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의 폭포수
-오미연의 시 읽기
출근길에 나서는 남편의 안위가 걱정스러워 안스런 눈길로 마중하는 아내의 눈은 한없는 사랑스러움으로 깊이를 헤아릴 수가 없다. 걱정스럽고 상냥스런 말로 ‘조심하세요‘라고 당부할 때 남편은 일상적인 물음이어서 아무런 반향 없이 출근한다. 아내도 그 대답 없음에 마음 상하지 않는다. 굳이 대답을 듣지 않아도 되는 것은 그것 또한 일상적인 물음이기에 그렇다. 남편의 안위를 걱정하는 것은 단지 아내의 노파심에서 우러나온 것이었고 부부간의 교감에 의해 이미 이해의 폭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교감은 의미를 가지고 있으면서 무의미화 되어버린 것이며 또한 무의미한 교류 속에서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오미연의 작품은 의미의 무의미화를 통해 일상을 더욱 일상스럽게 표현하는 그곳에 매력이 있다. 그녀는 시에 어떤 거대한 의미를 담기보다는 미묘한 감정의 작은 틈새를 끄집어낸다. 출근하는 남편의 반향이 없음을 오히려 더 자연스러움으로 느끼는 아내의 미묘한 정감을 포착해 내고 부부간의 행복한 웃음이 삶을 이끌어 가는 원동력임을 인식한다. 아주 작은 세계이면서 가장 보편적인 삶의 의미에 접속되어 있음을 본다.
<잘라도 피 한 방울 흐르지 않던 머리카락의 따뜻함이/ 얼마나 큰 힘으로 어깨를 덮어 주는지/ 좁은 방 한 칸을 지키게 해 주는지> ( 「잊지 않은 인사」중에서)
오미연 작품의 또 다른 모습은 우리 삶을 삶이게 만드는 요건으로서 진정성을 추구한다는 것이다. 누구에게나 진정성은 있겠지만 시인이 접근하는 일상은 일반인들의 그것보다 더 큰 진정성을 담는다. 그렇지 않다면 그 일상은 그저 평범한 일상으로 추락하기 때문이다. 평범한 <일상으로부터 솟아오르기>는 시에 있어서 <낯설게 하기>와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시인이 만나는 일상 자체가 바로 진정성에 의해 선택되어 진다는 것이다.
「기억, 탈의실에 관한」작품에서도 여자 탈의실에서 일어나는 풍경들을 통해 내가 안고 있는 아이의 열과는 전혀 상관없는 여자들의 무서운 일상과 시적 자아의 안절부절한 일상이 충돌하면서 시적 자아의 일상이 타자의 일상에 관여할 수 없음을 뼈저리게 인식한다. 다른 여자들의 일상은 그들에게는 너무 일상적이지만 특별한 사연이 있는 시적 화자에게는 그들의 평범한 일상이 무섭게 느껴지는 것이다. 그래서 시적 화자는 그것이 물과 기름처럼 함께 묻혀질 수 없는 것이었고 그것을 느끼는 순간 시적 화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으로 강변한다. 너무나 깊은 의미 하나를 가슴에 품게 된 시적 화자는 역설적으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을 거듭 거듭 주장한다. 그것이 오미연의 일상의 틈이며 낯설게 하기에 접근하는 방법이다. 오미연이 기대하는 일상은 수도꼭지처럼 비틀면 물이 나오는 그런 일상이 아니다. 꼭지를 비틀면 물이 쏟아지듯이 세상일들도 꼭지처럼 비틀지 않으면 제대로 이루어지는 것이 없다는 의미를 담는다. 꼭지가 가지고 있는 상징성으로 기대치가 높을수록 더욱 큰 아픔을 느껴야 하는 세상의 일상을 향하여 경각심을 띄워 보내는 것이다.
오미연의 작품을 읽어 나갈 때 문득 그런 느낌이 든 것은 무엇 때문일까. 그의 작품들이 지극히 평범한 일상을 대상으로 삼고 있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생활이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치부되기 쉬운 예술 세계에서 일상은 가장 흔히 접할 수 있는 가장 가까운 소재이다. 그렇기 때문에 평범한 작품은 그냥 땅에 떨어진 휴지처럼 아무에게도 관심을 줄 수가 없다. 일상의 커다란 기둥 아래 그냥 있었던 틈, 눈에 보일락 말락한 그런 틈새에서 꼬물거리는 벌레, 또는 낯선 갈라짐 속에 숨어 있는 우울이나 갈증, 그리고 어떤 느낌을 갖지 못하고 있었던 얼굴의 작은 점처럼 공기와도 같은 일상에서 틈을 끌어낸다. 그런 것들에 어떤 의미를 붙이고 생명력을 불어넣을 수 있는 이는 시인이 아니면 불가능하다. 일상이 의미와 생명력을 지닐 수 있게 되기까지에는 시인이 간직해야 할 시선의 문제이다.
오미연의 시선은 아주 가늘다. 외할머니란 부제를 달고 있는 「구멍난 부침개」의 작품에서도 할아버지를 바다에 묻고 사시는 할머니의 모습을 통해 섬에 사는 이들의 삶을 그리고 있다. 그러나 그 시선은 다르다. 작은 것을 통해 큰 것을 보기 때문이다. 시적 화자가 보았던 것은 하늘, 바다, 해바라기, 파도소리, 외할머니, 자갈밭, 파래, 우뭇가시, 말똥성게, 소금꽃들이지만 그가 그것들의 이면에서 본 것은 바로 <고구마전, 호박전, 파전, 부침개마다 뚫려 있던/ 젓가락 구멍으로 보았던/ 어두운 눈으로 만들어 낸 세상>이었고 늙어 가신 외할머니였다. 오미연은 자신의 가족사에 대한 기억들을 통해 진정성에 접근하고자 한다. 이곳에 발표되는 여러 시편들에 엿보이는 특징이지만 보다 더 철저한 객관화 작업이 필요한 것으로 느껴진다. 객관화 되지 않고서는 그것의 성패가 두려워지기 때문이다.
오미연 시인이 가고자 하는 세계는 진실이 살아있는 곳이다. 그에게 주어진 진정성은 바로 정직성에 닿아있다. 거짓말하는 아이에게 매를 들면서 진실이 무엇인가를 가르쳐 주지만 거짓이 진실보다 아름다운 아이에게는 소용이 없다. 외할아버지를 바다에 묻고 사는 자신의 어머니를 통해 진실이 무엇인가를 배워왔던 시적 자아와는 다르다. 그러나 진실은 자신의 아픔을 통해 터득할 수밖에 없다는 자각으로 끝맺음 한다. (「진실은」중에서) 그러나 결코 포기하지 않는 진실에 미련이 남게 되고 이의 구현에 연결시킨다.
<피아노 소리를 듣는다. 누구일까. 저 음을 두드리고 있는 이는. 아니, 나를 갈기갈기 찢어대고 있는 이는. 꼭꼭 숨은 그의 모습에서 오래 전 땅으로 떨어진 꿈 하나 기어오른다. 침자국 선명한 유년의 턱 언저리를 돌아 나온 참 아득한 시절이다. 묶인 시간들이 꿈틀거린다. 나는 왜 깍지 낀 손을 풀지 못했을까. 푸르른 유년이 벽의 잔해 속에서 자주 눈을 껌벅인다. 지금 무엇보다 두려운 건 짱짱한 햇빛이다.> (「어느 봄날, 그 피아노 소리」중에서)
시인이 대상을 선택하고 표현하는데는 내면적으로 지니고 있는 <부담>이 작용한다. 위 시에서도 그것이 작용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오 시인은 유년의 아픈 기억을 부담으로 안고 있다. 이웃집에서 울리는 피아노 소리에 한없는 열등감 속으로 빠져 들어가던 기억을 지울 수가 없다. 시인은 지난날의 기억을 통해 자신의 가난과 열등감을 느끼게 했던 피아노 소리에 대해 아픈 것이다. 그것이 시인을 자유롭게 만들지 못하는 한 부분으로 자리하고 있음을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