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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장 신약 종말론의 본질
구약 신자들의 신앙은 종말론적 성향을 띠고 있다. 종말론적 소망의 심층부에는 장차 오실 구속자를 대망하는 기대로서 가득차 있었다. 늙은 시므온(눅2:25-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과 여선지자 안나(눅2:38-하나님께 감사하고 예루살렘의 속량을 바라는 모든 사람에게 그에 대하여 말하니라)에게서 나타나 있다.
신약 시대에 와서는 첫째, 사람들에 의해 맛본 영적 축복들이 구약 시대 보다 더 풍부하였다. 하나님의 구원 계획에 관한 지식이 풍성해지고, 신자들의 신앙도 깊어지고, 하나님의 사랑도 여러 풍부한 차원에서 인식하였다. 둘째, 미래에 오게 될 더 큰 축복들을 고대하는 신자들의 기대감도 더욱 더 심화되어 갔다. 구약과 마찬가지로 신약도 강한 미래지향적 전망을 지니고 있었다. 셋째,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으로 말미암아 시작된 시대가 장차 있게 될 더욱 평화로운 시대로 연결될 것이라는 확고한 신념도 있었다. 신약의 신자들은 구약성경에서 예언된 종말론적 사건이 이미 발생했다고 생각하는 한편, 매우 중요한 종말론적 사건들이 장차 발생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었다.
신약성경을 열었을 때 구약의 작가들이 예언했던 것이 이미 미루어졌음을 즉시 발견하게 된다.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신 사건은 구약성경이 말하는 가장 중요한 종말론적 기대의 성취였다. 윌리암 맨슨은 “우리가 신약성경을 펴보게 되면 예언으로부터 성취로 변화하는 기후를 맛보게 된다. 종말이 예수님 안에서 이미 등록이 된 상태이다. 종말의 가장 중요한 신호는 예수님의 부활과 교회 위에 내리신 성령의 강림사건이다. 예수님의 부활이란 단지 하나님게서 자기의 아들에게 호의를 베푼다는 표시로 내려졌던 신호가 아니라 마지막 때의 시작이며, 역사 속으로 들어오는 입구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새 시대에 들어오게 되었다. 교회, 성령, 그리스도 안에서 생명 등등은 종말론적 의미들이다. 새 창조의 기초 돌이 이제 비로소 제자리에 놓이게 된 것이다.”
이것이 진실임에도 다른 측면에서 볼 때 구약의 예언자들의 말했던 많은 예언들이 아직도 덜 성취되었음을 알아야 한다. 또한 예수님 자신이 예언하였던 많은 일들이 아직 실현되지 않았음도 주지해야 할 사실이다. 인자가 큰 권세와 영광을 가지고 구름타고 오실 것들이다. 선지자들은 이 세상에 대한 큰 심판이 있을 것이며 죽은 자들의 부활에 관해서도 말한 적이 있다. 신약의 종말론은 이미 이루어진 일에 대해서와 앞으로 실현되어여쟝 할 일, 이 두 가지 측면을 다룬다.
맨슨의 의견은 “여기에 실현된 종말론이 있다. 또 다른 한편에 아직 실현되지 않은 종말이 있다. 기독교는 그 처음 시작부터 근본적인 이중주곡을 들려주고 있다. 종말은 왔다. 종말은 아직 오지 않았다. 은혜도, 영광도, 하나님 안에서의 현재적 풍요도, 미래적 완성된 삶도, 그 어느 것도, 실체가 파괴되지 않고서는 결코 사라져 버리지 않는다.”
신약의 종말론을 특징 지워주는 특성은 “이미”(already)와 “아직”(not yet)사이에 일어나고 있는 긴장관계라고 할 수 있다. “이미”란 신자들이 향유하고 있는 것이며, “아직”이란 신자들이 아직 소유하지 못한 상태를 지칭한다. 오스카 쿨만은 “신약성경에 나타난 새로운 요소란 종말론 그 자체가 아니라 현재와 미래의 사이, 다시 말해서 결정적으로 ‘이미 성취됨’(already fulfilled)과 ‘아직 완성되지 아니함’(not yet completed) 사이에서 일어나는 긴장감이 신약성경에 나타난 새로운 요소이다.”
구약의 예언자들이 예언한 위대한 종말론적 사건이 어떻게 일어났는지, 또한 역사의 최종적 완성이 장차 어떻게 전개될지에 관해 신약성경이 무엇이라고 말하는지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자.
1.신약성경에서 우리는 구약에서 예언되었던 한 위대한 종말론적 사건이 이미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신약성경은 예수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오신 사건을 구약성경의 예언에 대한 성취사건으로 해석하고 있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하지 말라 그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 이르시되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마1:20~23).
예수님의 삶과 죽으심, 그리고 부활하심에 관한 수많은 자세한 기록들은 구약의 예언의 성취사건들로 여겨지고 있다. 또 한 가지 중요한 것은 ‘단번에’와 ‘오직 한번’과 같은 단어들이 그리스도의 사역에 적용되었다는 점이다. “그리스도께서도 단번에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벧전3:18).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 그 후에 자기 원수들을 자기 발등상이 되게 하실 때까지 기다리시나니”(히10:12,13).
여기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희생이 최종적인 사건임을 배우게 될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구약의 선지자들을 통하여 약속하신 바가 그리스도의 사역 안에서 결정적으로 발생 되었고 완성되었음도 알게 된다. 즉, 그리스도 안에서 약속된 구속자가 오신 것이다.
세례 요한과 예수님은 선포하시기를 예수님의 오심 속에서 하나님의 왕국(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하였다(마3:2, 막1:15). 예수님은 하나님의 영으로 자기가 악마와 귀신들을 내어 쫓는 일이 하나님의 왕국이 그들 위에 임하였다는 증거라고 하였다(마12:28). 하나님의 왕국이 오고 있다는 것이 구약의 종말론적 기대의 한 측면이었다면, 우리는 이 예언이 역시 그리스도에 의해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음도 볼 수 있다. 그리스도라는 한 인격체 안에 약속된 왕국이 왔고, 이 왕국은 장차 미래에 최종적 완성을 기대하고 있는 것이다.
신약의 저자들은 그들이 이미 마지막 날들에 살고 있음을 의식하고 있었다. 베드로의 오순절 설교에 “때가 제 삼 시니 너희 생각과 같이 이 사람들이 취한 것이 아니라 이는 곧 선지자 요엘로 말씀하신 것이니 일렀으되 ‘하나님이 가라사대 말세에(마지막에)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게 부어주리니…’(행2:15~17). 바울에게서도 “때가 차매”(갈4:4) 세상에 오셨다고 한다. 그리스도께서 시간이 차매 나타나셨다는 뜻은 역사의 위대한 중심점이 도착했다는 것을 의미하며 구약의 예언이 이제 성취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구약의 관점에서 바라다 볼 때 신약 시대는 “성취의 때”라는 것이다.
히브리서 저자도 자기들의 피가 아닌 피를 가지고 매년 지성소에 들어가야 했던 구약의 대제사장들을 그리스도와 비교함으로써 새 세대와 옛 세대 사이의 갈등과 긴장에 관해 말하고 있다. “대제사장이 해마다 다른 것의 피로써 성소에 들어가는 것 같이 자주 자기를 드리려고 아니하실지니 그리하면 그가 세상을 창조한 때부터 자주 고난을 받았어야 할 것이로되 이제 자기를 단번에 제물로 드려 죄를 없이 하시려고 세상 끝에 나타나셨느니라”(히9:26,27). 구약 시대의 제사장들이 행하였던 역할이 잠정적이었던 것에 비하여 히브리서 기자는 그리스도의 나타나신 것을 종말론적 성취 및 최종점으로 보고 있다.
요한 서신들은 ‘말세에’ 혹은 ‘마지막 날들에’라는 표현들 대신에 “마지막 때”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 “아이들아 지금은 마지막 때라 적그리스도가 오리라는 말을 너희가 들은 것과 같이 지금도 많은 적그리스도가 일어났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마지막 때인 줄 아노라”(요일2:18).
신약 시대의 신자들이 세상 끝에, 말세에, 마지막 때에 살고 있는 자기 자신들을 분명히 의식하고 있었다는 증거들이다. 또한 그들은 구약성경에 예언되었던 위대한 종말론적 사건이 그리스도의 오심과 그의 왕국이 세워짐 속에서 발생하였다는 점을 의식하고 있었다. 여기에서 후크마는 “시작된 종말론”이란 용어를 사용함으로써 종말론적 역사 발생이 이미 이루어진 동시에 미래에 종말론적 완성 단계로 발전되어 갈 것이라는 측면을 내포한다. “시작된 종말론”이란 종말은 이미 시작하였으나 아직 마치지는 않았다는 것을 암시한다.
2.신약성경을 살펴볼 때 우리는 구약의 저자들이 하나의 운동과정으로 묘사했던 내용이 신약성경에 와서는 두 단계로 인식되고 있음을 주목해야만 한다-현재적 메시야의 시대와 미래의 시대. 신약의 신자들은 자기들이 지금 예언자들이 예언했던 새 시대에 살고 있음을 인식하는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시작된 이 새 시대가 장차 올 또 다른 시대를 잉태하고 있다는 사실도 인식하였다고 할 수 있다. 신약의 저자들은 지금 마지막 날들에 살고 있음을 인식하고 있는 동시에 두 세대에 관해서도 이야기하고 있다. 두 세대란 현재의 세대와 장차 다가올 세대를 말한다. 장차 올 세대를 “저 세상, 내세, 오는 세상”으로 묘사하고 있다. 히브리서 저자는 자기 시대에 어떤 이들은 “내세의 능력들”(히6:5), “오는 여러 세대들”(엡2:7)에 관해 말하고 있다.
현재의 세대와는 다른 미래의 세대가 장차 있을 것이라는 인식이 면면히 재확인되어 왔는데 성경에는 이러한 두 세대에 관해 언급하고 있는 몇몇 구절들이 있다(눅20:34~35, 마12:32, 눅18:29~30). 신약의 저자들은 현재의 세대를 뒤따라 올 장차의 세대를 바라다 보았다고 단정할 수 있다.
베드로는 오순절에 행한 그의 설교에서, 성령의 강림으로 말미암아 시작된 시기가 “말세”에 속해 있음을 말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지금 “말세에”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단수로서 표현된 “말세”라는 표현구는 현세대를 지칭하지 않으며, 항상 장차 올 세대를 가리키고 있ㅁ을 주의할 필요가 있다. 일반적으로, 단수로 사용된 “말세”는 인류의 대 심판의 날이나 부활의 날을 가리키고 있다(요6:39, 40, 44, 54, 요11:24, 12:48). 신약성경의 제자들에 의하면, 우리는 지금 “말세에” 살고 있는 것이며 “마지막 날”은 장차 올 것이다.
또 다른 흥미 있는 일은 ‘세대’라는 단어가 복수형 명사와 함께 쓰여진 경우는 한 번 있는데 이 경우는 현재의 세대를 의미하게 된다(히9:26). 그러나 단수형과 함께 쓰여질 경우는 일반적으로 이 단어는 장차 미래에 있게 될 최종적 절정 상태를 지칭하고 있다(마28:20, 13:39, 40, 49, 마24:3).
신약의 종말론은 구약의 선지자들이 예언했던 그리스도의 오심을 뒤돌아보면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확증하고 있다. 우리는 지금 마지막 날들 속에 살고 있다. 그러나, 신약의 종말론은 동시에 장차 일어나게 될 최종적 완성 상태를 바라다보면서 다음과 같은 사실도 확증하고 있다. 마짐가 날은 지금 오고 있는 중이며 최종적인 세대는 아직 도래하지 않았다.
3.두 종말론적 국면들 사이의 관계성은 현 세대의 축복들이 장차 올 더 크나 큰 축복들에 대한 보증이며 담보물이라는 것으로 규명되어질 수 있다. 신약성경에 의하면 그리스도의 초림은 그리스도의 재림의 확실성을 보증해 주는 담보물과 같다고 할 수 있다. 그리스도가 부활 후 승천하실 때 천사들은 이 점에 관해 제자들에게 말하였다(행1:11). 히브리서의 저자도 죽음 후에 심판이 분명히 있듯이 그리스도의 초림 후에 재림도 분명히 있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히9:27~28). 바울도 디도서에서 신약의 신자들이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 사이에 살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딛2:11~13). 그리스도께서 과거에 나타나 셨듯이 장차 미래에 나타나실 것에 대해 본문은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종말론이란 이미 과거에 일어났던 사실에 그 뿌리를 두고 있는, 미래에 대한 기대라고 할 수 있다. 벌카우어는 “미래에 대한 약속은 과거의 사건들과 불가분리의 관련성을 맺고 있다. 그리스도인의 기대란 ‘미래의 씨앗들은 현재 속에 들어 있다’는 식의 일반적 관념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기대란 장차 일어날 것과 이미 과거에 일어난 것 사이의 특수한 관계작용에 의해 전적으로 결정되어 진다. … 진정한 종말론이란, 이미 나타나신 바 되고 또한 ‘간절히 그를 기다리는 자들을 구원하시려고 … 두 번째로 다시 나타나실’(히9:28) 그리스도를 고대하는 일과 항상 깊은 관련을 갖고 있다.”
신약의 종말론이 독특하다는 것은 그것이 과거에 일어났던 그리스도의 승리에 그 기반을 둔 하나님의 목적들이 장래에 완성될 것을 기대하고 있다는 점에 그 독특성이 있다. 래드 교수도 “미래에 있게 될 하나님의 승리에 대한 교회의 증거는 이미 역사 속에 성취되었던 승리에 그 기반을 두고 있다. 그것은 단순한 소망을 선포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 속에서 발생했던 사건들과 그 사건들에 대한 교회의 경험 위에 근거를 둔 소망을 선포하고 있는 것이다.”
오스카 쿨만은 “그리스도들은 D-day와 V-day 사이에 살고 있다. D-day는 그리스도의 초림이었고 그때에 원수들이 결정적인 패배를 맛보았다. V-day는 그리스도의 재림이며 그때에 원수들은 최종적으로 완전히 항복하게 될 것이다. 최후의 승리에 대한 소망은 너무도 크게 생생하다. 왜냐하면, 승리를 결정지어 주는 전쟁이 이미 일어났다는 확고한 신념 때문이다.”
헨드리쿠스 벌코프는 “신약성경에는 미래란 그리스도와 성령 속에서 이미 존재했떤 것을, 또한 죄와 고통과 죽음에도 불구하고 당당하게 지속 되어질 것들을 전개하며 완성시킴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인의 소망이란 빈곤 속에서 싹트는 것이 아니라 무엇인가를 소유했다는 의식 속에서부터 움트기 시작한다고 한다. 그리스도인들은 미래에 있게 될 훨씬 더 크고 풍요한 축복들을 소망한다. 이는 지금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 아니라 지금 이미 많은 것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미래를 소망하고 있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인간에게 있어서는 더 행복한 미래를 기대하는 소망이란 빈곤과 불확실성 때문에 발생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소망이란 밀에 대한 더 많은 시야를 넓혀주는, 이미 갖고있는 소유 때문에 일어난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소망은종종 신앙과 사랑과 연관되어지는데, 신앙과 사랑 역시 소유들인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무엇을 지금 소유하고 있다는 사실 바로 그 자체가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상실하고 아직까지 얻지 못한 그 무엇을 고통스럽게 느끼게 하고 있다. ‘좀 더 맛보았으면’하는 식이다. 그러므로 소망이란 소유와 결핍의 열매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