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패트릭 셰인리의 <다우트>는 영화 시작부터 강력한 결말에 이르기까지, 불확실함의 기운이 가득한 가운데 관객을 두 명의 수녀와 한 명의 신부 그리고 어린 남학생, 주인공뿐만 아니라 관객 스스로 자신의 신념을 다시금 확인하고, 편견과 판단력, 신념과 의구심 사이에서 끊임없이 고민하도록 만들며, 영화를 보는 내내 도발적인 미스터리의 세계로 매혹한다. 영화 <다우트>는 꾸준히 증가하고 있는 사회 변화와 도덕적 딜레마에 의해 점점 달라지는 세상의 문제점에 대한 해답을 찾을 수 있도록 해준다.
'의심'이라는 단어는 존 패트릭 셰인리가 지난 십 년 간 호평을 받도록 해 준 연극 대본을 쓸 수 있도록 영감을 불러일으켜 준 단어이며, 이제 연극 무대에서 보여주었던 작품을 확장시켜 불확실성의 새로운 씨앗을 비로소 영화의 유동성을 빌어 표현하게 되었다.
작품을 집필할 당시, 존 패트릭 셰인리는 당시 TV매체에서 말 그대로 서로에게 고함을 지르며 논쟁을 벌이던 정치계의 거물들의 대립 구도를 회상하기에 이른다.
존 패트릭 셰인리는 이렇게 말했다.
"사회를 둘러싼 많은 곳에서 어떤 확신 같은 것이 느껴졌어요. 모두 나름대로 견고한 의견을 가지고 있었지만, 실제 그들 사이에 진정한 교류는 없었죠. 만약 누군가, '잘 모르겠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대중매체라는 거대한 대극장 위에 있는 사형대에 제 발로 오르는 것과도 같았어요. 우리 사회에는 확신이라는 가면이 존재했고, 바로 거기서 빈틈이 생기고 발전해 온 것이라는 걸 강하게 표현하고 싶었죠. 바로 확신 속에 존재하고 있었던 의구심이라는 부분 말 입니다." "그래서 누구도 정확히 알지 못했던 분명한 사실을 널리 알리는 대본을 쓰고 싶었어요. 확실성이 궁지에 빠지고, 성장과 변화가 난무하는 무한성을 내포한 '의심'이라는 개념에 대해 샅샅이 탐험하고 싶었죠. 대체로 서로 대화가 끝나는 때 '확신'이 자리잡게 되거든요. 그리고 저는 대화에 관심이 많아요. 사실 대화의 다른 이름은 바로 '인생'이거든요. 우리는 '불확실성'이라는 기준을 가지고 사는 법을 배워왔어요. 우리 시대의 대화 속에 존재하는 '침묵'이 바로 '불확실성', 즉 '의심'이죠."
존 패트릭 셰인리 감독에게 가장 중요한 도전 과제는 영화의 주제일 뿐만 아니라 불확실성의 가제를 그가 말하려는 이야기 구조, 즉 밝혀지지 않은 사실과 진실, 그 조직 속에 어떻게 끼워 넣느냐는 것과 결합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관객들로 하여금 사건의 발단은 정확히 알지만, 마지막 결말은 느슨하게 만들어 관객 나름대로 결론을 내릴 수 있도록 만들어야 했다. 전반적으로 존 패트릭 셰인리 감독이 꾸준히 주장해 온 것은 바로, 관객들을 한 가지 고정된 결론으로 이끌어 가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저에게 가장 중요했던 것은, 불확실성이라는 감정은 바로 관객에게 속해야 한다는 것이었죠. 무엇이 옳고 그른 것인지 설명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감독으로서 무엇을 생각하고 느낄지 말해주기 보다는 관객들 스스로 뭔가를 생각하고 느낄 수 있도록 만들고 싶었죠."
일단 감독이 불확실성, 즉 의심이라는 것에 대해 쓰겠다고 결정하고, 필연적으로 인간의 신념에 도전해 동화시킬 필요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자, 그는 이러한 이야기를 만들어 나갈 배경을 심사숙고 하기에 이른다.
"고민이 많고 일면 불가능해 보이는 상황 속에서, 제 나름대로 사물을 보는 방법을 적용시키고 싶었어요. 그래야 지역 교구 목사가 신도를 이용했다는 비난을 받을 수 있는 바탕이 될 테니까요. 그들이 겪었던 단순한 교회 스캔들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죠. 대신 대부분 사람들이 주저하지 않고 누군가를 비난할 수 있는 상황과 정반대의 상황을 대립시키고, 그러한 억지스러운 주장들을 관객들 나름대로 각자의 관점에서 생각할 수 있도록 만들고 싶었죠."
종교적인 기운이 가득한 교구 학교의 원칙과 동정심 문제가,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갈등의 장 속에서 올바르게 표현되기 위한 영화 세팅이 결정된 후에서야, 연극 <다우트>는 풍부한 개인적 심연 속으로 빠져들게 되었고, 존 패트릭 셰인리 감독을 브롱크스 근교, 아일랜드계 카톨릭 노동계급이 다니던 유년 시절의 학교를 떠올리게 만들었다.
"전 그 사람들을 잘 알아요. 알로이시스 수녀는 제가 직접 체험했던 카톨릭 교구 학교의 수녀들의 모습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캐릭터죠. 지금은 사라져버린 옛 모습에 대한 향수를 알로이시스와 함께 공감하고 있다고 할까요?"
자신의 기억 속에 남아있는 이야기를 쓰기 위해서, 존 패트릭 셰인리 감독은, 1964년 당시 폭발 직전의 분위기를 위시한 알로이시스 수녀와 플린 신부 사이의 대립의 장을 만들어냈다. 1964년은 존 F. 케네디 대통령의 암살 사건이 벌어진 직후이며, 시민의 권리를 주장하는 운동이 발발하게 된 시기였다.
"견고한 구조로 이루어진 종교 집단의 제도와 더불어 위계 질서 내부에 존재하는 견고한 진리를 벗어 던지게 된 중요한 시기였죠. 그러한 제도와 위계 질서에 점점 의문을 품게 된 시기라고 볼 수 있어요. "
또한 카톨릭 교회에 변화의 그림자가 점점 번지던 시기이기도 했다. 1962년 요한 23세가 제 2차 바티칸 공의회를 개최하면서 교회가 더욱 현대화되고, 다양화되고, 평신도가 접하기 쉬운 종교가 되기 위해서 엄청난 개혁의 물결이 필요하다는 메시지를 전달했던 시기이기도 하다. 1960년대 중반, 교회의 모습이 사뭇 달라졌다. 수녀들은 더 이상 수녀복을 입지 않았고, 신부와 신도들 사이에 존재하던 형식도 많이 간소화되었다.
"저는 잃어버린 순간에 대한 어떤 단편을 포착하고 싶었어요. 1964년, 브롱크스 주변을 걷다 보면, 모자와 수녀복을 갖춰 입은 수녀님들을 쉽게 볼 수 있었죠. 그러다, 언제부터인가 모자와 수녀복을 입은 수녀님들의 모습을 볼 수 없었고, 예전의 모습은 영원히 기억 속으로 사라지게 되었죠. 플린 신부는 1960년대 초에 생겨난 여러 가지 변화의 결과물과 많이 닮아있어요. 자신이 서 있는 종교 단체에 의문을 품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그 조직 속에서 종교인으로 활동했죠. 플린 신부는 자신이 사랑하는 교회가 변화하는 세상 속에서도 그 명맥을 꾸준히 이어나갈 수 있기를 바랐던 거죠."
알로이시스 수녀를 자극해 교구 신부를 몰아내려고 하는 영화의 중심 사건은, 플린 신부와 흑인 학생 사이의 지나친 친밀한 관계를 시작으로 도널드 밀러라는 캐릭터를 통해서, 인종의 문제를 또한 다룬다. 감독은 인종 차별 철폐가 이루어지고, 눈에 보이지 않는 긴장이 팽팽하던 시절, 학교에 단 한 명의 흑인 학생이 다녔다는 흐릿한 기억이 있었다.
"학교에 한 명의 흑인 학생이 다닐 때, 여러분은 그 학생을 주의 깊게 살피고, 그 아이의 입장이 되면 기분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죠. 이를 통해 자신을 돌아보게 되고, 나의 사회적 위치를 더 복잡한 방식으로 살피게 되며, 그러한 문제를 점점 깊은 수준에서 고민하게 됩니다."
영화 전반적으로, 존 패트릭 셰인리 감독은 플린 신부와 알로이시스 수녀 중 어느 한 편의 손을 들어주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작품 속에 등장하는 모든 캐릭터들의 이야기에 어느 정도는 공감하고 있어요. 제가 경험한 인생이라는 그런 거죠. 인간이라는 존재는 원래 모순되고 불합리하고 의심스러운 상태로 계속 남아있기를 원하죠."
알로이시스 수녀가 처음으로 자신이 의심을 품고 있었다는 사실을 인정할 때, 이러한 모든 것들의 이야기에 결정적인 시련을 가져오게 된다. 흑인 학생의 어머니 밀러 부인, 다른 학생들, 그리고 제임스 수녀를 향한 연민과 공감이 점점 커져서, 알로이시스 수녀 자신이 가지고 있던 확신이 산산이 부서지게 되는 것이다. 본인도 인간적이고 변화한 카톨릭 단체에 의구심을 품고 있었던 것이다. 관객들은 자신의 신념과 감정에 의해서 경험한 것들을 스스로 감수하도록 남겨진다. 바로 이런 점이 존 패트릭 셰인리가 말하고자 하는 '의심'이라는 것이다.
"수 백 년 이상, 감독은 영화 안에서 질문을 던지고 결말 부분에 이르러 해답을 제시해 왔습니다. 그러나 저는 <다우트>에서 아무 해답을 제시하지 않고 관객들 스스로 고민할 수 있도록 만들고 싶었어요. 그러면, '정말 멋진 이야기죠?'라고 말하면서, 관객 스스로의 이야기로 만들 수 있을 테니까요."
존 패트릭 셰인리의 연극은 2004년 가을 오프 브로드웨이에서 브로드 웨이에 이르기까지 비평가들과 관객의 쏟아지는 찬사를 한 몸에 받았다. 연극 <다우트>는 2005년 월터 커 극장에서 첫 문을 열었고, 총25번의 시사회와 총 525번의 공연을 했다. 이어 전국 순회 공연과 여러 국가에서 제작되기에 이른다.
연극의 성공을 이뤄낸 존 패트릭 셰인리는 <다우트>가 더 많은 관객들에게 감동을 줄 수 있다는 것을 깨닫고 영화화 하기로 결심한다. 존 패트릭 셰인리는 이미 영화 <문스트럭>의 각본가로 아카데미를 수상한 바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지금까지 쓴 각본 중 <다우트>의 각본을 집필할 때 가장 힘들었다고 고백한다. 그는 더욱 직관적이고 역동적이면서 1960년대 급성장하던 노동 계급의 활기찬 모습을 담아내고자 노력했다
"제 자신이 브롱크스에서 성장했던 과거의 기억을 담아낸 작품이기 때문에, 연극 무대에서는 무대 배경과 무대 장치를 이용해 관객들에게 전달했죠. 하지만 영화는 실제 당시의 배경, 진짜 건물들까지 모든 것을 사실적으로 표현할 수 있기 때문에, 이야기의 진실성이 더해졌고, 배우들 또한 다른 연기를 보여줄 수 있었죠. 연극 무대와 달리 무척 사실적이었기 때문에 당시 기억 그대로를 표현할 수 있게 해준 셈이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