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無比스님 유마경 강의 15
三品. 弟子品
(②불고대목건련하사대~ 멸제상고 )
정말 ‘참선하는’ 하고 붙어 앉아가지고, 하는 그게 공부가 아니다 하는 것입니다. 그것만이 최고 공부라고 그렇게 생각하면 그건 큰 병이예요. 물론 ‘그것도’ 공부는 공부야. 그런데 ‘그것만’ 공부다 라고 생각해선 절대 안된다 하는 거예요. 그것도 공부는 공부죠. 그러나 그것만 공부라고 하고, 그것만 고집해서는 이건 도저히 불교를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 저 처음에 참선에 대해서 나왔어요. 우리 불자들 참선 좋아하죠.
정말 뭐 아주 고급스런 공부, 최고 공부라고 생각을 하고 있는데 잘 마음에 새겨야 될 대목이예요.
육조스님 제자 중에 남악회양선사라고 최고가는 제자죠. 남악회양. 남악회양의 제자가 누군고 하니 마조도일이라고 그 법을 이렇게 이었는데 그야말로 태백산맥처럼 그 산맥이 차악 이렇게 이어나가요, 법맥이. 그런데 마조도일이라고 하는 이 젊은이가 남악회양스님은 큰 절에 있고, 이 마조도일은 암자에 이렇게 가 있었는 모양이라.
그거 보니까 공부 꽤나 한 사람 같은데 도대체 한번씩 물으러 오지 않고, 그거 공부하느라고는 하는데 도대체 그 집에 없거든. 그래 가서 가만 보니까 아주 열심히 그냥 눈을 부릅뜨고 몇 년 째 열심히 좌선하고 있다구요.
‘저놈이 좌선하는 병에 걸렸구나’
남악회양스님이 보니까 그런거야. 그래서 ‘거기서 뭐하나?’ 그러니까
‘아이 좌선해서, 성불할려고 좌선하지 뭐하긴 뭐해요?’
그러거든.
‘그래?’ 그러고 남양회양스님이 이제, 저쪽 모퉁이로 돌아가서 깨진 기왓장, 절에 많잖아요. 기왓장을 가지고 좌선하는 바로 코앞에 와서 쓱-쓱 문질렀다고. 처음에는 자기 스승되는 분이 와서 그래싸니까 그냥 대충 봤는데, 좌선하는데 계속 시끄럽게 쓱쓱 문질러싸니까, 영 뭐 신경질 나서 안되겠거든, 그래 벌떡 일어나 가지고
‘아휴 스님 기왓장을 그거 남 앞에서 뭐할라고 자꾸 시끄럽게 갈고 있냐’고.
‘ 아 이사람아 갈아서 거울해야지.’
거울할라고 지금 간다고.
그래서 ‘기왓장 갈아서 거울한다는 소리는 내가 세상에 처음 들어본다’고 말이지 ‘그거 갈아서 백년을 간다고 그거 거울 되겠습니까?’
참 그런 계기가 한 번씩 있어야 돼 사람은.
그런데서 사람이 정신 바짝 차린거야.
‘그럼 스님 어떻게 해야 옳습니까, 어떻게 해야 좋습니까?’
그 때에서야 무릎 팍 꿇고 이제 정식으로 법을 묻는거야.
그러니까 남악회양스님이 아주 멋진 법문이죠.
소가 수레를 끌고 가다가 섰다 이거야. 그럴 때 ‘니 같은면 그 소를 때리겠니, 수레를 때리겠니?’ 그렇게 물었어요.
그래서 그 한마디에 착 그냥 하늘에 천둥이 내리치면서 그냥 그사람 마조 도일스님 어떤 정신세계가 확 그냥 바뀌어 버린 거예요.
어느 것이 수레고, 어느 것이 정말 수레를 끌고 가는 놈이 수레 바퀴인지, 뒤에 실어놓은 짐인지, 아니면 소인지 그걸 분별 못해가지고 되느냐 이거예요.
소를 때려가 수레가 가지, 뒤에 수레 짐, 아무리 때려봐야 그 수레가 가나? 참 기가막힌 법문이죠. 아주 그 천고에, 우리가 흔히 들어서 아시겠습니다마는 천고에 빛나는 법문이죠.
바로 여기 해당되는 거예요. 이 대목에.
이 몸뚱이 말이지 조복받는다, 몸 조복받는다 이러거든요, 선방에 가면. ‘몸 조복받는다’고, 오래앉아 배기는 사람이 공부잘하는 걸로 돼있고, 나는 몇 시간 앉았다. 그것 또 자랑이라고 그러는데 뭐 안하는 것보다는 낫겠죠. 그렇지만 그건 공부하고 십만팔천리죠.
좌선에 대한 유마거사의 기존 어떤 그 자꾸 앉아서 시간 채우는데 떨어져 있는 사람, 거기에 빠져 있고, 그런 병에 떨어져 있는 사람, 그것도 이제 정상적인 공부의 입장으로 보면은 참 문제가 많다 하는 그런 입장인데 아주 유마거사가 제대로 여기서 분석을 해냈습니다.
보십시오. 이 저 유마거사 병 하나 난 것 가지고 말이죠, 병 한 번 앓는 것 가지고 이렇게 멋진 설법을 이렇게 남겼지 않습니까?
우리는 병 수십 번, 수백 번 앓고도 이런 거 하나 깨닫지 못하고 그냥 앉아서 뭉개버리니 아주.
그 한 때 그 양심선언 교수로 지금은 학생이 되어있지만은 그 사람 글을 내가 읽어보니까 신학대학을 다니다가 몸에 병이 나가지고 집에서 병을 앓고 있었어요. 침상에 이렇게 누워서 몸은 아프고 그래가지고, 가만히 누워서, 어느 봄날이었다고 그래요.
그런데 이웃집 아이가, 꼬마가, 아주 어린 아이가, 아장아장 겨우 걷는 아이가 마당에 걸어다니더란 거예요. 병상에 가만히 누웠다가 그 아이를 보고는 그 순간 그냥 뭔가 탁 깨달음이 와가지고, 그 순간 벌떡 일어나가지고, 그때부터 이제 몸도 쾌차하고 그 다음에 학문도 새로 시작하게 되어가지고, 그다음에 동양철학으로 해가지고, 그 다음부터 신학 때려치우고 동양철학해가지고 미국가서 박사학위를 받아와가지고 굉장한 명성을 휘날리던 사람이 있었잖아요. 지금도 뭐 대단한 사람이지만, 그 사람도 자기 그 계기를 적어놓은 대목을 보니까 그렇더라구요.
그사람도 그사람의 병을 계기로 해가지고 그렇더라구요.
깨달았어. 자기 나름대로 깨달은 거야. 나는 몇 번을 읽어봤는데 그 대목을, 분명히 이사람은 거기서 깨달았어. 자기 어떤 경계를. 그 깨달음도 큰 깨달음은 800번이고, 작은 깨달음은 수도 없다, 무수하다 그렇게 되어 있어요. 그러니 깨달음이 한 두 번이 아니예요. 그러니까 매일매일 깨달아야 되요.
하루에도 몇 번씩 깨달아야 되고, 큰 깨달음은 800번이나 된다 그러니까, 일생을 통해서. 작은 깨달음은 무수하다 그랬어요. 그러니까 깨달음이란 말을 너무 쉽게 그래 써서 되느냐 하지만 그게 아니예요. 다 깨달음입니다.
깨달음도 정도 차이가 있고, 하기 때문에 깨달음이란 말 자주 써도 좋아요.
그다음에 두번째 목건련입니다. 사리불 목건련.
정말 부처님 제자로서 기라성 같은 사람들이죠.
이분은 신통이 제일인 분으로 그렇게 돼있죠. 사리불은 지혜제일인 분으로 우리가 흔히 그렇게 알려져 있습니다마는 여기서는 설법을 하는 과정에서 유마거사를 만나게 됩니다.
3-②
佛告大目健連하사대 汝行詣維摩詰問疾하라 /目連이 白佛言하되 世尊이시여 我不堪任詣彼問疾이니다 / 所以者何오 / 憶念하니 我昔에 入毘耶離大城하야 / 於里巷中에 爲諸居士說法이러니 / 時에 維摩詰이 來謂我言하되 / 唯大目連이여 爲白衣居士說法인댄 不當如仁者所說이니라 / 夫說法者는 當如法說이니 法無衆生이라/ 離衆生垢故며/ 法無有我라 離我垢故며/ 法無壽命이라 離生死故며/ 法無有人이라/ 前後際斷故며/ 法常寂然이라/ 滅諸相故며
부처님은 목건련에게 이르셨다. "네가 유마힐에게 가서 병을 위문하여라."
"세존이시여, 저는 그 사람에게 가서 병을 위문할 수 없나이다. 그 까닭은 제가 옛적에 비야리성에 들어가서 어떤 마을에서 거사들을 위하여 법문을 말하고 있노라니 그때에 유마힐이 와서 말하기를, '여보시오.유마힐님, 흰 옷 입은 거사들에게 설법하는 것은 당신의 말씀과 같이 말할 것이 아니외다. 설법이란 것은 마땅히 법답게 말하여야 합니다. 법에는 중생이란 것이 없나니 중생이란 때(垢)를 여읜 때문이며 법에는 나라는 것이 없나니 나라는 때를 여읜 때문이며 법에는 목숨이라는 것이 없나니 생사를 여읜 때문이며 법에는 사람이란 것이 없나니 과거와 미래가 끊어진 때문이며 법은 항상 고요한 것이니 모든 형상을 없애버린 때문이며
佛告大目健連하사대 汝行詣維摩詰問疾하라
(불고대목건련하사대 여행예유마힐문질하라)
부처님은 목건련에게 이르셨다. "네가 유마힐에게 가서 병을 위문하여라."
불고대목건련(佛告大目健連)하사대 여행예유마힐문질(汝行詣維摩詰問疾) 하라 네가 유마힐에게 가서 문병하라.
目連이 白佛言하되 世尊이시여 我不堪任詣彼問疾이니다
(목련이 자불언하되 세존이시여 아불감임예피문질이니다)
"세존이시여, 저는 그 사람에게 가서 병을 위문할 수 없나이다.
목련(目連)이 백불언(白佛言)하되, 목련이 부처님께 말씀드리기를 세존이시여 나도 불가임예피문질(不堪任詣彼問疾)이니다. 나도 저 사람에게 나가서 문병할 그런 능력이 없습니다. 문병하는 것을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이 말이예요. 자신이 없다 이거예요.
所以者何오
(소이자하오)
그 까닭은
소이자하(所以者何)오, 왜냐
憶念하니 我昔에 入毘耶離大城하야
(억념하니 아석에 입비야리대성하야)
제가 옛적에 비야리성에 들어가서
억념(憶念)하니, 기억하건대 나도 옛날에 입비야리대성(入毘耶離大城)하야, 비야리대성, 바로 이 유마경이 설해진 그 도시죠. 비야리 대성에 들어가서
於里巷中에 爲諸居士說法이러니
(어이항중에 위제거사설법이러니)
어떤 마을에서 거사들을 위하여 법문을 말하고 있노라니
어이항중(於里巷中)에 마을에서, 이항(里巷)이라고 하는 것은 그냥 골목에서, 위제거사설법(爲諸居士說法)이러니, 여러 거사들을 모아놓고 거사들을 위해서 설법을 했어. 여기 거사라는 말이 이제 나왔으니까. 여기도 유마거사가 주인공입니다마는 우리 불자들은 남자분들을 거사라고 해야 불교적입니다.
처사라고 하면은 일반적이예요. 그렇게 알아야 되요.
유교에서는 처사라는 말을 쓰고, 불교에서는 거사라 해, 유교에서는 거사라는 말은 안써요. 그런데 불교에서는 거사라는 말도 쓰고 처사라는 말도 써.
그게 무슨 거사라면 격이 높고, 처사라면 격이 낮고 그건 없습니다. 똑 같애요. 격은 똑같은데, 처사는 유교에서 흔히 많이 쓰고, 도교에서도 쓰고, 불교에서도 쓰고 공히 쓰는 말이고, 거사는 불교에서만 쓴다, 그렇게 이해하면 좋습니다. 그러니까 좀더 불교적으로 우리가 남자 신도들을 부를 때는 거사라고 부르는 게 옳아요. 거사라고 부르는게 훨씬 불교적인 의미가 더 많이 담겨 있습니다.
그리고 또 우리나라 묘한 관념이 거사라고 하면 조금 높임말로 그렇게 생각을 해요. 절대 높임말은 아닙니다. 처사보다 높임말은 아닌데 그렇게 생각하고 있으니까, 또 우리가 그렇게 또 생각되어지는 거죠. 뭐 그런 것도 있고, 그러니까 집에 가서도 거사님, 거사님 그러세요.
거사님, 그래 유마거사와 같은 분을 거사님이라고 하는 그런 존칭이니까 이거는 ‘대왕이시여’하는 말보다도 훨씬 더, 더 아주 존칭이다 이렇게 설명해 드리고 그리고 거사님하면 아주 좋아하죠.
거사를 위해서 설법을 했는데
時에 維摩詰이 來謂我言하되
(시에 유마힐이 래위아언하되)
그때에 유마힐이 와서 말하기를,
시(時)에 유마힐이 래위아언(來謂我言)하되, 와 가지고서 나에게 일러 말하대
唯大目連이여
(유대목건련이여)
유대목련(唯大目連)이여, 여보시오 대목련이여.
爲白衣居士說法인댄
(위백의거사설법인댄)
흰 옷 입은 거사들에게 설법하는 것은
위백의거사설법(爲白衣居士說法)인댄, 백의거사를 위해서 설법 할진댄 우리가 흔히 세속거사를, 세속인 신도들을 백의라고 그러거든요.
관세음보살도 백의관음, 관세음보살 출가한 사람이 아니예요. 그냥 일반인 모습 그대로입니다. 그래 백의관음이예요.
그리고 신도님들을, 일반 신도를 백의라고 그렇게 하고 흰 옷 입었다, 또 출가한 사람은 염의를 입었다. 물들인 옷을 입었다. 그래서 백의, 염의, 옷을 가지고 분별을 할 때는 그렇게 분별을 합니다. 백의다, 염의다, 물들일 염(染)자, 그래서 여기 백의거사, 이건 이제 세속에 있는 거사분들을 위해 설법할진댄
不當如仁者所說이니라
(부당여인자소설이니라)
당신의 말씀과 같이 말할 것이 아니외다
부당여인자소설(不當如仁者所說)이니라. 마땅히 인자(仁者) 그대와 같이 설할 것이 아니니라. 당신 지금 설법 하는 걸 가만히 들어보니 틀렸다 이거야. 그렇게 설법하는게 아니야.
夫說法者는 當如法說이니
(부설법자는 당여설법이니)
설법이란 것은 마땅히 법답게 말하여야 합니다
부설법자(夫說法者)는, 대저 설법이라는 것은 당여법설(當如法說)이니 마땅히 법대로, 진리에 맞게 설해야 된다 이거예요, 진리에 맞게, 여법(如法)이라는 말 참 좋은 거예요.
갈을 여(如)자 법 법(法)자. 그대로 진리 그대로. 법답게 설해야 된다.
그럼 사과를 설명하려면 사과에 맞게 설명을 해야 된다 이거예요. 사과에 맞게 설명하려면, 가장 사과에 맞게 설명하려면 어떻게 해? 어떻게 하는 게 사과에 맞게 설명한다?
사과를 한 개 주면 돼. 상의 할 것도 없어.(웃음)
말이 뭐 필요합니까? 말은 전부 엉터리야. 아무리 설명한다 한들 그 설명은요, 겉을 맴돕니다. 겉을, 겉을 맴돌지 정곡을 찌를 수가 없거든요.
여기 이제 여법이란 말은 바로 법, 법이 생긴 그대로 진리가 생긴 모습 그대로, 예를 들어서 사과를 설명하더라도 사과가 가지고 있는 내용 그대로 설해야 된다 이거예요. 그러면은 사람은 사과를 설명 못해요.
사과만이 사과를 설명할 수가 있어요, 제대로. 아시겠어요?
사람이 사과를 설명하는 것은, 내가 지금 무엇을 먹었는지 평소에 사과에 대한 감정이 어떤지, 사과 밑에서 이별한 사람인지, 사과 밑에서 만난 사람인지, 사과 밑에서 싸운 사람인지, 이것 따라서 사과에 대한 이미지가 전부 달리 박혀 있거든요. 여러분들 머리속에.
옛날에 사과 장사를 했던 사람인지, 사과 농사를 짓던 사람인지, 사과 따러 갔다가 뱀에게 물렸던 사람인지, 그런 어떤 계기 따라서 전부 사과에 대한 이미지도 다릅니다. 그럼 어떻게 우리 사람이 사과를 설명합니까? 사과를 가장 설명 잘 할 수 있는 사람은 사과 자신이야. 사과자신이라고요. 그게 여법이라구요.
법 그대로. 사과하면 사과 그대로. 사과와 같이.
그럼 개인의 감정이 개입되면 그건 온전한게 안나옵니다.
우리가 마지 못해서 사람의 어떤 그 설명을 빌려서 우리가 하긴 하죠. 하긴 하지만은 사실은 그건 뭐 부득이 해서 하는 거죠.
여법이라는 말이 참 좋은 말인데 그러나 또 지극히 어렵고도 쉬운 말입니다. 쉽고도 또 어려운 말이구요.
여기는 첫째 사상(四相)을 떠나는 데 대한 진리라고 하는 것, 이 법이라는 말은요. 인도 쪽에서는 흔히 법이라고 잘하고, 중국식 표현은 도라고 합니다. 도(道), 이쪽 표현은 도라는 말이 훨씬 더 가깝죠. 또 다른 말로 하면 화엄세상이라고 할까요, 화엄만다라의 세계라고 할까. 우리의 삶의 그 모습 그대로, 하나도 허물이 없고, 하나도 오류가 없고, 그대로 완전무결한 봄에는 꽃피고, 가을에는 잎지고 하는, 그대로 완전무결한 것으로 되어 있는 이 세상, 이 세상에서의 우리의 삶, 그것을 여기서 법이라고 할까, 도라고 할까, 화엄만다라의 세계라고 할까, 화엄세계라고 할까, 이렇게 우리가 머리속에 대충 설정을 하고,
法無衆生이라
(법무중생이라)
법에는 중생이란 것이 없나니
법무중생(法無衆生)이라. 그랬어요. 법에는 중생이라는 게 없다. 중생상이 없다 이거야. 중생이라는 건 이건 상대적인 소리야, 사람들이 괜히 나눠놓은 거야. 부처다 중생이다 이렇게 나눠 놔. 법에 무슨 중생이 있습니까?
꽃잎이나, 꽃송이나, 꽃잎이나 그 가치는 동등해, 똑같애. 이 꽃 잎, 잎이 없으면 꽃이 존재할 수가 없다고요.
어느 것이 낫다, 어느 것이 뭐 못하다, 어느 것이 가치가 더 있다, 덜 있다 이건 없습니다.
그래 우리의 판단으로 아 이것은 좋다, 이건 나쁘다, 지는 꽃은 말이지 나쁘고 피는 꽃은 좋다, 그거는 우리 판단이지, 지는 꽃한테 물어보십시오.
지는 꽃같이 어떤 그 참 어떤 정서가 그렇게 있는게 세상에 있느냐 이거야, 피는 꽃 저게 꽃이냐 이럴지 몰라. 그래요. 다 그 입장에서 보면은 다 완전무결해.
(개개가 범성이고 일인이 범부야)두두문물이 그대로 완전무결하게 갖추고 있다고요. 이게 법이고, 이게 도거든요. 이게 화엄만다라의 세계라. 그럼 거기에 중생이라는게 있을 수가 없어요. 중생이니 부처니 하는 것은 이미 우리가 나눠놓고 하는 소리라. 우리의 어떤 망상이 거기 개입되어서 하는 소리라고요. 그렇게 알고, 그다음에
離衆生垢故며
(이중생구고며)
중생이란 때(垢)를 여읜 때문이며
이중생구고(離衆生垢故)라, 중생이라고 하는 때, 중생이라고 하는 상, 상이 때가 되고, 중생이라고 하는 고집, ‘열등의식이다’ 이렇게 나는 흔히 표현하는데 중생의 때는 뭔지 알아요? ‘아휴 나는 이 못난 중생이, 중생이 그러면 그렇지’ 이게 열등의식이야. 그것을 떠나있다 이거야, 왜 열등의식을 가져? 개개가 다 완전무결한데.
자 이것, 잎이라고 해서 열등의식 가지면 되겠어요? 이 잎이 어떤 태양의 빛을 받아들이지 못하면 꽃이 안 펴. 꽃이 존재하지 않는다고요, 그러면 꽃의 모체는 이 잎이라고 할 수가 있어. 그러면 뿌리가 가만 있겠어요? 또? 나눠놓고 보면 매사가 다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열등의식 가질 게 아무것도 없어요. 중생이라고 해서. 그 다음에
法無有我라
(법무유아라)
법에는 나라는 것이 없나니
법무유아(法無有我)라, 법에는 아, 나라고 하는 그런 그 어떤 아상, 여긴 아상이라고 봐야죠. 우리가 여기, 사상이라고 내가 이야기 했으니까. 아상이라는 게 없다 이거예요. 아는 이거는 이제 또 자아의식이예요. 자아의식.
‘나만’ 이라고 하는, 나 중심의 그런 생각, 자만의식이거든요, 이게. 그게 있을 수가 없어요. 왜냐, 모든 게 동등하니까. 꽃이 저 혼자만 잘났다고 하면 되나요? 안되지.
쌀이 겨보고 말이지. ‘니 겨는 쌀을 싸기 위해서 이렇게 싸주기 위해서 있는 거니까 너는 말이지 열등하다, 내가 우등하다’ 그런 건 있을 수가 없어요. 우리가 보기에 그렇지.
그러면 겨가 있다가 ‘내가 안싸주면 니가 있을 수가 있나?’ 이거예요. 그러고 보니까 ‘너는 내한테 쌓여있고, 내 보호를 받으니까. 내가 우등하고 네가 열등하지.’ 당연히 그렇잖아요. 그 겨의 입장에서 보면 그렇거든요. 그렇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라고 하는 그런 자만의식, 이게 안맞는거죠.
모두가 다 우리가 종합적으로, 다 동참을 해가지고 내가 있게 되고, 이 세상이 있게 되고, 이 세상이 돌아가게 되고, 그런 거예요. 그런데 어찌 나혼자라고 하는 그런 자만의식에 도취해 있을 수 있느냐. 진리에, 법에 도에는 그런 게 없다. 법무유아(法無有我) 아가 없다 이거죠.
離我垢故며
(이아구고며)
나라는 때를 여읜 때문이며
또 아(我)라는 때도 없다, 아(我)라는 때를 떠난 연고다 그러죠
法無壽命이라 離生死故며
(법무수명이라 이생사고며)
법에는 목숨이라는 것이 없나니 생사를 여읜 때문이며
법무수명(法無壽命)이라 , 이생사고(離生死故)며, 또 법에는 수명이 없다. 수자상 그러죠. 한계의식입니다. 나이를 몇 살 먹었다 그런 거예요.
우리가 나이, 금강경에, 금강경의 사상하고 연속이 되고, 말하자면 믹서가 돼 있고 그렇습니다. 왜냐하면 깨달음의 이치는 같기 때문이예요. 이 수명이라고 하는 것은 수자상, 금강경에서 말하는 수자상인데 한계의식이라.
‘아휴 내가 이 나이에’ 또 아휴 ‘나는 젊으니까’ ‘나는 늙으니까’ 전부 그 나름의 나이에 대한 그런 의식이 있거든요. 그런데 이것이 우리 불교에는 나이를 인정 안하거든요.
절대 나이를 인정하는 종교가 아닙니다. 나이는 임시, 임시방편에 불과한 것이지. 본래 우리의 주인공은 또 우리들의 참 생명은 그런 나이로 한정할 것이 없다. 그게 이제 법무수명(法無壽命)이야. 법에는 수명이 없다. 그러니까 생사를 떠났지요, 나이를 먹지 않았으니까, 본래 나이를 먹지 않았으니까. 태어난 것이 있으면은 나이를 먹죠. 그런데 이 본래 우리 참 주인공은 나이를 먹는 것도 아니니까 태어남이 없고, 태어나지 않았으니까 나이가 없고, 그래서 생과 사를 떠난 연고며 그랬어요. 또
法無有人이라
(법무유인이라)
법에는 사람이란 것이 없나니
법무유인(法無有人)이라, 인이 없다, 법에는 인이 없다 그랬어요. 인이라고 하는 것은 차별의식이라, 남이라고 하는 생각이거든요.
아까 아는 자아, 자만의식, 나라고 하는 생각, 인은 반대로 남, 차별, 그러니까 남이라고 하는 말은 벌써 나와 차별을 두는 그런 의식이거든요. 법에, 도에는 그런 것이 없다. 아에 대한 생각을 하면 인도 쉽게 이해가 될 겁니다. 인이 없다.
前後除斷故며
(전후제단고며)
과거와 미래가 끊어진 때문이며
전후제단고(前後除斷故)며 그랬습니다. 전후제 제(除)자가 이게 잘 못됐어요. 제할 제(除)자가 되어있는데 제(際?) 이 자의 오자입니다. 전제 후제라고 해가지고 지난 세상이다, 전제는 지난 세상이다, 후제는 다음 세상이다. 그런 관념입니다. 그런 것이 끊어졌다 이거예요.
왜냐 차별의식이 없으니까. 또 법에는 본래 차별할 것이 없기 때문에 지난 일이다 다음일이다. 전생일이다 후생 일이다. 그런 것을 굳이 나눌 것이 아니다 하는 것입니다. 그런 것이 끊어진 연고며 또
法常寂然이라 滅諸相故며
(법상적연이라 멸제상고며)
법은 항상 고요한 것이니
법상적연(法常寂然)이라, 멸제상고(滅諸相故)며, 법은 항상 적연이다, 고요하다 이거야. 도는 항상 고요해.
진리는 말이 없어. 진리는 부동이야 또 말을 떠났고 동하지 아니하고. 그게 적연이지.
法離於相이라
(법이어상이라)
모든 형상을 없애버린 때문이며
법이어상(法離於相)이라, 모든 모양도 다 멸했다 소멸했다.
모든 상, 상은 이제 차별된 거거든요. 이렇게 생겼고, 저렇게 생겼고, 그 생긴 것이 상을 따지고 보면 벌써 생긴게 다르잖아요. 다르면은 그 다른 데에 우리가 끄달리게 돼 있다고요.
첫댓글 소가 수레를 끌고가다 섰다..그럴 때 '니 같으면 그 소를 때리겠니, 수레를 때리겠니?'....참구 합니다...꽃물들다님 더위에 수고 많으셨습니다..고맙습니다.._()()()_
前後際斷故며, 法常寂然이라 滅諸相故며....과거와 미래가 끊어진 때문이며 법은 항상 고요한 것이니 모든 형상을 없애버린 때문이며...._()_
法常寂然이라 滅諸相故며 法離於相이라... 법은 항상 고요한 것이니 모든 형상을 없애버린 때문이며...꽃물들다님, 고맙습니다. _()()()_
사과를 설명하려면 그냥 '사과'를 하나 주면 된다... 감사히 받들겠습니다 _()()()_
하루 하루 일상에서의 작은 깨달음들...삶을 풍요롭고 깨어있게 만들겠지요...꽃물들다님, 감사합니다._()()()_
_()()()_
화엄 만다라의 세계..._()()()_
法常寂然이라 滅諸相故며 (법상적연) (멸제상고) : 법은 항상 고요한 것이니 法離於相이라 (법이어상) 모든 형상을 없애버린 때문이며 ........ 감사드립니다 ! _()()()_
꽃물들다님 감사드립니다.._()()()_
三品. 弟子品 ※목건련(目健連)과 유마거사의 대담 <설법> 夫說法者는 當如法說이니 (부설법자는 당여설법이니) 설법이란 것은 마땅히 법답게 말하여야 합니다 1. 法無衆生이라 (법무중생이라) 법에는 중생이란 것이 없나니 離衆生垢故며 (이중생구고며) 중생이란 때(垢)를 여읜 때문이며 2.法無有我라 (법무유아라) 법에는 나라는 것이 없나니 離我垢故며 (이아구고며) 나라는 때를 여읜 때문이며
3.法無壽命이라 離生死故며 (법무수명이라 이생사고며) 법에는 목숨이라는 것이 없나니 생사를 여읜 때문이며 4.法無有人이라 (법무유인이라) 법에는 사람이란 것이 없나니 前後除斷故며 (전후제단고며) 과거와 미래가 끊어진 때문이며 5. 法常寂然이라 滅諸相故며 (법상적연이라 멸제상고며) 법은 항상 고요한 것이니 法離於相이라 (법이어상이라) 모든 형상을 없애버린 때문이며
큰스님 감사드립니다._()()()_
물들다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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法無衆生, 法無有我, 法無壽命, 法無有人,,,<法常寂然 滅諸相故>
감사합니다^^
法無衆生. 감사합니다 _()_
소를 때릴 것인가 수레를 때릴 것인가?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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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감사합니다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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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유마힐소설경 나무유마힐소설경 나무유마힐소설경 ()()()