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때 나이드신 어르신들이 흔히 놀리는 소리로 “너는 영산장에 갔다가 원다리 밑에서 주워 온 아이란다.”라는 말을 듣고
눈물을 흘린적이 있는지 모르겠다.
당시는 어릴적이라 어른들께서 놀리는줄도 모른채 실제로 그런줄 알고 간혹 그런 상념에 젖어본 적도 있다.
나뿐만 아니라 주변에서 그런 놀림을 받아본 우리 또래 아이들의 어린시절이 많았을것으로 생각한다.
중학교에 진학하기전인 초등학교 4학년때부터 우리는 친구들과 함께 영산3.1민속문화제 구경을 갔다가
원다리 주변도 둘러 보았다.
그 이후 중.고등학교를 다니며 늘상 보아왔지만 나이가 들어 오면서 생각해보니
“그때 어르신들이 놀린것도 이유가 있다.”라는 생각이 든다.
어떻게 보면 엄마의 다리처럼 생긴 원다리를 추상적으로 생각했을 수도 있겠다 싶어서다.
지난해 추석전날 영산에 들렸다가 영산만년교 주변을 둘러 보며 사진을 촬영했다.
몆해전 보수 공사를 하길래 이젠 옛날의 원다리도 변하겠구나?
일견 외관상 크게 문제가 없는 다리를 왜 뜯어서 해체하여 다시 복원하는 것일까? 궁금한점이 많았었는데
만년교 옆에 세워진 보수를 하게된 배경을 보고 다소 이해가 되었다.
꽃과 물이 어우러진 정겨운 돌담 같은 운치로 명성을 얻은 영산만년교가 몸살을 앓았다는 것.
제작년까지 주민들이 통행을 했지만 홍교 밑 부분과 석재곳곳에 균열이 발생해 다리를 해체하여 보수했다는 것이다.
만년교는 만년의 세월이 흘러도 무너지지 말라는 뜻에서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또 가근방에서는 원님이 만든 다리라고 원다리라고도 부른다.
실제로 다리 밑에 물이 좀 흐를때에는 다리와 그 아래 물에 비친 모양이 합해져서 원형이 되므로 원다리라는 생각도 든다.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아담한 무지개 모양의 만년교는 정조 4년(1780년) 석공 백진기가 축조했고
훗날 일부 훼손된 것을 고종 29년인 1892년 영산현감 신관조가 석수 김내경을 시켜 중수한 오랜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마치 돌담을 연상시키는 다리에 둥글둥글한 자연석을 겹겹이 쌓아 올리고 그 위에 흙을 덮어 길을 냈다.
길이는 13.5m, 폭 3m, 높이 5m의 규모가 큰 돌다리다.
그래서 국가에서 보물 564호로 지정 관리해 오고 있다.
영산일대는 수많은 군중들이 참가하는 쇠머리대기와 줄다리기가 벌어 지는 3.1민속문화제 등 축제행사때마다
다리위에서 농악놀이, 쥐불놀이를 해 왔다. 그뿐만 아니다.
한꺼번에 많은 만년교를 건너다니는 사람들로 인해 중량을 이기지 못한 것이 원인이 되었다고 한다.
아마도 다리를 놓은 옛 사람들이 이 광경을 보았다면 곤장을 내렸을 것이다.
만년교를 세우기전 이곳에는 나무다리가 있었다고 한다. 남쪽에서 영산고을로 들어오는 유일한 길이었다.
그 나무다리가 홍수 때마다 떠내려가자 지금의 홍교를 가설한 것이다.
현대에 와서 만들어진 우리의 다리는 기능성만을 생각한 것이 많다.
강이나 개울의 이쪽과 저쪽을 이어주는 역할에만 충실할 뿐이다.
낙동강에 놓인 수십 개 다리는 어떤가. 근자에 세운 몇몇을 제외하면 강위에 놓인 거대한 흉물 덩어리나 마찬가지다.
이쪽에서 저쪽으로 넘어가면 그만이지 미적고려가 무슨 문제냐고 버럭 화를 내고 있는 형상 같다.
미적 고려와 견고함은 곧 다리의 생명이다. 만년교는 그 생명을 존중해 놓은 것이었다.
다리가 보수되자 백성들은 원님이 고쳐준 다리라 해 ‘원다리’라고 불렀다.
다리 옆에는 비를 세워 원님의 공을 기렸다.
또 하나의 비석은 만년교가 처음 축조될 무렵 13세의 소년이 산신의 계시로 썼다는데,
비문에는 ‘만년교십삼세서’라고 새겨져 있다.
선조들은 그렇게 소중하게 다리를 여겼다.
영산은 조선시대 읍성이 있던 곳이다.
근대화 개발로 옛 맛은 사라졌고, 성벽도 어느 가정집 돌담으로 쓰여 지고 있다.
만년교에서 500여 미터 떨어진 성안 주택가에는 남북으로 흐르는 개천이 있다.
이 개천을 쉽게 건널 수 있도록 옛 사람들은 이곳에도 규모는 작지만 예쁜 홍교를 놓았다.
하지만 1995년경 개천을 복개한다면서 홍교를 묻어버렸다. 지금 그 자리에는 ‘유다리’라는 비석 하나만 달랑 남았다.
편의만을 강조하는 깃발에 조상의 소담한 정성이 밀려난 것이다.
“다리하나로 엄청난 관광객을 끌어들이는 체코 프라하의 다리를 생각하면 뭔가 무너지는 느낌이 든다.”는
어느 신문의 보도도 있었다.
다행히 1989년에 찍은 사진이 있어 유일한 현장 기록은 있는 셈이다.
우리 창녕군은 비화가야의 역사가 있는 곳이다.
더구나 영산은 3.1운동의 애국 열기를 자랑하는 고장이다.
유서 깊은 고을에서 유적들이 멸실되고 있다는 것이 가슴 아픈 일이다.
만년교 복원에는 창녕군이 총 사업비 8억8800만 원(국비6억2200만, 도비9300만, 군비1억7300만)을 들여
2009년 9월에 복원을 추진하여 2010년 7월 23일 준공했다.
만년교는 2003년 8월에 실측조사를 한 결과 석재의 풍화부식 진행과 홍예석의 하부침하 등으로 변행 발생작용을 알고
2005년 4월 정밀안전진단용역 결과 홍예교 기초하부 세굴진행으로 홍예석 부재의 파손 및 훼손 발생으로 2차 변형 방지와
안전성 확보가 필요하다는 진단결과가 나왔다.
이에 따라 2007년도 문화재청의 사업승인과 함께 국도비가 지원되어 국가보물로서 최대한 원형에 가까운 복원을 하기위해
문화재청의 3차례에 걸친 설계보완과 7명의 문화재전문가로 기술지도위원회가 구성되어 공사를 착공했다.
만년교 해체복원은 구조적인 변형이 심해 전면 해체복원이 불가피한 상태로 해체 해본 결과 다리측벽의 내부에는 적심이 없고
수리과정에서 불안정하게 쌓아올린 강돌(川石)을 처음 축조당시의 부재를 기준으로 같은 강돌을 최대한 확보해 사용하고
부족한 부재는 가공돌(加工石)로 교체했다.
이 과정에서 새로 교체된 가공돌에서 오는 이질감과 주변 경관의 변화로 인해 보수 전후의 모습이 조금은 차이를 보이고 있다.
창녕군에서는 새로 교체된 가공돌에서 오는 이질감과 주변 경관의 변화로 인해 보수 전후의 모습이 조금은 차이를 보이고 있지만
최대한 원형에 가깝게 복원됐다고 밝히고 있다.
그날 촬영한 사진과 또 그 이전의 자료사진들을 함께 올려 본다.
매몰되기전 1989년에 찍은 유다리
매몰후 유다리 - 오른쪽에 유다리라는 표시석이 있다.
1960년대 만년교의 모습이다.
만년교 왼쪽 위에는 초가집이 보인다.
홍교 석재가 균열된 복원 이전의 사진이다.
지난해 준공당시 연합뉴스에 올려진 사진이다.
올해 5월 4일 만년교 옆 영산천에 늘어진 수양벚나무의 벚꽃이 지고난 후 찍은 사진이다.
첫댓글 전문가가 아니라서 모르지만 뭔가 문화재 관리에 헛점이 있다는 잔상이 많이 남습니다.
남지서는 철교 밑에서 주워 왔데요.
그리고 새로 생긴 남지대교는 더욱 아름다운 디자인으로 탄생할 수 있었으나
설계 당시 철교를 사랑하는 사람들과 남지 주민들이 남지철교와 같은 구조를 원했기 때문에 크기만 다르지
남지철교와 설계가 똑같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것은 옛남지를 기억하는 사람들의 향수엔느 맞을지 모르지만
먼훗날 후회하지 않을까?라는 걱정입니다.
아! 영산장에 가는 사람들은 영산원다리 밑에서 주워 왔다고 하고
남지장에 가는 사람들은 남지철교 밑에서 주워 왔다고 하는구나. 하하하하하~~~~~
이 글을 장마총동문회에 올렸더니 돌쇠 동네 출신의 집안 형님이신 손명규 님께서는
어릴때 쓸데 없이 떼를 쓰거나 말을 잘 듣지 않을때 흔히 "원다리 밑에서 주워 온 애" 라는
표현을 썻다는군요.
몇해전 하동의 화개장터로 가는 섬진강변에 세워진 트러스형 교량을 보았는데 현대식으로 건립되어
참 보기가 좋았지요.
약 500억원이 투입된 남지의 새교량은 그런면에서 아깝다는 생각이 듭니다.
유다리 아깝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