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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레들도 품어안는 마음으로
동과 서의 “생태적 감수성”의 합창
“어미 새가 어린 새나 알을 품고 있거든, 새끼들과 함께 어미 새까지 잡아서는 안 된다. 새끼들은 잡아도 되지만 어미 새는 반드시 날려 보내야 한다.
그러면 너희가 잘되고 오래 살 것이다.”
(신명 22, 6-7)
벌레를 위한 기도
어느덧 이삭이 패는 때에 들어섰습니다. 벼들이 매일 달라지는 모습을 보이며 여름을 실감하게 합니다. 장마가 없어졌다는 말들이 있지만, 있는 듯 없는 듯 찾아와서 농부들의 마음을 시리게 하고는 합니다. 하늘에서 내리는 비인데, 누군들 피할 수 있겠습니까. 어느 농부는 기도하는 마음으로 비가 곱게 내릴 수 있도록 물을 아끼고, 대기 오염을 줄여서 바람이 순하게 하는 일에 정성을 쏟는다고 했습니다. 그리고는 내리는 비를 하느님이 보내신 손님인 듯 잘 맞을 수 있도록 준비한다면서 웃더군요. 여러분은 어떠신지요?
이렇게 벼가 익어 갈 무렵 논에도 밭에도 벌레들이 달려들어 작물을 마구 먹어 댑니다. 바람을 타고 차이나에서 넘어오는 균과 벌레까지 있어서 농부들의 마음을 더욱 무겁게 하기도 합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예전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래서 우리 선조들은, 당연히 화학 농약이 없었으니까 자연에서 얻은 벌레 방지 약을 뿌리면서 하늘에 빌었습니다. 벌레들이 농작물을 너무 심하게 먹어 치우지 않게 해주시라고요. 그런데 어느 지역에서는, 말하자면 충제(蟲祭)를 지내면서 “벌레들을 멸절하더라도 종자는 남겨 주십시오” 하고 기원하였다고 합니다.
농사를 지으면서 벌레가 극성을 부리는 일이 없기를 기원하면서도, 벌레들 역시 하느님의 창조물이라는 걸 알아서 그것들도 그대로 보존할 생명으로 받아들이는 이 넉넉한 마음이 얼마나 순한지요. 참 아름다운 영혼들의 울림을 저 충제의 기원에서 듣게 됩니다. 벌레를 포함하여 살아 있는 모든 것들과 이루어 가는 생태적 조화와 균형에 대한 조상들의 감각과 생명에 대한 존중이 참으로 깊고도 깊습니다.
벌레까지도 품어안는 따뜻함과 정성스러움이 있었기에 선조들이 그토록 빨리 예수님의 복음에 마음을 열게 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예수님께서 병자들을 치유해 주신 것도 모든 생명을 존중하고 그들이 하느님께 원래 받은 축복을 아름답게 그리고 충만하게 살기를 바라시는 생명에 대한 깊은 감수성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우리 신앙 공동체 모든 구성원이 생명을 사랑하는 선조들이 실천한 이 따뜻한 마음을 회복하여 깊어가는 여름과 함께 알곡 익어 가듯이 그 마음을 아름답게 익혀 갈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땅강아지야 눈 감아라”
한 사제가 김용택 시인한테 들었다면서 들려준 이야기가 있습니다. 보일러 점검하고 따뜻한 방으로 바꾸는 시기였답니다. 학교에서 돌아오니까 여든이 되신 어머니가 “용택아, 보일러를 다시 때려고 불 넣어보니까 보일러에 에아가 찼는갑다.” 그러시더라는 거예요. 아무리 불을 넣어도 방이 안 따뜻해져서 수리공을 불렀대요. 수리공이 와서 보일러를 보고는 물을 빼야 한다면서 뜨거운 물을 땅으로 흘려버리니 김이 모락모락 나는데, 노모가 물이 줄줄 흐르는 데로 가서 엎드린 채 뭐라뭐라 하시더라는 거예요. 수리공이 간 다음에 “엄니, 아까 마당에서 엎드려서 뭐라고 하셨습니까?” 그랬더니, “아이고 얘야,” 하면서 이렇게 말하시더랍니다.
“땅 밑에 마당에는 땅강아지도 살고, 작은 그 물것들(미생물들)도 많이 안 사냐. 거기다가 뜨거운 물을 찌끄러 불면 눈이 멀까 봐, 눈 감아라… 눈 감아라… 그랬다.” (최민석, “다시나기: 생태계를 치유하는 교회”: 2004년 12월 1일, 서울대교구 환경문화원 강좌)
뵈지 않는 땅속 세상까지 품어안고 사는 어머니 마음이 우리의 본마음 아니겠습니까. 마음이 보게 하고, 사랑이 통하게 합니다. 이것이 우리로 하여금 새로운 질서를 꿈꾸게 하고 살게 합니다. 노모의 저 생태심(生態心)은 땅바닥에 귀를 기울여 살아 있는 것들과 사랑을 나눌 수 있는 능력을 키워 가는 신앙 공동체, 하느님의 백성으로 살아갈 사명과 축복을 일깨우는 초대와도 같은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어미새를 지키는 마음
구약 성경 가운데 신명기 22장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너희가 길을 가다가 나무에서건 땅에서건 어린 새나 알이 있는 둥지를 보았을 때, 어미 새가 어린 새나 알을 품고 있거든, 새끼들과 함께 어미 새까지 잡아서는 안 된다. 새끼들은 잡아도 되지만 어미 새는 반드시 날려 보내야 한다. 그러면 너희가 잘되고 오래 살 것이다”(6-7절).
충제를 지내면서 벌레들의 종자는 살려 주시라고 기도하는 마음과 잘 어울리지요? 지구에 사람만 남아서, 하느님을 찬양한다고 생각해 보세요. 실제로는 이럴 수 없지만, 상상으로는 가능하겠지요. 사람이 찬양하는 것도 아름답겠으나, 새들도 함께 찬양하면 더욱 아름답지 않겠습니까? 그래서도 하느님께 창조된 만물은 다 살아서 하느님을 찬양하는 데 동참해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다니엘 3장 56-88절과 프란치스코 성인의 “태양의 찬가” 참조) 생명을 지켜 줄 줄 아는 이 마음은 원래 단순히 새를 불쌍히 여기는 동정심이나 사람과 사람 혹은 사람과 동물 사이의 의무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지요. 그것은 참으로 온 생명의 주인이신 하느님에 대한 찬양과 영광에서 샘솟는 것입니다.
이 대목은 발전을 이루어 잘 살겠다고 하면서 도리어 우리의 생명을 길러 준 땅과 강과 산과 바다를 때려잡으며 생태 위기를 불러온 오늘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땅과 강과 산과 바다를 신음하게 하면서, 이 안에서 사는 뭇생명과 우리가 건강하게 살 가능성은 없습니다. 땅과 물이 내주는 결실은 물론 이것들을 길러 주는 어머니와 같은 땅과 물 자체까지 파괴하면서 사는 한, 우리의 후손들은 땅도 산도 물도 메마르고 오염된 삶의 자리에서 우리보다 더 심하게 고통을 겪게 될 것입니다. 어미새를 살려야 새끼들을 계속 잡을 수 있는 것처럼, 어머니처럼 우리를 살려 온 땅과 산과 강과 바다를 살려야 하겠습니다. 그리하여 우리 자신은 물론 후손들 역시 이것들이 내는 소출을 먹으며 이것들과 함께 하느님을 찬양하는 축복을 아름답고 충만하게 누릴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결심:
1. 하느님은 생명의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과 함께 역사가 흐르고 생명이 이어집니다. 하느님이 존재하신다는 것은 하느님이 창조를 지속시켜 가신다는 것을 뜻합니다. 하느님은 오늘도 우리와 온 우주를 계속 창조하며 돌보고 계십니다. 우리는 이것을 하느님의 “계속되는 창조(creatio continua)”로 이해합니다.
우리 교회는 있게 하시고 돌보시는 하느님의 이 창조의 마음을 닮기를 원합니다. 창조와 생명 살림의 농부이신 하느님의 돌봄을 지켜 가고 싶어합니다. 우리의 자녀와 이웃을 돌보고 우리의 자연을 돌볼 때,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목숨을 걸고 선포하신 하느님의 생명의 다스림이 우리 가운데서 더욱 풍요롭게 성장해 갈 것입니다.
마리아께서 승천하신 것은 하느님의 돌보심과 예수님의 고난을 통한 구원의 여정을 묵묵히 동행하신 아름다운 사랑에 대한 하느님의 자비의 선물이었습니다. 어머니 마리아의 순명과 하느님의 응답을 기억하면서, 이 시대에 어머니가 바라시는 우리의 역할을 식별하여 실천할 수 있도록 다짐합시다.
2. 위에서 벌레와 땅강아지와 새에 대한 생태적 감수성을 살펴보았습니다. 생태(生態)란 생생(生生)하게 하는 일이요 돌보고 지켜 가는 살림입니다. 하느님과 예수님이 성경을 통하여 저희에게 계시하시는 살림의 방법은 단순합니다. 도움이 필요한 이들에게 다가가서 그들이 겪는 일을 보고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것, 이것이 생태적 감수성을 살아가는 첫 단계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눈으로 보고 예수님의 귀로 귀 기울여 들으면, 예수님의 마음에 비추어 판단을 하는 둘째 단계로 넘어가게 됩니다. 판단은 곧바로 셋째 단계, 곧 예수님의 손과 발이 되어 실천하는 단계로 이어집니다.
지리산에서 계룡산까지, 계룡산에서 임진각까지 오체투지 기도 순례를 하신 신부님과 스님이 계셨습니다. 바닥에서 보이지 않게 살아가는 수많은 생물은 물론, 사람이면서도 사회의 바닥에서 밟히면서 보이지 않게 신음하며 사는, 용산 철거민들과 같은 가난한 사람들을 찾아서 만나봅시다. 그리하여 먼저 그들의 말을 귀 기울여 들읍시다. 그 다음에 복음에 비추어 판단하여, 우리가 해야 할 일을 실천할 수 있도록 결심합시다.
3. 결심하여 구체적으로 실천할 것을 수첩에 적고, 한 달 동안 어떻게 실천하였는가를 기록하여 자신의 성장과 변화를 식별하고 함께 나눌 수 있도록 수첩 활동을 계속해 갑시다. (생태 사도직 수첩 활동)
“생태적 감수성”으로 보고 판단하고 실천하기
공동체 나눔을 위하여:
(아래에 열거한 주제 가운데 일부나 공동체가 직접 적절한 주제를 선택하여 나눔을 갖습니다)
1. 지난 달에는 하느님의 창조와 노동과 농사를 생태와 연관지어 살펴보았습니다. 사람이 하는 일을 신들을 섬기는 노예살이로 보았던 수메르와 바빌론의 인간 창조 신화를 보았고, 이어서 이것을 창세기의 인간 창조와 비교하면서 하느님의 노동과 쉼이 갖는 의의를 살펴보았습니다. 신들처럼 사람들의 노동을 고역으로 만드는 사회에서 하느님의 노동과 쉼의 주기를 따라 일하고 예배하는 신앙과 생활 전통이 얼마나 소중한가를 되새기는 소중한 시간을 가졌습니다. 이런 토대 위에서 우리는 구체적인 삶의 자리에서 자신의 노동을 통하여 하느님의 창조와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에 어떻게 동참하고자 노력하였는지 돌아보면서, 일을 하며 체험한 기쁨과 아픔들을 함께 나누어 봅시다.
2. 생태는 “생생하게 하는 일”이라고 할 때, 이것은 특히 바닥을 돌볼 줄 아는 따뜻한 마음을 필요로 합니다. 자연만이 아니라 사람들 중에서도 특히 바닥에서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한 채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을 살리는 모든 일이 “생생하게 하는” 생태 영성의 실천과 서로 통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생생하게 하는 마음”으로 교육을 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두봉 주교님은 이 면에서 참으로 앞선 분이십니다. 미제레올이라는 원조단체가 있습니다. 지금도 전 세계 가난한 이들에게 그리스도의 희망을 전하면서 참 살림을 증거하는 대표적인 기관입니다. 20년도 훨씬 더 전에 미제레올의 한 독일인 대표가 두봉 주교님과 함께 안동교구 지역에 있는 학교들을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한 교장 선생님이 학교 현황을 소개하면서, 졸업생이 몇 명인데 그들 중 몇 명은 어디에 취직했고 또 몇 명은 어느 학교에 진학했다면서 자랑스러워했습니다. 졸업생 가운데 특별히 뛰어난 학생들에 관해서 말할 때는 누구는 소위 일류대학이라는 어디에 입학했고, 누구는 무슨 공으로 어떤 상을 받았다며 그들의 고향과 부모의 사회적 지위를 소개하기까지 하였습니다.
이야기를 듣던 독일분은 곰곰 생각하며 묵묵히 앉아 있더니 한참 후에 입을 열어 물었습니다. “우등생 말고 학교를 겨우겨우 졸업하는 좀 뒤떨어진 학생들은 어디에 취직하며 무엇을 하는가요?” 그렇게 설명을 잘 하던 교장 선생님은 이 물음에 대답을 잘 못하였습니다. 그러자 미제레올에서 온 그 독일인 대표는 상처를 주지 않으려는 듯 웃음을 지으면서도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우등생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들은 머리가 좋고 똑똑하니까, 또 유능하니까 세상을 쉽게 이겨나갈 수 있고 언젠가는 출세할 것입니다. 하나 머리가 그리 좋지 못하고 남에게 뒤떨어지는 졸업생들은 그렇지 못할 테니 오히려 우리는 그 애들에게 관심을 기울여야 하지 않을까요?” 두봉 주교님은 이 말을 전한 후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회의 저변에 속한 사람들에게 관심 갖고 그들이 잘 사는 세상이 되도록 우리 함께 노력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지 않겠습니까?” (두봉, “관심에 대한 생각”: 사람의 일감, 문음사, 1989, 210-1쪽에서)
두봉 주교님이 미제레올 대표를 통하여 일깨워 주신 교육의 참 목표를 우리나라가 1970년대부터, 아니 80년대나 90년대부터, 아니 2000년대에 들어서라도 바로 인식해서 준비하였다면, 오늘과 같은 교육 혼란이 벌어지겠습니까? 두봉 주교님의 저러한 교육관을 실천해 갔다면, 우리도 참으로, 최근에 주목받고 있는 핀란드나 스웨덴 같은 교육 선진국이 되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바닥을 돌보는 따뜻한 마음으로 청소년들의 교육을 새롭게 일으켜 세우는 일에 관심을 갖고, 이들을 살리는 데 필요한 방법을 함께 나누어 봅시다. 바로 여기에 “사람 생태”를 복음적으로 실천하는 한 진정한 길이 있기 때문입니다.
3. 위에서 핀란드가 교육 선진국이라고 하였는데, 얼마 전에 핀란드의 페카 부오리스토 대사가 핀란드 교육에 관하여 말한 내용을 보면서 깊이 공감한 적이 있습니다. 핀란드 교육의 경쟁력의 원천이 무엇이냐는 물음에 대사는 한마디로 “경쟁 없는 교육”이라고 했습니다. 많은 사람이 학생들을 경쟁시켜야 공부를 열심히 할 것으로 생각하고 또 그렇게 주장하고는 합니다. 그런데 그것은 도리어 동료를 이기려는 욕심을 키우고 이 욕심이 커지면 커질수록 협동심과 창조력이 죽어간다는 것입니다. 경쟁심으로 교육을 하지 않다 보니, 이 나라에는 우리나라 교육을 망치고 있다고 비판받아 온 사교육이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중학교와 고등학교는 물론이고 대학교까지도 좋은 학교 못한 학교 이런 구분이 없습니다. 학교 간 차등이 거의 없이 특성화되어 있기 때문입니다(http://www.hani.co.kr/arti/SERIES/198/356116.html). 핀란드에서는 부모가 가난해서 자녀인 청소년들이 학교에 다니지 못하는 경우가 없고, 도리어 나라에서 이들에게 용돈까지 지급하면서 공부할 권리를 지켜 줍니다.
공부를 잘 하는 학생들을 중심으로 영재고, 과학고, 외고, 자사고, 자율형사립고 등을 더 많이 세우면 세울수록 도리어 경쟁심에 눈이 먼 부유층 자녀들에게 유리할 따름입니다. 핀란드 교육 전문가들은 핀란드가 교육에서 가장 역점을 두는 것은 뒤떨어진 학생들에게 가장 많은 지원을 하여 그들도 행복하게 공부할 수 있게 하는 데 있다고 했습니다. 공부를 잘하는 학생이 뒤떨어진 학생들을 도울 수 있는 협력 학습을 통하여 학교에서부터 이미 서로 돕고 사는 사랑의 실천을 교육과 삶 안에 통합해 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미제레올 대표로 온 독일인과 두봉 주교님, 그리고 핀란드 대사 부오리스토 등이 한목소리로 생생하게 하는 영성의 실천을 바른 교육의 대원리이자 원동력으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교육을 온 벌레를 비롯하여 모든 생명을 존중하는 생태적 감수성으로 교육하는 “생태적 교육”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생태적 감수성이 살아 있는 교육을 하는 데서 우리 교회가 할 역할은 어떤 것일지 성찰하여 이야기를 나누어 봅시다.
4. 차별적인 상황에서 경쟁에 내몰린 채 공부를 많이 하면 할수록 일반적으로 자연과 인간을 나누어서 생각하는 경향이 강해집니다. 그러면 그럴수록 하느님의 창조에는 둔감해져 갑니다. 공부를 했건 하지 않았건 하느님의 창조에 민감할수록 자연과 인간을 통합해서 보려고 노력합니다. 나중에는 이런 노력이 필요 없을 만큼 하느님의 창조와 자연과 인간이 “하나의 사랑의 끈”으로 이어져 있다는 것을 알고 살아갑니다. 농부들은 학교 공부를 했든 하지 않았든 하느님의 “창조의 학교”에서 이 사랑의 연대를 배운 진정한 학생들입니다. 창조의 학교에서 배운 “사랑의 가방 끈”으로 자연과 사람, 그리고 하느님과 예수님의 사랑의 돌봄을 이어 갈 가능성을 가장 역동적으로 갖고 있는 사람들, 그들이 농부입니다.
그런데 두봉 주교님은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얼마 전에 한 번 무슨 교회의 일로 지방의 몇몇 고등학생과 대화를 가져본 일이 있다. 고등학교 학생들이었지만 어디인지 모르게 젊은 사람으로서의 떳떳한 기풍이 부족한 것 같았다. 그 이유를 찾아보니까 단순한 이유가 있었다. 여유있는 집의 자녀들은 중학교 때부터, 아니 어떤 이는 초등학교 때부터 대도시에 나가서 학교 다니는 것이었고 고등학교 입학 당시에도 경제적인 힘이 많다든가 공부 잘 하는 학생들이 유명한 학교나 가까운 도시에 진학했다는 것이다. 남는 학생들은 그 밑의 애들뿐이었다. 고등학교 다니지만 자기 학교를 시시하게 생각하고 자기 자신을 가련하게 여긴다. 그 학생들 중에 하나는 따로 나를 만나자고 했다. 그랬더니 자기는 평범하게 살고 싶지 않다는 이야기다. 나는 격려해 주었다. ‘좋다, 젊은이가 평범하게 살아야 되겠느냐’고 했다. 그런데 뒷말이 이것이었다. ‘나는 3학년 학생인데 시시한 학교에 다니고 있으니까 국가고시에 합격할 가망성이 희박하다. 큰일이다. 내가 합격하지 못하면 농사를 짓는 길밖에 없다.’”(“농촌 청소년운동의 방향,” <두봉 에세이 사람의 일감>, 213쪽)
두봉 주교님은 이 이야기를 최소한 20년 전에 하셨는데, 오늘 우리 사회에서는 어떤지요?
지금도 농촌 지역 학생들이 이런 의식 속에서 좌절과 실패감에 사로잡힌 채 자존감을 갖고 살지 못한다면, 그 이유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함께 의견을 나누어 보고 부모로서, 혹은 믿음을 갖고 사는 어른으로서 자신이 실천할 일을 찾아봅시다.
5. 두봉 주교님은 위의 이야기를 전한 후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농사짓는 것을 얼마나 얕잡아 보는 것이었는지 얼마나 부끄럽게 평가하는 것이었는지, 자기로서는 농사짓는 것이 곧 일생의 실패였다는 것이다. 농촌 청소년들이 농사일을 절망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한, 농사일을 수치스럽게 평가하고 있는 한, 그들에게는 희망이 희박할 것이다. … 대도시 중심으로 생각하는 전반적인 경향, 오직 수출하는 데에 모든 힘을 기울이는 일반적인 경향 … 등등이 근본적으로 재검토되어야 할 것이다. … 다시 누가 흙을 자랑해야 할 것이다. 흙 묻은 손으로 일을 한다는 것, 뜨거운 햇볕으로 얼굴이 탄다는 것, 땀을 흘려가며 자연과 싸운다는 것, 나무를 사랑한다는 것 … 노동의 고귀한 가치를 누가 부르짖겠는가?”(같은 책, 213-5쪽)
두봉 주교님은 이렇게 명확하게 어른들과 교회와 사회가 나아갈 길을 보고 함께 그 길을 열어 가자고 호소하셨습니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도 청소년들이 손에 흙 묻히고 땀 흘려 일하는 것을 기피한다고 할지라도, 학생들을 탓하는 것으로는 문제를 제대로 극복할 수 없습니다. 두봉 주교님은 이 문제가 단순히 학생들이 못나서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이것이 대도시 중심, 수출하는 기업 중심 사회와 문화 현상과 직결되어 있다는 것을 정확하게 보셨습니다. 이런 사고를 건강하게 바로잡아서 땀 흘리는 노동을 바로 평가하고 그 노동의 대가가 실해서 사람답게 살면서 자녀를 교육할 수 있는 사회를 농촌 지역 사회와 도시 시민들이, 정부와 농사꾼들이 함께 만들어 가야 할 것입니다. 말로가 아니라, 실제로요.
지금, 각자가 노동의 고귀함을 자신과 자녀와 이웃과 사회에 증거하기 위하여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방법을 찾아서 이야기를 나눈 후에 구체적으로 실천하기로 다짐합시다. 자신이 생활 속에서 바로 실천할 수 있는 일은 어떤 것이 있는지, 그리고 사회 구조의 변화가 필요하다면, 그것을 위해서는 어떤 일을 할 수 있는지 이야기해 봅시다.
6.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첫째가 꼴찌 되고 꼴찌가 첫째 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마르코 10장 31절). 우리 사회에서는 흙을 아는 사람들이 뒤로 밀려나 있을는지 모르나, 예나 지금이나 하느님 나라에 가장 가까이 있는 이들일 수 있습니다. 이 역전이 현실에서도 통하게 하기 위해서 농부들이 먼저 바닥을 돌보는 마음으로 자녀들의 혼을 바로 세울 수 있어야 하리라고 믿습니다. 이를 위해서 교회가 할 일을 찾아야 할 것이고, 이런 점에서 안동교구의 경우 가톨릭상지대학교가 제몫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믿고 있습니다. 전문대학이기 때문에 1등주의 나라에서 어려움을 많이 겪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저 말씀처럼 그렇기 때문에야말로 하느님 나라에 가까울 수 있으니, 이 뒤집기를 농촌 교구, 농촌 청소년, 농촌 지역 전문대학교에서 새롭게 이룰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안동교구가 운영하는 유치원과 어린이집, 그리고 중고등학교와 가톨릭상지대학교에서 예수님의 마음으로 어린이와 청소년과 청년들을 위하여 어떤 교육을 할 수 있는지 성찰하여 나누어 봅시다.
나눔의 방법:
1. 먼저 달 나눔에서 결심한 실천 사항들을 나눕니다.
2. 이 나눔을 위하여 “생태 사도직 활동 수첩”을 마련하여 기록해 갑니다. 온 우주의 주인이시며 생명이신 주님을 따라 생태 사도직을 수행해가는 길에서 겪은 일들, 생명 사랑의 길에서 체험한 것들을 가능한 날마다 기록하시기 바랍니다. 이 기록들은 여러분 자신과 자녀들에게, 혹은 사랑하는 친구들에게 매우 소중한 삶의 지혜가 되고 생동하는 선물이 될 것입니다. 특히 이 생태 사도직 활동 수첩을 연말이나 성탄 때 주님께 봉헌하는 예식을 거행하시기 바랍니다. 일 년 동안 수행해온 생명 사랑의 삶을 봉헌하는 살아 있는 예식이 될 것입니다.
3. 각 사람이 절제하면서, 5-8분 정도로 요약해서 나눔을 갖습니다. 추상적인 내용이 아니라 자신의 실제 생활에서 겪은 일을 소재로 삼아서 나눔을 갖습니다. 자신의 이야기에 자신이 도취되어 있지 않은지 언제나 성찰하면서 나눔을 갖습니다.
4. 모임을 함께 갖는 형제자매는 서로 격려하는 가운데, 하느님의 자비 안에서 서로 더욱 성장할 수 있도록 힘이 되어 줍니다.
5. 어떤 경우에도 비판을 자제하면서, 언제나 긍정적인 방식으로 응답하려고 노력합니다.
6. 비판하고 싶은 내용이 있으면, 비판하고 싶은 욕구를 가슴에 묻으면서, 오히려 비판하고 싶은 것을 말한 사람이 그것을 극복하도록 기도해 줍니다.
원칙: 칭찬은 즉석에서 말로 하고, 비판은 후에 글로 정리하여 아무도 모르게 본인에게 직접 전해 줍니다.
신앙과 사회
생태계 복지 162위인 우리나라가 “4대강 살리기”를 하려면
유엔에서는 “새천년 생태 평가” 프로젝트를 수행하면서 2005년에 결과를 발표한 적이 있습니다. 이때 복지를 인간 복지와 생태계 복지로 나누어 연구하면서, 우리나라의 수준을 세계 180개 나라 가운데 인간 복지는 28위, 생태계 복지는 162위로 평가하였습니다. 인간 복지는 나름대로 노력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생태계에 대한 우리나라의 이해와 생태계와 관계를 맺고 사는 수준은 세계 최하위 그룹에 속해 있다고 본 것입니다(최재천, “모든 학문의 길은 생물학으로 통한다,” 김광웅 엮음, 우리는 미래에 무엇을 공부할 것인가 - 창조사회의 학문과 대학, 생각의나무, 2009, 166쪽). 이것은 우리나라 정부와 기업과 국민이 생태계에 대해서 그만큼 무지하고(생태맹 현상) 폭력적(무분별한 개발 현상)이라는 것을 말합니다. 생태맹과 폭력적인 개발주의는 우리 사회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악순환을 이룹니다. 이런 상태에서 자연에 손을 대면 댈수록, 자연은 그만큼 허무하게 그리고 급속하게 자연 본래의 모습을 잃고 제 역할을 수행하기 어렵게 될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정부가 생태계의 질서와 직결되어 있는 대규모 사업을 수행할 때 정책 결정자들의 생태 의식과 실천 수준을 확인하고 이를 사업의 진정한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수준으로 고양시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이들의 생태 감각과 정의 실천 역량은 단순히 우리 세대만이 아니라 후세대와 앞으로 올 세대는 물론 자연 생명 공동체까지도 고려하여 사업의 생태적 성공을 판가름하는 데 결정적으로 영향을 미치기 때문입니다.
이명박 대통령은 대운하를 공약으로 내세웠고, 지금은 남한의 거의 전 국토에 닿아 있는 4대강을 대상으로 소위 “4대강 살리기”를 생태적으로 수행하겠다면서 사업을 강행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대통령의 생태 의식과 실천 수준은 어떤가요?
이명박 대통령은 그동안 여러 기회에 자신의 생태 의식을 확인시켜 주었습니다. 일례로, 이 대통령은 지난 7월에 폭우가 내렸을 때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를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7월 14일이었습니다. 이대통령은 폭우 피해를 막기 위한 대책들을 들은 후에 단기 대책이 아니라 영구 대책이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강원도 같은 산골에 사는 사람들을 위해서 아파트 같은 것을 지어서 한데 모여 살게 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행정하기도 좋고 피해도 안 입고 할 거라면서요.
이 제안은 농촌 지역을 찾아가서 주민들과 대화를 하는 과정에서도 한 적이 있었습니다. 드문드문 떨어져 사는 주민들을 아파트 같은 데 모여 살게 하고, 학교도 기숙사학교 같은 것을 지어 줘서 학생들을 기숙사에, 이 대통령의 표현을 빌자면, “다 넣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들이 “딴 생각 않고 공부해서 성적이 굉장히 오르고 좋은 대학 간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이런 정책을 시도해 본 적이 있는 행정안전부장관이 경북 봉화에서 그런 식으로 유도해 보니까 주민들이 옮겨가려고 하지 않는다고 답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똑같은 제안을 이번에는 재난을 막을 대책으로 제시한 것이지요(“대통령의 원대한 구상”: 돌발영상 2009년 7월 15일: http://www.ytn.co.kr/_comm/pop_mov.php?s_mcd=0302&s_hcd=01&key=200907151356530919).
이 대통령이 농민 집단 거주지 조성 정책에 이렇게 집착한다는 것은 농민들의 생활과 농촌 생태를 그만큼 알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건설회사 사장 출신인 이 대통령에게는 자연과 생태가 사람과 별개로 여겨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유엔의 “새천년 생태 평가” 프로젝트는 인간의 행복과 불행이 생태계의 복지 수준과 직결되어 있다고 말합니다(A Report of the Conceptual Framework Working Group of the Millennium Ecosystem Assessment: Ecosystems and Human Well-being: http://www.ecodes.org/pages/areas/salud_medioambiente/documentos/ecosystems_human_wellbeing.pdf). 오늘 21세기에는 생태 복지와 인간 복지는 서로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는 것이 기본 이해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베네딕토 16세 교황님이 2007년 “세계 평화의 날” 메시지에서 쓰신 표현을 빌자면, 생태 평화와 인간과 사회의 평화는 한쪽이 희생되면 다른 쪽도 함께 손상을 입고 한쪽이 건강해지면 다른 쪽도 튼실해지는 공동 운명 관계에 놓여 있는 것입니다(http://www.cbck.or.kr/new/bbs/board.php?bbs_code=notice_kr&bbs_id=1336). 농부들은 하느님의 “창조의 학교”에서 자신들이 사는 곳이 자신들의 존재와 행복하고 불가분의 관계를 갖고 있다는 것을 온 몸으로 배워 알고 살아 갑니다. 그런데 자신들이 아는 이 기본을 모르면서도 집단 거주지 조성을 마치 큰 묘책이라도 되는 듯이 말하는 대통령 앞에서 농부들이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이 정도의 생태 의식을 갖고 있는 이 대통령과 관료들이 4대강 살리기를 생태적으로 할 것이라며 마구 밀어붙이고 있습니다. 그러니 그 결말을 내다보는 사람들이 지금까지 해온 것처럼 공권력을 앞세워서 이 사업을 조급하게 추진해서는 안 된다고 이의를 제기하는 것은 당연하고도 다행한 일인 것입니다.
일에는 순서가 있는 법입니다. 이 대통령과 이 사업에 크게 영향을 미칠 위치에 있는 사람들의 생태 인식과 실천 수준(인식 수준이 아니라 “인식과 실천 수준”이라고 했습니다)을 먼저 철저하게 점검할 필요가 있습니다. 세계 180개 나라 가운데 생태계 복지 수준이 162위인 나라에서 이렇게 결정적으로 생태계에 영향을 미칠 사업을 결정하고 감독할, 그러나 책임을 지지는 않게 될 사람들의 생태 의식과 실천 수준을 확인하지 않고는 이 일을 하게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4대강 살리기를 4대강 죽이기로 전도시키지 않으려면, 그리하여 우리 자신은 물론 특히 미래 세대들에게 그들이 결정하지도 않은 일에 대한 치명적인 댓가를 치르게 하지 않으려면 말입니다. 그러지 않고는 강들도 잃고 강 따라 사는 산과 들도 잃고 강을 따라 형성된 오랜 도시와 문화와 주민들도 잃고 결국 대통령도 관리들도 다 잃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