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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럭비부 창단
1946년 9월 이학용 체육선생은 재학생 중 체격이 건장하고 힘이 센 학생을 모아 럭비부를 창단하였다. 자의반 타의반으로 모여든 럭비부원은 이학용 선생의 지도와 고려대학교 럭비팀 주장인 박웅엽 씨의 개별지도를 받으며 훈련에 임하였다.
창단 2개월째인 11월 11일에는 서울운동장에서 거행된 제1회 전국 선수권 대회에처녀 출전하였다. 이 경기에서 경기공업학교에 11:8로 패하였다. 이후 선수를 보강하고 새로운 출발을 하였다. 당시 럭비부 명단은 다음과 같다.
■주장 강두원
선수 문종상, 윤용철, 김영진,
이명호, 고한규, 문영식
이들은 타 운동부에서 활약한 맹장들로서 애교심이 투철한 모범생들이었다. 1948년 여운영씨를 코치로 초빙하여 본격적인 훈련을 하였다. 방과 후 운동장에서 땀을 흘리고 숙직실에서 합숙(合宿)을 하고 본격적인 훈련을 하며 기량을 닦았다. 그리고 새로운 팀웍을 다져 전국대회(全國大會)에 다시 도전하였다. 1948년 10월 20일부터 대한체육회 주최 ‘정부수립 경축대회 겸 제29회 전국체육대회’가 서울운동장에서 개최되었다. 이 대회는 8․15 전에는 ‘조선올림픽대회’ 또는 ‘조선종합경기대회’로 불리어 왔으나 정부수립과 함께 ‘전국체육대회’로 그 명칭을 통일하고 대회 횟수도 대한 체육대회의 연륜(年輪)를 따라 제29회로 한 첫 번째 대회였다. 본교 럭비팀은 이미 예선전에서 20여 년의 전통을 쌓아온 양정중 팀을 9:6으로 누르고 경기중을 11:3으로 이겨 무서운 신생(新生)팀으로 두각을 나타내었다. 전국체육대회에 첫 출전하여 예선을 파죽지세로 휩쓸고 준결승에 오르자 본교생들은 서울운동장에 총동원되어 거교적 응원전을 펼쳤다. 준결승전에서 경기도 대표 인천중학을 29:0으로 대파하고 결승에 올랐다. 10월 25일 상대는 부산시 대표 부산중학이었다. 본교생의 열렬한 응원 속에 20:0으로 영패시켰다. 창단 2년 만에 럭비축구의 전국 제패의 영광을 차지하는 감격을 맛보았다.
이로써 본교 럭비부는 럭비계의 총아(寵兒)로 군림하는 전통의 뿌리를 내리기 시작하였다.
연전연승의 럭비부
■럭비부 활동
전후 어려운 경제적 사정을 위시한 제반여건의 불비로 대부분의 학교는 최소한의 기본학습을 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있었다. 본교도 역시 그러한 사회동향에 영향을 받아 여러 가지의 특별활동을 실시할 여유가 없었다. 그러나 오랜 역사를 두고 민족사학의 전통을 이어온 본교는 전후의 새로운 학교 전통의 수립과 뛰어난 한성인의 기개를 발전시키기 위해 남보다 더욱 노력을 하였다.
본교 럭비부의 활동은 두드러졌다. 1954년 5월에 개최된 각급 고등학교 럭비 리그전에서 본교 럭비팀은 5전 4승 1무승부로 우승을 차지한 것을 비롯하여 동년 6월 17일부터 4일간 개최된 서울대학교 총장기 쟁탈 럭비대회에서도 수많은 강적을 물리치고 당당히 영예의 우승컵을 획득하였다.
■해외원정
한성의 럭비 팀은 국내뿐 아니라 멀리 자유중국에까지도 명성이 전해져 1957년 12월 6일 선수단 23명이 원정을 떠났다. 도합 다섯 번의 경기를 치렀는데 종합전적 3승 2패를 기록하였다. 비록 경기전적은 국내에서 보유하던 기록과 견주어 보면 다소 미진한 바가 없지 않으나 멀리 타국에 살고 있는 교포들에게 위로와 함께 고국의 소식을 전해준 점과 한국남아의 기개를 자유중국에까지 떨친 점이 특기할 만한 것이라 하겠다. 그 당시 원정선수였던 이경수, 강신철, 이수억 동문이 한성보에 기고한 원정기를 인용해 보자
서기 1957년 12월 6일 우리 선수단 일행 23명은 다채로운 환송을 받으면서 자유중국으로 출발하였다. 5시간 후 전원 무사히 환영대의 환영을 받으면서 대북기장에 착륙하여 대사관에서 나오신 영사님의 안내로 대사관으로 향했다.
김홍일 대사님께 인사를 올리고 대만의 명산물인 바나나를 처음으로 맛있게 먹어 보았다. 기후가 우리나라의 추절과 같은 기분을 느끼게 하는 기후였다. 우리들의 숙소로 정해진 북투(우리나라의 동래온천과 같은 곳임)로 안내원의 안내로 정박지로 향했다. 30분 후 정박지에 도착하여 여장을 풀고 곧 운동연습 준비를 갖추고 근처에 있는 야구장에서 간단한 연습을 마치고 처음으로 유황온천수에 목욕을 하고 나니 여정의 피로가 일시에 풀리는 듯하였다.
대북에서의 일정표가 발표되었다.
12월 6일 환영회 참석
12월 7일 외교부, 교육부, 시정 부, 구국단, 중화체육협진회, 대만체육회 예방, 운동연습
12월 8일 : 시합 대 대북팀
12월 9일 : 유람, 선공묘, 벽담양명산공원 휴식
12월 10일 : 시합 대 전 대만팀
12월 11일 : 향발(向發) 대중(臺中)
자유활동이 제한되었기 때문에 버스 차창 밖으로 보고 유학생들에게 듣고 한 바를 간단히 적어 보기로 한다.
대북시는 자유중국의 수도로서 인구는 약 80만에 달하며 연 2모작으로 생산되는 농산물로써 생활면에서나 경제적으로 안정된 생활을 하는 것 같으며 일반적으로 생활양식이 복장부터 검소, 투박해 보이며 특기할 것은 학생들의 차림은 정말로 국민학교부터 대학교에까지 통일된 복장으로 검소함을 나타내고 있었다. 그리고 모든 국민이 준법정신이 확립되어 있어 제반법규와 공중도덕을 잘 지켜 사회의 안녕과 질서가 잘 유지되고 있는 것이, 교통도덕을 잘 지키는 것으로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도로의 미려함은 물론 말할 것 없이 깨끗함에 아니 경탄할 수 없었다. 또한 차도와 인도가 구별되었으며 인도는 옥내로 되어 있어 여름의 폭양과 스콜 우계의 비를 피하기 위함인 것같이 느껴지며 전력이 풍부함으로 밤거리는 네온싸인이며 가로등으로 불야성을 이루며 산간 농촌까지 가가호호마다 전기가 들어가 있으며 경공업까지도 전력을 이용한다고 하며 자동차는 그다지 많지는 않았지만 대부분 새로운 것이었으며 고품은 볼 수 없었다. 자동차가 적은 대신에 삼륜차가 많으며 유류난에 허덕이는 우리나라에서는 삼륜차를 이용한다면 도움이 되지 않을까 생각이 되리만큼 굉장한 차군이 요소요소에 모인 것을 볼 수 있었다. 12월 11일 오전 9시 대북에서의 일정을 마치고 충렬사(국립묘지)를 참배하고 대중으로 향했다. 4시간 후 북회귀선을 통과하니 우리나라의 하절과 같은 뜨거운 날씨로 땀을 흘리며 6시간의 긴 여행을 마치게 되었다. 대중시정부를 예방하고 환영야회에 참석하고 처음으로 중국본토의 요리를 맛보게 되었다. 대만요리에 비할 바가 아니다. 여기에서, 한 시합을 하고 더 남쪽에 있는 대남으로 떠나게 되어 있었다. 우리가 갔을 때의 대중의 기후가 연중제일 좋은 때라고 한다. 대북지방은 우계(雨季)였지만 대중지방은 내년 4월까지 비는 한 방울도 내리지 않고 온화한 기온으로 바나나와 사탕수수벼, 야자수 등의 재배가 잘되며 대중의 파인애플과 바나나는 대만의 대표적인 것이라 하며 먹어본 즉 정말로 별미를 느낄 수 있었다. 대중과 대남 지방은 연 3모작을 능히 할 수 있다고 한다. 12월 13일 대남으로 떠나는 아침, 우리들은 아리산의 만족(대만의 원주민)들이 살고 있는 곳을 다녀서 갈 예정이었으나 앞에 놓인 큰 시합 때문에 부득이 좋은 기회를 잃어버리고 말았다. 근 6시간 만에 대남에 도착하여 시정부를 방문하였으나 때마침 더위가 한창이라 수면시간이어서, 되돌아와 우리들도 무더위를 이기지 못하여 많은 고난을 받았다.(우리나라의 삼복절과 같은 더위였음) 저녁, 선선해진 때를 틈타서 시정부를 방문하고 체육회에서 나오신 안내원의 안내로 화란인이 처음으로 대만에 상륙하여 건립했다는 안평고의 승지(옛날엔 섬이었다고 하며 지금도 등대와 포대며 그 당시의 포를 볼 수 있었다.)를 지나 공자상을 모신 공자묘를 구경하였다. 12월 14일 작년도 해사 럭비팀이 이곳에서 패배당했던 곳으로 우리는 그 치욕을 만회하고자 최선을 다 하여 끝내 우리 해사팀의 치욕을 씻었다. 시합을 마치고 나동의 시합을 위하여 쉴 사이도 없이 대남을 출발하여 자정 때가 되어 대중에 돌아와 고단한 몸을 쉴 사이도 없이 아침 일찍 대북으로 향하였다. 12월 16일 원정 최종 시합으로서 현재까지 싸워온 전적으로 보아 중요한 시합으로 우리들은 긴장한 가운데 대북을 출발하여 나동으로 향했다. 우리 여정에서 기차는 처음 타게 되었으나 우리나라 수인선을 왕래하는 작은 기차와 같았다. 4시간을 태평양 연안을 달려 목적지인 나동에 이르렀다. 열광적인 환영을 받으며 도보로 시내를 지나 나동진공소(우리나라의 읍사무소)에서 오찬을 하고 교포들의 성의 있는 환대를 받으며 시합을 마치고 최종시합장으로 떠났다. 작은 농촌이었으나 굉장한 관객의 환호를 받으며 시종 백전불굴의 경기를 끝냈으나 애석하게도 패배하고 말았다. 석별연회는 더욱 가슴을 아프게 하였으며 교포들의 애곡은 정말 몸의 한 부분을 도려내는 듯 그 날 밤을 나동을 눈물로 떠나, 야간열차로 대북에 돌아왔다. 결국 5전 3승 2패로 원정경기는 끝났다. 12월 17일 최종일 대북시내에 외출하여 즐겁게 하루를 보내고 귀국할 준비를 완전히 갖추고 오래간만에 늦잠들을 잤다. 12월 18일 오후 2시 대사관에 계신 여러분과 럭비협회역원과 대만 선수들의 환송을 받으면서 대북 비행장을 출발하여 기체에 몸을 실은 우리는 푸른 하늘을 날아 일로 고국으로 돌아왔다.
-<漢城報> 8호(1958. 2. 28) p.4 ■ 대한 체육회 단체상 획득 - 중학교
1962년 1월 28일 대한 체육회에서는 각 분야의 경기종목에 걸쳐 개인상 및 단체상의 시상식을 상공회의소에서 거행하였다. 이 시상식에서 본교 중학교 럭비부가 최우수 단체상을 획득하여 선수단 전원이 메달을 받는 기쁨을 안았다.
당시 메달을 받은 중학교 선수단 명단은 다음과 같다.
예홍기, 박정구, 남갑현, 장도준, 강성관, 최장길, 김주호, 이길훈, 정관희, 최영일, 최수남, 최태진, 오광근, 우천희, 고길주, 김성태, 신흥성, 윤용호
■ 한국 신인체육상 수상 - 고등학교
1964년 6월 9일 고등학교 럭비부가 한국일보사에서 제정한 제2회 한국 신인체육상을 수상하였다. 고등학교 럭비부는 창단 이후 쌓아온 우수한 전적과 함께 동년 4월에 열린 전국 춘계 리그전에서 우승하는 등 발군의 실력으로 신인체육상을 수상하였으며 당시 주장인 최영일군이 대표로 수상하였다.
본교 럭비팀이 이와 같은 뛰어난 실력을 갖게 된 과정에는 지도자와 선수들이 부단히 연습한 노력이 바탕이 되었음은 물론이다. 이와 함께 본교 럭비팀의 대부(代父)로서 보이지 않는 뒷받침을 한 분이 있다. 그 분은 윤동식(尹東植) 서무주임이었다. 본교 전신인 경성실업전수학교 제3회 졸업생이기도 한 윤동식 서무주임은 가정이 어려운 선수들에게 숙식을 제공하고 손수 준비한 떡을 가져와 푸짐하게 우승기념 회식을 하는 등 남달리 열성과 노고를 아끼지 않았다.
■■ 럭비부의 해체
이렇게 화려한 성적과 최강의 경기력을 가졌던 럭비부였지만 1970년대 이후 스포츠가 인기 종목 위주로 급격히 재편되었고 비인기 종목인 럭비는 졸업생이 후에 사회에 진출하더라고 특별한 진로가 막연하여 생계대책에 어려움이 많기 때문에 학생과 학부모 모두가 럭비부원이 되는 것을 기피하였다.
이러한 실질적인 어려움을 외면한 채 학교의 전통을 잇기 위해 학생들의 희생만을 강요할 수는 없다는 교육적인 이유와 함께 어렵게 럭비부원으로 입회시켰다하더라도 그 다음날 학부모가 찾아와 제발 자녀를 럭비부에서 빼달라고 사정하는 상황에서는 선수 충원이 사실상 불가능하게 되어 어쩔 수 없이 ㄴ럭비부를 해체하게 되었다.(1979년 10월)
다음 회에는 럭비부 전적을 올립니다.
필자: 조승연
한고19회(통산 44회) 홍보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