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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교실 스크랩 수필문단에 비평이 절실하다
스카이이글 추천 0 조회 2 08.08.20 01:22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수필문단에 비평이 절실하다
 
신 재 기
 
  1

  ‘소설비평, 시비평, 수필비평’이란 말은 문학의 갈래 중 어느 것을 비평 대상으로 삼았느냐에 따라 붙여진 명칭이다. 사용할 수 없는 용어는 아니지만, 이렇게 세분하여 지칭하기보다는 일반적으로 묶어서 ‘문학비평’이라고 한다. 수필도 문학의 한 갈래인 만큼 ‘수필비평’도 문학비평이란 테두리 안에서 사유되는 것이 더 자연스러울 것 같다. 그런데도 굳이 떼어 ‘수필비평’이라고 지목하는 것은 어떤 특별한 문제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즉 수필을 대상으로 하는 비평이 시나 소설을 대상으로 하는 것과는 다른 처지에 놓여 있거나 특별한 문제점을 노출하고 있다는 것이다. 어떤 문제인가?

  수필작품이 쏟아지고 있다. 수필 전문 문예지나 공식적으로 활동하는 수필가의 수에 관한 통계를 들여다보지 않더라도 수필의 확산은 쉽게 실감할 수 있다. 작품의 대량생산만이 눈에 띠는 것이 아니다. 수필 동인 수도 엄청나다. 각 시, 도, 군 단위의 행정 구역마다 수필 동인 단체가 구성되어 있을 정도니 그 수는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이들에 의해 발간되는 동인지는 개인의 서가에 넘쳐난다. 대중 상대의 수필 창작 강좌도 곳곳에 개설, 운영되고 있다. 문화관광부에 등록된 수필 전문문예지가 2007년 연초를 기점으로 20종을 넘었고, 금년 안에 새로 출간되는 전문지도 있을 것으로 예상한다. 종합문예지, 일반 대중 교양지 등에도 수필은 빠지지 않는다. 잡지류의 정기간행물 대다수가 수필에 지면을 할애한다. 편집 방향이 일반교양을 지향하는 잡지의 경우도 대중적 소통에 있어 수필은 빠질 수 없는 양념과 같은 것으로 인식된다. 지방 일간지나 주간지에서도 주말에는 독자의 생활 글을 싣는 추세다. 무엇보다 수필류의 대량생산과 유통은 사이버공간에서 두드러진다. 각종 동호인들이 운영하는 홈페이지와 카페, 개인 블러그 등의 콘텐츠는 이미지나 영상을 빼고는 거의 수필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같은 수필의 양적 팽창을 두고 수필의 시대니, 수필이 주변문학에서 문학의 중심으로 진입했다니, 영상시대에 가장 적합한 문학 장르가 수필이니 하면서 자못 고조된 목소리를 낮추지 못한다. 문학 전체가 죽음을 맞이해도 수필만은 살아남을 것이라는 과격한 생각도 종종 목격한다. 지속되는 활황만을 보고 빈약한 토대는 인식하지 못하니 성급한 낙관이 빈번할 수밖에 없다. 수필문학에 대한 다양한 형태의 낙관론은 대부분 논리보다는 분위기에 편승한다. 이는 수필의 놀라울 정도의 양적 확대를 잘못 해석한 결과다. 신중하지 못한 즉흥적인 반응들이 수필문단을 주도하고 있는 듯하다.

  이러한 상황을 감안할 때, 현금의 수필문단에 가장 절실히 요구되는 것은 비평이며, 비평을 수용하는 적극적인 자세이다. 오늘의 수필비평은 쏟아지는 작품들을 제대로 평가하여 우수한 작품 창작을 유도하고, 수필문단이 지향해야 할 문학적이고 문화적인 가치를 도출해내는 데 사명감을 가져야 한다. 발표되는 모두가 좋은 작품일 수 없다. 적절한 기준에 의해 우수한 작품과 질적 수준이 떨어지는 작품은 구분될 수밖에 없다. 대중문화의 강력한 자장 속에 놓여 있는 오늘날, 엘리트 문화를 방패막이로 하여 문화의 순혈성과 고급성을 지키려는 것은 철 지난 과거의 가치로 퇴행하는 돈키호테의 행동과 다를 바 없을는지 모른다. 혼탁한 먼지와 불순물도 시간이 지나면 자연적으로 침전될 것이라는 식의 여유로운 태도는 치명적 국면을 초래할 수 있다. 갑작스런 폭우와 함께 이 골짝 저 골짝에서 밀어닥치는 홍수는 지금까지 이뤄놓은 모든 경계를 휩쓸어버리고 말 것이다. 뚜렷한 방향성을 지닌 냉엄한 비평정신이 필요하다. 작품을 따라가는 해석적 비평이 아니라, 앞에 서서 작품의 진로를 제시하는 계도적 비평이 요구된다. 분석과 귀납을 통한 민주주의보다 통합과 연역을 통한 강한 원리의 정립이 혼란을 막는 데에는 훨씬 효율적이다.

  2

  오늘의 수필문단이 안고 있는 문제로 비평정신의 빈곤을 꼽을 수 있다. 물론 그 책임과 원인이 어디, 누구에게 있다고 지목하기는 어렵다. 넓게 보면, 이 시대의 사회,문화적인 특성에 기인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하지만 비평정신의 빈곤과 관련하여 수필문학에 관여하는 사람들에게 혐의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티보테는 비평을 자연발생적 비평, 직업적 비평, 대가(大家)의 비평으로 구분하였다. 우리 수필문단을 진단해보건대 직업적 비평의 영역을 확대하는 것이 절실하며, 나아가서는 대가적 비평의 폐해를 줄이는 일이 시급하다. 직업적 비평은 “무수한 고전으로부터 공통적 이념을 추출하고, 그 추출된 모든 이념을 유기적으로 연결하고 질서를 부여하여 건설된 세계를 제시하고자 한다.”(1) 그것은 개인적인 취미보다는 보편적인 이론에 입각하여 작품을 평가하는 과학으로서의 비평을 지향한다. 현재 생산되는 작품에 즉각적으로 반응하는 자연 발생적인 비평도 중시되어야 한다. 오히려 그 어떤 비평보다 더 절실할지 모른다. 다만 우리 수필문단의 현실을 감안하여 학문적인 과학을 지향하는 직업적 비평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는 말이다.

  대가적 비평은 비평정신을 위축시키는 원인으로 작용하기 쉽다. 여기서 ‘대가’는 비평의 대가가 아니라 ‘대작가’를 말한다. 대가적 비평은 예술의 대가가 자신의 작품에 대해 말하고 자신의 창작과정을 반성하는 비평이다. 자신의 창작 체험에 기대어 창작방법론을 전개함으로써 일반적인 원리와 이론의 정립으로 나아가는 경우다. 문학의 이론과 체계가 과학적인 실험보다는 탁월한 심미안을 갖춘 대가의 깊은 통찰력에 의해 수립된다는 점을 염두에 둘 때, 대가적 비평의 무게가 충분히 인정된다. 그러나 이를 문제 삼는 것은 대가적 비평의 형태를 취하고 있는 현금의 우리 수필비평에서 순기능보다는 역기능이 더 두드러지기 때문이다.

  ‘대가’는 타인들이 인정할 때 대가가 되는 것인데, 자칭 ‘대가’라고 의식하고 행세하는 것은 심각한 문제다. 대가적 비평은 원래 자기 스스로에 대한 반성에서 출발하며, 자기 반성에는 언제나 겸양이 함의되어 있다. 겸양은 자기 통제이고 상대를 포용할 수 있는 논리의 유연성이다. 이러한 겸양을 유지하지 못하는 대가들의 비평은 날카로운 칼이 되어 타인에게 상처를 주고, 옹색하고 고정된 원리를 강요하는 폭력적인 것으로 작용할 수 있다. 연륜만으로 대가가 될 수 없다. 진정한 대가는 연륜과 무관하게 의식의 문을 열어두고 자기 밖의 새로운 것을 언제나 수용하고 적극적으로 자기 변화를 도모하는 자이다. 우리의 수필문단에 대가가 있다는 것은 아주 다행스러운 일이다. 그들의 공헌이 있었기에 오늘에 이르러 수필이 발흥의 기회를 잡게 되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수필문단이 소수 대가의 힘에 의해 움직인다면, 그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큰 영향력을 발휘해 왔던 대가들의 비평적 목소리들이 이 시점에서도 유효한지 짚어볼 필요가 있다.

  수필문단에서 비평정신의 빈곤을 초래한 원인의 하나로 비평의 중요성에 대한 수필전문지들의 불감증을 들 수 있다. 현재로 수필 전문지가 20종이 넘는다. 이들은 각기 나름의 창간 이념과 목표를 가지고 출발했으며, 애초의 이념을 실현하려고 부단히 애써왔다. 그런데 그 현주소는 어떠한가? 무엇 때문에 수필전문지를 발간하고 있으며, 수필문단에 기여하는 바가 무엇인지 도대체 감을 잡을 수가 없다. 손에 잡히는 대로 집어도 어느 하나 크게 다른 것이 없다. 왜 그렇게 많은 작품을 수록하고, 왜 그렇게 많은 신인들을 등단시키며, 왜 그렇게 수필 비평에 인색한지 알 수가 없다. 수필문학을 사랑하고 그 뜨거운 사랑의 정열을 수필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려고 잡지를 창간했다고 하는데, 왜 그 사랑의 흔적을 찾기가 어려운가? 여기서 어느 지방 계간지 편집자의 가슴을 파고드는 강렬한 비판적 목소리를 들어본다.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문예지는 수도 없이 늘어났지만, 그러나 그 잡지들의 질적 수준은 4-50년 전보다 더 크게 위축되고, 오히려, 거꾸로 퇴행만을 거듭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첫 번째는 정보사회에서 영상매체의 등장으로 문학의 주변화가 심화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고, 두 번째는 시대의 변화에 따른 변모가 아닌, 잡지 편집자들의 책임감과 사명감의 부재 때문이기도 하다.(2)

  이 글의 필자는 이처럼 잡지 편집자들의 책임감과 사명감 부재를 비판하면서 “대한민국의 문학잡지들은 무목표, 무책임, 무의지로 일관하고 있으면서도, 그 반대 방향에서, 요컨대 문학 권력만을 가진 괴물들이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라고 쓴 소리를 단호하게 뱉는다. 설마 문예지 편집자들이 사명감 없이 잡지를 만들었거나 오직 문학권력만을 추구했겠는가마는, 이러한 비판에 공감이 가는 것이 사실이다. 수필문예지의 경우도 이 같은 비판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오히려 다른 종합문예지보다 훨씬 더 비난의 화살이 깊이 꽂힐 수도 있다.

  수필전문지의 수준은 우리 수필문단을 수준을 그대로 말해 준다. 독자를 감동시킬 수 있는 양질의 작품을 생산하고, 수필문학을 풍요롭게 해 줄 수 있는 체계적인 이론을 구축하고, 다양한 비평적 시험을 통해 수필문학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야 한다. 편집의 차별성을 꾀하여 수필문학의 대중화로 인한 질적 저하를 방지하고 본격문학으로 도약할 수 있는 비전을 제시해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비평정신의 확립이 무엇보다 절실하다. 많은 문제는 비평정신의 부재에서 온다.

  비평정신은 나에 대한 반성이고 타인을 내 안으로 받아들이는 데에서 출발한다. 이론과 사상을 창출하기 위한 나와 타인과의 논쟁과 대화의 과정이 비평이다. 오늘의 많은 수필전문지들은 마치 봉건주의 사회의 영주제도를 모방하고 있는 듯하다. 성을 지키기 위해 높은 성벽을 쌓아 외부를 경계하며, 타인의 접근을 철저히 차단하고 있는 형국이 바로 그렇다. 부수적인 문학권력이나 자본의 압력을 뛰어넘지 못하고 폐쇄적인 회로에 갇혀 자기 지키기에 급급하다 보니 타인과의 대화로서 비평을 받아들일 여유가 없다. 작품만 있으면 만사형통이라고 위로하지만 이론과 비평 없이는 성벽이 쉬 무너질 수 있다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다양한 비평을 생산하고 뚜렷한 비평정신을 확립하는 일, 이것은 현금의 수필 문예지들이 시급히 실천해야 할 의무다.

  3

  현재 우리의 수필문단에서 드러나는 수필비평의 문제점으로 이론비평의 빈곤을 지적할 수 있다. 이론비평의 빈곤은, 실제비평이 활발한데 비해 상대적으로 그렇다는 것이 아니다. 전반적으로 수필비평이 부진한 가운데 수필문학의 진로를 제시해 주는 이론 생산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말이다. 지금 수필문학은 주변문학의 테두리를 벗어날 수 있는 호기를 만났다. 새로운 변신을 꾀하려면 작품의 활발한 생산만으로 불가능하다. 비평이 뒤따라 주어야 하고, 쇄신을 촉진하고 힘을 실어 줄 수 있는 이론적 틀이 마련되어야 한다.

  문학비평의 최전방은 구체적인 작품에 대해 해석과 평가이고, 동시에 개별 작가에 관한 문학적 논의다. 이런 작업을 실제비평이라고 부르는데, 이 실제비평이 비평 행위의 전면에 드러나는 얼굴과 같은 것이므로 문학비평의 최전방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실제비평이 어느 정도 제자리를 지켜주면 문학비평은 크게 문제될 것이 없을 성싶다. 하지만 실제비평의 맞은편에 건실한 이론비평도 있어야 한다.

  이론비평은 ‘문학은 무엇이며, 문학이 무엇을 할 수 있고, 어떤 문학이 좋은 문학인가?’라는 물음에서 출발한다. 문학의 본질에 대한 원론비평에서 시작하여 문학의 기능이나 가치와 관련된 문제들을 이론적으로 논의하는 것이 이론비평이다. 이러한 이론비평은 문학의 새로운 이론적 논리를 계발하여 문학작품을 이해하고 평가하는 다양한 시각을 마련하는 데 그 목표가 있다. 문학비평의 종착지가 작품에 관한 평가라고 했을 때, 평가행위는 주관적인 관점을 넘어서서 타당한 기준에 의해 이뤄질 때 설득력을 얻는다. 이론비평의 중심은 평가기준의 타당성을 담보해주는 논리를 구축하는 일이다.

  그런데 종종 이론비평에 매몰되어 실제비평이 크게 위축되는 경우가 있었다. 우리나라 비평사로 눈을 돌려보면, 1930년대 이데올로기적 비평과 전형기의 다양한 비평논리가 그러했다. 이들 비평논리는 이데올로기와 이론 쪽에 편향되었다. 사회학적 상상력에 뿌리를 두었던 1980년대 비평도 이론적인 성향을 강하게 드러냈다. 개념과 논리와 이데올로기는 난무하는데, 그것이 구체적인 작품 평가에는 조력하지 못하고 이론 그 자체의 잔치로 끝나버리는 경우가 허다했다. 이론비평과 실제비평이 서로 부합되지 못한 채 겉도는 모습을 보였다.

  물론 이론비평이 실제비평에 봉사하는 데만 그 의의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목적일 수 있다. 하지만 이론과 실제는 분리되어 따로 수행되는 것보다는 상호 보완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론비평과 실제비평은 우열 관계에 있지 않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이론비평은 실제비평에 직접적인 도움을 줄 때 공허하지 않고, 실제비평 또한 이론비평의 협조가 있으므로 논리적인 체계를 구축하고 설득력을 얻을 수 있다.

  현학적인 이론이 오히려 문학작품의 내면을 이해하는 데 방해가 될 때가 있다. 이론을 앞세우면 문학적 감수성과 상상력이 말살되고 논리와 체계의 속으로 고정되고 만다. 이론적 틀 앞에 문학은 사라지고 논리만이 덩그렇게 남는다. 그래서 이론과 법칙에 매몰된 강단비평이나 문학사가 문학 자체를 보지 못하고, 문학의 그림자를 놓고 앙상한 논리만을 만들어내는 경우가 있다. 이러한 이론의 폐해를 들어 이론비평을 혐오하거나 배척하는 경우도 많다. 특히 태생적으로 비평에 반감을 가지고 있는 시인이나 작가들은 이론비평의 무모함에 관해 언제나 감정을 자제하지 못하는 편이다.
  그런데 문학이론 혹은 이론비평도 순기능에 대해 주목할 필요가 있다. 조나던 컬러의 문학이론에 대한 견해다.

  이론은 상식적인 개념에 대한 호전적인 비판일 뿐만 아니라, 우리가 ‘상식’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 사실은 역사적인 구성물이며, 이론적이라고 생각할 수조차 없을 정도로 우리에게 너무나 자연스러운 것처럼 되어 버린 특별한 이론임을 보여주려고 하는 것이다. 상식에 대하 비판과 대안적인 개념에 대한 탐구로서, 이론은 문학연구의 자장 기본적인 전제나 가정을 심문하는 것이며, 당연한 것으로 간주되었던 것을 흔들어 놓는 것이다.(3)

  이론은 당연하고 상식적인 것에 대해 심문하고 비판한다. 이미 오래 전부터 통용되어 굳어진 것은 이론이 아니라 상식이다. 이론은 고정되었거나 변화하고 있거나 간에 주어진 현상에 대한 새로운 해석에서 출발한다. 새롭게 해석하기 위해서는 기존의 상식을 무너뜨려야 하고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개념에 대해 비판해야 하는 것이 당연한 절차다. 새 질서를 구축하려는 기획에서 창출되기 때문에 이론은 변혁을 꿈꾼다. 주어진 대상을 새롭게 해석하기 위해 기존의 질서를 반성하고 창의적으로 사고하는 과정에 구축되는 것이 이론이다. 어떤 현상에 대한 해석과 설명의 틀이 마련되는 순간, 그것에 대한 반론이 잉태하고 새로운 관점이 대두되기 마련이다. 무한 증식하거나 불변하는 원리는 없다. 그러므로 이론은 현상을 하나의 틀에 고정시키려는 기도이면서 반면에 새로운 이해의 가능성을 열어놓은 개방적인 기획이다. 더 알기 위해서 이론을 만들지만 그것에 의한 통달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끊임없이 새로운 이론이 출생한다.

  가령 수필비평계에서 한때 논쟁으로 대두되었던 ‘수필허구론’을 보자. 수필은 교술 장르로서 사실과 대상의 있는 그대로를 진술하는 글쓰기이기 때문에 허구는 용납할 수 없다는 주장과, 수필도 문학의 한 갈래인 만큼 주어진 사실과 실제의 체험을 상상력에 의해 부분적으로 가공할 수도 있다는 허구 허용론이 팽팽하게 맞섰다. 그런데 이 문제는 양자택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해결되지 않고 평행선을 긋는 논쟁거리다. 양쪽 주장의 타당성과는 무관하게 이 같은 이론적 논의는 수필에 대한 사고의 폭을 넓히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수필이 다른 문학 장르에 비해 상대적으로 단순하여 이론적 생산이 불가하다는 지적 열등감을 떨쳐버리는 데에도 기여했다. 이것이 이론비평의 역할이고 매력이다.

  이론은 방향지향성을 지닌다. 오늘 우리 수필문단에 이론비평이 활성화되어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수필 인구와 작품은 급증하는데, 이 흐름을 견인할 방향과 가치가 설정되지 못한 실정이다. 유통 기간이 지난 기존의 원칙을 고수하는 데 지나치게 많은 힘을 낭비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뚜렷한 이론은 주어진 가능성들을 분명하게 조직함으로써 비용을 줄일 수 있다. 지금은 수필계는 이론을 위한 이론이 아니라, 수필문학의 고유성을 부각시키고 그것의 문학적 가치를 제고할 수 있는 다양한 이론 생산에 관심을 가질 때다.

  4

  우리의 수필비평이 극복해야 할 또 하나의 과제는 창작방법론으로의 편향이다. 실제비평과 이론비평의 대립되는 비평의 두 갈래에 ‘창작방법론’이란 다른 하나를 더해 볼 수 있는데, 이는 작품을 창작하는 기술적인 방법에 관해 충고하고 논의하기 때문에 기술비평(technical criticism)이라고도 한다. 작품 창작방법이나 기법에 관해 논의한다는 점에서 이론비평에 속하지만, 작품 생산과 관련된 문제를 논의하기 때문에 순수 이론비평에서는 다소 비켜난 실용적인 것이다. 한편 창작방법론은 순전히 이론에 의해 제시되기보다는 구체적인 작품을 하나의 모델로 설정하고 그것의 모방을 권유하는 형태를 취한다는 점에서 실제비평으로서의 성격도 같이 지닌다. 창작방법론으로 기술비평도 작가의 창작 기술적인 문제를 교정하고 다양한 방법론의 가능성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실용적인 효용성을 확보할 수 있는데, 그 과정에서 이론비평과과 실제비평의 지원을 받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따라서 이론비평과 실제비평의 속성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것이 기술비평이다

  앞에서 오늘의 수필비평이 대가적 비평의 성격을 강하게 드러내고 있으며, 이 대가적 비평의 뿌리가 창작방법론에 있다고 하였다. 따라서 대가적 비평과 수필비평의 창작방법론으로의 편향은 밀접한 관계에 놓인다. 한편 수필비평이 창작방법론에 편향되는 중요한 요인의 하나는 수필작품이 해석이나 평가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선입견이다. 즉 수필은 주제를 형상화하기 위해 꾸미는 글쓰기가 아니라 수필가의 삶을 글로 고스란히 옮겨 놓기 때문에, 수필은 수필가의 삶 그 자체이며, 또한 모든 개인의 삶은 그것으로써 자족적이고 독자적인 의미를 지닌다는 것이다. 그래서 해석과 평가로서 비평적 행위는 불가하다는 주장이다. 주어진 것이지 만들어진 것이 아니므로 비평의 틈입을 허용할 수 없다는 생각은 전적으로 오류라고 보기 어렵다. 개인의 존재 가치를 존중하려는 의도는 그 자체만으로도 승인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수필가의 삶을 꾸밈없이 이야기하는 형태가 수필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해석이 불가능하다고 하는 것은 잘못이다. 수필도 하나의 언어적 텍스트다. 그 텍스트가 수필가의 실제 삶을 담고 있다고 해서, 수필비평이 수필가의 삶 자체를 대상으로 해석하는 것은 아니다. 텍스트에 나타나는 수필가의 삶을 해석한다. 실제의 삶을 담는 과정에서 언어 고유의 특성이나 담는 방법의 관습에 의해, 처음은 언제나 굴절된 결과로 드러난다. 또 이 과정에는 자신을 성찰하는 주체의 관점이 개입될 수밖에 없다. 여러 가지 요인에 의해 생긴 이러한 굴절의 각은 비평적 행위가 서식하기에 충분하다. 어쨌든 수필작품과 비평의 만남이 부적절하다는 논리는 성립되기 어렵다. 수필도 다른 문학작품과 마찬 가지로 해석과 평가의 대상이 될 수 있다면, 창작방법론에 편향된 수필비평은 작품 쪽으로 그 방향을 선회하는 것이 마땅하다.

  비평가는 독자의 한 사람이다. 비평가의 비평 행위는 독자의 입장에서 이루어진다.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조력하는 것이 비평이다. 비평가는 일반 독자와는 다른 고급독자인 셈이다. 비평이 읽기에서 시작하는 것은 이런 점에서 당연하다. 읽기의 역사를 짚어보자. “가독성(可讀性), 곧 리더빌리티(readability)만 문제 삼는다 해도 그 내포의 변화 양상은 만만치 않다. 읽기의 대상이 작가의 심혼에서, 현실 사회며 역사로 그리고는 작품 자체로 내향(內向)했다가는 이내 독자로 외향하게 된 것, 그것이 리더빌리티의 역사다.”(4) 작품 읽기의 역사가 작가→현실 →작품 → 독자로 이동해갔다는 것은 읽기의 핵심에는 독자가 있다는 뜻이다. 문학비평 도 마찬가지다. ‘독자수용비평’을 거론하지 않더라도 비평의 중심은 독자로 이동되었다. 독자의 입장에서 작품을 어떻게 이해하고 수용하느냐가 비평의 중심 과제다. 우리의 수필비평이 아직도 창작방법론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시인이 쓴 이러한 종류의 시론(詩論)(자기 자신의 작품에 대한 사고에서 비롯된 시론-필자 주)이나, 혹은 내가 말하는 작업장의 비평(workshop criticism)은 하나의 확실한 한계를 지니고 있다. 시인 자신의 작품과 관계가 없거나 시인의 성질에 반대되는 것은, 즉 그 시인의 능력 밖의 것이 되는 작업장의 비평이 가지고 있는 또 하나의 한계는 그 비평가로서의 판단이 그 자신의 예술을 벗어나게 될 때 불건전하게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5)

  엘리어트는 창작방법론에 경사된 비평을 ‘작업장의 비평’이라고 하고 그 한계를 지적했다. 자기의 작품과는 무관한 작품이나 자기의 창작방법과는 반대되는 것에 대해서는 비평적 역량을 발휘할 수 없다는 것이다. 안목이 그만큼 협소하다는 것이다. 이미 설정된 창작방법론에 입각하여 처방하거나 재단하는 것으로는 편협한 시각을 피할 수 없다. 그리고 창작방법을 세계관이나 문학적 이념에 입각하여 구축하지 못하고 세부적인 기교에 함몰할 가능성이 짙다. 작품에 대한 해석이나 평가 쪽은 소홀할 수밖에 없다. 이렇게 되면 비평은 반쪽 역할도 못하는 결과가 된다. 오늘날 창작방법론에 크게 편중되어 있는 우리의 수필비평이 어떤 문제점을 안고 있는지 분명해진 것 같다.

  5

  현금의 수필비평에서 심각한 문제성을 드러내는 대목은 아마추어리즘의 창궐이다.
전통적인 문학제도에서는 문학의 권력이 ‘시인, 소설가, 수필가, 문학평론가’ 등과 같은 소수에게만 집중되었다. 소설은 소설가만이, 시는 시인만이, 문학평론은 문학평론가만이 써야 하고, 쓸 수 있었다. 지금도 이런 입장이 일면 통용되고 있다. 그러나 인터넷이 대중화되고 ‘사이버’라는 새로운 공간이 마련된 후 소수 전문가 중심의 문학의 수직적 권력 구조는 조금씩 무너진다. 특히 사이버공간에서 문학 생산에 참여하는 사람에게 자격 같은 것은 필요치 않다. 인터넷망이 연결되어 있기만 하면 모든 네티즌은 가상공간에 접속할 수 있고, 접속한 후에는 누구도 문학적 글쓰기에서 제약을 받지 않는다. 평등과 자유가 최대한 보장된다는 점에서 ‘민주적’이다.

  2000년대에 들어와 인터넷의 대중화는 문학판에서 전문가와 비전문가의 경계를 허물었다. 물론 이 시대의 문학이 전적으로 사이버 공간에 의존하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사이버는 문학의 생산, 유통, 소비가 이뤄지는 아주 작은 공간에 불과하다. ‘사이버 문학’이라는 장르가 새롭게 대두되었지만, 그것이 전통적인 순수문학보다 우위를 점령했다고 판단하는 목소리는 아직 들리지 않는다. 종이 위에 작품이 인쇄되고 문학은 종이책으로 유통, 소비된다. 그 공간은 디지털의 가상공간이 아니라 정통적인 아날로그 공간이다. 하지만 문학 그 자체만 두고 보면 사이버의 직접적인 영향이 미미하다고 할 수 있으나, 지식이나 문화생산이란 차원에서 보면 사이버 공간에서 통용되는 새로운 경향과 원리는 거대한 조류를 타고 거침없이 통행하고 있다. 이 같은 흐름은 문학판에도 크게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그 중에 큰 파장으로 다가오는 것이 아마추어와 프로 사이의 경계가 무너지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프로와 아마추어의 경계를 허무는 것은 신성한 충격이다. 하지만 경계의 붕괴가 주는 신선한 충격의 이면에는 적잖은 혼란이 야기된다. 특히 대중화의 바람이 다른 어느 장르보다 강하게 몰아치고 있는 수필비평의 혼란은 훨씬 더하다. 최소한의 부끄럼조차도 깨닫지 못하는 아마추어리즘은 현금의 수필문학비평이 안고 있는 심각한 문제다.

  한국문학사 백 년 동안 수필비평이 없었던 것은 아니나 대부분의 비평 역량은 주로 시나 소설 장르에 집중되었던 것이 사실이다. 수필이 문학의 핵심 권역으로 진입하지 못했던 만큼 수필 또한 문학비평의 주된 관심 항목에서 소외될 때가 많았다. 1980년대 이후 수필이론 확립과 작품 평가에 지속적인 관심을 가진 몇몇 전문 수필비평가들이 등장한다. 수필비평에 대한 이들의 치열성이 돋보이긴 하였지만, 쏟아지는 수필 작품과 확대되는 수필 문단을 제어하고 뚜렷한 방향성을 제시하기엔 역부족이었다. 그리고 대부분의 수필비평가가 수필가였던 만큼 그들의 비평적 관심과 시선은 자연스럽게 창작방법론으로 편향되고 말았다.

  이처럼 수필비평이 제대로 기틀을 마련하지 못한 상태에서 2000년대에 들어와 갑자기 작품 생산이 확대되고 수필장르가 문학권의 본궤도로 진압할 수 있는 호기를 만나자, 수필문학의 진로를 제시해 줄 수 있는 이론과 비평이 절실히 필요했다. 비평의 수요는 확대되는데 훈련된 전문적 비평가는 태부족이다. 선택은 두 가지다. 빈 공간을 그대로 방치하든지, 아니면 아쉬운 대로 아마추어들을 그럴듯하게 치장하여 대체하는 방법이 그것이다. 어느 것이든 정상에서 벗어난 선택이다. 임시방편으로 마련된 비정상적인 방법들은 시간이 지나면 그 이전보다 더 큰 허점을 드러내기 마련이고, 그로 말미암아 악순환은 지속된다. 오늘 우리 주위에서 쉽게 목격되는 수필비평의 아마추어리즘은 이처럼 비정상적이라고 진단할 수밖에 없다.

  아마추어리즘의 한계는 인상비평에 있다. 수필 관련 잡지들의 월평이나 계간평을 보면 지난 호에 발표된 작품 둘 중 몇 편을 골라 그 내용을 정리하고 인상과 느낌을 덧붙이면서 수필가의 실제 삶까지 끌어오기도 한다. 이러한 형태는 1920-30년대 한국문학비평 태동기에 볼 수 있는 것이다. 일관된 논리나 평가 기준 없이 각 작품에 관한 비평적 단상들을 나열하고 있는 전형적인 인상비평의 모습이다. 여기서 수필비평의 확장이나 이론 정립은 고사하고 작품의 해석조차 제대로 되지 않는다. 수필비평의 전문성을 확립하기 위한 수필전문지들의 노력과 과감한 변신이 아쉬운 때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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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최동호 외, [문학에 이르는 길] (열음사, 1992) 219쪽
2) 반경환, [한국문예지에 대한 비판적 성찰] <오늘의 문예비평> 2007 여름호 205쪽
3) 조나던,컬러, 이은경 임옥희 옮김. [문학이론](동문선, 1999) 15쪽
4) 김열규, [하이펴 텍스트/디지털 텍스트로서 보는 스토리-디지털스토텔링] 한국문학이론과 비평학회 2007 전국학술대회 발표문
5) T.S.엘리어트, 이경식 편역 [문예비평론] (범조사, 1985) 8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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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재기

문학평론가, 경일대학교 교수
매일신문 신춘문예 평론(1990)
대구문학상 수상(1998)
평론집 <비평의 자의식>(1997), <여백과 겸손>(2003)
산문집 <언어의 무늬와 빛깔>(1998), <침묵의 소리를 듣는다>(2003)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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