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靑山裏 碧溪水야>
간체 -
靑山里碧溪水, 莫夸易移去, 一到沧海不复还,
jīngShānlǐbìxīshuǐ, mòkuāyìyíqù, yídàocānghǎibúfùhái,
청산리 벽계수야, 수이 감을 자랑 마라 . 一到滄海하면, 다시 오기 어려웨라.
明月满空山, 暂休且去若何.
míngyuèmǎnkōngshān, zànxiūqiěqùruòhé.
명월이 滿空山하니, 쉬어 간들 어떠리.
*청산리: 푸른 산 너머, *벽계수: 푸른 시냇물, *일도 창해: 한 번 푸른 바다에 닿으면.
번체 -
靑山裡碧溪水, 莫誇易移去, 一到滄海不復還,
明月滿空山, 暫休且去若何.
청산은 내 뜻이오 / 황진이
靑山은 내뜻이오 綠水난 님의 정情이,
綠水 흘너간들 靑山이야 변(變)할손가,
綠水도 靑山을 못니저 우러예여 가난고,
<동짓달 기나긴 밤을>
동짓달 기나긴 밤을 한 허리를 둘에 내어,
春風이불 아래 서리 서리 넣었다가,
어른님 오신 날 밤이어드란 구뷔 구뷔 펴리라.
* 어른님: 사랑하는 님
[ WINTER SOLSTICE (동짓달 기나긴 밤을) ]
If I could take this long November night. And cut it off at this its waist,
Roll by roll, I’d roll it up, And lay it away beneath the blankets of spring.
Then when my love returns. Roll by roll, I’d roll it out, And join it to that night.
<靑山은 내 뜻이요>
靑山은 내 뜻이요. 綠水는 임의 정이. 녹수 흘러 간들, 청산이야 변할손가.
녹수도 청산 못잊어, 울어 녀어 가는고
< 어져 내 일이여 >
어져 내 일이여, 그릴 줄을 모르던가. 있으라 하더면,
가랴마는 제 구태여 보내고 그리는 정을, 나도 몰라 하노라.
*어져: 아! , *그릴 줄: 그리워 할 것을
<산은 옛 산이로다>
산은 옛 산이로되, 물은 옛 물이 아니로다. 주야에 흐르니, 옛 물이 있을소냐.
인걸이 물과 같아야, 가고 아니 오노메라.
<마음이 어린 후니>
서경덕,
마음이 어린 후니, 하는 일이 다 어리다. 萬重雲山에 어느 임 오리마는,
지는 잎부는 바람에 행여 긴가 하노라.
*어린: 어리석은, *만중운산 : 겹겹이 싸인 깊은 산속
<내 언제 무신하여>
내 언제 무신하여, 임을 언제 속였관데, 월침 삼경에 온뜻이 전혀 없네.
추풍의 지는 닙 소리야 낸들 어이 하리오.
이 시는 진이가 화담을 그리워하며 지은 시입니다. 여성 내면의 깊은 그리움을 잘 나타냈다고 전합니다.
<청초 우거진 골에>
“청초 우거진 골에 자는다 누웠는다. 홍안은 어디 두고 백골만 묻혔는다.
잔 잡아 권할 이 없을새 그를 설워 하노라”
[황진이(黃眞伊) 생몰 미상. 조선 중종 때의 명기. 개성 출신, 송도 기생 기명은 明月, 정확한 생존 연대는 알 길이 없으나 추측은 (1520~1560) 마흔을 전후하여 세상을 떠남. 출자(出自)는 황진사의 서녀라고 전함.
출중한 인물과 詩文에 뛰어나 시조 작품에 명작을 내었으며 후세에 많은 전설적 일화를 만들고 있으나 근거는 확실하지 못함.
어려서부터 절세미인이었으며, 비록 홀어머니 슬하에서 자랐지만, 양반집 규수 못지 않게 어려서부터 학문을 익혀 이미 열살때에 한문고전을 읽고 한시를 지을 정도의 재능을 보였으며, 또한 서화에 능하고 가야금에도 뛰어난 재능을 가지게 되었다.
황진이가 15세 되던 해에 황진이를 연모 하던 한 젊은이가 상사병으로 숨을 거두게 되자 스스로 기생이 될 것을 결심했으며, 천한 몸으로 헛되히 일생을 살기보다는 기생의 신분으로 일생을 자유 분방하게 살고저 하였다고 전해진다. 황진이도 평소 흠모했던 사람이 있었는데 화담 서경덕과 선승 지족선사였다. 서경덕에게는 갖은 유혹의 손길을 폈으나 끝내 거절을 당했으며, 지족선사는 황진이의 갖은 유혹을 벗어나지 못하고 결국 파계하는 일까지 생기게 되었다. 황진이는 죽기전 자기의 시신을 관에 넣지 말고 날 짐승의 먹이가 되도록 해 달라는 부탁을 했으나, 그녀가 죽은 후 사람들이 개성 근처의 장단에 묻어 주었다고 한다.
한국 시조 문학사에서 특히 조선조 시대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볼 때 여성의 시조가 전해지고 있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황진이의 일생중 가장 잘 알려진 벽계수와의 만남, 그리고 면벽한 지족대사를 시험하고 괴로와 했던 황진이... 또 진정한 사랑 서화담과의 만남으로 생기는 그녀의 육체와 정신 세계의 정립들.....
그토록 폐쇄적이고 봉건적인 이조시대에 그런 생활을 할 수가 있었던 것은 그녀의 예술적인 정신세계가 드높았기 때문입니다.
일반적 공감대가 형성되는 시의 특성으로 이해하려 할 때 ‘청산’과 ‘벽계수’는 나와 님입니다.
靑山裏 碧溪水 시조는 왕가의 종실 ‘벽계수’라는 이를 넌지시 희롱하기 위한 시로써, “사람들이 한 번 보기만 하여도 황진이에게 혹하니 나는 그것을 뿌리치고 오리라”하며 큰 소리 친 ‘벽계수’는 왕가의 귀족답게 의젓하고 냉정했습니다. 그가 가을 밤 송도를 구경차 나갔다가... 어디서 낭랑한 시를 읊는 여인네의 목소리를 듣고, 혹하여 그만 타고있던 나귀 등에서 낙상하게 됩니다. 물론 양반 위신도 함께...... (연후에 황진이에 매혹당한 일설)
기생으로써 세상의 허무와... 자조적인 탄식조, 여기서 인걸은 화담을 이르지 않았을까 합니다.
황진이는 서경덕을 흠모했습니다. 그렇게나 사랑해도 덤덤해 하는 서경덕을 위한 사랑의 시가 많이 만들어졌습니다.
*서경덕 : (1489~1546)호는 화담중종때의 철학자 일생을 학구생활로 보냄 논술로는
<太虛說> <原理氣> <死生鬼神論>등이 있고<珍靑>에 시조가 전함
송도삼절(松都三絶)
송도의 유명한 세 존재 서 경덕(서 화담) 황 진이 박연폭포를 이름입니다.
황진이가 서화담을 그리며 지었다는 시가 동짓달~~~ 입니다.
황진이와 서화담의 관계를 재조명 해 볼라치면 91년도에 초판 된 소설 토정비결
(李載雲作)을 참조해 보시기 바랍니다.
또한 그녀의 멋진 풍류의 뜻을 기리며 황진이의 무덤에 술잔을 올리고
시를 읊고 치제(致祭)했다하여 빈축을 사고 급기야 파직된 백호 임제의 그 시 한 수 입니다.
*임제 (1549~1587)호는 백호, 선조때 사람 시인, 이조정랑, 북평사, 예조정랑을 지냄.
어느날 황진이는 화담을 찾아가고, 문 전에 이르러 화담이 읊는 시를 우연히 듣게 됩니다. 그렇게나 냉냉하던 화담도 진이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황진이가 대제학을 지낸 소세양 (당시 47살)과 한달간 동숙하고, 헤어진 뒤 그녀(당시 25살)가 유일하게 사랑했던 남자, 소세양(蘇世讓)을 그리는 간절한 마음을 글로 적어서 한양에 있는 소세양에게 전한 사연이 바로 이 夜思何 랍니다.
*소세양 蘇世讓 (1486~1562)의 본관은 진주. 자는 언겸(彦謙), 호는 양곡(陽谷)·퇴재(退齋)·퇴휴당(退休堂)이며. 1509년(중종 4) 식년문과에 급제했다. 정자·주서·정언 등의 벼슬을 거쳐 수찬으로 있으면서 단종의 어머니 현덕왕후의 복위를 건의하여 현릉에 이장하고, 대묘에 위패를 두도록 했다. 이조정랑· 교리· 직제학 등을 거쳐 사성이 되었다. 왕자의 사부(師傅)와 승지 등을 지내고, 전라도 관찰사로 나갔으나, 1530년 왜구에 대한 방비를 소홀히 했다 하여 파직되었다가 이듬해 다시 기용되어 형조판서에 올랐다. 1533년 지중추부사로 있으면서 진하사(進賀使)로 명나라에 다녀온 뒤, 1535년 형조판서·호조판서, 1537년 병조판서·이조판서를 거쳐 우찬성이 되었다. 1538년 성주사고(星州史庫)가 불에 타자 중종의 명으로 춘추관(春秋館)의 실록을 베껴 다시 봉안했다. 1545년(인종 1) 대윤(大尹) 일파의 탄핵으로 벼슬에서 물러났으나, 명종이 즉위한 뒤 을사사화로 윤임(尹任) 등이 몰락하자 다시 기용되어 좌찬성을 지냈다. 사직한 뒤에는 익산에 머물면서 여생을 마쳤다. 律詩에 뛰어났고 松雪體의 글씨를 잘 써서 필명이 높았다. 익산 화암서원(華巖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양곡집〉이 있으며, 글씨로는 임참찬권비(任參贊權碑)와 소세양부인묘갈(蘇世良夫人墓碣) 등이 있다.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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