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유한한 인생
정석준
내가 이십대였던 사십여 년 전만 해도 백삼십 호가 살던 우리 마을에 회갑을 넘긴 노인은 열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였고, 부모가 회갑 때가지 살아 계시면 큰 경사로 알고, 온 동네 사람들을 초청하여 잔치를 베풀고 함께 축하해 마지않았다. 그러나 요즘은 "인생은 육십부터", "육십은 청춘"이란 말이 있듯이, 회갑나이는 노인 축에 끼지도 못한다. 따라서 회갑연을 하는 사람도 찾아보기 어렵고, 그 대신 칠순잔치를 많이 하고 있으니 격세지감(隔世之感)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해방 직 후 우리나라 사람의 평균 수명은 50살을 겨우 넘었다고 한다. 그런데 최근 통계청이 발표한 자료에 의하면 우리나라 남자의 평균 수명은 76.54세, 여자의 평균 수명은 83.29세라고 한다. 여자가 남자보다 7년이나 오래 사는 것은 전문가들은 남자가 여자보다 사회생활이 길고 경쟁이 심해 스트레스를 많이 받으며 또한 여자가 남자보다 스트레스 대처능력이 뛰어나기 때문이라고 한다. 여자의 경우 괴로우면 울기도 하고 맘껏 표현해 스트레스를 풀지만 남자의 경우는 괴로워도 참는 경우가 많아 스트레스가 쌓이게 되고, 또 이를 해결하기 위해 흡연이나 과음을 하기 때문에 여자가 오래 산다는 것이다.
생명공학자들은 인간의 건강과 수명을 연장하기 위하여 밤잠을 설쳐가며 연구에 몰두하고 있는데, 이미 1953년 왓슨에 의해 DAN이중나선 구조를 발견하였고, 1997년 영국 에딘버러의 로슬린 연구소에서 복제양 돌리를 탄생시켰으며, 2003년 유전자의 비밀을 밝히는 인체 게놈프로젝트를 완성하여, 인간의 의도대로 유전자를 조작해 각종 질병의 치료는 물론 대물림되는 체질마저도 바꿀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의학자들은 향 후 5~10년 이내에 현대의학으로서는 해결하지 못하는 암이나 에이즈를 완전 정복하고, 20년 이내에는 인간의 수명을 130세까지 연장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그러나 의학이나 유전공학이 아무리 발전한다 하더라도 인간이 죽지 않고 영원히 살 수는 없다.
지난 가을 친구 몇 명과 함께 남산 등산을 갔다가 팔각정에서 10년 만에 한 동기생을 만났는데, 그 동기생이 대뜸 한다는 소리가“야, 니 와 이리 늙었노?."였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가 늙어가는 것은 잘 모른다. 남은 늙어도 자기는 안 늙는다고 생각하고 있다. 친구의 모습에서 내 모습을 보아야 하는데, 친구는 늙어도 자기는 안 늙는다고 생각하고 있다. 이른 바 ‘착각 속에 살아가고 있는 것'이 인간이다.
어느 철학자가 "이 세상에 확실한 두 가지가 있다. 그 하나는 현재 내가 살아 있다는 사실이고 다른 하나는 안젠가는 죽는다는 사실이다."라고 말했다.
내가 현재 살아 있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리고 언젠가는 죽는다는 것도 부인할 수없는 사실이다. 그러함에도 사람들은 나와 내 가족의 죽음은 쉽사리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부처님께서 기원정사(祇園精舍)에 계실 때의 일이다. 3대 독자를 잃은 한 과부가 비탄에 빠져서 먹지도 않고, 잠도 자지 않고 울기만 하다가 어느 날 부처님을 찾아와서 슬픔을 하소연하였다.
“부처님 저는 오직 아들 하나를 두었는데 갑자기 중병이 들어 죽었습니다. 모자의 정이 깊어 어쩔 수 없으니 제발 저의 아들을 살려 주십시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자식을 살리고 싶으면 지금부터 거리로 들어가 사람이 죽지 않은 집에서 불을 얻어 오라.”
과부는 이 말을 듣고 기뻐 날 뛰며 성안으로 들어가 집집마다 외치며 외쳤다.
“사람이 죽지 않은 집은 없습니까? 나는 불을 얻어 자식을 살리고 싶습니다.
사람들은 말했다.
”너는 정신이 돌았구나. 사람이 죽는 것은 당연한데 죽은 사람이 없는 집이라니…썩 나가거라."
가는 집마다 과부에게 사람이 죽은 일이 있다고 하였다. 과부는 불을 얻지 못하고 맥이 빠진 채 부처님이 계신 기원정사로 돌아왔다.
“불을 얻어 왔느냐?”
부처님은 빙그레 웃으시면서 물으셨다. 그때서야 그 과부는 부처님께서 하신 말씀의 깊은 뜻을 알아 차렸다. 부처님을 우러러보는 그의 얼굴에는 어느새 슬픔의 그림자가 지워져 있었다.(잡비유경)
사람은 나면 반드시 죽는다. 생자필멸(生者必滅)은 만고불변(萬古不變)의 진리이다. 이것은 어느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인간의 숙명이다.
요즈음에는 한물간 건배사가 되어 버렸지만 한때는 퇴직자들의 회식 때‘구구팔팔 이삼사'라는 건배사가 크게 유행을 했다. 이 말은“구십구세까지 팔팔하게(건강하게) 살고 이삼일 앓다가 죽는다."는 뜻인데, 이 말 속에 노인들의 염원이 담겨있다고 보아진다.
한국인의 사망률 1위는 각종 암으로 인한 사망(26.3%)이고, 2위는 뇌혈관질환으로 인한 사망(13.9%)이며, 3위는 급성심근색으로 인한 사망(7.3%)이라고 한다. 늙그막에 암이나 뇌출혈로 쓰러진다면 본인의 고통은 말 할 것도 없고, 간병하는 가족들이 겪는 고통도 이만저만이 아니다.
노인들에게 "소원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한결같이 "잠자듯이 죽는 것"이라고 대답한다고 한다. 그러나 잠자듯이 편안하게 죽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50대 중반 이후 종교를 찾는 경향이 부쩍 늘어난다고 하는데, 그 이유를 심리학자은 '마음의 평안' 또는 '사후에 대한 불안감'때 문인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어느 철학자가 "인간은 삶이 두려워 사회를 만들고, 죽음이 두려워 종교를 만들었다."고 말했지만, 나이가 들수록 죽음이 불안으로 다가오는 것은 유한한 삶을 사는 인간의 한계인지도 모른다.(경주문학 52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