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마적인 제도는 국민당이 나치를 지지하는 당에서도 잘 나타난다. 국민당은 더욱더 잔혹하게 인종차별을 하기 시작했다. 만델라는 국민적 저항이 더욱 거세어지는 정국 속에서 충격적인 장면을 목격한다. 평화적으로 시위하던 시위대에 경찰이 무차별 총격을 가해 수많은 부상자와 18명의 목숨이 희생되었다. 그러나 이 사건은 앞으로 만델라가 겪게 될 엄청난 일들의 전주곡에 불과했다. 그는 이로 인해 무장투쟁에 대한 필요성을 느끼기 시작했다. 만델라는 투쟁을 하면서 공산주의를 비롯한 다른 사상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소수 지배로부터 행방과 자결권을 위한 아프리카 민족투쟁을 최우선으로 두고 있는 만델라에게 마르크스주의는 상당히 매력적인 사상이었다. 하지만 만델라는 공산주의자가 될 수는 없었다. 그는 아프리카 공산주의와 대화하기 위해 공산주의를 공부한다. 만델라가 투쟁을 하고 있는 모습은 일제 강점기 우리나라의 상황과 비슷함을 느낄 수 있다. 민족주의, 공산주의, 사회주의, 비폭력, 폭력, 조직 내에서의 내분과 분쟁 등 남아프리카에서 자유를 얻기 위해 투쟁하는 모습은 우리나라의 독립운동 모습처럼 보인다.
만델라는 어느 순간 비폭력으로는 자유를 쟁취할 수 없다는 판단을 내리고, 폭력 투쟁으로 노선을 돌리고 조직을 만들게 된다. 이제는 변호사가 아니라 지명수배를 받은 투사로서 지하에 숨어 지내는 민족운동가가 되었다. 국민당과 싸우기 위한 군대를 만드는 일에 책임자로 활동을 하게 된 만델라는 이 조직의 이름을 ‘움콘토 웨이즈웨’ 즉, ‘민족의 창’이라고 했다. 줄인 이름은 ‘MK’. 아프리카 민족회의에는 백인이 참가할 수 없었지만, MK는 백인을 비롯한 공산주의자까지 모두 받아들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