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남대로 유곡도(嶺南大路 幽谷道)
유곡역(幽谷驛)
□유곡(幽谷)이라는 이름은?
그윽할 유, 깊을 유, 가둘 유, 유(幽)자이고 골 곡(谷)자 인데
깊고 그윽한 고을 이라고 유곡이라 불렸다고 하고 한편으론 영남과 한양을 잇는 교통의 중심지가 되어 물산이 풍부하게 되자 도둑이 많이 들었으나 군졸이 지키는 간선도로를 제외하곤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도둑이 밤새 헤매어도 벗어나질 못했다고 하여 가둘 유 유곡이라고도 하였답니다.
□지금은 역의 모습을 볼 수 없고 비석만 남아 있네요?
이곳에 세워진 비석들은 1960년 요곡지공로자 노시출 불망비가 유곡초등학교 앞에 건립되고 난 다음에 학교장과 유곡동민들이 유곡동에 산재되어 있던 것을 1962년 옮겨 온 것으로서 19기 중 14기가 유곡역과 관련된 것인데 관찰사비 6기 찰방비 6기 이방비(吏房碑) 2기 등입니다.
유곡역은 조선시대 이전 신라시대부터 고려시대 개경을 중심으로 한 22개 역도 체계에서 상주도의 으뜸역이였습니다.
고려시대 문신이자 문장가인 이규보가 지은 시(詩)
‘유곡역에서 하룻밤을 술에 취해 자고 나서
요성역 한나절에 말 멍에 풀어 쉰다’라는 내용의 시가 남아 있는데 신라시대 고려시대부터 유곡역이 중요한 역도 역할을 하였던 것입니다.
조선시대 유곡역은 한양에서 동래, 동래에서 한양을 오가는 중간지점에 위치한 인적 물적 교류의 교통과 군사적으로 중요한 지리적 중심지였을 뿐만 아니라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으로 중요한 중심지 역이었습니다.
조선시대에는 한양을 중심으로 조선팔도 9대 간선대로 중에서
한양에서 동래를 잇는 4번 영남대로와 유곡역에서 갈라져 통영에 이르는 5번대로의 2개 간선도로를 관장하던 유곡도 찰방역은 문경현, 함창현, 상주목, 선산부, 비안현, 군위현, 용궁현, 예천군 등 8개 고을에 200여리의 19개 속역을 관할하는 유곡도(幽谷道) 찰방역이었습니다.
찰방 1인, 역리(驛吏) 469인, 노(奴) 비(婢) 83구
상마 2필 중마 5필 부마 7필을 두었었다는 내용이
1454년 편찬된 세종실록지리지, 영남읍지, 영남역지(嶺南驛誌)등에 기록되어있습니다.
또한 임진왜란 이후 봉수제가 파발제로 바뀌면서 파발참(擺撥站) 군졸 35명에 파발임무를 수행하는 군사적인 요충지였습니다.
조선말까지 아사와 청고 등 40여칸이 남아 있었다고 하나 그 모습이 사라졌고 유곡침례교회 뒤편으로 역사가 있었던 흔적으로 지금도 밭둑에 기왓장과 주춧돌 흔적이 있습니다.
조선 초기의 문신으로 사헌부 대사헌, 성균관 대사성을 역임하였던 허백당 홍귀달선생은 1489년 성종 20년 대청(大廳) 동헌(東軒) 서헌(西軒) 등을 중수하였을 때 유곡역 중수기를 지었는데 유곡역은 영남의 인후와 같다. 영의 남쪽 60여 주는 지역이 넓고 인구와 물산이 많은데 수레와 말들이 모두 유곡의 길로 모여들어야 한양으로 갈 수 있고 한양에서 남쪽으로 가는 사람도 유곡을 지나야 그 갈 곳으로 갈라져 가게 된다. 사람이 음식을 먹지 못하면 죽는 것과 같이 유곡역은 인후와 같이 중요한 곳이라는 기록을 남겼습니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규장각 소장. 문경군읍지 계명대학교 도서관 소장 등에 등재)
우암 홍언충선생은 1504년 갑자사화로 투옥되어 거제로 이배되면서 유곡역관에서 일침하게 되었는데 그때 ‘유곡역관’이라는 적시를 지었는데 그내용이
일침청풍고관리(一枕淸風孤館裏) 한 베개 맑은바람 외로운 객관 속에
삼배박주노괴변(三盃薄酒老槐邊) 늙은 괴목가에 박주석잔 기울였네
차행미료생환일(此行未料生還日) 이 걸음에 살아옴을 내 어이 생각하랴
만사유유지부천(萬事悠悠只付天)만가지 유유한 일일랑은 하늘에다 부치련다.
-양주동(梁柱東) 박사 역(繹)-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우암집에 등재되어 있습니다.
그때 우암선생이 시를 지었던 유곡 주막거리 느티나무옆에 2015년 유곡동민이 시비를 세웠습니다.
□한 때 유곡동은 어떠한 모습이었나요?
조선시대 유곡은 2일 7일 장이 서는 천여 호가 사는 고을이었고 5개 부락이 있는데 찰방 관아가 있던 아전골이 앗골으로 상마 중마 부마를 사육 관리하던 마을 마본, 객사가 있던 주막거리, 큰절이 있던 한절골, 인구가 유입되어 새 동네 새마을 이렇게 5개 부락이 있었고 지금도 그렇게 부르고 있습니다.
□ 유곡역도사적비 건립?
새로운 교통의 발전으로 유곡역을 오가던 길손들의 발걸음이 끊기면서 영남대로 유곡도 유곡역의 역사적 의미까지 잊혀지게 되는 것을 아쉬워한 애향심 가득한 문경시민의들의 뜻에 의하여 1990년 유곡역도사적비를 유곡동 서낭당 고갯마루에 건립하였습니다.
□ 유곡동에 성황당의 유래가 있다는데?
유곡 성황당은 조선시대 영남대로 유곡도 찰방역 군관이 겨울날 일과 후 이웃동네 친구 아버지 회갑연에 가려고 찰방에게 보고하니 말을 타고 갔다오라고 하는 것을 사적인 일에 군마를 이용할 수 없다며 관아에서 기르는 개를 데리고 갔었는데 친구 아버지의 권주로 과음하고 돌아오다가 쓰려져 정신을 잃자 군견이 군관을 깨우기 위하여 꼬리에 물을 묻혀 얼굴에 문지러는등 온갖정성을 다하였으나 깨어나지 않자 역사로 헐떡이며 달려와 근무중인 역리의 옷을 물어당기며 따라올것을 재촉하여 군견을 따라가니 군관이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어 부축하여 데려와 동사 할 목숨을 구하게 되었는데
그 후 군견이 나이들어 죽게되자 무덤을 씌주고 성황당에 군견의 신을 모시게 되었는데 군견이 성황신이 되어 그 후로 도둑이 들어도 훔쳐 도망가지 못하고 다 잡히게 되었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