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타리 초기의 사회봉사 1.
최초의 로타리클럽인 시카고클럽은 처음부터 봉사에 대한 개념이나 제반 규정 같은 것을 만들었던 것은 아니었다. 이것은 당시의 클럽 강령에도 나와 있어 잘 알 수 있다. 그러나 조직이 발전하면서 필연적이라 할 수 있는 시행착오와 변화 과정에서 하나씩 정해지고 만들어져 온 것이다. 최근 국제로타리의 방향이 직업봉사에서 사회봉사로 옮겨가는 현상이 두드러지고 있으며 이에 대한 염려와 비판이 국제적으로 서서히 일어나고 있는 시점에서 로타리 운동에 있어서 로타리 클럽이 대사회봉사활동의 이루어져 온 과정을 살펴보고자 한다.
극단적인 자본주의와 가혹한 자유경쟁이 유감없이 구사되고 있던 시대에 순수한 사교클럽으로 로타리는 발족했다. 일인일직업제도를 채택한 것도 동업자끼리의 경쟁을 막고, 어떤 일이라도 서로 흉금 털어놓고 얘기할 수 있는 클럽으로 하기위한 것이었다.
돌계단을 거쳐 올라가면 두꺼운 떡갈나무 문이 있고, 그 문에 붙은 굵은 고리로 문을 노크하면 조그만 창문이 열리고 경비원이 안에서 단골(혹은 자기편)인가 아닌가를 확인한 후에 천천히 육중한 문이 열리고, 그 안에는 그들끼리의 모임이 열리고 있는 모습을 외국 영화 같은 곳에서 흔히 보아왔다. 로타리 클럽도 바로 이러한 형태였으리라 짐작이 된다.
이와 같이 폐쇄적이고 배타적인 환경 속에서 회원끼리는 친목을 돈독히 함과 동시에 물질적 상부상조를 해 가면서 자신들의 사업을 넓혀 갔던 것이다.
처음에는 단순한 사교클럽이었던 로타리가 대사회적 봉사를 생각한 것은 언제부터이라고 정해져 있지는 않다. 1906년 도널더 카터의 입회 거절에 의해서 촉발된 것이라는 것이 정설로 되어 있지만 그 이전에 자선활동이라는 형태로 대사회적 봉사활동이 이루어졌는지는 모른다. “배타적인 클럽활동을 통해 돈을 벌었다”는데 대한 속죄의 의미에서 약간의 자선활동을 하자고 하는 마음이 들었을런지도 모른다는 것은 쉽게 상상할 수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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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lden Strand”에 나와 있는 도널드 카터(Donald Carter)의 “입회거절”사건을 要約(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906년 4월 프레데릭 트위드(Frederick Twedd : 별명 프레드)가 카터에게 시카고 로타리 클럽에 입회하기를 권유했을 때, 카터는 정관을 읽어본 후 입회를 거절했다. 서로 입회하려고 줄을 서 기다렸던 당시로서는 깜짝 놀랄 일이었다.
입회거절의 이유는 "일반적인 경향으로서 회원 이외의 사람들에게 아무런 이익도 주지 못한다면, 그런 클럽은 큰 장래성이 없다" 는 것이었다.
이 거절을 받고 프레드가 취한 행동이 결국 로타리 발전에 기여하게 되었다. 즉 그는 카터의 생각을 시카고클럽 정관에 반영할 생각으로 카터를 끌어 드린 것이다.
1개월 후에 카터는 입회했고, 둘이서 클럽의 장래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한 강령 제3조를 만들어 다음과 같은 내용을 붙여 클럽에 제출한 것이다.
「전혀 이기적인 조직은 영속성이 없다. 만약 우리들이 로타리 클럽으로서 살아남고, 발전하기를 바란다면 우리들의 존재를 정당화하기 위해서 무엇인가를 해야만 한다. 우리들은 어떤 종류이던 시민을 위해서 봉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정관의 개정은 우리들이 시민에 대한 봉사가 가능하도록 시카고 로타리클럽의 강령을 확대하는데 목적을 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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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ederick Twedd :
별명 프레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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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란 아놀드가 지은 “Golden Strand"에는 초기의 시카고클럽의 대사회봉사활동으로 두개의 사례를 소개하고 있다. 모두 자선적 활동 범주에 속하는 것이다.
그 첫 사례는, 시카고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살고 있는 농부가 농사일 외에 전도사로 일하고 있었다. 달리 생각해 보면 전도사가 본업이고 농사가 부업이라고 해도 좋았다. 얼핏 보아 그는 양쪽 모두 겨우 생활을 유지할 뿐 성공했다고는 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말(馬’) 이라는 좋은 친구를 가지고 있어서 농사나 전도하는 일을 하는데 큰 도움을 받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그 말이 죽어버렸다. 시카고 클럽의 닥터 크라크 하우레는 이 소문을 듣고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다음 주 주회가 끝나자 클럽 주위에서는 논의가 비등했다. 크라크는 입에 거품을 물고 얘기를 늘어 놓았다. 결국 모두는 그의 무모한 노력을 중지시키기 위해서 가난한 전도사 겸 농부에게 새 말을 사주기 위해 클럽회원들이 모금하자는 동의를 내어 만장일치로 채택했다. 결국 시카고 로타리클럽은 인도주의에 근거한 봉사를 한 것이다.
두 번째 사례는, 1908년 어느 추운 날, 어떤 로타리안이 신문을 사기 위해 남루한 차림의 한 신체장애 신문팔이 소년과 마주했다. 그가 주머니에서 동전을 찾고 있는 사이에 소년은 떨면서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마침 그는 잔돈이 없고 10달러짜리 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는 소년의 팔을 잡고 로타리에 데리고 와서 요점을 설명하고 옆의 회원에게 5센트를 빌렸다. 그리고는 자신이 입고 있던 순모 세타를 벗어 주었다. 이런 사정을 이해한 주위 로타리안들도 샤스나 모자, 마후라, 장갑에다 5달러 정도의 돈까지 모아 주었다. 장애자차(휠체어)에 앉았던 소년은 몇 년만에 최고의 옷차림을 한 채 주회장을 나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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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7년 시카고 클럽의 회장에 취임한 폴 해리스는 도널더 카터의 의견을 받아들여 지역사회를 위한 봉사활동의 전개라는 새로운 방침을 세우고, 그 최초의 구체적인 활동이 공중변소건설운동이었다.
1907년 시카고상공회의소에 참석한 폴 해리스는 루브지역의 통행인들이 공중변소가 없어 불편하다는 소리를 듣고, 이것을 사회봉사활동을 개시하는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한 것이다. 폴은 재빨리 이 사업에 착수할 것을 클럽에 제의했다. 그러나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내용이라 대부분의 회원들은 어리둥절하면서도 최종적으로는 승인했다는 것이 진상인 듯 하다.
곧 클럽은 크래드 노잔 호텔에 25개 시민단체의 대표자를 모아, 연합공중변소걸설위원회를 설립하고 활동을 개시했다. 당시 시민 가운데 남성들은 Pub에 들러 맥주 한 잔이라도 마시면서 화장실을 이용하고, 여성은 백화점에서 입술연지 한 개라도 사며 화장실을 빌리는 것이 상례였기 때문에 이 운동에 강력하게 반발하고 나선 것이 시카고 양조조합과 백화점조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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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로
설치한 시카고 공중변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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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가지 방해를 받아 착공하기까지 2년이라는 세월이 걸렸다. 최종적으로 시카고 시당국에서 20,000달러의 보조금을 받아, 1909년에 시청과 공립도서관 옆에 2개의 공중변소를 만드는 데 성공한 것이다.
그런데 이 활동은 시민단체를 조직하여 시 행정당국을 움직여 이룩한 것으로, 흔히 말하는 단순히 돈을 모아 기부하는 단체봉사활동이 아니었다는데 주목할 가치가 있는 것이다.
이 활동을 계기로 시카고클럽은 친목파 즉 물질적호혜파와 봉사파로 갈려져 혼란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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