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힝오야, 면서기가 되어라”
우리 고흥군에서 과역장이 제일 크다. 4개 면민이 다 모이는 장이기 때문이다. 이 5일장이 열리면 고흥 특산물인 유자, 마늘, 쌀, 꼬막은 물론이고 집에서 지은 농산물을 가지고 나온 사람들로 시장 안은 항상 북새통을 이루었다.
어느 여름방학 때 부모 몰래 양설당에 책가방을 맡기고 아이스께끼 장사를 나선 적이 있었다. 한여름 따가운 뙤약볕 아래 가축장 쪽으로 갔다가 다시 포목장이 열리는 곳으로 발길을 옮기는 순간 내 귓전에 낯이 익은 여자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이 울음소리는 분명히 어머니의 목소리였다. 나도 모르게 평소 어머니가 소금을 팔고 있는 곳으로 눈길을 돌렸다. 어머니는 남루한 무명옷을 걸치고, 몸빼바지를 입은 채로 웬 남자의 바짓가랑이를 잡고 울부짖으며 통사정을 하고 계셨다. 나는 순간 아이스께끼 통을 내려놓고 먼발치에서 떨리는 감정으로 그 장면을 주시하고 있었다.
“에말이요. 한 번만 용서해 주시오!”라고 애걸구걸 하였으나, 경찰복을 입은 사람과 면사무소 직원은 아랑곳 하지 않고 두 개의 됫박을 발로 짓이기고 있었다. 그러자 굵은 소금을 파는 큰 됫박과 고운 소금을 파는 작은 됫박이 그들의 발길질에 산산 조각이 나서 땅에 내뒹굴고 말았다.
박살난 됫박을 물끄러미 바라보시던 어머니는 목소리를 높여 우시면서 흩어진 소금을 손으로 쓸어 모아 함지박에 담으셨다.
나는 연신 몸빼바지 자락으로 눈물을 닦으시는 어머님을 바라보면서 어머니 곁에 바싹 다가서지도 못한 채 어머니를 따라 속절없이 눈물을 흘렸다.
이러한 당시 상황을 보면서 나도 모르게 두 손을 불끈 쥐며 ‘우매한 백성에게 저렇게 하는 짓은 선정이 아니다. 내가 나중에 관리가 된다면 나는 저렇게 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가슴에 깊이 새겼다. 어머니가 흩어진 소금을 다 쓸어 담은 후에야 나도 눈물을 멈추고 자리를 떠나, 그 길로 양설당으로 곧장 가서 팔다 남은 아이스케끼를 반납하고 눈물을 훔쳐가며 집으로 돌아왔다.
지금은 척관법 개정으로 말(斗) 되(幷)를 쓰지 않고 있지만, 당시에는 모든 곡식은 말이나 되로 그 양을 측정했는데, 반드시 됫박에 ‘공용’이라는 도장이 박혀 있는 것을 사용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오랜 세습에 젖어 있는 장사꾼들은 그냥 집에서 만든 되를 사용하고 있었다.
어머니는 저녁 무렵 호랑이 시어머니에게 드릴 빵과 떡, 그리고 고기를 준비해 집으로 돌아오셨으나 시장터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 조금도 내색을 하지 않으셨다.
어머니는 힘든 소금장수를 하시면서 어떤 일이 있어도 일찍이 홀로 되신 시어머니 상에 고기를 빠뜨린 적이 없고, 시어머니가 좋아 하시는 고막, 굴 등 해산물을 거르신 적이 거의 없을 정도로 정성이 지극한 효부셨다. 그래서 효부·효녀로 군수상과 도지사 상을 두 번이나 받으셨다.
그날 밤도 여느 때와 다름없이 나는 등잔불 밑에서 공부를 하고 있었고, 어머니는 허리에 찬 전대를 꺼내 돈을 헤아리시더니 긴 한숨을 내리 쉬셨다. 우리 어머니는 장사를 하고 돌아오시면 의례히 등잔불 밑에서 전대를 풀어놓고 셈을 하셨다. 돈을 세시면서 두 번 세 번 반복을 하며 소리 내어 돈을 세시다가 내가 어머니를 쳐다보면 돈벌이가 좋은 날은 등잔불빛에 유난히도 얼굴이 환해 보이셨다. 그날은 왠지 전대에 돈을 담지 않으시고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시더니 말씀하셨다.
“힝오야, 애미는 니가 면서기가 되면 영 좋겠다. 응?”
하시면서 빡빡이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눈가에 이슬이 맺히셨다.
“이 세상은 선한 끝은 있어도 악한 끝은 없단다.”라며 말끝을 이어 가셨다.
아마도 낮에 과역 장에서 일어난 일이 계속해서 마음에 걸리는 듯싶었다. 나는 하던 공부를 멈추고 이불을 푹 뒤 짚어 쓴 채 소리 없이 울고 또 울다가 나도 모르게 잠이 들었다.
우리 어머니는 무거운 소금을 머리에 이고 5일장을 찾아 떠도는 장돌뱅이시다. 그래서 우리 형제는 거의 할머니가 키우다시피 하셨다.
어머니는 우리 집을 반경으로 고흥장, 유둔장, 도화장, 녹동장, 벌교장 등 시장을 나가시기도하고, 당시 하이칼라라고 할 수 있는 교장이나 면장 댁 등에서 주문을 받으신 날이면 사오십리 길을 마다하지 않으시고 머리에 무거운 소금을 가득 이신 채 여기저기 배달을 나서기도 하셨다.
지금처럼 치약이 흔치 않은 60년대까지만 해도, 가는 소금이 흔치않아 왕소금을 방망이로 으깨어 이를 닦았다.
우리 어머니도 이른 아침 양치 소금 통을 검사하시고 양이 적으면 방망이로 왕소금을 짓이겨 양치 소금 통에 채워놓으시곤 하셨다. 온 집안 식구들이 소금을 손가락에 찍어 이를 박박 닦았고, 다. 이를 닦고 난 후에는 양치물을 입안에 넣고 있다가 내뱉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