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실의 간택제도(揀擇制度)와 데릴사위
조선시대 왕실에서 혼인을 치르기 위해 여러 사람의 혼인후보자들을 궐내에 모아놓고 왕 이하 왕족 및 궁인들이 나아가 직접 보고 적격자를 뽑던 행사로서 조선건국 초까지만 해도 이와 같은 간택제도는 없었으며 비빈(妃嬪)을 구할 경우에는 상궁을, 부마(駙馬)의 경우에는 감찰로 하여금 각각 예정된 처녀·동남(童男)의 집으로 가서 혼인의 뜻을 전하고 당사자를 살펴 결정하게 하는 중매혼의 형태가 일반적이었다. 간택제도는 태종 때 부마선택사건을 계기로 비롯되었다고 한다.
태종이 춘천부사 이속(李續)에게 감찰을 보내어 혼인의사를 밝혔는데, 이속은 달가워하지 않으며 짚신 짜는 데는 지푸라기가 제격이라고 말함으로써 혼인을 거절하는 뜻을 암시하였다. 이에 태종은 크게 노하여 이속의 아들에게 금혼령을 내리고, 이후 국혼(國婚)에는 후보자의 단자(單子:名單)를 수집하여 직접 간택하도록 하는 것을 제도로 정하였다.
본래 간택의 적용범위는 비빈에 한정되는 것이 원칙이었으나 실제로는 일반 왕자녀(王子女)의 배우자까지도 이 제도에 의하였다. 조선왕조실록에 처음으로 나타나는 간택의 사례는 1439년(세종 21) 3월과 4월 의창군 공(義昌君玒)과 한남군 어(漢南君0x9A92)의 배우자 선발이다.
의창군의 경우는 사족(士族) 처녀 26명을 사정전(思政殿)에 모아 11명을 뽑고 이틀 후 같은 장소에서 재선을 했다고 하며, 한남군의 경우는 경회루에서 8명의 처녀를 대상으로 간택을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간택의 절차는 먼저 금혼령을 내고 다음으로 처녀 혹은 동남 봉단령(捧單令)을 내린다. 금혼령이 내려 있는 기간에는 양반 아닌 서민도 결혼할 수 없었다. 봉단령은 적임자를 가진 집에서 스스로 단자를 내라는 명령이었다. 그 자격은 사족으로서, 이씨가 아닌 사람, 부모가 있는 사람, 세자(또는 왕자녀)보다 2, 3세 연상까지의 여(남) 및 이성친(異性親)의 촌수 제한이 있었다. 간택은 초간택·재간택·삼간택 등 3차에 걸쳐 이루어지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초간택의 후보자 수는 대체로 30명 안팎으로 여기서 5∼7명을 선발하고, 재간택에서 3명을, 그리고 마지막 삼간택에서 1명을 결정하게 되어 있다. 간택일은 특별히 점을 쳐서 정했으며 당일 처자들이 궐내에 들어오면 넓은 마루에 모아놓고 각기 그 자리 앞에 아버지의 이름을 써붙이도록 하였다. 처자들에게는 각각 간단한 다과상을 내려 그 행동거지를 볼 수 있게 하였다.
이때 왕과 왕비는 발을 드리운 안쪽에서, 궁녀들은 면전에서 그들을 관찰하였다. 이렇게 하여 삼간택날 마지막으로 뽑힌 처녀는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곧바로 별궁으로 들어가 가례(嘉禮) 전까지 장래의 비빈으로서의 예비교육을 받았다. 그 기간이 50일 남짓하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단축되는 수도 있었다.
선발의 기준은 우선 명문의 후예로서, 부친의 지위가 높지 않은 집의 딸이었다. 이런 집은 혈통과 가문은 좋되, 권력도 재산도 없는 집이 많았다. 이것은 사치와 교만을 경계하는 뜻도 있겠으나, 외척의 발호(跋扈)를 꺼리는 의도가 더 짙다. 또 본인의 됨됨이와 용모에도 장래 국모(國母)로서의 덕과 복, 어진 인상을 우위에 두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조건은 원칙론에 불과했으며 실제는 외적(外的) 요인, 즉 정치적인 요인이 크게 작용하였다. 간택이 형식적인 절차인 데다가 다행히 뽑힐 가능성이 있다고 하더라도 넉넉치 않은 선비의 집안에서는 처자의 의복·가마에서부터 유모 등 수행원의 복장까지 마련해야 하는 부담 때문에 처녀단자 올리는 것을 기피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이 발각될 경우 형벌이 따르게 되므로 난처한 입장이었다고 한다.
일례로 혜경궁 홍씨는 그의 ≪한중록≫에서 세자빈으로 간택될 당시 국명을 어길 수 없어 마지못해 단자를 올렸으나 옷치장 등 경비 때문에 빚을 내지 않을 수 없었다고 술회하였다. 이 때문에 대체로 어느 시대에나 초간택에 모이는 인원은 30명 안팎에 지나지 않았고 때로는 그 정도의 인원도 차지 않아 관계관원이 견책을 받고 간택 자체가 연기되기도 하였다.
이처럼 간택제도는 적령기의 처자를 둔 사족들에게 큰 부담을 주는 것이면서도 사실상 의례적인 행사에 불과하였다. 그러나 그 같은 내막을 잘 모르는 어린 당사자들은 간택의 의미를 알 리 없었고, 고운 옷 입고 대궐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즐거운 일이었는데, 초간택에 참예하면 명주옷감을 받았고, 재간택에 참예하면 중국 비단과 노리개까지 받았으니 기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조선 후기 노론계열에서 ‘국혼을 놓치지 않는다.’라는 명제를 제일의 당론으로 삼았던 것은 왕실과의 혼인을 통한 권력의 유지와 확대를 꾀하기 위해서였다. 실제로 조선 후기의 왕비는 노론 집안의 딸이 아닌 경우가 거의 없었으며, 세도정치도 결국은 이러한 간택제도에 바탕을 두고 나타난 정치형태였던 것이다.
그러나 공주의 부마 간택의 경우에는 많은 비판이 따랐다. 조선 중기의 유학자 이이(李珥)는 한 사람의 왕자와 공주를 위하여 사족의 여러 처자와 동남이 간택에 참여해야 하는 제도가 옳지 않다고 지적하고, 국혼을 중매혼으로 복귀하는 게 마땅하다고 주장한 바 있다.
데릴사위
딸만 있는 집안에서 혼인한 딸을 시집으로 보내지 않고, 처가에서 데리고 사는 사위로서 솔서(率婿) ·예서(預婿) ·서양자(婿養子) ·서류부가(婿留婦家) ·초서(招婿) ·췌서(贅婿) 등 예로부터 남자가 처가에서 사는 유형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그래서 오늘날의 데릴사위 혼인과 혼동되는 경향이 있으나, 일반적으로 딸만 있는 집안이 동족(同族:同姓)에서 양자를 입적시키고, 사위는 별도로 맞이하여 그의 노동력으로 가사를 돌보게 하는 솔서혼을 말한다.
데릴사위와 연관되는 혼인의 유형은 다음과 같다. ⑴ 솔서:고려시대까지 이성(異姓)의 사위양자[婿養子]가 인정되었으나, 조선시대에는 부계혈연의 가계계승만을 인정하여 이성의 남자(대개 가난한 사람)에게 딸을 주어 데릴사위로 삼아 그의 노동력을 빌고, 양자는 같은 성씨에서 따로 취하였다. 따라서 이러한 데릴사위 혼속은 조선시대 특유의 것으로 추정된다.
⑵ 예서:대부분 집안이 가난한 어린 남자를 여자집에서 맞이하여 성장한 후에 혼인시키는 것으로, 고려 ·조선 시대에 일부에서 하던 혼인 형태이다. ‘민며느리[預婦]’와 반대인 경우이다. 고려시대 때 몽골에 처녀를 바친 공녀(貢女)와 조선시대의 왕가간택제도에 연유한 것으로서 혼인 후에 서양자 또는 솔서의 형태로 이행된 경우도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⑶ 서양자:솔서와 혼동되는 것이 서양자의 경우이다. 고려시대 이전부터 부계혈연의 가계계승만을 고집하지 않았을 경우, 딸만 있는 집안에서 가계계승을 위하여 맞이한 사위양자를 말한다. 오늘날 민법에서는 서양자 규정을 따로 두고 있지는 않으나, 처가 친가의 호주이거나 호주상속인인 경우 남편이 처가에 입적하고 자녀는 어머니의 성과 본을 따라 모가(母家)에 입적하도록 되어 있다(민법 826조).
⑷ 서류부가:고구려 때부터 내려온 혼속으로, 남자가 혼인을 한 뒤 일정 기간 처가에서 살다가 남자집으로 돌아와 사는 혼인형태이다. 《위서(魏書)》에 따르면 고구려에서는 남녀간에 혼담이 이루어지면 여자집에서는 ‘서옥(婿屋)’이라는 작은 집을 세우고, 날이 저물어 사위가 돈과 폐물을 가지고집 밖에서 여자와 동숙할 것을 청하면 부모가 사위를 서옥으로 안내하여 여자와 동숙하게 함으로써 결혼생활이 시작되는데, 남자는 자녀가 장대하여야 비로소 처자를 데리고 본가로 간다 하였다.
이러한 서류부가의 혼속을 사위가 처가에 장기간 머물며 노력을 제공하는 봉사혼(奉仕婚)으로 규정하기도 한다. 이를 조선 중기 효종 때의 《반계수록(磻溪隨錄)》에는 “사대부가는 고루구간(固陋苟簡)하여 사위가 처가에 유한다. 그러므로 처를 취하지 않고 장가든다”라고 표현하였다. 수천 년 내려온 서류부가의 혼속은 체류기간이 조선 후기에는 1∼3년으로 단축되었다.
⑸ 췌서:중국에서는 데릴사위를 췌서라고 하였는데, 여자를 얻는 대가로 지불하는 빙재(聘財)를 노역으로 대신하는 노역혼(勞役婚:役婚)인 경우의 사위를 말한다. 이러한 혼인풍속(婚姻風俗)은 기원전부터 시작되었는데, ‘췌’에는 ‘혹 ·군식구 ·질(質:인질)’의 의미가 포함되어 췌서는 질서(質婿),즉 채무노예적인 의무가 있었다.
참고문헌
• 『태종실록』
• 『세종실록』
• 『성호사설』
• 『송와잡설』
• 『연려실기술』
• 『증보문헌비고』
• 『조선여속고』(이능화, 1926)
• 『조선조 궁중풍속의 연구』(김용숙, 일지사, 197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