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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번궁 신사 | |
>> 이즈하라 중심지에 위치해 있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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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사 현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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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사기행』에서 ‘미야와기 조우’는 ‘이마미야진자’를 방문했을 때를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8시에 여관을 나와 하찌만구우로 갔다. 성터가 있는 산을 뒤로 한 돌계단 정면에 본전이 있는데, 내 목적은 그 왼쪽 구석에 있는 작은 ‘이마미야 진자’다. 여기에 고니시 마리아의 혼백이 모셔져 있다고 한다. 히데요시의 조선출병, 대마도의 입지조건, 유끼나가의 입장 등을 생각해 보면 이해가 될 만한 결혼이다. 그리고 처 마리아의 권유로 해서 요시토시도 기독교도가 되었다· · · ”
여기서 시대적 배경을 좀 설명해야 할 것 같다. 천하를 호령하던 히데요시가 죽기 직전에 명실공히 제2인자였던 도꾸가와 이에야쓰를 포함한 중진급 대대명(大大名)들을 소집하여 “내가 죽은 다음이라도 이 어린 자식을 잘 보필해 달라.”고 당부하고, 이를 확약하는 서명까지를 참석자 모두에게서 받아놓고서야 눈을 감았다. 그러나 히데요시가 죽고 없는 이 마당에 와신상담 오직 오늘 같은 날을 기다려온 제2인자 이에야쓰는 그까짓 서명에 구애받을 인물이 애초부터 아니었다. 결국 이에야쓰는 옥좌를 노리게 되고 이를 배신자로 규정한 히데요시의 막료들이 ‘이시다 미쓰나리(石田三成)’를 중심으로 세를 규합하여 이에야쓰에 강력히 대항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일본은 완전히 양분되어 이에야쓰군단과 히데요시 세력의 미쓰나리군단 간에 천하를 가름하는 ‘세끼가하라(關が原)전투가 벌어지게 되었다. 이때 전국의 다이묘(大名)들은 정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아주 어려운 입장에 처하게 되었으니, 이 전투에서 어느 편이든 들기는 해야 하는데, 만일에 자기가 가담했던 쪽이 지는 날에 당할 일들을 생각하면 여간 곤혹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오죽했으면 자기는 에에야쓰군단에 가담하고 자식이나 동생은 미쓰나리군단에 속하게 하여 어떠한 경우라도 자기 가문의 안녕을 도모하고자한 다이묘가 있었겠는가. 은혜와 의리로 보면 당연히 히데요시계인 미쓰나리 군단에 속해야 하나 강력한 군사력으로 보면 이 전투에서의 승산이 이에야쓰군단에 있을 것으로 생각되는 마당이니 도덕과 실리가 그야말로 뒤범벅이 되어버린 혼탁한 시대였다. 히데요시가 그렇게도 아끼던 가또 기요마사(加藤淸正)는 당연히 나가 싸워야할 세끼가하라 전투에 참가하지 않고 세가 우세한 이에야쓰 편에 들어 자기의 거성(居城)인 구마모도(熊本)성에서 꼼짝을 하지 않아 전후에도 에에야쓰에게서 계속 대접을 받은 반면에 같은 히데요시 막료의 한 사람이었던 고니시 유끼나가는 세 불리를 의식했으면서도 의리상 히데요시 군단에 가담했다가 참변을 당한 것은 이 전투의 한 대표적인 예라 할 것이다.
일본의 역사를 가름한 이 ‘세끼가하라’전투는 그 역사적 의미에도 불구하고 일본역사 속에서 가장 더러운 전투의 하나로 기록되고 있다. 왜냐하면 자기편을 들기로 약속하고 자기편 대열에 끼어 있으면서도 도무지 능동적으로 움직이려 하지 않고 대세를 관망하다가 유리한 편에 돌아서려는 ‘우라기리모노(배신자)’ 다이묘들이 양쪽 편 다 여럿이 있었던 전투였기 때문이다. 전투가 시작되어 작전대로 일사불란하게 움직여 주어야 할 부대들이 작전대로 움직여 주지를 않는 것이다. 전투 초기에 불리했던 ‘이에야쓰’는 아무리 신호를 보내어 “자, 이때다. 쳐들어가라.”고 해도 산 위에 매복하고 있던 부대가 관망만 하고 도무지 움직이려 하지 않는다. 격분한 이에야쓰는 그들에게 활을 쏘아 겨우 움직이게 하였던 전투였으니 더 말해 무엇 하겠는가.
세끼가하라 전투에서 패한 고니시 유끼나가는 참수를 당하고 그의 딸을 처로 삼고 있던 대마도번의 존립이 위태로운 사태에 처하게 되었다. 고니시 마리아는 소우요시토시로부터 즉시 소박을 당하고 나가사끼로 건너가 죽었다고 한다. 그 고니시 마리아를 이 이즈하라에서 제사를 지내게 된 것은 악령의 재앙을 두려워해서란 말도 있다. ‘이마미야 진자’에 모셔진 위퍠를 보면 “제신(祭神) 오오구니누시 노 미고도(大國主命) 스기와라 미찌쟈네(菅原道眞)”라고만 돼 있고, 고니시 마리아의 이름은 없다. 도꾸가와 이에야쓰가 두려워 그 이름을 숨긴 채 오늘날까지 제사를 지내 왔단 말인가?
현재 일본의 와고(和光)대학 인문학부 교수인 이진희 선생의 『일본문화와 조선』이란 책 속에서도 이 대목에 관련되는 글이 있어 여기에 소개한다.
역사의 물결에 그토록 농락을 당하면서도 히데요시와 이에야쓰의 양 시대를 용케도 살아 남은 대마도의 소우요시토시라는 사람은 도대체 어떠한 인물인가? 처음부터 그렇게 생각해 온 나는 그의 사적(사적)을 알아보려고 몇 번인가 이 대마도에 왔었다.
요시토시는 1588년, 20세의 젊은 나이로 대마도주 ‘요시시게’의 뒤를 이었는데, 25세가 되던 봄, 히데요시로부터 조선 침략의 선봉에 서도록 명을 받아 많은 부하를 잃었다. 5천명이 동원되었는데 고작 2천명밖에는 바다를 건너지 못했다. 그것은 평양과 행주산성의 두 싸움에서 크게 당하였기 때문이지만, 대마도를 통과하는 일본본토의 병사들에 의한 약탈과 파괴도 피폐에 박차를 가하는 것이었다. 그것뿐인가, 생명선이라고 할 만한 조선무역의 길마저 끊어지고 말았던 것이다. 그는 전쟁이 시작되기 전부터 그렇게 될 것을 충분히 예측하고 있었다. 장인인 고니시 유끼나가와 짜고 전쟁만은 막아보려고 무진 애를 썼는데 바로 그것이 예측을 하고 있었다는 사실의 반증이리라.
전쟁이 끝나고는, 대마도의 살길은 오직 조선과의 평화적 관계와 무역이란 것을 다시 한 번 통감했음에 틀림이 없다. 일본군이 패퇴하고 1개월 뒤인 1598년 12월, 그는 빠르게도 사람을 조선으로 보냈고, 다음해에는 3월과 6월 두 번이나 사람을 보내 평화의 계기를 잡아보려고 했다.
다른 한편으로는 고니시가 장인이기도 한 연유로 해서 그는 1599년 7월 오오사까 성으로 들어가 도요또미 편의 장수의 한 사람으로 후시미(伏見)성 공략에 가담했었다. 하지만 도요또미쪽의 장래에 자신을 갖지 못해서인지, 2개월 뒤에 벌어진 세끼가하라의 싸움에서는 직접 병사를 내지 않고, 가신인 ‘야나가와 시게노부(柳川調信)’의 아들 ‘가게나오(景直)’를 도요또미쪽의 총사령관 격인 이시다 미쓰나리의 군진으로 보내 얼렁뚱땅 적당히 얼버무리고 말았다. 그래서 도요또미쪽이 패하자, 이번에는 처(고니시 유끼나가의 딸)를 내쫓아, 장인마저 배반하고 마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요시토시는 도꾸가와 이에야쓰의 노여움을 피하고, 조선과의 평화 교섭에 전력을 경주할 수 있게 되어, 선린관계 회복에 겨우 도달했던 것이다. 그가 역사의 전개를 민감하게 꿰뚫어 보는 눈을 가질 수밖에 없었던 것은, 국경의 섬 대마도를 살려내야 한다는 일념의 소산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