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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교회여, 모교회여
(용산감리교회 창립 70주년 기념 회고와 간증예배/2015년 11월 22일 오후)
먼 땅에서 오는 좋은 기별은 목마른 사람에게 냉수와 같으니라(잠 25:25)
대단히 죄송한 이야기이지만, 오늘 이 설교는 ‘좋은 설교’가 아닙니다.
좋은 설교가 되기 위해서는 두 가지 조건을 갖춰야 합니다.
첫째, 짧아야 합니다.
목사님들 사이에 “설교를 짧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다시 초청을 받을 것이요….”라는 우스갯소리가 있는데 그런데 오늘은 드릴 말씀이 많아서 조금 길 것입니다.
한 시간은 넘지 않을 테니 너무 염려하지는 마십시오.
둘째, 설교자가 자기 이야기 하지 않고, 특히 자기 자랑을 하지 않고, 또 다른 이야기들을 넣지 않고, 그 날의 본문을 중심으로 깔끔하게 말씀을 전해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은 예배의 성격상, 자기 이야기가 안 들어갈 수 없습니다.
먼저, 용산교회에서 창립 70주년 기념행사의 하나로, 이렇게 오후 예배에 이 교회 출신들을 청해서 회고와 간증을 듣는 순서를, 그것도 한 달 내내 마련해 주신 것을 감사드립니다.
지금까지 강국주 장로님, 이은미 사모님, 박기원 장로님의 회고와 간증을 통해서 은혜를 많이 받은 줄로 압니다.
이 일이 교회의 발전에 도움이 되고, 하나님께 영광이 되기를 바랍니다.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저도 먼저 회고의 말씀을 드리고, 감사의 말씀. 회개, 마지막으로 용산교회에 바라는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먼저 자기소개와 회고를 겸해서 말씀을 드립니다.
제 나이는 우리 나이로 7학년 2반인데, 우리나라에는 7학년 제도가 없기 때문에 저는 ‘7호선 전철 두 번째 칸 승객’이라고 좀 길게 말하고 있습니다.
감리교 원로목사로서, 분당에 있는 성화교회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원래 담임했던 교회는 용인 수지에 있는 목양교회인데 소속을 바꾸었습니다.
그 이유는 나중에 말씀 드리겠습니다.
저는 ‘잡탕목사’입니다.
목사님들은 대개 교회를 중심으로 평생 사역하시는데, 저는 이것, 저것 하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극동방송에서 20여 년 일했는데, 최영권 권사님이 기도 가운데 말씀하신 것과 같이 북방선교 업무를 주로 담당했습니다.
북방선교를 당시는 ‘공산권선교’라고 했습니다.
교회 담임목사로도 십 여 년 일했습니다.
또 한편으로 신학교에서 가르치는 일을 많이 했습니다.
연세대학교 연합신학대학원 객원교수를 비롯해서 여러 학교에서 외래교수, 또는 시간강사라는 이름으로 가르쳤습니다.
국문학을 따로 공부했기 때문에 처음에는 교양국어, 기독교문학을 가르쳤고, 나중에는 북방선교, 뒤에는 북한교회사를 집중적으로 가르쳤습니다.
그러면서 교계(敎界)의 여러 일, 특히 선교와 문학, 출판에 관련된 일들에 참여하기도 했습니다.
1957년, 제가 중학교 2학년이었을 때부터 1970년대 후반까지 용산교회에 출석했습니다.
동네 선배들에게 이끌려 초등학생 때부터 동네에 있는 다른 교회에 나가고 있었는데 옆집에 사시는 속장님이 ‘우리 교회에 나가자’고 이끌어서 용산교회에 나오게 되었습니다.
그 속장님은 오래 전에 하늘나라로 가셨는데, 그 분의 조카가 지금 이 자리에 와 있습니다.
수십 년 만에 처음으로 모교회를 찾았다고 합니다.
저도 수십 년 만에 만났습니다.
저희 집이 교회에서 가까운 곳에 있었습니다.
용산교회 주소가 용산구 한강로 1가 183번지일 텐데, 저희 본적 겸 오랫동안의 현주소가 용산구 한강로 1가 224번지였습니다.
이 가운데 용산초등학교 졸업생들이 여럿 계실 텐데, 저는 용산초등학교에 6․25 전쟁 나던 해인 1950년에 입학해서 1956년에 졸업했습니다(제10회).
용산초등학교 졸업한 다음에는 용산중학교, 용산고등학교를 다녔습니다.
한 때 제 카페의 이름을 ‘다룡(多龍)이’라고 할만큼 ‘용’자와 관계가 깊습니다.
1970년대 초에 교회에서, ‘교회 이름을 바꿔야 한다. 용은 성경에 마귀로 나오는데 교회 이름에 용 자가 들어 있어서 부흥이 안 된다’, 이런 이야기가 강하게 돈 일이 있었습니다.
실제로, 가까운 곳에 ‘용산중앙교회’라는 이름을 가진 교회가 있었는데 그 교회는 그런 이유로 그 무렵에 이름을 바꿨습니다.
제가 그 때 상처를 많이 받았습니다.
‘나는 사는 곳이나 학교나 모두 용 자 투성이인 데, 그렇다면 나는 마귀 새끼란 말인가?’했습니다.
여러분, 그런 생각을 하지 마세요.
저기 평안북도에 용천군(龍川郡)이 있습니다.
해방 전에는 교회들이 많기로 아주 유명한 곳이었습니다.
감리교회의 연회(年會)를 장로교에서는 노회(老會)라고 하는데, 초기에는 도(道) 하나가 하나의 노회였습니다.
평안노회, 함경노회, 경기노회, 이런 식이었는데, 용천은 교회들이 많아서 군 하나가 노회가되어서 용천노회가 따로 있었습니다.
이름 가지고 무엇이라고 하지 마세요.
제가 용산교회에 출석한 기간은 20여 년, 그리 길지 않다고 할 수도 있는데 사실은 사람의 일생에서 제일 중요한 기간이었습니다.
청소년기, 청년기, 청장년기를 용산교회에서 보내면서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성장하고, 진로가 정해지고, 결혼을 하였습니다.
나무가 자랄 만큼 자란 다음에는 더 자라지 않습니다.
그 상태에서 나이테만 많아집니다.
나무가 자라는 것 같은 기간을 용산교회에서 보냈습니다.
서정주 시인의 “자화상”이라는 시가 있는데, 그 시 가운데 “나를 키운 건 팔 할(80%)이 바람이다”라는 말이 나옵니다.
“나를 키운 건 팔 할이 용산교회다”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이 말이 과장이 아닌가?’ ‘오늘 설교를 멋있게 꾸미기 위해서 하는 말이 아닌가?’ ‘그렇다면 빼야 하는 것 아닌가?’ 많이 생각했습니다.
과장도 아니고, 멋있게 꾸미기 위해 하는 것이라는 확신이 들어서 이렇게 인용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나에게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모두에게 그렇게 중요한 것입니다.
다음에는 감사입니다.
첫째로, 신앙을 지도해 주시고, 세례를 주시고, 이끌어주신 담임목사님들께 감사를 드립니다.
특히 잊을 수 없는 분이 계신데, 1959년, 제가 고등학교 1학년 때 제10대 담임자로 부임하신 목사님입니다.
이 목사님은 1년 조금 더 담임을 하시고 다른 교회로 가셨는데, 다른 교회로 가신 다음에도 저에게 종종, ‘너는 꼭 신학교에 가야 한다.’며 신학교로 이끌어 주셨습니다.
이 목사님이 아니면 저는 신학교에 안 갔을지도 모릅니다.
이 목사님은 제가 결혼할 때 결혼주례를 맡아주시고, 목사 안수도 집례해 주셨습니다..
심장질환으로 20여 년 전에 하늘나라로 가셨는데 ‘너에게 목사 안수를 하려고 할 때 머리에 손을 얹으니까 피가 통하는 것 같았다.’ 하신 음성이 지금도 귀에 남아 있습니다.
이 분은 1974년에 감독이 되셨습니다.
지금은 감리교에 감독이 연회별로 계시지만, 그때까지는 한 분이었습니다.
한 분 감독이 감리교 전체를 이끌었는데, ‘용산교회 역대 담임목사님들 가운데 감독이 되신 분이 계시다.’는 사실을 기억해 주시기 바랍니다.
용산교회에서 신학생 시절을 보내고, 뒤에 연회감독이 되신 분도 계십니다.
그 다음에 교회의 권사님들을 잊을 수 없습니다.
그 권사님들의-그 이름들을 지금도 잊지 않고 있습니다.- 사랑과 기도와 격려에 대해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사실은 그 사랑에 취해서, 그 분들의 권면에 따라 ‘목사가 되겠다.’고 ‘서원’을 했습니다.
저는 그것을 ‘겉멋 서원’ ‘풋 소명’이라고 스스로 부르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것도 기억하시고, 거기에서 벗어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시더군요.
미국 시카고 부근의 휘튼이라는 곳에서 4년에 한 번씩 ‘세계한인선교대회’라는 큰 대회가 열립니다.
1996년에 강사로 초청을 받아 가서, 앞자리에 앉아 있는데, 머리 뒤가 자꾸 간지러운 것 같았습니다.
누구의 시선이 와 닿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돌아보았더니 용산교회에 계시다가 오래 전에 미국 시애틀로 이주하신 권사님이었습니다.
교회 일을 열심히 하면서 젊은이들을 많이 사랑해 주시고 도와주시던 분이었습니다.
그 권사님이, “용산교회 출신이 이런 큰 대회에 강사로 와서 반갑고 자랑스럽다. 유 선생을 위해서 기도를 많이 했는데 그 보람을 느낀다.”고 하시면서 무엇인가를 저의 주머니에 넣어주셨습니다.
숙소에 돌아와서 꺼내보니까 돈 20불이었습니다.
그 날 가지고 나오신 돈을 다 저에게 주신 것 같았습니다.
그 다음에 교회학교의 학생들, 부족하기 그지없고 불성실한 교사였는데, 잘 배워주고 따라준 것,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습니다.
너무 엄숙한 이야기만 한 것 같습니다.
청소년 시절과 청년 시절 이야기에 이성교제 문제를 빼놓기 어려운데, ‘용산교회 커플’들이 여럿 있습니다.
그 당시 유유산업이라는 제약회사가 ‘쌍Y표는 품질을 보장합니다.’’라는 선전문구를 늘 사용했는데 용산교회 커풀들을 ‘쌍Y표 부부’라고 했습니다.
반면에 아주 가슴 아픈 이야기도 있습니다.
저와 아주 친했던 같은 또래 하나는 이성교제 문제가 잘못되어 지금까지도 생사조차 알 수 없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저도 같은 학년의 여학생하고 연애를 잘 하다가 실연을 당했는데 아주 멋있게 당했습니다.
오늘 교회에 오니까, 옛날 모습을 보여주는 사진전을 하고 있는데, 사진 가운데 그 여학생이 있나, 먼저 찾아보았더니 다행히 없네요.
그것이 50년 전의 일인데, 얼마 전에 그 이야기를 ‘실연50주년 기념작’이라며 수필로 써서, 어느 문예지에 발표 했으니 궁금하면 찾아서 읽어 보세요.
그 다음, 회개를 빼놓을 수 없습니다.
모교회에 간다고 생각하니까, 이 교회에 다니고 있을 때 많이 실수한 것, 교만한 것, 성실하지 못했던 것, 정직하지 못했던 것, 그 사랑을 갚지 못하고 있는 것, 교회를 떠난 다음에, 그렇게 고맙고 영향을 많이 받은 모교회를 위해 좀 더 기도하지 못한 것, 이런 것들이 계속해서 떠올랐습니다.
교회학교 -그때는 주일학교라고 했습니다.- 교사를 하고 있을 때, 저 혼자서 그 일을 한 것은 아니지만, 정말 어이없는 짓을 했습니다.
개구쟁이 하나를 ‘퇴학’을 시켰습니다.
교회학교에서는 퇴학이라는 것이 있을 수 없지요.
퇴학을 당했던 학생은 지금은 사회와 교회의 중진이 되어 있는데, 이십 여 년 전에 그를 만나, 그 이야기를 하면서 잘못했다고 하니까, “그 때 제가 퇴학을 당하고도 교회를 떠나지 않은 것이 얼마나 다행이고 감사한지 몰라요.”하더군요.
여러분 못마땅한 일이 있더라도 교회를 떠나지는 마시기 바랍니다.
한동안 제가 건강이 많이 어려웠었습니다.
목회과로(牧會過勞) 때문이었습니다..
여러분, 담임목사님의 건강에 많은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목사님들은 스트레스 때문에 건강을 잃는 일이 많은데 담임목사님이 스트레스를 받지 않도록 보살펴야 합니다.
그 때, 하늘나라에 갈 준비가 필요한 상태가 되었는데, 여러 가지 결심을 했습니다.
‘하늘나라에 초점을 맞추고 살자’ ‘버리기에 힘쓰자’ ‘원망하지 말자’, 여러 가지를 정했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용서하고 용서 받기에 힘쓰자’는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을 만나면 ‘내가 당신에게 잘못한 것 용서를 구한다’라는 말을 많이 했습니다.
그래야만 하나님 앞에 섰을 때 꾸지람을 덜 받을 것 같았습니다.
오늘 그런 마음으로 모교회 앞에, 그리고 성도들께 용서를 구합니다.
용서라는 것이 간단한 일이 아니고 쉬운 것도 아니지만. 제가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아주시기 바랍니다.
창립70주년을 맞은 용산교회에 당부하고 싶은 것이 셋이 있습니다.
손님이 당부를 하는 것은 매우 외람된 일이지만, 모교회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창립 70주년이 계기가 되어서 교회가 높이 솟구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기도하면서 조심스럽게 드리는 부탁들입니다.
첫째, 알찬 교회가 되어주십시오.
‘알찬 교회가 되어 달라니 지금은 알차지 못하다는 이야기란 말인가?’
그것이 아니고, 지금도 알찬데, 더 알찬 교회가 되어 달라는 것입니다.
어떤 교회가 알찬 교회입니까?
큰 교회가 알찬 교회는 아닙니다.
저도 체험을 통해 이것을 자신 있게 말씀 드릴 수 있고, 여러 사람이 같은 말을 하고 있습니다.
어느 대형교회 목사님 한 분은 “교회 큰 것이 짐이다.”라는 말을 입에 달고 있습니다.
교회다운 교회가 알찬 교회입니다.
대전에 미래학, 리더십, 이런 것을 깊이 연구해서 세미나를 자주 인도하시는 목사님이 계신데, 이런 말씀을 자주 하십니다.
“지금 한국교회가 어려움을 많이 겪고 있는데 점점 더 심해질 것입니다. 문을 닫는 교회가 늘어날 것입니다. 합병하는 교회도 늘어날 것입니다. 그런 가운데서, 참다운 교회는 점점 더 부흥할 것입니다.”
그 목사님의 이야기가 사실로 나타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알찬 교회는 알차게 부흥합니다.
제가 일하던 선교방송기관에서 제일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후원헌금을 늘이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을 위해 홍보집회도 많이 하고, 후원회원 모집도 힘쓰고, 여러 가지 방법을 씁니다.
저는 생각이 좀 달랐습니다.
제가 프로듀서 출신이어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방송사는 방송을 잘 하면 헌금은 저절로 많이 들어온다, 다른 일보다, 좋은 방송하기 위해 힘쓰자!’고 했습니다.
이것은 사실로 입증이 되었습니다.
가끔 서울에 있는 교회로부터 오후 예배 설교를 해 달라는 부탁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오후 예배는 대개 두 시에 드리는데, 주일낮예배를 분당에서 드리고 서울에 오면, 그 시간에 맞추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그런 부탁을 받으면 서울에 와서, 설교해야 할 교회의 주변에 있는 교회에서 주일낮예배를 드리게 됩니다.
오늘도 청파동에 있는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고 왔습니다.
작년 10월에 영등포에 있는 교회에서 오후 예배 설교 부탁을 받았습니다.
‘아, 오늘은 용산교회에 가서 주일낮예배를 드리고 가야하겠다. 용산교회 가 본지가 30년이 넘었으니 이제는 아는 사람이 없을 테지. 뒷자리에 앉아서 예배를 드리고 살짝 빠져 나와야지.’했습니다.
그랬는데 알아보는 분들이 여럿 있더군요.
제가 담임하고 있던 교회에서 여선교회 전국대회가 열린 일이 있었는데 그 때 오셨던 분들이 먼저 알아보고 인사를 해 왔고, 60년대와 70년대에 같이 교회생활을 한 분들 가운데 권사로 교회를 섬기고 있는 분들이 인사를 해서 제 계획은 어긋났지만 반가웠습니다.
그 때 두 가지 때문에 놀랐습니다.
하나는 담임목사님을 그 때 처음 뵈었는데, 인상이 좋으시고, 설교의 품격이 매우 높은 것에 놀랐습니다.
이것은 잘 보이기 위해서 하는 말이 아닙니다.
진심입니다.
그 다음, 대단히 미안한 이야기이지만, 교인수가 그리 늘지 않은 것을 보고 놀랐습니다.
오래 전 전, 제가 출석하고 있을 때보다도 많지 않은 것 같았습니다.
‘왜 그럴까?’
이것은 교회에서는 적합하지 않은 이야기이지만, ‘터가 세서 그런가?’ 했습니다.
사실, 이 교회는 전에부터 그런 말을 좀 듣기도 했습니다.
교회가 변화되고 있다는 소식을 듣는데, 더 알찬 교회가 되어서 이 문제도 잘 극복될 것으로 믿습니다.
특별히 교회학교 교사들에게 알찬 교사가 되어 달라고 부탁을 드립니다.
제가 이 교회에서 교회학교 학생 생활과 교사 생활을 했기 때문에 더욱 간절한 마음으로 이 말씀을 드립니다.
교회학교 교사, 참 중요합니다.
미국의 카터 대통령이 평생 놓지 않고 있는 일이 그 일이지요.
자랑 같아서 죄송하지만, 이 교회에서 교회학교 교사를 하고 있을 때, 교회학교 학생이었던 분 가운데 지금 서울대학교의 교수를 하고 있는 분이 있습니다.
이상하게 이 분이 유년부에서 고등부까지 12년 동안 제가 담임을 했습니다.
이 분은 오래 전부터, 명절이 되면 거의 빠지지 않고 인사를 오고 있습니다.
어느 해 설날에 담임하고 있던 교회의 교회학교 선생님들이 세배를 하러 집에 와 있었는데 이 분이 세배를 왔습니다.
제가 교회학교 교사들에게 그 분을 소개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분이 서울대학교 교수인데 30년 전, 제가 여러분과 같이 교회학교 교사를 하고 있을 때 학생이었습니다. 그 인연으로 매해 이렇게 세배를 옵니다. 여러분도 교사 일을 성실하게 하면 뒤에 성공한 제자들의 세배를 평생 받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시기 바랍니다.
1958년, 제가 중학교 3학년 때, 육군 일등병 한 분이 중등부 담당 교사로 부임해 오셨습니다.
이 분은 신학교를 졸업하고 입대한 분이었습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 때 이 부근에 군부대들이 많이 있었는데 이 분은 그 가운데 한 부대에서 군대생활을 하면서 주일이 되면 교회에 나와 저희들을 지도하셨습니다.
한 번은 이 분이 설교를 하는데 학생들이 떠들었습니다.
그랬더니 이 선생님이 언짢은 얼굴로, 만년필로 빽빽하게 쓴 설교 노트를 보여 주시며, “내가 어제 밤을 거의 새다 시피하면서 이렇게 설교를 준비해가지고 나와서 설교를 하는데 이렇게 떠들면 어떻게 하느냐?”하셨습니다.
철없을 때이지만 미안한 생각이 들어서 조용해졌습니다.
나중에 제가 군대생활을 할 때 이 분 생각이 다시 났습니다..
군인들, 10분이라도 더 자려고 하지요.
밤을 새다시피 하면서 설교준비 하는 것, 저로서는 생각도 못할 일이었습니다.
이 선생님을 다시 만났을 때 그 이야기를 하면서 ‘선생님, 존경합니다.’ 했습니다.
이 분은 장로님이 되어 감리교회를 위해서 많은 일을 하셨고, 지금 팔순이신데 충청도에서 현역 고등학교 교장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 뵙고서, “아니, 제자인 저는 은퇴를 했는데 선생님은 현역이시네요.” 하면서 서로 웃었습니다.
두 번 째 당부, 통일선교에 힘써 주십시오.
‘아니, 뜬금없이 무슨 이야기야?’ 하실 것입니다.
이 회고간증 두 번째 주일에 오신 분도 북한선교에 힘써 달라는 말씀을 하신 것을 용산교회 OB 카페의 설교요약에서 읽었습니다.
그 분은 왜 그런 말씀을 하셨는지 모르겠는데 제가 이런 부탁을 드리는 이유가 몇가지 있습니다.
하나는, 통일선교, 풀어서 말하면 통일과 북한복음화는 하나님이 원하시고, 하나님이 명하시는 것이고, 한국교회의 숙명적 사명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는 지금 세계 유일의 분단국입니다.
대단히 수치스러운 일입니다.
며칠 전에 ‘프리미어 12’에서 일본을 꺾고, 미국도 꺾고 우승을 했습니다.
대단히 자랑스러운 일인데, 그 자랑보다 세계 유일의 분단국이라는 수치가 더 큽니다.
하나님은 분단을 원하시지 않습니다.
무엇보다도, 북한에서는 2,520만의 동포가 복음을 제대로 듣지 못 해 구원 받지 못하고 죽어가고 있습니다.
이 사실에 대한 안타까움이 없다면 제대로 된 성도, 제대로 된 교회라고 하기 어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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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선교에 힘써 달라고 말씀 드리는 또 하나의 이유, 요즘 감리교회가 이 일에 열심이기 때문입니다.
감리교회는 오랫동안 통일선교에 열심을 별로 내지 않았습니다.
얼마 전부터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탈북민들 가운데 목사님이 되신 분들이 여럿이고, 신학생은 더 많은데 얼마 전까지 탈북민 출신 감리교 목사님은 한 분뿐이었고, 신학생도 별로 없었습니다.
지금은 감신대에 탈북민 출신 신학생이 일곱 명 재학하고 있습니다.
한 때는 십여 명이 있었습니다.
‘감신대는 탈북민 신학생들을 잘 보살핀다’하는 소문이 나고 있습니다.
실제로 잘 보살피고 있습니다.
통일과 함께 통합이 중요합니다.
통합은 남과 북이 마음과 마음으로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통일은 정치적, 영토적, 물리적인 것이고, 통합은 심리적, 화학적인 것입니다.
목원대에 ‘통일을 대비한 사회통합형 종교지도자 양성사업단’이 조직되어 많은 일을 하고 있습니다.
감리교 중진 목사님들을 중심으로 ‘북한회복감리교연합’이라는 단체가 조직되어 정기적으로 돌아가면서 기도회를 하고 또 여러 일을 하는데 얼마나 활발한지 모릅니다.
이 북한회복감리교연합에서 ‘통일일꾼을 양성해야 하겠다.’ 하면서 북한선교학교를 만들었습니다.
정식이름은 ‘통일선교학당’입니다.
‘감리교가 배재학당을 만들어 현대식 교육을 열었고, 이화학당을 만들어 여성교육을 열었는데, 이제 통일선교학당을 만들어 통일과 북한복음화의 길을 열자’해서 이름을 그렇게 정했습니다.
제가 학장입니다..
‘원로목사가 무슨 책임을 맡는 것이 피차 어색하다.’ 했는데, ‘그렇기는 하지만 경험 있는 사람이 없으니-실제로 없습니다.- 맡아 주십시오.’ 해서 맡고 있습니다.
잘 운영되고 있습니다.
이런 것들을 보면서 ‘아, 하나님께서 통일선교에 감리교를 들어 쓰시려 하는구나!’ 깨닫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쓰시려고 하면 순종해야 하지요.
통일선교운동을 하는 목사님들이, ‘뿌리를 북한에 두고 있는 감리교회들의 연합회를 만들자’고 의견을 모으고서 준비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이름을 임시로 ‘향북교회연합’이라고 정했습니다.
‘향북교회(鄕北敎會)’는 ‘고향이 북한에 있는 교회’라는 뜻입니다.
우선 그 리스트를 만들고 있습니다.
그 교회의 양해나 동의 구하는 일은 나중에 하기로 하고, 일단 명단을 작성하고 있는데 의외로 여럿입니다.
평양에 뿌리를 두고 있는 남산교회, 개성에 뿌리를 두고 있는 일신교회, 서대문교회…,
제가 지금 출석하고 있는 교회도 북한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해방 후에 평양에 성화신학교라는 감리교 신학교가 있었는데 남으로 온 그 교회 출신들이 세운 교회입니다.
그것이 제가 그 교회의 원로목사가 되어서 그 교회에 출석하고 있는 가장 중요한 이유입니다..
향북교회 리스트에, 용산교회도 들어 있습니다.
‘아니 그게 무슨 이야기야?’ ‘누구 마음대로….’ 하실 지 모르겠는데, 황해도에서 목회하던 이강산이라는 목사님이 1945년 11월에 저 파출소(치안센터) 뒤쪽에서 한성교회라는 이름으로 시작한 것이 용산교회의 출발이라고 합니다.
1948년에 교회가 둘로 갈라졌는데, 나간 쪽에서 한성교회라는 이름을 가지고 나갔습니다.
한성교회는 용산우체국 부근에 있다가 방배동으로 이사를 갔습니다.
향북교회 리스트에 한성교회가 들어있는 것을 보고 ‘한성교회를 넣었으면 용산교회도 넣어야 한다.’ 했습니다.
통일선교에 힘쓰면 교회가 힘을 얻는 것을 많이 봅니다.
하나님이 귀하게 보시고 힘을 주시기 때문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강남의 한 교회는 교회 안에 여러 문제가 있어서 어려웠는데, 통일선교에 힘쓰면서 교회가 하나가 되는 것을 보고 있습니다..
모교회에 드리는, 세 번째 당부, 마지막 부탁, ‘이 교회 출신들을 기억해 주시고, 좋은 교제를 나눠 주십시오!’ 입니다.
제가 아까 모교회를 얼마나 크게 마음에 담아두고 있는지 잠깐 말씀을 드렸습니다.
사실 이 근처에 올 일이 있으면 거의 빼놓지 않고 교회를 한 번 돌아봅니다.
얼마 전에도 그렇게 하다가 아는 교인 한 분에게 들킨 일도 있습니다.
저만 그런 것이 아닐 것입니다.
저보다 더 크게 마음에 담고 있는 분들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외국에서 살고 있는 교인 한분이 오래간만에 잠시 한국에 온 일이 있습니다.
이 교회 대물림 교인인 이문옥 권사님과 대학동창인데 하루는 제가 안내를 하게 되었습니다.
‘어디를 가고 싶으냐?’고 하니까, 자기가 살던 집과, 그 다음에 출석하던 용산교회라고 해서, 여기에 와서 저 밑에 차를 세우고 옛날 이야기를 한참 한 일이 있었습니다.
모교회는 모두에게 이렇게 잊지 못할 곳입니다.
여러분, 이 회고와 간증예배 두 번째 순서를 맡은 이은미 사모님을 통해서 은혜를 많이 받으셨을 것입니다.
그 분이 회고와 간증예배에 오시기로 했다는 소식을 듣고 ‘모교회가 무섭구나!’ 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 분이 일을 참 많이 하셨고 또 지금도 하고 있는 분입니다.
부군이 잘 아시는 것과 같이 새빛시인교회 안요한 목사님입니다.
이 교회는 오랫동안 새빛맹인교회라고 하다가 얼마 전에 새빛시인교회라고 이름을 바꿨습니다..
‘시인교회’는 시를 쓰는 사람들이 모인 교회라는 뜻이 아니고 ‘시각장애인교회’의 준말입니다.
안요한 목사님은 “낮은 데로 임하소서”라는 소설과 영화의 주인공으로, 많은 일을 하고 있는 것을 잘 아실 텐데, 그 뒤에는 이은미 사모님이 있습니다.
안요한 목사님은 요즘 저개발국가들의 장애인 선교를 위해 해외 오지들을 많이 방문하는데 이은미 사모님의 내조가 없으면 그 일이 가능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은미 사모님은 그러면서 그런 이야기를, 정말 하지 않는 분입니다.
언론사에서 인터뷰 요청이 오면 그야말로 결사적으로 피하는 분인데, 모교회에서 부탁하니까 단에 서는 것을 보고 그렇게 느낀 것입니다.
그 분은 용산교회 때문에 일생이 바뀐 분입니다.
여고 시절에 학교 친구의 전도를 받았습니다.
지난 주일에 간증한 박기원 장로의 사촌동생이 이은미 사모님의 클래스메이트였습니다.
동정녀 탄생에 대해 말하니까 눈을 동그랗게 뜨고 “선생님, 처녀가 어떻게 아이를 낳아요? 나는 다른 것은 다 믿어도 그것은 못 믿겠어요.”하던 학생이었는데, 이은미 사모님이 이 친구의 전도로 용산교회에 나오게 되었습니다.
부잣집 딸이고, 좋은 여고, 좋은 대학을 나왔는데 시각장애인의 내조자가 되어 그 가시밭길, 그러나 예수님이 부르신 길, 하늘나라의 상급이 큰길을 걷게 된 것입니다.
용산교회 때문에 이렇게 일생이 바뀐 분들 많을 것입니다.
저도 그 가운데 하나입니다.
여러분, 그런 용산교회 출신들에게 관심을 가져 주시기 바랍니다.
통일운동선교을 하는 사람들이 많이 쓰는 공식이 하나 있습니다.
SK+NK=OK입니다.
무슨 뜻일까요?
‘South Korea(남한)와 North Korea(북한)가 합해 One Korea(하나의 한국)를 이루자!’는 뜻인데, 요즘은 하나가 더 붙었습니다.
SK+NK+DK=OK,입니다.
DK는 뭘까요?
‘Diaspora Korea’, 해외에 살고 있는 700만 동포들을 말합니다.
DY, ‘디아스포라 용산’, 나라 안팎에 살고 있는 용산교회 출신들을 기억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들이 모교회를 잊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아시기 바랍니다.
좋은 교제를 나눠주시기 바랍니다.
이제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모교회 창립 70주년을 맞으면서 먼저 이 교회를 세우시고 70년을 인도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립니다.
교회 위에 일본 사람들이 세운 사찰이 있었는데, 1960년의 4․19 혁명 전까지 그 사찰의 주지가 이승만 대통령의 인척이 되는 여자 스님이었습니다.
강국주 장로님이 회고간증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이 분이 교회를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괴롭혔습니다.
그때 교회를 건축하고 있었는데 훼방을 얼마나 심하게 했는지 모릅니다.
용산경찰서에서 사복경찰관 한 분이 나와 경비를 섰는데, 목사님이 이 경찰관을 설득해서, 주지스님이 외출을 하면 그 분이 초소에 손수건을 걸어서 알려주었습니다.
그러면 교인들이 얼른 모여서 블로크 벽돌을 쌓아올렸습니다.
그 사찰, 오래 전에 없어졌습니다.
4․19 혁명이 일어나고 한 주 뒤인 4월 26일 오전에 이승만 박사가 하야성명을 발표했습니다.
그 날 오후에 교회에 왔다가 그 사찰에 가보니 동네 청년들이 몰려와서 그 스님을 추방하였습니다.
그때 연못 주위에 있던 좋은 화초들도 많이 없어지진 것을 봤습니다.
그 뒤에 그 자리에 삼인학교라는 학교가 들어왔는데 이 학교도 얼마가지 않아 간판을 내렸습니다.
그 스님과, 그 사찰에 대한 이야기는 이 동네에 오래 살고 있는 엄재호 권사님이 더 자세하게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는 꿋꿋하게 서서 70년 세월을 이어오면서 이제 새로운 도약을 준비하고 있는 것, 감사한 일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시기 바랍니다.
‘오늘, 어떤 말씀을 본문으로 정할까요?’ 하나님께 많이 여쭤 보았는데 그 답으로 주신 말씀입니다.
“먼 땅에서 오는 좋은 기별은 목마른 사람에게 냉수와 같으니라”
이 말씀이 모교회와 모교회 출신들 사이에서 그대로 이뤄지기를 바랍니다.
고마운 모교회, 잊지 못할 모교회, 그 모교회가 이 교회를 거쳐가고, 지금도 이 교회에 많음 관시을 가지고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좋은 기별을 끊임없이 전해주게 되기를, 이 교회의 머리가 되시는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