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9-1989
부엌 테이블에서 태어난 소설
순서대로 하면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가 내가 제일 처음 쓴 소설이다. 이 작품으로 1979년 '群像'신인상을 받아 일단은 작가로서 데뷔했다.
이 소설을 쓰기 시작한 계기는 실로 간단하다. 갑자기 무언가가 쓰고 싶어졌다. 그것뿐이다. 정말 불현듯 쓰고 싶어져 키노쿠니야에 가서 만년필과 원고용지를 사왔다.
대학을 졸업한 이후 줄곧 일에 쫓기는 나날이어서, 글자라곤 세금신고서류나 가끔 쓴 편지를 제외하면 거의 써본 일이 없었다. 거드름을 피우는 게 아니고 정말 그랬다.
나는 옛날부터 작가는 아니더라도 글쓰는 일을 직업으로 삼고 싶어했다. 그러나 학생 시절에 시나리오를 쓰려고 시도했다가(대학을 영화연극과에 다녔으므로), 도무지 순조롭게 써지지 않아 '나는 그런 능력을 갖추지 못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절필을 했다고 할만큼 심각한 것은 아니고 별수 없지 않은가 하고 포기한 것이다. 그 후론 나름대로 무리 없이 생을 보냈다. 일도 순조로워 자신에게 만년필이 없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살았을 정도다.
그런데 스물 아홉 살의 어느 봄날, 진구구장의 외야석에서 문득 이렇게 생각한 것이다. 재능이나 능력이 있든 없든 자신을 위해 무언가 쓰고 싶다고.
그때는 옛날에 글을 쓰려면 느껴지던 부담감 같은 것은 전혀 없었다. 싸구려 만년필과 원고용지를 책상 위에 가지런히 놓아둔 것만으로도 기분이 착 가라앉았을 정도였다.
1978년은 야쿠르트 스왈로즈가 우승한 해이다. 나는 봄에 쓰기 시작해서 우승이 결정 나기 전후에 완성했다. 야쿠르트는 29년만의 첫 우승이었고 나는 스물 아홉 살이었다. 야구선수들은 저마다 모두 열심이었다. 나도 열심히 해야지 하고 책상을 향했던 기억이 난다. 매일 밤늦게까지 일하고 한밤중에 부엌 테이블에서 썼다. 매일 조금씩 단락을 지어 '오늘은 여기까지',그런 식으로 써나갔다. 문장이나 각 장이 짧은 것도 그 탓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群像'지의 신인상에 응모했다. '群像'지를 선택한 것은 원고매수가 비슷했다는 까닭도 있고, 이 잡지에서는 뭐가 새로운 것을 평가하는 부분도 있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느낌이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문예지에 관한 것은 전혀 모르는 상태였는데 결과적으로 옳았다. 다른 잡지였더라면 안 됐을 거라는 얘기를 그 무렵 곧잘 들었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행운아다. 만약 이 작품으로 상을 받지 못했더라면 나는 영원히 글을 쓰지 않았을지도 모르고, 또 썼다 하더라도 지금과는 상당히 다른 과정을 밟았을 테니까. 하지만 물론 그 당시의 문단이 이 소설을 전면적으로 따뜻하게 맞아준 것은 아니다. 어떤 사람은 이 소설의 양식을 지지, 격려해주었지만 이런 것은 소설도 아니라는 분위기도 농후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전체적으로 긍정적인 평가는 아니었다. 하긴 지금 읽어보면 과연 이 소설에는 여러 가지 문제점이 있다. 그 당시에도 그런 생각은 했었다. 내가 쓰고자 하는 것의 1/3도 채 못 쓰지 않았는가, 이 다음에는 보다 잘 쓸 수 있겠지 하고 생각했다.
그러나, 변명은 하고 싶지 않지만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는 아까도 말했듯 아무 생각 없이 쓴 글이다. 그것이 이 소설의 문제점이기도 하고 좋은 점이기도 하다.
이 작품은 소설적 테제로서 성립해 있다. 하지만 소설로서는 약간 불충분하다. 그것은 동전의 안과 밖이다. 어느 쪽이든 한쪽만 취급하여서는 불충분하다. 당시 이 소설을 새로운 테제로서 평가한 비평도 있었고 소설로서의 불충분함을 힐난한 비평도 있었다. 내 생각을 말하면 그 어느 쪽도 비평으로서는 부정확하다고 생각한다. 이 소설은 테제인 까닭에 불충분하고 불충분한 까닭에 테제일 수 있는 것이다. 한쪽을 제거하면 나머지 한쪽은 성립하지 않는다. 물론 당시 나는 테제를 쓸 생각 따위는 없었다. 자신의 기분을 그저 정직하게 문장으로 표현하고 싶었을 따름이다. 그러나 작업 진행 중에 나는 정직하게 쓰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그럴수록 거기에 담긴 생각은 부정확해졌다. 요컨대 나는 언어의 2차적 언어성에 의존하여 글을 썼던 것이다. 그것은 내가 원하는 방식이 아니었다. '타인과 다른 뭔가를 얘기하고 싶어서'라고 피츠제럴드는 어느 편지 안에 썼다. '타인과 다른 말로 얘기하라.' 나는 이 소설을 쓰면서 곧잘 그 말을 떠올렸다. 그렇다. 나는 타인이 얘기한 것과는 다른 뭔가를 얘기하고 싶었다. 아무도 사용하지 않은 말로 좀 더 심플하게 쓰자고 생각했다. 지금까지 아무도 쓰지 않았을 만큼 심플하게. 심플한 말을 반복하여 심플한 문장을 만들고, 심플한 문장을 반복하여 결과적으로는 심플하지 않은 현실을 그리는 것이다.(나중에 레이먼드 카버를 번역하면서 그가 하고자 하는 것도 비슷한 시도가 아닐까 하는 느낌을 받았다.) 그렇게 문장을 심플하게 쓰기 위하여 나는 처음 몇 페이지를 실험적으로 영어로 써보았다. 물론 나의 영작문 실력은 고등학생 정도의 치졸한 것이다. 그러나 쓰려고 하면 정말 기초적인 심플한 어휘만으로도 문장을 쓸 수 있다는 발견은 내게는 커다란 수확이었다. 그것은 분명 하나의 테제이다. 당시에는 그것이 테제가 될 수 있으리란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다. 그렇지, 이렇게 써나가면 되겠구나, 하고 생각했을 뿐이다. 그것은 내게는 아주 신선한 발견이었다.
그런 식으로 이 소설에는 콜럼버스의 달걀이 몇 개 숨겨져 있다. 나중에 다시 읽어보니(괴로운 일이지만) 그것은 내게 있어서도 콜럼버스의 달걀이었고 몇몇 타인에게도 콜럼버스의 달걀이었다. 내 주변에 있는 많은 사람은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가 출판된 후 이렇게 말했다. "그게 소설이라면 나도 그 정도는 쓸 수 있다"고. 맞는 얘기다. 하지만 그렇게 얘기한 사람들 중 어느 누구도 소설을 쓰지 않았다. 써야 할 필연성이 없어서였을 것이다.
필연성이 없으면 아무도 소설을 쓰지 않는다. 결국 내 안에 소설을 써야 할 만한 필연성이 존재했던 것이리라.
'바람의 노래를 들어가'가 최종심사에 올라갔다는 전화가 걸려온 날의 일을 지금도 또렷이 기억하고 있다. 나는 서른이 되어 있었다. 어이가 없고 기뻤다. 나는 작가가 되어 여러 가지 기쁨을 경험했지만 그때처럼 기뻤던 적은 한번도 없다. 신인상을 받았을 때도 그처럼 기쁘지는 않았다. 전화를 끊고 아내와 함께 산책하러 나갔다. 센다가야 국민하교 앞에서 날개에 상처를 입어 날지 못하는 비둘기를 발견했다. 나는 그 비둘기를 두 손으로 감싸들고 죽 걸어 파출소에 신고했다. 비둘기는 내내 손안에서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그 미미한 생명의 증거와 온기를 아직도 선명하게 떠올릴 수 있다 그것은 풋풋한 온기와 귀중한 생명의 향기가 사방을 채우고 잇는 봄날의 아침이었다. 신인상을 받게 되겠지, 싶은 아무런 근거도 없는 예감이 들었다.
'1973년의 핀 볼'은 그 다음해에 쓴 장편소설이다. 이 작품은 세 번째 장편인 '양을 둘러싼 모험' 사이에 끼어 좀 존재감이 희박한 듯한 느낌이지만 그 이후 나의 소설에서 전개되는 다양한 요소가 처음으로 등장하는, 내게 있어서는 중요한 작품이다. 전체적으로는 습작의 영역을 벗어나지 못하지만 자신의 생각을 한 대상에 집중적으로 표현할 수가 있었다. 바로 환상의 핀 볼 머신이다. 주인공인 '나'는 그 기계를 찾아 여행을 한다. 이런 플롯이랄까 구조가 내 마음과 잘 융합이 되었다. 나는 이 작품 역시 일하며 썼다.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와 마찬가지로 부엌 테이블에서, 쓰고 싶어서 견딜 수가 없었고, 첫 작품 때와는 달리 힘들이지 않고, 술술 써나갔다. 여기에는 테제가 풀이되어 있다. 그것은 이미 체제일 필요가 없어졌으니까. 체제가 엷어져감에 따라 자립적인 스토리가 내 머리를 지배하게 되었다. 소설이 자립하여 스스로 걸어가기 시작한 것이다. 어떻게 하면 될지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물론 알고 있어도 쓸 수 없는 경우가 많았지만 이대로 계속하면 된다는 낙관의 도움을 받아 이 소설을 완성시켰다. 이 소설차제의 힘이 딱딱한 껍질을 벗고 얼굴을 내밀기 시작했다. 그 이후 나의 생활상은 싹 바뀌어 풀타임 전업작가로서의 인생이 시작된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처음의 이 두 작품에 개인적인 애착을 갖고 있다. 전집에 수록함에 있어 많은 단편을 손질했지만 이 두 작품에는 전혀 손을 대지 않았다. 손을 대기 시작하면 끝이 없고 구태여 손을 대고 싶지 않다는 기분이 강했다. 이 두 작품은 어떤 류의 불완전함과 표리일체를 이루며 성립되어 있으므로. 이것이 나였고 시간이 흘러도 결국 이것이 나인 것이다.
새로운 출발
'양을 둘러싼 모험'은 내게는 여러 가지 의미에서 기념해야 할 작품이다. 우선 소설 자체의 스타일이 지금까지의 작품과는 크게 달라졌다. 스토리 텔링의 요소가 한결 강해졌고 그 까닭에 길이도 상당히 길어졌다. 이른바 이 소설은 새로운 경험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개인적인 얘기이나 '양을 둘러싼 모험'은 내가 전업작가로 나선 후 처음으로 쓴 작품이다.
나는 가게(재즈를 틀어놓는 찻집 같기도 한, 한 달에 몇 번은 라이브 공연도 했다. 스스로 말하기는 좀 뭣하지만 꽤 괜찮은 가게였다)를 경영하면서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와 '1973년의 핀 볼'이란 두 장편과 장차 '중국행 슬로 보트'에 수록될 단편을 몇 편 쓰고, 스코트 피츠제럴드 단편집 '마이 로스트 시티'를 번역 출간했는데, 나로선 이 정도가 양다리 걸치기의 한계였다. 무엇보다도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일의 양이 이미 한밤중의 부엌 테이블에서는 수요를 다 조달할 수 없는 영역에 돌입해 있었다. 그리고 잡일에 허둥지둥 시달리는 생활 속에서는 집필에 집중하기가 점점 곤란해졌다. 더구나 일의 성격상 매일 불특정 다수와 얼굴을 마주해야만 했다. 나처럼 사교성이 없는 인간에게 그것은 상당히 성가시고 힘든 일이었다.(무명 시절에는 가만히 일만 하면 되었는데)누군가에게 가게를 맡기고 자신은 여유롭게 집필에 전념한다는 방법도 있었지만 내 성격에 안 맞았다. 그래서 단호하게 가게를 팔아 치바의 한적한 시골로 잠적하여 글쓰기에 전념하기로 했다. 그래서 뜻대로 안 되면 그때 또 가게를 시작하면 되지 하고 생각했다. 어디에서든 먹고사는 정도쯤 자신이 있었다. 주변 사람들은 전업작가가 되면 생활 부담이 크니까 지금 이대로라도 상관없지 않느냐고 했지만 나는 좀더 좋은 환경에서 자신의 능력을 시험해보고 싶은 기분이 강했다. 그리고 지금 되새겨보면 좀 이상한 얘기지만 자신의 재능이 어느 정도일까 하는 의문은 그 당시의 내 머리에는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 치바로 이사가고 부터는 모든 것이 싹 바뀌었다. 매일의 생활 시간대가 가장 크게 변했다. 가게를 그만둔 덕분에 밤에는 10시에 자고 아침에는 6시에 일어났다. 그 무렵부터 매일 아침 러닝을 하게 되었고 그 이듬해에는 풀 마라톤을 뛸 수 있게 되었다. 밤에 술을 마시러 밖으로 나가는 일도 거의 없어졌고, 곧잘 산책을 했고 마당에는 가지와 토마토를 심고, 그리고 클래식 음악을 열심히 듣게 되었다. 머지않아 담배도 끊었다. 사람도 별로 안 만나게 되었다. 외국여행을 하게 되었다. 소위 생활패턴 갈이를 한 것이다. 나이를 생각하면 서른 두살이었으므로 마침 적절한 때였다. 도심에 있으면 여러 가지로 화려한 일은 많지만 나는 애당초 그런데는 별 관심이 없었던 것 같다. 처음에는 호화찬란하게 보이던 매스컴계도 몇 년 가까이서 보고 있으면 모순투성이라는 것이 훤히 드러난다. 물론 개중에는 훌륭한 인간도 훌륭한 행위도 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내게는 실망스러운 일이 더 많았다. 떠날 때라고 생각했다.
'양을 둘러싼 모험'은 겨울에 썼다. 늦가을에 쓰기 시작하여 봄이 시작될 무렵 완성했다. 신기하게도 '양을 둘러싼 모험'부터 '댄스 댄스 댄스'에 이르는 네 편의 장편은 모두 같은 계절에 씌어졌다. 그저 우연한 일치일지도 모르겠으나, 한 겨울 동안 꼼짝 않고 방안에 틀어박혀 소설을 쓰는 것이 내 성격에 맞는 것이지도 모르겠다. 늘 '이 겨울을 무사히 넘기면 봄이 온다'라고 생각하며 소설을 쓴 것 같다.
가을에 홋카이도로 양의 생태와 역사 등등을 조사하려 갔다. 나는 소설을 쓰기 위한 취재는 거의 안 하는데. 이때만은 예외였다. 삿포로 시청에 가서 양의 사육에 관한 연구를 하시는 분께 얘기를 듣기도 했다. '어째서 양이냐'라는 질문을 흔히 받는데, 그에 대한 대답은 분명히 있지만 특별한 의미는 없으므로 생략한다. 다만 우연한 계기에 양이란 컨셉트가 내 머리에 입력되었다. 그리고 이리저리 생각하는 사이에 "그렇지 양에 관한 소설을 쓰자"고 마음먹은 것이다. 그리고 곧장 취재여행을 떠났다. 그 시점에서 제목만은 '양을 둘러싼 모험'이라고 이미 정해져있었으나 그 외에는 줄거리도 아무 것도 정해져 있지 않았다.
하지만 도쿄로 돌아와 양과는 아무 관계도 없는 이야기를 쉬엄쉬엄 쓰고 있는 중에 불가사의하게도 전체적인 공기가 양 방향으로 기울어감을 느낄 수 있었다. 양이 소설 자체를 끌어 잡아당기고 있는 듯한 묘한 리얼리티가 있었다. 그리하여 이윽고 나와는 무관하게 전체 스토리가 저 홀로 걷기 시작했다. 열중하여 쓰다보니1300매라는 지금까지 없이 긴 소설이 되었다. 이 소설은 내게 상당한 집중력을 요구했다. 한번 거기에 발을 들여놓으면 여간해서는 자신을 그곳으로부터 해방시킬 수가 없었다. 가계를 계속했더라면 결코 쓸 수 없었으리라. 그때 처음으로 소설이란 단연 폭력적인 것이라고 생각했다. 작가란 소설을 때려눕혀 멋대로 주무르던가 아니면 짓밟히는 길밖에 없다고. 거기엔 융화나 협조의 정신은 없다. 백이냐 흑이냐 지느냐 이기느냐 밖에 없다. 나의 이런 말투가 과장스럽게 들릴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정말 그렇게 생각했다. 그때까지의 두 작품은 다소의 차는 있지만 즐기면서 썼다. 물론 힘든 때도 있었지만 게임 같은 것이었다. 마음에 드는 단상을 이어 붙여 머릿속으로 이미지를 제멋대로 부풀려 그것을 문장으로 바꾸었다. 그런데 '양을 둘러싼 모험'은 전혀 달랐다. 이 작품은 물론 내가 써낸 것이지만 동시에 나란 존재와 격렬하게 대치하는 창끝을 지니고 있었다. 그것은 내게 어떤 류의 변혁을 요구했다. 또 하나, 내가 이 작품을 쓸 수 있었던 것은 1년 전쯤에 무라카미 류 씨가 '코인 로커베이비스'란 박력 있는 작품을 쓴 덕분이라고도 할 수 있다. 나는 그 소설에 내재하는 장편소설적 에너지--그것은 다른 어떤 것으로도 대체될 수 없는 것이다--에 동요했고, 그 힘이 내 창작에 자극을 주었다. 동시대의 뛰어난 러너가 길동무로서 혹은 라이벌로서 혹은 목표로서(혹은 그 전부를 혼합한 무엇으로서)존재한다는 것은 창작을 하는 인간에게는 귀중한 재산이다. '양을 둘러싼 모험'을 씀에는 그런 자극이 제법 상당한 추진 역할을 했다.
이 작품은 '郡像'지에 전작 장편 형식으로 발표되었는데, 쓰는 도중에 담당 편집자도 바뀌고 편집부의 방침도 크게 바뀌어--세월이 많이 흘렀으니 정직하게 말해도 좋으리라--미운 오리새끼를 낳은 어미오리 같은 기분이었다. 물론 잡지에는 나름의 색깔과 방침이 있어 그 자제는 전혀 개의치 않으나 나는 잡지는 단편이나 에세이는 몰라도 시간이 많이 걸리는 장편소설에는 걸맞지 않는 그릇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장편소설을 쓰는 일은 정말 섬세한 작업이고 왕왕 뼈를 깎는 고독한집중력을 요구한다. 그리고 자칫 사소한 일로도 힘의 균형이 깨어질 수 잇는 것이다.
그런 탓도 있어 이후 장편소설은 전부 전작 장편소설이란 시스템을 취하게 되었다. 사람들에게는 저마다 다양한 방식이 있겠지만 내게는 성격상 전작 형식이 어울린다고 생각한다. 다른 일은 전혀 하지 않고 몇 달 동안 집중적으로 완성시킨 후 천천히 시간을 두고 퇴고하는 방식이라서 연재소설은 도무지 쓸 수가 없고 그렇다고 잡지에 일거에 게재하는 형식은 두 번 품이 드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런 자신에게 가장 적합한 페이스를 포착한 것도 이 소설을 통해서였다.
'양을 둘러싼 모험'을 다 쓰고서 가장 기뻤던 것은 자신이 앞으로 소설가로서 해나갈 수 있으리란 자신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머리를 빙빙 돌려 얻은 치가 아니고, 양손으로 확실하게 느낄 수 있는 실체적인 반응이었다. 설사 모든 신문 잡지들로부터 극구 칭찬을 받았다 해도 이런 반응이 없으면 작가는 평생을 불안에 떨며 살아야 할 것이고, 설사 모두에게 치욕스러운 말로 매도당했다 해도 이런 반응을 손에 쥐고 있으면 그 어떤 일도 겁나지 않는다. 이런 느낌은 무언가를 창조해내는 사람만이 알 수 있는 감촉이 아닌가 생각한다. '양을 둘러싼 모험'에는 그런 반응이 있었다. '양을 둘러싼 모험'이 출판된 해, 반 년 동안에 팔린 부스는 몇십만 부였다. 작금의 블록버스터(초베스트셀러)현상으로 보면 별로 많은 수치가 아닐지 모르겠으나, 문예지의 판매고가 한심할 정도로 부진했던 당시(80년대 전반은 내내 그랬다)에는 상당한 숫자였다. 독자의 반응도 있었고 상도 받았고, 생활의 기반도 어느 정도 잡혔고 전업작가로서는 일단 만족할 만한 출범이었다.
하긴 이 소설도 지금 돌이켜보면 풋내가 난다. 불필요한 부분도 눈에 띄고, 여긴 좀더 썼으면 좋았을 텐데 하고 느끼는 부분도 많다. 그러나 이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사람은 그 때문에 나이를 먹는 것이니까. 처음부터 모든 것을 빈틈없이 알고 있다면 아무도 소설을 쓰지 않을 것이다. 그리하여 '양을 둘러싼 모험'은 영어로 번역된 나의 첫소설이 되었다.(1989).
그런 의미에서도 이 소설은 내게 큰 의미를 지닌다. 이 소설을 읽은 미국인 대부분은 "이건 순수한 정치적 소설이다"라고 말했다. 또한 양의 의미를 제각각 해석해주었다. 그들 대부분은 양을 신화적이며 토착적인 표상으로 포착하여, 그러한 역사적 의지가 포괄적이고 전체적인 세계와 관계할 때 생겨나는 '발열'에 품는 것 같은 흥미를 보여주었다. 딱히 내가 그런 관점에 흥미를 갖고 이 소설을 쓴 것은 아니지만 해석의 한 방법으로서는 상당히 재미있게 생각한다.
단편소설에서의 시도
[중국행 슬로보트]
단편집 [중국행 슬로보트]에 수록된 작품은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와 [1973년 핀 볼]이란 중편에 가까운 장편 다음으로 쓴 것들이다. 단편소설을 집중적으로 써보고 싶어진 것이다. 발표는 주로 문예지를 통하여 했다. 그러나 실은 그 당시의 기억이 선명치 못하여 나는 이 작품집에 수록된 단편을 전부 쓴 후에 [양을 둘러싼 모험]에 매달렸다고 생각했는데 연대를 보면 [캥거루 통신]과 [오후의 마지막잔디밭] 사이에 [양을 둘러싼 모험]이 씌어졌다. [캥거루 통신]이 내 부업작가 시대의 마지막 작품이고 [양을 둘러싼 모험 이후가 전업작가 시대가 된다. 기억이란, 특히 나의 기억은 상대할만한 것이 못 된다.
이 작품집이 출간된 후 거의 십 년 가까이 다시 읽어보지 않았는데 오랜만에 읽어보니, 한 작품 한 작품을 썼을 때의 기분이나 편집자와의 대화가 풍경적으로 그립게 떠오른다.
지금 전집에 재 수록함에 있어 몇몇 단편에 대폭 손질을 가했다. 현 시점에서 껄끄러운 부분이 많았기 때문이다. 나는 원칙상 한번 발표한 작품에 대해서는 손질을 하지 않기로 하고 있다. 손질을 가하기 시작하면 끝이 없고 또 작품이란 다소 결점이 있다 해도(또는 작가가 마음에 들어하지 않는다 해도) 정점관측적(定點觀測的)인 의미를 지니는 자료로서 오리지널한 형태로 반드시 남겨 두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전집 형식의 출판이라 단행본인 오리지널 버전과는 다른 하나의 선택지를 제공할 수 있는 더없이 좋은 기회였으므로 단호하게 손질을 하기로 했다. 당시 표현하고자 뜻하고서 충분히 표현하지 못했던 것을 다소나마 명확히 하자는 기본방침하에 수정했다. 요컨대 지금 시점에서 과서의 자신에게 손을 빌려준 것이다. 그러나 어느 정도 문제가 있어도 이 부분은 덧칠을 하지 않고 그냥 놔두는 편이 좋겠다 싶은 부분도 많았다. 손질을 가해 명확히 하는 것보다는 불투명한 채로 생각을 전하는 편이 나을 거란 얘기다.
미진하고 불투명한 채로 전할 수 밖에 없는 것이 의외로 꽤 많다. 불필요한 부분은 깎아내고 모자라는 부분에는 살을 붙였다. 보수공사 후에, 나라는 인간 즉 무라카미 하루키라는 작가의 전모는 이 작품집 속에 이미 드러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과연 그 후 나는 나 나름으로 사물을 다면적으로 관찰하여 문장을 쓸 수 있게 되었고, 자신이 하고 싶어하는 일도 명료하게 알 수 있게 되었고, 작가로서 자신의 역량이 현 단계에서 어느 정도인가 하는 것도 점차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내 세계의 존재양식은 미완성이고 어눌하고 균형이 덜 잡힌 나름으로 이 처녀 단편집에 대충 제시되어 있다고 생각된다. 스타일이며 모티프, 어법 등의 원형이 일단은 전부 제기되어 있다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중국행 슬로보트] 이 작품은 먼저 제목부터 정했다. 내 단편소설은 대부분 제목을 정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내용은 정하지 않고 제목을 우선 생각한다. 그리고 첫장면을 쓴다. 그리고서야 간신히 스토리가 전개되는 그런 방식이다. 전부가 그렇다는 것은 아니고 또 그런 방식이 제대로 가능하지 못하여 도중에 포기하는 일도 있지만 대체로 내 성격에 맞는 방식이라 생각한다. 소위 제재나 테마라는 고정적인 틀에 얽매이지 않고 글을 써나가기 때문이다. 머리에 떠오르는 이미지를 문장으로 더듬어 추구해 가는 사이에 줄거리가 자발적으로 점점 퍼져나간다. 써나가는 사이에 자신도 깨닫지 못하고 있던 무언가가 그 모습을 보인다. 그렇게 자연방출적인 작업이 내게는 상당히 스릴 있고 흥미롭다.
이 작품은 내가 쓴 기념할 만한 첫 단편이고 그 타이틀 선행 방식의 선구적인 작품이다. 물론 예의 소니 롤링스의 연주로 유명한 [온 어 슬로 보트 투 차이나]에서 제목을 땄다. 나는 이 곡과 연주를 무척 좋아한다. '중국행 슬로 보트'란 말로부터 어떤 소설을 쓸 수 있을까, 내 자신도 기대되었다. 오랜만에 읽어보니 꽤 거슬리는 부분이 많았다. 한편 상당히 분투했구나 싶은 느낌도 든다. 부족한 나름대로 야생마를 길들이듯, 마지막까지 낙마하지 않고 소설에 매달린 흔적이 역력하다. 지금 생각하면 꽤나 골치 아픈 얘기가 전개되고 있는데 당시에는 뭐가 어렵고 뭐가 어렵지 않은 것인지 잘 몰랐으므로 전력을 다해 썼다. 전집 수록에 임하여 중반부 이후에 상당한 손질을 하였다. 가능한 한 오리지널의 분위기를 해지치 않도록 교통정리를 할 작정이었는데 역시 얼마간 빛깔이 변했는지도 모르겠다.
[가난한 숙모 이야기] 두 번째 단편소설. 이 작품도 제목부터 시작했다. 더구나 글쓰기를 제목으로부터 시작한다는 집필작업 자체를 모티프로 한 얘기다. [중국행슬로 보트]를 쓴 경험을 바탕으로 하여 소설을 쓰는 행위를 문장으로 검증해보고 싶었다는 의미도 있다. 소설 자체도 이중구조를 지니고 있다. 즉 [가난한 숙모 이야기]라는 소설이면서 동시에 [가난한 숙모 이야기]를 만드는 과정인 셈이다. 나로서는 의욕적으로 시작한 작품이었지만 신출내기 작가가 감당하기 벅찰 만큼 어려운 전개의 소설이다. 어쩌다가 또 [가난한 숙모 이야기]라는 기묘한 제목의 소설을 쓰려고 했는지 생각도 나지 않는다. 아마 그것은 어느 날 오후에 투명한 탄환처럼 내게 날아온 것이리라.
[뉴욕 탄광의 비극] 이것도 제목으로 시작된 작품. 물론 비지스의 초기 히트 송 타이틀이다. 곡 자체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창간된 지 얼마 안 된 [블루터스]를 위해 썼다. 담당 편집자는 이 작품의 게재를 썩 달가워하지 않았다. '비지스는 세련되지 못하다'는 게 그 이유였다고 기억한다. 나는 이 곡의 가사에 매료되어 아무튼 '뉴욕 탄광의 비극'이란 제목으로 소설을 쓰고 싶었던 것이다. 비지스가 부르든 베이 시티 롤러스가 부르든 내게는 관계없다. 사람은 세련돼지기 위해 소설을 쓰는 것은 아니니까. 전체적으로 가지런히 가지를 치는 정도로 손질을 하였다.
[캥거루 통신] 나 자신은 카세트 테이프 소설로 쓴 이 작품을 꽤 좋아한다. 마이크를 향하여 주절주절 떠드는 느낌으로 문장을 쓰고 싶었다. '신초(新潮)'에 실었을 때 삽화로 카세트 라벨을 넣었다. 문예지란 여러 가지로 골치 아픈 세계지만 하고자 하면 하고픈 일을 또한 여러 가지로 할 수 있는 세계이기도 하다. '캥거루통신'이란 제목으로 어떤 얘기를 쓸 수 있을까 하고 흥미로워했는데 설마 이렇게 기묘하게 굴절된 얘기가 되리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뜻하지 않은 전개의 묘미도 있지만. 훨씬 온화한 얘기가 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쓰기 시작했는데......화자가 백화점의 불평불만 접수 담당이라는 설정--이것은 내 자신이 백화점에 불평불만을 호소하는 작업에 열중한 시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결코 악의로 한 것은 아니었다. 백화점이라는 기구 자체에 관심이 있었고, 실제로 그 무렵 불만을 터뜨리고 싶은 일들이 우연히 잇달았다. 따라서 나는 손님들의 불만에 백화점 측이 어떤 식으로 대응하는지에 대해 비교적 상세하게 알고 있는 편이다. 소설과는 직접 관계없지만 그 처리에는 백화점에 따라 상당한 차이가 있다. 이 작품도 가다듬는 정도로 손질을 하였다.
[오후의 마지막 잔디밭] '다카라지마'(옛날의 '다카라지마'는 지금과는 전혀 다른 성격의 잡지였다)를 위해 쓴 작품. 발표 당시 상당한 반응이 있었고 개인적으로 이 작품을 좋아한다는 사람도 많다. [반딧불]에서 [노르웨이의 숲]이란 소설이 잉태되었듯, 이 작품으로 장편을 써주었으면 하다는 사람도 많았지만 무리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반딧불]에는 얘기를 확대시킬만한 여지가 있었지만 이 작품에는 그것이 없다. 이 작품의 세계는 어떤 한 의미로 완성, 집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설령 기술적으로는 미숙하다 할지라도 분위기는 완성되어 있는 것이다. 이 소설은 정원 잔디를 깎으면서, 잔디 깎는 얘기를 쓰자는 발상으로 시작되었다. 나로서는 줄거리보다 오히려 잔디를 깎는 그 자체를 그리고 싶었다. 지금 다시 읽어보니 [양을 둘러싼 모험]을 쓴 후라 어깨에 힘이 쭉 빠져 있는 듯한 느낌이다. 그리고 장편을 쓴 영향인지 앞의 세 작품에 비해 리얼리즘적 흐름이 강하다.
[땅속 그녀의 작은 개] 이 작품은 몇 가지 정경으로 시작되었다. 제목은 나중에 붙였다. 우선 호텔의 정경을 그리고 싶었다. 비내리는 비수기의 리조트호텔, 그리고 개의 주검을 뜰에 묻는 정경, 마지막으로 한밤중에 점 비슷한 것을 치는 정경, 세 가지 다 당시의 내 자신과 관계있는 정경이다. 나는 당시 이 소설에서처럼 점에 열심이었다. 밤중에 신경을 집중하여 상대방을 추적하다보면 여러 가지 점괘가 술술 나왔다. 전혀 모르는 상대인데 스스로도 깜짝 놀랄 만큼 잘 맞았다. 그러나 한번하고 나면 힘이 쭉 빠져 며칠 동안은 머리가 멍했다. 끝나고 한동안은 몸이 부들부들 떨릴 정도였다. 그래서 두 번 다시 그런 일은 하지 않기로 했다. 그 에너지를 소설에 돌리기로 한 것이다.
내 자신은 이 작품이 도무지 마음에 들지 않아 별로 생각하고 싶지도 않지만 이번에 다시 읽어보니 이런 분위기의 소설이 하나쯤 있어도 상관없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시드니의 그린 스트리트] 이 작품도 제목으로 시작되었다. 시드니 그린 스트리트란 말한 것도 없이 [마루타의 매]에 나온 명우의 이름이다. 나는 [마루타의 매]를 본 후 언젠가는 이 제목으로 소설을 쓰고 싶다고 생각했다. 이 작품은 [우미(海)]에서 어린이를 위하여 중간본으로 낸 소설집에 실렸다.
[반딧불. 헛간을 태우다. 그 밖의 단편]
나로서는 꽤 멋을 부려 이런 제목을 붙였는데, '인간, 개를 물다'라는 문맥처럼 반딧불이 헛간을 태우는 얘기라고 착각한 사람이 많았던 모양이다. 글자수가 많은 제목이라 단행본을 만들 때 안자이 미즈마루 씨에게 그림만으로 표지를 만들어줄 수 있겠느냐고 부탁했다. 이것은 [양을 둘러싼 모험](1982)과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1985) 사이의 공백기간에 쓴 단편을 모은 작품집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이 앞에 [캥거루 날씨]라는 비교적 가벼운 소품을 모은 작품집을 냈으므로 [양을 둘러싼 모험]과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사이에 세 권의 단편집을 낸 셈이다. 단편소설이라는 형식을 끈질기게 추구하여 어떻게든 자신의 것으로 하려는 의도가 당연히 있었다. 그러나 결국 나는 이들 단편을 쓰면서 다음으로 쓸 장편에 대해 이것저것 모색하고 있었다고 생각한다. 나는 [양을 둘러싼 모험]을 끝으로 당분간 '나와 쥐' 시리즈와는 결별하고 싶었으나, 그렇다고 새로이 쓸 테마가 잡혀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런 의미에서 단편이란 포맷은 새로운 가능성을 다양하게 점검하고 시도해보기 위한 이른바 테스트 코스 같은 장이었다.
물론 단편소설이란 아무리 재주를 부려도 장편이 될 수 없는 소재를 유효하게 사용하기 위한, 또는 짧은 형식으로밖에 그릴 수 없는 것을 표현하기 위한 용기이다. 그래서 숨을 헐떡이고 장편을 쓰고 나면 한동안은 느긋하게 단편이 쓰고싶어진다. 장편에서 쓸 수 없었던 것을 단편에 쓰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휴지기에도 나는 늘 자신의 근육이 어떤 식으로 움직이는가를 체크한다. 자신이 갖고있는 문장적 근육을 이쪽 저쪽 세세하게 나눠 움직여보며 그 효용성이나 움직이는 방식을 확인하며 조금씩 자신 속의 미지의 영역을 체크해 가는 것이다. 그 전형적인 예가 [반딧불]이다. 이 단편을 다시 손질하고 늘어뜨려 [노르웨이의 숲]이란 장편소설이 태어난 것이다. 이전의 작품집 [중국행 슬로 보트]에 비하면, 이 작품집에서는 이렇듯 앞날의 작업에 눈길을 둔 실험적인 색채가 짙게 느껴진다.
[반딧불] 이것은 [中央公論]을 위해 쓴 소설이다. 잡지의 성격상, 역시 정통 리얼리즘으로 써보고자 했다. 영어로 하면 '컨벤셔널한 폼'. 아무튼 나는 약간 센티멘탈하고 심플한 청춘 소설적인 얘기를 쓰고 싶었다. 기법상으로는 새로운 것이 없지만 감각은 새로운 그런 얘기 말이다. 다 썼을 때는 꽤 멋지게 썼다고 생각했는데, 시간이 좀 지나자 더 잘 쓸 수 있었는데 싶은 생각이 강해졌다. 당시 나는 리얼리즘적 문장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 분명하게 파악하고 있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군데군데 문장이 튄다. 그런 탓으로 이 작품에 대해서는 줄곧 옷이 몸에 딱 맞지 않아, 아주 조금 색상이 달라, 아주 조금 길이가 안 맞아 하고 은근히 애타하는 그런 기분에 시달렸다. 언젠가 솜씨가 늘면 반드시 결착을 지으리라고 생각했고, 결국은 4년 후에 [노르웨이의 숲]이란 형태로 개작되었다. 그러나 [반딧불]을 쓸 때는 설마 이 얘기가 점점 부풀어 장편이 되리라는 기대는 좁쌀만큼도 없었다. [노르웨이의 숲]을 쓰며 마음껏 손질하였으므로 이번에는 개고하지 않았다.
[헛간을 태우다] 이것은 '헛간을 태우다'라는 말에서 떠오른 소설이다. 물론 포크너의 단편 제목인데, 당시 나는 열렬한 포크너 팬도 아니었고 [헛간을 태우다]라는 단편을 읽은 적도 없었고 이 말이 그의 단편 제목이라는 것조차 몰랐다. 어디에선가 그런 말을 들은 듯하여 프랑스 영화의 제목인가 하고 생각했다. 만약 포크너의 제목이라는 것을 알았다면 아마 이런 소설은 쓰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그럴 만큼 뻔뻔스런 인간은 아니니까. 나중에 그 단편을 읽고 같은 헛간이라도 미국 것과 일본 것은 상당히 이미지가 다르다고 느꼈다. 미국의 헛간은 당당하고 규모가 크지만, 내가 헛간이라는 말에서 떠올리는 이미지는 밭 한구석에 서 있는 너저분하고 조그마한 허술한 판잣집이다. 포크너가 '헛간을 태우다'라는 말로 표현한, 불길이 하늘까지 치솟도록 한 장엄한 배경은, 여기에서는 남돌래 은밀히 헛간을 태워버리는 어두운 분위기에 그쳐 있다. 마음 한구석에서 조용히 불타다 허물어져 내리는 헛간이다. 나는 때때로 이렇게 섬뜩한 소설이 쓰고 싶어진다.
[장님 버드나무와 잠자는 여자] 애당초는 '장님 버드나무'라는 식물이 등장하는 환상적 터치의 단편을 썼는데 마음에 들지 않아 폐기시켰다. 하지만 그 내용과는 별도로 '장님 버드나무'라는 말의 감촉이 여전히 머리에 남아 있어, 그것을 제목으로 한 작품을 쓰게 되었다. 친구와 함께, 여자친구를 병문안하러 가는 장면은 [노르웨이의 숲]에서 회상 장면으로 사용한 기억이 있다.
[춤추는 난쟁이] 어쩌다가 또 이렇게 하드 페어리테일 같은 얘기를 쓰게 되었는지 잘 생각이 안 난다. 기억에 "꿈에 난쟁이가 나타나 내게 춤추지 않을래요? 라고 말했다"라는 첫 행을 쓰는 것으로 작품이 시작된 듯하다. 요컨대 피아니스트가 첫 네 소절을 딩동댕동 치는데 그것이 하나의 곡으로 발전해 가는 것 같은 식이다. 제대로 써질까 의심하면서 써나가는 사이에 코끼리 공장이 나오고, 거기에 코끼리 공장의 존재양식이 마음에 든다. 하지만 무슨 이유로 이 작품세계 속의 사람들은 인조 코끼리를 만드는 것일까? 자신이 써놓고도 수수께끼다. 공장이란 불가사의한 장소다. 그곳은 조용하고 실질적인, 그래서 오히려 상상력이 촉발되는 축제적 장소이다. 나의 공장 취미는 더욱 고조되어, 훗날 [해뜨는 나라의 공장]이라는 탐방기까지 내게 되었다. 유감스럽게도 코끼리 공장은 없었지만.
[세 개의 독일 환상] 이것은 1984년에 [블루터스]를 위하여 썼다. 그 전해에 [블루터스]의 편집진들과 두 주일 동안, 그리고 나 혼자 남아 두 주일 정도 독일 여기저기를 다니며 취재를 했다. 내게 할당된 일은 독일에 관한 에세이와 단편을 쓰는 것이었는데, 에세이는 무산되고 단편이 바로 이것이다. 외국을 소재로 한 그럴듯한 분위기의 소설은 쓰기가 싫어서 독일로부터 연상되는 환상을 핵으로 소품을 썼다. 박물관 얘기 같은 것은 어디가 독일과 관계가 있느냐고 물을 만하다. 그러나 독일에 관한 기억을 더듬다보니 불현듯 그런 얘기가 떠오른 것이다. 독일이라는 나라에는 무언가 농후하고 사람의 마음을 혼란케 하는 것이 잇다. 독일행은 처음이었던지라 일본에 돌아온 후에도 한동안 이런 판타지가 머릿속을 점령하고있었다. 지금 다시 읽어보니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의 '세계의 끝'부분과 통하는 분위기가 엿보이기도 한다.
첫 전작 장편소설
[양을 둘러싼 모험]을 쓴 후 거의 3년간 장편에는 손을 대지 않았다. 장편소설을 쓰기란 내게는 무척 힘든 작업이다. 장편을 쓰고 나면 당분간은 이런 일은 하고 싶지 않다는 기분에 빠진다. 그리고 그때는 이쯤에서 한 차례 휴식을 취하자 싶은 마음도 있었다. 대학을 나와 결혼한 이래--졸업하기 전에 이미 결혼했지만--한눈 한번 팔지 않고 노동으로 점철된 20대를 살아왔다. 이 세계에 살아남기 위해 최대한 일해야만했다. 당시에는 한푼이라도 더 빚을 갚아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리고 글을 쓰기 시작하고는 하루라도 빨리 문필가로서의 경력을 확립해야지 하는 생각으로 머리가 꽉 차 있었다. 그런데 숨을 돌리며 주위를 돌아보니 자신은 30대 중반에 가까웠고 그럭저럭 이 세계에 살아남아 있었다. 슬슬 기어변속을 할 시기였다. 장기 외국여행을 하고 스포츠가 일과가 된 것도 이 무렵이다.
그렇다고 그냥 논 것은 아니다. 장편을 쓰지 않았을 뿐 일은 많이 했다. 이 시기에 단편집 몇 권과 에세이, 번역 일을 했다. 단편과 번역을 어떻게든 정복해보겠다는 목표였다. 특히 레이먼드 카버, 존 어빙. 이 두 경애하는 작가의 작품을 번역하며 많은 자극을 받았다. 소설에는 이런 가능성도 있구나 하고 감탄했다. 개인적으로 이 두 사람을 직접 만나 얘기할 수 있었던 것도 큰 수확이었다. 세계는 넓고 수준도 높다. 소설적인 모험의 여지는 아직도 많고, 얌전하게 웅크리고 있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자신의 방향성을 확실히 포착하여 새로운 일에 착수하기에는 아무래도 3년이란 세월이 필요했다. 주간지 월간지의 이세이 일도 대담도 했다. 그러나 잡지 연재라는 용기에는 도저히 익숙해지지가 않았다. 책상 앞에 한 달치 예정표를 붙여놓고 마감일과 원고매수를 써넣어 하루하루 처리해 가는 셈인데, 아침에 일어나 그걸 볼 때마다 우울해졌다. 나는 대체로 마감일을 잘 지키는 인간이다. 마감일 이틀 전까지 원고가 완성되어 있지 않으면 견디지 못한다. 나는 사생활에 있어서는 적당주의자지만 일에 관해서는 꼼꼼한 편이다. 마감일이 되어서야 천천히 쓰기 시작하는 재주는 도저히 못 부리겠다. 이런 성격은 편집자에게는 편하지만 당사자는 힘들다. 하루 종일 '이걸 하고 그 다음은 저걸 해야지'하고 생각해야 하고, 그러다 보면 소설에 집중할 수가 없다. 하지만 이 시기에 이런저런 일을 한 경험 덕분에 어떤 종류의 일이 내 성격에 맞는지, 어떤 페이스로 해야 하는지 차차 알게 되었다 그러나 에세이에 대해서만은 아직도 자신이 없다. 지금 이 글을 쓰면서도 이런 글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은 무력감에 사로잡혀 있다. 나는 슬로 씽커(slow thinker)라서 생각하고 판단을 내리는 데 시간이 많이 걸린다. 그렇게 내린 판단도 왕왕 오판이기가 일쑤이다. 그런 인간이 에세이를 써본들 세상에 별 도움이 될 것 같지 않다.
아무튼 그런 잡다한 일등을 정리하고 1984년 8월, 새 장편에 돌입했다. 신초사에서 순문학 전작 시리즈를 위해 장편을 쓰지 않겠느냐는 제의가 있었고, 나도 슬슬 본격적인 일을 하고 싶었다. '나와 쥐' 시리즈를 [양을 둘러싼 모험]으로 일단락 짓고 전혀 다른 소재를 사용하여 전혀 다른 타입의 소설을 쓰자고 생각했다. 쓰기 시작한 시점에서는 소설의 구성에 관한 막연한 이미지밖에 없었다. 그 얼마 전 [文學界]를 위해 쓴 [마을과 그 불확실한 벽]이란 중편소설을 고쳐 쓴다는 전제는 정해져 있었지만 어떤 방향으로 바꿨을 것인가에 대해서는 전혀 방침이 안서 있었다. 나는 [마을과 그 불확실한 벽]을 [1973년의 핀 볼] 다음에 썼는데.
이 테마로 글을 쓰기에는 역시 시기상조였다. 그만한 것을 쓰기엔 아직 자신의 능력이 부족하다는 것을 다 쓴 후에 알았다. 나는 자신이 한 일에 후회를 안 하는 편인데 이 작품을 활자화한 것은 후회한다. 그러나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활자화하였기에 오히려 어떻게든 다시 고쳐 써서 조금이라도 제대로 된 물건으로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강해졌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아무리 잘 고쳐 쓴다 해도 자신이 추구한 소설이 될 수 없으리란 것 또한 잘 알고 있었다. 이건 정말 어려운 얘기이다. 물론 반듯하게 쓰면 그럭저럭 웬만한 소설은 될 것이다. 문예지의 서평란에 호평이 실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광범위하게 독자의 마음을 찌르는 대형작품으로는 완성할 수 없으리라는 기분이 들었다
. 작품을 설득력 있게 하기 위해서는 본능적으로 얘기를 한층 상대화시켜야겠다는 감이 들었다. 꽤난 생각한 끝에 전혀 다른 두 가지 얘기를 병행하여 진행시켜 마지막에 합치면 되겠다고 착안한 것은 소설을 시작하기 직전이었다. 풀 더미 속에 숨어든 토끼를 쫓듯 자신 속의 본능을 쥐어짜다 보면 어디에선가 고통에 못 이겨 아이디어가 통 튀어나온다. 그것을 놓치지 않고 꽉 붙잡는 것이 소설을 쓰는 하나의 요령이라고 생각한다. 그 두 얘기를 어떻게 연결시키면 좋을지 나 자신도 잘 몰랐다. 어찌됐건 써나가면서 생각하는 수밖에 없다. 여기고 일단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란 두 가지 얘기를 동시에 쓰기 시작했다. 물론 이런 식이 되겠지 싶은 막연한 아이디어는 있었지만 그것이 확실한 윤곽을 띠게 된 것은 훨씬 나중 일이다. 바꿔 말하면 나는 그 이야기의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 써나간 것이다. 만일 마지막까지 합쳐지지 않으면 어쩌나 하는 불안도 있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나는 자신의 상상력과 행운을 믿었다. 이런 말투는 오만하게 들릴지 모르겠으나 소설가란 그런 점에서는 근본적으로 오만한 존재이다. 단시간에 내리는 집중호우식으로 글을 쓰는 나지만 이 소설에는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여름에 쓰기 시작하여 탈고를 한 것이 이듬해 1월, 최종적으로 원고가 완성된 것은 3월초였다. 그 사이에 치바에서 후지사와로 관례인 이사를 했다. 어수선하여 짜증이 날 때에는 야쓰가다케에 있는 호텔이나 미우라에 있는 신초사의 별장에 틀어박혀 일을 했다. 두 가지 얘기를 병행하여 진행하는 작업은 힘들기도 했지만 재미있기도 했다. 분위기가 전혀 다른 두 가지 일을 번갈아가며 쓰는 것은 그야말로 오른쪽 뇌와 왼쪽 뇌를 나누어 쓰는 것 같아 기분전환이 되었다. '세계의 끝' 쪽은 마름질하기가 곤란한 이야기라 이것을 궤도에 올려놓기란 그리 간단하지 않다. 그에 비하면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쪽은 발걸음이 가볍다. 그 두 가지 얘기를 사이좋게 껴 맞춰 초반부를 웬만큼 이끌어 가면 그 나름의 가속도가 생겨 그 다음은 자연히--작가나 독자에 있어서--소설이 흘러가지 않을까 하는 예측을 하고 일했다. 그러나 정직하게 말해 내가 지금껏 쓴 여섯 편의 장편 중에서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 쓰기가 가장 힘들었다. 지칠 대로 지쳤다. 자신의 실력보다 한 단계 높여 쓰고 있다는 느낌이 있어서였는지도 모르겠다. 그런 만큼 다시 읽어보니 이것 참 싶은 부분도 많다. 그러나 인생이란 싫건 좋건 이미 일어나 사상(事象)들로 형성돼 있다. 다 썼을 때는 정말 홀가분했다. 마침 나의 서른 여섯 번째 생일날 저녁으로 기뻐서 어쩔 줄을 모를 정도였다. 그런데 아내가 읽어보더니 후반부는 전부 다시 쓰는 게 좋을 것 같다고 했다. 화가 치밀어 한동안 말도 하지 않았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트집잡힌 것은 어찌 되었든 다시 쓰는 것이 나의 기본방침이라서 후반부는 전부 다시 썼다. 특히 마지막 부분은 대여섯 번 고쳐 썼다. 나와 그림자가 어떻게 될 것인가 하는 결말부분은 쓸 때마다 달라졌다. 다른 작품 같으면 끝이 가까워지면 대개 결말이 머릿속에 정해져 있는데, 이 작품에 한해서는 도무지 결단이 안 섰다. 웅덩이 앞까지 나와 그림자가 함께 도망치는 것까지는 알겠는데, 그 다음이 오리무중이었다. 그래서 나는 주인공인 나와 똑같은 평면에서 최후까지 헤매며 괴로워했다. 내가 혼자 '숲'에 남는다는 선택은 고민고민끝에 간신히 얻어진 것이다. 물론 지금은 다른 결말은 있을 수 없다고 확신하고 있지만.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란 제목이 출판사 쪽에서는 마음에 안 들었는지, '세계의 끝'이라고 하면 좋겠다는 요청이 몇 번이나 있었다. 아마 그 편이 순문학적인 것이리라. 그러나 이 작품은 두 가지 이야기가 병행되는 것이 포인트인지라 '세계의 끝'만으로는 제목으로서의 의미를 다할 수 없으므로 사양했다. 이 작품이 영어로 번역되었을 때는 제목을 '하드보일드 원더랜드'만으로 할 수 없겠느냐는 정 반대의 요청이 있었다. 이것도 같은 취지로 사양했다. 새삼 세계는 다양하다고 느꼈다.
나는 이 작품 이후 전작 형식으로 장편을 쓰게 되었다. 한번 잡지에 실었다가 다시 책으로 출판해야 할 필요성을 인정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전작 형식으로 일을 해보고, 우선 마감일이 없어 자신의 페이스로 일에 집중할 수 있다는 점에서 역시 내게 맞는다고 느꼈다.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나는 앞으로도 전작 형식으로 장편을 쓸 것이다.
이 소설은 내 안에서 상당히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잇는 작품이다. 나는 이 소설을 긴장감 속에서 쓰기 시작했고, 전력을 투구하여 썼고, 다 썼을 때는 보람도 있었다. 그 감촉은 지금도 내 몸속에 남아 있다. 그렇다고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란 소설의 완성도와 그것이 반드시 직결하는 것은 아니다. 다시 읽으며 이 작품은 훨씬 더 높은 완성도를 요구하고 있음을 느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작품은 [마을과 그 불확실한 벽]이 늘어뜨리고 있는 '뜻있는 실패작'이란 꼬리의 흔적을 여전히 짊어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작품을 쓰기를 잘했다고 생각한다.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의 미흡함은 [마을과 그 불확실한 벽]의 미흡함과는 전혀 질이 다르다. 또, 다시 고쳐 쓰고 싶다고도 생각지 않는다. 이 작품은 이미 종결된 것이다. 그리고 어떤 경우에, 이 소설의 존속을 건 전쟁터에서는 그 미흡함마저 무기를 들고 싸울 것이기에.
상호 보완하는 이야기군(群)
[캥거루 날씨]와 [회전목마의 데드히트], 이 두 작품은 잡지 연재를 통하여 발표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나는 원칙상 연재 형식으로는 소설을 쓰지 않는다. 건방진 얘기가 될지 모르겠으나 소설이란 역시 자발적으로 쓰고 싶은 것이 있으면 쓰고 없으면 안 쓰는 것이 본연의 자세라고 생각한다. 그런 연유로 나는 이 작품들을 쓸 때 소설이라고는 간주하지 않았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이 작품들은 소설에 가깝지만 정확한 의미의 소설은 아니고, 비록 그 차이가 근소하다 해도 내게는 상당히 본질적인 것이다. 그러나 이 두 권의 책을 쓴 일은 나중에 보다 큰 의미를 갖게 되었다. 나는 장편소설에서 건지지 못한 것을 다루는 것이 단편소설의 하나의 목적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런 문맥에서 보면 단편소설에서 건지지 못한 것을 다루는 것이 이 유사단편인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나로서는 이런 형식의 글을 씀으로 해서 자신 속에 있는 변칙적인 형태로밖에 묘출하기 어려운 것을 그 나름으로 묘출할 수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여기에 수록된 몇몇 작품은 그 이후 나의 창작활동에 많은 도움이 됐다. 나중에 소설의 일부로 끼워 넣은 것도 있고 반대로 "이건 잘해봐야 이 정도야"하고 단념한 것도 있다. 이런 방법적인 유익성과는 별도로 이들 작품 중 몇몇에 대해서는 자신 속의 말단 혹은 변경에 대해 애착을 느끼듯 아끼는 거소 있다. 그러나 앞으로는 이와 비슷한 형태의 글은 아마도 쓰지 않을 것이다. 그런 문장 형식은 그 시기의 내게 유효했고, 이 작품들은 내용 이상으로 형식 그 차제가 과도기적인 것이기에.
[캥거루 날씨] 이 작품집 안에서 나는 여러 가지 실험을 했다. 그 중에는 [창](버트바카라르를 좋아하시나요?)처럼 리얼리즘 기법을 시도한 것도 있고, [꼬깔콘의 성쇠]처럼 우화적인 것도 있다. 원고지 20매라는 양 안에서 실로 수많은 실험이 가능했다. 실험적이라는 의미에서는 [회전목마의 데드히트]보다 한결 실험적이라 생각한다. 요리가 조금씩 담긴 접시가 죽 나온다. 여기저기로 촉수를 뻗어 이건 먹을 만하군 이건 틀렸어 하고 품평을 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여기에 실린 작품은 제법 외국어로 많이 번역되었다. [캥거루 날씨] [4월의 어느 개인 날 아침에 100%의 여자와 만나는 일에 대하여] [스파게티의 해에] [꼬깔콘의 성쇠]등.
아까도 말했지만, [5월의 해안선]은 [양을 둘러싼 모험] 속에 흡수되었고 [그녀의 마을과 그녀의 면양]은 [양을 둘러싼 모험]의 원형이 되었다. 표제작인 [캥거루 날씨]는 캥거루를 취재하던 시기, 즉 [캥거루 통신]과 비슷한 시기에 썼다. [4월의 어느 개인 날 아침에 100%의 여자와 만나는 일에 대하여]는 이 작품집 중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작품인데 야마카와 나오토 감독이 아주 짧고 인상적인 영화로 만들었다. 이 얘기는 내가 야마노테선 만원 전철 안에서 광고 포스터를 보고 쓴 것이다. 그 포스터의 모델인 여자에게 나는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렬하게 이끌렸다. 가슴이 벅차고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다. 지금 생각해도 정말 운명적인 만남이었다. 나는 그렇게 돌연 여자에게 한눈에 반하는 일이 결코 없으므로. 나는 그 포스터를 북 뜯어 가지고 오고 싶었지만 차마 그럴 용기는 없었다.[창]이라는 작품에 대해서는 국어 교과서에 싣고 싶다는 신청이 두 번 있었지만 부끄러워 사양했다. 그건 그렇고 나는 숙명적으로 거울이나 쌍둥이 등 더블에 무척 매력을 느끼는 모양이다.
[1963/ 1982년의 이파네마 양]은 어떤 류의 개념을 천착하여 쓴 작품이다. 여기에 구상성은 전무하다. 이 작품은 리처드 브로티건에 있어서의 [미국의 송어잡이]와 같은 위치를 점하고 있다. 내 작품을 에로 들자면 [가난한 숙모 이야기]와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사우스 베이 스트리트'라는 부제로 명시되어있듯 두비 스라더스의 곡에서 제목을 땄다. 이것은 챈들러의 초기 단편소설에 바치는 헌사이다. 아무런 내용도 없다. 문체의 나열일 뿐. [도서관 기담]은 내게는 영원한 히어로인 양사나이에게 바쳐진 헌사이다. 도넛에 대한 양사나이의 집착은 그칠 줄을 모르고, 소녀의 아름다움은 보는 이의 가슴을 짓찧고 만다. 양사나이는 지금도 어디에선가 도넛을 만들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도서관 구석에는 눈이 아파질 만큼 깊은 어둠이 존재한다. 그런 세게는 내게 있어 현실보다 한결 리얼하다.
[회전목마의 데드 히트] 여기에 수록된 작품은 [IN . POCKET]이란 고단사의 문고 PR지에 연재된 것들이다. 연재 형식은 '듣고 쓰기'였다. 쓰는 것은 나라는 1인칭 화자이지만 얘기는 다른 사람이 한다. 그러니 실은 전부 내가 꾸며낸 전혀 모델이 없는 이야기다. 나는 다만 '듣고 쓰기'라는 형식을 빌려 얘기를 만들었을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작품들은 창작된 '소설'이다. 나는 이 연재를 통해 리얼리즘 문체를 쓰는 훈련을 하고자 했다. 그 당시 나의 과제는 자신이 리얼리즘 문체를 어느 만큼 구사할 수 있는 가였다. 내가 '듣고 쓰기'형식을 취한 것은 [그레이트 개츠비]의 화자 닉 갤러웨이에게 줄곧 관심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닉 갤러웨이에게는 별다른 의미가 없다. 그러나 피츠제럴드는 닉 갤러웨이라는 인물을 통하여 자신을 상대화하고, 제이개츠비란 인물을 멋들어지게 그려내는 데 성공했다. 나 역시 리얼리즘이란 세계로 들어가는 입구로는 이것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자신을 철저하게 듣는 이로 한정하기로 했다.
이런 리얼리즘 훈련의 귀착지는 말할 것도 없이 [노르웨이의 숲]이다. 나는 말하자면 이 [회전목마의 데드히트]란 리얼리즘을 다양한 각도에서 거듭 반복함으로써 [노르웨이의 숲]의 초안을 잡은 것이다. 물론 양자의 내용에는 통하는 것이 없다. 그러나 이런 훈련 없이 [노르웨이의 숲]이란 소설은 태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처음에 . 회전목마의 데드 히트]는 서문 형식으로 썼다. 여기에 씌어 잇는 것은 거의 거짓이지만, 내가 이 작품을 통해 얘기하고 싶었던 것은 순수한 진실이다.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나의 정직한 문학적 선언이다. 내가 여기에서 시도한 것은 리얼리즘이란 것을 일관된 100% 거짓말로 처바르는 것이었다. 긴 세월 손때가 절어 붙도록 사용된 리얼리즘이란 것을 비틀어 내 나름의 방식으로 소생시키고 싶었다. 그리고 거기에서 어떤 류의 절대적인 진실 같은 것을 집어 내보고 싶었다.
나는 이 작품집 중에서는 [레더 호젠]이 제일 잘 쓴 작품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러나 가장 화제에 잘 오는 것은 [풀 사이드]다. 인생의 전화점이란 것은 많은 사람에게 뭔가를 생각하게 하는 모양이다.
1986년 10월초의 맑게 개인 따스한 날이었다. 햇살은 강렬하고 눈이 부시도록 밝은데 일본의 청명한 가을 하늘과는 달리 남유럽의 가을 하늘에는 가을 안개와도 같은 어딘가 모르게 애틋한 필터가 끼어 있었다. 내가 일본을 떠난 것은 한마디로 긴 소설을 쓰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정말 쓸 수 있을까, 사실은 자신이 없었다. 아마도 쓸 수 있겠지 하는 비전만을 품고 걷는 로마거리의 정경은 그래서 더욱 애절하게 느껴졌는지도 모르겠다.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를 쓴 후 2년간은 장편을 쓰고 싶은 기분이 들지 않았다.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를 완성한 것이 1985년초이고 그 후 1년 동안에 단편을 여섯 편 정도 썼고, 그 작품들은 [빵집 재습격]이란 단편집으로 만들어졌다. 그해는 완전히 단편의 해였다 해도 무방할 것이다. 그러고는 일의 중심이 점차 번역으로 옮겨져갔다. 존 어빙의 [곰을 풀어주다], 레이먼드 카버의 [밤이 되면 연어는......], 폴 세로의 [월즈 엔드], C.D.B.브라이언의 [위대한 데스리프]를 번역 출판한 것도 이 시기의 일이다. 또 잡지의 에세이를 정리한 책 [村上朝日常의 역습]과 [The Scrap], 그리고 안자이 미즈마루 씨와 전국의 공장을 돌며 쓴 공장견학기 [해뜨는 나라의 공장]을 냈다. 나는 견학기를 쓰기 위해 두 다리로 많은 곳을 보고 많은 사람들과의 대화를 꽤 즐길 수 있었다. 이런 문학적 농한기에는 몸을 움직이는 일을 하는 것이 즐겁기도 하고 또 나중에 유형무형으로 도움이 된다. 이 사이에 나는 후지사와에서 도쿄로 또다시 오오이소로 빈번하게 집을 옮겼다. 이사를 싫어하는 편은 아니지만 세월이 흐름에 따라 가재도구가 늘어나기도 하고 나이도 40이 가까워지니 어딘가에 지긋하게 자리를 잡고 영구적으로 정착해도 좋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와 동시에 나는 이 무렵부터 만사가 짜증스럽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특별히 기분 나쁜 일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한계를 느낀 것도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일은 순조로웠고 생활에도 딱히 불안은 없었다.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라는 골치 아픈 얘기를 써 작가로서의 자신도 어느 정도 얻었다. 그러나 결국은 자신이 쓴 글에 만족할 수 없었던 것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지금까지의 자신의 모든 것을 깨뜨려 자신 속에서 새로운 세계의 흐름을 만들지 않으면 안 되겠다 싶은
기분이 들었다. 이것은 일종의 본능적인 감이었다.
그리고 나는 작가로서 나름으로 안정된 자신의 위치나 존재에 대해서도 초조함을 느꼈다. 이 나라에서는 작가로서 이름이 나면 굶지는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일본은 정말 풍요로운 나라다. 그러나 이렇게 쉽게 쉽게 지내도 괜찮은 건가 하는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물론 풍요로운 세계 속에서도 작가는 허기에 주릴 수 있다. 허나 얘기는 그리 간단하지가 않다. 내 초조함에는 연령적인 요인도 있었다. 내가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를 쓴 것은 서른여섯살 초엽이고 일본을 떠난 것은 서른일곱살 막바지였는데, 그때 나는 자신이 인생의 가장 중요한 시기에 접하고 있음을 실감하게 되었다. 나는 젊음을 내세워 일을 할 수 있을 만큼 젊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문학적 성숙을 전면에 내세울 만큼의 나이도 아니었다. 그런 애매한 시기에만 할 수 있는 일을 하지 않고 지내면 나중에 후회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하기 위해서는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를 쓴 이상의 집중력이 필요함은 명백했다. 그런 이유로 일본을 떠나게 되었다. 나는 글쓰는 일에 한해서는 상당히 예민하고 어눌한 인간형이라서 아무데서고 집중할 수 있는 타입이 아니다. 그런 점을 감안하여 일본을 떠날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도달한 것이다.
[노르웨이의 숲]은 1986년 말에 그리스의 미코노스 섬에서 쓰기 시작하여 이듬해 봄 로마에서 탈고하였다. 나는 이 작품을 쓰면서 내 작품의 계열 중에서는 상당히 예외적인, '외전적'인 작품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즉 강렬한 생각을 갖고 쓰기 시작하지 않았다는 얘기다. 오랫동안 소설을 안 썼으니 워밍업을 하는 기분으로 가볍게 시도해보자는 정도의 의도밖에 없었다. 여느 때와는 다른 줄거리를 사용하여 여느 때와는 다른 방법으로 써보자는 식으로, 이 소설 속에서 내가 시도하고 싶었던 것은,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를 뒤집는 것이었다.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나 [노르웨이의 숲]의 포맷은 양쪽 다 청춘소설이다. 거기에 그려져 있는 것은 20대를 전후한 청년이 성장하는 과정에서 바라보는 세계의 광경이다. 그러나 이 두 작품의 차이는 결정적이다.
[노르웨이의 숲]을 쓰며 나는 세 가지 시도를 하였다. 우선은 철저한 리얼리즘 문체로 쓸 것. 두번째는 섹스와 죽음에 관해 철저하게 언급할 것. 세번째로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란 소설이 포함하고 있는 처녀작적 수줍음 같은 것을 소거하여 '반 수줍음'을 정면으로 내세울 것. 따라서 처음 [노르웨이의 숲]이란 작품은 내 계획으로는 지금 읽히고 있는 것과는 다른 성격의 소설이 될 예정이었다. 다른 소설들과는 약간 분위기가 다르고, 그다지 좋은 평은 얻지 못한다 할지라도 소수의 뿌리 깊은 팬이 따르는 그런 소설 말이다. 하지만 그렇게 되지 않았다. 책의 표지띠에 '100% 연애소설'이라고 쓴 것은 말하자면 그런 소설을 낸 것에 대한 나의 변명이다. 내가 하고 싶었던 얘기는 "이 소설은 과격하지도 세련되지도 지적이지도 포스트모던적이지도 않고 실험적이지도 않은 그저 리얼리즘 소설입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알고 읽어주세요"란 것이다. 그러나 표지에 그런 말은 쓸 수 없으니까 열심히 지혜를 짜내 '100% 연애소설'이란 말을 갖다 붙인 것이다. 그래서 [노르웨이의 숲]을 연애소설의 관점에서 쓴 평론을 보면 스스로 자초한 일이기는 하지만 당황을 금치 못한다. 왜냐하면 [노르웨이의 숲]은 정확한 의미의 연애소설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지금껏 많은 소설을 읽었는데 그 안에는 어떤 형태로든 연애가 다루어져 있었고 그렇다고 그 모든 작품이 연애소설로 분류되지는 않는다. 이 소설을 구태여 정의하자면 성장소설이라고 하는 편이 가까울 것이다. 내가 결국 [노르웨이의 숲]을 당초의 예정대로 가벼운 소설로 끝내지 못한 원인이 여기에 있다. 어느 정도 써나가는 사이에 "이것을 이대로 도중에서 내동댕이칠 수는 없다"는 생각이 점차 굳어져갔다. 나는 [반딧불]이란 작품을 쉽사리 포기했다. 왜냐하면 그것은 단편소설이기 때문에, "이건 이런 얘기입니다. 그 다음은 상상해보세요"라는 식으로. 하지만 그 단편을 바탕으로 좀더 얘기를 늘려보자고 결정한 순간부터 나는 그 얘기에 대하여 전면적인 책임을 져야만 했다. [노르웨이의 숲]에 나오는 등장인물들이 사랑에 대하여 혹은 모럴에 대하여 책임을 져야만하듯.
이 소설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잇달아 죽어 사라진다. 너무 쉬운 해결 방식이 아니냐는 비판도 많이 받았지만 정직하게 말해 얘기 자체가 내게 그렇게 하도록 요구했던 것이다. 내게는 그 외에 다른 방법이 없었다. 그리고 이 얘기는 기본적으로 사자(死者)들에 대한 얘기다. 그것은 내 주위에서 죽어간 혹은 사라져간 적지 않은 사자(死者)들에 대한 얘기다. 내가 여기에서 정말 그리고 싶었던 것은 연애의 모습이 아니고 오히려 그 사자(死者)의 모습이며 뒤에 남아 존속하지 않으면 안 되는 사람들의 또는 사물의 모습이다. 성장이란 바로 그런 것이다. 그것은 사람들이 고독과 싸우다 상처입고, 많은 것을 잃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가지 않으면 안 되는 그런 것이다. 이 소설이 그렇게 길어진 이유는 써나감에 따라 그런 모습이 똑똑하게 보여왔기 때문이다. 마치 산정을 향하여 올라 가다보니 주변의 구름이 점점 걷혀 시야가 넓어지는 것처럼. 따라서 이 소설에 무슨 흠집이나 결점이 있다 해도 나 나름으로는 책임을 완수했다고 생각한다.
이 소설에 대한 다양한 반응 중에서 내가 가장 의아하게 생각한 것은 줄거리에 관한 갑론을박이 무성했던 데 비해 문체의 양식은 그다지 문제가 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나는 소설의 문체와 줄거리는 비행기와 승객과 같은 관계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노르웨이의 숲]이란 소설에서 나는 승객보다는 비행기의 구축에 대해 훨씬 신경을 많이 썼다. 시종일관 리얼리즘이란 문체는 내게는 이른바 신종 비행기였다. 내가 생각하는 리얼리즘이란 우선 심플하고 스피디할 것. 문장은 줄거리의 흐름을 저지하지 않고 독자에게 필요 이상의 물리적 심리적 요구를 하지 않을 것. 감정은 가능한 한 자립시키지 않고, 별 관계없는 것에 의탁할 것. 그것이 내가 설정한 [노르웨이의 숲]에 있어서의 문장적 접근 방법의 개요이다. 그것은 일종의 도전이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이것을 리얼리즘이라고 파악하지 않은 모양이다. 내가 생각하는 리얼리즘은, 다른 사람이 생각하는 리얼리즘과는 아주 다른 지점에 성립해 있는지도 모른다. 제목은 마지막까지 정해지지 않았다. 4월 볼로냐에서 개최된 도서전시회에 온 고단사 사람에게 최종고를 넘겼는데 그 직전까지 이 소설에는 다른 제목이 붙어 있었다. 물론 [노르웨이의 숲]이란 제목은 선택지로서 남아 있었지만 나로서는 그 제목이 너무도 딱 들어맞는 것 같아 피하고 싶었다. 그리고 비틀즈의 노래 제목을 그대로 차용하는 데도 저항감이 있었다. 하지만 그 제목은 내 머릿속에 진득하게 눌어붙어 다른 제목은 좀처럼 수긍이 안 갔다.
결국 아내에게 어떤 제목이 좋을까 하고 물었더니 "노르웨이의 숲이 좋지 않겠냐"고 하여 정했다. 아내는 그때까지 비틀즈의 [노르웨이의 숲]이란 노래를 한번도 들은 적이 없었다. 그러나 '노르웨이의 숲'이란 제목은 정말이지 상징적이다. 원시를 읽고 느낀 것인데 'Norwegian Wood'란 말에는 그 자체가 아연하게 퍼져나가는 듯한 정취가 있다. 조용하고 멜랑콜리하고 어딘가 모르게 고상한 느낌이 있다. 노르웨이 사람에게 들은 얘기로는 노르웨이어의 '노르웨이의 숲'이란 말에는 그에 가까운 분위기가 있다고 한다.
새로운 태동[빵집 재습격]
[빵집 재습격]에 수록된 6편의 단편은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가 출판된 후 1985년 봄에서 그해 말에 걸쳐 썼다. 나는 비교적 짧은 시기에 단편을 일괄하여 쓴다. 장편을 쓰느라 기진하여, 한동안 쉬는 사이에 집중적으로 쓰는 것이다. 그리고 또 단편을 다 쓰고 나면 아무 것도 하고 싶지 않은 시기가 온다. 그때는 주로 번역 일을 한다. 번역이란 내게는 이를테면 회복기적인 역할을 한다. 그러고는 다시 장편을 쓰고 싶은 욕망에 휩싸인다. 그런 사이클의 회전에 요하는 시간은 때에 따라 다르지만 그 패턴은 대개 일정하다. 그래서 내 단편에는 후산적인 요소와 태동적인 요소가 동시에 포함되어 있다. 후산적이라 함은 장편에서 할 수 없었던 것을 쓰는 것이고 태동적이라 함은 다음 장편으로 연결되는 소재나 수법을 조금씩 실험해본다는 뜻이다. 이렇게 얘기하면 상당히 의식적이고 계산적으로 단편을 쓰는 것처럼 들릴지 모르겠으나 실제로 쓸 당시에는 그 작품이 지니는 의미 따위는 거의 생각하지 않는다. 내가 생각하는 것은 이 얘기가 내 몸에 스미는가 아닌가 하는 것뿐이다. 만약 그것이 내 몸에 스미면 의미있는 얘기이고 그렇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
단편소설은 대개 잡지사의 의뢰를 받고 쓰는 것이니 만큼 마감날이 있다. 나는 장편에 한해서는 절대로 마감날을 설정하지 않지만, 단편은 오히려 마감날을 즐기며 쓰는 경우조차 있다. 그런 때에는 한정된 시간 안에 집중하여 쓰고 뭐를 써야 할지 전혀 모를 경우에도 책상 앞에 앉아 잠자코 정신을 집중하면 그럭저럭 얘기가 튀어나온다. 때로는 오히려 그렇게 "이런 얘기를 써야지"하고 정해지지 않은 경우에 솔직하고 온화한 글이 써지는 수도 있다. 자신을 궁지에 몰아넣음으로써 무의식적인 부위가 더 잘 노출되는 일도 있기 때문이다. 나는 이따금 이런 방식을 게임처럼 즐기는 자신을 발견할 때가 있다. 하긴 이런 글쓰기 방식은 장기적으로 보면 건전하지 못하다. 왜냐하면 그런 시스템에 몸이 길들어져 자신의 무식이 표출되는 특별한 루트가 모르는 사이에 양식화되어 의식이 상실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소설은 의미도 아무 것도 없는 자전거 타기에 불과하게 된다. 단편이란 마주치는 순간이 승부수이며, 거기에서는 작가의 정신의 자유로움이 큰 관건이기 때문이다.
내 단편소설에는 스승이 셋 있다. 스코트 피츠제럴드, 트루먼 캐포티, 레이먼드 카버이다. 나는 이 세 사람이 쓴 단편을 실로 꼼꼼하게 읽기도 했고 번역도 꽤 열심히 했다. 따라서 그들이 단편을 쓰는 방식을 대충 파악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내가 쓴 단편과 이 세 사람의 단편 사이에 어떤 공통점이 있는가하면 그 점은 의문이다. 아니 전혀 비슷한 점이 없다고 해도 좋을 정도가 아닌가 싶다. 이 점에 대해서는 내 자신도 의아하게 생각하고 있지만 필시는 내가 이 사람들을 너무 존경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요컨대 섣불리 흉내내기에는 그 사람들이 너무 잘 쓰고 위대하다는 것이다. 그들의 작품을 흉내내본들 그 이상의 작품이 나올 리 만무하고 오히려 쓰는 편이 비참해질 뿐이다. 그래서 내가 그들에게 배운 것은 단편소설을 쓰는 그들의 자세와 정신이었다. 내가 피츠제럴드에게서 배우려 한 것은 독자의 심금을 울리는 정감이며 캐포티에게서 배우려한 것은 아연해질 만큼 치밀한 문장과 기품이며 카버에게서 배우려 한 것은 금욕적이기까지 한 진지함과 독특한 유머이다. 단편소설이란 형식은 만약 아주 훌륭하게 완성되면 독자에게 그만한 것을 제대로 전달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그 요소 중 어느 것이고 내가 그들의 영역에 도달하기는 아직도 길이 멀고 어쩌면 답파하기 어려운 길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목표의 윤곽을 희미하게나마 파악할 수 있다면 작가인 나에게는 상당히 고마운 일이다.
흥미롭게도 [빵집 재습격]에 실린 작품들은 외국인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았다. [태엽 감는 새와 화요일의 여자들]은 알크레드 번 바움의 역으로 [뉴요커]에 게재되었고, [빵집 재습격]은 제이 루빈이 번역했다. 나는 지금 미국 동해안의 작은 대학촌에서 살고 있는데, 이 대학의 일본문학과에서는 [코끼리의 소멸]을 텍스트로 삼고 있고, 하버드에서는 [빵집 재습격]을 텍스트로 하고 있었다. 학생들과 그 글들에 대해 토론할 때 그들은 한결같이 "일본문학의 아이덴티티에 대해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는가"라고 물었다. 예를 들어 [빵집 재습격]은 부부가 맥도날드를 점거하는 얘기이고, [태엽 감는 새와 화요일의 여자들]의 주인공은 로시니를 들으며 스파케티를 삶는다. [코끼리의 소멸]은 장소가 일본이 아니더라도 성립할 수 있는 얘기다. 이들 단편에는 배경이 반드시 일본이어야만 하는 필연성은 하나도 없다. 일본인 소설가로서의 당신의 위치는 대체 어떤 것인가 (이것이 질문의 취지이다. 그에 대한 나의 대답은, 그들에 대한 질문이었다. 그렇다면 자네들은 나의 소설을 일본소설이 아니라고 생각하는가, 만약 내가 미국 이름으로 발표했다면 자네들은 나의 소설을 일본소설이 아니라고 생각하는가, 만약 내가 미국 이름으로 발표했다면 자네들은 그것을 미국소설이라고 인식할 수 있는가) 그들의 대답은 '노우'였다. 아니 그들은 역시 이것은 일본소설이라고 생각한다, 라고 대답했다. 왜냐하면 여러 가지 면에서 그것은 미국소설일 수 없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코끼리의 소멸]에는 코끼리가 마을에 왔을 때 행해지고 있던 의식, 제전 같은 것에 대한 기술이 있다. 일본의 독자라면 이런 일들에 대해 불가사의하게 생각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미국 독자들은 이해하지 못한다.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빵집 재습격]에서의 점거는 역시 뉴욕의 점거와는 다르다고, 도쿄의 점거라고 그들은 말한다. 뉴욕의 점거에는 아무런 우의(寓義)도 없는 것이다.
내가 그들의 의견을 흥미롭게 생각한 것은, 그것이 바로 내가 원하는 일 중의 하나였기 때문이다. 나는 무라카미 하루키라는, 일본에서 태어나 자라고 또 일본어로 소설을 쓰는 작가다. 따라서 당연히 자신이란 존재의 아이덴티티도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아이덴티티에 대해서 생각하는 내 자신은 필연적으로 나라는 주체 안에 포함되어 있다. 그러므로 나 자신의 아이덴티티를 내가 바깥쪽에서 객관적으로 검증하기는 원칙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내가 할 수 있는 그에 가장 가까운 행위는, 자신의 무의식성의 샘플을 추출하여 그것을 검증하는 일이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내가 소설을 쓰는 하나의 의미이다. 그와 똑같은 문맥에서 일본인으로서의 내 자신의 아이덴티티는 내가 일본인으로서의 아이덴티티를 의식하지 않을 때 비로서 의식되지 않을까? 그것이 나의 테제이며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이후 줄곧 일관하여 추구한 것이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