 정하고 할수없이 해야한다면
-우리나라의 가격과 현지가격을 비교하여 미리 사전지식을 습득하는 것이 좋다
※어쩔수없이 구입을 해야한다면 꼭 필요한 것을 사고 가격은 저렴하게 구입하는게 좋다
◎현지어의 충분한 습득이 중요하며, 특히 영어의 활용도를 높이자
-호텔에서의 “계란사건”
-툭툭이 기사의 등짝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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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누가 쓴거야.. 완젼 똑부러지네..ㅎㅎ 멋지다 ㅋ
우와ㅋㅋㅋ제대로된 기행문이다!!!!!나도 일본다녀오면 써야지 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