붓펜이 필기도구다. 그의 손이 닿으면 메모지나 냅킨도 캔버스가 되고, 어디든 앉은 자리가 그의 화실이 된다. 전철 속 맞은편에 앉은 모녀, 폐휴지를 줍는 할머니, 과일 가게 아저씨, 택시 기사의 뒷모습. 일상에서 스쳐 지나가는 것들이 그에게는 소중한 그림거리다. 그림에는 그가 그린 이들의 언어가 그대로 담겨 있다. "사람을 그리면 사람이 소중해지고, 꽃을 그리면 꽃이 소중해지고, 돌멩이를 그리면 돌멩이가 소중해져"라고 말하는 박재동 화백을 만났다. |
편집부가 독자에게 ...
아직 못다 한 이야기 박재동 화백은 욕심이 많습니다. 앞으로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만화도 그리고, 그림도 그리고, 애니메이션 영화도 새롭게 만들고, 아이들도 최선을 다해 가르쳐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세상이, 아픈 사람들이 그를 필요로 하면 언제든 함께할 몸과 마음의 준비도 되어 있다 합니다. 손이 열 개 있다 한들 모든 것을 해낼 수 있을까요? 걱정스런 리포터와 달리 활짝 웃으며 말합니다. "꿈은 꾸는 거야, 되고 안 되는 것은 두번째. 늘 현실에서 길이 나와. 순서에 따라 그 길을 가면 되는 거지." 안색과 눈빛이 맑은 박재동 화백이 전하는 '소소한 것들의 소중함' '꿈을 따라 걷는 길' 함께 만나보시지요. _김지민 리포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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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정 속의 아이들이 그림에 담겼다. 그림 속 어여쁜 아이들은 저마다 의미 있는 표정으로 우리를 쳐다본다. 아이들은 그렇게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다시 태어나 자신의 이야기를 이어간다. |
"잊지 않아야 살릴 수 있어" |
"그림쟁이로서 뭔가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지. 내가 할 수 있는 일, 그림으로 그 아이들의 이름을 다시 부르고 싶었어." 세월호 희생자들의 모습을 그림으로 옮기는 작업을 하고 있는 박재동(62) 화백의 말이다. 처음엔 슬프고 원통한 마음이 앞서 사진을 쳐다보기도 힘들었다. 하지만 아이들을 오래 바라보니 한 명, 한 명이 너무나 예쁘고 소중하더란다. 그 소중한 아이들을 그림을 통해 우리 안에 살아 있는 아이로 다시 태어나게 해줘야겠다고 생각했다.
박 화백은 "그림을 그리면서 아이들의 손을 잡아 올리는 느낌이 들었어. 그 아이들을 통해 오히려 내가 치유되고 위로 받았지"라고 말한다. 세월호 침몰 사고로 희생된 모든 이들을 그리기에는 아직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그는 희생된 사람들과 아팠던 사건이 잊혀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그리고 자신의 그림이 사람들의 기억을 붙잡아줄 작은 매개체가 되기를 소망한다고. |
예술지상주의자의 변신 |
그의 시선은 늘 사람에게 닿아 있다. 얼마 전 마친 전시회 제목도<소소한 일상 : 고요한 울림>. 그는 소소한 것들을 사랑한다. "일상의 사소한 것이 소통하면서 삶이 되고 서로 더 풍부해지거든. 그런 것이 시대를 말해주기도 하고. 나는 그렇게 시대를 표현해주는 작은 것들이 궁금해요. 그러니 내게는 세상이 온통 그림인 셈이지." 천생 그림쟁이인 그는 시사만화가로 더 유명하다. 1988년부터 1996년까지 8년 동안 한겨레신문에 연재한 '한겨레 그림판' 의 주인공이 그다. 한 컷 만평에 대한민국의 중요한 사건을 촌철살인의 시선과 표현으로 담았다. "대한민국 시사만화는 박재동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 는 말이 나올 만큼 그의 만평은 독특했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시사만화가' 로 기억하는 이유다. "사실 나는 예술지상주의자였거든. 정치에 큰 관심도 없었고. 그 당시는 우리나라에 민주화의 큰 물결이 일어날 때였어. 그 거대한 흐름을 보며, 그림을 통해 민주화에 참여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지."
그 무렵 신문사의 시사만화가 모집 공고를 보고, 시사만화가의 길로 들어섰다. 그는 만평에 만화책처럼 말풍선과 액션을 넣었는데, 이전의 만평에는 그런 표현이 드물었다고 한다. '어린이 만화적' 발상은 어디에서 비롯되었을까. |
나를 키운 건 8할이 만화 |
"우리 집이 만화 가게였어요. 당연히 만화와 살았지. 어릴 때부터 만화 보고 그림 그리는 것이 내 놀이였어. 만화가 나를 키웠지. 그림 그리는 것 말고는 다른 길을 생각한 적이 없어. 사실 만화를 그리고 싶었지만, 당시에는 만화를 제대로 배울 곳이 없었거든.배곯을까 봐 걱정도 됐고.(웃음)" 미대에 진학해 '예술' 을 전공했지만 그는 만화와 예술을 구분하지 않는다. "모두 문학을 예술로 생각하잖아. 문학의 한 장르인 소설도 처음에는 저잣거리의 이야기에서 출발한 거야. 만화도 마찬가지지. 그 속에 다양한 삶을 담고, 가치 있는 것을 담고, 창조하고 소통하는 기능이 있어. 뭐든 예술로 승화할 수 있는 콘텐츠를 깊게 가진다면 그것이 예술이 되는 거야."
"만화는 부모고 자식이며, 나 자신이기도 하다"고 말하는 박 화백의 만화 사랑은 끝이 없다. 그는 2011년부터 부천국제만화축제의 운영위원장을 맡고 있는, 그가 사랑하는 만화를 널리 알리고 만화가 할 수 있는 역할을 넓히고 싶은 마음으로 애정을 쏟는다. 이번 축제기간동안에는 세계 어린이 만화가 대회를 전시하기도 했다. '수호자' 를 주제로 주변의 실존 인물과 사물을 탐구해 현시대에 필요한 캐릭터를 설정하고 창작 만화를 만들어 이번 축제의 주제인 '만화, 시대의 울림' 에 아이들을 동참시켰다. 세계가 우정과 소통으로 하나 될 수 있음을 아이들에게 느끼게 해주고 싶었기 때문.
박 화백은 만화에 대한 인식이 달라지고, 만화가를 꿈꾸는 아이들이 많아진 것이 기쁘다. 하지만 그림 그리는 기술보다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능력을 키우는 것이 중요하다고 조언한다. 이야기만 재미있다면 '졸라맨' 밖에 못 그리는 사람도 훌륭한 만화가가 될 수 있다는 것. 다만 머리에 떠오르는 것들을 글로 쓰거나 그림으로 남겨두는 습관은 꼭 필요하다고. |
아이들, 경탄하고 믿어야 할 존재 |
만화책을 모으고, 웹툰을 정기 구독하며, 애니메이션 영화도 일일이 챙겨 보는 아들을 둔 리포터는 만화에 빠져 사는 아들이 걱정이다. 기왕 보는 만화, 좋은 만화를 골라주고 싶어 물었다. "아이들이 읽거나 보고 나서 좋으면 좋은 만화야"라는 박 화백의 답이 명쾌하다. 아이들의 선택과 판단을 믿으라는 것. 많은 부모들이 아이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랑이라고 생각하지만, 사랑만으로 부족하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아이를 아이로만 보지 말아야 해. 인정하고 경탄해야 할 존재로 여기고, 믿음직한 파트너로 여겨야지. 아이들은 모든 것을 할 수 있거든."
그의 단언은 몇 년간 고등학교에서 아이들에게 미술을 가르친 경험에서 출발한다. 단순하게 그림 그리는 수업이 아니라 다양한 방식으로 아이들과 함께 여러 가지 도전을 했다. 아이들에게 공동 작업 과제와 마감 시한을 주면, 훌륭하게 일을 마무리해 나가더라는 것. 계획을 세우고 실행하는 과정에서 여러 가지 갈등을 겪고 극복해가며 아이들은 문제 해결 능력은 물론, 소통의 방법까지 스스로 터득했다. "선생님, 이제 뭐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라는 아이들의 고백은 그가 교단에 있을 때 받은 가장 큰 선물이다.
아이들의 잠재력과 능력을 잘 아는 박 화백은 창의력, 책임감, 배려심 같은 인성적 덕목이 인정받기 힘든, 오로지 학습 능력으로 아이들을 평가하는 현실이 아쉽다. 어른들의 잣대로 만든 '평가' 때문에 교육의 주체가 되어야 할 아이들은 저만큼 밀려나 있다는 것. 하지만 교육이 하루아침에 혹은 누군가 주도해서 바뀔 수 없기에 장기적 연구가 필요하고, 모든 평가의 기준이 되는 대학 입시의 구조에 대한 국민적인 논의가 꼭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누군가와 이렇게 오래 눈을 맞춘 것도 참 오랜만의 일이었다. '참 맑은 눈이다.' 인터뷰 내내 그의 눈을 보며 떠오른 생각. 문득 깨달았다. 사람, 세상과 눈을 맞추는 것은 그의 오랜 습관임을.
미즈내일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